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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복음의 유일성
1-5절,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1-3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는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고 보내신 자들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6:13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다. 후에,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말한다. 그의 사도직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세우고 파송한 사도가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예수님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고 그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택하여 그의 이름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다(행 9장, 22장, 26장).
바울은 또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은 복음 진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믿을 만한 자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부활할 것을 3차례 이상이나 제자들 앞에서 공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가 믿을 만한 주님과 구주가 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처음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가 친히 바울을 사도로 삼으셨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었다. 즉 그는 자신이나 사람들에 의해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만드셨고 세우셨고 파송하셨다.
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세우셨다는 사실은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기도 하였다. 즉 바울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은 그의 말씀 사역에 신적 권위를 준다.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롬 1:1) 그의 말씀 사역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사역이 되었고 그가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문안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몇몇 개인들의 진리가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공동적 진리요 주의 백성이 다함께 고백하고 감사하고 증거하는 진리이었다. 디도서 1:4에 ‘같은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통적 믿음’(코이네 피스티스)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모든 성도의 공통적 믿음이다. 유다서 1:3에는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도 원문에서 ‘공통적 구원’(코이네 소테리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모든 성도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이다. 우리는 공통적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공통적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과 일꾼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의 겸손한 마음을 보인다. 주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 그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고(마 12:50; 23:8),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사도직은 권위 있는 직분이었지만, 바울은 높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않고 겸손히 대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4에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했다.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1)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는 단순히 마음에 감동을 주고 눈물을 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 즉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다. 죄인은 그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받는 것, 즉 죄사함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평안’은 문제들, 싸움, 갈등,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리킨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 곧 죄사함을 통해 온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과 싸움, 갈등과 불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며 우리의 심령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참된 평안과 안정을 누리게 된다.
평안은 마음의 평안뿐 아니라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도 포함한다. 그러나 평안이 항상 그런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욥기가 그것에 대해 교훈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때때로 고난의 훈련을 받게 하신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에게도 때때로 고난이 닥친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도 오지만 때로는 욥처럼 까닭 없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들을 통해 믿음이 자라고 거룩해진다. 주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육체의 가시도 비슷한 목적을 가졌다.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아마 어떤 질병이나 연약성을 통해 교만에 떨어지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고후 12:7).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4-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없이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간략히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원어(페리)(전통본문)2)는 ‘우리 죄와 관계하여,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하기 위해’(BDAG)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휘페르 uJpe;r) [때문에, 대신하여] 죽으시고.”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디아)[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죄인은 자신이 자기 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든지, 아니면 누가 대신 그 벌을 받아주어야 한다. 후자가 대속(代贖)의 개념이다. 대속은 대리 형벌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을 이루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드리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인생의 죄 문제의 해결이 여기에 있다. 죄인들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 곧 그의 선하고 의로운 뜻을 거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하다. 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한 죽음과 지옥 형벌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택한 영혼들은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베소서 1:4,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실상, 하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질문들의 해답이시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의 창조와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으시기를 기원한다. ‘저에게’라는 말은 원문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택함 받지 못한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며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성을 가진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때가 되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또 우리에게 죄의 깨달음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과 천국 기업을 상속받게 하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찬송의 이유와 내용이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알아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열두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셔서 온 세상에 보내셨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의 말씀 사역의 신적 권위와 그가 전한 복음의 신적 권위가 있다. 그것이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항상 사모하며 누리자. 그것은 죄사함과 성화의 은혜이며 죄사함에 근거한 심령의 평안과 그에 부수된 몸의 건강과 환경적 평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늘 사모하며 누리며 살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을 사모하며 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안에 영생이 있고 천국의 복도 있다. 또 이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제는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 계명 순종의 삶, 즉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헤테론(NASB, NIV))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다(갈 1:4).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내용이 다른 복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내용이 다른 것을 가리킨다.
갈라디아 교회가 은혜의 복음을 속히 떠난 것은 사람의 연약성을 보인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신명기 9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목이 곧고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속히 떠났었다(신 9:7, 12-13, 16, 24). 사람의 연약성은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있다(롬 7:18-25).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붙드심이 아니고서는 오늘날 우리도 은혜의 복음을 속히 떠날 수 있다.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좇아간 것은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이었지만, 이 교회 속에 다른 복음이 용납된 것이다. 역사상 기독교회 안에는 다른 복음들이 적지 않게 들어왔었다.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각종 이단 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은 다른 복음들이다. 그것들이 역사상 기독교회 안에 용납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7절] 다른(알로 another)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말은 그것이 다른 하나의 복음이 아니니라는 뜻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different) 복음은 다른 하나의(another) 복음이 아니었다. 복음은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유일하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환경에서도 다른 내용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복음의 내용을 바꾸거나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내용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였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보인다.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었다. 여기에 다른 복음의 음흉한 목적이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소식인데, 어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변경시키려고 다른 복음을 만들어 전파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의 가감이나 변경은 결국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사탄의 활동들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교회들을 어지럽히고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교훈하였다(요일 4:1).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파르)[에 반대되는]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이라는 말씀에서 ‘전한’이라는 원어(유엥겔리사메다)는 과거시제로서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해졌음을 나타낸다. 기독교 복음은 사도들이 이미 전한 복음, 초대교회에 이미 전해진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은 이미 전해졌다. 그 내용은 확정되어 있다. 기독교 복음은 결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과 확정성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 바울 자신이라도 변경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 온 어떤 천사라도 변경할 수 없는 성격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오늘날 누가 감히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 내용을 변경시킬 수 없다.
