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의로운 무인, 유응부(兪應孚) 선생
-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 무신(武臣) 유응부
신지(信之) 유응부(兪應孚, ?~1456) 선생은 조선조의 의인(義人)이시다. 무도하게 단종을 내쫓고 임금에 오른 세조(世祖, 1417~ 1768)는 즉위 후 선생을 동지중추원사에 임명하였다.
1456년(세조2)에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성삼문·박팽년(朴彭年) 등은 유응부와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2품 이상의 무관武官이 칼을 차고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직위)으로 선정하여,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이 의논을 함께 한 사람들이 나중에 생육신, 사육신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 세조는 갑자기 별운검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장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거사를 준비한 다른 사람들은 다음으로 거사를 미루자고 한다. 성삼문과 박팽년
은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자’고 말한다.
그러자 무신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단종 복위 사건의 주모는 성삼문 박팽년이었고, 유응부는 행동책이라 부득이 주모를 앞설 수는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이때 무신 유응부의 의견으로 모였다면?
공모자의 한 사람 김질(金礩)은 일(혁명)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 장인 정창손에게 알렸고, 결국 역모죄로 주모자 6인은 모두 세조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 "이 쇠를 다시 달구어오라."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고 세조가 묻자, 유응부는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세조 지칭)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 김질에게 고발당했으니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라고 말했다.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겼다. 그러자 유응부는 성삼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무사들이 당신 같은 서생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려. 지난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며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이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리고나서 유응부는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굳게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를 지지게 하니, 이내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주; 아마도 이 대목에서, 친국하던 세조의 간담이 서늘해졌음 분명하다.
갑과 을이 뒤바뀌는 반전은 이렇듯 의인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리라.)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http://www.koreahiti.com)
<참고>
선생의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이다. 선생은 키가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하며 활을 잘 쏘아서 세종과 문종이 특히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집안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벼슬이 재상급(宰相級, 2품 관직)에 올랐어도 그의 생활은 지극히 청렴하였다. 밥상에는 고기 한 점 없이 늘 채소와 나물 몇 가지로 찬을 삼았으며, 방에는 문 대신에 언제나 멍석(거적자리)을 발처럼 치고 살았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아우가 하루는 유응부를 찾아와 탄식하듯 말했다.
“형님께서 벼슬길에 올라 이제 재상까지 되셨는데, 어찌 밥상엔 고기 한 점 없고, 방문엔 사철 멍석을 치고 사십니까?”
그러자 유응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녹봉으로 고기반찬을 먹는다면 필시 녹봉 외에 헐벗는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이고, 호화로운 발을 치고 산다면 그 역시 아첨하는 무리에게 뒷돈을 받은 것이라네.”
아우가 말을 잃고 앉아 있자, 유응부가 다시 말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신하된 자의 도리를 지키고, 불의와 야합하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길을 택할 것이네.”
때때로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기에, 처자도 이를 원망하였다. 유응부가 떠나던 날 아내는 슬피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
하였다고 한다.
의로운 삶을 사셨던 선생은 다른 사육신들과 함께 노량진 사육신묘에 안장되어 있다. 아마 오늘도 삼각산과 한강을 바라보며, 이 나라 종묘 사직을 탄식하고 계시리라.
다음은 선생이 남긴 시이다.
간 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다음은 의기 넘치는 선생의 친필 글씨이다.
출처; <다음백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