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호초행(江湖初行)

4. 강호초행(江湖初行)  초옥(草屋).그것은 한 채의 매우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초옥이었다.마당에는 짐승가죽과 고기를 널어 말리는 나무대가 놓여 있었고, 몇 그루의 야생매화(野生梅花)가 정갈하게 심어져 있었다.초옥은 무성한 송림(松林)을 뒤로 둔 야트막한 둔덕에 서 있었고, 그 풀잎지붕이 이고 있는 하늘은 베면 피라도 배일 듯한 푸른빛이었다.운룡이 초옥의 싸리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마당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묵묵히 앉아 대나무로 만든 활을 다듬고 있었다.그의 인상은 매우 냉막했다.혈관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냉연한 그 얼굴은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운룡을 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그리고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소주(少主)님을 뵈오." 운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냉아저씨는 나를 또 그렇게 부르시는군요. 의부(義父)님께선 안에 계시오?" "계십니다." 그의 시선이 운룡의 차림새를 한차례 가볍게 훑었다.먼 길을 떠나는 행색이었으며, 큰 예식에 준해서야 입는 칠의삼재의 요란한 행색이었다.하나 그는 먼길을 가느냐는 말도, 옷에 대한 의문도 단 한마디도 표시하지 않았다.그는 다시 묵묵히 앉아 자신이 하던 일을 조용히 이어갈 뿐이었다.삐이걱― 먼지가 쌓여 있는 문이 조금 둔탁하게 열렸다."이음목 부분에 기름칠을 해야겠군." 운룡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제일 먼저 매큼한 약 냄새가 자욱하게 코끝을 찔러왔다.방안은 사방 네 평 정도로 구석쪽에 작은 문갑이 놓여 있는 것 외에는 매우 간결한 구조였다.한 자 크기의 다탁(茶卓)을 앞에 두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방안은 창문이 높게 달린 탓으로 매우 어두웠으므로 그 사람의 모습은 그저 윤곽 정도나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어둠 속의 빛기둥 같은 가는 햇살이 먼지 한올 한올까지 투영해내는 속에서 그는 죽음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등을 지고 앉아 있다는 것과 한쪽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간 탓에 빈 소매가 허리춤에 묶여 있다는 것뿐.운룡은 장대한 위엄이 뒷등에 서린 이 거한을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의부님?" 가슴속 오장육부까지 쿵쿵 두들겨대는 듯한 목소리가 거한에게서 흘러나왔다."오늘은 오는 날이 아니잖느냐?" "소자는 사문의 명을 받들어 사해대검회라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러 갑니다. 비무날이 이달 스무아흐렛날이고, 장소가 태산(泰山)이니 왕복 한 달쯤 걸릴 것 같습니다." 거한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대봉황천?" 운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거한에게 물었다."그곳을 알고 계십니까?" "대회에 대한…… 지편(紙片)을 보내온 것이 있느냐?"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무당파 앞으로 된 초청장을 꺼냈다.거한은 등을 돌린 자세로 홍색의 초청장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문득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그의 시선이 높은 창문을 향했다.그렇게 반각쯤의 시간이 흘렀다 싶을 때, 거한의 입에서 무거운 어조가 흘러나왔다."냉혼, 게 있으냐?" 즉시 짤막한 대답이 뒤를 이었다."분부 기다립니다." "술상을 봐 오너라." 운룡의 얼굴에 순간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그는 이 근엄하고 무서운 의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차려온 술상은 단출했다.호로병에 담긴 화주(火酒) 한 병과 밀떡 서너 장, 그리고 사과, 배 등의 과일 약간 뿐이었다.냉혼이 한쪽에 좌정하여 앉자 운룡은 즉시 상 위에 놓인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그가 과일을 보기 좋은 모양으로 다 정돈해 놓았을 때에야 거한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비로소 그의 윤곽이 흐릿하게 드러났다.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무성한 구레나룻.송충이처럼 굵은 눈썹에 호안주순(虎眼朱脣)의 장년인.부처를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이런 위엄을 지니고 있을까?  장판교(長板橋)에서 홀로 조조(曹操)의 십만대군을 맞은 촉(蜀)의 장비가 이런 용맹을 지니고 있었을까? 거한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 산이 웅크린 듯한 위엄의 소유자였다.사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운룡은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거한은 단숨에 삼배(三杯)를 들이켰다.안주 한점없이 물을 퍼붓듯 술을 삼키고 난 그는 문득 한 쌍의 호안으로 운룡을 정시해 왔다."받아라." 운룡은 얼떨떨하여 급히 잔을 받았다.쪼르르― "마셔라." 운룡은 한쪽의 냉혼을 힐끗 바라본 후, 두 눈을 딱 감고 술잔을 입 속에다 부었다."쿨룩쿨룩……." 순간 격렬한 기침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속이 탔다.과실이나 곡식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란 것을 머리털 나고 처음 마셔보는 그가 아닌가? 더구나 술을 붓고 불을 놓으면 그대로 화염이 되는 독한 화주."끄윽…… 끅……." 