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성전파괴와 인자의 오심 - 누가복음 21장 5~38절 주해와 적용 대담 : 양용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그말씀 2003년 12월호
성전파괴와 인자의 오심 - 누가복음 21장 5~38절 주해와 적용
문제제기: 해석의 차이
누가복음 21장 5~38절은,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눅 19:28~40)와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눅 19:41~44) 및 예루살렘 성전청결 이야기(눅 19:45~46)에 뒤이어, 누가복음 19장 47절에서 시작되는 성전에서 진행되는 강화의 절정부를 형성한다. 다른 공관복음서들에서도 그 평행 단락들(마 24장; 막 13장)이 발견되는 본 단락은 그 해석상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불러일으켜 왔다. 그러한 문제들은 주로 본 단락이 다루는 주제가 성전파괴와만 관련된 것인가, 아니면 세상 끝(즉 예수의 재림)과도 관련된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만일 성전파괴와만 관련된 것이라면, 25~27절의 우주적 현상과 인자의 오심 묘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28절의 ‘구속이 가까이 왔다’는 구절과 31절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만일 세상 끝과도 관련된 것이라면, 32절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는 구절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성전파괴 관련 소단락들과 세상 끝 관련 소단락들 사이의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10~11절의 징조들과 25~28절의 징조들, 그리고 29~33절의 무화과나무 징조는 각각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인가, 아니면 세상 끝과 관련된 것인가? 만일 이러한 징조들이 세상 끝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러한 징조들은 세상 끝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리라고 가르치는 누가복음 12장 35~48절과 17장 24절, 26~35절의 교훈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1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기되어 왔던 다양한 제안들은 그 어느 것도 모든 문제들을 만족할 만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문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본문의 전체적 논점 전개의 일관성을 존중하며, 예루살렘 성전 관련 문맥(19:28~21:4)의 흐름에도 일치하고, 누가복음의 다른 세상 끝 관련 구절들(예. 12:35~48; 17:24, 26~35)과의 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위의 문제들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위의 두 입장들 중 전자(즉 본 단락 전체가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입장)의 경우로 보인다.2 이 입장과 관련하여 대개 25~27절의 인자의 오심 구절이 큰 난점으로 제기되지만, 그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고찰해 보면 이 입장이 오히려 가장 적절한 해석적 가능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필자의 입장의 타당성은 아래 석의의 진행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단락(눅 21:5~38)은 다음과 같이 소단락들로 구분될 수 있다:
1) 5~7절: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과 그에 관한 사람들의 질문
2) 8~11절: 성전파괴에 앞서 임할 참화들
3) 12~19절: 성전파괴에 앞서 제자들이 감수해야 할 핍박
4) 20~24절: 예루살렘에 임할 참화들과 제자들의 피난
5) 25~28절: 인자의 임함
6) 29~33절: 무화과나무의 비유
7) 34~36절: 경성할 것에 대한 권면
8) 37~38절: 계속되는 예수의 성전사역
성전파괴 예언과 관련 질문들
(21:5~7)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과 그 성전에 드려진 장식물들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을 때에(5절), 예수는 그 성전이 파괴될 날이 이를 것인데, 그 파괴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6절). 사실 누가는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고를 이미 두 번이나 언급했었다(눅 13:34~35; 19:41~44). 그럼에도 누가가 본 문맥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장식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 성전과 그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안심시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성전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예수는 명확히 하고 계신다. 이 아름다운 성전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안전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 결과 그 성전은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과 마찬가지로(참조. 눅 19:46; 렘 7:11)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어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 47절로부터 시작된 성전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이처럼 성전 자체의 파괴선언으로 그 절정에 도달한다.3
예수의 이러한 충격적인 선언은 그의 청중들에게 그 시간과 징조들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7절). 누가가 제시하는 질문의 형태는 마가의 형태(13:4) 및 마태의 형태(24:3b)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마태가 ‘세상 끝’(sunteleiva" to? aivw`no")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고, 마가도 ‘모든’(pavnta)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암시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세상 끝에 대한 내용을 누가는 질문 가운데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 결과 누가가 제시한 질문은 세상 끝과는 무관하고 성전파괴와만 관련되고 있다.4 누가가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질문을 이런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제시해 나갈 예수의 답변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답변(8~36절)은 전반적으로 세상 끝보다는 성전파괴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적절할 것이다.
