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내(水內)
상수내, 하수내, 삼포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마을 유래
1) 상수내(上水內) : 마을 곁의 냇물이 마을을 안고 있는 듯하여 “물안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수다리(水多里)라 하였다. 300여 년 전 진양하씨가 마을을 열었다.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빼재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삼포·하수내·신기골터·상수내·빼재 같은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다.
□ 산천지명
◦ 절골 : 삼포에서 북서쪽 2km 지점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 빼재(秀嶺)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에서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를 잇는 고개로, 높이 920m이다. 빼재가 있는 지역은 과거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이들의 뼈를 묻어야 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뼈’가 ‘빼’ 소리가 되어 빼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빼재의 다른 이름은 수령(秀嶺)이다. 경관이 빼어나다는 의미로 빼재라고 불렸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할 때 ‘빼어날 수(秀)’를 써서 ‘수령(秀嶺)’이 되었다고 전한다. 빼재 정상에서 거창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오른쪽 작은 휴게소 옆으로 가면 한자로 ‘수령(秀嶺
)’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신풍령(新風嶺)은 빼재에 포장도로가 놓이고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생기면서 불리게 되었는데, ‘신풍령’은 추풍령에서 모티프를 얻어 지은 이름으로 전해진다. 현재 신풍 고개에는 국도 37호선 빼재 터널이 지나고 있으며, 고갯길에는 터널 개통 이전에 사용되었던 구 국도가 지난다.
◦ 짚은재 : 큰재라고도 하며 북상면으로 통하는 잿길이다.
◦ 선바위 : 빼재 중턱에 서 있는 높이 6m, 넓이 3m의 큰 바위이다. 옛날에는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도사가 한 개를 뽑아서 상수내에 다리를 놓고 나머지도 뽑으려하니 바위에서 피가 흘러내려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핏자국이 있다 하며 다리를 놓은 바위는 물에 떠내려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 호랑이 사랑바위 : 빼재 남동쪽 살구지 골짜기의 동쪽 산중턱에 있다. 큰 바위들이 엉키어 있는 너덜로써 옛날 호랑이들이 그 바위에 모여 놀았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고, 지금도 그 바위너덜 밑에 몇 사람씩 몸을 숨길 수 있는 틈이 여러곳에 있다.
◦ 살구지 : 상수내 북쪽 1km, 길가의 펀펀한 골짜기이다. 옛날 호랑이가 사랑바위에서 놀다가 밤이 되면 근방 마을에 내려와 개를 물어 갔다고 하여 살구(殺狗) 진 골이라 한다.
◦ 역적골 : 삼포마을 서쪽 3km 떨어져 있는 뒷 골짜기다. 옛날에 도적들이 떼를 지어 이 지방 백성들을 약탈하며 살았던 곳이라 한다.
◦ 칠목재 : 수내골에서 서쪽으로 북상면 소정리로 넘는 고개길이다.
◦ 각시쏘 : 수내 북서쪽 1.5km 떨어진 곳에 빼재에서 흐르는 개울에 있다. 어른들과 뜻이 맞지않는 며느리가 빠져 죽었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 마을의 문화자원
◦ 영모정(永慕亭) : 개명리 물안실에 있다. 경주인 김만준(金萬浚)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들어온 이래 대대로 살아오다가 후손들이 선조를 사모하여 1921년에 지었다.
정자는 목조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규모는 정면 측면 각각 한 칸씩으로 되어있고, 최근에 후손들이 재물을 마련하여 보수를 완료하여 모습이 새로워 졌다. 건물의 좌향은 ‘경(庚)-신(申)’ 방위로 정동향에서 북쪽으로 15° 치우친 자리에 앉아있다. 이는 산줄기가 내려오는 방향을 따라서 지은 때문이다.
정자 안에는 1919년 덕은 송증헌이 지은 <영모정기(永慕亭記)>, 1921년 연안(延安) 이조영(李祚永)이 지은 <상량문(上樑文)>, 그리고 후손 준희의 <영모정 원운(永慕亭原韻)>, 선희의 <영모정운(永慕亭韻)>, 종희(宗熙)·경희(景熙)·상희(相熙)의 <추모의 느낌(追感)> 등의 판상시가 걸려있다. 처마 밑의 편액은 덕은(德殷) 송재건(宋在乾)이 대자 해서체의 힘찬 휘로를 새겼다.