운룡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내장이 일으키는 기침을 참느라고 목구멍을 부여잡고 켁켁 소리를 냈다.거한의 고요한 음성이 빈 술잔에 떨어졌다."내가 너에게 가르친 것이 있다. 인생을 살되 어찌 살라 하였느냐?"  "끄윽…… 사람을 대하매 속임이 없고 일을 대하매 정당하며, 자신의 마음에 물어 부끄러움이 없고 하늘을 우러러 깨끗한, 그런 삶이라야 한다 하셨습니다." "옳다. 이제부터의 삶은 바로 너의 것이다. 너에게 배당된 한 잔의 술을 마시듯…… 이제 다시 너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사람은 없다. 네 스스로 채워야 한다. 자신의 삶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순 없는 것이다."  운룡의 몸이 흠칫했다.'의부께서는 오늘 지나치게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그 뜻 또한 심오한 것이 아닌가. 내가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그토록 큰일인 것일까?' "냉혼, 그 상자를 가져 오너라." 냉혼은 힐끗 거한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그는 방의 한쪽에 있는 문갑을 열어 사방 두 자 남짓의 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그것을 열어보라, 운룡." 탕! 뚜껑이 열리자마자 삼엄하게 솟구치는 보광(寶光)! 운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안에는 하나의 신비롭도록 영롱한 구슬 하나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세 가닥으로 접혀진 활이 자주색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거한은 묵묵히 세 가닥으로 접힌 활을 집어 들었다.그것을 펴들자 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하나의 훌륭한 탄궁(彈弓)으로 변했다.거한은 거의 운룡의 키만한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는가 싶더니 운룡을 향해 내밀었다."이것은 과거 내가 쓰던 헌원탄궁(軒轅彈弓)이니라. 그리고 이 탄궁은 백 년의 내력이 없으면 시위조차 당길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도록 하라." 활 전체가 거무스름한 묵광(墨光)으로 신비롭게 빛났다.활의 위쪽에는 정교한 용의 조각과 함께 헌원(軒轅)이란 두 글자가 전자체(篆字體)로 새겨져 있었다."향후, 네 스스로 백 년의 내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때 음산(陰山)의 만년냉소(萬年冷沼)를 찾아라. 그 안에는 천 년을 묵은 독각교룡(毒角蛟龍)이 살고 있으니 그놈을 잡아 힘줄은 시위를 만들고 뼈로 화살촉을 만들어라. 독각교룡의 힘줄이 아니면 헌원신궁은 당겨지지 않는다. 알겠느냐?" "예." 운룡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그런데…… 백 년의 내력이라는 것은 어찌 알 수 있나요?" "너는 내가 가르쳐 준 천기대나인신공(天機大那引神功)을 기억하고 있느냐?" 운룡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고말고요." 천기대나인신공! 운룡의 의부는 십육 년의 세월동안 그에게 이 하나의 신공만을 가르쳤을 뿐이다.방법은 보통의 좌식법(坐息法)과 대동소이하되 다만 늘 발밑의 용천혈(勇泉穴)에서 진기가 끝나는 것이 틀렸다. 운룡은 이것을 처음 배운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연마해 왔으나 별 신통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것을 지금 연무해 보아라." 운룡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에서 정좌의 자세로 급히 바꾸어 앉았다.연후, 천천히 몸 속의 진기를 끌어올려 천기대나인신공의 구결(句訣)대로 움직여 가니, 일각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머리 위로는 희미한 백색의 원이 피어올랐다.그때 거한이 날카롭게 외쳤다."눈을 뜨라!" 운룡은 번쩍 눈을 떴다."무엇이 보이느냐?" "백색의…… 음…… 희미한 원이 머리 위에 떠 있군요." 거한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이 지금까지 연마한 네 공력의 실체(實體)이다. 나이 삼 세부터 십육 세까지 도합 십삼 년 내력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후유…… 그러면 아직도 팔십칠 년의 내력이 더 있어야 헌원신궁을 쓸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때면 늙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리석은 놈!" 거한은 한 쌍의 호안을 부릅뜨며 꾸짖듯 말했다."연후 강호에 나가 적과 대적함에 있어 무기가 아닌 권장(拳掌)으로 해오는 공격은 되도록이면 몸으로 받도록 해라!" "받으라고요? 그럼 얻어맞으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단, 받을 때 반드시 천기대나인신공을 운기해야 한다. 그리고 매달 대보름 때마다 운공하여 머리 위의 형체를 확인하라. 그 형체가 다섯 송이의 연화(蓮花) 모양이 되었을 때가 바로 백년내공(百年內功)이 이루어지는 때다." "다섯 송이 연화라……." 거한은 운룡이 말을 이을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상자 속에서 영롱한 광채의 구슬을 꺼냈다.현란한 백색의 광채.크기는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햇살보다도 더 밝은 빛으로 이글거렸다."이것은 백옥주(白玉珠)라는 것으로써 인세에 드문 희귀한 보병(寶兵)이다." "보병? 그렇다면 그것이 무기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묘용(妙用) 또한 백 년의 내력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백년내공이 이루어진 후에 이것을 시험해 보도록 하라. 이것은 네 친부(親父)의 유물이다." 순간 운룡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아…… 버지……?" 아버지! 