성전파괴 전 임할 참화들 (21:8~11)
누가는 이제 성전파괴의 시간과 그에 앞선 징조들에 관한 예수의 답변을 제시해 나가기 시작한다. 예수의 답변은 성전파괴 사건에 앞서, 거짓 메시아들의 출현, 세계정세의 불안, 지구상의 재해들, 천상의 놀라운 현상들이 있게 될 것임을 확언하신다. 본 소단락에서 언급된 징조들을 세상 끝이 아니라 성전파괴에 대한 징조들로 보아야 한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물론 어떤 이들은 8절의 ‘때’(oJ kairo;")라는 표현과 9절의 ‘끝’(to; tevlo")이라는 표현을 세상 끝으로 보려는 시도를 한다.5 그러나 7절의 질문에서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때는 세상 끝이 아니라 성전파괴의 때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8절의 ‘때’와 9절의 ‘끝’도 성전파괴의 때로 보는 것이 질문과 대답 사이의 논리적 연결에 있어 자연스럽다.6 그렇다면 8~9절이 묘사하는 징조들은 AD 70년 성전파괴 사건 이전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내의 다양한 메시아 사칭 인물들(예. 드다, 갈릴리의 유다; 참조. 행 5:36~37; 20:29~30)과 예루살렘 전쟁 이전의 정치적 소요사태들 또는 AD 66년의 예루살렘 전쟁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7
10~11절은 8~9절의 징조들과 같은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징조들을 언급하지만,8 그 강도에 있어서 좀더 강화된 느낌이다. 10절은 9a절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참조. 대하 15:6; 사 19:2). 이는 아마도 AD 66년 예루살렘 전쟁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1a절은 성전파괴에 앞서 이땅에 일어나게 될 재난들(즉, 큰 지진, 기근, 온역)을 지칭한다. 이런 재난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자주 하나님의 심판에 수반되는 특징적인 현상들로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그와 같은 심판과의 연관성이 시사되고 있는 것 같다(참조. 겔 38:19~22; 사 5:13~14; 학 2:6; 행 11:28; 계 6:8, 12; 8:5; 11:13, 19; 16:18 등).
11b절은 징조들의 절정을 이룬다: ‘하늘로부터 공포와 큰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25절에서도 나타나는데,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구약에서 큰 나라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참조. 사 13:9~10, 13; 겔 32:5~8; 욜 2:10, 30~31; 암 8:9; 또한 참조. 계 6:12~14). 흥미롭게도 요세푸스는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전후한 사건들을 11b절과 유사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War 6.288~315).9 그렇다면 우주적 징조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파괴에 이어지기까지의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10
성전파괴 전 감수해야 할 핍박
(21:12~19)
12절의 ‘이 모든 일들’(touvtwn pavntwn)은 8~11절에 묘사된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럴 경우 ‘이 모든 일들 전에’ 일어날 것으로 묘사된 12~19절의 사건들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파괴되는 사건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칭한다.11 그렇다면 12~19절이 기술하는 기간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과 상당 부분 겹친다. 실제로 12~19절의 표현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될 사건들을 내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2절의 ‘손을 대어 핍박하며’는 사도행전 4:3; 5:18; 12:1; 21:27 등을 내다본다. ‘회당과 감옥에 넘겨주며’는 사도행전 5:19, 22, 25; 8:3; 12:4~6; 16:16~40; 22:4, 19; 26:10~11 등을 내다본다. ‘임금들과 통치자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는 사도행전 12:1~11; 23:24~24:27; 25:1~26:32 등을 내다본다. 13절의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는 표현은 아마도 12절에 묘사된 핍박 상황들이 제자들에게 복음증거의 기회들이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막 13:10).12 그렇다면 13절은 사도행전 1:8; 4:33 등을 내다보는 것 같다. 이처럼 12~13절에서 묘사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앞서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박해상황과 그 가운데서도 제자들이 감당할 증인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예고는 사도행전에서 기술된 교회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매우 인상적으로 그 성취가 입증된다.
