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11장 19절 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에로 되리라
1-11절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11: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곧 올리브 산 근처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 중 둘을 보내며
직역: 그들이 예루살렘 으로 가까이에 벳바게와 베다니 그 안으로 감람산 가까이 와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신다.
11:1 Καὶ ὅτε ἐγγίζουσι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εἰς
그리고 때에 그들이 가까이 와 있을 으로 예루살렘 안으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Βηθφαγὴ καὶ Βηθανίαν πρὸς τὸ ὄρος τῶν ἐλαιῶν,
벳바게 와 베다니를 가까이에 그 산 그 감람
ἀποστέλλει δύο τῶν μαθητῶν αὐτοῦ
예수께서 보내신다 두사람을 그 제자들을 그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저희가 예루살렘에‥‥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 예수께서는 베레아 지역의 여행(막 10장)을 마치시고 여리고에 들려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후유대의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였다. 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 정도의 거리로서 7시간의 여행 거리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하지 않으시고 베다니에 유숙하시며 안식일을 보내신 것은, 다음 날 메시야로서영광스럽게 입성하는 것과 아울러 바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시게 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감회에 젖어 있고 싶어했던 것 같다.
▣ 한편 본절에는 세 장소가 언급되었는데 먼저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건너편에 있는 해발 800m 정도의 산으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감람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의 도래'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마가는 이 지명을 언급함으로써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고대해 온 메시야임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 같다.
▣ 또한 '벳바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들의 집'이란 뜻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달만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역의 경계 또는 도성의 동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교외 지역이라고 한다.
▣ 그리고 베다니는 '고뇌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 지점에 위 치한 마을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살던 곳인데, 예수의 전 행선지였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 마가가 언급한 장소,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또한 파견된 이 두 명에 대해서도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베데는 베드로와 빌립이었다고 말하고, 얀세니우스는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신뢰하셨고 이 두 사람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으며,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단짝이었다는 점에서 후자의 주장이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또한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나귀의 주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임자가 따로 나오므로 적합한 추론이 아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1: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11: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곧바로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직역: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 안으로 가라. 그리고 즉시 그곳 안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아니하였던 나귀새끼를 너희가 발견 할 것이다. 위로 매여져있는 풀어라 그 나귀를 그리고 끌고 오너라
11:2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ὑπάγετε εἰς τὴν κώμην τὴν κατέναντι ὑμῶν,
너희는 가라 안으로 그 마을 그 맞은편 너희의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καὶ εὐθὺς εἰσπορευόμενοι εἰς αὐτὴν
그러면 곧(즉시) 들어가면 안으로 그곳에 (분사: 현재 중수디 주격 2복)
εὑρήσετε πῶλον δεδεμένον ἐφ᾽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단수)
너희가발견할 것이다 나귀새끼를 매여져 있는 위로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2복)
ὃν οὐδεὶς οὔπω ἀνθρώπων ἐκάθισεν·
바-그것을 아무도-아직아니하였던 사람들의 타보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λύσατε αὐτὸν
풀어라 그 나귀를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복)
καὶ φέρετε.
그리고 끌고오너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 맞은편 마을은 아마도 저들이 그때 접근하고 있었던 벳바게일 것이다.
▣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 본절에 대해 마태는 '나귀와 나귀새끼'라고 표현함으로써 당시 그 나귀 새끼가 어미와 함께 있는 어린 것임을 강조했으며, 누가와 더불어 본문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사용하여 나귀의 순결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나귀 새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로스'는 모든 짐승의 새끼, 즉 어린 나귀뿐만 아니라 망아지를 나타낼 수도 있는 말이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짐승이 나귀 새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나 70인역의 용례나 전시(戰時)에 사용되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나귀 새끼가 확실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기서 '나귀 새끼'란 말이 강조하는 점은 '평화'와 '순결성'이다. 즉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며 구약의 전통이 말하는바 신성한 곳에 사용되는 것은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라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신 것이다, 한편 본절에는 예수의 정체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예수의 신성 (神性)이다. 즉 그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요 1:48). 둘째는 택하신 나귀의․ 상태이다. 즉 그것은 흠이 없고 깨끗하며 완벽한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었을 때나 그의 탄생 때까지 마리아 역시 처녀였다는 사실과 일치하며,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던 무덤 역시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전혀 우연히 아니라 구속사의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질서 정연하며 또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당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1: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 하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11:3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 라고 말하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십니다.' 라고 말하여라. 그러면 그가 즉시 그것을 여기로 보내 줄 것이다."
직역: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너희가 이일을 하느냐? 말을 하거든 너희는 말하라.
주께서 이것을 필요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즉시 그 나귀를 그가 여기로 보내신다.
11:3 καὶ ἐάν τις ὑμῖν εἴπῃ·
그런데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거든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τί ποιεῖτε τοῦτο;
왜 너희가하느냐 이일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εἴπατε·
말하라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복)
ὁ κύριος αὐτοῦ χρείαν ἔχει,
그 주께서 이것을 필요를 가지고계신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εὐθὺς αὐτὸν ἀποστέλλει πάλιν ὧδε.
그리하면 즉시 그나귀를 그가 보내신다 다시 여기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누가‥‥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 구절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그 논쟁의 요지는 여기서 언급하는 '주'(主)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이냐 하는데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첫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호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므로 이 '주'는 나귀의 주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나귀의 주인도 예수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께서 '주'라고 말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셋째, '주'는 메시야로서 예수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모든 일들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리는 그리스도론적인 칭호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소 어색함이 있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 해석 중에 마지막 견해를 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타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은 칭호를 사용한 마가의 의도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주이시며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사실은 또한 당시 예루살렘 주변에는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 본문을 '즉시 그것을 다시 이리로 돌려보내리라'로 이해하면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사용하시고 돌려주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으로 볼 때 나귀의 임자가 나귀를 예수께 보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미래에 있을 나귀 주인이 예수께 나귀를 빌려드릴 일까지 아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11: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11:4 그들이 가서 길 가 문 바깥에 매여 있는 한 나귀 새끼를 발견하고서 그것을 풀고 있었는데,
직역: 이에 그들이 떠나갔다. 그리고 발견하였다. 앞으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문 밖 길거리 위로 이에 그것을 푼다.
11:4 Καὶ ἀπῆλθον
이에 떠나갔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εὗρον πῶλον δεδεμένον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단수)
그리고 발견하였다 그 나귀새끼를 매여있는 앞으로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πρὸς θύραν ἔξω ἐπὶ τοῦ ἀμφόδου
앞으로 문 밖으로 위에 그 길거리의
καὶ λύουσιν αὐτόν.