황혼이 되면 자신의 굴로 돌아가는 들짐승들이 있었다.이슬을 피해 어미의 날개깃 속으로 파고드는 어린 날짐승들이 있었다.그 모습을 보며 쓸쓸히 웃음짓던 날들이 운룡이라고 왜 없었으랴? 아니, 어릴 때 의부에게 그 의문을 물어보았다가 호통을 당한 후, 입 밖으로 감히 낼 수 없어서 더욱더 응어리진 그리움인지도 모른다."아…… 버지……." 운룡은 구슬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어 보았다.한 번도 불러보지 못해 오히려 낯선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목을 메여오고 있었다.거한은 침통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앉았다."가거라." 짤막한 한 마디.그것은 할말을 다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운룡은 헌원신궁과 백옥주를 품속에 갈무리한 후 거한의 뒷모습을 향해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의부님." 냉혼이 문 밖까지 따라나왔다.운룡은 마당을 천천히 둘러본 후 싸리문을 밀었다.하나 싸리문을 밀다 말고 그의 시선이 힐끗 냉혼을 향했다."냉아저씨, 아버지의…… 이름을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냉혼의 냉막한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그는 초옥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일성 장탄식을 터뜨렸다."화천상(華天上), 화천상대공이십니다." "화천상…… 그럼 내 속세의 성도 화씨라는 얘기로군." 운룡의 얼굴에 문득 우울한 웃음이 번졌다."대공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소?" 냉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더니 느릿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말할 수 없이 훌륭한…… 소주님의 의부께서 이 세상의 단 하나의 영웅이라 칭할 정도로……." "됐소. 고마워요." 운룡은 냉혼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나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등뒤로 한 줄기 가을햇살이 우울하게 밀려들고 있었다.냉혼은 그 모습을 장승처럼 선 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이 냉철한 사나이의 두 눈에 고이는 것은 뜨거운 장부의 눈물이었다.그리고 한소리 탄식이 빈 산속에 울려 퍼졌다."닮으셨군…… 슬픔을 참는 방법까지도 주공을 닮으셨어……."  * * *  "대봉황천에서 비무대회를 연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무거운 어조였다.냉혼은 거한 위지중걸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했다.위지중걸, 그는 벌써 다섯 병째의 화주를 비우고 있었다."그러잖아도 약(藥)으로 지탱하시는 몸인데…… 지나치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나는 비무에 대해 물었다." 냉혼은 한소리 탄식과 함께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군요. 첫째는 이 년 앞으로 다가온 십사연방천하검회에 대비하여 자체의 능력을 재평가해 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외의 십대세력에 대한 견재를 위해 잠자고 있는 중원의 세 세력, 즉 화남 광무천, 한북 용권풍, 중주 신선도를 자극한다는 의미가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이것은 인재가 많은 대봉황천으로써는 극히 희박한 이야기겠지만…… 이번 비무를 통해 십사연방천하검회에 참가할 화북 만룡가의 대표를 선발하려는 것이 아닐지……." 막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위지중걸의 손이 멈칫했다."바로 그것이다. 앞의 두 이유도 타당성이 있긴 하지만 세 번째 이유가 가장 그럴듯해." 냉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그러나 대봉황천은 기라성 같은 노장, 소장고수들이 어우러진 인재의 총본산이라 할 만한데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위지중걸은 흔쾌히 잔을 넘겼다."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예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운 세 단계가 있다고." "공령(空靈)…… 무예의 마지막 계열인 공령에 이르기 위한 조화(造化), 지념(止念), 공심(空心)의 세 단계 말씀입니까?" "그렇지. 만룡가 대황봉천을 포함해서 십사연방 수뇌부의 무예수준은 공령의 첫번째 단계인 조화경(造化境)까지 이르러 있다. 천하검회에 참가하자면 최소한 두 번째 단계인 지념경(止念境)까지 끌어올려야 겨우 안심할 수 있다. 대봉황천의 노성주께서는 그러기 위해 성심마공(聖心魔功)이란 일종의 교량역할을 하는 무예를 연마하고 계셨지."  "……." "가정이지만, 만약 노천주의 무예연마에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었다면…… 그리하여 천하검회의 시일은 촉박하게 다가오고 그것에 대한 대안(代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면……." 냉혼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실패란 말입니까?" "없다고 할 순 없는 일이지." "설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진천우도 노천주 같은 절대의 고수가 연마해내지 못한 무예를 누가 대체 연마할 수 있겠습니까? 시일도 이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위지중걸은 참으로 오랫만에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무예는 시간으로 연마하는 것이 아니야. 재질이 무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는 말과 함께 술상 위에 놓여 있는 사과를 들어 보였다."이 사과를 보라. 운룡이 깎은 것이지만 깎인 모양이 어딘가 다르지 않은가?" 