14~15절은 12절에서 언급된 박해상황에서 대적들에게 답변할 것을 미리 준비하지 말 것에 대한 예수의 권면을 기술한다. 이는 마가복음 13장 11절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표현방식은 상당히 구별된다. 사실 마가복음 13장 11절은 누가복음 12장 11~12절에서 보다 가까운 평행구가 발견된다. 특히 두 곳에서는 말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본 구절(14~15절)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누가복음 12장 11~12절에서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반복을 피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예수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13 14~15절의 이러한 권면은 사도행전 4:8~14; 6:10; 13:8~12 등을 내다본다. 특히 15절의 ‘능히 변박할 수 없는’(ouj dunhvsontai…ajnteipei`n)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4장 14절의 ‘변박할 말이 없는지라’(oujde;n ei\con ajnteipei`n)에서 인상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16a절에 기술된 가족으로부터의 배반은 사도행전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12장 53절, 14장 26절, 18장 29절 등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이 특징적으로 기대되는 현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16b절의 ‘그들이 너희 중에 몇을 죽일 것이다’는 사도행전 7:54~60; 12:1~2; 26:10을 내다본다.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도 그 경험에 동참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너희 중에 몇을’(ejx uJmw`n)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당하는 것이 교회의 통상적인 경험은 아닐 것임을 제안해 준다.
17절은 제자들이 직면할 적대감들을 기술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자들이 ‘모든 이들에게’(uJpo; pavntwn) 미움을 받는다는 표현은 과장적인 것이 분명한데, 이는 마가복음 13장 13절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누가가 사도행전(2:47; 3:9; 4:21; 5:13; 19:31 등)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칭찬과 교제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자신도 이 표현을 과장적인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도행전 28장 22절이 잘 증언해 준다.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18절의 격언적인 선언(‘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은 사도행전 27장 34절에서 인상적으로 반향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이 선언은 12~17절에서 기술된 내용들과 상반되어 보인다. 특히 16절의 ‘그들이 너희 중에 몇을 죽일 것이다’라는 예측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18절의 선언과 유사한 언급이 발견되는 누가복음 12장 7절(‘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다’)의 문맥은 이 선언의 의미를 시사해 준다. 12장 4~5절은 몸을 죽이고 그 이상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가 있는 분을 두려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제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혹시 그들의 육체적인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참조. 16절),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까지 위협하지는 못할 것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18절의 선언은 박해자들이 제자들을 아무리 극심하게 박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안전을 철저히 보장해 주실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14
19절은 18절에서 선언된 영적 안전보장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제자들은 박해의 기간을 충실하게 인내해 나감으로써,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생명(ta;" yuca;")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절은 16절과 18절의 상호연관성을 암시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15
예루살렘에 임할 참화들과 제자들의 피난 (21:20~24)
5~19절에서 예루살렘 파괴에 앞서 일어나야 할 사건들을 소개한 누가는 이제 예루살렘 파괴의 과정과 그 상황에서 제자들의 대처방안을 보다 생생하게 묘사한다. 예루살렘은 군대들에 의해 포위를 당할 것이며, 이는 그 도시와 성전의 끝이 가까웠음에 대한 징조가 될 것이다(20절). 따라서 제자들은 이러한 징조를 보게 되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는 안 되고,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자들은 비교적 안전한 산으로 도망해야 하고, 그 도시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피난해야 한다(21절).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다(22절).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녀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께서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 백성을 끊임없이 모으려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눅 13:34). 그 결과 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참조. 눅 13:35; 19:41~44). 이러한 징벌이 시행되는 때에는 위험에 가장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는 어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큰 환란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23절). 예루살렘 백성들은 살육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운명에 처할 것이며,16 예루살렘 도시 자체는 이방인들의 손에 파괴를 당하고,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17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24절).
