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기이한 출생 (6)
여러 해가 지났다.
주선왕(周宣王)은 화살통을 파는 여인을 죽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언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周)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선왕 43년(BC 785년)의 일이었다.
그 해 왕실에 큰 제사가 있었다.
주선왕(周宣王)은 제사 준비를 하느라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제사를 지내기 전 날 밤, 목욕재계하고 재궁(齋宮)으로 들었다.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주선왕(周宣王)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사방은 적막하고, 천지는 깊이 잠들었다.
한순간, 주선왕(周宣王)은 재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한 여인을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재궁(齋宮)은 왕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금지구역이다.
주선왕은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무엄하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그러나 여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주선왕을 향해 다가왔다.
"아무도 없느냐? 당장 저 계집을 쫓아 내어라!"
빗소리 때문인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은 주선왕 앞까지 다가와 크게 웃어제꼈다.
"호호 호호호..."
"뭣하는 짓이냐?"
웃음을 그치는가 싶자 이번에는 간장이 끊어질 듯한 통곡을 세 번 해대는 것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울음을 멈추자 여인은 벌떡 일어나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선왕(周宣王)은 여자 뒤를 쫓았다.
그러나 숨이 가쁘고 쓰러질 것만 같아 걸을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왕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한바탕 꿈이었다.
주선왕(周宣王)은 가슴이 떨리고 마음이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우 그날 밤을 재궁에서 보내고 다음날 제사를 마친 후 조정으로 들어왔다.
"태사 백양보는 어디에 있는가?"
백양보(伯陽父)가 나타났다.
주선왕은 꿈에서 본 여인에 대해 자세히 들려준 후 물었다.
"이게 무슨 징조요?"
백양보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왕께서는 3년 전의 동요와 늙은 궁녀가 낳았다는 계집아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 신은 여자로 인해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아뢰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점을 쳤을 때도 그 점괘에 웃다가 운다는 복사(卜辭)가 있었습니다. 어젯밤 왕께서 그러한 꿈을 꾸신 것은 아직 요기(妖氣)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일은 그 당시 완전히 끝낸 것으로 아는데.... 계집아이는 강물에 빠져 죽고, 화살통을 파는 여자는 잡아 죽이질 않았소?"
"신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집아이가 죽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천도(天道)는 길고도 멀며, 넓고도 깊습니다."
"시골 아낙 하나쯤 죽였다 해서 어찌 요기(妖氣)를 완전히 물리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그 시골 아낙은 이번 일과는 무관한 듯싶습니다."
"어허, 그때 그 일이 지금에 와서 다시 거론될 줄이야. 대관절 어떻게 해야 좋겠소?"
주선왕(周宣王)은 탄식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백양보의 대답은 간결했다.
"늙은 궁녀가 낳았다는 그 계집아이는 요녀(妖女)입니다. 찾아 없애십시오."
주선왕(周宣王)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새삼 간밤의 꿈을 떠올리고는 심하게 몸서리를 쳤다.
당시 계집아이를 찾는 일은 대부 두백이 맡았었다.
그러고 보니 두백(杜伯)은 그 후의 일을 지금까지 보고하지 않았다.
"왕의 명령을 가벼이 여기는 처사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두백을 불러 호령했다.
"강물에 내다버린 계집아이를 수색하란 지가 언제인데, 아직 아무런 보고가 없는가?"
"신이 철저히 수색해보았으나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 계집애가 죽었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더욱이 대부 좌유(左儒)가 화살통 파는 아낙을 체포해 죽였다기에 더 이상 백성들을 놀라게 할 까닭이 없다고 판단하여 수색을 중지했습니다."
두백(杜伯)은 무심코 대답했다.
"죽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증거는 없습니다만....."
"증거도 없는데 감히 멋대로 단정하고 왕명을 소홀히 한 까닭은 그대가 나를 능멸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왕명에 태만하고, 왕을 능멸하는 처사는 오형(五刑)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아는가?"
오형(五刑)이란 주왕조 초기에 제정된 형벌제도로 다섯 단계로 나뉘어 있다.