냉혼은 사과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보통 사과는 횡(橫)으로 깎는 법인데 이 사과는 드물게도 종(縱)으로 깎여 있군요." "자네는 사과를 밑으로 깎아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나도 없네. 즉 운룡은 스스로 그렇게 깎는 법을 터득한 거야. 그런데도 깎는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네. 그놈은 두 개의 사과를 깎는 데에 술 한 잔 마시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위지중걸은 피식 웃었다."그놈은 치우천인이야. 즉, 그놈은 어떤 것을 보고 배우면 그 즉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흐음……." "현청이 비록 기초가 없고 삼재검법이 하류검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청은 그 검법 하나만을 수십 년 동안 수련해 왔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청의 삼재검법은 나름대로 달통의 경지에 이른 것이네. 그런데도 운룡은 그를 이겼지. 이유는 치우천인이란 괴상한 재질이 그렇게 만든 것일세." "그렇군요……." 위지중걸은 다시 한 잔의 술을 천천히 따라 마셨다."대봉황천은 바로 그런 인재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아는, 즉 화북 만룡가의 운명을 걸머질 희대의 기재(奇才)를!" "운룡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그들의 무예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위지중걸은 씁쓸하게 웃었다."이것 보게, 냉혼. 자네와 내가 운룡, 그놈을 가르치는 문제를 놓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가. 나이 두 살 때, 천자문을 가르치자 그것을 술술 외던 그놈을 말이야." 냉혼도 따라 웃었다."머리가 깨질 지경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천기대나인신공 외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네. 그 뛰어난 재질에는 보통 무예는 오히려 흠이 될 뿐이었으니까. 고민 끝에 우리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그에게 튼튼한 밑천을 준다는 것이었지. 즉, 어떤 난해한 무예라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 말일세."  "소주의 나이 오세까지 일천여 종의 약초를 밥 대신 먹이고, 물 대신 쓰게 했지요." "세상의 귀한 영단(靈丹), 영물(靈物)을 다 먹였고 천기대나인신공의 바탕을 심었지." "……." "천기대나인신공은 상대의 내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묘용이 있다. 창검으로 몸이 잘리지 않는 한 어떤 공격이든 다 자기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흠이라면 나이 삼 세 때부터 반드시 익혀야 하고, 또한 백 가지 양성신초(陽性神草)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운룡은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지 않았는가? 그는 한마디로 완벽한 체력을 갖추었다."  냉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줄기 이채를 번뜩였다."그렇다곤 하지만…… 소주가 일신에 지닌 무예가 너무 빈약한 것이 좀……." "무예?" 위지중걸의 얼굴에 담담한 웃음이 번졌다."난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해보지. 그 녀석이 지나칠 정도로 우직하지 않은가. 정직하고 충직하다는 것은 좋긴 하지만 총명을 가리게 된다네."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그놈은 과거 무예의 천재였던 진천우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핏줄이란 건 속일 수 없지. 그렇다고 볼 때 치우천인의 기이한 근골이 그렇게 시키고 있는 건지도 몰라. 즉, 겉으로 총명이 그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있는 거란 말일세." 냉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이해하기 어렵군요." "벌레가 자신의 몸을 나무와 땅의 색으로 위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사실 치우천인이란 건 너무 뛰어나다. 그 뛰어남을 위장함으로써 외부의 적을 막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  "오오……." "언젠가 그 껍질이 벗겨지고 나면 우리는 이제까지 인세에서 보지 못했던 일대기재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네." 위지중걸의 시선이 창쪽을 향했다.텅 빈 시선으로 그가 말했다."쇠는 달구어져야 한다. 알도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지 않고서는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할 수 없지. 앞으로 그에게 닥칠 고난이란 건 껍질을 벗기 위한 아픔인 것으로 생각하면 될 거네." 말을 잇던 위지중걸은 돌연 몸 속에서 짧은 피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그는 그것을 힘껏 불었다.삐이익― 귓청을 찢을 듯한 소음.그로부터 반각 가량이 지났을까? 돌연 한줄기 기음과 함께 장내로 두 줄기의 뿌연 인영이 나타났다.스스스스― 놀랍게도 이들은 나타났으면서도 흐릿한 모습이었기에 어떤 얼굴이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다만 하나의 인영은 믿을 수 없이 말랐고, 또 하나의 인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하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부르셨습니까, 위지사부." 두 인영 중 한 인영이 말했다."