|
숙제 창세기 37장 부터
제 37 장- 요셉이 꿈을 꿈
4 요셉, 그리스도의 상징―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 그는 의로웠기 때문에 반대와 멸시를 당하셨다. 그의 언행일치된 생활, 자기 부정의 생활은 경건하다고 공언하지만 그 생활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계속적인 책망이 되었다. 요셉의 고결하고 청렴 결백한 인격은 불같은 공격을 받았다. 요셉을 탈선케 하려했던 여자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그가 타락케 할 수 없었던 요셉의 인격에 대하여 강렬한 증오심을 갖고 요셉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였다. 무죄한 사람이 그의 의로움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결한 인격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또 요셉은 자기 형제들의 손에 의하여 적은 돈에 팔리었다. 예수도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가장 악한 원수의 손에 팔리었다. 예수는 겸손하고 거룩하셨다. 그분의 생활은 보기 드물게 착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거룩한 생활이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거짓 증인들을 불러 그에 대해 거짓 증거케 하였다. 그는 죄와 잘못을 신실히 책망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채색 옷을 벗겼듯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도 그의 옷을 벗기고 통으로 짠 그 옷을 얻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다(3영적 174).
17-20 형제들 앞에서 겁을 먹은 요셉―요셉의 형들은 그를 거칠게 대했다. 요셉은 아버지가 부탁한 말을 전했지만 형들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형들의 표정들을 보았을 때 그는 겁이 났다. 즐거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풀이 죽었다. 형들은 요셉이 전에 권면하던 말로 그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더 높이기 위하여 꿈 이야기를 하였다고 욕하였다(3영적 140).
28,36 애굽에 축복을 가져온 요셉―요셉은 애굽 땅으로 팔려 간 것이 자기 생애에서 가장 큰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요셉은 하나님을 애굽 땅에 모시고 내려갔다. 슬픔 중에 취한 그의 명랑한 태도가 이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에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 이 청년은 애굽 땅에 축복을 가져왔다. 이 사실이 너무나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에 보디발은 그가 받은 모든 축복을 그의 종 요셉의 공로로 여겼고 그를 종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 사람들에게 그 명예를 돌려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영광도 그들 위에 다시 반향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이다(청년 지도자 1897. 3. 11).
제 39 장- 요셉을 유혹함
9 인생의 초년에 받은 선한 감화가 마음을 강하게 함―요셉이 초년에 받은 감화는 그의 마음에 하늘 군대를 주둔시킴과 같아서 무서운 시험이 닥쳤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라고 부르짖게 하였다. …
하나님을 경외하고 조심성 있는 어머니가 유년기에 뿌린 씨앗들은 의의 나무들이 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가 훈계와 모본으로 가르친 교훈들은 요셉의 경우와 같이 조만간 풍성한 수확을 낼 것이다(좋은 건강 1880. 1).
장래의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선택에 달림―관능적 욕망의 유혹보다 젊은이들에게 더 위험하고 더 치명적인 것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 욕망이 의지에 굴복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현세와 내세를 위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키는 욕망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의 장래의 모든 행복이 한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요셉은 잠잠히 눈을 하늘로 향해 도움을 청하고 거룩하지 못한 욕망 대신 단호한 결심으로 밝아진 시선을 들어 부르짖기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하리이까” 라고 하였다. 승리는 그의 것이었으며 그는 유혹자의 손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았다(편지 3, 1879).
9-19 크신 섭리가 원수의 궤계를 뒤엎으실 것임―모든 사람이 그러한 원수의 덫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든든하고 믿을만한 방어책이 필요하다. 이 타락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조금 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첫번째 공격으로 그들의 방어벽은 무너져 내리고 무서운 시험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은혜의 방패는 우리가 아무리 타락한 세력에 포위되어 있다 할찌라도 원수의 시험에 정복당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능히 방어해 준다. 순결하고 고상한 품성은 확고한 원칙과 요동치 않는 믿음에 의해서 빛을 발할 수가 있다. 비록 죄악에 둘리어 있다 할지라도 고결함과 완전성에 흠집을 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요셉같이 모략과 중상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크신 섭리는 선을 위하여 대적의 모든 궤계를 뒤엎으실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악한 자의 원한 때문에 잠시동안 낮아진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그를 높이실 것이다(3영적 145,146).
