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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교훈을 경계함
1-11절, 다른 교훈을 경계함
[1-2절]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이사야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시지만,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도 구주이시다.
세상에는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돈이나 세상 권세는 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라고 말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이며 사람은 죄의 결과로 온갖 불행한 일들과 사망과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죄와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다른 그 어떤 이도 우리를 죄와 불행에서 건져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우리 소망이신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증거하신 후 승천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악인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것이나, 의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골 1:28)이시며 ‘복스러운 소망’이시다(딛 2:13).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주 예수께만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늙고 병들고 쇠약한 시간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거나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인데(롬 1:1) 하나님께서 ‘너는 사도가 되어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순종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한 것처럼(사 6:8),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른 것처럼(마 4:19-20), 바울도 그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자인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라고 말하였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엡 2:8).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다.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혹은 믿음 안에서 아들로 여겨졌다는 뜻일 것이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하다.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영적 가족관계는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3:33, 35). 교회는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날마다 부족과 실수를 씻음 받고 신앙생활하며 조금씩 조금씩 성화(聖化)를 이루어 간다. ‘평안’은 죄씻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며 또 거기에 더하여 주시는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도 포함한다. 사도 바울의 축복의 기도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복이며 우리 모두가 항상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바이다.
[3-4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경영, 섭리, 뜻]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다. 교사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했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른 교훈은 금지되어야 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교훈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교훈에 있다.
교회는 교훈의 통일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을 말한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과의 일치이다. 바른 교훈의 기준은 성경이다. 신구약성경만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다. 물론, 성경이 유일한 규범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객관성 있는 바른 해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즉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과 사실들의 말씀들이다. 그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니고 사실들이다. 족보는 육신적 혈통을 말한다. 그것이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으나, 진리의 보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르지만, 진리 사상으로 말하면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였고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교훈의 계대(繼代)이다. 사실상, 육신적 족보는 헛되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는 사도적 교훈을 가진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참 계승자이다.
사도 바울은 신화나 족보 이야기 같은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죄인들을 향한 구원의 뜻을 가리킨다. 그 뜻이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진행됨을 말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구원 얻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 얻은 성도가 믿음에 굳게 서고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이다. 참된 교훈은 우리로 믿음에 굳게 서게 한다. 그러나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믿음에 유익을 주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다. 변론은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한다. 그런 변론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고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5-7절] 경계(파랑겔리아)[명령,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경계의 목적’ 즉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다.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하고 죄를 씻음 받은 마음을 가리킨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힌다. 그러나 회개와 죄씻음을 통해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고 또 계속 씻음 받음으로 깨끗함을 유지한다.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킨다. 양심은 죄로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진실한 순종생활로 선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모양만이 아니고 작을지라도 진실하게 믿기 시작한 믿음을 가리킨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참 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웃사랑은 도덕법의 완성이다. 구원 얻은 자의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와 교훈의 목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바른 말에서 떠나 헛된 말들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고 잘못된 교사들이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다.
[8-11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베벨로스)[속된](pro- fane)(KJV, NASB) 자며 아비를 치는 자(파트롤로아스)[아비를 죽이는 자](patricide)와 어미를 치는 자(메트롤로아스)[어미를 죽이는 자](matricide)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동성애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인신매매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건전한] 교훈을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저 율법교사들처럼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 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 진리에 맞게 적용한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다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의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롬 3:20). 바울은 열다섯 가지의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불법한 자 즉 율법을 거슬러 행하는 자, 복종치 않는 자 즉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망령된 자 즉 세속적인 자, 아비를 죽이는 자와 어미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동성애자,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죄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바른 교훈 곧 건전한 교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이다. 그러나 불건전한 율법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충돌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서 또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의를 통해 왔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을 따라 섬긴다(롬 7:6; 8:4, 13-14).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구원의 목표가 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구해야 한다. 2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얻었으며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의 확신과 소망의 견고함과 성화를 이루며 고난과 수고의 세상 현실에서 낙심치 않고 평안을 유지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교훈을 조심해야 한다(3절). 바른 교훈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으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의 교훈이다. 다른 교훈은 이 교훈 안에 거하지 않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문제 같은 것으로 변론하는 것이다. 신학적 토론은 필요하지만,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교훈 안에서 경건과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5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구원 얻은 신약성도들에게도 경건과 의와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특히 율법을 잘못 사용하지 말고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생활의 바른 지침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고, 반율법주의는 도덕법이 여전히 성도가 지켜야 할 생활 규칙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다.
