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아침에 각자 걷고, 밥 모심 후, 감자와 단호박을 먹으며 차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둘러앉습니다.
.....“미생물”이 나한테 그래. “너희들 나한테 미생물, 미생물 그러는데, 나는 작지 않아. 아름다울 미로 바꾸면 말이 된다. 너희들의 시선으로 나를 보니까, 나를 작다고 하는데, 너희가 근본이 맞냐?”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이런 말이 있잖아. 누가 한 말이지? 누가 한 말이야. 그지? 우리가 크다, 작다. 나한테 비교하는 얘기란 말이야. 코끼리가 크다, 다람쥐가 작다. 그러잖아. 내가 기준이야. 그런데, 네가 왜 기준이야?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자기 아빠가 최고야. 남의 집 아빠는 아빠로 안 보여. 크면 우리 아빠도 남의 집 아빠랑 똑같구나. 상대가 절대시 되던 아버지가 상대시가 되는 거야. 종교도 마찬가지야. 기독교밖에 없다. 크면,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은 존재구나. 상대화시키는 거야. 그게 성장, 성숙하는 거야. 아름다울 미를 쓰면 말이 돼.
(사랑도 에너지예요? 모든 것이 에너지예요?)
에너지지. 에너지가 한문으로 말하면, 기야. 뭉쳐있으면 물질이 되는 거고, 흩어지면 공기고, 뭐 그런 거지. 우리도 기 덩어리지. (모든 감정도 에너지고, 그것을 만든 것도 저예요?) 어떤 놈이 만든 지는 몰라. 어떤 사람은 미생물이 만든다더라. 미생물은 어디서 온 지 모르고. 방 안에 가만히 있다가 웬 사람이 쏙 들어왔어. 달라지잖아. 괜히.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던지, 험악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던지, 인간이 하나 들어왔을 뿐인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가 누구하고 얘기도 안 했는데, 바뀌는 거야. 왜 그래? 거기서 에너지를 뿜어낸다는 거야. 우리 몸이 에너지를 받는 거야. 금방 알지. 머리는 몰라. 몸은 안지. 그러니, 경계 해야 되겠다. 험악하던 분위기가 어떤 사람이 앉아있는데, 슬슬 바뀌어서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는 거지.
똑같은 말도 내가 어떤 상태냐에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어. 시편에 하나님이 나를 불 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나를 온전히 지켜줄 것이다. 이런 대목이 나와. 이것을 그전에도 읽었던 내용인데, 독방에 갇혀서 읽는데, 막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갇혀서 읽은 거니 그것이 다른 게 읽힌 거야. 내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그 말이 달라.
“서울의 봄”인가 그 시절에 어떤 목사님이 강의해 달라 해서 거기서 통일 어쩌고 말해서 국가 보안법 위반을 없애야 된다. 다 고쳐야 된다. 이런 얘기를 했어. 거의 끝날 때쯤, 웬 건장한 젊은이들이 막 들어오더라고. 교회 선배 목사 잘 아냐고, 잘 안다고, 했더니, 그 목사님에 대해 말할게 있으니 잠깐 가시자고, 나를 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가자마자 수갑을 채워 놓고 걸어놓고는 “체포했습니다.” 잡혀갔어. 누가 신고를 했더래. 누가 이상한 말을 한다. 나중에 들어 온 사람들이 형사들인 거 같아. 얘기 다 끝났을 때인데. 반공법으로 들어갔어. 그 형님과 내가 둘이 같이 체포당했는데, 한번도 서로 못 만났어. 똑같은 경찰서에서 조사받았는데, 그 선배와 나는 석방되던 그 전날 만났어. 보름 정도 조사받고 검찰로 넘기고, 검찰이 기소를 하면, 재판을 받는 거지. 그 과정을 거칠려면 3,4개월 걸린대. 나는 20일인가 있다 나왔어. 왜 풀어줬는지 모르겠어. 재판해봤자, 말만 한 거니, 그래봤자 1년 못 살아. 그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를 통일주체 국민회의인가, 거기서 뽑았잖아. 대통령 취임하는 날, 목사 둘을 구속하는 게 재미없잖아.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한테는 그것이 저 분이 나한테 주는 경험이지.