이에 푼다 그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문 앞거리에. - '거리'(암포돈)는 '모두' 혹은 '둘'과 '길'의 합성어로서 '로타리'나 '교차로'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주도로가 아닌 '뒷길' 혹은 '주변 길'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문 앞'이란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집 안으로 통하는 뒷길 정도로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11: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웬 일이오?"
11:5 거기 서 있던 어떤 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그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직역: 그러자 거기에 서서있는 몇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11:5 καί τινες τῶν ἐκεῖ ἑστηκότων ἔλεγον αὐτοῖς·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그러자 몇사람들이 그 거기에 서서있는 말하고있었다 그들에게 (분사: 완료 수동태 소유격 복수)
τί ποιεῖτε λύοντες τὸν πῶλο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복)
무엇을 하려느냐 풀어서 그 나귀새끼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 -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제자가 거리에 묶여 있던 나귀 새끼를 풀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주위의 어떤 사람이 이유를 묻는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 임자들이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나귀 새끼 주위에 그 임자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로써 예수가 말씀하신 바로 그 위치에 나귀가 있었고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까지 사실로 이루어졌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11: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허락하였다.
직역: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에게 그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허락하였다.
11:6 οἱ δὲ εἶπαν αὐτοῖς
그들이 그러자 말하였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θὼς εἶπεν ὁ Ἰησοῦς,
대로 말씀하셨던 그 예수께서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ἀφῆκαν αὐτούς.
그래서 그들이 허락하였다 그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예수의 이르신 대로. - 제자들이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을 나귀 임자에게 하자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허락하였다. 이것은 저들이 이미 예수를 알고 있었고 그의 권위에 완전 복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로 미루어 예수께서 열두 사도들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예수에 시종들려고 하였던 다른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은 '주가 쓰시겠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예수가 머물 장소이건, 나귀 새끼이건, 또는 무덤까지도 예수께 드리려고 하였다. 오늘날도 역시 주의 참 제자들과 그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헌신과 봉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즉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 등등 이런 일들을 기꺼이, 그리고 어떤 찬사나 타산적인 계산 없이 실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11:7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 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11:7 그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덮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앉으셨다.
직역: 그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에게로 이끌고 온다. 그리고 자기들의 겉옷들을 그것위에 걸쳐 놓는다.
그리고 나귀 새끼 위에 예수님께서 앉으셨다.
11:7 Καὶ φέρουσιν τὸν πῶλον πρὸς τὸν Ἰησοῦν
그래서 그들이끌고온다 그 나귀새끼를 에게로 그 예수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καὶ ἐπιβάλλουσιν αὐτῷ τὰ ἱμάτια αὐτῶν,
그리고 위에 걸쳐놓는다 그것에 그 겉옷들을 자기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καὶ ἐκάθισεν ἐπ᾽ αὐτόν.
그리고 앉으셨다 위에 그것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 히브리인들은 일상적으로 속옷만을 입고 다녔으나 어깨를 덮을 수 있고 소매 둘레가 있는 정방형 천으로 만들어진 겉옷도 지참하여 밤의 한기를 막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겉옷은 쉽게 벗을 수 있었고 본문에서처럼 그것을 나귀 위에 걸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펴는 행위는 존경하는 자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복종을 다짐한다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왕하 9:13에서 왕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자기들의 옷을 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에 있어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에게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경의를 표했다. 이로 보건대 당시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놓았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입성함으로 말미암아 곧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평화와 겸손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제자들이나 당시의 민중들이 기대하였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평화와 겸손의 왕이 심을 선언하셨다.
▣ 예수께서 타시니. - 눅 19:35에는 제자들이 주체가 되어 '예수를 태우니'라고 기록된데 비해, 본문은 예수가 주어로 묘사되어 능동적으로 예수살렘에 입성하심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더욱 생동감 있고 세심하게 나타내기 위 해서 취한 문장 기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11: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11:8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으며, 다른 이들은 들에서 꺾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길에 깔았다.
직역: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들을 길 안으로 폈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명이 나뭇가지들을 꺾은 것을,
그 길 안으로 펼치니라.
11:8 καὶ πολλοὶ τὰ ἱμάτια αὐτῶν ἔστρωσαν εἰς τὴν ὁδόν,
또한 많은사람이 그 겉옷들을 그들의 폈다 안으로 그 길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ἄλλοι δὲ στιβάδας κόψαντες ἐκ τῶν ἀγρῶν.
다른이들이 그리고 나뭇가지들을 꺾은 것을 에서 그 여러명이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복수)
주해
▣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 예수를 환호하는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나온 무리일 뿐 아니라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맡은 무리이다. 이들 역시 예수를 로마의 압제와 정권 잡은 자의 폭정에서 구해낼 메시야로 생각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예수에 대한 예의는 왕으로 추대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바 과거 북이스라엘의 예후도 그가 왕이 될 때 친구들에 의해 이러한 영접을 받았었다.
▣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할 때 사용한 나무 가지가 헬라어로는 각 복음서마다 각기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다. 즉 본서에서는 '잎사귀', '잎이 많은 가지'라는 뜻을 가진 '스티바다스'가 사용되었고, 마태복음에서는 '나무에서 잘라 낸 어린 순'이란 뜻의 '클라두스'가 사용되었다(마 21:8).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종려나무'를 나타내는 '바이아'가 사용되었다(요 12:13).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나무 가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눅 19:36). 따라서 각 복음서들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예수를 환영하던 사람의 일부는 밭에서 베어낸 잎사귀가 많이 달린 나뭇가지로서 길을 덮었으며, 다른 사람은 들에 있는 나무순을 잘라 동일하게 길을 덮었고, 또 다른 일부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예수를 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구절은 당시 민중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분을 왕으로 환영하는 무리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있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분!"
11:9 앞서 가는 자들과 뒤따르는 자들이 외쳐 말하기를 "호산나. 복되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직역:그리고 앞에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말하기를 호산나 찬송을 받으시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분은
11:9 καὶ οἱ προάγοντες
그리고 그사람들이 앞에서 가는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καὶ οἱ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κραζον· ὡσαννά·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그리고 그사람들이 뒤 따른는 소리지르고있었다 호산나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찬송을받으시리로다 이분은 오시는 으로 이름 주님의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 - 마가는 마태의 기록과 같이 이들을 두 종류의 무리로 분명히 구별 지었다. 즉 본절은 무리들을 '앞에서 가는 무리'와 '뒤에서 따르는 무리'로 구분지음으로써 이들이 예수님의 앞과 뒤를 에워싸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예수와 동행하였던 한 무리는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보려고 왔던 무리로서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무리들이며, 또 다른 한 무리는 예루살렘 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온 무리라고 한다. 한편 눅 19:37에서는 이 무리가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가까운 곳에서 모인 무리라고 알려준다.
