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미네르바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12신 중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로마식 이름이다.
아테나는 늘 부엉이와 함께 다닌다.
부엉이가 신의 사자요 전령인 셈이다.
그녀의 부엉이(또는 올빼미)는 특성상 밤에도 깨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지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아오른다'라고 말했다.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역 사적인 조건을 고찰하여 철학적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혹은 황혼을 '지혜와 철학이 본격적으로 필요할 때는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고 인간성이 사라져갈 때'라는 해석도 있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사건이 다 지난 후 "아하 그래서 그랬었구나!" 하는 뜻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심리학의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어려울 때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그 생각의 내용은 그림인가,
문장인가?
우선 아버지에 대한 그림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모습들, 웃는 얼굴이나 야단치는 모습
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문장은 그다음이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가 있다.
문장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에디톨로지 본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진 다음에 난다'라는 헤겔의 주장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논리적 사유는 항상 2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 한다.
그래서 성찰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은 비겁할 수밖에 없고
치열한 싸움이 다 끝나고, 해가 진 다음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
비겁함은 지식인의 존재적 본질이다.
회화에서 '객관적 재현'이란 '주관적 시선'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다들 의심하던 이 같은 '벌거벗은 임금님' 문제를 본격 제기한 것은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이에 관한 학자들의 본격적인 토론은 수십 년이 지난 20세기 후반에나 이뤄진다 그래서 예술이 위대한 거다.
해가 진 다음에야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학자는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다르다.
먼저 느끼고 먼저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무모하고 학자는 비겁한 거다.
에디톨로지 본문
"예술가는 무모하고 학자는 비겁한 거다."
예술가는 용감하고 학자는 신중하다로 보는 게 둘 다에게 좋을 듯하다.
예술가는 주관적 사고를 할수록 유일함의 특권을 가진다.
학자는 어떤 현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야 의미가 분명해지는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이 제기한 문제를
비록 수십 년 후에야 학자들의 본격적인 토론이 이루어진다 해서
비겁한 지식인으로 매도하기는 좀 억지이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좀은 우유부단하게 여겨졌던 지식인들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
또한 무모하다 여겨졌던 예술가들의 사고도 이해된다.
김정운 교수님의 창조적 사고에 소심한 반기를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