조사하는데, 첫마디가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겁주면서 시작해. 한 사람은 빼짝마르고, 한 사람은 유도선수처럼 덩치가 크고, 서울서 왔다고 그래. 겁 참 잘 주더라. 보름쯤 조사를 했는데, 나는 다 불었어. 하나도 안 감추고, 뭐가 없어. “국가보안법 없애자는 말 했냐?” “같은 동족끼리 서로 적이 돼서 싸우면 되겠어요? 그러지 말자고 한 얘기입니다.” 다 받아적었지. 내 일기장, 다 가져갔어. 나중에 동네 와서 내 뒷 조사를 다 했대. 여자관계 없냐, 금전관계 없냐. 그때 고맙게도 그런 것이 없어서 못 털었어. 오니까, 마을 사람들이 얘기를 해. 거의 끝나니까, 조사할 때는 법적으로 내가 아직 죄인이 아니잖아. 피의자잖아. 그러니, 유치장에 넣을 수가 없어. 그 숙직실에다 재우드라고, 세끼를 먹여줘. 원하는 걸로. 내가 거의 못 먹고. 내 꺼를 자기들이 배고프니 다 먹고. 열흘 쯤 되니까 조사가 다 끝났어. 검찰로 넘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를 유치장에 넣더라고, 난생 처음 유치장 들어간 거야. 이만한데, 통행금지 위반한 사람들, 잡범들 자고 가는 데야. 그날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야. 나를 집어놓고 자물쇠를 잠그고 가더라고. 노란 전등이 가운데 하나 있어서 이쪽 방도 비추고 이쪽 방도 비추고,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있는데, 저 구석에서 인기척이 나. 분명히 나 혼자인데, 보니까, 누가 군대담요를 둘둘 말아서 쳐박아 놓은 거야. 담요를 사람으로 착각했나 보다. 다시 앉았는데, 아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인기척이 나. 거기 누가 있어. 사람은 없고, 담요만 있어. 두 번째 그렇게 느껴지니까, 소름이 쫘악 돋드라. 무슨 생각이 나니까, 누가 여기서 자살을 했나 보다. 자살을 하면, 귀신이 거기 있다던데. 그러면서 겁이 나는 거야. 겁나면 소름 돋잖아. 세 번째 인기척이 나. “누구야?”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누구야?” 그랬더니, 누가 얘기해. “네가 명색이 목사라고 하면서 나도 몰라보냐? 너무 그렇게 얘들 말로 쫄지 마. 여기 네가 존경하던 선배들이 다 다녀간 곳이야. 내가 너 오기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것이 들려. 바로 문익환 목사님등등이 떠올라. 다 다녀간 데잖아. “나도 모르냐? 내가 너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이세요?” “그래, 나다.” 내가 그분하고 일대일로 만난, 눈으로는 못 봤어. 음성으로. 그런 만남이였지. “겁내지 마. 다 내가 여기 있어. 너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 마음이 싸악 편안해 지는 것이 그렇게 좋아. 그 기회를 또 안 놓치고, “부탁이 있습니다.” “말 해 봐.” “밥 좀 먹게 해 주세요. 밥이 안 넘어가요. 굶어 죽게 생겼어요.” “먹어라, 누가 못 먹게 했냐? 맘 놓고 먹어.” 불안, 공포가 차 있으니까 못 먹은 거잖아. 이게 없어지니까 겁낼 게 없는 거야. 그다음 날부터 밥을 잘 먹었지. 형사를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지는 거야. 겁이 안 나는 거야. “형사님, 일 때문에 고생이 많수다. 집에도 잘 못 가고 고생이 많네, 다 끝났으니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형사도 조사가 다 끝났으니 겁줄 이유가 없잖아. 마지막 진술서를 내야 하는데, 나보고 읽어서 해 달래. 문장이 엉망이야. 교정을 다 봐줬어. 살살 나한테 유리하게 고치면서. 좋아하더라. 지독한 형사가 있었는데, 나중에 나한테, 내가 달라지니까 저도 달라지더라. 마지막에는 목사라 하니까 인생 상담도 했어. 자기 중학교 다니는 자식이 속을 무지 썩힌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이런 얘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은데, 집에 있는 집사람은 얼마나 불안하겠어. 내 마음을 전해야 하는데, 만나게를 안 해주는 거야. 면회가 안 돼. 79,80년도니까 무대뽀로하는 거야. 집사람이 속옷을 가져오면 수위실에 있으면, 새 옷을 갈아입으면 갖다주고. 