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8-10절. 헛된 철학과 참된 신앙
1. 골로새서는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교회를 설립하여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이 에바브라는 바울 사도가 에배소에서 3년간 전도하고 있을 때, 바울의 전도를 듣고, 골로새에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2. 바울이 이 성경을 쓸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인 에바브라가 선교헌금을 걷어서, 감옥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로 찾아왔습니다.
3. 그러면서, 에바브라가 바울 사도에게 골로새 교회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들어왔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를 써 보내면서, 특히 2장에서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마디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이단 경계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4. 그러면서도, 이단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먼저 정통신앙을 올바로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모든 신성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성도들만이 영육간에 참된 만족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오늘 설교 제목은 <헛된 철학과 참된 신앙>입니다.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ee to it that no one takes you captive through philosophy and empty deception,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men, according to the elementary principles of the world, rather than according to Christ.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Βλέπετε μή τις ὑμᾶς ἔσται ὁ συλαγωγῶν διὰ τῆς φιλοσοφίας καὶ κενῆς ἀπάτης
take heed lest anyone you there will be the taking captive through the philosophy and empty deceit
‘주의하라’(Βλέπετε)는 현재 명령형 동사입니다(take heed).
‘사로잡을까’(ἔσται ὁ συλαγωγῶν)는 직역하면 ‘사로잡는 것이 있을까’(there will be the taking captive)란 뜻이고, 앞의 동사(ἔσται)는 미래형이고(there will be), 뒤의 동사(συλαγωγῶν)는 현재분사인데(taking captive) 앞의 정관사와 합해서 ‘사로잡는 것이 있을까’란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κατὰ τὴν παράδοσιν τῶν ἀνθρώπων, κατὰ 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the men,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the world
직역하면 ‘사람의 전통(유전)을 따른, 세상 초등학문을 따른’(철학과 헛된 속임수)란 뜻입니다.
‘전통’(παράδοσιν, tradition)이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which is given over from one to another)을 가리키고, ‘초등학문’(στοιχεῖα)이란 ‘기본적인 가르침’(elementary teaching)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καὶ οὐ κατὰ Χριστόν·
and not according to Christ
동사가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1.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원래 ‘철학’(φιλοσοφία)이란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데, 헬라 시대와 로마 사회에서는 철학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 같은 사람은 구약성경과 철학을 조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철학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 초등학문을 좇은 것이라고 하면서, 복음 신앙을 망치는 것이라고 경계했습니다.
실제로 바울 당시의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은 복음에 철학을 접목시킴으로써, 복음을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철학적 추구를 순수한 복음을 망치는 일이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처럼 이단의 정체를 비판하면서, 그 사람의 인신공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단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2. 철학이란 원래 근원을 따지는 학문입니다.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가?
옛날 사람들은 우주의 근원이 불, 물, 공기, 원자 등 여러 가지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질 숭배,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근원도 연구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연구하다 보니, 인간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용어로 말씀하자면, 인간이 죄성을 지니고 있고, 사회는 죄악으로 고통스러운 사회이고, 인생의 삶이 고생스러운 삶이고, 결국 병들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학문을 많이 연구한 사람이 자살하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이 죄로 잘못된 것을 예수님이 고쳐주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알면, 자살하지 않고, 구원을 얻습니다.
요즘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이 미련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생의 본질을 연구해보았더니, 희망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이 치료받고 구원받는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요즘에는 성경에 대한 상식을 갖추기 위해서 성경이나 성경 해설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성적으로 비판하면서 읽고,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중에서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도덕적인 교훈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창조도 안 믿고,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 가게 하시는 것 같은 기적적인 사실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슈바이쳐> 박사 같은 분은 아프리카에 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였고,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준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나 부활이나 천국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인류에게 사랑의 정신을 가르쳐주신 훌륭한 스승으로만 존경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3. 바울 사도는 철학을 헛된 속임수라고 지적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주의, 도덕주의가 헛된 속임수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율법부터 가르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도 유교에서 어린아이에게 동몽선습 같은 것을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처럼 예의와 도덕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도덕 과목이나 윤리 과목이 있어서, 역시 율법주의적인 규범을 가르쳐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윤리와 도덕을 가르친 선생님들이나 부모나 사회의 지도자가 결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고, 나라의 정치가나 지도자들도 결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학생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 백성을 노예로 부려 먹기 위해서 내세우는 속임수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권위파괴 운동, 반윤리운동, 고정관념 깨뜨리기,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돈과 향락을 추구하는 극도의 실용주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듀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을 필두로 한 사회학자들은 미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건강하고, 머리 좋고, 아름다운 사람만 남기고, 인간쓰레기 같은 소모품들은 쓰레기 처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말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과 참된 생명을 주는 성경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해야 하겠습니다.
