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청각적 이미지에 대한 매료(魅了)
현대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음악성과 회화성(繪畫性)에 중점을 두고 창작하고 마지막으로 주제를 정립하는 의미성을 강조하는 구조를 살필 수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나는 시의 회화성에서 감응하는 이미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이미지란 마음 속에 그려지는 감각적 영상(映像)인데 이를 심상(心象)이라고 한다. 이는 마음 속에 떠오는 상으로 과거에 경험한 잔상들이 기억에 의해서 재생하고 거기에서 창출된 형상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생애(生涯)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 어떤 현실적인 환경에 따라서 생성하는 체험적인 사유(思惟)는 작품의 훌륭한 전개와 의미성(주제)을 표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들이 하나의 심상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우리 육체가 간직한 감각기능이 예리한 작용을 통해서 투영되는 것이어서 시청(視聽味嗅觸) 등 다양한 기능이 있는데 나는 청각적(聽覺的) 이미지의 활용에 많은 관심으로 작품들을 읽고 있다.
나는 대체로 산촌에서 자랐기에 새소리, 개울물소리, 바람소리, 산짐승 울음소리, 개짖는 소리, 송아지 울음소리와 닭우는 소리 그리고 아침에 까치가 울면 먼곳에서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전언(傳言). 그리고 겨울에 문풍지 떠는 소리, 가을에 돌담 밑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 여름에는 매미들의 합창, 비 쏟아지는 날 천둥소리 등 자연의 소리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소리들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한편 동네잔치가 벌어지거나 민속명절 때는 동네가 축제분위기로 변해서 괭가리와 징, 대북, 소고(小鼓) 등의 한바탕 울림의 흥겨운 소리에 넋이 빠지는가 하면 다르게 동네 초상이 나면 그 가족들이 울부짖는 통곡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무서워했던 기어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장사를 지내는 날이면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처량하게 사자(死者)를 떠나보내는 상여소리, 그리고 농사철에는 이랴이랴 쟁기멘 소모는 소리와 타작마당에 도리깨로 곡식을 털던 소리, 경운기 소리, 정미소 방앗간 소리 등등 청각적 이미지에 남달리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한기팔 시인처럼 평생을 제주도에 살면서 바다와 접하는 것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어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적 이미지에도 관심을 두지만 대체로 바닷새 갈매기 소리나 뱃고동 소리, 파도소리, 해녀들이 휘파람소리와 선창가에서 어부들이 멸치잡이 만선의 그물 터는 소리 등등 청각적인 이미지를 많이 투영하고 있었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추억의 소리들이 있는가 하면 도시생활에 익숙한 시인들에게서는 자동차 소음, 공장 기계소리, 시장이나 백화점 세일 때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 간혹가다가 이웃과 사소한 일로 타투는 소리, 엠불런스 싸이렌 소리 등등이 청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절에 가면 독경(讀經)소리와 목탁과 범종소리, 반야심경이나 관세음보살을 염우너하는 염불소리, 교회에 가면 찬송가와 설교소리 등 그리고 요즘은 노래방에 가서 한 곡조 뽑는 노래소리와 반주기에 흘러나오는 요란한 반주 등도 좋은 이미지로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생하여 작품에 투영하여 시각적인 이미지와 동시에 형상화함으로써 좋은 시 한 편을 창작하게 되는 것이다. 박재삼 시인은 시 「물의 행로」 중에서 “강물이 처음에는/ 산골에서 소리를 카랑카랑 울리더니/ 그것은 예닐곱 살 때의/ 우리들 맑고 시원한/ 노래소리에나 비길 수 있을까”라는 청각적인 소리들이 작품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옛 조선 효종 때 홍만종의 『명엽지해(蓂葉志諧)』라는 책에는 소리의 품격을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 우연히 어느 벼슬아치의 환송 회식에 참석한 정철과 유성룡, 이항복, 심희수 그리고 이정구 등,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다섯 대신들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試題)를 가지고 시 한 구절씩을 읊어 흥을 돋우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그래서 각자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청소낭월 루두알운성(淸宵朗 月樓頭遏雲聲) ‘맑은 밤 밝은 달 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 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만산홍수 풍전원수성(滿山紅樹 風前遠岫聲)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효창수여 소조주적성(曉窓睡餘 小槽酒滴聲) ‘새벽 창 잠 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 가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산간초당 재자영시성(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동방양소 가인해군성(洞房良宵 佳人解裙聲)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아하, 달빛 지나가는 구름 소리, 바람 소리, 술 거르는 소리, 시 읊는 소리 모두 좋은데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오성대감 이항복의 ‘깊은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였다고 한다. 해군성 (解裙聲)이다.
여기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광균 시인의 시 「설야(雪夜)」에서도 ‘첫눈’을 ‘머 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하고 있다. 깊은 밤에 눈 내리는 소리가 시인에게 마치 어둠 속에서 여인이 치마끈을 풀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흘러내릴 때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리처럼 들린 것이리라.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