집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여. 집사람은 모르지. 저 사람한테 내 편안한 마음을 전해야 하는데, 만나게 해 주질 않으니까, 마침, 누가 보다가 남은 헌 신문지가 있더라. 광고면에 보면 여백이 많아. 그래서, 찢어서 백지를 만들었어. 펜을 주라 하면 줄 리도 없고, 펜을 어떻게 구하나 했더니, 방 모서리에 누가 모나미 볼펜 심만 박혀있어. 꺼내서 썼어. 내가 마음이 참 편안하고 그러니까 당신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 방법이 없지. 내 속옷에다가 쌌어. 그러고 보냈어. 읽어보면 읽어보는 거고 안 읽어보면 할 수 없는 거고. 나중에 집에 가서 보니까, 그 사람 성경책에 그 쪽지가 있어. 어떻게 발견했냐 했더니, 세탁기에 넣을라고 했는데, 뭐가 똑 떨어지더래. 나를 만나실라고 거기에다 넣으셨구나. 나중에 그렇게 생각했지. 그때같이 들어갔던 형님은 돌아가셨다.
(요즘에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진짜 요즘에 NO PROGRAM, NO IDEA. 재밌게 지내. 주로 엄정 집에서 지내. 두 자매가 농장을 일구고 사는데, 큰 집에서 살고 있어. 오늘 하루 살고,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얼마나 좋아. 생각이 비슷하고, 방향이 같고, 그런 사람들끼리 함께 길을 가면서 두런두런 얘기도 하면서 필요할 때 손을 잡아주고, 그러면 됐지.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데이빗 홉킨스 뒤에 보면, 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자기의 내력, 저자에 대한 글이 붙어 있어. 그것을 먼저 한번 읽어보자.
점심을 먹고, 한 숨 푹 자고,
데이빗 홉킨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를 수도 있다. 따를 때 어떻고, 거역할 때 어떻다라는 것을 둘 다 경험해 보는 거야. 비로소, 이것을 경험하지 못 했을 때는, 이것이 뭔지 모르는 거지. 낙원에 살면서 낙원에 사는 것이 아니야. 거기가 낙원이지 모르니까. 얼마나 좋은 데인지 몰라. 첫째 아들은 안 떠났잖아. 내가 늘 농담삼아 얘기하지만, 저들은 아직 아버지 품에 사는 것이 뭔지 몰라. 얼마나 좋은 건지. 둘째 아들은 떠났기 때문에, 이것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거야. 돌아와야 아버지하고 처음부터 함께 산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저 사람 무릎 아파서 쩔쩔 매고 있었을 때, 그러다가 무릎이 성해져서 걸어 다니잖아. 그냥 성한 무릎으로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그제서야 알잖아. 우리 보통 그렇잖아.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 사는데, 잃어버려 봐. 그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게 될 거야.
(돌아온 탕자에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큰 아들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가 액센트를 주고 싶은 것은 탕자보다 아버지였던 것 같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보통 그 당시에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거지. 그때 당시 살았던 유대인의 생각에 하나님은 둘째 아들이 들어왔을 때, 못 들어오게 해야돼.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야. 그런데, 예수님은 받아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거지. 나는 그게 더 예수께서 액센트를 주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탕자에 초점을 두는데, 그것도 괜찮아. 탕자가 왜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알아야 해. 고생해 보지 못 한 놈은 편안한 것이 뭔지 모르잖아. 아파보지 못 한 사람은 건강한 것이 뭔지 몰라.
(어떻게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을 했을까요?)
