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철학힐링 - 지금 이원성에 빠져있는지만 돌아보십시오.(49:04)
그게 이완, 집중, 그리고 어떤 또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이런 게 같은 원리죠.
결국 이게 크게 보면 이완이고, 우리가 이완해 가지고 마음을 이완한다는 게요,
불필요한 생각들 감정들을 날려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빨리 내 마음에서 내가 지금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을
빨리 날려 버리고 마음을 초기화 시킬 수 있는가, 순수한 상태로 돌릴 수 있는가?
집중이라는 것도 별 거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는데 잡념이 끼어요.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생각과 감정이 낍니다.
고것만 빨리 리셋시켜 가지고 초기화 할 수 있으면,
다시 그냥 하던 일을 하면 그게 집중이에요.
그래서 제가 몰입 강의을 해도 "모른다" 를 하시라고 하고요,
심지어 양심 회복 운동을 주장하면서도 "모른다" 하시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우리가 양심을, 뭐라고 지금 이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양심이라는 건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에요.
즉, 여러분이 배우실 필요도 없는 거라고요.
여러분이 갖고 계신 마음이고 순수한, 때 묻지 않은 여러분 마음의
본원적 상태이기 때문에 이 상태를 막는 걸 욕심이라고 합니다.
욕심만 내려 놓으실 수 있으면 돼요.
부정적 생각, 부정적 감정, 욕심을 순간 순간 난 내려 놓을 수 있는가?
이것만 본인한테 물어 보시고 "나는 방법이 있다" 하시면요,
아주 훌륭하게, 인간으로서 아주 훌륭한 삶을 사실 수가 있구요.
"요 방법이 나는 없다, 힘들다" 라고 하신다면
세상에서 이렇게 던지는 온갖 돌맹이와 어떤 시련을
온몸으로 맞고 계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걸 금방 금방 털어버리는 비법이 결국은 마음의 문제 아닙니까?
세상이 던지는 돌이 꼭 이 물질적인 돌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엄청난 상처를 주는 돌들, 즉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무형입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이런 물질적인 상처처럼 아무는데 오래 걸리고 이렇게 이 흔적이 남고,
마음도 그렇습니다만, 물질보다 훨씬 쉽게 리셋시킬 수 있어요.
형제가 없으니까, 예 이해 되시죠.
그래서 형체가 없는 마음을 다루는 나만의 비방 있으신지.
이런 걸 가지고 좀 말씀을 좀 드리면 학당에서 말씀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모른다" 하시라고 해요.
왜 그러냐면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면요.
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꼭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 보십시오.
여러분, 제가 이걸 '에고' 라고 말씀 드립니다.
에고 요놈은 '참 나' 그럽니다만은 순수한 나, 요게 양심 자리예요.
에고, 욕심 자리, 욕심과 양심이 이렇게 다릅니다.
욕심은 늘 플러스, 마이너스 이원성에 빠져 있어요.
양심은 순수해요. 욕심은 그게 채워지지 않으면 미칩니다.
예, 그래서 욕망이 하나 일어나고 그걸 여러분이 채워주면
쾌락이라는 상태로 가고 채워주지 못하면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계속 일어났다 사라졌다, 이원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욕심을 한 번 채워준다고 끝나지 않아요.
다시 갈증을 느끼고 또 채워줘야 되고
갈증을 느끼고 또 채워줘야 됩니다.
이 욕심의 세계, 에고의 세계에서 우리는 늘 이원성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원성이라는 걸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요,
이렇다 저렇다, 아닙니까? 맞다 틀리다,
예, 그래서 우리가 결국에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한 생각만 일으켜도, 하나의 감정만 일으켜도, 하나의 오감만 느끼셔도,
우리는 곧장 이원성의 세계에 속한다는 걸 아실 수가 있어요.
어떤 생각 하나도요,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합니다.
그 생각의 내용은요, 이원성을 갖고 있어요.
요게 맞든가, 요게 맞든가, 에요.
그러니까 이럴까 저럴까 따지고 계십니다.
생각을 하나, 뭔가라도 하나 생각을 지금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이원성 속에 발을 담구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 이원성, 이원성의 마음, 저게 지금 우리 욕심의 마음인데
욕심은 이걸 택하면 요걸 놓쳐야 되고, 요걸 택하면 이걸 버려야 되기 때문에
이원성 속에서는 늘 선택의 어떤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뭔가 하려고 하는데 다른 거 하자고 그래요.
그럼 그 생각 자체는 나쁜 게 아닌데, 나는 이 일을 해야 되는데
다른 거 하자고 하면 이게 잡념이 됩니다.
이원성 세계에서는요, 뭔가 하나를 택해야 되기 때문에
꼭 버리는 게 생기고요, 그 버리는 게 여러분을 또 흔들어 놓을 때는
여러분은 잡념에 빠져 버리게 돼요.
어떤 갈증에 빠지게 되고, 쉽게 쉽게 우리 마음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원성을 한 번 내려 놓으실 수 있는가?
요게 여러분이 품으셔야 하는 화두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이원성에 한 편으론 담궈두고 한 편으로는 담궈뒀다가
내 맘대로 바로 바로 건질 수가 있는가?
요 자신 없으시다면 아무리 여러분이 10년, 20년 명상을 하셨고
40년 참선을 하셨어도 아닌 겁니다.
지금 곧장 이원성에서 빠져 나오실 수 있어야 돼요.
'신심명'(信心銘)이라는 불교의 경전에서,
최고의 경전에서 뭐라고 합니까?
첫 머리에 지도는 무난(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무난, 어렵지 않으니
유혐(唯嫌), 오로지 혐, 혐오한다, 싫어해야 된다.
간택(揀擇), 유혐간택(唯嫌揀擇), 이럴까 저럴까 따지는 것만 피하면 된다.
요게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비방입니다.
그래서 이원성만 벗어나면 우리는 그대로 도(道)다.
이원성만 없으면 돼요.
즉, 여러분은요, 이 말은 뭐냐면,
"나 '참 나'를 찾고 싶어." 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찾으실 수 있을까요?
이원성을 곧장 버리는 방법은 뭘까요?
'참 나'를 찾지도 않으셔야 돼요.
"'참 나'를 찾고 싶어." 하면 이게 플러스 마이너스,
벌써 하나를 일으켰기 때문에 '참 나'를 못 찾은 상황이랑
지금 대립하게 되고 이원성 속에 빠집니다.
갖고 싶어 하면 못 가진 상태랑 싸워야 됩니다.
갖고 싶은데 지금 못 갖고 있으니 이 두 가지가 충돌해서
여러분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이것만 내려 놓아 버려라." 그럼 뭡니까?
갖고 싶단 생각도 안 해 버리는 거예요.
그럼 그게 '참 나' 상태에요. 너무 쉽지 않아요?
이게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예, 지금 생각해 보세요.
'참 나' 찾지 마세요. 예, 저 똑바로 보세요.
눈에 딱 힘 주시고 저 똑바로 보시고, '참 나' 찾지 마세요.
지금 문제 있나요? '참 나'를 찾지 마세요.
이완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잡념을 없애려고도 하지 마시고,
잡념을 따라가지도 마세요.
모른다라고 하세요, 그냥.
