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제22회 해외한국문학 심포지엄 주제발표
재외동포 문인과 한국문학
-- 캐나다 동포 문학과 유라시아 고려인 문학
김 송 배
(시인. 본 협회 부이사장)
1. 재외동포의 문학과 모국어 사랑
우리 문인협회에서는 해마다 해외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재외동포 문인들과 문학적 교감을 하고 있다. 벌써 올해가 제22회이니 그 역사도 만만치 않다. 또한 재외동포 문인들 중에서 작품활동이 우수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해외한국문학상’도 올해로 제21회를 맞는다.
이러한 사업들은 재외동포 문인들과 더욱 긴밀한 교류를 통해서 우리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디딤돌의 역할을 촉진하기 위한 국가 정책적인 사업을 우리 문인협회가 대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나 재외 한인문학의 발전과 활성화에는 전혀 배려가 없다는 서글픈 기류를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자생력을 획득하면서 한류의 열풍이 세계 각국에서 불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문학도 세계화를 지향하는 연구가 필요하며 국가가 정책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세계 각국에 이주해 살아가고 있는 한인동포들은 고국을 떠나 있지만, 우리 말과 글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물론 현지에서 생존경쟁을 위한 현지어도 사용하면서 생활하는 동포도 많이 있겠지만 대부분 가정에 돌아오면 우리 말과 우리 한글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민 몇 세대가 지나면 어쩔 수 없이 현지어로 생활하면서 현지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고충도 이제는 당연한 생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 재러시아 이민 5세대 작가 박미하일 씨의 작품 「밤, 그 또는 다른 태양」(전성희 번역) 중에서 한 대목을 읽어보기로 하자.
‘그럼 당신이 시인이란 말인가요?’하며 경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언어로 시를 쓰고 있죠?’
‘러시아어로요’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가 당신 모국어인가요?
‘한국어도 제 모국어이지만, 이제는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지요. 젊은이들한테는 별 필요가 없고 늙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세대가 바뀌면서 언어생활과 풍습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문학 창작활동은 당연히 현지어로 바꾸게 되는데 그 이유가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젊은이들한테는 별 필요가 없고 늙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으니까’ 실질적으로 현실 생활에서 모국어는 옛 전설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심각해지는 재외동포들에 대한 모국어 교육과 보급은 재외 공관마다 설치되어 있는 문화원이나 교육원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본국의 국민들이나 재외 동포들의 기대에는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러한 모국어 사랑을 위한 각계의 현지인들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현지 문인들의 모국어 사랑은 각별하다. 현지어로도 창작하지만 가능하면 우리 모국어로 이민생활의 애환이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재캐나다 문인들은 잊혀져가는 우리의 문화와 모국어를 위해서 해마다 전문가를 초빙해서 ‘한국어의 뿌리’, ‘새 맞춤법 해설’ 등을 문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민들도 참석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지난 1985년에는 주캐나다 한국대사관 후원으로 제1회 캐나가 한인 청소년 글짓기 현상모집을 실시하여 한글부문에 「한국인의 긍지」와 영문부문에 「Korea, My Conuntry」등이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각국에 산재한 재외동포들의 모국어 사랑은 현지 교민들과 문인의 노력으로 현지 신문 방송들이 후원하는 각종 행사를 비롯해서 강연회와 백일장 그리고 본국 명사들 초청 간담회, 어떤 지역에서는 한글도서관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2. 재카나다 문인들의 문학 활동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재외동포 문인들의 활동은 어떠한가? 필자는 일본과 조선족 그리고 베트남 문학과의 교류관계에 대하여 문협 해외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로 살펴본 일이 있는데 오늘은 시간관계상 캐나다에서 긍지를 잃지 않고 모국어로 창작하는 문단과 유라시아에서 어렵게 활동하는 문인들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재캐나다 문단 개황
캐나다 문인들의 문학 활동은 1977년 1월 15일, 이석헌 시인이 중심이 되어 권순창, 김영매, 김창길, 문인귀, 설종성, 장석환 씨 등 8명의 문인들이 발기하여 캐나다 한인문인협회를 창립하고 고 이석현 시인을 초대회장에 선출하여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으니 벌써 그 역사도 34년으로 현재 북미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인단체로 성장하였다.
