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6
6.박제가 (楚亭 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 "돼지보다 소고기가 짱" 18세기 조선, 한우에 열광
▲ 김홍도 작 벼타작. 인부들이 열심히 벼타작을 하고 있는 모습을 양반이 한가로이 담배를 피우면 쳐다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2세기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비색청자를 만들었지만 조선후기인 18세기에는 자기 기술이 오히려 현저히 퇴보하게 된다. 조선의 자기 하면 무색의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백자가 주로 떠올려지지만 기교적 측면에서 고려청자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
우리 민족은 이미 기원전 8세기 고조선시대부터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수레를 활용했지만 정작 수천 년이 흐른 조선시대에는 수레 제조 기술이 발전하기는커녕 사용이 중단되고 만다. 말이나 가마를 이용하거나 도보 등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할 만큼 이동수단이 크게 낙후된다.
조선후기 개혁사상가 박제가의 대표작인 북학의(北學議)는 이런 내용을 포함해 조선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북학의는 '맹자'를 인용한 말로 문화가 뒤처진 남방이 중국 북방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생애 네 차례 청나라 수도였던 연경(베이징)을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현실에 관한 객관적 시각을 얻는다. 청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은 물론 한족, 여인족, 위구르 왕자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국제정세에도 깊은 안목을 갖게 된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과 그가 목격한 문명세계와의 격차는 실로 현격했다. 그에게 배고픈 이상주의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풍요하며 정신적으로도 윤택한 삶이 목표였다.
북학의에서 다루는 내용의 폭은 매우 넓다. 상업과 유통에 대한 중시, 수레와 배, 벽돌의 이용, 도로망의 확충, 기술과 기계의 도입 강조, 도량향의 표준화, 사회의 개방화 등이다. 이를 통해 부국 강병, 문명국가와 기아의 탈피를 지향한다.
▲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
박제가는 조선의 백성들이 가난한 이유 중 하나로 수레가 없는 것을 꼽으면서 전반부에서 수레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사신 행차를 보면 몇 사람만 말을 타고 갈 뿐 대부분은 수레가 없어 도보로 1만리가 되는 중국을 간다.
중국에 도달할 때 쯤이면 모두가 죄수의 머리처럼 봉두난발을 한 모습이 되며 땀을 흘리거나 숨을 헐떡거려 다른 나라에 보이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조선시대에는 놀랍게도 함경도 등 일부 국경지역을 제외하고는 수레를 사용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상업이 사치를 조장하고 사람을 속이는 행위라고 보고 억제했으며 외국과의 교역도 철저히 통제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길이 넓고 다리가 견고할 경우 조선이 잦은 외침으로 남아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상업이 퇴보하고 도로를 정비할 의지가 없는 조선에서 수레의 필요성도 없어졌다. 수레는 일제강점기 이후 수탈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이용된다).
수레가 없어지다 보니 자급자족 경제를 벗어나기 어렵다. 산골에서는 팥을, 바다에서는 창난젓만 물리게 먹는다. 박제가는 백성들이 자기 땅에서 나는 물건과 다른 데서 산출되는 필요한 물건을 교환해 풍족하게 살고자 하나 수레가 없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은 너무 검소해 사회가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제가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했다. 우물은 퍼내면 늘 물이 가득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화려한 비단 옷을 기피하다보니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로 인해 비단기술이 피폐해졌다.
기교를 부린 물품을 숭상하지 않아 장인과 목축, 도공의 기술이 형편없고 기술도 사라졌다.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아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다.
우리나라는 1000호가 사는 마을이라도 살만한 집을 한 채도 찾기 힘들다. 평평하지 않은 언덕에다가 다듬지도 않은 나무를 세우고 새끼줄로 묶어 기둥과 들보로 삼는다. 구들장은 울퉁불퉁해서 앉고 누우려면 늘 몸이 기운다.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에 가득하여 숨이 꽉 막힐 지경이다.
도성에 간간이 있는 화려하고 사치한 저택도 대청이나 구들장이 바둑판을 반듯하게 놓을 수 있는 데가 없다. 도랑물이 뚫려 있지 않아 변소에는 늘 분뇨가 가득하고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물이 부엌으로 들어온다.