일체 이원성에 대해서 모른다라고 하세요.
거기 문제가 있나요?
지금 '참 나' 상태인데 아시겠어요?
인정하고 안 하고도 필요 없어요.
'참 나' 상태에요. 이원성만 없으면.
이원성 없는 걸 '참 나'라고 하는 거예요.
'참 나'가 따로 뭐 엄청나게 있는 게 아니예요.
이원성 없는 게 '참 나'지.
순간 순간 여러분 마음에서 이원성을 내려놓으실 수 있나요?
이원성 없이는 못 삽니다, 우리가.
이원성과 우리는 계속 만나게 돼 있어요.
한 생각 일어나면 우리 이원성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배 고파' 그러면 '배 부르다'랑 '배 고프다'가 싸우는 이원성 속에 빠지죠.
내가 지금 배 고프면 배 부른 상태로 빨리 만들어야 되고
배 불렀으면 또 배를 꺼트려서 또 그 또 다음 밥을 먹어야 되고,
이렇게 이원성 속에 살아가지 않습니까?
한 생각이 일어나면 여러분 이원성 속에 빠져요.
나 잘 났어, 그러면 못 나지 않았다는 얘기죠.
이원성이 늘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이 좋다, 그러면 나쁘지 않다니까
날이 좋은 거랑 날이 나쁜 거랑 또 싸우고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무조건 대립됩니다.
생각이 일어났어, 그러면 생각이 사라졌어랑 또 대립하고 있고,
그런데 그런 거에 관심을 순간적으로 안 둬버리시면,
모른다고 해 보세요.
모르십니다. 모른다고 할 때는요,
깨끗이 다 모른다고 하세요.
'참 나'는 남겨두고 뭔 나쁜 건 모른다고 하고
좋은 건 다 냅두고 이러지 마시고, 예, 그런 것은 여러분이 뭔가
한 어떤 일에 하나에 집중하실 때
고 일에 대한 생각 외에는 다른 건 다 모른다 할 때
대상에 대한 몰입할 때 쓰시면 되고 지금 곧장
'참 나'를 만나고 싶으시면 다 모른다고 해 버리세요.
좋은 놈, 나쁜 놈 없어요. 다 모른다.
지금 말짱해지시죠? 머리 맑아지지 않으세요?
거기 고민이 있으세요? 예, 이완하려고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셔야 돼요.
이게 진짜 무소유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거 막 기부하고 버리고 하는 게,
이 선에서 말한 무소유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쥐고 있는 이원성을 내려놓는 게 무소유예요.
이원성을 못 내려놓으시면 여러분이 아무리 내려놓아도
어떻게 될까요?
플러스, 돈이 많음, 마이너스, 돈이 없음,
여러분이 이원성 세계에서 무소유를 택하시면 뭡니까?
마이너스에 집착하고 있는 것뿐이예요.
여전히 이원성 세계 속에 있어요.
'난 돈이 없어, 돈이 있는 사람에 비해서 난 위대해.'
라는 또 다른 에고 놀음에 빠진 겁니다.
돈이 있고 없고랑 아무 관계가 없어요, 도(道)는.
유마거사(維摩居士)는 재벌입니다. 그래도 도인이에요.
[ 유마거사(維摩居士) -
고대 인도의 상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재가 제자였다. 비록 부유하지만 인색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승려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일찍이 널리 복전을 두어
재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불교와 습합된 민간 신앙에서 부(富)의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위키백과) ]
그럼 가난하다고 도인인가요, 반대로? 아니죠.
부자라고 도인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도 있는 사람이 도인이고 도 없는 사람은
'참 나' 모르는 사람은 도인 아닌 거죠!
이원성만 내려놓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소유고,
그게 진정한 출가(出家)입니다.
유마경(維摩經)에 그렇게 나와요.
그냥 내려놓으면 출가예요.
이원성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제일
우리의 안식처고 영원한 부처 자리이지,
여러분이 산에 간다고 더 고귀해지고,
속세에 있다고 더 더럽혀지고 하지 않아요.
그건 플러스 마이너스, 이원성 세계 안의 얘기일 뿐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지금 내려놓으세요.
이 자리에서 그냥 내려놓으세요.
어디 가서 경치 좋은 데 가서 고요한 데 가서 난 명상할래~.
이미 글렀습니다.
그것은 이원성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마인드이기 때문에
'참 나'를 만날 수가 없어요.
나는 명상을 한 4시간 하면 '참 나'를 만나. 그런 게 아니에요.
'참 나'는 지금 늘 여러분 마음 안에 생생한 거지.
생생한데 여러분이 왜 못 보실까요?
이원성 따지느라고요, 이원성만 멈추세요,
따지는 것만, 모른다고 하세요.
이름 모르시죠? 존재하시죠? 쉬세요, 거기에.
아무 문제 없어요, 지금. 그래도 '참 나' 찾아야 되는데... 그 말 하지 마세요.
그 말만 하지 않으시면 지금 깨끗합니다.
느낌 오세요?
요게 여러분이 찾으셔야 할 자리예요.
마음을 순간적으로 지금 그렇게 몰고 가실 수 있으면
여러분은 리셋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선이에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는 겁니다.
단박에 가기 때문에.
여기에 뭐 구구절절이 시간 붙이고 뭐 붙이고 하면 다 이원성이에요.
화두를 해야 되고 뭐 아니면 염불을 해야 되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고,
왜 지금 이원성을 갖다 붙이는 겁니까, 거기에다.
화두 하면 화두 안된 거랑 또 대립하고 있고,
시간이 얼마 걸린다 그러면 길면 짧은 거랑 대립하고 있고
왜 이원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시죠?
지도무난(至道無難)이고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아서 따지지만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아무도 안 믿어요.
웃기죠? 그 말이 지금 천 년 넘게 내려오는데 아무도 그 말을 안 믿어요.
안 따라요~. 그냥 깨끗이 내려놓으시면 되는데.
좀 편하신가요? 걱정이 있으세요? 이원성이 없는데?
수시로 돌리세요.
자, 지금부터 올바른 생활 태도는 뭐냐?
여러분이 도(道)를 닦으려면 어디로 가셔야 되느냐?
인간의 길, 인간으로서 최선의 길을 도(道)라고 하는 겁니다.
도(道)에 대한 이미지부터 바꾸세요.
도를 닦아야 된다, 그러면 또 뭐죠?
도 닦는다 그러면 이게 또 속세를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가족을 등지고, 지금 착각하는 거예요.
가족을 등지면 도가 얻어질까요?
그거 이원성의 세계 아닙니까?
가족이 있건 없건 뭔 상관이에요.
도는 그런 거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도가 이 이원성의 세계의 물건이면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되고 이러겠지만,
이원성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다고 저런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부유하다고 도가 더 늘고 줄고 하질 않아요.
다 똑같아요. 이원성만 버리시면 돼요. 그거 따지지만 않으시면 돼요.
사람들이 자꾸 이원성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원성에서 초월하려고 하면요,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이원성을 만들어 내서
사람들을 자꾸 분열시키고 싸우게 만들어요.
지역 감정이니,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이원성 속에 사는 걸
사람들은 참 즐기고 있죠. 중독되어 있어요.