20~24절은 마가복음 13장 14~20절과 평행을 이루는데, 두 단락 사이의 어구적 평행은 매우 제한적이며(20절의 네 단어, 21a, 23a절), 대부분의 기술들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마가는 ‘멸망의 가증한 것’과 관련된 이해하기 힘든 징조에 대해 언급하는데 반해(막 13:14), 누가는 예루살렘 도시가 포위당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언급한다(20절). 마가는 환란이 닥칠 때에 도망하는 방식과 관련된 구체적인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데 반해(막 13:14~16; 참조. 눅 17:31), 누가는 단순히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가라는 간략한 지침만을 제시할 뿐이다(21b절). 누가는 예루살렘 멸망을 하나님의 징벌이자 진노라는 언급을 포함시킴으로써,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밝힌다(22, 23b절). 마가복음 13장 20절의 수수께끼 같은 언급(‘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인데,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다’)은 생략되어 있다. 그 대신에 누가는 유대인들의 죽음과 포로에 대해 언급하며,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힐 것임을 언급한다(24절).18
이러한 차이들은 누가가 마가의 기술을 재진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누가는 아마도 AD 70년의 성전파괴 사건 이후에 그의 복음서를 저작하는 상황에서, 마가의 암시적 기술들을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비추어 보다 명시적으로 자세히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20, 24절). 또한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아 충격에 쌓여 있었을 그의 독자들에게 그 사건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좀더 명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에 대한 언급을 보다 강력하게 진술하고 있다(22, 23b절).
인자의 임함 (21:25~28)
대다수의 학자들은 25~28절에 언급된 징조들과 사건들을 세상 끝(즉 예수의 재림)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앞서 지적했듯이, 다음 몇 가지 요소들은 본 소단락이 세상 끝이 아니라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간주돼야 할 것을 촉구한다.
첫째, 7절의 질문은 성전파괴의 때와 그것을 지시해 주는 징조와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떤 명백한 주제전환의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25절 이하도 성전파괴에 관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24절과 25절 사이에 아무런 시간적, 사건적 단절도 언급되거나 암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19 25절 이하도 20~24절과 마찬가지로 성전파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32절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는 언급에 있어 ‘모든 일’은 본 소단락을 포함하여 31절까지의 모든 내용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우며, 그럴 경우 예수의 예측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본 소단락은 세상 끝이 아니라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0 넷째, 누가복음 12장 35~48절, 17장 24절, 26~35절에서 세상 끝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리라고 하였는데, 25~28절을 세상 끝에 대한 징조로 본다면 둘 사이에 충돌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의 이러한 입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장애물로 대두되는 25~27절의 ‘하늘의 징조들’과 ‘인자의 임함’ 관련 표현들은 그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인상적인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다.21
바로 위에서 지적했듯이, 25절은 24절과 아무런 단절 없이 앞 단락의 사건들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현상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25~26절은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한 후에 ‘인자의 임함’으로 표현된 성전파괴 사건 자체가 일어나기 직전 또는 그 사건 자체를 묘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25절의 ‘해와 달과 별들에 있을 징조들’과 26절의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림’은 흔히 세상 끝에 대한 징조로 간주되어 왔지만 이는 필연적인 해석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사야 13장 10절(‘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다’)과 34장 4절(‘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눅 21:11). 이사야 13장 10절은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묘사한 것이고, 이사야 34장 4절은 에돔을 비롯한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것이다. 만일 이방 나라들과 제국들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도 이러한 묵시적 언어가 사용되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과 그들의 신앙의 중심인 성전의 파멸을 묘사하는 데 이러한 묵시적 언어가 사용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25~26절의 묵시적 표현들은 반드시 세상 끝을 묘사할 필요가 없으며, 얼마든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정치적 몰락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 겔 32:7; 욜 2:10; 암 8:9; 또한 참조. 요세푸스, War 6.288~315).22
한편 마가복음 평행단락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25b절의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이다’라는 표현들은 선지서 일부(사 3:24~4:1; 33:9; 34:1~15; 렘 4:23~26; 나 1:4~5 등)에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절들 역시 이스라엘이나 제국들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25b절의 표현도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멸망을 묘사할 수 있다.