3. 철학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전통’(παράδοσιν, tradition)이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which is given over from one to another)을 가리키고, ‘초등학문’(στοιχεῖα)이란 ‘기본적인 가르침’(elementary teaching)을 가리킵니다.
즉 ‘전통’(παράδοσιν, tradition)이란 골로새 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나 유대인 금욕주의 에센네파(Essenes)처럼 자기들만이 유전적인 비밀 교리를 가르쳐준다고 주장하는 그 ‘비밀 교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상의 ‘초등학문’(στοιχεῖα)이란 유대교에서 음식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 에세네파에서 금욕하고 천사 숭배하는 것이나, 영지주의의 혼합주의 철학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추구하던 초보적인 종교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초보 행위들은 예수님을 믿고나면, 다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는 것은 세상 철학이나 종교적인 유혹에 노략 당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주의하라’(Βλέπετε)는 말은 원형이 ‘바라보다’(βλέπω)란 뜻인데,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1) 이단은 인간의 타락한 이성이나 감정이나 신비성에 맞추어, 그럴 듯 하게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마귀의 종으로 삼는 것 같이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성경을 그저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좋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를 섬기다가 죄에 본성이 타락된 죄인이고, 그 때문에 인간 세상에 온갖 가난과 질병과 싸움과 죽음이 생긴 것을 믿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배신하고 죄에 빠진 인간이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죄와 온갖 저주와 지옥에서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장차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생 복락의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구원과 축복을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거저 사랑하셔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예수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서, 우리의 어떤 실수나 또 어떤 역경이나 천사나 마귀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5. 이것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1) 사람의 유전
아담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 수양과, 인격 연마와, 종교적 고행을 열심히 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손 대대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종교들, 국가적인 법률들, 학문들을 탐구하고, 유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노력과 인격 수양과 학문 탐구와 의학적 노력과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 중심에 모셔 들임으로써만, 근본적인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2) 세상의 초등학문
세상의 초등학문으로써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초등학문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도 연구하면,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더욱 알게 되어, 삶에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세상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은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학교에서 유치원으로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교과서가 대개 무슨 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을 제시해주는 방식으로 저술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넘어서 대학교에 가고, 대학원에 갈수록 대개 여러 학설을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대개 다수의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데, 금방 새로운 학설이 연구 발표되기 때문에, 늘 학술 잡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할수록 남의 학설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더욱 깊은 연구를 해나갑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만 나온 사람은 무슨 문제에 대한 해답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식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독불장군식이 되고, 소위 용감한 무식쟁이가 됩니다.
이처럼 세상 초등학문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와 인간의 죄악과 예수님의 속죄와 내세의 천국과 지옥과 부활 등을 환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세상 학문을 높이 쌓은 분이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고상하므로, 세상 학문을 배설물 같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즉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하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같은 사물과 사건을 보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이라는 사람은 우주 여행을 하고 와서, 하나님도 천당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은 달나라에 갔다 와서, 과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법칙대로 온 우주가 운행되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초등학문을 좇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 Him all the fullness of Deity dwells in bodily form,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ὅτι ἐν αὐτῷ κατοικεῖ πᾶν τὸ πλήρωμα τῆς Θεότητος σωματικῶς,
for in Him dwells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bodily
직역하면 ‘그 분(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거하시고’(κατοικεῖ)는 현재형으로서(dwells) ‘계속적인 상태와 현재적인 실재’(continual state and present reality)를 가리키고,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사람이셨지만, 온전한 신성의 충만함이 언제나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신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셨고, 또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He was and is absolute and perfect God). Trench and Lightfoot by Linguistic Key. 573.
1.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 안에 충만히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 예수님은 단지 인간 육체일 뿐이고, 그리스도는 영적인 충만한 존재라고 잘못 주장한 데 대한 반론입니다.
즉 후대의 발렌티누스(Valentinius. c.AD100– c.180)는 인간 육체는 공허한 케노스(κένωμα, emptiness)이고, 영적인 것은 충만한 플레로마(πλήρωμα, fullness)라고 잘못 주장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신성은 30개의 아이온(αἰών: Aeons)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그 일부의 신성을 받았다고 잘못 주장한 데 대한 반박으로 예수님에게는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요소가 충만히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요 2장), 멀리서도 말씀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요 4장), 38년이나 된 병자를 단번에 고치시고(요 5장),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의 장정을 먹이시고(요 6장), 물위로 걸으시고(요 6장),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을 고치시고(요 9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 11장).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이 혼자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도 다 아시고,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도 아시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도 아시고 부르셨습니다(베드로, 삭개오 등).
