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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참조 및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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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의 역사
〔고대〕
구석기 시대의 유적·유물이 관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송학면 포전리 점말동굴에서는 이 시대의 기후·환경·동물군·식물군 등을 밝힐 수 있는 유적과 석기·뼈·연모 등의 유물이 발굴되어 우리나라 홍적세의 자연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밖에 한수면 사기리·호운리·황강리, 금성면 월굴리, 백운면 도곡리, 수산면 하천리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유물은 도곡리, 청풍면 진목리·황석리·양평리에서 약간 발견되었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은 계산리·양평리·황석리·방흥리·진목리·사기리 등에 산재해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으며, 4세기 경에는 백제(百濟)땅이 되었다.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속하여 나토군(奈吐郡)이라 불리었고, 청풍이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 불렸다. 5세기 말엽에는 신라(新羅)의 영토로 편입된 것으로 보이며,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이 이곳에서 출생했다고 전한다.
673년(문무왕 13)에 지금의 청풍(수몰지역) 사열산성(沙熱山城)이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757년(경덕왕 16)에 나제군(奈堤郡)으로 고쳐졌고, 사열이현이 청풍군으로 개명되어 나제군의 속현으로 삭주북원경(朔州北原京)에 소속되었다. 백운면 부수동에는 경순왕(敬順王)의 이궁(離宮)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제주군(堤州郡)이 되었고, 992년(성종 11)에는 의천(義泉)·의원(義原)이라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995년 지방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여 자사(刺史)가 두어졌으며,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양광도(楊廣道) 충주목에 귀속되어 감무가 설치되었다. 1217년(고종 4) 거란(契丹)의 10만 대군이 박달재를 공격해 올 때 김취려(金就勵)장군은 정상(頂上)을 먼저 점령하고 좌우에 군대를 포진하여 적군을 섬멸하였다.
1258년의 몽고군(蒙古軍) 침입 때에도 충주·제주(堤州)·청풍의 별초군(別抄軍)이 박달재에 복병을 두어 적군을 격파하였다. 1317년(충숙왕 4)에는 청풍현 사람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기 때문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는 제천으로 개명되고 현감이 두어졌다. 세조의 왕위찬탈로 단종이 영월(寧越)땅에 유폐되자, 원호(元昊)는 이곳의 월악산(月岳山)에 귀틀집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청령포(淸?浦)를 향해 우러러 절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관향이라고 해서 청풍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어 부사가 두어졌는데, 이는 충청도에 유일한 것이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황사영(黃嗣永)은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만든 봉양면 구학리 배론(舟論)의 천주교인 마을로 와서 토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의 천주교회를 구하기 위해 흰 명주천에 글을 써서 북경(北京)주교에게 전하려다 검거되어 처형된 백서사건(帛書事件)이 있었다.
1856년(철종 7) 배론에 신학교(神學校)가 세워지고 이곳의 신자들에게 성사가 베풀어졌다. 1860년 경신박해(庚申迫害) 때 이곳으로 피신하는 신자가 늘어나자, 신학교에서는 그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옹기를 굽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봉양면·백운면·송학면·청풍면의 옹기가 유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프랑스 신부 9명과 신자 8,000여 명이 순교하면서 배론신학교도 폐교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1895년에 제천과 청풍이 각각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풍군 일원과 덕산면 10개 이가 충주군으로부터 제천군으로 병합되었다. 철도가 개설되어 제천이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청풍은 제천군에 편입되었다. 1940년에는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73년 7월 1일 덕산면 수곡리가 수산면에 편입되는 등 일부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제천군은 제원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5년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청풍에 있던 한벽루·팔영루·금병헌·금남루 등의 문화재들이 물태리로 옮겨졌다.
1987년 1월 1일 한수면의 6개 이가 중원군 동량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중원군 산척면 원월리가 백운면에, 금성면 대랑리가 제천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제원군이 제천시에 통합되어 새로운 제천시가 되었으며, 3월 2일에는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써 1읍 7면 13동이 되었다. 1998년 제천시 일부 동의 통폐합이 있어 1읍 7면 9동으로 바뀌었고, 2002년에 고암동과 모산동을 신설하는 한편 동명 변경이 있었다.
제천의 선사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송학면 포전리 점말 용굴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3만년 전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확인해 준다. 이 유적은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팀이 중심이 되어 1973년부터 1980년까지 8차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그 보고서에 따르면 모두 13개의 문화층으로 동물 뼈에 새긴 선각화를 비롯하여 토끼·붕어 모양의 원시 예술품과 코뿔소 정강이뼈, 그리고 세계 동물학계에서 신종으로 확인된 편편달팽이 화석 등 1만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여 23-7만년전의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역사 시대에 들어와 제천은 진한의 발상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다가 마한의 세력 확장과 함께 마한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삼한 시대의 유적으로 의림지를 빼놓을 수 없다.