20 악이 번성하여 보이는 것이 큰 시험거리가 됨(애 3:27; 마 23:12)―요셉은 그의 신실하고 흠 없는 인격 때문에 좋은 평판도 자유도 다 잃었다. 악이 승하고 선이 티끌 가운데 짓밟히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은 덕이 높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가장 혹독한 시험이다. 유혹자는 고상한 인격의 표본으로서 번영 가운데 살고 있는 반면에 요셉은 신의를 저버린 가장 배반적인 죄를 지은 사람으로 벌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신앙은 그의 성품을 부드럽게, 인간에 대한 그의 동정심을 강하고 따뜻하게 해 주었다. 정당한 취급을 받지 못하면 언어와 행동이 심술궂고, 편협하고, 괴팍하게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용기가 꺾이어 증오심을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러나 요셉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감옥 생활에 들어가자 마자 곧 요셉은 밝은 그리스도인 생활 원칙을 능동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는 같은 죄수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사였기 때문에 명랑·쾌활하였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책임이 크고, 명예로운 지위, 유능한 사람이 앉아야 될 지위에 오르도록 그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배웠고, 주께서 그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젊을 때에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다. 그는 겸비히 행하였고 주께서는 특별한 영예로써 그를 높이셨다(편지 3 1879).
역경이 요셉을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준비시킴―암울한 감옥 속에서 요셉이 해낸 그 역이 마침내 그에게 성공과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를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유혹과 역경과 고난의 경험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3영적 146).
제 40 장-9-23 요셉이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줌
각자가 자기 꿈을 말하였을 때 요셉은 그 의미를 알려 주었다. 3일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전직을 회복하여 전과 같이 바로의 손에 잔을 올릴 것이나 떡 굽는 관원장은 왕명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두 사건들이 다 미리 말한 대로 일어났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꿈을 기분좋게 해석해준 일과 여러가지 일을 친절히 돌봐 준 이 두가지에 대하여 요셉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 대신 요셉은 가장 감명적인 태도로 자기가 부당하게 감금된 것을 말하고 자기의 사건이 왕의 앞에 제출되도록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하고 말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은 꿈이 일일이 성취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왕의 은총을 다시 회복하였을 때에 그는 이미 그의 은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요셉은 2년간 죄수로 더 머물러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 불타오르던 희망은 서서히 꺼져갔고 모든 다른 시련에 배은망덕의 쓰라린 고통이 더하여졌다(부조 219).
제 41 장-38-40 충실하게 사는 비결
요셉은 그의 신앙을 모든 곳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그의 요동함이 없는 충실한 삶의 비결이었다(원고 59, 1897).
38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맺고 살면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봄―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갖는다. 그것이 바로 존귀로 통하는 길이다. 그는 하늘의 분위기를 지니고 다닌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세상이 돈으로 살 수 없는 보화이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비록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의 도덕적 가치는 이방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알아주었던 요셉과 다니엘의 그것처럼 귀중한 것이다(원고 54, 1894).
제 42 장
18 이같이 하여―삼일 만에 요셉은 그의 엄격한 태도를 좀 누그러뜨렸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애굽의 통치자들에게서 흔히 있을 법한 그들의 섬기는 신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아홉 명의 그들 전부를 감옥에 넣는 대신에 그는 단지 한 명만 잡아두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어 굶주린 가족들에게 양식을 가져다주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들이 베냐민과 함께 돌아온다면 지금 가둬두고자 하는 한 명이 그 때 풀려나게 될 것이고 만약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요셉을 속인 것이면 그들은 굶주림으로 죽게 될 것이며 애굽에 남아있는 한 사람은 첩자로 처형될 것이었다.