이제부터 너희들은 하산하여 소주인의 뒤를 따른다." "하산입니까?" "단, 어떤 경우에도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전까지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도록." "존명!" 커다란 고함과 함께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는 번쩍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河水蒼山路向來 東南山祖大河通 寒樹希微遠天外 夕陽明滅亂流中 강물 좌우에는 푸른 산이 서 있구나.배 위에 몸을 싣고 동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넓은 황하 동남쪽이 보이네.눈을 들어 바라보니 아득한 하늘 끝에 희미하게 서 있는 나무 차가운 맛 풍겨주고, 지는 해 물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구나.찰랑찰랑― 물이 흔들리니 배도 더불어 흔들린다.맑디맑은 물 속으로 가을햇살 한 줄기가 덧없이 흐르고, 그 물 속에 손을 담그면 손마저 푸르게 물들세라.이곳은 용주(龍州)에서 협성(陜城)으로 이르는 수로(水路)였다.너비 십여 장의 거룻배에는 행상(行商) 차림의 거상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약간의 부녀자와 승복 차림의 승인들도 보였다.그 한쪽, 굵은 타목(舵木)을 이리저리 힘주어 미는 조타수(操舵手)의 아래 뱃전에 홀로 기대앉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차림새를 보아하니 도사(道師)인데 그 모양이 가히 가관이다.붉고 푸르고 희고 누런 옷에, 울긋불긋하며 휘황찬란한 장식과 도패(道牌)들, 양 어깨로는 한 자루 청강장검과 불진(佛塵)을 번갈아 메었고, 허리춤에는 종선(棕扇)을 매달았으며 우수에는 한 자루 편괴( 拐)를 들고 있었다.어찌 보면 생사람 잡으러 나선 선무당의 몰골을 한, 이 현란한 차림새의 주인공은 불과 십오륙 세의 소년이었다.호기심섞인 부녀자들의 시선이 쉴새없이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는데도 소년도인은 매우 태연자약했다.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뱃전에 기댄 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소년도인은 사문의 명예회복과 천하양명(天下揚名)의 중차대한 임무를 끌어안고 산을 떠나온 운룡이었기에 지금 매우 많은 생각과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진인도성(眞人道聖)의 일대기를 보면 자고로 행도(行道)의 길에 나선즉, 무슨무슨 도적떼와 마주치고 악당들을 만나 협의의 검을 뽑아 그들을 징계했다는 대목이 숱하게 많다. 그런데 나는 산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나도록 쌀알을 훔치는 쥐새끼조차 만나지 못했으니…… 아아…… 협행(俠行)의 길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던가, 아니면 내 도력이 부족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요즘 도적떼들은 모조리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일까? 답답하기 이를 데 없구나.' 돌연 찢어지는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조용한 선상에 울려 퍼졌다."앙앙……." 동시에 삼십 세 가량의 아낙네 하나가 다급히 일어서며 울먹이는 것이 보였다."이 아이 좀 봐주세요! 누가, 누가 빨리 좀……." 옷고름도 채 여미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던 듯했다.그녀의 품에 안긴 이삼 세 가량의 아기는 찢어질 듯이 울고 있었다.우는 아기의 입가로 허연 수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허어…… 저게 무슨 변괴인가?" "급체인가? 저런, 저런…… 수액 속에 피도 섞여 있다." 운룡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그때 사십대의 거상꾼 하나가 느닷없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도사님, 어서 저 아이를 좀 봐주시구려!" 사람들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도사님이 계셨군. 어서 이쪽으로!" "도사님!" 대저, 이 시대의 도사들은 태반이 약간의 의술(醫術)을 지녔던 터, 개중에는 도력(道力)과 의술을 혼합하여 죽은 자도 살린다는 명인도 있었다.하지만 강제로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아기의 앞으로 다가선 운룡은 일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도대체 자신이 의술에 대해서 무엇을 안단 말인가? 부글부글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아기의 맥(脈)을 엉겹결에 짚긴 했지만 들리느니 맥박소리요, 짚이느니 병은 틀림없는 병이라는 것뿐!  "병…… 병이군요." 소년도사의 얼굴이 붉어졌다.'제기랄! 나타나라는 도적떼는 안 나타나고 이게 무슨 경천동지할 괴변인가?' 바로 그때였다. 홀연 이를 데 없이 희고 고운 손 하나가 스르르 아이의 맥문을 짚어왔다.손을 덮고 있는 장포는 쳐다보기조차 눈부신 백의(白衣)였고, 옷자락을 살며시 더듬어 올라가자니 빼어난 자연석처럼 차갑고 섬세한 목덜미가 시선에 들어왔다.그리고 한 송이 꽃잎인 양 붉디붉은 입술이 나풀거리는 것이 보였다."이것은 궐음병(蹶陰病)이라는 것이오." 귀공자(貴公子).이제 나이 십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마치 인형처럼 빼어나고 수려한 이목의 귀공자였다.그는 수중의 무릉선(武陵扇)을 한가롭게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양기(陽氣)가 위로 올라가고 음기(陰氣)가 아래에 남아 음양의 기가 제각기 떨어져서 교역되지 않을 때 수족(手足)이 궐냉(蹶冷)되는 것을 궐음병이라 하오." "오오……." "이는 상열하한(上熱下寒)의 상(狀)이 있고, 복부에 작열한 통증이 있으며 배가 고픈 것 같으면서도 먹을 수 없소. 먹게 되면 바로 토하오. 토물(吐物) 속에 피가 섞이는 것은 과거에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오."  말과 함께 귀공자는 수중의 섭선을 아기를 향해 가볍게 부쳤다.