12-20절, 감사와 찬송과 당부
[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暴行者)[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불신앙 중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비방하고 핍박하고 폭행했던 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폭행했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불신앙 중에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하였었다.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주의 긍휼과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주셨다. 구원의 은혜는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또 주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죄인 바울이 구원을 얻었고 사도의 직분까지 받았다는 것은 주 예수님의 크신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가졌었다. 주께서는 충성된 마음을 좋게 여기시는 것 같다. 주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신 후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는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충성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직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자기의 직분과 직무를 잘 이해하고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15절] 미쁘다[믿을 만하도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전적으로 받을 만한](KJV, NASB, NIV)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우두머리]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신실한 말씀이요 사람들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에 참으로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유대인 청년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 곧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신적인 구주를 약속하였다(사 9:6; 미 5:2). 바로 그 약속된 신적 구주께서 오신 것이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셔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사 53:5) 그들을 위해 그 몸이 찔리시고 상하시는 고난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비방하였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모든 죄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죄 중에도 큰 죄이다.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때문에’라는 말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라는 뜻 같다. 구주 예수께서 죄인들의 우두머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주께서 그에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죄인들의 괴수 같은 큰 죄인이 주의 긍휼을 입어 구원 얻었으므로,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다. 어떤 크고 심각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17절] 만세의[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전통사본)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자 곧 통치자이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원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그는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썩지 않으신다. 모든 피조물은 다 죽고 썩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보이지 않으신다. 그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다. 그는 모든 존재 세계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홀로 하나이시다.’ 세상에는 한 하나님께서 계신다. 다른 신들은 모두 가짜이며 헛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 거짓된 우상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열거한 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다.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KJV, NASB, NIV).
‘그것들로’라는 말은 그가 전에 그에게 주었던 예언들이라는 뜻이다. ‘예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교훈들을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이며 교회를 위한 싸움이다. 우리의 몸에 있는 죄악성(갈 5:17)은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며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이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도 싸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도 당한다(요 16:33; 딤후 3:12). 더욱이, 사탄과 악령들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대적한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과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검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마 4:4, 7, 10).
[19-20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 싸움에 지면 믿음을 잃고 불신앙과 죄에 떨어진다. 이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했다. 그것은 개인적 배교와 변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 복음 신앙, 성경적 신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착한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음으로써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인신 공격이 아니다. 이미 시행된 권징을 알리며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 출교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이지만, 교회 밖은 사탄이 활개치는 사탄의 세계이다. 요한일서 5: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지만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보이며 권징을 집행한 자가 그 자신임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당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주신 영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이 권위를 가지고 권징을 시행한다.
권징의 목적은 그들로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징계를 받는다’는 원어(파이듀도시)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배운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KJV, NASB, NIV). 그들은 진리를 비방하고 참된 믿음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좁은 길보다 포용주의를 좋아하고 타협적인 길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제명 출교의 권징을 통해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다.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만세의 왕, 영원하신 왕,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썩지 않고 보이지 않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철학자들과 같다. 철학은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삶의 의미, 죽음과 그 너머 등에 대해 질문하지만, 참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믿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그런 물음들에 대해 대답을 얻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구주이시다. 15절, “믿을 만하도다, 전적으로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의 괴수 바울을 구원하셨다. 그는 그가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것이다. 또 그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는 오늘 우리도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영적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8-19절,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우리는 믿음에서 떠난 배교와 변절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잘 지켜야 한다. 특히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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