◦ 상수내 유물산포지 : 유적은 고제면 농산리 삼거리에서 좌측 북서쪽으로 무주로 가다보면 상수내마을이 나오는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쪽 밭에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유적의 남서쪽에는 북서-남동향으로 흐르고 있는 신기천(新基川)이 있고 협곡에 해당한다. 이곳은 해발 530m 전후의 비교적 고지(高地)에 해당하는데 주변에 특별히 채집토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유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 봉화대성지(烽火臺城址) : 봉화대성지는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삼포마을 뒷산(해발 861M) 정상부의 평탄지를 감싸고 있는 테뫼형 산성이다. 산성이 있는 산은 북상면과 고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덕유산 국립공원의 고산들이 바라다 보이고, 동으로는 거창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727번 지방도가 내려다 보인다. 산정에는 헬기장이 축조된 다소 너른 평탄지가 있으며, 그 주변으로 더 넓게 형성된 부분이 남아 있고, 이 곳을 둘러싸고 있는 토축의 성벽이 남아 있다. 주민에 의하면 옛날부터 봉화를 올려 금귀산봉수와 연락되었다 하나, 금귀산 방면으로는 눈 앞에 해발 940m의 붕우리가 가로막고 있어 불가능한 것 같다. 임진왜란때 성을 쌓고 왜적에 대항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하수내 유물산포지 : 유적은 상수내마을에서 남동쪽 직선거리로 약 500m 떨어진 하수내마을 안쪽 제실 뒤편의 구릉 하단부에 위치한다. 하수내마을은 동서, 좌우편으로 저평한 소구릉이 도로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이 중 북서편 구릉 하단부의 경작되는 밭에 다수의 토기편이 채집된다. 서쪽 구릉 일대에 지표조사를 하였으나 별다른 흔적은 관찰할 수 없었다. 상수내유적과 더불어 전북과 인접한 고지에 위치한 유물산포지라 할 수 있다.
◦ 갈산재 : 하수내 마을 뒤에 있다. 거창 신씨의 재실이다.
□ 마을의 전설
◦ 빼재 유래 : 옛날 무주 구천동 산골마을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배가 점점 불러왔다. 부모들이 딸을 다그쳤으나 처녀는 한결같이 부정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마을 사람들 보기가 창피하여 바깥출입을 일절 하지 않았는데, 열 달이 지나 아이를 낳으니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날 때 보니 겨드랑이에 은빛 비늘이 있었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를 가지고 병정을 만들어서 진을 짜서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고, 산에 올라 천문지리를 연구하기도 했다.
아이의 이런 행동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있던 중, 하루는 탁발을 온 스님이 아이를 보고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어미가 된 처녀가 물으니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마을에 큰 화가 닥쳐 마을 사람 모두가 죽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이 소리를 들은 처녀는 고심을 하며 아이를 바깥에 내보내지 않고 집에만 있게 했는데, 이 소문이 밖에까지 알려져서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죽이려고 집으로 와서 아이를 칼로 베었으나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아이 어머니를 보고,“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하니 아이의 어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고민을 하고 있으니, 아이가 “내가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나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겨드랑이 밑에 돋아난 은빛 비늘을 빼고는 뒤편 산속으로 들어가서 흔적을 감추었다. 아이가 사라지자 마을 앞의 용소에서 용마가 솟아나와 산을 넘어갔는데 이때 용마가 내뺀 곳이 빼재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 마을의 민속신앙
◦ 상수내는 마을 서북쪽 1km 지점에 500년 가까이 되는 소나무와 북쪽에 700m 지점에 있는 자판과 마을 입구에 있는 조산을 당산으로 하여 보름날 당산제를 올렸으나 70년대부터 당산제를 올리지 않는다.
제관은 한달 전에 선정했으며 제기는 마을에서 사용하는 전용제기로 했고 제관이 제물을 마련했는데 명태, 백떡, 나물을 제수로 썼으며 돼지는 잡지 않았다.
삼일 전에 제관집과 우물 그리고 당산 세 곳에 금구줄을 치고 열 나흘 날 밤에 제관은 밥을 지어서 뒷당산으로 가서 자정이 지나면 제를 올렸다.
기우제는 마을 옆 삼지소라는 개울에서 올렸는데 돼지의 목을 찔러 피를 뿌리고 제를 올렸으며, 제를 지낸 후 그곳에서 돼지를 삶아 나누어 먹고 마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