첫번째는 묵형(墨刑)이라고 해서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문신하는 형벌이다.
두 번째는 의형(劓刑)으로 코를 베는 형벌이다.
세 번째는 비형 (剕刑)이라고 해서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다.
네 번째는 궁형(宮刑)이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옥에 가두는 형벌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는 대벽형(大劈刑)이다.
목을 잘라버리는 형벌로, 참수형이라고도 한다.
대죄인에게만 시행하였다.
주선왕(周宣王)의 싸늘한 음성에 두백은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황공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주선왕의 입에서는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참수형이다!"
".........!"
처음 정청 안에 있던 다른 신하들은 자신들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주선왕(周宣王)은 함부로 신하를 죽이는 왕이 아니었다.
등극 초기에는 '중흥의 군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사해(四海)에 위세를 떨쳤던 명군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직후에 알았다.
"무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장 두백을 조문 밖으로 끌어내 참수형에 처하라!"
주선왕(周宣王)의 서릿발 같은 호령에 신하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사들이 달려들어 넋놓고 서 있는 두백(杜伯)의 두 팔을 뒤로 묶었다.
막 조문 밖으로 끌고 가려고 할 때였다.
"무사들은 멈추어라!"
느닷없이 한 대신이 뛰어나와 끌려나가는 두백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왕께서는 부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외침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대부 좌유였다.
좌유(左儒)는 두백과 절친한 사이였다.
지난날 두 사람은 함께 조정에 출사했다.
두백도 그러했지만 좌유의 인품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다.
- 소나무 같은 사람.
그러한 좌유(左儒)의 목소리가 조정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옛날에 요(堯) 임금은 9년 홍수에도 임금 자리를 잃지 않았으며, 성탕 임금 때에는 7년 가뭄이 있었지만 아무도 왕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천변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거늘, 왕께서는 어찌하여 하찮은 계집아이 하나를 이렇듯 두려워하십니까?"
"만일 왕께서 두백(杜伯)을 죽이시면 백성들은 오히려 더욱 요사한 말을 믿게 되고, 마침내는 오랑캐들까지 우리 주(周)왕실을 업신여길까 두려울 뿐입니다. 왕께서는 두백을 죽이시면 안 됩니다."
여느 때 같으면 좌유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주선왕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그렇지가 못했다.
옛날 일까지 들춰내며 두백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밝힌 좌유(左儒)가 여간 괘씸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너는 친구를 위해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구나. 이는 벗을 소중히 생각하고 임금을 가벼이 여김이로다."
"임금이 옳고 벗이 그르다면 마땅히 벗을 반대하고 임금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벗이 옳고 임금이 그르다면,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 하더라도 벗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즉 왕께서 굳이 두백(杜伯)을 죽이시려거든 신까지 함께 죽이십시오."
본래 주선왕(周宣王)은 두백을 죽일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좌유(左儒)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대들고 있지 않은가.
주선왕(周宣王)은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두백을 죽이는 것은 지푸라기 한 올 베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여봐라. 어서 두백을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끝내 두백(杜伯)은 무사들에 의해 조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참수당하기 전 두백(杜伯)은 하늘에 대고 외쳤다.
"나는 결백하다. 만일 내가 죄가 있다면 그뿐이겠지만, 만일 내가 죄가 없다면 나는 3년 안에 반드시 왕에게 그것을 알려주겠노라!"
말을 마치고 나서 두백은 목을 내밀었다.
좌유(左儒)는 좌유대로 절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 희망이 없다.
왕실에 대한 희망이다.
망국의 조짐을 보았으리라.
그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좌절되었다.
희망이 사라진 것은 당연하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의욕을 잃는다.
그 날 밤 좌유(左儒)는 방안에 앉아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자결하니, 많은 뜻있는 사람이 두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두백(杜伯)이 죽은 후 그의 가족은 주왕실을 떠나 진(晉)나라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사사(士師)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은 사씨(士氏)가 되었고, 또 범(范)이라는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기 때문에 다시 범씨(范氏)가 되었다.
물론 뒷날의 일이다.
🎓 다음편에 계속.......
<출처 - 평설 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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