그러면 그 복음은 지금 어디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는가?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은 신약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제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복음은 사도 바울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며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이다.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믿고 전한 사도들의 믿음이었고 또한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증거되어 있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복음 확인에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그 중에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보인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생각대로 임의로 변경시키는 것은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매우 악한 일이며 사탄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들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의 일을 방해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일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사탄의 방해 때문에 죄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새로운 것이거나 처음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이 경고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것이고 다시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저주를 반복하여 다시 선언하는 것이다.
“너희의 받은”이라는 원어(파렐라베테 parelavbete)도 과거시제로서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달되었음을 보인다. 복음은 초대교회가 이미 받은 것이요 갈라디아 교회도 이미 받은 것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옛날부터 즉 사도 시대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믿어온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전통적인 것, 옛것이다. 복음 신앙은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 없었다가 어느 날 누가 비로소 깨닫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믿는 신앙은 사도적, 전통적 신앙, 곧 옛신앙이다.
물론, 전통적인 것이 다 옳다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도 있고 순수하지 못하고 불순해진 옛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내용이며 섞인 것들을 제거시키고 순수하게 보존해야 할 옛것이다. 본래 사도들에게 계시되고 사도들이 전파하고 선언한 그 옛 복음은 확정된 내용이어서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기독교’ 혹은 ‘옛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받은 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변질되고 있었다. 교인들은 목사들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양들은 순진하여 목사들을 그냥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목사들의 책임은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목사들을 더 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이는]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아님이니라](전통사본, syr).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람들에게 좋게 하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변경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변경하는 자들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 복음은 사도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 즉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이며 초대교회가 ‘받은 복음’이다.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증거된 대로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내용이다(롬 3:21-24; 갈 2:16).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는 참으로 옛것이며 복음 신앙은 참으로 옛신앙이다. 기독교 역사상, 다른 복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회와 각종 이단 종파들과 자유주의 신학이 다른 복음이다.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다른 복음들로 인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잘 지켜야 하고, 이 믿음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은 없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변경하고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것은 그들로 구원받지 못하게 방해하고 그들을 멸망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저주받을 큰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배교와 타협이 만연한 시대에는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이 넓은 길, 포용적인 길을 가기 쉽다. 그런 길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옛길, 좁은 길은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아마 많은 원수들이 있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한, 우리는 타협적이고 포용적인 넓은 길로 갈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배교자들과 타협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지키며 그 믿음만 힘써 전파해야 한다.
11-24절, 사도 바울의 복음의 유래
[11-12절] [그러나]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기독교가 불교처럼 사람의 명상과 깨달음에서 나왔거나 유교처럼 양심과 이성적, 도덕적 판단에서 나온 정도의 종교라면, 그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방 종교들과 다르며 모든 사람들이 믿고 복종해야 할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과 구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또한 사람 이상이시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이시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1:14). 또한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친히 말씀하기도 하신 분이시다(8:58).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증을 가짐을 증거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사도직의 독립성과 정당성, 그리고 신적 권위성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이 복음, 즉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는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연구하고 믿고 전해야 할 것이다.
[13-14절] [이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파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遺傳)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 예수님 믿기 전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이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의 동년배들보다 유대교를 더욱 열심히 믿었다. 그는 기독교의 맨처음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를 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기도 했고(행 7:58),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스데반의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며 교회를 파괴하였던 인물이었다(행 8:3). 그는 그의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파괴했었다. 종교적 열심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못할 때 유익보다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는 단순한 열심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15-17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하나님께서]4)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웃 나라 도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했는데 이는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다. 그가 다메섹 성에 가까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췄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장). 그때 거기에서 그는 거꾸러졌고 마침내 예수님께 굴복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은 그의 어떤 경건과 선행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친의 태로부터 그를 택하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생명이 어머니의 태에서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이미 구별하셨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렇게 하셨다. 에베소서 1:4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불러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사도로 삼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일 뿐 아니라,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는 그가 받은 사명이 ‘이방인 전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구원받은 즉시 바울의 열심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는 열심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며 그를 사용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그 일을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바울은 또한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아라비아는 사막과 광야의 땅이다. 그는 거기에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와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하며 그 진리들을 묵상하였던 것 같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조용한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다. 고요히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며 주께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복된 시간이며 그때 성도는 하늘로부터 힘과 기쁨을 얻는다.
[18-19절]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5)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복음과 사도직이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그가 3년 만에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그와 함께 단지 15일간 머물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는 베드로 외에 주의 동생 야고보만 보았을 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여기 언급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도행전 15:13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총회에서 발언하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행 12:17; 갈 2: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야고보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인물임을 보이는 것 같다.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사도 바울의 말들과 기록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제9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며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의 책이다. 요한복음 21:24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 사람의 진실한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바울의 이 말도, 성경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또 진실한 증인들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21-24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파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길리기아는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가 있는 지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전도 사역은 이와 같이 열두 제자들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하신 기이한 일이 있다. 여기에 그의 사랑과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그가 핍박하던 그 예수님을 전파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셔서 그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사도 바울의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되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되었다. 첫째, 바울은 회심 직후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도 올라가지 않았다. 둘째,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셋째, 그는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넷째, 그는 그때에도 단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뿐이다. 다섯째, 그는 그때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섯째, 그가 회심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일치하였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계시되고 증거된 복음은 사람의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이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은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내용이다. 천주교회, 이단종파들, 자유주의 신학, 은사주의는 거짓된 교훈들이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 오늘도 이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삼으신 것은 그의 놀라운 은혜이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파괴하던 자를 부르시고 구원하셔서 그가 핍박하고 파괴하던 그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그 동일한 은혜이다.
셋째로, 오늘날도 기독교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찾지 말고 오직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렇게 깨달은 복음 진리는 역사적 기독교 진리와 일치할 것이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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