놔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경상도니, 전라도니, 진보니 보수니, 뭐 남이니 북이니,
놔버리면요,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요,
이 지구상에 분열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적절하게 플러스 할 땐 플러스, 마이너스 할 땐 마이너스,
그러니까 도인들이, 이원성을 초월한 분은 어떻게 사나요?
이원성을 초월한 분이라고 해서 이원성이 없는 세계에 사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본래 이원성이 없다는 걸 알고 살 뿐이지,
결국은 어떻게 사나요?
플러스 할 때 플러스, 마이너스 할 때, 마이너스 하지,
플러스나 마이너스에 집착을 안 해요, 초월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분이 뭐라고 표현을 합니까? 도인들이?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도인들은 어떻게 삽니까?
그때 그때 적절하게 살아갈 뿐이지 집착하지 않는다 라는 얘기입니다.
왜냐, 이원성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 이원성을 초월해 있으셔야 해요.
안 그런 사람들 말은 듣지 마세요.
이원성을 초월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은요,
그 말이 아무리 멋있어도 뭔가에 집착해서 하는 말입니다.
자기 욕심이 묻어 있고, 집단의 어떤 이기주의가 묻어 있고,
집단의 편견이 묻어 있고, 그냥 그렇게 살고 있어요, 우리는.
이원성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은요,
절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뭐 하나 옳다 라고 주장하려면요,
과거의 어떤 편견, 내가 느꼈던 편견, 내가 주어진 환경에서 배웠던 어떤 편견들,
다 묻어서 그게 나와요, 이원성 속에서,
그런데요, 내 이름도 모른다고 탁 놔버리면 그 자리는 깨끗하죠.
그 자리에서 다시 판단해 보세요. 그게 진짜로 옳은 건지.
그게 양심이라는 겁니다.
'참 나'가 양심이라, 순수한 마음으로 보면요,
이건 인간이 남에게 하면 안되는 짓이다, 하면 안 하면 되고,
이거는 내가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싫어할 일이 아니다, 싶으면 하시면 돼요.
양심의 눈으로 보면요, 다 보여요,
양심으로 안 보고 어떤 자신의 편견으로 보니까
우리는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원성을 벗어나는 삶이란 건요,
늘 '참 나' 상태에서 머물면서
마음이 순간 순간 이원성 속에서 살 때는 양심에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안 하는 거예요.
내가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싫어하지 않을 일이라면 하고
내가 상대방이라면 싫어할 일은 하지 마세요.
이게 도인의 마음 아닌가요.
이원성을 초월한 사람이 왜 자기 살자고 남을 해치겠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도인이라는 사람이 남한테 피해 준다면 가짜 도인입니다.
어떻게 도인이, 이원성을 초월한 사람이 플러스 마이너스를 다 초월한 사람이
자기 살자고 왜 남한테 피해를 주겠습니까.
이분은 초월한 척하고 있지만 가짠 거에요.
진짜 초월한 사람은 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남을 내려 놨기 때문에 한 생각을 일으켜서
이원성 세계 속에서 뭔가를 하더라도 모두를 배려해서 하지
절대로 자기만 살기 위해서 하질 않아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도는.
예, 그러니까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새로운 삶,
지구인이면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 먼저 시작해서
지구인들은 앞으로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제가 제안 드리는 것은 플러스 마이너스에서 벗어납시다.
분열에서 좀 벗어납시다. 분열이예요.
지금 많은 회사원들이 쫓기고 있습니다.
밤에 자기계발을 안하면요 도태될까봐 겁나서
자기계발에 내몰리고 있어요.
회사생활도 힘든데 자기계발 때문에 또 스트레스 받으니
죽으란 얘기죠. 이렇게 살면 안돼요. 원래~ 사람이.
다 병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병들도 엄청 걸리고 있는 거구요.
플러스 마이너스를 놔 버리세요.
예, 자기 계발해야 된다는 게요
진짜 순수한 양심의 계발이 아니면요, 다 스트레스입니다.
먹고 살려니까 해야 되지만 되도록이면 그런 마음,
쫓겨서 불안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요, 병 걸려요.
이원성 속에서 늘 노심초사 하다보면 몸에 무리가 오게 돼 있죠.
그래서 플러스 마이너스를 놔버리고
자기 계발, 남들이 한다니까 내몰려 가지고 하지 마세요.
꼭 필요한 거 아니면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원성 속에서 나한테 꼭 필요한 거 있으면
예,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고 아니면 말고 해야 되는데
나는 필요 없는데두요 남들이 움직이면 나도 달려야 됩니다.
같이 살다 보니까.
특히, 한국 사회는요 남의 눈치를 너무 보는 사회이기 때문에
남이 달리고 있으면 혼자 못 계세요. 불편해서 못 있어요.
그때, 딱 깨어서 나한테 진짜 필요한 일인가?
양심에 맞나? 하고 결정하실 수 있는 안목을 좀 길렀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자기 마음은 자기가 관리해야지 남한테 맡겨 놓으면
큰 일납니다. 아무도 여러분 위해 주지 않아요.
자기 혼자 살겠다고 지금 남이 죽든지 말든지 하는 그런 마음,
욕심의 마음이 충천해 있는 세상에서 남한테 내 마음을 맡기지 마시고
자기 건 자기가 챙기시고, 지금 여력이 계신 분들은 남도 좀 도와주세요.
그게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 문화, 이 땅의 지금 진정한 어떤 철학자들이,
진정한 철인들이, 진정한 보살들이, 이렇게 우굴되는 세상이 되려면
어렵지가 전혀 않다는 거에요. 저는.
지금 자본주의에 살 건 공산주의에 살 건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플러스라고 되고 마이너스라고 안 되고가 없어요, 도는.
보세요, 도는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마이너스에서도 한 생각 내려놓으면 도고
플러스에서도 한 생각 내려놓으면 도입니다.
이게 지금 남한이고 북한이라고 하더라구요
공산주의에 사는 사람도 한 생각 내려놓으면요
공산주의고 뭐고 없어요. 내 이름도 없는데요.
그러면 그 마음으로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보면서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떠나서
저건 남에게 할 짓이 아니다~ 하면 안 하면 되고,
저건 남에게 해서 좋은 짓이다~하면 하면 됩니다.
인간은 이거 다 알고 있어요.
공산주의라고 다르고 자본주의라고 다르지 않아요.
아무리 세뇌 당해도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은 알고 계세요, 여러분이.
군대에서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부당한 명령을 진행하려면요.
양심이 뜨끔거려서 못합니다.
인간이면 알고 있는 게 있어요. 특히 이렇게
플러스, 마이너스를 내려놓는 명상 체험을 많이 하시다 보면요.
'참 나'와 만남을 자주 가지시다 보면 더 못해요.
여러분이 양심이 살아나셔서 여러분 죄 못 짓게 돼 있습니다.
올바른 방식으로만 접근하시면.
제가 말씀드린 방식, 모든 걸 이원성을 내려놓고 그 순수한 마음에서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한가? 자명한가? 라고 한 번 물어보시면요.
'자명한가?' 란 말이 천둥처럼 울리시면서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줄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깜짝 놀라서 실토할 겁니다. 잘못했다고.