'의림지'라는 지명은 본래 임지로 불렸으나 고려 성종 대인 992년 지방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천, 의원 등으로 다르게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 때 의림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림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밀양의 수산제, 김제의 벽골제, 상주의 공검지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의 하나로 전해오나, 군지를 비롯한 전해지는 문헌들을 참고하면 신라 진흥왕대 악성 우륵이 처음 쌓았다는 기록과, 그 후 700여 년이 지난 후 박의림이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모두 확인하기 어렵고. 그 후 1457년(조선 세조 원년 정인지), 1910년, 1972년에 걸쳐 보수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림지는 호반 둘레가 1.8Km, 만수 면적 15정보로 저수량은 660만㎥나 되어 289정보의 들판과 시내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니 제천의 보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충청북도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76년에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하여 보존과 전승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의림지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승과 유적, 그리고 특이한 산물이 있다. 산물로는 겨울철 진미인 빙어를 비롯하여 궁중 진상품인 순채를 들 수 있다. 또한 빼어난 풍광을 즐기려 찾아든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악성 우륵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현종대 학자이며 관인인 박수검, 순조대 풍류객인 한진호, 한말 고종대 심상훈 판서 등으로 그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1807년 선비 이경집이 창건한 정자로 전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아한 팔작 지붕의 목조 건조물인 영호정, 1948년 당시 제천 군수였던 김득련, 경찰서장 김경술 등의 노력으로 조성된 경호루, 한말의 항일독립운동가로 약관 23세로 제천의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범우 추모비, 한말 의병에 투신하여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절한 홍사구 의병의 묘소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로만 전하는 악성 우륵의 사당터, 탄금대 등이 있다. 전승으로 못의 조성에 관한 이야기, 못 주변에 있는 거북바위 이야기, 못 주변에 살던 어씨 오형제 이야기 등이 전해오고 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어 4세기 무렵 백제가 한강유역의 중부지방을 차지하니, 제천지역은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5세기에 이르러 북방의 고구려가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서울 근교의 북성을 7일만에 점령하고 이어서 남진하여 남한강 유역을 점령하니 백제는 공주로 서울을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제천지역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내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6세기에 들어와 신라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등 북진정책을 추구하니, 이 때 제천지역은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제천이 옛 기록상에 나타나는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다. 곧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 권 제 35 지리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A. 내제군은 본래 고구려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 대에 지금의 제주로 고쳐 불렀으며, 소속 현은 둘이다.
B. 청풍현은 고구려 사열리현으로 경덕왕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
위의 기록에서 제천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에 속했다가 6세기 무렵인 신라 진흥왕대 이후에 신라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옛 이름은 고구려시대 '내토'였다가 신라에 이르러 '내제'로 바뀌었으며, 신라 경덕왕대 한자식 명칭으로 지명을 대대적으로 변경할 때 '제주'로 고쳐 불렀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풍은 고구려 시대 '사열리현'으로 불리다가 역시 신라 경덕왕 16년(759년) 청풍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냇물을 의미하는 내제·내토의 '내', 저수지를 의미하는 의 제주의 '제'는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의림지는 제천의 이름이 탄생하기까지 상징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풍의 사열리현은 '서늘하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청풍 호수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시원하고 상큼한 옛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볼 수 있다.
그 후 중세에 이르러 제천의 모습을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사》권 제 56에서 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주는 본래 고구려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대 내제군으로 바뀌었는데 고려 시대 초기에 제주로 고쳤다. 성종 14년 자사를 두었고, 목종 8년에 자사를 폐 지했다. 현종 9년에 원주에 소속시켰으며,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의천으로 부렸는데 이는 성종대 정해진 것이며, 또한 의원이라고도 불린다.