그러자 자지러질 듯이 울어대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며 이내 쌔근쌔근 잠드는 것이 아닌가? 귀공자는 아이의 모친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읍내로 들어가거든 곧장 대황(大黃)을 섞은 순기제(順氣劑)를 먹이도록 하시오. 사군자탕(四君子湯)이나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이 좋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운룡을 비롯한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실로 신묘한 의술이요, 비범한 풍도가 아닌가? 귀공자는 운룡의 옆을 스쳐 지날 때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웃음[笑]. 마치 봄볕에 송화(松花)가루 터지듯 밝고 천진한 웃음이었다.게다가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박속처럼 희고 깨끗했다.운룡은 제자리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했다.'사내의 웃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귀공자의 모습은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답게 보였다.그러나 운룡의 시선이 쉴새없이 가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쪽 뱃전에 기대어 선 귀공자는 다시는 운룡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그런 와중에도 배는 쉬임없이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용주와 협성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수(淇水)는 말미에서 황하(黃河)의 한 강줄기로 이어지는 큰 강이었다.배가 강심쯤에 이르자 주위의 경색은 가히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변했다.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것은 종남삼십육봉(終南三十六峯)의 자태요, 강의 양안에는 붉은 화강절벽이 우뚝 치솟아 있었다.절벽의 사이사이 휘늘어진 천 년 덩굴 새로는 원숭이떼들이 무리지어 뛰어넘으니, 양쪽 강 언덕의 원숭이 소리는 끊임없고[兩崖猿聲啼不佳], 가볍게 이 몸 실은 배는 산과 산을 지난다[輕舟己過萬重山]라고 읊은 이백(李白)의 시구에 정녕 합당한 모습이었다.이때 문득, 저 멀리 강의 하류쪽으로부터 느닷없이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조타수가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며 무심히 중얼거렸다."이 시간에 상류로 배를 저어오다니…… 무슨 미친 짓일까?"  배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그것은 순식간에 거룻배와 삼십여 장의 간격을 두었는데, 배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조타수의 입에선 한소리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맙소사! 저것은 생사선(生死船)이다!" 한가로이 졸거나 앉아 있던 거상꾼들은 이 한소리에 자지러질 듯 놀라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생, 생사선?" 다가오고 있는 배의 돛대에 꽂힌 두 개의 기(旗).하나는 먹물 같은 검은 바탕에 섬뜩하도록 흰 해골 문양과 생사(生死)라고 쓰여진 두 글자가 양각(陽刻)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핏빛처럼 붉은 바탕에 줄 수(授)자가 음각되어 있었다.그리고 그 배는 몹시 컸다.가까이서 보니 배는 거룻배의 열 배는 족히 되어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아래에서 보자니 위쪽의 선창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배의 양편으로는 오십여 개의 긴 노(櫓)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거상꾼 중의 한 사람이 다급히 외쳤다."붉은 깃발에 쓰인 글자가 줄 수(授)인가 받을 수(受)인가 빨리 확인해 봐라."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줄 수요." 순간 거룻배의 거상꾼들은 일제히 머리 위로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만세!" "만세!" 이렇게 되자, 어리둥절해진 운룡은 다급히 옆에 있는 거상꾼을 붙잡고 물었다."왜 만세를 부르시오? 저 배가 당신의 친척이라도 되오?" 거상꾼은 운룡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 실소를 흘렸다."보아하니 칼 찬 양반이…… 그래, 생사선을 모르시오?" "생사선?" "생사선은 황하 일대에서 가장 큰 악명을 날리는 수적(水賊)떼요. 그 세력은 강호의 일개 문파를 능가하고, 그 힘은 천하의 으뜸일 것이오."  운룡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수적? 그렇다면 도적이 아니오?" "그렇소." '오오…… 기회는 왔다!' 운룡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그런데 당신은 왜 만세를 부르시오? 도적이라면 당신의 돈을 강탈해 갈 것이 아니오? 돈을 잃는 것이 그리도 좋소?" "그것은……." 거상꾼이 막 말을 이으려 할 때, 돌연 멀리서 징소리가 들렸다.징― 일성 거대한 징소리가 수상의 정적을 자욱이 찢었다.동시에 생사선의 선창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한데 최선두에는 엉뚱하게도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수레 하나가 나타났다.마치 삼국시대의 공명(孔明)이 탔던 일여평교자(一與平橋子)와 유사한 모양을 한 그 수레에는 한 명의 혈의청년(血衣靑年)이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그는 매우 깨끗하고 단아해 보였다.옷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았고, 일신에 걸친 모든 장식은 최고의 호화로운 것이면서도 격조높은 우아한 것들이었다.