그렇게 여러분 마음 관리 못하시면 여러분 마음은요,
힐링이 안됩니다. 근원적으로.
이런 이완이나 집중은 결국 여러분 마음을 힐링해 주는 쪽으로 가야 되거든요.
여러분 마음이 치료가 돼야 되는데 치료가 되고 치유가 돼야 되는데
여러분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분이 이완을 하고
명상을 잘하고 몰입을 잘해도요, 삶 전체 균형이 깨져버려요.
여러분, 우울증에 걸리고 온갖 스트레스에 강박증에
걸리시게 돼 있습니다. 균형이 깨지니까.
균형이 안 깨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명상만 하시면 안 돼요.
예, 순간순간 내려놓는 이원성을 초월하는 명상과 함께
여러분이, 왜냐? 여러분은 그래도 아무리 이원성을 초월해도
여러분의 '참 나'는 이원성에 원래 때 묻지 않기 때문에
늘 이원성을 초월하면 '참 나'를 만나게 되지만
여러분의 에고는 여러분의 욕심은 이원성 세계 속에 있고
여러분은 절대로 욕심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원성 세계 속에서 적절한 선택을 못 하시면
여러분은 고뇌에 빠지시게 되어 있어요.
명상으로 도망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내가 저질러 놓은 짓 때문에 명상도 못하게 돼요. 나중에는.
여러분 사람 죽이고 와서 앉아서 명상이 되실 것 같으세요?
될 리가 없죠.
그러니까 부처님도 예전에 계정혜(戒定慧),
이게 같이 가야 된다고 하잖아요.
명상과 지혜의 올바른 지혜와 계율, 올바른 실천은 반드시 같이 갑니다.
계율을 어기고 앉아서 명상 하면 명상이 안돼요.
지혜도 어그러져요.
내가 한 짓이 분명히 잘못됐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당당하게 있을 수가 있어요?
마음이 쪼그라들고 위축되고 자기가, 자기의 지혜가 자기를 꾸짖게 됩니다.
이러면 답이 안 나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삶을 총체적으로 균형 잡힌 삶을 사시려면
명상, 명상도 아주 쉽습니다.
아주 쉬워요. 지금 모른다 해보세요. 이름 모르시죠?
카메라 보고도 해야겠다, 이름 모르시죠?
예,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느끼시고 안다 모른다,
'참 나'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 놓으세요. 되시죠?
자꾸 해 보세요. 저랑 혹시 저랑 친하게 지내는 분들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이거예요.
같이 밥 먹다가 "깨어 있냐?"고, 그럼 정색하고 다시 모른다 한 번 하고
차 한 잔 하다가 지금 "깨어 있냐?"고 늘 제가 물어봐 주는 겁니다.
그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예요.
지금 강의 하는 중에도 계속 물어봐 드릴 테니까, 지금 하세요.
따로 시간 내서 하신다, 이거 안 돼요.
지금 못 하시면 못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실... 왜 도를 지금 못 닦아요? 그쵸?
지금 되시죠? ‘참 나’도 찾지 마세요.
‘부족한 게 있다.’ 는 생각 자체를 날려 버리세요.
‘부족한 게 있다.’ 는 생각이 있으면요,
부족하단 생각이 일어나면서 여러분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원성 세계로 끄집어 내려요.
부족한 게 어디 있습니까? 지금.
모르시죠? 마음 편하시죠? 왜 얼굴들이 굳어져 계셔요? ㅎㅎ
미소 지으시고, 미소 한 번 띄어주시고 ‘모른다’,
그래서 ‘모른다’만 하시면 혹시 긴장되실까 봐
제가 ‘괜찮다’도 같이 말씀드려요.
‘괜찮다’ 라고 해 보세요.
몸에 힘 빼시고 ‘괜찮다, 괜찮다.’
‘지금 딱 좋다.’, ‘모른다.’, ‘모르는데 딱 좋다.’
뭐 어떻게 쓰셔도 좋습니다.
판단중지에만 들어가시면 돼요.
이 세계를 다 없애겠다는 게 아니라,
이원성을 초월하시라는 게 생각만 안 일으키면 돼요.
눈에 지금 뭐가 보이든지, ‘이거다 저거다’ 따지지만
않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따지지 말아 보세요.
‘좋다 싫다’, ‘나다 남이다’, ‘참 나를 알았다 몰랐다’,
‘나는 중생이다 부처다’ 아무 상도 세우지 마세요.
부처도 될려고 하지 마세요. 그거 왜 되세요?
그거 되려는, 부처가 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여러분 아주 가난한 중생이 됩니다.
‘부처가 되고 싶다.’ 나는 지금 부처가 아니란 얘기 아닙니까?
왜 스스로 괜히 그런 얘기를 하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깨어서 이런 말 하는 건 괜찮은데요,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이원성을 초월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면은 이원성 세계에 갇혀 버려요. 그래선 안 돼요.
그래서 마음을 지금 깨어나게 하셔서
이원성을 초월한 다음에 얘기하시는 건 괜찮아요.
맑은 하늘에 흰 구름 몇 개 떠다니는 거,
이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 깨어 있는 상태로 몰고 가 볼게요.
지금 이름 모르십니다. 예. 판단도 하지 마세요. 이름 모르세요.
'참 나'를 찾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지금 제 얘기 들어 보세요.
제 얘기 들으시면서 또 생각하실 수 있죠?
맑은 하늘에 구름 몇 점 떠다니는 이 맛을 느껴 보시라구요.
넓은 10차선 도로에 차 몇 대 다니면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다.
그런데, 그 도로가 차로 꽉 막혀 버리면, 여러분 마음 이제 죽겠다가 돼요. 예.
차가 좀 많아지면 뭐 하시면 돼요?
생각이 좀 복잡해지면 생각하셔도 괜찮다고요.
그 넓은 마음으로, 모른다는 마음이 베이스에 깔리면 생각을 하셔도 괜찮은데,
생각에 이제 이원성이 점점 강도가 세지기 시작하죠.
우리가 생각을 하나 일으키면, 이원성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해요.
너무 빠져드는 것 같으면 뭐 하시면 돼요?
다시, 몰라 한 번 다시 때려주고...
1분 내지 5분 정도 몰라 때리고 다시 생각하시면 돼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세요.
자, 이제 다시 정리를 좀 해 드릴게요.
모른다고 하세요, 수시로. 아시면 안돼요.
모르셔야만 이원성을 초월해요.
이원성을 초월하셨으면 계속 거기만 머물지 마시고
생각을 일으켜서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생각이 자명한지,
양심에 당당한지, 한 번 따져보세요.
그러면 플러스 마이너스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플러스 할 때 플러스, 마이너스 할 때 마이너스, 잘 살게 돼요.
인생을 바로 지금 구제하는 비법입니다.
곧장 이완하는 비법도 여기에 있고,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선택을 하는 비법도 여기 있어요. 곧장 내려 놓으세요.
한 생각만 일어나면 플러스, 마이너스 갈립니다.
배고파 하면 배부름과 배고픔이 싸웁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난 아무개야, 그러면 나랑 남이 또 싸웁니다. 하지 마세요.
나는 '참 나'를 모르겠다는 '참 나'를 안다는 거랑 또 싸웁니다.
하지 마세요.