금년 3월에 개최한 2012년도 정기 총회에서 제22대 회장에 이상묵, 이사장에 원옥재 씨가 선출되어 새 집행부를 구성했는데 이상묵 회장이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현재 회원수는 총 120여명으로 토론토 중심으로 몬트리올, 윈저, 밴쿠버, 알버타, 에드몬톤, 캘거리, 매니토바등 캐나다 전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 시, 수필, 평론, 동화, 동시, 번역, 드라마등으로 각 장르별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시분과, 시조분과, 수필분과에서는 매월 정기적으로 합평회를 열고 있다.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함은 인류의 오랜 숙원이다. 그 갈증을 채워주는 것이 예술이요, 그 꿈을 구현시켜 주는 것이 문학이다. 이민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지워버릴 수 없는 예술에의 열망과 우리다운 것, 한국 고유의 미(美)에의 부절(不絶)한 의욕이 모여 캐나다한인문인협회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강령아래 캐나다 문협은 캐나다 정부에 비영리 문화단체로 등록되어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모범단체로서 동포신문에 회원작품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회원작품집인 『캐나다문학』과『영문작품집』을 격년제로 출간하여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민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작년 10월에 출간된『캐나다문학』 제15집은 1977년 제1집 『새울』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어『이민 문학』『이민도시』『옮겨 심은 나무들』로 이름을 달리하다가 1997년 제8집부터『캐나다문학』으로 명명하여 제12집에 이르면서 격년제로 발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캐나다 복합문화 속에 한국문학으로 자리잡고 이방문학과 교류의 장을 넓히자는 목적아래 회원 작품 첫 영역집 『KCWA Literary Collection』을 2007년에 발행하여 작년 5월에 제3호를 발행하였다.
한편 ‘문학공개강좌’와 회원들의 ‘출판기념회’를 주관하고 ‘호반문학제’와 ‘겨울 문학캠프’, ‘문학의 밤’ 등을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2011년부터 동포를 대상으로 ‘문예교실’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의 작품은 거의 신문지상 즉, 문협의 고정란인 한국일보의 ‘문협광장’과 동포신문의 고정컬럼을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으며 한국의 문단에도 개인의 작품집과 회원 작품 합작집 등이 소개되고 있어서 회원들의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캐나다 문협회원들은 캐나다에서의 문학 활동 뿐만 아니라 모국과 미주 전역에 걸쳐 작품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으며 여러 장르에서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들은 이민1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독자에게는 감동을 주며, 후세대에겐 선조들 삶의 발자취와 지혜로 전해질 수 있도록 열심히 살며 생각하며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협회의 회원은 재카나다 문협과 한국일보사가 공동주최하는 ‘신문문예’에 입상하거나 다른 곳에서 이미 등단하신 분을 대상으로 회칙에 명시된 절차를 밟아 입회하여 함께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나. 본국 문단과의 교류
이처럼 장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발전해온 재카나다 문단과 본국 문단의 교류는 어떻게 이루지고 있을까. 이들은 대체로 문학제와 문학캠프 그리고 문학의 밤을 통해서 회원뿐만 아니라, 교민을 위한 교양강좌를 겸한 행사를 마련하고 특징적인 주제를 설정하여 회원들이 직접 강론을 하거나 외부 인사를 초청하여 문학강의를 듣는 문학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1981년(11. 19.)에 토론토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박동규 서울대 교수를 초청하여 한인회 강당에서 「한국 문학의 현대적 특성」이라는 주제로 문학 강좌를 개최하여 본국의 문인들과 직접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1985년(9. 14.)에는 토론토를 방문한 여성 소설가 정연희 씨를 모시고 「문학과 신앙」에 관한 간담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리고 1990년(6. 15.)에는 캐나다 한국청년연합회 주최로 미국 매사추세스 대학에서 강의하던 권민지 문학평론가를 초청해서「80년대 현대문학의 의미」「광주항쟁과 분단, 그 문학의 함수관계」를 주제로 강연을 했으며 1991년(2. 23.)에 캐나다 문협과 토론토 한인YMCA가 공동으로 토론토 대학 교환교수 김영무 교수의 문학 강좌와 그후 몇 차례 회원들의 작품합평회와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으며 다시 1995년(5. 27.)에는 서울 오세영 교수와 영남대 이기철 교수를 초청해서 모국 시인들과의 간담회를 성황리에 개최한 바 있 다.