21 요셉의 형제들은 노예가 될까봐 두려워 함―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벌을 주지 않으실까 하고 두려워 하였다(3영적 156).
우리가…범죄하였도다―이 애굽의 영주가 단지 혐의 때문에 그들을 벌하거나 죽이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함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의 양심이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요셉을 얼마나 다르게 대했던가!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내버려두어 굶어 죽게 하려 했는데 가나안에서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애굽의 재상이 동정을 보이다니! 이같은 생각들이 그들의 머리를 스치자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자신의 불행이 형제의 고뇌를 생각나게 하였다. 르우벤은 그 소년에게 죄를 행치 말라고 형제들을 경고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아 그 소년 요셉에게 냉정하게 행한 그대로 정당한 보응을 그들이 받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요셉의 면전에서 그가 모든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들을 고발하였다.
제 43 장
30 마음이 타는 듯―이것은 그의 감정이 복받친 두번째이다. 먼저는 그의 형제들이 요셉 자신에게 잔인하게 행한 것을 이야기할 때 그랬었고(42:21), 이번에는 22년 동안이나 그가 보지 못한 형들의 얼굴이 또 그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강렬한 사랑 때문에(14절) “따뜻해지다”란 뜻이다. 그는 먼저 형제들의 베냐민에 대한 태도를 시험하려 했기 때문에 아직 그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없었고, 혹 의도한 대로 잘 되지 않을까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식사 때 그들이 서로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그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세면을 한 후, 형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인들에게 저녁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32 요셉에게 따로 하고―그를 위하여, 그의 형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와 같이 식사한 애굽인들을 위하여 각각 다른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그의 높은 지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아시아인이라서 애굽의 수행원들이 그와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따로 먹었다. 같은 이유로 애굽인들도 요셉의 형들과 같이 먹지 않았다. 고대의 애굽인들은 외국인들과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특이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최고 수준의 인간들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람”(people)이라 부른 반면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네들과 동물계 사이의 어떤 생물들, 즉 야만족으로 생각하였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식사법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히브리인들은 동물들을 잡아서 음식으로 먹었고, 애굽인들은 동물들을 매우 신성시하였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애굽인들은 헬라인들의 칼이나 포크, 접시 등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칼로 잡은 정한 짐승의 고기도 먹지 않았다.
제 44 장
16 유다가 가로되―두 번째 임무(43:8)를 띠고 애굽에 온 이 형제들의 책임자였던 유다가 대변자로 나섰다.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거나 자신들이 입은 혐오를 벗으려고 애쓰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그는 그들의 형제 요셉에게 그들이 저지른 범죄, 그 때 이후로 계속해서 그들의 양심을 찔러온 그 범죄 사실을 의심없이 말하였다(42:21,22). 옆에 있던 애굽인들에게 특히 요셉의 청지기에게는, 유다의 말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뜻으로 들렸고 그들이 정말 무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애굽인들은 이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요셉은 그들의 영혼의 번뇌를 느꼈고, 그들이 곧 받게 될 형벌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때 자신들의 형제를 노예로 팔아 버렸던 그 애굽에 이번에는 그들이 노예로 남겠다는 유다의 제안에 요셉은 그의 처벌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이며 또 공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를 저지른 자만 그의 노예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무사히 그들의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33 아이를 대신하여―유다의 자아 희생의 정신은 확실히 칭찬할 만하다. 늙은 아버지가 슬픔과 고통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누려온 형제를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는 그의 태도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다의 무아적 아량은 전에 있었던 누구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것이었다. 여기서 유다는 진실로 회심한 사람, 약속의 후손의 조상이 될 만한 사람,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선민을 지칭하기에 합당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이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특히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기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유다의 모습이 그 후 완전히 바뀌었음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요셉의 병법은 탁월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제 형제들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확신하고 그들의 회개가 참이었음에 대해 만족하였다. 더 이상 그들을 시험할 필요가 없었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도 될 것이었다.