나누지만 마세요. 나누지만 말고 계시면 그대로 '참 나'입니다.
자, 그 상태 여러분이 뿌리를 내려 보세요.
그 상태에서 한 생각을 일으켜서 이제 따져 보시면요,
여유롭게 따질 수가 있어요.
생각을 해도 여러분이 마음이 이런 고요가 깨지지 않을 정도,
요 정도 상태에서 생각을 하시면 좋은 생각이 납니다.
자, 생각하는 방법도 가르쳐 줄게요.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인의예지(仁義禮智)만 잊지 마세요.
[ 인의예지 仁義禮智 -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
곧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을 이른다.(국어사전) ]
인(仁), 상대방의 입장이 어떨까?
의(義), 내가 상대방한테 부당한 피해를 준 것은 없나?
예(禮), 상대방한테 내가 무례하게 굴지 않았나?
내가 상대방이라면, 나를 보고 무례하다고 하지 않을까?
지(智),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들, 나의 주장들,
이것은 진짜 진리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게 자명한 얘기일까?
요 네 가지를 점검해 보시면,
여러분의 선입견이 있으면 발각되게 돼 있고,
여러분이 욕심 부린 부분이 있으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이원성을 초월하는 이 '참 나' 상태, 양심 상태에서
물어봐 주시면 잘 보여요.
근데 욕심이 꽉 차 있는 상태,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어느 한 쪽을 단단하게 집착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방금 이 네 가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물어봐도 신통한 답이 안 나옵니다.
내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남의 입장을 헤아릴 길도 없고
나의 선입견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내 이름도 모른다고 내려 놓으시고 나면
마음이 순수해지고 나면, 좋은 생각들이 잘 나옵니다.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원성의 세계에 빠져 가지고 나는 부처가 아니다,
난 '참 나'를 모르겠다, 양심이 뭔지도 모르겠다, 되는 일도 없다,
나는 못 났다, 키가 작다, 얼굴이 못 생겼다,
온갖 이원성 속에 찌들어 가지고 사시는 중에
한 생각 내려놓고 이원성만 초월해도 얼마나 편할까요?
그 편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한 번 더 물어봐 가지고 양심을 따져서
양심이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안 하실 수만 있다면,
여러분 인생에서 후회할 일이 확 줄겠죠.
그냥 이렇게 살자는 겁니다.
도인이 되고, 보살이 되고, 철인이 되고는 그 다음 문제고
그냥 이렇게 하루 하루 사실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생활 문화를 보급하고 싶어요.
이렇게 사셔야만 여러분이 마음에 병이 안 걸리세요.
이렇게 안 살면요. 여러분이 아무리 명상을 잘 하고,
하루 10시간 삼매(三昧)에 들면 뭐 합니까?
[ 삼매(三昧) -
힌두교와 불교의 종교 및 철학에서,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집중 상태.(다음백과) ]
10시간 지나서 10분만 지나면 다시 고뇌에 빠지실 텐데,
이원성에 또 진입하실 텐데, 명상 끝나면 다시 생각이 일어나겠죠.
10시간 명상으로 막았어요, 생각을.
자, 10시간 지나서 1분만 지나도 또 뭔 생각이 나겠습니까?
'아, 그런데 돈은 어떻게 할까? 돈은 어떻게 벌려?
내 자식은 어떡할까?' 다시 또 명상에 들어가실래요?
이렇게 해서 해결이 안 돼요. 명상은요,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일상화 돼야 돼요.
일상화 되지 않으신 분은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들어가서는 의미가 없어요.
옛말에 공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게
일폭십한(一暴十寒)이런 말이 있어요.
하루 아주 덥고 열흘은 춥다는 겁니다.
[ 일폭십한(一暴十寒) -
일폭십한(一曝十寒)은『맹자(孟子)』의「고자상(告子上)」편의《무혹호왕지부지장(無或乎王之不智章)》
에 나오는 말로써, 하루 햇볕을 쬐고 열흘 춥다는 뜻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하고
중단되거나 자주 끊김을 비유하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다음, 음성신문) ]
공부를 이렇게 해요. 열흘은 춥다고 하루 찐하게 해요.
뭐 열흘 다시 추워요. 그럼 이 공부가 끊어지겠죠?
계속 그러지 마시고 늘 시간 나는 대로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세요.
지금 이 순간 깨어 계시나요?
좀 전까지 잘했는데, 이런 것 의미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나만 보세요.
앞으로는요, 과거 잘 했는지 못 했는지 미래에 잘 할지 못 할지
걱정하지 마시고 제 말씀만 꼭 지금 따르세요.
지금만 돌아보세요. 지금 내려놓으세요.
지금 돌아봐서 내가 이원성에 빠져 있으면 빨리 나와 보세요.
그것만 생활화 하세요, 지금.
그러면 공부가 끊어진 것도 이어진 것도 없어요.
지금 늘 깨어 있게 되니까 .
과거에 뭐죠? 끊어졌네, '참 나'를 놓쳤네 말았네,
그게 그런 이원성에 또 빠지세요?
이원성에 빠지지 마세요. 그냥 내려놓고 깨어나세요.
그래서 정신이 말짱해지고 맑아지면 여유로울 때
그때 고민하시고 그때 생각하세요.
내가 하려는 일이 정당한 지 양심에 부합한 지,
여러분 역량껏 한 번 고민해 보시면 좋은 길이 보입니다.
이거밖에 없어요. 제가 여기에 무슨 이제 호흡법이니 이런 게 있지만 그거는요.
이 다음 문제에요. 이게 생활화가 돼 계시지 않은 데 호흡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뭐 도움되지 않으세요.
괜히 에너지만 커져 가지고 욕망만 커집니다.
이게 생활화 되어 있지 않은데 에너지가 단전에 꽉 찼다,
그러면 욕심이 엄청 커졌다고 보시면 돼요.
식욕, 성욕, 명예욕, 권력욕이 같이 커집니다.
에너지가 세지니까, 안돼요.
이게 생활화 돼 계신 분이 에너지가, 단전이 꽉 차면 어떨까요?
깨어있는 힘이 커지고 양심 분석하는 힘이 커져요.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호흡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호흡 얘기 잘 안 하니까 저거 변절했나 보다 이런 분도 계시는데.
아니에요, 호흡은 엄청 중요한데
에너지 문제는 엄청 중요한데 에너지는요,
어떻게 경영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경영하는 힘이 없는데 에너지 많으면 안돼요.
돈을 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돈이 많으면요, 그냥 망하는 겁니다.
오히려 마이너스 인생이 돼요.
"그 돈은 차라리 나한테 들어오지 말았었어야 한다."
뭐 이런 말이 나오게 됩니다.
경영 능력을 여러분이 스스로 키우셔야 돼요.
어떤 일도 경영할 수 있습니다. "모른다" 해 버리세요.
아무리 힘든 역경에 처해 있어도요, 여러분 이 순간 죽을 것 같은,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이 펼쳐지고 숨이 턱까지 차도
"모른다"라고 한 번 해 보세요.
숨이 턱까지 찼는지 모르겠다, 잠깐만 "모른다"고 해보세요.
"지금 내가 죽을 지경인지 모르겠다." 한 번 해 보세요.