이러한 사람이라면 천만인 속에 섞여 있어도 능히 눈에 띄리라.혈의청년의 좌측에는 표범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친, 날렵하게 생긴 미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별빛 같은 두 눈과 허리 아래까지 찰랑찰랑한 긴 흑발이 야생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녀는 대리석처럼 흰 두 다리를 내놓은 보기 드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이 수려한 일남일녀의 좌우로는 일률적으로 혈의(血衣)에 혈건(血巾)을 두른 대한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생사선과 거룻배의 거리는 십여 장 정도.이때 피의미소녀가 백옥 같은 우수를 높이 쳐들었다.순간 우측에 서 있던 혈건인(血巾人)들이 일제히 허리춤의 대감도(大坎刀)를 빼들었다.챙― 창― 이어 그들은 십여 장의 허공을 비조처럼 날아 내려와선 뱃전에 몸을 세웠다.삼엄한 도광(刀光)이 일순 거룻배 위의 허공을 자욱이 뒤덮었다.피의미소녀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긴말하지 않겠다! 황하 일대를 지나는 자들은 본 생사선의 주머니를 한 번씩 견식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거상꾼들은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여 일제히 소리쳤다."마땅히 알고 있소!" 그때 뱃전에 쭉 둘러서 있던 혈건인들이 느닷없이 한 개씩의 가죽주머니를 배 위에 내던졌다.찰그랑! 철컹! 묵직한 둔음으로 미루어 보아 돈이 가득 든 주머니인 것 같았다.피의미소녀가 다시 외쳤다."목숨이 아깝거든 그 돈을 가져가라! 그렇잖으면 이렇게 만들어 준다!"  휘이잉! 한소리 파공음과 붉은 광채가 이는가 싶더니 돛대 하나가 와지끈 부러져 나갔다.일개 아녀자의 손속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장풍이었다.거상꾼들은 희색이 만연하여 급히 가죽주머니를 주우려 했다.바로 그때 날카로운 일성과 더불어 번쩍 나타난 이가 있었다."잠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그곳엔 한 명의 소년도사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운룡! 그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는 수중의 편괴를 쿵쿵 찍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실로 요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로다! 어찌 백주대로에서……."  하나 이때 그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백주…… 대로에서……." 원래는 도적질이냐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한데 언뜻 떠오르는 생각! 저들은 돈을 뺏기는커녕 오히려 가져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백주대로에서 돈을 주느냐고 하기도 이상하고, 남이 주는 돈을 왜 주느냐고 따지고 들기도 이상했다.'아아…… 빌어먹을, 도대체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늘은 하고많은 도적떼를 다 놔두고 왜 하필 저런 괴상한 도적떼를 만나게 했단 말인가?'  그때, 피의미소녀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해 화살처럼 꽂혀왔다."후랑말코도사, 할말이라도 있는가?" "그것이…… 저…… 백주의 대로인데…… 대로는 큰길을 말하고…… 사실 이곳은 강인데……." "무슨 소리야?" 운룡이 궁색한 답변을 이리저리 더듬자 피의미소녀는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흥! 본 생사선은 일수일수(一授一受)의 법규가 있다. 즉, 한 번은 주고 한 번은 뺏는 것이다. 개코도사, 너는 이 일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그, 그것이……." "할말없으면 죽엇!"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운룡은 눈앞에서 한 줄기 시뻘건 화염이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휘잉! 피할 겨를도 없었다.쾅! "으악!" 가슴팍에 한 줄기 화염을 안고 운룡의 몸이 퉁기듯 거룻배의 저쪽 끝으로 나뒹굴었다.쿠당탕! 피의미소녀는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흥! 실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것이 설치고 다녔군." 그녀는 거상꾼들이 주춤주춤 돈주머니를 줍는 것을 보고는 또다시 좌수를 번쩍 쳐들었다.휘휘휙! 순간 혈건인들이 생사선 위로 날렵하게 뛰어오름과 동시에 생사선의 거대한 몸체가 반대쪽을 향해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촤아악! 그것은 이내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생사선이 사라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우르르 운룡의 주위로 모여들었다.그의 몰골은 비참했다.도관은 깨어져 나뒹굴었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데다 입가에는 한 줄기 검붉은 선혈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그는 죽은 것 같았다."쯧쯧…… 그러게 왜 느닷없이 나서누……." "글쎄 말이야.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사람이 객지횡사로군." 이윽고 배가 저편 강가에 닿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내렸다.누구 하나 운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사실 이런 일은 누구보다도 빨리 잊어버리는 쪽이 좋았다.거룻배의 조타수는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나자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에잉…… 팔자에 없는 시체 하나 치우게 생겼군." 