제 45 장-1-15 요셉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대표임―요셉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표한다. 요셉의 형제들을 움직여 그를 노예로 팔게 한 것은 시기심이었다. 저들은 요셉이 저들보다 더 크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요셉이 애굽으로 옮겨졌을 때에 저들은 그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을 모두 제거하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그의 꿈 때문에 번민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행한 일을 가지시고 저희가 방해하고자 계획한 바로 그 일을 실현시키셨다. 그와 같이 유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그분께서 저들에게서 백성의 관심을 끌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저들은 그분께서 왕이 되시는 것을 방해하고자 그분을 죽였으나 이로 인하여 저들은 그분을 왕이 되시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가 됨으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의 가족을 구원한 구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형들의 죄가 감소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그분의 원수들로 인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그분을 인류의 구속자요, 타락한 인류의 구주요, 온 세상의 통치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분을 살해한 자들의 죄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그 사건을 지배하지 않으신 경우와 꼭 같이 극악한 것이었다.
요셉이 그의 친형들에 의하여 이방인에게 팔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가장 큰 원수들에게 팔리셨다. 요셉은 그의 결백 때문에 거짓 고소당하고 투옥되었다. 그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의로우신 극기의 생애가 죄에 대하여 견책이 되었기 때문에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다. 요셉이 불공평과 압박 아래서도 인내하고 온유하게 행하였으며 인도(人道)를 어긴 그의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고 고상한 자비심을 베푼 것은 구주께서 악인들의 악행과 능욕을 불평없이 참으시고 당신을 살해한 자들 뿐 아니라 당신에게 나와 저희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신 것을 예표한다(부조 239,240).
5 형제들의 마음이 쉼을 얻었음―그들은 겸손하게 요셉에게 범한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의 용서를 구했다. 그들은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셉을 그토록 잔인하게 팔아버리고 난 이후로 마음에는 늘 큰 고통과 자책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피를 흘린 죄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고통 당하는 그들의 마음이 쉼을 얻었기 때문이었다(3영적 167).
제 46 장-3 두려워 말라―이 하나님의 권고는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혹 잘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음을 말해준다.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결과가 얼마나 나빴었는지(12:14-20), 그리고 전에 한 번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던 것(26:2)을 기억하였다. 그의 여행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것이 그 부조의 마음 속의 심각한 의문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여행에 대하여 승인을 표하셨고 전에 하신 약속들을 다시 확증해 주셨다. 전에 밧단 아람으로 향해 갈 때와 같이 이번 애굽을 향해 떠날 때에도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시겠다는 보증과 그의 번영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애굽으로 이주해 가지만 약속의 땅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보증의 말씀을 받았다.
26 애굽에 이른 자는―이 숫자는 애굽으로 이주할 당시에 살았던 야곱의 자손들만 포함시킨 숫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부들과 출가한 딸들, 그들의 식구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들이 함께 애굽에 내려오긴 했지만 이미 다른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66 명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야곱의 아들들 11명, 미혼의 딸 1명, 르우벤 아들 4명, 시므온의 아들 6명, 레위의 아들 3명, 유다의 아들 3명, 손자 2명, 잇사갈의 아들 4명, 스블론의 아들 3명, 갓의 아들 7명, 아셀의 아들 4명, 딸 1명, 손자 7명, 단의 아들 1명, 납달리 아들 4명, 베냐민 아들 10명 이다.