27절(‘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 가운데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가는 것을 볼 것이다’)은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마지막 때 예수의 재림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본 구절 역시 그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할 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먼저 다니엘 7장 13~14절에 기초하고 있는 본 예언은 문맥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니엘 7장 13~14절에서 ‘인자의 오심’은 인자가 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영광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가는 것과, 그 결과 인자의 권위와 왕권이 온 세상에서 인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전파괴는 인자의 심판자로서의 권위가 온 세상에 공개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지되는 종말론적 심판행위로 간주될 수 있으며(참조. 눅 13:34~35; 19:41~44), 따라서 이 구절은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지칭하는 데 매우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23
그럴 경우 28절의 ‘이런 일들’은 성전파괴로 절정을 이루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할 것이다.24 그렇다면 ‘너희 구속(hJ ajpoluvtrwsi")이 가까웠다’는 표현은 미래의 최종적 구속을 의미하기보다는 예루살렘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28절의 ‘너희’가 7절에서 질문을 던진 제자들이라면,25 본 구절은 예루살렘에 대한 인자의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고난 가운데 인내해야 했던 제자들에게, 인자로서 예수의 진정한 권위를 입증해 준 성전파괴와 더불어 제자들의 구속이 보다 확고하게 보장될 것임을 확인해 준다. 예루살렘에게 약속되었던 구속(참조. 눅 1:68; 2:25, 38)은 더 이상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그 예루살렘이 심판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예수의 진정한 심판적 권위를 인지하고 그의 구속을 소망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26 따라서 제자들은 고난 중에도 머리를 들고 자신들의 구속을 확신 가운데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18~19절의 약속(‘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이다’)을 재확증해 주는 효과를 갖는다.
무화과나무의 비유 (21:29~33)
지금까지 제시된 해석적 입장을 따를 경우, 29~30절의 무화과나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하다. 팔레스타인 내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는 대개 다른 ‘모든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늦은 봄이 돼서야 잎사귀를 낸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내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화과 잎사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여름이 바로 임박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20~24절(참조. 10~11절)의 징조들은 25~27절의 성전파괴 사건에 대한 놓칠 수 없는 분명하고도 임박한 징조가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뿐 아니라(사 28:3~4; 렘 8:13; 호 9:10, 16; 욜 1:7, 12; 미 7:1~6)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도(눅 13:6~9; 막 11:12~14, 20~24)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주제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데, 본 문맥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과 관련하여 무화과나무가 비유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의미심장하다.
31절의 ‘이런 일들’(tau`ta)은 앞의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나타나는 것에 해당하는 현상들(즉, 20~24절)을 지칭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일을 보게 되면, 제자들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나라 주제는 자주 예수의 현재적 사역과 연관해서 소개되어 왔다.27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는 그 동일한 주제가 성전파괴 사건에 나타나게 될 예수의 심판적 통치사역과 관련하여 소개되고 있다.28
32절에서 누가는 성전파괴와 관련된 7절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긴 답변의 결론을 제시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 결론적 답변에서 예수는 ‘모든 일들’(pavnta), 즉 8~31절(특히 25~28절)에서 예언된 사건들의 시한(時限)을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으로 명백히 규정하신다.
그런데 ‘모든 일들’을 세상 끝으로 보는 이들은 ‘이 세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제안들을 해 왔다. 어떤 이들은 누가가 ‘세대’를 ‘인류’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제안한다.29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그것을 지지해 줄 언어적 증거를 갖지 못한다.30 어떤 이들은 ‘이 세대’가 세상 끝 징조들이 주어지는 세대를 지칭한다고 제안한다.31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세상 끝에 속한 세대가 세상 끝을 볼 것이라는 식의 무의미한 반복어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32 사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이 세대 안에 이루어질 일들이 세상 끝과 관련된 것이라는 전제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문제들(특히,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세상 끝이 ‘이 세대’ 안에 도래하지 않은 문제)을 해결하기 위해 도출된 부자연스러운 제안들이다. 그러나 이 세대 안에 이루어질 ‘모든 일들’을 성전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세대’가 예수 당대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자연스런 해석33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제 우리가 25~32절까지를 위와 같이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첫째, 만일 우리가 25~28절을 세상 끝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경우, 32절의 예수의 예언은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34 하지만 25~28절을 성전파괴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경우, 예수의 예언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파괴 당시 성취되었고, 예수의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세대’) 중 많은 이들이 그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 둘째, 만일 우리가 25~28절을 세상 끝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고, 29~31절을 세상 끝에 있을 징조로 이해할 경우, 이는 앞의 누가복음 구절(12:35~48; 17:24, 26~35)과 상충된다. 29~31절에서는 세상 끝에 대한 징조가, 그리고 32절에서는 그 시한(時限)이 언급되고 있는데 반해, 위의 구절들에서는 세상 끝에 대한 무지가 선언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점을 예견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25~32절 모두를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관련된 언급으로 이해할 경우, 이러한 상충의 문제는 아무런 무리 없이 해결된다.35
계속되는 예수의 성전사역
(21:34~36, 37~38)
34~36절은 사람들의 질문(7절)으로 비롯된 예수의 긴 답변을 종결짓는다. 실제로 성전파괴의 때와 그 징조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33절에서 마무리되었다. 이제 본 소단락은 지금까지 제시된 예수의 답변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한 권면을 기술해 나간다. 제자들은 이러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그 날이 덫과 같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34절).