곧 신라이래 '내제'로 불려지던 제천은 고려에 편입된 이후 940년(태조23)에 명칭이 '제주'로 변경되었다. 그 후 985년(성종2)에 특수행정구역으로 12목이 설치되고, 하부 구조로서 주·부·군·현의 행정 조직이 개편될 때 제천은 충주목 관할하의 원주에 속하였다. 992년(성종11)에 별칭으로 '의원', '의천'으로 불려졌다. 그 후 995년(성종14)에 중원도 등 전국을 10도로 개편하고 12목에 절도사, 단련사, 자사, 방어사 등의 외관을 파견할 때 제천에는 자사를 파견하였으나, 10도가 유명무실화되면서 외관직이 폐지되자 1005년(목종8)에 제천의 자사도 폐지되었다. 현종 때 다시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앞서의 12목이 4도호부 8목으로 개편되었다가, 몇 차례의 변천을 거듭한 후 5도 양계로 정립될 때 제천은 충주, 괴산, 음성, 단양과 함께 양광도의 일부로서 충주목에 속하게 되었다. 이 후 1106년(예종 원년)에 제천을 관할하는 관리로서 감무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에 제천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자사'는 중국의 한나라 시대 지방 군현의 관리를 감찰하는 고급관리였는데 점차 퇴조하여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무관 계급을 나타내는 하위직으로 몰락하였다. 이에 비추어 자사는 하위 지방관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후 10도가 유명 무실화됨에 따라 외관직이 폐지되자 1005(목종8)에 제천에 파견된 '자사'도 폐지되었다.
1106(예종 원년)에 제천을 관할하는 관리로 파견된 '감무'는 현감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에 파견된 감독관으로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였고, 후에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감무'라는 지방관의 명칭에서 행정상으로 제천 지역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역사의 흔적으로 거란·몽고군의 침입과 관련된 박달재 전투를 들 수 있다. 916년 '요'를 건국하여 1125년 여진족에게 망하기까지 200여 년간 역사상에 나라를 세워 족적을 남겼던 거란족은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에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등 영향을 끼친다. 그 여파는 우리 고장 제천에도 미쳐 1217년 7월 박달재에서 고려 장군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과 충돌하여 패퇴하고 만다. 이 때 거란의 포로들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일대에 살게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거란장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전승도 있다. 1206년 부족을 통일하여 1271년 원 제국을 세운 몽고족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하였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259년에 항복하여 1368년 원이 멸망하기까지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와중에 전쟁의 참화는 박달재까지 미치게 되는데, 곧 "1258년 10월에 몽고 병이 제천의 박달재에 밀려들자 제천·충주·청풍 지역의 별초병이 적군을 물리쳤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천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그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충청도가 확정된 것은 1395년(태조4)에 이르러서였다. 곧 수도를 개성으로부터 한양으로 옮기면서 경기도를 재편하게되는데, 이때 양광도에 속했던 양주목, 광주목을 경기도에 편입하고, 나머지 충주목·청주목을 충청도로 개칭하면서 오늘의 충청도가 시작되었다. 그 후 1413년(태종14)에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지방중심지로 4부와 4개 대도호부를 두고, 그 아래에 20개의 목과 82개의 군, 175개의 현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행정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제천은 175개의 현 가운데 하나로 정립되었던 것이다.
제천의 본래 이름은 '제주'였으나, 1395년(태조4)의 지방명칭 변경에서 '주는 천으로 바꾸어 부르게됨'에 따라 '제주'가 '제천'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청풍면은 청풍군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나, 현종대 왕비 명성왕후의 관향인 관계로 '도호부'로 승격시켜 부사를 두니 충청도의 도호부는 청풍이 유일하여 조선시대 청풍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제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기록에 실려있는 단편들을 통하여 조선시대 제천의 모습의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에는 행정을 비롯하여 형사, 군사, 세정 등 189조에 이르는 제천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는데 제천의 실상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454년(단종2)에 완성된 《세종실록》에 실려있는 다음의 두 기록 정도이다.
◎ 제천현(堤川縣)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柰吐郡)인데, 신라에서 내제군(柰堤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제주(堤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 자사를 폐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원주(原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제천 현감으로 고쳤다. 별호는 의주(義州)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영춘(永春)에 이르기 13리, 서쪽으로 충주(忠州)에 이르기 33리, 남쪽으로 청풍(淸風)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원주(原州)에 이르기 21리이다.
호수가 4백 15호요, 인구가 1천 2백 35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93명이요, 선군(船軍)이 70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안(安)·지(智)·석(石)·강(姜)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나(那)이다.