잠깐이라도 요 마음 한 번 돌려 먹으신 분이요,
그래도 활로를 찾으시지, "죽는다" 하면 못 찾아요.
뇌에서 더 이상 좋은 생각이 못 나옵니다.
"죽는다" 하는 순간 끝나요.
플러스, 마이너스 중에 마이너스를 탁! 붙잡았죠? 끝났어요!
그런데 죽을 것 같은데도 그 순간까지 죽으려는 순간에서도요,
플러스, 마이너스를 한 번 탁! 놔 보세요.
산다, 죽는다를 "모르겠다" 하고 나면 정신이 말짱해집니다.
고 정신이라야 뭐 활로를 찾아요. 이해되십니까?
이거를 실전에서 매일 연습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삶을 이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계획돼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뭔가 자극할 겁니다.
그 순간 순간 여러분이 "모른다" 하실 수 없고,
그 상황에서 올바른 양심에 맞는 선택을 못 하신다면
여러분 공부하셔도 소용없어요.
뭔 공부를 하셔도 그건 다 지금 잘못된 공부입니다.
올바른 공부가 아니예요.
지금 이 순간 그걸 하실 수가 없다면 여러분 공부는, 지금 뭐죠?
산으로 가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제 얘기를 꼭 유념하셔서 지금 이 순간 하실 수 있나요?
지금 "모른다" 또 한 번 해보세요.
그 자리가 여러분의 본래 상태입니다.
사실 여러분 마음은요, 본래 마음은 늘 그 자리예요.
늘 그 고요함이 베이스에 있고요,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한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러고 있을 뿐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 가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는 지금 저처럼 하시는 분 많으실 거예요.
지금 학당에 많으세요.
나중에는 늘 고요한, "모른다" 해서 이원성을 내려놨을 때 느껴지는
그 순수한 마음이요, 내 마음의 밑바닥에 항상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게 여러분의 존재감 자체거든요.
"모른다" 하고 지금 존재감만 집중해 보세요.
이름도 "모른다" 하고 존재감만 느껴보세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그게 '참 나'이기 때문에 이 존재감이 여러분이 만드신 게 아니에요.
늘 있었던 거지, 자, 보세요.
여러분이 '참 나'를 만드신 적이 없어요.
이원성만 내려놓으니까 이게 느껴진 것뿐이지 늘 있어요.
이원성만 내려놓으면 이게 강하게 느껴져요.
이원성에 여러분이 아무리 빠져 계셔도 이게 어디 가지 않아요,
나라는 존재가! 이걸 통으로 이해하시게 될 날이 옵니다.
지금은 수시로 이원성을 내려놓으시기만 하세요.
그래서 계속 이원성만 내려놓으면 '참 나'가 있다는 걸 확인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요, 이원성 속에 빠져 있는 순간,
생각과 고민에 울고 웃고 하는 중에도
'나'라는 순수한 '나'가 어디 안 간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 때가 와요.
이때가 이제 확철대오를 했다고 합니다.
뭔 짓을 해도요, '참 나'가 어딜 가질 않아요.
그래도 '참 나'를 더 강하게 느끼고 싶으시면, '모른다' 한 방 때려주면 됩니다.
'모른다' 한 방만하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이 맑아지고 밝아져요, 그러시죠?
자꾸 해보세요. 지금도 '모른다'면 또 해보세요. 정신이 맑아지죠?
몸이 힘들다 안 힘들다, 마음이 편하다 불편하다...
다 '모른다' 하세요.
일체 이원성에 접근하지 마세요.
예, 이렇게 수시로 수시로 마음을 돌리세요.
이렇게 자꾸 하시다 보면요, 이 힘이 커져서 늘 흐르게 됩니다.
원래 늘 흐르는 거라 여러분이 노력해서 만드는 게 아니고,
늘 있다는 걸 그냥 알게 돼요.
그러고 나면요, 뭔 짓을 해도
'참 나'가 어디 간다는 걸 걱정 안하게 됩니다.
이런 거를 예전에 이제 불가에서 한도인(閑道人), 한가한 도인이네,
일 마친 한가한 도인이네, 일 마쳤네, 요런 말을 씁니다.
그거를 초기 불교에서 이제 아라한(阿羅漢)이네, 그럽니다.
번뇌가 이제 끝났다고 아라한이네, 고 정도는 하셔야죠.
[ 아라한(阿羅漢) -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로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 본다.(다음백과) ]
'참 나'가 늘 흐른다는 걸 아는 경지일 뿐이에요.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고 진짜 늘 흐르니까.
늘 흐르니까 늘 흐른 줄 아는 그 경지가 아라한의 경지이고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서 확철대오 했다는 경지입니다.
원래 진짜 확철대오는 이게 아니에요.
진짜 확철대오는 저 부처 자리 가야 확철대오지만,
이것 선불교에선 요 정도만 해도 '참 나' 입장에선
'참 나'가 훤히 드러났다고 확철대오, 그럽니다.
근데 왜 확철대오가 온전한 확철대오는 아니냐?
'참 나'는 내 안에서 이제 훤히 드러났지만 내 업장들이 어디 가질 않아요.
업장이 그대로 있다가 자꾸 내 살림살이를 방해한다는 걸 알아요.
그 업장들을 어떻게 지우느냐?
습관을 교정해야만 지워집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넓어지고 여러분의 욕심이 진짜로 비워졌을 때,
작용에서도 비워졌을 때 여러분이 업장을 지웠다고 합니다.
즉, 작용의 측면에서 '참 나'는 늘 내 안에 있지만, 환하지만,
움직이려고 하면 한 생각만 일으키려고 하면 고정관념이 끼어들고
뭐 좀 하려고 하면 욕심이 끼어듭니다.
요 짓거리 작용에 있어서도 무지랑 아집이 욕심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경지까지 그렇게 그렇게 살아 가시다 보면,
점점 그쪽으로 가겠죠. 부처를 닮아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 궁극의 경지를 확철대오라 하면
그것은 저 10지 보살 이상 가야 얻는 확철대오고,
지금 '참 나'도 훤히 드러났다는 측면에서 확철대오는
지금 곧장 얻으실 수 있어요.
내려놓으세요. 자꾸만 내려놓으세요. 지금 여기 계시는
이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생각 나는 대로 '모른다'고만 해보세요.
지금 여러분, 가만히 봐 보세요, 마음을.
여러분 마음을 보시면요, 순수한 상태에 잠깐 머물렀다가요, 어떻습니까?
다시 플러스, 마이너스 쪽으로 또 빠져요.
뭐에 빠지나요?
그래도 난 '참 나'를 잘 모르겠는 걸? 또 모른다 해요.
아, 이 생각하지 말라 그랬지, 모른다 해요.
잠깐 걱정이 없어요. 그게 '참 나'인데.
넘 밋밋한데? 또 나와요.
또 들어가요. 남들은 더 잘하지 않을까? 또.
그래도 고승들이 얻은 '참 나'는 다를 텐데,,, 계속 이러고 있는 겁니다.
이 생각만 안 하면 그건 끝인데.
고승들은요, 신기한 걸 얻은 게 아니라 그 생각을 안 해요.
안 하는 사람이 짱이예요.
노자에도 나오지만, 욕심 없는 사람이 제일 부자예요.
