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2장 5-11절. 예수의 마음을 품자
1.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역경 중에서도 복음 전도사역에 진보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의 투옥을 바울의 인생이 실패로 끝났다고 악선전한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반대자들 때문에 너무도 고달프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어서 험악한 세상을 떠나서 평안한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는, 어서 감옥에서 나가서 말씀을 전하므로, 영적 유익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2. 지난 시간에는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서로 다투지 말고, 허영심으로 자기를 교회에서 높이려고 하지 말고, 서로 존경하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육신의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ave this attitude in yourselves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τοῦτο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 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this let mind be in you which also in Christ Jesus (is)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마음이 너희 안에도 있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품으라’(φρονεῖτε)는 현재 명령형 동사이고(let mind be), 원형(φρονέω)은 ‘이해심을 갖다, 생각하다, 판단하다, 추구하다, 관찰하다’(have understanding, think, judge, seek for, observe)는 뜻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자기를 최대한 겸손히 낮추셔서 결국 인류를 구원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겸손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최고로 높이셔서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길을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존귀에 동참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경쟁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겸손한 것이 존귀의 앞잡이인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2.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지도자들 간의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열쇠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다투지 않고 서로 존경하면서 살려고 결심을 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야 17장에는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2장에는, “사람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양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화목과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화목을 이루는 방법은 내 마음을 다 비우고, 주의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주의 사랑과 자비와 양선을 따라서 살아가는 길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감사와 헌신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에 이루어집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먼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먼저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나 대신 죽게 하셨으므로, 나는 여기서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나도 이웃을 존경하고 섬기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이웃 사랑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의 감사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감사가 적은 사람은 그만큼 이웃을 덜 사랑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사함 받음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사함 받음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o, al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who in form of God existing
직역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시나’란 뜻입니다.
‘존재하시나’(ὑπάρχων)는 현재분사입니다(existing).
‘본체’(μορφή)란 원래 ‘형태, 모양, 외모’(form, shape, outward appearance)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본질적인 형체’(essential form)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not something (to be grasped) considered the to be equal with God
‘동등됨’(τὸ εἶναι ἴσα)이란 문법적으로는 현재 부정사형이 명사화 한 것으로서(the to be equal) 대등한 상태나 모양(manner of equality)을 가리킵니다.
‘취할 것’(ἁρπαγμὸν)은 원래 ‘붙잡는 행동이나 붙잡힌 것’(the act of seizing or the thing seized)을 뜻하는데, 예수님이 본래의 신적인 영광의 상태를 계속 고집하지 않으시고, 낮은 인간의 형태로 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지 아니 하시고’에서 동사(ἡγήσατο)는 부정과거로서(considered) 단호하게 그만두신 것을 가리키고, 원형( ἡγέομαι)은 ‘인도하다, 생각하다, 여기다’(lead, think, suppose, consider)는 뜻입니다.
1. 본 절이 말씀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셨지만, 성부 하나님처럼 영광스러운 상태를 단호하게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가지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뜻합니다.
(1)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μορφή)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포기하시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단호하게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사랑입니까!
(2) 그래서 신성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행로에 피곤하셨고,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시기도 하셨고,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심히 고민하여 마음이 죽게 되었다고도 하셨습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12제자들은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실 때에도 “저가 뉘기에 풍랑을 명하매 잔잔해지는가?”하고, 예수님의 본질적인 정체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사도들은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창세 전에 선재하신 하나님이셨는데,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4) 바울 사도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이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욱 낮아지신 사건입니다.
(5) 이 말씀 속에서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피조물인 인간으로 낮아지시고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인간 취급을 못 받더라도, 용납하며 희생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싸움이 벌어지면, 서로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이 예사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하고, 짐승 취급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싸우면, 서로 허물이 있는 죄인인 줄 피차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싸우면, 자기는 하나님처럼 의롭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지옥 갈 마귀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끼리의 싸움은 너무도 잔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자와는 싸우더라도 절대 예수 믿는 성도와는 싸우지 마십시오!
더욱 좋은 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도와는 싸우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길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사업을 하나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평화만 유지하면, 성공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화목한 교회는 가만두어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서, 신적인 영광을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영원한 죽음으로 가고 있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희생에 대해서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가족을 사랑한다고 해도, 가족으로부터 짐승과 같이 취급받으면 화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신대도, 우리 죄인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종이 되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수없는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생각하면서도, 감격과 감사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어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감격하며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사랑의 윤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감격과 감사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바리새적인 외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과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끊어지지 않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감격이 없으면, 남의 허물이 보이고, 서로 용서와 사랑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ἀλλὰ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but Himself emptied, form of servant having taken
‘비어’(ἐκένωσεν)는 부정과거로서(emptied) 단호하게 자신을 비워버리신 것을 가리키고, 원형(κενόω)은 ‘비우다, 내용을 빼앗다, 비실제가 되다’(empty, deprive of content, make unreal)는 뜻입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에서 동사(λαβώ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종의 형체,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형체’(μορφή)란 ‘모양, 형체, 외모’(form, shape, outward appearance)를 가리키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본질적으로 인간의 형체(essential human form)를 가지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in likeness of men having been made
직역하면 ‘사람들의 형체로 되셨다’는 뜻입니다.