처음부터 그랬지. 거기서부터 왔으니까. 한국 사람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야. 진짜 와서 온갖 좋지 않은 것을 다 경험하고 아니다, 싶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진짜 돌아간 거지. 그렇지 않는 사람은 요가난다에 말에 따르면, 세상에 또 와야 해. (웃음) 환생이라고 그래. 데이빗 홉킨스 정도 되는 사람이면, 환생을 안 하지. 또 올 수도 있어. 카르마에 의해서,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올 때는 달라이라마처럼,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기의 뜻으로 오는 거래.
여기, Same- Self라고 하는데, 동일한 큰 나.
아까 얘기했잖아. 내 몸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나온단 말이야. 이 사람이 얘기하는 건, 내 에너지가 아니야. 자기 에너지가 아니야. 대문자 Self 큰 자아와 하나님과 같다고 보면 돼. 하나님의 에너지가 나를 통해서 나오는 거야. 내가 내 힘을 내는 것이 아닌 것을 경험했다는 거야. 교통사고로, 깡패들 싸움으로. 자기가 그것을 경험했다는 거야.
예수님이 소경을 눈 뜨게 해주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우리가 얘기하는 상식적인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기적이란 말을 쓰는데, 이 사람 말은 기적은 없자.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 사람들이 보면,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그때 당시 사람들이 우리를 본다면, 어떻게 미국에 있는 사람과 얘기를 하냐고. 우리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기본이잖아. 그때 당시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 봐봐. 그 사람들한테는 기적이라고.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몰라서 그런 거지. 원래 그런 거야. 모르는 사람에게는 기적이지만, 다 본 사람들은 당연한 거야. 소경이 눈 뜬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야. 예수가 그런 일을 했을 때, “내가 너를 눈 뜨게 해 준 것이 아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그런 거야. 믿음. 지가 믿는 거 아니잖아. 믿어지니까 믿는 거지. 자기가 만든 믿음이 아니잖아. 어디서 온 거란 말이야. 그 믿음으로 안 될 것이 없다. 요새 의사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 수술을 꼭 해야 한다는 것보다 언제든지 마음의 작용으로 그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많이 나오고 있단 말이야.
(가족과 충돌하면 까지 병원을 안 가도 될까요? 저는 동생이 원해서 수술을 했거든요,)
네가 동생보다 크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네가 동생보다 똑같거나 작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아니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잘한 거지. 네 생각을 동생한테 강요해서는 안 돼. 못 받아들여. 이해가 안 돼. 너는 동생의 세상을 거쳐왔기 때문에 이해가 가잖아. 나도 과거에 그랬으니까. 그런데, 동생의 입장에서는 저 언니가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뭔지 모르는 거야. 고등학생은 중학생 과정을 알잖아. 중학생들은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고등학생을 몰라.
(귀향이라는 말이 나왔네요.)
return home 이렇게 나왔다.
여기서 개별성이라는 것은 individuality 개체성, 독립된 개체가 있다고 하는. 그것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던 거지. it is only the illusion of individuality 개체가 있다는 환상, 착각 그것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내가 독립되어있다는 착각, 내가 어디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착각, 그것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내가 그런 얘기 했잖니. 내 몸은 아파. 그런데, 나는 괜찮아. 그럴 때, 내 몸과 내가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야. 내 몸은 아파. 그러나, 나는 안 아파, 괜찮아. 이런 말을 한단 말이야. 나, 우주적 자아라고 큰 자아라고 얘기하는 거야. 걔는 안 아파. 보통 얘기할 때, 다리가 아프다. 얘가 아파. 나는 괜찮아. 얘기할 수 있다고. 나라고 하는 것과 내 육체가 일치 시켰을 때 그때 내가 아프다고 하는 거지. 그런데, 큰 나가 내 육신이 아니란 말이야. 내 몸은 피곤하고 아파. 나는 괜찮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자기가 경험한 얘기를 쭉 하고 있는 거지. 여기저기 가서 못 고치는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사랑받고 싶어한다. 사랑을 배가 고파서 그 증세가 나타난단 말이야. 사랑을 받고 싶은 그 사랑이 안 와. 그래서, 그 몸에 병으로 전환되는 거지. 몸의 증세를 고치는 것이 해결이 되지 않는단 말이야. 사랑을 주니까 고쳐지더라.