우리 한국문인협회와 이곳 캐나다와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이번이 3회째 해외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지난 1997년(7. 24.~26.-당시 황 명 이사장)에 문화공보부와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제7회 해외문학 심포지엄’이 토론토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해외동포 문학의 국내 수용과 그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이유식(당시 문협 부이사장. 평론가) 장 호(시인. 동국대 명예교수) 박충도(평론가. 캐나다 문협 회원) 씨 등이 발표를 해서 회원들의 호응을 받았고 여기에서 캐나다 문협이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하고 초대회장 이석현 시인인 캐나다 문협 창립공로를 인정 받아서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6. 21.-당시 신세훈 이사장)에 ‘제14회 해외문학 심포지엄’이 토론토 파크 플라자 호텔에서「남북통일을 앞둔 선비들의 앉음새」를 주제로 해서 윤재천(수필가) 이운룡(시인) 신협(시인) 리헌석(평론가) 씨가 발표를 했으며 캐나다 김영주 회원이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모시 흰 적삼에 푸른 치마 입고
곱게 앉아 있는 당신
열여섯 꽃순이 맞선 보던 날
부끄러워 신랑 얼굴도 못 보았지
세월만큼 억순이 된 그녀
칠남매 시집 장가 들이고
쪼글쪼글 늙어가도 박꽃처럼
곱기만 하네
사랑을 먹고 살아서일까
영원한 꽃순이
사랑합니다, 어머니
캐나다 알버타주 에드몬톤에서 11년째 35명의 회원이 소속된 ‘한인 얼음꽃 문학회’ 5대 회장인 김숙경 시인의 작품 「박꽃」(서울에서 발간된 시집『시월애』에 수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사는 에드몬톤의 시향기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채색하는 시의 본령이 바로 고국에의 회상이며 특히 미수(米壽)를 맞이하는 어머니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에 대한 체험을 소종하게 여기지만, 김숙경 시인에서의 어머니는 고국의 향수에서 발산하는 시적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많은 이미지를 재생하고 있다. 그 ‘몽매간에 그리운 어머니 정겨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에드몬톤 대평원’에 달이 뜨면 어머니를 목메이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처롭기까지 한 사모곡(思母曲)의 형상화는 이 작품 「박꽃」처럼 시적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밖에도 ‘샤스캐치완주 한인문학회(회장 이정숙)’, ‘벤쿠버 한인문학회(회장 반병섭)’, ‘캐나다 한인작가회(회장 이원배)’ 등의 문인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중에는 국내 문학지에 추천된 문인들도 다수 있어서 필자에게 시집 해설과 시집 발간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고 있다.
3. 유라시아 문인들의 문학 활동
유라시아 대륙,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우리 고려인들이 정착하여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글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와 문학을 정립시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연해주에 정착하였다가 강제 이주를 당한 배경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에 한인 13가구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는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가 마주 이웃해 있고 우쑤리강 하구는 조선의 두만강과 합쳐진다. 시베리아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시작된 때는 러시아인들의 흑룡강 왼쪽 지역을 점유한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였다.
우리 한인들이 연해주에 최초로 살게 된 시점은 1860년 북경조약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1863년에는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185가구 999명이었으나 1869년에는 한반도의 북녘에 대기근이 일어나 1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1902년에는 총 3만 2천여 명이 이민하였다.