‘형체’(ὁμοιώματι)란 ‘닮은 것, 형체, 유사한 것’(likeness, or rather: form; a similitude), ‘유사함'(similarity), '동일함'(identity)이란 뜻입니다.
‘되었고’(γεν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en made) 단호하게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1. 본 절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신성의 상태를 떠나 비천한 육신을 가지신 성육신을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비어’(κενόω)란 단어에서 유명한 ‘케노시스 주의’(Kenoticism)가 생겼는데, 이 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 하실 때, 하나님의 본체(μορφὴ)를 비워버리시고, 종의 형체(μορφὴ)를 가지셨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반면에 ‘가현설자’(Docetism)들은 ‘사람들과 같이’란 단어에서(ἐν ὁμοιώματι)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 하셨을 때, 사람들의 눈에는 사람들 ‘같이’ 보였지만, 실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가지신 분이라고 주장해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도 참 사람이신 신인 양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2. 7-8절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비하:卑下)을 가리키고, 9-11절의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놓여,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높아지심(승귀:昇貴)을 가리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에서 ‘동일함’(ὁμοιώματι)이란 ‘유사함'(similarity), '동일함'(identity)을 뜻하며, 예수님이 죄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인간과 동일하게 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러 오신 참 사람이셨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3. 오히려 자기를 비어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절대 주권과 영광과 무소부재 하심과 전지전능하심 등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적 속성을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부모의 권리를 포기한다거나, 나이 드신 분이 아들 같은 사람에게 모욕을 당한다거나, 직장에서 상사가 자기의 직위를 포기하고 부하 직원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사업체를 경영하시는 사장님이 경영권을 포기하고 직원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시고, 낮고 천한 인간이 되셔서, 죄인들에게 멸시와 채찍을 맞으시고, 벌거벗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희생과 고난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코 주님을 섬기는 교회에서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4. 종의 형체를 가져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당시 사회적으로 종과 같은 처신을 하셨음을 말씀합니다.
즉, 이사야 53장에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부당한 고난에도 대항치 않으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대항하고, 정당방위의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과 같이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도 대항하지 않고,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억울한 모욕과 수모를 당했어도, 종과 같이 잠잠하고 변호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가난한 마음, 종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참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자신을 비우신 것처럼, 마태복음 5장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고, 주님이 종과 같이 욕을 당하시되 대항치 않으신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억울한 핍박을 참는 성도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even death on a cross.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and in appearance having been found as man
이 부분이 Nestle 1904와 Westcott & Hort에는 8절에 나와 있고, 다른 사본에는 한글 성경처럼 다음절(9절)에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외모로는 사람처럼 보여졌다’는 뜻입니다.
즉 ‘나타나셨으매’(εὑρεθεὶς)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found) ‘나타나졌다, 보여졌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He humbled Himself
‘낮추시고’(ἐταπείνωσεν)는 부정과거로서(He humbled) 자기를 확 낮추신 것을 가리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having become obedient unto death
직역하면 ‘죽기까지 복종하게 되었으니’란 뜻입니다.
즉 ‘복종하셨으니’에서 동사(γεν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come) 복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death even of cross
직역하면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복종하셨다는 뜻입니다.
1. ‘사람의 모양’에서 ‘모양’이란 단어(σχῆμα)는 ‘외관, 모양, 형체, 외모’(figure, shape, form, appearance)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형체’(μορφή)가 본질적인 모양을 가리키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것은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시는 극도의 비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십자가’(σταυρός)는 당시에 중죄인이나 노예에게 가했던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을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신명기 21:23).
2.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겸손하여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우리들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3.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여러 가지 제한을 몸소 당하신 것은 정말 불쌍한 인간을 위해서 당하신 희생이었습니다.
4.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주님은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모습과는 달리, 죄인을 위해 구원하시려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죄인의 삶을 살았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과는 다른 삶이요,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 빚을 갚는, 율법을 다 이루어드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5.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에게 죽음이란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슬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심만 해도 말할 수 없는 희생인데, 죽음까지 당하신다는 것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희생이요, 낮아지심입니다.