여기서 ‘그 날’(hJ hJmevra ejkeivnh)은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심판의 날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이 권면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기술하는 가운데, 성전에 대한 심판의 날과 유사한 측면을 갖는 마지막 심판 때와도 연결해서 이해할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36 그리고 그의 이러한 기대는 35절의 진술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다.’ 사실 성전파괴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자로서의 종말론적 통치권 행사의 한 예로 본다면, 성전파괴 사건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예수 당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누가의 독자들도 공히 ‘그 날’의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36절).
마지막 소단락(37~38절)은 누가복음 19장 41절로부터 시작된 예수의 성전사역을 종결짓는다.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은 구석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참조. 행 26:26), 성전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행해졌다(37절). 그리고 모든 백성은, 성전과 더불어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성전 지도자들과 달리(참조. 눅 19:47), 그 가르침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38절; 참조. 눅 19:48). 비록 유대교 지도자들의 불순종으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지라도, 모든 유대인들이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백성은 예수의 가르침에 호의적이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대상들인 것이다(참조. 행 2:41; 4:4; 5:14; 6:7).
주(註)
1. 더욱이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은 콘첼만(H. Conzelmann)의 종말 ‘지연’ 이론 이래로 제기되어온 누가복음의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과 연관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복잡하게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본 논의에서는 이러한 방대한 신학적 문제들을 상세히 다룰 수 없으며, 단지 본 단락이해에 좀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을 좀더 단순한 형태로 다루고자 한다. 콘첼만의 ‘지연’ 이론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The Theology of Saint Luke (trans. G. Buswell; London: Faber, 1960), pp. 95-136을 보라; 특히, 본 단락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pp. 125-32를 보라.
2.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A. Feuillet, ‘Le discours de Jesus sur la ruine du Temple d'apres Marc XIII et Luc XXI, 5-36’, pp. RB 55 (1948), pp. 481-502; 56 (1949), pp. 61-92; A. Salas, Discurso escatologico prelucano. Estudio de Lc 21, 20-36 (Biblioteca de La Ciudad de Dios, I/16; El Escorial, 1967); O. da Sinetoli, Luca. Il vangelo dei poveri (Assisi, 1982), pp. 636-56 등; 위의 정보들은 V. Fusco, ‘Problems of Structure in Luke's Eschatological Discourse (Luke 21:7-36)’, in G. O'Collins, S.J. and G. Marconi (eds), Luke and Acts (trans. M.J. O'Connell; New York: Paulist Press, 1991), pp. 227 note 24로부터 빌린 것이다. 본 단락에 대한 마태복음 평행구와 관련해서는 R.V.G. Taske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London: Tyndale Press, 1961), pp. 223-31; 마가복음 평행구와 관련해서는 N.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2; London: SPCK, 1996), pp. 339-66 (Wright는 누가복음 관련구절에 대해서도 가끔 주목한다); R.T. France, The Gospel of Mark (NIGTC; Carlisle: Paternoster Press, 2002), pp. 497-546 등이 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3. 사실 성전 관련 가르침과 이야기는 19:41-21:38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전체 단락의 처음(19:41-44)과 끝(21:5-38)이 성전파괴에 관한 가르침으로 감싸여져 있다는 사실은 본 대단락의 초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성전에 대한 심판주제에 맞추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4. R. Maddox, The Purpose of Luke-Acts (Edinburgh: T. & T. Clark, 1982), p. 118; R.H. Stein, Luke (NAC, 24; Nashville: Broadman Press, 1992), p. 512.
5. C.F. Evans, Saint Luke (TPINTC; London: SCM Press, 1990), pp. 738-39.
6. J. Nolland, Luke 18:35-24:53 (WBC, 35c; Dallas: Word Books, 1993), pp. 991-92;
7. Maddox, Purpose, p. 119.
8. I.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NIGTC; Exeter: Paternoster Press, 1978), pp. 765-66; J.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AB, 28a; New York: Doubleday, 1985), pp. 1334-35; Fusco, ‘Structure’, p. 81; Nolland, Luke, pp. 992-93.