도자기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갈 만큼 그 수준이 뛰어났으나 불과 200년 뒤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박제가는 "중국은 아무리 외진 마을의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모두 금벽의 그림을 그려넣은 병, 술병, 물동이, 주발을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의 자기는 지극히 거칠어 바닥에 모래가 그대로 붙어 있으며 자기를 바닥에 놓으면 기우뚱 잘넘어지고 빛깔도 추하다. 운종가(종로)에서는 수천 개의 자기를 놓고 팔지만 부수어 버려도 조금도 아깝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자기 굽는 자가 기술을 배워 정성과 힘을 다해 그릇을 빚더라도 나라에서는 그릇을 사주기는커녕 세금부터 매기려고 달려드니 도공은 기술을 배운 것을 후회한다.
고대 삼한시대부터 해외에 수출했던 동아시아 최고 철 제조술도 쇠퇴했다. 중국의 병기와 농기구는 견고하고 날카롭기가 조선 물건의 곱절이었다. 혹여 중국에서 사들여온 철제품이 손상되면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단련하지 못했다.
1610년 발간된 동의보감이 동양의학의 본고장 중국에서도 크게 각광받았지만 정작 의술 발전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박제가는 조선의 여러 기술 중 의술을 가장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약재는 연경에서 수입해 오지만 가짜였다. 엉터리 의원이 엉터리 약재로 처방하니 병이 낫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간장은 더러워서 입에 댈 수조차 없다. 콩을 씻지 않으며 좀이 슬거나 모래가 들어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자약하다. 옷을 벗고 맨발로 콩을 밟아대는데 수많은 남정네의 침과 콧물, 땀이 메주 안에 섞인다. 간장에서 손톱, 발톱이나 털을 발견하게 되며 모래나 지푸라기 같은 잡물을 걷어낸 다음에야 먹을 수 있다.
활은 멀리 날려보내는 데 치중했다. 중국은 사정 거리가 60~70보밖에 안되었지만 모두 나무로 만들어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조선의 활은 불에 구워 200보까지 날아가나 비가올 때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박제가는 다른 이의 표현을 빌려 "활을 멀리 쏘는 자는 접전을 하기도 전에 미리 겁을 내는 자이다"고 질타했다. 중국에서는 똥을 황금처럼 여기며 길거리에 버려진 재를 찾기 힘들다. 모든 분뇨와 재는 거름으로 알뜰하게 재활용한다.
조선은 똥을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해 악취가 길에 가득하며 개똥이나 말똥은 항상 사람 발에 밟힌다. 재도 거의 모두 거리에 버려져 그 수가 몇 만섬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눈을 뜰 수가 없으며 바람에 날린 재는 가가호호 음식의 불결을 초래한다.
가난했지만 고기는 쇠고기에만 열광했다. 조선은 소 도살이 엄격히 금지됐지만 실제로는 매일 많은 수의 소를 죽였다. 성균관과 한양 오부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었다. 혼사, 연회, 장례, 활쏘기할 때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도살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전국에서 날마다 500마리의 소를 도살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온다.
소는 임신 기간이 길고 한꺼번에 낳을 수 있는 새끼 수도 극히 제한적이다. 돼지고기와 양고기는 식성에 맞지 않고 질병이 생길까 염려해 기피했다. 소가 날로 품귀를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제가는 "그들의 힘을 빌려 지은 밥을 먹으면서 또 그들의 고기를 먹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한 율곡 이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처럼 돼지와 양을 키워 이를 대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제가는 폐쇄적인 국가를 과감히 개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서양선교사 도입이나 청나라에 기술교육생 파견 요청, 기술자 우대 등 당시 금기시 되던 주장도 거침없이 폈다. 더 나아가 지배층인 유자(儒者)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혁명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박제가는 매우 강력한 개방을 요구했지만 그의 든든한 지원자이면서 개혁군주였던 정조도 그의 주장을 수용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조가 죽은 뒤 조정은 그의 뜻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더 강력한 쇄국을 향해 내달리게 된다.
▶박제가(1750~1805)=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평생 서울에서만 살았다. 문인, 화가, 서예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으며 그의 뛰어난 능력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1779년 정조는 규장각(왕실 도서관이자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관아)을 설치하고 검서관이라는 직책을 신설해 서얼 신분의 학자에 문호를 개방했는데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서리수 등의 서얼들과 함께 검서가 됐다. 1798년 그의 개혁 구상을 총정리한 '북학의'를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1800년 최고의 후원자였던 정조가 급서하자 사돈이던 윤가기(尹可基)의 옥사에 연루돼 사지에 몰렸다가 대왕대비의 구원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갔다. 4년 뒤 석방된 뒤 이듬해 사망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