그후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6만여 명에 달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되기도 했다. 1932년에는 한인학교 380개와 잡지 등 6종, 신문 7종이 발행되어 한인들의 문화의 광장이 마련되었으나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서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약 6천 km)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지배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으나 그들은 한국어 교육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글로 문화(특히 문학)활동을 감행했다. 한글이라는 모국어를 매개로 창작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거대한 소비에트 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에 환원시키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주해온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첫째,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이주된 약 20만 명의 한인과 그 후손들이며 둘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었던 일본 식민통치하의 한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할린에 잔류되었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사람들로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약 20만명, 카자흐스탄에 약10만명 이 거주하는 한인사회에는 우리말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던 『레닌기치』(강제 이주 전까지 연해주(원동)에서 발간된 『선봉』의 후신으로 1990년 12월 31일자로 폐간됨.)는 고려인들의 언론매체였고 고려인들이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지면이었다. 그후 창간된 『고려일보』가 고려인 문학의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유라시아 고려인들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명희의 생애와 그의 문학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 목성(木星), 필명은 적로(笛蘆)(강제 이주 전까지 발행된 한글신문『선봉』에 발표된 작품에는 조생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이며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출생하여 중앙고보를 마치고 방황하다가 3. 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동경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를 고학으로 수학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시창작과 연극 공연을 전개했다.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곡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서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개벽, 1926. 2)·「농촌사람」(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대표작 「낙동」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소련에서는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짓밟힌 고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그 전날 밤」(1925)·「낙동강」(192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개벽, 1925. 6)·「직업·노동·문예작품」(중외일보, 1926. 12. 1~2) 등을 발표하였다.
1928년, 조선 프폴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에 가담하여 이기영, 한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일제의 문인 탄압을 피해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거주하였으며 1938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에 따른 소수민족 지도자 숙청작업으로 총살당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 우리스크, 하바로포스크 등 소련의 원동(遠東)지역을 전전하면서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과 교사, 조선사범대학 교수와 잡지 『선봉』의 문학편집자,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 등의 직함으로 프로레탈리아 혁명문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재소 한인문학의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다룬 「민주 빨치산」을 집필하던 중 1937년, 간첩 형의로 KGB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있는 ‘알리쉐르 나보이 박물관’에 아주 작은 ‘조명희 문학기념실’에 KGB 당국의 사망확인서와 당시의 연행상황을 서술한 러시아어로 된 증명서와 각종 자료 그리고 ‘조명희 육필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볼세비끼의) 봄
륙성 조생
봄! 새 나라에 떨쳐오는 봄
오년 계획 셋째 해의 봄,
하늘에도, 땅에도, 새봄이 나래를 친다
일어 서라! 천먼의 노력 대중아
봄과 한가지 떨쳐 일어서라
굴뚝의 연기도 구름이 되어 날으거던
쇠 깎는 소리도 하늘 우에 용솟음쳐 구르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둘러라, 바퀴를 ! 쳐라, 망치로!
오년 계획을 여기서 넘쳐 하자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가없는 벌판에 햇빛이 뛰놀고
바람도 거기서 손벽을 치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잡아라! 뜨락또르채를, 뿌리라! 새 씨앗을
오년의 열매를 여기서 얻다!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선봉』신문에 실린 전문
그는 위의 작품과 같이 리듬과 운율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력자의 조국』(1937. 2호)에 게재된「로력자의 고향에 실린 시들에 대하여」에서 ‘초기 프로레타리아의 반항적 감정들이 문예적으로 아직 정서화하지 못하고 말이 아직 리듬화되지 못한데서, 작가나 시인들이 아직 기교를 소유하지 못한데서, 정치적 내용이 첫째로 중하기야 더 말이 없지마는, 그렇다 하여서 그것만 중히 여기고 표현하는 기교는 중대하지 않은데서, 건전한 내용은 좋은 기교에 담아 놓아야 선전의 효과가 더 많음을 깨닫지 못한데서 일종의 정치표어나 나열식의 작품들이 많이 나왔었다.--중략-- 개념의 소산인 시, 번역냄새가 나는 시, 다른 민족이 유창하지 못한 고려말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시들이 나타났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짧은 서정시로서 운율과 리듬이 역동적이라서 ‘...하자’거나 ‘....서라’는 들의 청유형 어미를 사용해서 미래지향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포석의 고향 충청북도 진천에는 2003년 10월에 ‘포석문학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시비도 세워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밖에도 타슈켄트, 우주베키스탄 등에서 활동하는 고려인들은 까레이스끼의 눈물어린 모국어를 통해서 소위 삼진(三眞)이라 일컫는 한 진, 리 진, 허 진 시인들의 문학적 업적은 지금까지 그 바탕을 유지하고 있다.