9. 참조. Tacitus, Histries 5.13; 마카베우스2서 5:2-3.
10. Marshall, Luke, 765; Evans, Luke, pp. 740-41; Stein, Luke, p. 514; Nolland, Luke, p. 992.
11. Maddox, Purpose, p. 116; Stein, Luke, p. 516.
12. Maddox, Purpose, p. 116; Stein, Luke, p. 517; Nolland, Luke, p. 996.
13. 특히 15절에서 ‘나’(ejgw;; 즉, 예수 자신)가 강조되고 있음은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 준다; Stein, Luke, p. 517.
14. E.E. Ellis, The Gospel of Luke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244; Marshall, Luke, p. 769; Stein, Luke, p. 518.
15. 참조. Nolland, Luke, p. 998.
16.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전쟁으로 말미암아 1,100,000명이 목숨을 잃었고(대부분 무교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유대인들), 97,0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War 6.420). 비록 요세푸스의 기록이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참상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7.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acri ou| plhrwqw`sin kairoi; ejqnw`n)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제한된 기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예루살렘/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 시사되고 있다(참조. 롬 11:25-32). 몇몇 학자들은 이 기간에 해당하는 ‘이방인의 때’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기간이라고 제안한다; Maddox, Purpose, p. 120; 참조. Marshall, Luke, pp. 770, 773-74.
18. 참조. Marshall, Luke, p. 770.
19. 참조. Maddox, Purpose, p. 120; Fusco, ‘Structure’, p. 86. 24절과 25절 사이의 이러한 단절의 부재는 25절 이하를 세상 끝으로 보려는 학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제기해 왔으며, 그 결과 다양한 해결책들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그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하지 못하다; 참조. Maddox, Purpose, p. 149 note 82. 그런데 만일 25절 이하를 계속해서 성전 파괴와 관련된 기술로 본다면, 이러한 단절의 부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입장의 강력한 지지요소가 된다.
20. ‘모든 일’과 ‘이 세대’가 무엇을 지칭하는가와 관련된 논의는 다음 장(제6장)에서 다룰 것이다.
21. A.R.C. Leaney,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BNTC; London: A. & C. Black, 1966, 2nd edn), pp. 262-63.
22. Leaney, Luke, p. 262; Wright, Victory, pp. 362-63.
23. Leaney, Luke, pp. 70, 262; Wright, Victory, pp. 361-62. 복음서 안에서 ‘인자의 오심’ 표현은 다양한 종말론적 상황들에 적용되고 있으며(예. 변화산 사건,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성전파괴, 재림 등), 재림은 그 다양한 적용들 중 한 경우일 뿐이다; 참조. Leaney, Luke, pp. 70; R.T. France, Divine Government: God's Kingship in the Gospel of Mark (London: SPCK, 1990), pp. 64-84.
24. Maddox, Purpose, p. 121.
25. Maddox, Purpose, p. 122. 본 강화가 진행되는 동안 예수의 강화의 대상이 바뀐 표지가 없음을 주목하라.
26. 참조. J.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7), p. 741.
27. 참조. M. Wolter, ‘“Reich Gottes” bei Lukas’, NTS 41 (1995), pp. 541-63.
28. Wright, Victory, p. 364.
29. Conzelmann, Luke, p. 131; Leaney, Luke, p. 263.
30. Maddox, Purpose, p. 113; Evans, Luke, p. 759.
31. Ellis, Luke, pp. 246-47; Marshall, Luke, p. 780.
32. Evans, Luke, p. 759. 그 밖의 다양한 견해들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Maddox, Purpose, pp. 111-15를 보라.
33. Maddox, Purpose, p. 115. 참조. 눅 7:31; 11:29-32, 50, 51; 16:8; 17:25; 행 2:40. 위 구절들에서 ‘이 세대’는 예수 당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또는 적어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참조. Stein, Luke, p. 528.
34. Evans, Luke, p. 758.
35. 참조. Wright, Victory, pp. 360-65, 특히 p. 365.
36. 참조. Leaney, Luke, p. 263. 이러한 전환은 마가의 경우 좀더 확실하며(13:32), 마태의 경우 아주 명백하다(마 24:36); 참조. France, Mark, pp. 501-505.
양용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 200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