▣ 호산나. - 이 말은 본래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구하소서'란 뜻의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으로, 하나의 기원문이었으나 점차 종교적 환호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즉 이 말은 장막절과 같은 축제의 기간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갈채,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었다.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유월절에 부르는 찬미시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시 118:26을 인용한 것이다. 즉 이 시편의 구절은 절기를 당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맞아들이는 인사말로도 사용되었으나, 그 진정한 의미는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메시야'를 기다리며 빨리 임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10 "복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였다.
직역: 찬송을 받을지로다. 우리 조상 다윗,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나라여 가장 높은 곳 안에서 호산나
11:10 εὐλογημένη ἡ ἐρχομένη βασιλεία τ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Δαυίδ·
찬송을받을지로다 그 오시는 나라여 그 조상 우리 다윗의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단수)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
호산나 안에서 그 가장높은곳
주해
▣ 우리 조상 다원의 나라. -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마가만의 기록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메시야관을 잘 보여 준다. 즉 그들의 이러한 외침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 왕국의 주체로 인정하고 환영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공의를 실현할 제 2의 다윗왕 정도로 이해한 것이란 점에서 잘못되었다. 또한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도자로 생각했지 실제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할 메시야로 환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참된 목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면과 정치적 해방만을 염두에 두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그래서 이처럼 열성적으로 환영했던 그들이 예수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오류를 범하는 실수와 더불어 반대로 현실적인 상황에만 연결시켜도 과거 유대인들이 예수께 범한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전인격으로 인정하고 모든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혹자는 이 말을 이 땅 위에서 행해지는 무리들의 환호에 대한 하늘에서 행해지는 천사들의 화답송이라고 보기도 하나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당시 군중들의 환호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이란 하나님이 계신 처소를 뜻한다고 볼 때, '하나님이여 이 땅에 다친 왕국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축복이 나타나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직역: 예수께서 예루살렘 그 성전 안으로 들어 가셨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둘러보시고 이미 시간이 늦게 되어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안으로 예수께서 나가셨다.
11:11 Καὶ εἰσῆλθε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εἰς τὸ ἱερὸν
그리고 그가들어가셨다 안으로 예루살렘 안으로 그 성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περιβλεψάμενος πάντα,
그리고 둘러보시고 모든 것들을 (분사: 과거 중간태 주격 단수)
ὀψίας ἤδη οὔσης τῆς ὥρας,
늦게 이미 되어서 그 시간이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단수)
ἐξῆλθεν εἰς Βηθανίαν μετὰ τῶν δώδεκα.
그가나가셨다 안으로 베다니를 함께 그 열두제자들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 본절의 표현은 예수께서 성전 모든 것을 돌아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이방인의 뜰과 거기 인접한 행각을 돌아보셨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본절의 '성전'(히에론)은 성전 본 건물이 아니라 '성전 경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기 하루 전인 일요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께서 다음 날 있어질 사건을 위해 미리 성전을 방문하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주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생략하고 있으나, 마태는 온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 거민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눅 19:41-44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보고 우신 장면이 나온다. 이는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한 이유이다.
▣ 베다니에 나가시다. - 예수께서는 그날 저녁을 지내시기 위해 베다니로 돌아가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에 대하여 격분해 있다는 것과 자신의 죽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밤을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수 없었다. 또한 그 성을 떠남으로 해서 예수는 군중들의 소동을 피하고 기도와 명상의 시간, 그리고 아마 자기 제자들과 약간의 교제 시간이나마 가질 수 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한편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잠시 머무르다 베다니로 떠나실 때 성전 뜰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상인들의 결탁된 악행을 살펴보시고 성전 숙정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을 것이다.
12-14절 [열매 없는 무화과의 저주]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셨다.
직역: 이튿날에 그들이 베다니로부터 나간 후에 예수께서 시장하셨다.
11:12 Καὶ τῇ ἐπαύριον ἐξελθόντων αὐτῶν
그리고 그 이튿날에 나간후에 그들이 (분사: 과거 능동태 소유격 단수)
ἀπὸ Βηθανίας ἐπείνασεν.
부터 베다니로 그가시장하셨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이튿날. - 이 날은 종려 주일 다음 날 아침으로 니산월 11일로 추정되는 월요일이었다.
▣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 만일 예수께서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그의 친구 집에서 지내셨다면 아침에 시장하셔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 전날 밤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거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셔서 그가 하실 일에 대하여 기도하러 가셨다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병행 구절인 마 21:18은 예수께서' 이른 아침'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길에 시장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른 아침'(프로이)이란 새벽 3시~6시 사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채 이른 새벽에 베다니를 떠나 오셨기 때문에 몹시 시장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시장하심을 느끼신 것에서 우리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발견하게 되며, 본래 하나님이셨던 분이 성육신하여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복음서 여러 곳에 잘 나타난다. 따라서 예수는 신성을 지니셨음을 물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성(人性)도 아울러 지니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때는 본절의 경우와 더불어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 절규에서이다(마 15:34). 특별히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피로하시고 목말라하시는 것을 묘사하면서 그의 옆구리에 창을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왔다(요 19:34)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예수의 고난이 환상적인 허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셨음을 부정하는 '가현설'(假顯說)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1: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1:13 멀리서부터 잎이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으니,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직역: 그래서 멀리서 잎들을 가진 한 무화과나무를 보신 후에 혹시 그 나무 안에서 무엇을 찾아 낼 것인가? 하여 예수께서 가셨다. 그 나무 앞으로 와서 잎사귀들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다.
11:13 καὶ ἰδὼν συκῆν ἀπὸ μακρόθεν
그래서 보신후에 한무화과나무를 부터 멀리서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ἔχουσαν φύλλα ἦλθεν,
가진 잎들을 그가 가셨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εἰ ἄρα τι εὑρήσει ἐν αὐτῇ,
인가하여 혹시 무엇을 찾아낼 것 안에서 그나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καὶ ἐλθὼν ἐπ᾽ αὐτὴν
이에 와서 앞으로 그나무를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οὐδὲν εὗρεν εἰ μὴ φύλλα·
아무것도못하였다 발견하지 는 외에 잎사귀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ὁ γὰρ καιρὸς οὐκ ἦν σύκων.
그 왜냐하면 때가 아니 었다 무화과들이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때가 아님이라. - 유대인의 사회 보장 율법에 있어서 굶주린 자는 타인 소유의 열매도 따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시장기를 느끼시고 길가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서 열매를 찾으셨다. 한편 열매와 잎을 함께 내는 특성을 지니는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다. 그러나 본절의 사건은 유월절에 가까운 4월경이었으므로 무화과 열매를 따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즉 팔레스틴에서 일반적으로 무화과는 3월말에 싹이 나서, 5,6월에 익고 6,7월에 일차 수확을 하며 8-10월에 완전한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자연적인 이치와는 다르게 결실기가 되기 전에 무화과 열매를 구했으며, 또한 열매가 없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상의 혼란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왜 수확기도 아닌데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셨을까에 대한 난해한 문제의 해 결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 왔다.