더구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하는 죄수는 노예로서 주인을 죽였다든지,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나무에 달아죽이고 길거리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그런 부끄러운 죄인이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게 하는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반역죄를 지은 중죄인은 목을 베어 나무에 달아 놓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효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침을 뱉고 저주를 퍼붓는 치욕적인 죽음을 형벌로 시행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 십자가 죽음은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도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1:23).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스럽게 죽으신 것은 오직 저와 여러분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무지하게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죄인을 섬기시는 지극한 겸손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겸손을 말씀한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과 오늘날 우리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예수님처럼 수치를 당하더라도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is reason also, God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therefore also the God Him highly exalted
‘지극히 높여’(ὑπερύψωσεν)는 부정과거로서(highly exalted) 단호하게 지극히 높이신 것을 가리키고, 원형(ὑπερυψόω)은 ‘뛰어나게’란 전치사(ὑπέρ)와 ‘높이다’는 동사(ὑψόω)를 합성한 것으로서 ‘측량할 수 없이 지극히 높이다’(exalt beyond measure, highly exalt)란 뜻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and granted to Him the name the above every name
직역하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란 뜻입니다.
‘주사’(ἐχαρίσατο)는 부정과거로서(granted) 확실하게 주셨다는 뜻이고, 원형(χαρίζομαι)은 ‘은혜를 나타내다, 은혜로 거저 주다, 용서하다, 친절을 보이다’(show favor, give freely, pardon, forgive, show kindness)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유대인에게서 ‘이름’이란 그 실체를 말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이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최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최고로 높은 자리로 높이셨다는 뜻입니다.
2. ‘이러므로’란 ‘예수님이 겸손함의 극치를 이루는 삶을 사셨으므로’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할 수 없는 겸손과 희생과 사랑의 삶을 사심으로써, 그 결말이 더욱 비참해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존귀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의 두 지도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서로 겸손한 삶을 살면, 비참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주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교회에서 다툴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본받아서, 인격 모독을 당하고, 명예를 훼손당하더라도 주님을 모시고 잘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결국 성도님의 순결을 변증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으로 깊이 존경심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3.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ὑπερύψωσεν)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지극한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수 없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5.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장 6절에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4.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여기서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란 뜻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죄수가 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결국 왕중 왕,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고,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낮아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요셉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호칭 속에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고 섬기고 희생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결국 높여주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죄수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최고의 호칭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고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겸손과 사랑과 희생을 베풂으로써, 결국 오랜 후에 하나님과 사람들이 여러분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높여주는 그러한 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will bow-- of those who are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직역하면 ‘그래서 하늘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었다’는 뜻입니다.
‘꿇었다’(κάμψ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ould bow) 단호하게 급히 무릎 꿇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본 절의 접속사(ἵνα)는 10절과 11절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신 목적이 만인과 만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키고(에베소서 1:21, 히브리서 1:4-6), ‘땅 위에 있는 자들’이란 사람들을 가리키고(고린도전서 15:40), ‘땅 아래 있는 자들’이란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이 표현은 모든 피조물을 통틀어서 총칭하는 말입니다.
2.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다’는 말씀은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하게 하시고 복종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서 섬기시고 희생하시고 가장 치욕스런 죽음까지 당하셨는데, 이제는 완전히 반대로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으로 섬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적인 역전 드라마입니다.
3.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을 섬기고 희생할수록 그 만큼 많이 높임을 받는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도’이고, 소위 ‘기독교 정신’입니다.
기독교 정신은 섬기고 희생함으로써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철학은 권력을 가지고 억압함으로써 억지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들 속에는 죤 쉬타인 백이 쓴 소설처럼 “분노의 포도”가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서도 기독교 정신을 본받아, 섬김으로써 존경과 높아지려고 하는 경영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경영학이나 행정학이 모두 이처럼 ‘서비스 정신’을 통해서 국가와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수없이 가르치고 있는 정신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했습니다.
시편 112편 5절에,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가 잘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섬기는 가정은 잘 되고, 이와 같이 서로 섬기는 직장은 잘 되고, 이와 같이 손님을 섬기는 사업체는 잘 되고, 이와 같이 서로 섬기는 교회는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 교회 지도자들처럼 서로 허영심을 가지고 다투는 성도들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처럼 서로 섬기고 존경하여, 평화와 부흥을 이루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at every tongue will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and every tongue should confess that (is) Lord Jesus Christ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모든 입이 고백하게 하시려고’라는 뜻입니다.
‘시인하여’(ἐξομολογήση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ould confess) 단호하고 확실하게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시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to glory of God Father
동사가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1. ‘주’(κύριος)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일반적인 존경어로 사용되었고(창세기 19:2), 아내가 남편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창세기 18:12), 종이 주인에게 사용했고(에베소서 6:9), 백성이 통치자에게 사용했고(창세기 42:10), 하나님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빌립보서 2:9).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란 통칭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사도행전 2:36, 로마서 10:9, 고린도전서 12:3 등).
2.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여,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종으로 섬기시고, 부끄러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죽기까지 해야 하는 순종을 거부하셨다면,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3.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고 미워한다면, 하나님께 욕이 될 것입니다.
4.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나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낮은 인간이 되시고, 죄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수치스런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을 때, 이 구원의 감격이 우리가 원수에 대해서도 참고, 착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모든 선한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세상살이가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억울함과 고난을 참고 이기면서,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히 성도를 섬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수님처럼 여러분을 높여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