제 47 장-9 내 나그네길의 세월―야곱은 자신과 조상들의 생애를 “나그네 길”이라고 표현하였다. 가나안을 아직 소유하지 못한 채, 그들은 유업으로 받은 약속의 땅에서 집도 없이 사방을 옮겨 다니며 정착되지 못한 생활을 해왔다. 이 “나그네 길”은, 인간이 진정한 휴식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으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마음속으로만 그것을 갈망하며 살아야 하는 지상 생애의 곤비함과 모순됨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히 4:8, 9). 그러므로 바울은 야곱의 이 말을 부조들이 세상에 살면서 늘 하늘 가나안에서 누릴 영원한 휴식을 사모하고 갈망했던 사실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히 11:13-16).
일백 삼십년―요셉이 공직에 임명될 때 그의 나이가 30 세였고(41:46) 그로부터 7 년의 풍년과(41:47-49) 2 년의 흉년이 지났다(45:6). 현재 그의 나이는 39 세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의 나이는 130 세이다. 이 계산에 따르면 요셉이 그의 아버지가 91세 되던 해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14 년간 살았을 즈음에 요셉이 출생하였으므로(30:25) 부조가 그곳에 도착한 때의 그의 나이는 77 세였다.
못하나 험악한 세월―야곱의 자신의 생애에 대한 이 평가는 단지 그의 조상들의 생애와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다. 아브라함은 175 세를 살았고, 이삭은 180 세를 살았다. 그들 중 아무도 야곱처럼 불확실한 생애, 고생과 위험, 시련과 고뇌로 가득 찬 생애를 살지는 않았다. 하란으로 도망할 때부터 애굽으로 이주해 올 때까지의 그의 생애는 길고 긴 고난의 연속일 뿐이었다(42:36).
제 48 장-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이것은 축복의 상징으로써 안수가 사용된, 성경상 최초의 기록이다. 축복을 전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을 상징하기에 부적합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안수는 영적인 능력과 은사들을 전달하는 한 방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수아를 봉헌할 때 이 절차가 사용되었고(민 27:18,23; 신 34:9),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재직들을 임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행 6:6; 8:17; 딤전 4:14; 딤후 1:6), 많은 이적들을 행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막 6:5; 8:23,25; 행 9:17; 19:6; 28:8).
15 그가 요셉을…축복하여―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빎으로써 요셉을 축복하였다.
16 사자께서―여기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진 이 “사자(The Angle)”는 피조물일 수가 없으며,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 즉 “하나님의 사자”이다(출 32:34; 사 63:9; 고전 10:4). 신약의 저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보다 밝은 계시 속에서 그 분은 “말씀”이시며, “목자”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야곱과 욥은(욥 19:21) 둘 다 그들을 일시적 영적 질병에서 구해주시고 결국 그들을 음부(grave)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당신의 구원의 사업을 완성하실 이 하나님(Divine One)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야곱과 욥이 바라고 기다렸던,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거하였던 그 구속주는 그리스도 예수였다(고전 10:4; 갈 3:13; 딛 2:14; 벧전 1:18).
내 이름…으로―야곱이 한 이 말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아들들로 여겨지게 해 달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수혜자들이 되었다.
18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둘 중의 형이었던 므낫세도 큰 민족이 될 것을 보증하면서 야곱은, 그러나,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되어 “많은 민족”을 이루게 될, 보다 적절히 표현한다면 “민족들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이 축복은 사사 시대부터 성취되기 시작하여 그 때부터 에브라임 지파는 숫자도 늘어나고 세력도 강해져서 북방의 열 지파 중에서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고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란 이름과 같은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사 7:2; 호 4:17; 13:1; 등). 모세 때에는 므낫세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보다 20,000 명 더 많았다(민 26:34,37). 그 이후의 역사는 이 약속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야곱의 축복은 단순히 임종을 앞 둔 할아버지의 신실한 바램이 아니었고, 확실한 예언적 의의와 힘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었음을 보여 준다.