① 이 사건은 본래 무화과 열매가 익는 여름에 있었던 일이나 의도적으로 예수의 수난과 관련을 시켰고, 더불어 마가가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을 첨가하므로 이 사건의 때가 봄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된 것으로서 성경 기록의 신빙성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② 무화과나무의 경우 잎이 무성하면 열매 또한 풍부한 것이 상례이므로 잎이 많은 나무에서 잘 익은 열매를 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예지력을 갖고 계신 예수께서 이처럼 나뭇잎에 속아 그릇된 판단을 하셨다는 것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③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데. 예수께서 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할 심판의 급박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이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은 교만에 가득차 외식을 일삼으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패역한 종교 지도자들로 가득차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으나, 실상은 그 열매가' 없음을 폭로키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 나오는 '무화과의 때'에서 '때'(카이로스)가 '계절'이란 의미보다는 결정적 시점을 나타내는 종교적 용어로 쓰인 것으로 보아 즉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종말론적인 때를 놓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를 포기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4절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21절에 있는 저주의 성취가 당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분노와 이것의 성취로서 A.D. 70년에 이스라엘의 멸망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지닌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1: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없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아무도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다.
직역: 그래서 예수께서 공허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네게서 영원토록 아무도 열매를 먹지 못하기를 원한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듣고 있었다.
11:14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εἶπεν αὐτῇ·(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래서 공허하여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에게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μηκέτ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ἐκ σοῦ μηδεὶς καρπὸν φάγοι.
이제 부터 토록 그 영원 부터 네게로 아무도못하기를원한다 열매 먹지 (동사: 희구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ἤκουο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그러자 듣고있었다 그 제자들이 그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주해
▣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직접 저주를 하심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창조자로서 이를 주관할 권능을 지녔음을 나타내 주는 이적이다.
▣ 영원토록‥‥따먹지 못하리라. - 예수의 이 저주는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한 책임이 그 나무에게 있는 것처럼 그 나무에게 벌하셨기에 타당치 못하며 이기적인 이적 사용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무성한 잎을 가진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실제로 어떤 신앙적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민족들의 외식적 모습을 기억하시고 상징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란 점에서 이 이적의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형식과 의식에만 치우치고 실제로 성령의 열매(갈 5:22)를 맺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심판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 마가가 구태여 이 구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15-19절 [ 예수의 성전 숙정]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1:15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 안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1:15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팔고 사는 자들을 내쫓기 시작하시고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직역: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간 후에 시작하셨다. 성전 안에서 사는 것 파는 것 쫓아내시고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비둘기들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뒤집어 엎으셨다.
11:15 Καὶ ἔρχονται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그리고 그들이 간다 안으로 예루살렘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복)
Καὶ εἰσελθὼν εἰς τὸ ἱερὸν
그리고 들어가신후에 안으로 그 예수님께서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ἤρξατο ἐκβάλλειν τοὺς πωλοῦντας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성전 시작하셨다 쫓아내는 것을 그 파는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3단)
καὶ τοὺς ἀγοράζοντας ἐν τῷ ἱερῷ,
그리고 그 사는 안에서 그 성전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καὶ τὰς τραπέζας τῶν κολλυβιστῶν
그리고 그 상을 그 돈바꾸는사람들을
καὶ τὰς καθέδρας τῶν πωλούντων
그리고 그 의자들을 그 파는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복수)
τὰς περιστερὰς κατέστρεψεν,
그 비둘기들을 뒤집어 엎으셨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 예수의 성전 정화작업은 그의 사역 기간 중 두 번 있었다. 첫째는 요 2:13-22에 기록된 것으로 초기 활동시 였고, 둘째는 본절에 기록된 것으로 수난 주간 중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한편 그의 첫 번째 성전 청결 작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범죄가 계속되었던 것은 당시 성전 상인들의 완악함과 이를 두둔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상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이번 두 번째는 보다 강력한 비난으로 책망하심으로써 성전의 주인이신 메시야의 권능을 드러내셨다(17절,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한편 본절의 성전이란 성소나 지성소와 같은 성전 본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뜰, 즉 바깥마당인 이방인의 마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성소나 지성소는 제사장과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 당시 성전에는 대규모의 순례자들이 와서 많은 제물을 바쳐야 했던 큰 절기에 앞서 성전의 바깥마당에 큰 제물 시장이 열렸다. 그런데 이 시장은 구약에 결코 언급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포로 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포로 이후에 여러 디아스포라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는 불편함을 덜기 위해 초창기에는 감람산 지역에 비교적 크지 않았던 제물 시장과 환전 시장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임 제사장 안나스에 의해 성전 바깥마당에도 시장이 개설됨으로 본절과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랍비 문서에 의하면 이 마당은 큰 면적(475×370m)을 차지했으며, 다른 마당들과 성전 일부 건물들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성전에서의 매매활동은 성전 당국에 의해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제사장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인해 불공정한 거래가 유도되었고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라는 명목으로 종교 지도자들 및 그들과 결탁한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도록 방관하였다. 그리고 이 시장은 대제사장의 친족들이 소유했는데, 당시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이 소유하였다고 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매매하는 자', 즉 사는 자들과 파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이 분노하여 쫓아내신 대상이 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점이 있다. 왜냐하면 파는 자들은 순례자들을 속이고 폭리를 취하는 완전한 죄가 있으나,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제적인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단지 편의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랄한 비난 대상에 이 사는 자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마도 엘리 제사장처럼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하나님 뜻에 따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 점에 있다. 즉 자신의 짐승이 제물로서 합당한 것인가를 검사하는 검열관들에게 거부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 보다는 이방인의 뜰에서 자신의 제물을 사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파는 자들의 특권은 사는 자들의 편리가 되었던 것이고, 사는 사람은 파는 사람들의 악행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 돈 바꾸는 자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해서 관례적인 화폐 또는 고대 히브리 화폐를 사용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로 취급된 이방인의 화폐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히브리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흡사한 두로의 은전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돈을 바꾸면서 약 2.1~4.2% 정도의 수수료를 받았다.