4. 재외동포 문인들과 문학 교류
지금까지 지엽적으로 살펴본 캐나다와 유라시아 재외동포 문인들에 관한 담론으오로는 재외동포의 문학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고 또 이들 만으로 재외 동포문학의 활성화를 말한다는 것도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지의 다수민족에 비해서 우월하지 못한 문화의식을 회복하는 일과 모국의 생활과 향수를 탈피하여 현지 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동화함으로써 현지민과의 차별성과 갈등 등의 요소를 가급적 빨리 해소하야 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코리아 타운이 설정된 재미동포 사회가 바로 이런 난관을 극복하면서 모국어로 생활하고 문인들은 모국어로 창작을 하고 있다. 지난 2000년, L.A.에서 열린 어느 문학 심포지엄에서 당시 재미시인협회 이사장이었던 송순태 시인이 발표한 「북미주 한인 시인들의 시적 관심」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활동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왜 북미주 시인들은 20년, 혹은 30년을 살면서 현지의 삶에 관한 시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떠나온 땅에 두고 있는가. 그토록 조국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토록 모국이 그리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삶에 대한 숙고나 고민없이 그저 ‘시란 그리움이다’는 식으로 관념적인 시를 써내기 때문인가. -중략- 우리가 겪고 있는 이민살이의 삶을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문화적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온 가족이 사투를 벌려야하는가 하면 또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한다. -중략- 북미주 시인들이 망향조의 시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이민살이의 그 고통을 직접 고백하는 것보다 관심을 고국으로 돌려 그리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이민살이의 고충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도 동일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타국에서나마 동일 민족끼리 현지민과 다른 하나의 공동체 생활공간에서 모국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경우와 현지민과 적극 밀착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는 등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교민단체가 있으나 얼마만큼 교민들의 권익과 생활 보호에 노력하고 모국어 사랑에 기여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사절의 경우는 재일 시인 왕수영 수필집『쪽발이 잡은 조센진』에서 명쾌하게 대할 수 있다.
“왕상이 우리 동네 이사왔을 때 나는 겁 없이 호랑이 소굴로 들어온 왕상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동네는 조센진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일본 이름으로 일본 행세를 하며 사는 조센진이라도 우리 동네에는 이사를 안 옵니다. 그런데 왕상은 자기가 조센진(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한국인이라고 하지요)이란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일본인이 숨어서 조센진을 차별하는 것까지도 밝게 끄집어내어 유머로 처리하거나 진지하게 설득하거나 해서 지금까지 차별하는 쪽에 있던 일본인을 스스로 반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동네로 와서 회장을 맡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힘껏 응원하겠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들은 현지사회의 문화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모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본적인 문화의 특성을 대부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중용의 길이라고 연변대학 조문학부 김관용 교수의 논지에 주목한다. 조선족은 한 세기 남짓 중국 이민생활에서 숙명적으로 중국 요소와 모국 요소가 혼재한 이중적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고 피력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배달민족이 영위하는 세계, 이 한국문학이라는 대 계통 속의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또 하나는 중국의 주체민족-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56개 소수민족이 영위하는 중국문학이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조선족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었던 조성일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조선족 문학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 중국 각 시대의 역사적 생활공간에서 이루어 온 문학으로서 모국의 국민과 모국 문학과의 내재적인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하여 왔지만, 조선족 문학에는 중국 사회와 중국 역사적 내용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족 문학이 비록 조선어 문학권에 속하는 다른 문학과는 달리 많은 경우 중국의 역사 변천, 중국의 독특한 사회생활, 중국의 자연 풍경, 중국 국민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가치관념, 도덕규범, 사유 방식, 심리 갈등, 심리 추구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족 문학의 중국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지난 2010년 2월 6일, 명지전문대에서 개최한 “서/타(S.T) 문학 . 