이 원리를 모르면 절대 도통을 못합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부자인 원리를 모르면,
신기한 걸 얻어야 견성이라고 생각하시는 한
그 사람은 절대로 견성할 수 없어요.
왜냐?
신기한 거는요, 왔다 가요. 이거 절대로 얻을 수가 없죠.
영원히 내 물건이 되지 않는다구요.
영원한 내 물건은 아무 맛도 없고, 밥 같은 맛.
담담 무미한 맛을 가진, 여러분의 순수한 그 의식 자체인데
신기한 걸 바라기 때문에 여러분 절대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명상하다 신기한 체험이 한 번씩 와요.
그게 '참 나'려니 하면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리 해보세요, 얻어지나 그게.
그건 왔다 가는 거예요. 왜냐?
자, 보세요. 그것은요,
여러분의 순수한 의식, 담담 무미한 의식이 드러날 때
고뇌에 빠져 있다 이 순수한 맛을 느낄 때, 이때 에고가 환희를 일으킵니다.
죽겠다 살겠거든요.
그 환희, 거기에 집착하시는 거예요.
에고의 환희, 에고의 되게 플러스 상태.
거기에 집착해서 그걸 '참 나'라고 아시는 한,
에고라는 건 영원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왔다 가고
두 번째 만나면 밋밋해요.
처음 만날 때나 좋지, 두 번째 '참 나'를 만나면 밋밋해 져요.
그러니까 이제 큰일 난 거죠. 환희가 사라지기 시작해요.
'참 나'를 만나는데도 환희가 점점 약해져요.
일상이 돼 가거든요.
그럼 자연스러운 상태고 좋은 일인데도
'참 나'를 환희라고 설정한 이상, 환희가 사라져 가니까 긴장합니다.
그래서 다시 튕겨버려요. 이런 일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담담무미.
기쁘다, 환희여야 한다. '참 나'는 즐거워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세요.
그러면 그 자리가 지금 '참 나'입니다.
이 맛, 밥의 맛을 알 때 진짜 도를 얻습니다.
이게 무미한 것 같은데 이게 진짜 맛이네,
요거를 모르니까 우리가 견성을 못해요.
삼매(三昧)에서 좋은 체험 가지신 분은
더더구나 견성 못해요. 왜냐?
삼매의 좋은 체험에 집착해서 절대로 '참 나'를 '참 나'라고 인정을 못합니다.
진짜 '참 나' 만나서 인정 못해요.
이 사람은 내 아버지 아니야,
내 아버지는 럭셔리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냥 아버진 거예요, 초라한.
인정을 못해요. 내가 생각했던 아버지가 아니라고.
다 에고 놀음이에요.
지금 왜 간택을 하고 계세요. 간택하지 마세요.
에고는 판단을 멈춰야 돼요, 그냥.
그 상태가 '참 나' 상태예요.
이렇게 제가 지금 여러 가지로 말씀드렸지만
잘 이해하시리라고 믿구요.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래서 실습을 통해서 '참 나''를 만나시고
지금 끝나는 시간까지 수시로 모른다고 하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 생각은 뭔가의 분명히 또 하나에 빠져 계실 거예요.
그거 모른다고 한 번 해보세요. 큰 일 나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보시면 판단을 할 때 하더라도 내가 주체적으로
더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판단을 하기 싫으면 안 할 수 있어야 되고,
할 때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 양자가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여러분 삶은 균형을 잃습니다.
이원성을 초월하려고만 해도 안돼요. 그것도 집착입니다.
이원성을 깨끗이 내려놓은 상태에서 우린 이원성을 또 만나야 돼요
만날 때 즐거운 기분으로 여유롭게 만나자는 겁니다.
정당한 방식으로, 요 얘기만 이해하시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삶, 사는 삶, 그대로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재산 상태, 여러분의 학력, 여러분의 외모, 그대로
여러분은 보살이 됩니다.
다른 거 하나도 안 바꿔도 마음만 고쳐 먹으면 그대로 보살이예요
이원성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보살이예요.
이원성을 초월했으면서 동시에 내 육신, 내 외모, 내 재산,
내 스펙, 내 가족, 다 긍정하고 거기서 나는 양심에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안 하는 존재가 되면 그대로 보살이지 다른 게 필요 없어요.
그렇게 사시다 보면 여러분 얼굴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여러분의 운명이 변해 가면서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뒤집어질 겁니다.
이거를 지금 만들어 내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도를 이해 못 하시는 거고,
이 말씀이 그럴싸한데? 라고 들리신다면
지금 도에 조금 어떤 실마리는 보신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운동을 하세요.
이러고 지구가 안 바뀌면요.. 제 손에 장을 지지는데,
뭐 그때까지는 제가 살아있진 않겠죠.ㅎㅎ
하면 됩니다.
이런 얘기를 드리는 이유가 제 눈에는요, 선명해요.
저는 제가 본 우주의 진리의 부분,
제가 뭐 특별히 다른 짓을 해서 본 게 아니고, 방금 말한 짓을 계속했더니
우주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히 보여요.
우주가 뭘 원하는지, 인의예지(仁義禮智) 하라는 거예요.
다른 거 아닙니다. 지금 이 말이 저한테는 실감나게 들리고,
제가 물건 하나라도 인의예지 어긋나게 되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마이너스 결과가 온다는 것도 선명하게 느껴요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이런 것, 이.. 지금 내가 잘 했건 못 했건
또 일어난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빨리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우주에 발 맞추지 못 한다는 것도 알아요.
빨리 빨리 내려놔야 돼요
사람 마음은 에고는 집착하게 돼 있어요. 자꾸...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집착해도 괜찮아요. 제가 말씀 드립니다.
집착해도 괜찮으니까 5분 안에 빨리 나오세요.
5분만 하세요, 5분만 누리세요. 막~ 자기, 막~ 자기 자뻑에 빠져가지고,
5분만 하세요. 빨리 나오세요. 더 계시면 안 돼요.
가족들이 이제, 가족들의 눈빛이 변하고 주변이 다 변해서
여러분이 우주에서 왕따가 됩니다.
뭐든지 적당히 에고의 욕심은 누리시고 빨리 나오세요.
그러면요, 좋은 경험이 돼요.
나오시면 내 에고의 그 마음을 가지고 남도 이해할 수 있고
보살의 좋은 경험이 되는데, 5분 이상 머무르시면요, 독이 돼요.
이해되시죠?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고의 욕심도 내가 흠뻑 느껴봐야 돼요.
그래야 남의 마음도 이해해요.
내가 배 고파봐야 남이 굶는 게 무슨 마음인지 알고, 내가 막 자만심에
빠져봐야 상대방도 '지금 쟤 지금 완전히 오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고 다 알아요.
그런데 5분 안에 빨리 나오세요.
그래야 상대방한테도 나오는 법을 가르쳐 주죠.
빨리 빨리 나오시기만 하면 돼요.
뭔가 빠져 계신다고 느끼시면 '아, 왜 빠졌지?' 이러지 마세요.
이럴 시간이 없어요. 빨리 모른다고 나오세요.
나와서 보면요, 굳이 그럴 게 아니라는 거를 다 아세요.