▣ 비둘기 파는 자들. - 제물로서 비둘기는 여러 경우에 바쳐졌는데 주로 값비싼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이 애용하였다. 또한 문둥병에서 나은 자가 바칠 제물이기도 했으며, 해산한 여인이 부정한 기간이 지나 정결례를 드리는 제물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 내어 쫓으시며‥‥둘러엎으시며. - 요 2:15에 나오는 제 1차 성전 정화 시에는 예수께서 채찍으로 그들을 내어 쫓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그러한 표현이 없다. 그러나 본 구절을 통해 볼 때 완력으로 그들을 쫓아내셨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처소를 더럽힌 자들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발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성전 정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의문점이 대두된다. 즉 이것이 부패한 성전 제의의 회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묵시적 희망에 따라 새로운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기대를 표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16절에 이어지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1:16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11:16 아무에게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직역: 그리고 아무나 기구를 통하여 그 성전을 위하여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11:16 καὶ οὐκ ἤφιεν
그리고 않으셨다 허락하지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ἵνα τις διενέγκῃ σκεῦος διὰ τοῦ ἱεροῦ.
위하여 아무도 나르는것을 기구를 통하여 그 성전을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허치 아니하시고. - 구약 시대부터 성전은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성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규칙이 시행되었다. 솔로몬 성전 건축 시 돌을 돌 뜨는 곳에서 다듬어서 성전 안에서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것과, 성전 안에는 먼지 있는 발로나 지팡이나 전대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등의 규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는 제사장들의 허용에 의해서 시장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 뜰이 통행로로 이용되었다. 즉 베데스다에서 예루살렘 성읍의 상부로 지나가는 자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이 성전의 큰 뜰을 통과하여 솔로몬 행각 옆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물건을 나르는 종들과 일꾼들에게 성전 큰 뜰을 통과하는 이 길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적 권위로서 그 지름길을 사용하지 못하게 봉쇄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집 전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즉 본문에서 '기구'(스큐오스)는 일상적인 짐이 아니라 종교의식에 필요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70인역에 이 단어가 300회 이상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1/3 이상이 성전 도구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명령은 성전을 통행 도로로 사용하거나 여기서 장사하는 것을 금한 정도가 아니라 제사를 위한 기물 사용 금지를 통하여 성전 제의 전체에 대한 폐지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본문을 성전 정화를 위한 편의적 상업행위나 통행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야 하나 이를 후자와 같이 해석하여도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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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1:17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11:17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가그것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었구나." 하시니,
직역: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모든 민족들에게 불려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11:17 καὶ ἐδίδασκεν
그리고 가르치고있었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그리고 말씀하고계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οὐ γέγραπται
아니하였느냐 기록되지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ὅτι ὁ οἶκός μου οἶκος προσευχῆς κληθήσεται πᾶσιν τοῖς ἔθνεσιν;
것을 그 집은 내 집이라 기도하는 불려질 것이라는 모든 그 민족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ὑμεῖς δὲ πεποιήκατε αὐτὸν σπήλαιον λῃστῶν.
너희는 그러나 만들었다 이곳을 소굴로 강도들의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2복)
주해
▣ 가르쳐 이르시되. -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행한 자신의 폭력이 단순한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 본절은 사 56:7의 하반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제도로서는 이방인이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은 이방인의 뜰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뜰을 제물 시장으로 만들어 장사를 했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유대인들의 횡포였고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저지하는 사탄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횡포를 중단시키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성전을 성결케 하시고 그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만인'(토이스 에드네신)이 이방인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만인'의 원어적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본절에서 '내집' 은 원칙적으로 성전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 집'이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암시적으로 제 2위 하나님되시는 '예수 자신의 집'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로 보아 예수는 집 주인의 자격으로 성전 청결 작업을 진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도하는 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친히 만나시며 인간의 거룩한 바램을 들어 주시는 곳임을 보여 준다.
▣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이는 렘 7:ll에 나오는 여호와의 책망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예레미야 당시 유대인들은 온갖 가증한 일을 하고서도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였던바 하나님은 이러한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도 성전은 상인들과 교권주의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장소로 변했으므로 예수는 극단적인 말로서 이들을 비난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집'으로 정해 놓은 곳을 '강도의 굴혈'로 변모시킨 자들을 질타하신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말하는 '강도의 굴혈'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상인과 교권주의자 뿐 아니라 성전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을 질책하는 말로도 이해했다. 즉 '기도하는 집'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종교적인 장소가 반 로마 투쟁을 하는 장소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경계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성전이 다윗 왕국의 영화를 가시적으로 회복하려고 시도하며 로마의 외세를 몰아내려던 열심당의 활동 장소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실제로 로마에 항전하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요새로 하여 투쟁하다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마저 무너지는 결과를 야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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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1:18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서, 어떻게 그분을 죽일까 궁리하였으나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니, 모든 백성이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기 때문이다.
직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들었다. 그래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들이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리가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1:18 Καὶ ἤκουσαν οἱ ἀρχιερεῖς καὶ οἱ γραμματεῖς
이에 들었다 그 서기관들이 그리고 그 대제사장들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ἐζήτουν πῶς αὐτὸν ἀπολέσωσιν·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그래서 그들이찾고있었다 어떻게 그를 죽일 것인지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ἐφοβοῦντο γὰρ αὐτόν,
그들은두려워하고있었다. 왜냐하면 그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3복)
πᾶς γὰρ ὁ ὄχλος ἐξεπλήσσετο ἐπὶ τῇ διδαχῇ αὐτοῦ.
마다 왜냐하면그 무리가 놀라고 있었기 대하여 그 가르침에 그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수동태 3단)
주해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 대제사장은 본래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대제사장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로마가 유대 민족을 수월하게 통제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자기들 임의로 임명함으로써 전임 대제사장, 현직 대제사장, 대제사장 대리인 등이 생겨났고, 그들이 모두 대제사장으로 불리운 까닭이다. 한편 당시 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였고, 서기관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것은 특권 귀족 계층인 제사장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는 모임으로, 사법 문제만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 전역의 통치 기구로서 광범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국내의 종교 문제를 완전히 관장하였고 민사 문제와 로마 행정 장관의 재량에 따라 형사 소송도 재판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산헤드린에는 사형의 재판권은 없었다.
▣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 본래부터 반목(反目) 상태에 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공모하여 예수를 잡으려 한 것은 성전 청결 같은 공공연한 행위로 인하여 이들이 큰 충격을 받고 격렬한 분개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은 이전에도 예수에 대하여 조사하며 죽이려 하였으나 이제 전보다 더 치밀하게 예수를 죽일 것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꾀하니'(에제툰)란 말에서 이들의 살의를 잘 엿볼 수 있다. 즉 이 말은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어떻게 그 살의를 실행할 것인지에 대해 골몰하여, 조사하며, 구하는 진지한 노력을 암시하고 있다.
▣ 무리가‥‥그를 두려워함일러라. - 이 말은 산헤드린이 왜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죽일 방도를 구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즉 당시 교권주의자들의 외형적 권위에 식상해 있던 모든 무리는 예수의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행위와 또한 권위 있고 생명력 넘치는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어 심히 경탄해 마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에게로 집중되자 산헤드린이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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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11:19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례 성 밖으로 나갔다.