(최근의 칼부림도요?)
그렇지. 걔 잡아가도 해결되지 않아. 그 사랑에 배고프니 그런 식으로 폭발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지. 부모도 그렇게 자랐으니까. 30년 전에 비교하면 더 묻지마 폭행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어디서 오는 걸까? 근본적으로 해결책을 생각해 봤음 하는데, 미봉책이야. 더 강력한 경찰들이 권총을 주고, 벌을 주고.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음식이야. 음식을 너무 함부로 먹어. 너무 고기를 많이 먹어. 그러니, 그 성질이 포악해지지 않겠니. 스스로 잘 알아가겠지.
웜홀이 뭔 말이야? 벌레 구멍이야. 서로 통하게 하는 구멍이야. interface 얼굴 안으로 들어간단 말인데, 만남, 직면, 당신과 만나는 공동의 마당, 그것을 말해. 둘이 함께 만나는 장소. 개체가 우주 사이를 연결해주는 벌레 구멍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나와 만나는 그곳.
사랑이 사랑아닌 것을 대처한다. 뭔 말이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아니야. 그 사랑의 주체가 내가 될 때, 객체가 될 때, 내가 너를 사랑해. 그 사랑은 이 사람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야. 이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나보다 커.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너에게 흘러간다. 그때 그것을 참사랑이라고 말하는 거지. 사랑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사랑이 참사랑인데, 매가 주체가 되서 사랑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거지. 사랑이 나를 도구로 쓰는 거야. 내가 사랑을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나를 도구로 쓴단 말이야. 그것이 참사랑이라고 하는 거야. (사랑도 현존이라고 표현되나요?) 그 사랑이 참사랑일 때. The presence 그것이 사랑이란 말이야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사랑한다. 그것이 참사랑이야. 네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내가 숨을 쉰다고 생각을 하잖아. 내가 숨을 쉬고 말고 하는 힘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을 하잖아. 내가 내 의지로 숨을 쉬거나 말거나 할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착각이잖아. 내 맘대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잖아. 숨이 쉬어지니까, 사실 숨 때문에 내가 사는 거지. 어떤 숨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사랑이 나를 통해서 흘러가는 거지. 내가 사랑을 만들거나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보통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 상처가 되고, 깨지고 하는 것이 뭐냐면, 지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야. 지가 숨을 쉰다고 착각하는 거야. 숨이 나를 살려주는 거야. 사랑은 어떤 한 사람의 것일 수가 없잖아. 이 사람이 얘기하는 사랑은 emotion 감정, 어떤 생각도 행위도 아니고, the state being 존재, 상태, 상황, 그것이 사랑이다. 예수의 경우에는 사랑 아닌 것은 할 수가 없어. 상대가 누구던 간에. 왜냐면, 존재 자체가 사랑이니까. 그것이 착각 속에서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대신한단 말이야. 사랑이 사랑 아닌 것을 대체한다. 이 말이야.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주여, 나를 사랑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내가 평화를 이루겠습니다. 이것이 아니야. 그럴 수 밖에 없어. 숨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잖아. 나를 살리고 있잖아. 숨은 여전히 남아있고, 사랑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 때,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잖아. 엄마가 어린 젖먹이를 사랑하는 것이 비슷하지. 조건이나 댓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잖아. 그런 것이 참사랑과 같은 거지. 사랑이 subject야, 그래서,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든 거야. 자기가 살려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지 혼자 있으면 사랑이 아니지. 언젠가, “하나님, 저 여기 왜 보내셨어요? 세상에 오긴 왔는데, 제가 왜 왔는지 가르쳐주세요.” “너 거기 가서 모든 가짜를 전부 경험해 봐. 거긴 전부 가짜가 다는 데야. 그러니 네가 진짜가 뭔지 알아.” 사랑 아닌 것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는 거야. 그래야 참사랑이 뭔지를 알 수가 있는 거지. 사랑의 개념이 달라지지. 뭘 해도 사랑을 해. 그 사람을 향해서 욕심이나 그런 마음이 안 드는 거지.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나한테 있는 것이 사랑밖에 없으니까.
