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과 추억 사이
마침내 마음을 먹었다.
건전지가 다 되어 그런가 싶어 교체해주길 여러 번이다. 건전지를 갈아 끼운 뒤 삼사일까지는 잘 돌아갔다. 그러나 서서히 늦어지던 시간은 일주일쯤 되면 한두 시간 늦어지다 이내 엄청난 간격으로 시차가 벌어지고 만다. 그래서 내 옷방에는 시계가 두 개 걸려 있다. 멀쩡한 시계 하나와 자꾸만 늦어지는 시계 하나.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갈 때마다 이 시간을 한 번 보고 저 시간을 한 번 본다. 그럴 때마다 착각한다. 마치 두 번의 시간을 사는 듯한. 두 시이기도 하고 다섯 시이기도 한 시간을 동시에 사는 이상한 느낌. 양자역학에서 말하듯 ‘중첩’된 나를 경험한다. 여기에도 존재하고 저기에도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 비밀공간이라도 생긴 듯 그 느낌이 싫지 않아 계속 그렇게 두었다. 하나는 높은 곳에, 하나는 그보다 낮은 곳에 걸어두고 이 시간도 살고 저 시간도 살았다. 마침내 건전지가 다 되어 시간이 아예 멈추면, 정녕 멈추고 만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몰라도 지금은 차마, 아직은 살아 있는데, 그러면서 계속 두었다.
그런데 마우스가 작동을 안 하는 것이다. 마우스가 작동하지 않으면 상당히, 아주 상당히 불편해진다. 컴퓨터를 매일 쓰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쓰더라도 이미 쓰겠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면 그건 반드시 써야 할 때라서 누른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커서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럽다. 더구나 기계치다. 모든 기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처음의 감정은 당혹감이고 그러다 걱정이 이어지고 걱정은 결국 태산 같이 불어나고 만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마우스가 작동을 안 하다니,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답 없는 마우스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다 다행히 발견한다. 아무리 기계치라도 오랜 세월 곁에 두었던 것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심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늘 깜빡대던 마우스 아래쪽의 빨간 불빛이 묵묵부답이다. 아, 건전지가 다 됐구나. 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 해답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건전지만 교체해주면 될 일이다. 기뻤다. 해답은 너무나 명쾌했고 해결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안도했다. 얼른 방으로 달려가 건전지를 보관해 둔 서랍을 뒤졌다. 이런 맙소사, 건전지가 없다. 다 쓰고 여분의 것이 없다. 어느새 다 썼나. 젠장. 상황이 짜증스러워지고 있다. 이걸 사러 나가야 하나. 나는 당장 컴퓨터가 급한데. 그러다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건전지가 하나 있지, 거기에.
나는 옷방으로 갔다. 세 시 이십오 분과 열 시 십삼 분. 걷잡을 수 없이 시간이 벌어지고 있다. 어차피 그랬던 것, 이제 그런 것쯤이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두 번의 시간을 동시에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끄러미 두 개의 시간을 보다 열 시 십삼 분을 떼어냈다. 그리고 열 시 십삼 분을 뒤집어 야박하게 건전지를 빼냈다. 사망하셨습니다, 어디선가 사망선고가 내려진다. 멈춘 시간을 가만 내려 보다 열 시 십삼 분이 보이지 않게 시계를 뒤집어 방 한구석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건전지를 들고 나오며 마침내 마음을 먹었다. 이제 그만 버려야겠구나, 라고.
들고 나온 건전지를 마우스에 끼워 넣었다. 빨간 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요란하게 깜빡댄다. 마우스 패드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커서가 유연하게 왔다갔다한다. 마우스의 부활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문서프로그램을 클릭하며 창을 열었다.
오래 전에 알고 지낸, 그러나 이제는 소식을 모르는 옛 친구가 준 선물이었다, 열 시 십삼 분은. 선물은 준 이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 여겨 쉬이 버리지 못했다. 마치 그 마음을 저버리는 것만 같아서. 그러나 또 한 친구가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사라지는 거야. 그건 자연스러운 거야. 붙들고 있는 건, 그저 미련일 뿐이야. 절에 다니더니 제법 말이 되는 소리도 할 줄 안다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제 기능을 잃은 열 시 십삼 분을 애써 붙들고 있었던 나는, 추억을 간직했던 것일까, 그저 미련에 붙잡혀 놓지 못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