11:19 날이 저물자, 그들이 성읍 밖으로 나갔다.
직역: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와 제자들이 그 도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11:19 Καὶ ὅταν ὀψὲ ἐγένετο,
그리고 때에 저녁이 되었을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ἐξεπορεύοντο ἔξω τῆς πόλεως.
그들이나가고있었다 밖으로 그 도시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간태 3복)
주해
▣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 본절의 '매양 저물매'(호탄 오프세 에게네토)란 '저녁이 될 때마다', 즉 매일 저녁을 말한다. 이 날은 월요일 저녁이었는데 일요일 밤에 베다니에서 지내신 것과 같이 이 날도 베다니에 가셨다(마 21:17). 이것은 11절에서 보여지듯이 마지막 주간의 예수 숙소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군중이 목격하지 않을 때를 택하여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베다니에서의 예수 거처는 예수께서 평소 가깝게 지냈으며 죽었을 때 살린 적이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20-26절 [ 응답 받는 기도의 두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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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11: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11:20 아침 일찍 그들이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직역: 그들이 아침에 지나가면서 무화과나무가 뿌리들로부터 말라져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11:20 Καὶ παραπορευόμενοι πρωῒ εἶδο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그리고 지나가면서 아침에 보았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τὴν συκῆν ἐξηραμμένην ἐκ ῥιζῶν.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져버려져있는 부터 뿌리들로
주해
▣ 아침에 지나갈 때‥‥마른 것을 보고. - 예수께서 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 대한 결과를 보여 준다(14절). 한편 예수님의 신적 저주가 있은 직후에 나무가 말라버린 것으로 되어 있어 하루 후에 이를 확인했다는 본절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명령 후 바로 나무가 생명력이 상실해 감을 지적한 것인데 반해, 마가는 그 다음날 말라버린 결과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나무의 상태를 뿌리부터 말랐다고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 이를 직접 목격한 베드로로부터 마가복음이 기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즉시 나무가 생명력을 상실한 것으로 묘사한 마태는 예수의 즉각적인 능력에 관심을 둔 반면 마가는 무화과나무의 상징성에, 주목하여 성전과 이스라엘의 생명력 상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잎만 무성하고 결실이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외형적인 종교행위는 있으나 결실은 없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인해 구원의 반열에서 멀어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예언은 A.D. 70년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서 성취되며 이러한 완전한 파멸은 전적으로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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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1:21 그래서 베드로가 전날 일이 생각나서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저것 좀 보십시요,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께 말하기를 "랍비님, 보소서. 랍비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 하니,
직역: 그래서 베드로가 다시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랍비여 보소서 무화과나무가 주님께서 저주하셨던 것처럼 말랐습니다.
11:21 καὶ ἀναμνησθεὶς ὁ Πέτρος λέγει αὐτῷ·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그래서 다시생각이나서 그 베드로가 말씀드렸다 그에게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ῥαββί, ἴδε ἡ συκῆ ἣν κατηράσω ἐξήρανται.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랍비여 보소서 그 무화과나무가 하는-바 주님께서저주하셨던 말랐습니다.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2단)
주해
▣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말랐나이다. - 마태는 이 질문을 제자들이 함께 제기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반면, 마가는 베드로의 독단적인 질문인 것처럼 기록한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제자들의 공통된 의문을 베드로가 중심하여 제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양자가 상이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베드로의 제자이며 복음서를 베드로의 관점에서 기록했던 마가는 자연스럽게 베드로를 전면에 내 세우는 기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랍비여. - 베드로는 전처럼 예수께 말을 건넬 때 '랍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아람어는 요한에 의해 일반적으로 '선생'으로 해석되어져 있는데, 근본적으로 크게 높임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일찍이 기록된 바에 의하면 세례인 요한까지도 이와 같이 불리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적인 이적이 묘사되는 이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용어인 랍비보다 그의 권능을 강조하는 '주'라는 명칭이 더 합당했을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11: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직역: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11:22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Ἰησοῦς λέγει αὐτοῖ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이에 대답하여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ἔχετε πίστιν θεοῦ.
가지라 믿음을 하나님의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예수께서 대답하여‥‥이르시되. - 본절이하 25절까지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나, 이 말씀이 제기된 질문과 논리적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로 이 부분에 배치된 것이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와 동일한 구조의 말씀이 다른 상황에서도 여러 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 나타난다고 해서 이 부분과의 관련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 사건이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믿음 없는 것에서 찾는다면,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 하나님을 믿으라. - 이 명령은 이어지는 교훈의 결론임과 동시에 출발점이 된다. 한편 원문에서는 현재 명령형이 사용되어 계속적인 믿음 갖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바, 이 말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과 뜻이 상통한다. 이러한 명령은 한계가 뚜렷한 인간이 급변하는 환경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으나, 모든 사건과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며 끝내 그분이 각자의 삶에서 활동하시도록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벌떡 일어나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1: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치 않으며,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이루어 질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내가 진시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져라 말을 하면 그래서 바다 속으로 던지어져라.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가 말한 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된 줄로 믿으면 그에게 될 것이다.
11:23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진실로 말한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ὅτι ὃς ἂν εἴπῃ τῷ ὄρει τούτῳ·
것을 누구 든지 말하면 그 산더러 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ἄρθητι
들리어져라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 2단)
καὶ βλήθητι εἰς τὴν θάλασσαν,
그래서 던지어져라 속으로 그 바다로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 2단)
καὶ μὴ διακριθῇ ἐν τῇ καρδίᾳ αὐτοῦ
그리고 않으면 의심하지 속에 그 마음 자신의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3단)
ἀλλὰ πιστεύῃ
오직 믿는다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ὅτι ὃ λαλεῖ γίνεται,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줄로 바-그것 그가말하는 되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ἔσται αὐτῷ.