교육 국제학술대회”에서 주제를 발표한 유라시아문화포럼 홍태식 명지전문대 교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 문학적인 교류의 현실과 절박한 상황들을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황과 교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고려인 문학은, 이제는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또 다른 불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글 해독 세대가 줄어들고 이주 3, 4세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어 그들이 한글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표기 수단으로만 본다면 이제 멀지 않아 고려인 문학은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이들 고려인 문학과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고려인 3, 4세들이 비록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데까지 그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한국문학을 이해시켜 민족 정체성을 유지케 하고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에 희생되고 억울하게 소외되어 온 고려인을 위로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의 동족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길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우리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적시(摘示)한 바와 같이 고려인 문학과 적극적인 교류 추진의 이유는 바로 ‘민족 정체성 유지’와 ‘한민족의 자부심’ 고양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인 3, 4세들이 한글로 문학을 할 수 없다고 하드라도 그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한국문학을 이해시켜야 한다.
한편 이명재 교수도 ‘새로운 통일문학을 이루는 완충지대일 수도 있는 공간’인 중앙아시아는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의 산 증인인 고려인 한글문단의 주역들을 비롯한 현지어 사용 동포문인들과 더불어 본국의 일선 평론가와 학자들이 자주 고려인 문학세미나 등을 열고 진지하게 접근, 협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문학단체와 국내 각 대학 학회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지엽적으로 일부 관심 있는 학자들과 학회 차원의 자료조사와 의견의 상호교환에 머물고 있어서 본격적인 교류를 통한 모국어와 한인문학의 활성화는 아직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소비에트 사회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2, 3세대들 가운데는 일부 한국어와 러시아어에 익숙한 경우도 있지만, 거의 한국어에 서투른 대신 러시아어를 통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 때문에 한인문학에서도 한글문학이 더욱 열악한 입지를 해소하는 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면서 우리 문화를 계승하고 다시 모국어로 창작하는 재외 문인들의 고충이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외 문인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아직까지 만족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문협과 펜클럽 등의 문학단체들이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사실 지금까지의 문예진흥기금 중에서 ‘해외동포 예술교류 기반구축사업’에 대한 지원은 아주 미미하며 소극적이다. 더구나 문학 관련 교류에는 ‘『미주문학』발간 지원’, ‘재일 민족문학 교류’, ‘『도라지』잡지 발간’, ‘조선족 문학과 예술’, ‘중한문학 비교 연구’, ‘『고려문화』지원’ 등으로는 미흡하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관심이 없고 민간 문학단체에서는 예산타령으로 사업 시행에 어려움을 호소하다보면 재외 한인 문학과의 교류는 차치하고라도 재외 한인문학의 활성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한국문인협회에서는 해마다 해외한국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각국에서 모국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동포문인들에게 ‘해외한국문학상’을 시상하면서 해당 국가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현실적인 교류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특히 조선족) 베트남 호주 독일 등지에서 개최하여 동포문인들과의 교류에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방법은 문협뿐만 아니라, 각 문학단체에서 계획하면 국가 차원의 행정 및 재정의 지원이 뒤따라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재외의 우리 대사관에는 문화원과 한국어 교육원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기관들이 앞장서서 한글과 한글 문학의 보급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서 우리 말과 글로 창작되는 문학작품들이 세계 각국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상묵 : 캐나다문인협회 현황
김송배 : 제17회 해외문학심포지엄(일본) 주제발표문. 2007.
홍태식 :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황과 교류 가능성」2010. 주제발표문
이명재 : 「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2011. 카자흐스탄 문화마당
장사선. 우정권 :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 연구』 2005. 월인
* 이 발표문은 2012. 6. 13. 캐나다 벤쿠버에서 시행하는 문협 해외심포지엄 주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