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길
베드로후서 2장 9-16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에서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유혹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대로 살게 하는 모습은
구약시대나 베드로 사도의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꼭 같은 모습입니다.
옛날에는
거짓 선생들이 믿는 자들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세상의 정욕대로 살게 하였지만
지금은 교묘하게 유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의 말이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하였다는 말입니다.
내 육체가 끄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오늘의 세상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심판이 어디에 있느냐며
자기 마음의 정욕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라기 3:16-18절보면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이러한 심판이 지체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자지 않고 집행되고 있습니다.
그 본보기로
천사들도 범죄 하면 용서하지 않고
지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 때의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 심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이 없다고 하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종말이
어떻게 되어지는 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멸망당하는 모습이구나!
구원 받은 자는
저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심판이 지금
집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요한계시록 22:11절 새 번역으로 봅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사람이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이 말씀은
고치고 돌아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확정된 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자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이 죄 인줄 알고
주님의 보혈 안에
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신이 돌이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결과인 것입니다.
2:1-8절까지
하나님의 쉬지 않으신 심판을 말씀하시고서
결론부분입니다.
9절을 보세요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란
노아의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믿어서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았지만
그 성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이들이 경건한 자들이며
이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을 불의한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10-14절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에
멸망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의 평소 관심사인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산
사람들입니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주관하는 이란
우리주님이 온 세상을 주관 하시는데
그 주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기로 작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노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롯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판의 징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정욕을 따라간다면
이것은 이미 심판이
집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멸망 받을 자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고집스럽고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잡혀 죽기위하여 난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살아도
잡혀 죽기위한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짐승도
여러 쓸모가 있는 짐승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잡혀서
사람들의 먹이감이 되는 짐승은
돼지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어울리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멸망할 짐승에게는
진주를 발로 밟고
도리어 헤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짐승처럼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밤에 쾌락을 즐깁니다.
그런데 낮에도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의 시대에
멸망 받을 자들의 모습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15-16절에보면
지금 베드로사도가
거짓 선생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예를 들어 말하면서
그 구체적인 인물로
발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술사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왕 발락의 요청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온
사람입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따라 나섰다가
당나귀가 사람의 말로
이 미친 선지자를 금지한 것입니다.
이는 멸망당할 짐승보다 못하여
짐승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바가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백성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는가 하면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발람이 떠나면서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할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미디안 여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의 축제가 다 그러하듯이
우상을 숭배하고
그 뒤에는 음란한 짓을 하게 만들어
범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40년을 광야를 지나고 나서
가나안 근처에 와서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40년 동안 만나만 먹고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은
여자를 보다가
기름진 음식과
매혹적인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런 유혹들이
발람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유혹은
동일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만을 믿고 산다는 것은
이 화려한 유혹의 세상에서
무언가 바보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 같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사느냐고 놀릴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120년을 기다린 것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그리하자고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주님의 심판이 두렵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것은
혈과 육, 금과 은이 아니라
주의 보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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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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