될 것이다 그에게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주해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앞부분에 언급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완 설명함에 앞서 제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말이다. 또한 앞으로 되어질 교훈이 '진실함'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 누구든지 이 산더러‥‥바다에 던지우라. - 당시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었으므로 감람산과 더불어 사해의 서편 부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더 실감나게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산더러‥‥던지우라'는 표현은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속담의 하나로서 '어려운 일을 한다'란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가리켜 '산을 옮긴 자'라는 말로 칭찬하였는바, 이는 '해결자'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의 교훈의 요지는 의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은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해결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 본문은 '믿음'과 '의심'이란 반대어를 등장시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의심'이란 말은 '두 가지'란 단어가 '결정을 하다'란 단어의 합성어로서 '가닥을 잡지 못하고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믿고'는 '확신을 가지다'의 제 1과거 가정법으로서 확신한 바에 대하여 계속적인 신뢰감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정과 긍정의 양면을 대비시키심으로 신앙의 필요성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리려 하지 말며, 그 의미하는 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여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함에 대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의심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와 대립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들은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을 물질적이며 영적인 각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었다. 즉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며, 열 두 제자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소리쳤었다.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에로 감이니라'고 약속까지 하셨다. 사실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께서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적과 기사는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24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어진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직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모든 것을 기도하고 구한 것만큼 받았다는 것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4 διὰ τοῦτο λέγω ὑμῖν,
므로 그러 내가말한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πάντα ὅσα προσεύχεσθε
모든 것을 만큼많은 너희가 기도하고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2복)
καὶ αἰτεῖσθε,
그리고 구하는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πιστεύετε
믿으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ὅτι ἐλάβετε,
것을 너희가 받았다는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2복)
καὶ ἔσται ὑμῖν.
그리하면 그대로되리라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주해
▣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그대로 되리라. - 본절은 23절과 병행되는 말씀이나 23절을 보다 더 강조하며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본절은 믿음이 전제된 기도가 가지는 효력을 밝히고 있는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받은'(엘라베테)이란 말이 과거형으로 쓰여 '이미 받은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하기도 전에 이미 주시는 것으로 해석하여 기도의 효력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의 의미는 앞부분의 조건절을 전제해서 해석하여야하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과 일치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온전히 일치된 상태에서 가지는 믿음은 불가능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인간적인 정욕을 위한 간구이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약 4:3). 그러므로 신자들은 기도할 때 무조건 간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해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11: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게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11: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너희가 어떤 이에 대해 적대 관계에 있다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직역: 너희가 서서 기도하면서 어떤 사람과 등진 무언가 가졌거든 용서하라 너희의 잘못들을 너희에게 용서하여 하늘들 안에 너희 아버지께서 역시 용서해 주시리라
11:25 Καὶ ὅταν στήκετε προσευχόμενοι, (분사: 과거 중수디 주격 2복)
그리고 때에 너희가 서서 있는 기도하면서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2복)
ἀφίετε εἴ τι ἔχετε κατά τινο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용서하라 거든 무언가 가졌 등진 어떤사람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ἵνα καὶ ὁ πατὴρ ὑμῶν
주시리라 역시 그 아버지께서 너희의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ἀφῇ ὑμῖν
그 안에 그 하늘들에 용서하여 너희에게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ὑμῶν.
그 잘못들을 너희의
주해
▣ 서서 기도할 때에. - 이 말을 서서 기도하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관습 가운데 하나인 서서 기도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 뿐 또 다른 기도의 관습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언제나'란 의미로 풀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티 에케테 카타티노스')는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이'와 부정대명사 '티'와 속격 '티노스', 그리고 '소유하다'는 의미의 '에케테'와 '~에 대해서'란 의미의 '카타가 합해져서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을 가졌다면'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 의역하면 ' 만약 타인에 대하여 불화나 다툼을 가졌거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앞절에서 교훈한 바대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아울러 반드시 용서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용서에 대해서는 무척 강조하신 바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할 것을 가르친 산상수훈과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받기 위해서는 죄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라고 가르친 주기도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앞부분에 언급된 믿음과 더불어 용서는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첫째, 기도가 인간의 분노 때문에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여서는 안 되며, 둘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웃이나 형제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는 효과가 없으며 교회 공동체의 바른 유지를 위해서도 이 규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 부분에만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있어서 용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개한글KJV 번역본 ◆한글 흠정역 본역본 ◆ 새번역 성경 번역본 ◆ 직역
11:26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가 있음.
11:26 그러나 너희가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시니라.
11:26 i(26절 없음) '26. 만일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직역: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신다.
11:26 εἰ δὲ ὑμεῖς οὖκ ἀφίετε,
만일 그러나 너희가 아니하면 용서하지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οὐδε ὁ πατὴρ ὑμῶν
도-아니하시리라 그분 아버지께서 너희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ἀφησεὶ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ὑμῶν.
자 안에 그 하늘에게신 사하지 그 허물들을 너희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이는 시내 사본(N), 바티칸 사본(B), 레기우스 사본(L), 프리얼 사본(W) 등 유력한 사본들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므니취 사본등에는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 하시리라'로 번역되는 마 6:15의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삽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역 성경과 같이 생략하는 것이 정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이 부분에 삽입한다 할지라도 본문의 흐름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27-33절 [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11:27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께로 와서
11: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거닐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와서,
직역: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간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 거닐고 계실 때에 그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를 향하여 온다.
11:27 Καὶ ἔρχονται πάλι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그리고 그들이 간다 다시 으로 예루살렘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복)
καὶ ἐν τῷ ἱερῷ περιπατοῦντος αὐτοῦ
그리고 안에 그 성전 거닐고 계실 때에 그가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단수)
ἔρχονται πρὸς αὐτὸν
그들이 온다 향하여 그를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복)
οἱ ἀρχιερεῖς καὶ οἱ γραμματεῖς καὶ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그 제사장들이 과 그 서기관들 과 그 장로들이
주해
▣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 예수께서는 일요일에(11절)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 성전을 둘려 보셨고, 월요일(15절)에는 성전을 깨끗케 하신 데 이어 이제 다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계신데 이 날은 화요일 아침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아마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교훈을 주시기에 적합한 왕의 행각 또는 솔로몬의 행각에 계셨을 것이다.
▣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 - '성전을 걸어 다니신다'는 표현은 본절밖에 없으며 병행구인 마 21:23과 눅 20:1에는 이때 예수께서는 무리를 가르치고 계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옮겨 다니시면서 적극적으로 백성을 가르치심으로 자신이 성전의 주인 되심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전날 예수의 성전 청결 작업으로 크게 명예가 실추된 대적들이 다가 왔는데 이들이 예수께서 가르치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 대제사장이 직접 예수께 나아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란 표현은 대제사장을 구심점으로 하는 '제사장의 무리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이때 예수께 다가온 무리들은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인데,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하므로 '대제사장들'이란 말을 앞세운 것이다. 한편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 가운데서도 사상적으로 투철한 무리로서 아마도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공적으로 파견되어 나왔던 것 같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11:28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 ?" 하고 물었다.