제 49 장-3,4 물같이 불안정한 성질(창 39:9 참조)
확고한 원칙들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 사람들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렵다. 어떤 방향에서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그들의 도덕적 능력을 강하게 할 감화로 그들을 둘러 싸기 위하여 모든 예방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좋은 감화와 교제를 끊게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내버려 두면 그들은 곧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는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무너져 내리는 모래 위에 서 있을 때 칭송을 받고 높임을 받아 왔다. 마음이 곧지 못하기 때문에 르우벤처럼 물의 끓음같고 결코 탁월치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요, 단호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품성의 힘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도덕적· 신앙적 감화력에 손상을 입힐만한 어떤 제안에 대하여 단호히 거절할만한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 무사안일적 성격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이다(편지 48, 1887).
48-49 야곱이 그 자녀들에게 내린 축복
죽음이 가까운 것을 느낀 야곱은 요셉을 부르러 보냈다. 여전히 가나안의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는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고 말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야곱은 만족하지 않았다. 야곱은 그를 막벨라 굴에 있는 조상들 곁에 장사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강요하였다.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요셉의 아들들도 이스라엘의 자녀들로 정식으로 인정되어야 하였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회견하러 오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왔다. 이 두 청년은 저희 어머니 편으로 애굽사제의 최고위층과 혈연이었고 저희가 애굽인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저희 아버지의 지위는 저들에게 부귀영달의 대로를 열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이 저희 백성과 연결되는 것이 요셉의 소원이었다. 그는 아들들을 위하여 애굽의 궁정이 제공하는 모든 영예를 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위탁된 천대받는 양치기 족속 중에 자리를 잡게 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나타내었다.
야곱은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저들은 야곱의 양자가 되어 각각 한 족속의 족장이 될 것이었다. 이리하여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의 권리 중의 하나가 요셉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두 몫이었다.
야곱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 그는 젊은이들이 그의 앞에 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저희 모습의 윤곽을 알아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하였다. 누구라는 말을 듣고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고 하였다. 저들이 가까이 나아왔을 때에 야곱은 저들을 안아 입맞추고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들어 엄숙히 저희 머리 위에 얹고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이제 자기를 의지하는 정신도 인간의 능력이나 교활한 꾀를 의지하는 마음도 없었다. 하나님만이 그의 보존자이셨고 후원자셨다. 과거의 불행한 세월에 대한 불평도 없었다. 그 시련과 슬픔도 이미 “그를 해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의 행로를 통하여 그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자애만이 기억에 떠올랐다.
축복은 끝났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보증을 주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장차 올 세대들을 위하여 그는 속박과 슬픔의 오랜 세월을 통하여 그의 믿음에 대한 이 증언을 남겼다.
마침내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그의 임종의 병상 주위에 모였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였다. 자주 또 걱정스럽게 그는 저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각 지파들의 역사를 머리 속에 그려 보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그의 자녀들이 마지막 축복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을 때에 영감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의 앞에는 예언적 계시 가운데 그의 후손들의 장래가 전개되었다. 차례 차례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각자의 성격이 묘사되고 각 지파의 장래의 역사가 간단히 예언되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 마는”
이와 같이 아버지는 장자로서 르우벤의 지위가 어떠했어야 할 것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에델에서 범한 그의 무거운 죄는 그로 하여금 장자 상속권의 축복에는 합당하지 못하게 하였다. 야곱은 계속하였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 나라와 메시야의 허락은 유다에게, 기업의 두 몫은 요셉에게 배당되었다. 르우벤 지파는 결코 이스라엘 중에서 뛰어나지 못했다. 르우벤 지파는 유다, 요셉, 단처럼 수효가 많지 못하였고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갔다.