그랬을 때 양심에 맞게 또 생각 하나를 일으키고 감정을 쓰시고
올바르게 처신을 하세요.
그리고 그러다가 또 우리는 이원성을 다루면요, 분명히 또 집착하게 돼 있어요.
괜찮아요. 그건 누구나 똑같으니까. 또 5분 안에 빨리 나오세요, 모른다고.
이렇게 살아가실 수 있겠어요?
이게 최고의 수행인데, 이거만 하시면 여러분은요,
10년, 20년, 30년 뒤에 위대한 인격자가 돼서
여러분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분이 될게 확실한데요.
저는 그게 손에 잡힐듯이 보이고 만져지고 합니다.
제 삶에서 실험해 봤더니 돼요, 안 망해요, 아무리 망하려고 해도 안 망해요.
도와주시는 분이 생기고, 함께 이런 얘기에 공명해 주는 분이 생겨서 안 망해요.
제가 망할 수 있을까요? 제가 미치지 않고서는 못 망합니다.
사단에 어긋난 짓을 제가 해야 망하지 사단에 맞는 짓을
제가 지금 더 해버리면 망할 수 있을까요?
망하고 흥하고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느낌을 좀 느끼시라고.
여러분이 사단에 맞는 짓만 하는데 하늘이 어떻게 여러분을 무시합니까?
여러분한테 어떻게 잘못 되게 합니까?
내가 예전에 잘못한 것 때문에 혹시 나한테 시련이 오고,
나를 더욱 성장시키려고 시련이 올 순 있어도
나 죽으라고 시련이 오지는 않습니다, 절대.
공부 개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우주가 어떤 사람 하나 죽어보라고 그렇게 괴롭히는 그런 싸이코라면
이 공부 하시나 마나죠.
우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알고 계시죠?
순수한 욕심이 없는 상태인데 우주라 불리는 자리가 우리 '참 나'만 해도 저런데
우주의 '참 나' 자리는 얼마나 플러스, 마이너스, 나와 남을 초월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플러스 할 때 플러스 하고 마이너스 할 때 마이너스 할 뿐이에요, 우주는.
저한테 어떤 시련이 필요하면 주고 아니면 말고.
그래서 저를 더 우주적으로 성장시키려고 도와주려고 그러지
왜 저 죽으라고 그러겠습니까?
제가 한만큼 우주는 저한테 돌려줄 뿐인 거죠.
제가 사단을 계속 양심에 맞아 살아버리면, 계속해서 이원성을 초월하면서
집착을 버리면서 양심에 맞게 살아버리면 우주가 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이게 예전 성인들이 하늘이 어떻게 나를 뭐라고 하느냐,
나를 막을 수 있느냐 당당함이 있었어요.
그 당당함이 어디서 나오냐면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게 없다.' 라는 데서 나옵니다.
이렇게 살아보지 않고,
아~ 이 세상은 악이 이기네, 선을 이기네, 이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아무 말 안 하시는 게 나아요.
괜히 그런 말이 또 구업을 짓습니다.
그 말을 듣고 또 누군가가 잘 살아 보려다가 아이 나가리다, 이번 판~~,
보니까 지금 다 착하게 살아도 망하는 판에 내가 뭐 하겠냐?
남을 좌절시킬 수 있지 않나요? 그런 말 한 마디가.
말, 행동,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실 거냐,
이원성을 내려 놓으시고 양심 챙기십시오.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제 실험 결과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제가 많은 분들을 지도해 본 결과 이게 제가 말씀 드린 방법론을
삶에 조금만 적용하셔도 그분 인격이 변하고 생각이 변해요.
그러시겠죠. 그게 당연한 얘기겠죠.
원수도요, 화해를 해요, 이 방법을 쓰면.
내 원수다, 원수다만 하고 있다가 이원성에 빠져 계신 거 아닙니까?
원수다, 저 놈 보기만 해도 내가 체할 것 같다, 토 나온다, 원수다,
자기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한 생각 돌려서 저 사람 인의예지 한 번 써 볼까?
저 사람은 뭔 마음으로 그랬을까? 진지하게 그 사람이 돼 보는 거.
인(仁)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 지(智)랑 인(仁)이 특히 중요해요
인이 돼야 사실은 지혜도 빛을 발하고요.
공감을 해 주지 않으면 지혜가 다 잘못 쓰여요.
인이 제일 중요하고 또 지혜가 중요합니다.
두 개를 꼽자면 인과 지혜가 중요해요.
남의 마음이 한 번 돼 보기만 하면요.
그 사람의 은밀한 속사정까지 뭔가 짐작이 와요.
왜 그랬는지, 내가 상대방이 한 번 돼 보고 나면,
내가 상대방이라면 어떤 지적을 받고 싶을 지,
잘못했다 하더라도
무슨 어떤 방식으로 꾸중을 듣고 싶은 지까지 보여요.
그렇죠. 그 방식대로 해 주시면 돼요.
그게 이제 자명해지고,
인(仁), 상대방의 입장 한번 되어 보고,
의(義), 상대방한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예(禮), 무례하지 않게,
지(智),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 상대방을 대해주면 상대방이 왜 계속해서 원수로 남을 수 있을까요?
못 남아요. 이쪽이 변해 버리면 저쪽도 변하게 돼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자유자재로 쓰시는 분이 보살이지
이런 거에 까막눈이신 분이 '참 나'에서 삼매 체험 좀 했다고
도인이네 하시면 안 돼요, 큰 일 납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여요.
그런 분들이 한 한 마디, 그냥 생각 없이 한 한 마디가
다른 사람들의 의욕을 꺾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 올바른 인간의 길을 가는데 어떤 좌절을 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좀 조심하고 살고 저도 저부터도 자명한 얘기 아니면 안 하려고 합니다.
제가 목소리를 높여서 하는 얘기는 너무 안타깝고
제가 너무 자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같이 좀 이 방법을 한 번 활용해 주십사 해서 좀 강하게 말씀드린 거니까
제가 무슨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뜻을 내서 하시지 않는 한은
여러분 영성은 계발이 안 됩니다.
제가 한 말이니까 그냥 믿으시면 안 돼요.
여러분 자명한 것 같으세요? 물어보세요, 여러분한테.
너 깨어 있어?
두 가지만 물어보세요.
너 자명해? 지금 저 말 자명하다고 느껴?
아닌 것 같으면 이거 또 저한테 질문해 주세요.
자명하게 여러분이 자명해지지 않으면 저 혼자 자명하면 뭐 합니까?
여러분 마음 의혹투성인데 여러분이 자명해져야지 끝나고
여러분이 자명해지는데 방해물이 있을 수 있어요.
여러분의 욕심과 편견, 그러니까 모른다 하고 꼭 따져 보세요.
지금 선입견 가득해 가지고 따지시면요, 답이 안 보일 수가 있어요.
선입견 가득하면 어떻습니까?
제 얘기 중에 단어 하나만 마음에 안 들어도 제 얘기 전체가 안 들려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쟤가 뭔데 저렇게 진리라고 믿고 있을까?
제 주장을 한 번만 제 입장에 되어서 한 번 이해해 주세요. 인(仁).
그 다음에 자명한지 따져주세요.
그러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만 쓰시면
남의 속도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살이 될 수가 있어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