11:28 그분께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것들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것들을 할 권세를 주었소?" 하니,
직역: 예수님께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무슨 권세에 의하여 이런 일들을 하느냐? 당신이 이일들을 행하기 위하여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11:28 καὶ ἔλεγον αὐτῷ·
그리고 말하고있었다 그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ταῦτα ποιεῖς;
의하여 무슨 권세에 이일들을 당신은하느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ἢ τίς σοι ἔδωκεν τὴν ἐξουσίαν ταύτην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권세를 그 주었느냐? 이런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ἵνα ταῦτα ποιῇς;
위함이라 이일들을 당신이 행하게된다면 행하기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은 권위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전날(월요일)에 교권주의자들이 허용했던 성전에서의 제물 판매 행위를 정죄하고 상인들을 쫓아낸 바 있었다. 그리고 그 전날(일요일)에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입성을 감행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교권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을 계속 공격하였으므로 대제사장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의 수장(首長)인 대제사장과 율법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예수의 권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 앞선 질문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예수를 모함하기에 보다 용이한 성격을 지닌다. 즉 당시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가 최상이었는바 산헤드린과 뜻을 달리하는 예수님이 그 권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권위를 절하시키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 같은 사악한 계획은 그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전혀 믿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에서 나온 계책이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11: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11: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마디 물어 보겠으니,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내가 무슨 권세로 이것들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직역: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대답하라 너희에게 나 또한 한 가지만 말씀되어진 것을 묻겠다. 너희는 나에게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리라
11:29 Ὁ δὲ Ἰησοῦς εἶπεν αὐτοῖς·
그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디 2복)
ἐπερωτήσω ὑμᾶς ἕνα λόγον,
내가 묻겠다 너희에게 한가지 말씀되어진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καὶ ἀποκρίθητέ μοι
그리고 너희는 대답하라 나에게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디 2복)
καὶ ἐρῶ ὑμῖν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ταῦτα ποιῶ·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그리하면 나도말할 것이다 너희에게 대하여 무슨 권세에 이런일들을 행하는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주해
▣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적들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역으로 또 다른 질문을 하심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셨다. 이러한 한 질문에 대해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당시 유대 랍비들이 즐겨하던 대화법으로 최초의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질문을 통해 스스로 찾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에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자신들의 질문에 포함된 불순함을 자각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11:30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 내게 대답해 보아라."
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하여라."
직역: 요한으로부터 세례가 하늘로 있었느냐?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이냐? 너희는 나에게 대답하라.
11:30 τὸ βάπτισμα τὸ Ἰωάννου ἐξ οὐρανοῦ ἦν
그 세레가 그 요한의 부터 하늘로 있었느냐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ἢ ἐξ ἀνθρώπων;
그렇지않으면 부터 사람들로
ἀποκρίθητέ μοι.
너희는 대답하라 나에게 (동사: 명령법 과거 수동태/디 2복)
주해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예수의 이 질문은 단지 질문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헤집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던 세례인 요한을 심정적으로는 거부하였으나 민중들이 그를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므로 그의 선지자적 위치를 부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못함으로 인해 민중들이 믿고 있던 바와 같이 세례인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란 사실을 그들 역시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됨으로써 결국 예수의 권위도 하나님에게 근거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하늘'이라 하는 것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명칭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1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고 할 것이다.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하늘로부터이다.' 라고 말하면, 이 사람이 '그러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말할 것이오.
직역: 그들이 자신들끼리 의논하여 말하기를 만일 하늘로부터 말을하면 너희가 어찌하여 믿지 않느냐 말할 것이다.
11:31 Καὶ διελογίζοντο πρὸς ἑαυτοὺς λέγοντες·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그러자 그들이의논하고있었다 끼리 그들 자신들 말하기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3복)
ἐὰν εἴπωμεν·
만일 말을하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1복)
ἐξ οὐρανοῦ, ἐρεῖ·
부터 하늘로 그가말할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διὰ τί [οὖν] οὐκ ἐπιστεύσατε αὐτῷ;
하여 어찌 그러면 않았느냐 너희가 믿지 그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2복)
주해
▣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예수의 예기치 못한 반문에 대하여 이들은 매우 당황하였으므로 서로 머리를 맞대어 묘책을 찾고자 하였다. 아마 이들은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예수가 있었던 그 자리를 떠나서 숙의(熟議)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려는 대답이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라든지 자기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인가에 대한 이기적인 것이므로 오랜 시간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세례 요한의 세례나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을 시인한다면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반목하고 결국 그를 죽게 한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게 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32 그러면 사람에게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11:32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서 왔다" 고 대답할 수도 없지 않은가 ?"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무리가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32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로부터이다.' 라고 말하겠는가?" 하였으나 그들이 무리를 두려워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요한을 선지자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역: 그러나 만일 사람으로부터 말을 하면 백성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을 모든 사람들이 참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음이라.
1:32 ἀλλ᾽ εἴπωμεν·
그러나 만일 말을하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1복)
ἐξ ἀνθρώπων;
부터 사람으로
ἐφοβοῦντο τὸν ὄχλον·
그들이무서워하고있었다 그 백성을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3복)
ἅπαντες γὰρ εἶχον τὸν Ἰωάννην ὄντως
모든사람이 왜냐하면 여기고있었음이라 그 요한을 참으로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ὅτι προφήτης ἦν.
것을 한 선지자로 그가있었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 이들은 예수의 반문에 대하여 첫 번째를 선택하면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폭로함이 되고 두 번째를 선택하면 백성에게서 위험을 당하게 되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졌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무리들은 교권주의자들의 생동력 없는 가르침과 기득권을 이용한 횡포에 식상해 있었고 이러한 자들의 비리를 공격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던 요한을 선지자라 인정하였고, 그 요한의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인정하였고, 그 요한의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진실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인하는 대답은 백성들의 정치적 소요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며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와 병행 구절인 눅 20:6에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칠 것이라'라고 표현하고 있음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1: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1:33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기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11:33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오."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것들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직역: 이에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무슨 권세로 이일들에 대하여 내가 행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11:33 Καὶ ἀποκριθέντες τῷ Ἰησοῦ λέγουσι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이에 대답하여 그 예수께 말한다.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복수)
οὐκ οἴδαμεν.
못했다 우리가 알지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1복) (부인함)
καὶ ὁ Ἰησοῦς λέγει αὐτοῖς·
그리고 그분 예수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ὐδὲ ἐγὼ λέγω ὑμῖν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ταῦτα ποιῶ.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않는다 나도 말하지 너희에게 대하여 무슨 권세로 이일들을 내가행하는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세례 요한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가부간(可否間)의 모든 대답이 올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산헤드린의 파견자는 알지 못하겠다는 궁색한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진리에 입각하지 못한 비겁한 태도이며, 동시에 영적 무지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고, 처음에 예수에 대한 공격적 태도가 오히려 철저한 패배로 끝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나도… 이르지 아니하리라. -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 교권주의자들의 대답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알고 있는 바를 대답치 아니하시겠다는 신적 권위에 입각한 대답을 하셨다. 이로써 교권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해 낸 예수를 빠뜨리려 했던 절묘한 올무에 오히려 자신들이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위험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며 이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더욱 악랄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예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