나이에 있어서 르우벤 다음은 시므온과 레위였다. 저들은 연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였고 또한 요셉을 파는 데도 제일 크게 죄를 지은 자들이었다. 저들에 관하여 이같이 선언되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이스라엘을 계수할 때에 시므온은 가장 적은 지파였다. 모세는 그의 마지막 축복에 있어서 시므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이 지파는 유다의 몫의 작은 부분 밖에 가지지 못했으며 그 가족들은 그 후에 다른 강력한 식민지를 만들었으나 성지(聖地) 변경의 바깥 쪽에 있는 영토에 거하였다. 레위도 역시 그 땅 여기 저기 널려있던 40성읍 밖에는 유업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지파의 경우에는 다른 지파들이 배도하였을 때에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성소의 거룩한 봉사의 직분을 맡아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었다.
장자의 명분의 무쌍의 축복이 유다에게 옮겨졌다. “찬양”이라는 의미를 가진 유다라는 이름의 의미심장함이 이 지파의 예언적 역사 가운데 전개되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삼림의 왕 사자는 이 지파의 적절한 상징이요 그 지파에서 다윗과 다윗의 자손 실로 곧 참 “유다 지파의 사자”가 나시고 그에게 모든 권력들이 마침내 절할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충성을 표할 것이다.
야곱은 대부분의 그의 자녀에게 장래의 번영을 예언하였다. 마침내 요셉의 이름에 미치자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에 축복을 빌 때에 아버지의 마음은 기쁨이 넘쳐 흘렀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의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여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건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은 항상 깊고 열렬한 애정의 사람이었다. 아들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강하고도 부드러웠으며 저들에게 한 그의 임종의 증언은 편애나 분개가 섞인 발언이 아니었다. 그는 저들을 모두 용서하여 주었으며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 그의 아버지로서의 부드러움은 격려와 희망의 말로 표현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시고 영감의 감화를 받을 때에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사실대로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축복을 선언하고 야곱은 그의 매장지에 관한 부탁을 되풀이하였다.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이 굴은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와 같이 그의 생애의 최후의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앙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야곱의 만년(晩年)은 괴롭고 싫증나는 낮이 지난 후 저녁의 평온과 안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의 길 위에 구름이 어둡게 모여들었으나 그의 인생의 해질녘은 맑았고 하늘의 광휘는 그의 최후의 시간을 비추었다. 성경은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 37:37)라고 하였다.
야곱은 범죄하고 심한 괴로움을 당하였다. 큰 죄를 범하고 아버지의 장막에서 도망하여 나온 그 날부터 그는 여러 해 동안 수고와 염려와 슬픔을 당하였다. 어머니와 이별하고 다시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집 없는 도망자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 동안 수고했으나 다만 비열한 기만을 당하고 탐심과 욕심 많은 친척을 섬기느라고 20년 동안 수고를 하였다. 재산은 불어나고 슬하에 자녀들이 자라나지만 다투기를 좋아하고 갈리진 가족에게서 기쁨이라곤 거의 찾지 못하였다. 그의 딸의 수치, 그에 대한 오라비들의 복수, 라헬의 죽음, 르우벤의 인도에 어긋나는 범죄, 유다의 죄, 그리고 요셉에게 행한 형제들의 잔인한 기만과 악행으로 당하던 고통, 얼마나 길고 어두운 악의 목록이 눈 앞에 펼쳐졌는가! 그는 여러번 최초의 실패의 결과를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범한 죄가 그의 아들들 중에 반복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징벌은 쓰라린 것이었으나 그 목적은 수행되었다. 징계가 슬퍼보이나 “의의 평강한 열매”(히 12:11) 맺었다.
영감은 선한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귀하게 되었던 사람들의 과오를 충실히 기록한다. 사실 저들의 과오는 저들의 선행보다 더욱 완전히 제시되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문제가 되어 왔으며 불신자에게 성경을 조롱할 기회를 주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을 수식하지도 않고 아무 죄도 그 적의 참 성격을 은폐하지 않은 것이 성경이 진리라는 가장 유력한 증거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편견의 지배를 많이 받고 있으므로 인간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공평무사할 수는 없다. 성경이 영감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의심없이 거기 나오는 존경받은 사람들의 성품을 좀 더 아첨하는 견지에서 기록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저들의 경험에 대한 올바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부조 234-238).
