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은 하나 ‘관람객이 많아야 미술관이 산다’
-김섭 교수
재반박에 답함-
김종수 문화도시울산포럼 고문
문화지구로 정비하면 시너지 효과
시 예산으로만 운영하기엔 역부족
이 논쟁은 김섭 교수가 문화도시울산포럼의 사례연구발표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 “미술관에 복제품이 웬 말이며 복합공간은 안 된다”는
논지였다. 그리고 레지던시 공간운영까지 반대했다. 거기에 대한 나의 반론으로 2월24일자에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면 27일자
김교수의 칼럼에서는 우리의 구상을 뛰어 넘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밝혔어야 했다. 그것이 교육자로서, 미술관 추진위원으로서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논쟁의 본질은 피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우리는 처음부터 복제품으로 전관운영을 거론한 적이 없다. 학생들의
미술사 학습에서 종이에 인쇄된 그림보다는 원작에 손색없는 모사작이
낫다는 생각으로 미술관의 한 섹션으로서 교육관 조성을 주장했다.
복사제 그림과 디지털화면 해석으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은 아직껏 어느 미술관에도 없다. ‘푸쉬킨미술관’과 ‘프티팔레미술관’의 시도를 진일보시킨 것이다. 미술관으로 인해 지역 경제가
살찌고 한 단계 높은 고급도시로 갈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는 믿음에서 혁명적이라 했다.
미술관의 평판은 20세기까지는 콜렉션의
가치에서 결정났다. 21세기는 사회교육적기능이 더욱 중시된다. 예술담당 교수는 세기를 넘어가는 경계에서 앞장서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텐데 아직
구태의연하다면 더 이상 논쟁할 가치가 없다. 전체적으로 대응할 가치가 낮지만 김 교수가 지적한 3가지는 그대로 넘길 수 없어 설명을
보탠다.
첫째, 복제그림을 전시하는 사례로 ‘예술의 전당’을 꼽았더니, 김 교수는 그곳은 영리목적이며 미술관의 기본 업무인 수집과
보존, 연구라는 업무를 하지 않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참 좁고 가파른 식견이다.
‘예술의 전당’은 문화예술진흥법에 별도의 조항을 두고
관리되는 기구다. 국가보조금, 사업수입 등으로 운영되는 이 기관에 대해 ‘전시사업을 통해 영리를 취하는 단체나 회사에 장소를 빌려주는 곳’으로
호도했다. 이런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도 되는지. 지금 전시중인 클림트의 ‘다나에’ 한 점으로도 청소년들은 신화와 철학과 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기획이든 대여든 이것이 공립미술관의 역할이 아닌가. 센터냐 뮤지엄이냐가 관람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둘째, 김 교수는 공립미술관
입장료는 받지 않는 것이 품격을 지키는 길이라고 했는데, 실정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시립미술관이라고 해도 시 예산에만 기댈 수 없다.
문화사업이라 해서 세금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우리는 지방미술관이 최대한 자립성을 키우면서도, 시민들의 반향을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고 설계작업전에
참고되길 바랄 뿐이다.
‘뉴욕시립미술관’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같은 공립미술관은 ‘모마’나 ‘구겐하임’같은 사립미술관처럼 고가의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대신 1불이라도 기부(donation)하고 관람한다. 무료입장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지속가능성도 없다. 한국은 물론 외국도
미술관운영에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뉴욕의 ‘아메리칸 포크아트 뮤지엄’은 매우 훌륭한
기관이었으나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미소니언에 소장품을, 모마에 건물을 넘기고 말았다. 워싱턴의 저명한 ‘코코란미술관’ 또한
‘내셔널갤러리’로 병합되었으며, 시애틀 근교의 지역미술관
‘벨르뷰미술관’은 오픈하자마자 3년만에 문을 닫았다. 관람객 확보는 못하고 예산에만 기댄 미술관들의 사례다. 품격을 지키려다 사라져간 미술관이
어디 한둘인가.
셋째, 광주미술관은 71만㎡ 규모의 중외공원 가운데 있고, 경남미술관은 잘 지어진 공공시설 가까이 넓은 공간을
지녔으나 울산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고 접근성과 환경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예를 모르는지?
울산시립미술관이 들어설 울산초등학교 반경 200m 안에는 동헌과
도서관, 애국청년들의 요람인 3·1회관, 근현대 울산불교 포교사 해남사를 비롯 소공원이 2곳 있다. 울산의 종갓집이요 울산의 원핵도시가 있는
곳이다.
이런 역사문화시설이 집약된 곳의 공간성과 장소성은 매우 큰 것이다. 또한 레지던시공간과 객사복원까지 합쳐 주변을 잘
정비하면 미술관과 함께 윤기 나는 문화지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시설을 수용할 지하주차장까지 확보할 수 있어 관람객 창출은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활용할 이런 희귀한 위치는 어디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끝으로 당부할 것은 지역대학의 교수로서 언행이 신중했으면 한다.
좋은 미술관을 세우기 위해 다년간 노력해온 민간에 대해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너무 무례하다. 스스로 문화권력에 빠져
시민단체를 폄하(貶下)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 경상일보 2014. 3.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