그래서,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했고, 바울도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했고,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3.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시고 예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확실히 사셨던 분이십니다.
전도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성경에만, 예수라는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고 하지, 어디 일반 역사에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고 기록해놓은 곳이 있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그런 불신자는 중학교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고 좀 창피를 주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나라 중학교 세계사 책에 보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Gaius Cornelius Tacitus, AD56—c. 120)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그 사람이 쓴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의 전쟁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타키투스는 로마의 역사기록인 <고대기>(Annals)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지독한 미신이라고 불신하면서도, 그리스도라는 예수가 로마의 황제 디베료(Tiberius) 때에, 자기들의 한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아시아 지방에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소아시아 버지니아 지방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 61-114년)가 로마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게 보낸 편지(A.D.112년경)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또, 글라우디오 황제의 전기에는 사도행전 18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인들이 로마시에서 서로 싸우므로, 주후 48년에 유대인 추방령(the expulsion order of the Jews)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신자에게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확실히 생존하신 분이심을 일반 역사를 들어서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증인들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생전에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사셨던 분임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을 뜨신지 50년이 훨씬 지난 때에 기록한 요한일서 1장에서 예수님을 얼굴로 보지 못한 성도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함께 지내고, 만져본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은 바요, 눈으로 주목하여 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분이셨습니다.
4.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는 예수님이 세상을 뜨신 지 3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발생하여, 인간을 구원할 예수님이 어떻게 더러운 육체로 오셨겠는가?
단지 인간의 눈에 육체로 오신 것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령파(spiritualists)로서, 영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니,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세상 질서를 무시하고, 교회의 교직 제도도 무시하고, 예배의 질서도 무시하고, 사회의 선량한 풍속도 무시고, 심지어 거룩한 결혼생활도 무질서하고 방탕하게 했던 이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으로만 오셨다가 가셨고, 육체로는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통일교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만 이루셨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구원은 문선명씨가 완성시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단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 요한일서 4장 2절에서 단호히 잘못된 것을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못 박아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심을 믿습니다.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n Him you have been made complete, and He is the head over all rule and authority;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καὶ ἐστὲ ἐν αὐτῷ πεπληρωμένοι,
and you are in Him having been made complete
직역하면 ‘너희도 그 분(예수님) 안에서 충만해진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충만해진 상태에’(πεπληρωμένοι)란 완료분사 수동태로서( having been made complete) 이미 충만해진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ἐστὲ)는 현재형으로서(you are) 둘을 합하여 ‘그분 안에서 너희는 현재 충만해진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충만해져 있다’는 것은 승천하신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완전함이 거하게 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abiding results of believer’s completeness through union with the exalted Lord).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ὅς ἐστιν ἡ κεφαλὴ πάσης ἀρχῆς καὶ ἐξουσίας,
who is the head of all rule and authority
직역하면 ‘그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시다’는 뜻이고, ‘통치자’로 번역된 단어(ἀρχῆς)는 복수 형태로 쓰일 때는 ‘통치자’(rulers)로 번역되지만, 단수로 쓰일 때는 그냥 ‘통치, 시작, 근원’(rule, beginning, origin)으로 번역됩니다.
1.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이 예수님에게 거하시고, 그 예수님의 충만이 성도들에게 임하시고, 예수님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3).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된다는 것(요한복음 17:21)은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적인 충만(성령 충만)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2. ‘정사’와 ‘권세’란 천사들의 명칭으로서, 당시 이단인 천사숭배자들은 예수님을 천사들 중 하나로 보았으나, 바울 사도는 예수님은 모든 천사들의 머리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3.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한(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충분한 자격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1)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를 섬기고 마귀에게 종노릇 하는 가련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2) 주님은 이 시간에도 마음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20. 보라.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을 마음속에 충만히 모시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충만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저는 청주에 있는 한 집회에서, 60세 되신 장로님이 이번에서야 성령님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하시고, 수 많은 성도들 앞에서 부끄럼 없이 간증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 문을 열어놓고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충만히 모셔 들이고,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늘의 능력을 맛보고, 신비스러운 체험들을 하셨는데, 지금은 사랑의 주님을 잃어버리고, 허전하게 살고 계시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로마서 8장 14절에는 “지금 이 순간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와 헌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지금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충만히 모시고, 세상 권력이나 돈이나 향락보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합당한 제자가 되려면, 가족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업보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마음의 왕좌에 충만히 모시고, 성령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