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아가페)
요일4:7-21, 3:13-24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는 말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이신가를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반대로 사랑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감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움, 증오, 기쁨, 연민, 슬픔 등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와 같은 자연계시적인 부분을 넘어선 특별계시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뛰어 넘은 완전 다른 차원과 의미를 갖고 있다. 불신자들도 사랑을 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사랑, 가족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동료나 국가에 대한 사랑 등 사랑의 영역은 인간의 삶 전체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곧 구원의 완성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가페는 언제부터 있었으며 시작은 무엇인가?
삼위의 하나님들로 존재하셨을 때는 하나님들은 사랑(아가페)이 아니셨다. 삼위의 하나님들께서 한분 하나님으로 일체가 되셨을 때 아가페가 생겼고 시작되었다.
요17:23-24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삼위의 하나님들이 한 분 하나님이 되신 것을 사랑(아가페)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 사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아가페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아가페는 삼위일체의 목적이다.
23절 “나를 사랑하심 같이”
24절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아가페를 위하여 삼위의 하나님들께서 한 분 하나님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창세 전부터”=“세상의 시작에 앞서” 라는 말인데 “시작”(히/카타볼레) “시초, 수태, 기초를 놓음” 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시작은 오직 아가페라는 것이다. 천지만물과 아담을 창조하시는 목적은 아가페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기초는 아가페라는 것이다.
-23절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그들이 완전하게 되도록” “최후의 상태에 도달하다, 완전으로 나아가다, 목표에 도달하다”
구원 받은 우리가 도달해야할 최후의 상태는 무엇인가? 그 최후의 목표는 무엇인가?
아가페이다. 아가페의 기초를 놓으셨으니 그 아가페의 기초위에 완전한 아가페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목표요 구원받은 자들의 목표이다.
구원은 그저 죄사함 받고 믿음으로 나중에 죽어 천국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목표가 천국인 것은 맞다. 그러나 막연히 지옥이 아닌 어떤 파라다이스가 천국이 아니다. 아가페가 천국이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처럼”(히/카쏘드)“-의 방법으로, -에 따라, -이므로, -인 까닭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정체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목표가 아가페이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도 아가페를 완성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아가페인 까닭에 우리도 아가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4절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있는 곳”은 장소 또는 어떤 것,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단순히 위치적으로 어떤 곳으로 이동되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 되는 것을 뜻한다. 즉 아가페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그 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목표를 말할 때 사랑(아가페)을 말한다. 한글 단어가 똑같다고 해서 그 뜻도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악한 자라도 자식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단과 타종교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교육방송에서도 명사들을 통하여 사랑을 들을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그와 같은 것일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표상이다. 아가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한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가페이다. 많은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옮기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신다. 창1:16-17
그 언약은 하나님의 계명인데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아가페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아가페는 그리스도를 완성하기 위한 언약이다. 그 언약은 무슨 언약인가? 히9:18-22 피로 세운 언약이다. 피 없이는 이 언약을 세울 수 없다. 즉 피언약 만이 아가페를 이루는 것이다. -요일3:14-24, 4:18-21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오직 피언약으로 세우는 아가페뿐이다. 우리의 행위를 아무리 깨끗이 하고 바르게 한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실수 허물 잘못을 이기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아가페 뿐이다.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agape)2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이다.
유월절 어린양은 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셨는가? 하나님의 최후의 목표인 그리스도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루는 방법은 오직 아가페 뿐이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머리되신 하나님께서 주인되신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머리로 하여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의 눈이 밝아졌다.
창3: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아담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주체와 시각이 아닌 자신의 주체적 시야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각의 독자적인 주인이 되어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신 언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아담의 자유의지와 인격적 권리에 의한 선택이다. 그 명하신 언약은 피언약이다.(눅21:20, 히9:18-22)
피언약은 피없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멜기세덱의 약속은 피없이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히5:4-10, 12:1-2, 빌2:5-11)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는 아가페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아가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 사건에 나타난다.
창22:1-2“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사랑하는” 히/아헤브
“독자” 히/야히드(유일한)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피언약)로 드리는 것이 아가페이다. 나의 사랑하는 모든 것을 피언약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가페이다.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모리아산은 다윗이 단을 쌓은 곳이며(삼하24:16-18,19,25) 솔로몬 성전의 자리이며(대하3:1) 골고다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권” 하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에서 “데리고”에서 원문에는 “너는 데리고” 인데, 히/:“나 라카흐”이다. “나”라는 히브리어는 “간청과 권고, 청컨대, 제발, 자 이제” 등의 뜻이다.
-왜 어린양은 독생자(요3;16)인가? 독생자는 하나님의 전부를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피언약으로 내놓으심으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셨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즉 만유의 왕, 만왕의 왕이 되심은 그저 되심이 아닌 피언약의 결과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계명을 명하셨다. 새계명은 천국의 계명, 그리스도왕국의 법이다.
요일4:11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6-17 피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멜기세덱과 상관없는 자이다.
-서로 사랑하는 아가페는 서로 십자가(번제)를 지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아가페 피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다.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마16:24-25(10: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계14:4-5 “이 사람들은...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거짓말은 무엇인가?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흠이 없는 자는 누구인가?
요일3:21 “사랑(agape)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예수그리스도와사랑(agape)3
요14:15 아가페의 계명
-호6:6-7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 마9:9-13 – 마태는 ‘긍휼’을 [헬/엘레오스 ἔλεος /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자비, 긍휼]라는 헬라원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를 뜻하는 히브리 언어는 [헤쎄드חֶסֶד]이다. 이 원어는 ‘어머님의 모체, 자궁’을 뜻하는 [레헴 ֶחֶמ]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즉 ‘긍휼’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사람이 또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히브리어 ‘알다’의 ”야다”와 헬라어 ”기노스코”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그 지식을 경험적, 체험적, 실천적으로 아는 것이다. 또한 “야다”는 ‘사랑하다’ 라는 뜻이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가페를 원하셨다. 그 아가페는 피언약 피계명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권리를 죽이지 못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아담은 하와와 동침(야다/알게되다)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창 4:1~ 아담이 가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여기서 '얻었다'라는 히브리어로 '카나' 즉 카인이란 이름의 유래는 '소유권'을 뜻한다. 영어로는 '가지다 have'
*아벨 Havel 헤벨의 뜻은 nothing. 아무것도 없다. 無. 비어있다. 아무것도 없다. 텅 빔. 공허. 덧없음.
아담에게 여전히 아벨은 죽고 가인은 살아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신10:12-16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은 여전히 목이 곧아 있음을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창4:25-26 아벨이 죽은 후 다시 아내와 동침하여 셋을 낳는다. 셋은 택함을 받은 자, 대신주다, 다른 씨를 주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약한자. 무기력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이다.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하나님의 이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로소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애(긍휼)를 원하고” 하나님의 인애하심 같이 그 인애가 이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흐르기를 원하신다.
마22:34-40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5:21-24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가페하는 것이다. 아가페는 피흘림으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아담이 어긴 언약은 피언약이다. 언약이 피흘림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