이 사람이 경험한 것은 이 사람의 의지로 됐다고 볼 수 없지. 30대에 자기가 죽어가는 질문이 들어 왔을 때, 바로 “하나님,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런 기도를 안 했다면, 이런 것이 없지. 뭔가 이루어진다면, 하늘과 땅이 합해서 이루어지는 거다. 신과 내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너의 협조를 구한다, 필요로 한다. 나를 도와다오.” 이 쪽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나는 못 합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오.” 이 둘이 만났을 때 뭐가, 사건이 발생한다.
“어쨌든, 네 도움 없이는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얘기하는 두려움과 공포, 넘어가면 의식이 점점 높아가는 거니까, 석가모니가 왔다간지 3천년이고, 예수가 왔다간지 2천년이 지나갔는데,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인류의 의식이 좀 높아질 수밖에 없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어. 지금 우리는 그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거야. 이 책도 나올 때가 돼서 나온 거야.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분들의 가르침을 알고 깨달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거야. 그동안 세월을 겪으면서 극소수이지만, 걸어왔겠지. 깨달음이라는 것이 예수나 석가나 노자의 생각이 일반인들에게 들어오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그러니, 이 세상이 극도로 발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인륜이고 천륜이고 다 없어졌잖아.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단 얘기야. 더 많은 고통과 무질서를 경험하게 될 거 같아. 우리 세대는 그렇지 않을까 싶어. 2천년 이상의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살겠지. 괴물이 많이 나올거야. 요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 하잖아. 그런 모습을 보이지만, 그 속에 언제나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야. 몇 사람이야. 나머지는 다 그래. 지금도 그렇지 뭐. 놀라운 아이들이 많아.
“종교의 경계, 울타리를 넘어선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대답하길, “울타리가 없던데?” (웃음) 전부 생각으로 만든 거지. 처음에는 있는 줄 알지. 넘어갈 수 없다. 넘어가면 안 된다. 어렸을 때, 교회 목사님이 “너희들은 절에는 놀러 가되, 천주교는 절대 놀러 가면 안 된다.” (웃음) 절에는 놀러 가는데, 천주교는 진짜 가면 안되는 줄 알았어. 알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잖아. 천주교 가서 이것을 얘기했어. 질문 시간에 질문하라고 했더니, 여기 안 올라고 했대. 왜냐면, 천주교에도 신부가 있는데, 개신교 목사가 강사로 들어오는데, 동창 중에 목사가 있는데, 만날 때마다 밥맛 떨어지게 한 대. 기분 나빠서 안 올라고 했대. 수녀님이 다른 목사님과 다르다고 해서 수녀님 때문에 왔대. 나한테 한 시간쯤 얘기 들어보니 다르다고 생각 했대. 목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달리 먹었대. 참 좋았다고. 목사인데, 천주교에 대해 나보다 아는 것이 많대. 거기까지 얘기하면 좋은데, “여기까지 오셨는데, 개종하심이 어떻습니까?” (웃음) 나보고 개종하라 하니 사람들이 막 박수를 쳐. 헤어지면서 “내 입장에서는 개종을 한다면 불교는 모르겠지만 천주교는 안되겠습니다.” 이랬어. 분위기가 서늘해지는 거야. “내 말은 개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냐면, 이 종교를 다른 종교로 바꾸는 것을 개종이라고 합니다. 나한테는 불교는 다른 종교입니다. 천주교는 뿌리가 같습니다. 기둥도 같고, 어떻게 내 종교를 내 종교로 바꿉니까?” 알고 보니까 장벽이 없는 거야. 가짜 사랑을 진짜 사랑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나, 에고가 큰 나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 마더 테레사 기도에 “내 의지, 내 뜻, 내 생각 다 당신이 나한테 주신 겁니다. 원래 당신 것인데 저한테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돌려 드릴께요. 내 의지, 내 생각, 내 계획을 다 돌려 드릴께요. 당신이 쓰십시오.” 그것이 내가 없어지는 거야. 착각 속의 나, 내가 독립된 존재라는 착각.
아~ 맛있는 콩물이네.
우리 점심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