33 야곱이…열조에게 돌아감―우리의 격려와 경고를 위하여 허물많고 어리석었던 저들의 생애가 우리 앞에 열리어 있다. 만일 저희에게 과오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더라면 죄 많은 성질을 가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오와 실패를 보고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당한 바와 같은 낙담을 거쳐 싸운 것과 저들이 우리가 빠졌던 것같이 유혹에 빠졌었으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혹을 이긴 것을 봄으로 우리는 의를 위하여 싸울 용기를 얻는다. 저들이 때로는 격퇴를 당하였으나 저들의 위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편으로 저희 생애의 기록은 우리에 대한 경고가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 있는 사람을 결백하다고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부조 238).
제 50 장-24 나는 죽으나―요셉은 그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자 그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표하였다(46:4,5; 15:16).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때, 자신의 뼈를 그 곳에 묻어 줄 것을 그들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 바램은 실현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시신은 그의 아버지처럼(2,3절) 방부 처리된 후 입관되었다. 아마도 그의 시신은 애굽의 관습에 따라 미리 준비된 묘소에 임시로 안장되어 출애굽 때까지 애굽에 그냥 남아 있었던 듯하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바램대로 그의 유골을 가나안으로 옮겨, 야곱이 사서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세겜의 한 장소에 묻었다(33:19; 48:22; 수 24:32).
임종하는 요셉 편에서의 믿음 있는 행동과 함께 부조 시대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그의 관(coffin),혹은 묘소는 애굽에 체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들의 영원한 거처는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 땅임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권면하는 기념비가 되었다.
26 요셉의 임종―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사망 후 54년을 더 살았다. 그는 살아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그의 백성이 증가되고 번성하는 것을 보았고 그 모든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회복시키시리라는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의 임종이 가까움을 볼 때에 그는 친척들을 그의 주위로 불렀다. 바로의 땅에서 그는 그렇게 영예로운 대우를 받았었으나 애굽은 그에게 그의 유랑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행위는 그가 이스라엘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요셉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저희가 그의 유골을 저들과 같이 가나안 땅으로 올려가리라는 엄숙한 맹세를 받았다. “요셉이 일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노역(勞役)에 종사한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요셉의 임종의 말을 기억나게 하는 그 관은 이스라엘에게 저들은 다만 애굽에 체류하는 자들에 불과함을 증거하였으며 구원의 때가 분명히 올 것이므로 저들에게 허락의 땅에 대한 저희 희망을 굳게 잡도록 하였다(부조 240).
통찰-창37장부터 50장 까지는 야곱의 일생과 요셉을 통하여 범죄후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인 은햬와 자비였다
특히 요셉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살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나그네 생활의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요셉을 축복하고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키웠다 예수님을 대표하는 요셉의 삶은 너무나 순수하고 성실한 삶,거룩한 인물이였다
2-관찰=어떻게 하면 요셉처럼 살아갈수 있을까? 우리의 힘으로론 아무것도 할수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요셉처럼 살도록 인도해 주실것을 믿습니다 아버지인 야곱을 말씀을 늘상 잊지 않았고 마지막 생을 마칠때까지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 마치 주님께서도 매일 새벽에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3-적응-요셉은 온 생애를 통하여 예수님을 대표한 삶을 살았다
요셉처럼 이땅에 살면서 흠없이 고결하게 살아가도록 성도의 길을 가도록 선택하자
우리의 본향은 결코 이땅이 아닌 것을 기억하고 반듯이 하늘 본향에 돌아가야 한다
성령이 동행하셔서 우리를 승리하도록 넉넉하게 도우리라 요셉처럼 하늘에 가서 사는 하늘에 증인이 되자
|
첫댓글 "흠없이 고결하게 살아가도록"저도 노력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