그가 막 운룡의 시체를 안아 들려고 할 때, 홀연 담담한 목소리 하나가 그의 뒷덜미에 부딪혀 왔다."그냥 놔두시오. 건드리면 큰일나오." 조타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언제 온 것이지?' 그의 옆에는 아까 신묘로운 의술을 보여주었던 백의귀공자가 의혹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큰일나다니요?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일이 사람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쉬잇……." 백의귀공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운룡의 맥문을 짚었다.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의혹의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심후한 내력도 아닌데…… 팔성(八成)의 혈사기공(血邪功)을 맞고도 살아 있다니, 괴사(怪事)로다." "살아…… 있어요?" "맥이 뛰고 있소. 보시오.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지 않소?" 그렇다. 운룡의 창백한 얼굴로 어느새 붉은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그로부터 반각쯤 지났을 때 운룡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끄응……." 운룡은 처음엔 좀 얼떨떨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탄식을 터뜨렸다."무림엔 과연 기인고사(奇人高士)가 많구나. 내 생전 그런 무서운 장풍은 처음 본다." 그의 도포자락의 앞가슴 부분이 누렇게 그을려 있었다.아깝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되뇌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를 향해 백의귀공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생사선 생사이독(生死二毒)의 혈사기공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난 사람도 아마 처음일 거요." 운룡은 그제야 그를 알아본 듯 어! 하는 외침을 터뜨린 후 겸연쩍은 어조로 말했다."아까 그 여자가 생사…… 이독이오?" "화독(花毒) 혜혜(慧慧)이오. 그 옆의 혈의청년은 혈독(血毒) 혜공(慧拱)으로서 그들은 근자에 호북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신진기수들이오. 그 수법은 백 년 전 중원제일독문(中原第一毒門)이었던 만사문(萬邪門)의 것이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일컬어 의도(義盜)라고도 하오." "호오……." "흥!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들은 단지 천한 도둑떼일 뿐이오. 줄 수(授)자의 깃발을 달 땐 그들은 일부러 작은 배를 고르오. 대신 큰 배를 발견하면 받을 수(受)를 다는 것이오. 명성을 높여 보겠다는 얕은 수작이오." "그렇구려." "아까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하다 그만 당신을 독수(毒手)로부터 구하지 못했소. 어디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소?" 박속처럼 고운 치아에 또다시 웃음이 맺혔다.운룡은 그의 모습에 눈이 부셔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은 것 같은데…… 맞는 그 순간 의부의 말씀을 떠올렸기 때문이오."  "의부가 무슨 말씀을 해주셨소?" 호기심에 질문을 하고는 백의귀공자는 내심 아차 싶었다.타문(他門)의 무예나 가전(家傳)에 대해 묻는 것은 무림의 금기(禁忌)였기 때문이다.그런 것은 애초에 묻지도 않고 또 대답하지도 않는 법.하나 운룡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활달하게 웃으며 말했다."천기대나인신공이지요. 의부께선 사람과 겨룰 때 되도록이면 맞으라고 하셨소. 나는 그 말씀대로 했을 뿐이오." 백의귀공자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천진한 표정과 가식없는 태도, 세속의 물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은 사람이로구나. 어떤 내력을 지녔을까? 천기대나인신공이란 것도 처음 들어보는 무공이다.'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러고 보니 명문(名門)의 도제인 듯…… 소생은 남해(南海)의 옥수(玉秀)라 하오. 귀공은?" "핫하…… 빈도는 무당파 제삼십칠대장령인 운룡이오. 금번 사문의 명을 받아 대봉황천의 사해대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중이오."  "무당파?" '갈수록 의혹투성이로군. 그리고 무당파는 망했다. 백 년간이나 제자를 맞지 않아 모든 무예는 절전되고 인재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런 무당파가 언제 이런 기이한 인재를 키워낸 것일까?' 하나 백의귀공자 옥수는 이내 흉중에 이는 의문을 털어버리고 싱긋 웃었다."운형, 소제도 실은 사해대검회에 가는 길이오만 중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 그는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곧 말을 꺼냈다."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비무대회까지는 앞으로 보름이 남았소. 외람되오만 운형이 소제를 마다 않는다면 우리 십삼 일 후에 제남부(齊南府)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운룡이 마다할 리 있겠는가? 그는 내심 크게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본 옥수는 낭랑하게 웃으며 몸을 날렸다."그럼 십삼 일 후 그곳에서……." 슈욱― 크게 몸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옥수의 신형은 수십 장 밖을 날아갔다.그 뒤로 문득 한 장의 낙엽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