땅이 메마르며, 산이 높고 기후가 일찍 추워진다. 간전(墾田)이 3천 9백 15결이요,【논이 7분의 1이다.】 토의(土宜)는 기장·피·벼·조·콩·보리·뽕나무·닥나무·칠(漆)이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漆)·종이·돼지털·곰의 털[熊毛]·족제비털[黃毛]·범의 가죽[虎皮]·여우가죽[狐皮]·삵괭이가죽[狸皮]·느타리·석이·호도·지초요, 약재(藥材)는 승검초뿌리[當歸]·복령(茯뷋)·복신(茯神)·담비쓸개[獺膽]·자단향(紫檀香)·담쟁이[洛石]·대왕풀[白벌]·인삼이요,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순채(蓴菜)·잇[紅花]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의 서쪽 마곡동(馬谷洞)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1이니, 남천(南泉)이요, 큰 방죽[大堤]이 1이니, 현의 북쪽 6리에 있는데, 의림제(義林堤)라 한다.【길이 5백 30척이며, 논 4백 결(結)에 물을 댄다.】《 세종 149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제천현 》
◎ 청풍군(淸風郡)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인데, 신라가 청풍(淸風)으로 고쳐서 내제군(柰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라, 현종(顯宗) 9년에 충주(忠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숙왕(忠肅王) 정사에 고을 사람인 중[僧]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명산(名山)은 월악(月嶽)이요,【신라 때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하였다.】 대천(大川)은 북진(北津)이니, 군의 북쪽에 있다.【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단양(丹陽)에 이르기 24리, 서쪽으로 충주(忠州)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문경(聞慶)에 이르기 30리, 북쪽으로 제천(堤川)에 이르기 13리이다.
호수가 1백 91호요, 인구가 6백 5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6명이요, 선군(船軍)이 21명이다.
본군의 토성(土姓)이 2이니, 유(劉)·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장(莊)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장(張)이다.【단양에서 왔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간전(墾田)이 1천 9백 55결이요,【논은 1백 35결에 그친다.】 토의(土宜)는 기장·피·콩·조·팥·가래나무·뽕나무·산뽕나무·닥나무·보리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漆)·종이·느타리·석이·지초·범가죽·삵가죽이요, 약재(藥材)는 자단향(紫檀香)·복신(茯神)·승검초뿌리[當歸]·복령(茯뷋)·인삼·곱돌[滑石]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군의 서쪽 30리 되는 며오지(?吾之)에서 난다.】·대추·송이·신감초(辛甘草)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군의 북쪽 위곡리(位谷里)에 있고,【하품이다.】 잠실(蠶室)은 군의 서쪽 7리 유제리(惟梯里)에 있다. 역(驛)이 3이니, 황강(黃江)【강(江)을 예전에는 강(剛)이라 하였다.】·수산(壽山)【수(壽)를 잘못 수(水)로 하였다.】·안음(安陰)이요,【예전에는 안성(安城)이라 하였다.】 봉화가 1곳이니, 군의 남쪽 오현(吾峴)이다.【동쪽으로 단양(丹陽) 소이산(所伊山)에, 서쪽으로 충주(忠州) 오성(梧城)에 응한다.】 풍혈(風穴)【군(郡) 안 병풍산(屛風山) 기슭에 있다.】
월경처(越境處)는 충주(忠州) 임내의 덕산향(德山鄕)과 소을림 부곡(所乙林部曲)이 터무니없이 군(郡)의 남촌(南村)에 들어와 있다.《 세종 149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청풍군 》
위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기에 제천지역에는 415호 1235명, 청풍지역에 191호 656명으로 모두 1891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당시의 인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옛날의 인구조사는 오늘날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웃 충주에는 1871호 7452명이 거주한다는 기록과 견주어 대략 제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청풍은 '승려 청공이 충숙왕의 왕사가 되어 지군사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에서 출신 인물로 인하여 다른 지역보다는 행정상 우대받은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밖에 토지의 규모, 산물, 역, 봉수, 특수행정구역 등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1757-1756년(영조33-41)년 이루어진 관찬 사서인【여지도서】에는 청풍부에 2363호 6291명(남2527, 여3764), 제천현에 2673호 11141명(남5309, 여5832)으로 도합 17432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전기의 1891명과 대비된다.
그 후 행정상의 커다란 변화는 개별적인 행정 구역을 지니고 있던 제천군과 청풍군이 1914년에 통합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계기로 현재의 모습인 제천으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40년 제천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오늘날의 읍·면 지역은 제원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1년 제원군이 제천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가, 1995년 시·군민의 요구수렴에 의하여 제천시·군이 통합되었고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동 지역도 교동, 중앙동, 남천동, 명서동, 의림동, 용두동, 동현동, 두학동, 청전동, 화산 1·2동, 영천 1·2동의 13개 행정동으로 편제하였으나, 1999년 지방행정 조직에 대한 구조 조정으로 교동, 중앙동, 명서동, 의림동, 용두동, 동현동, 청전동, 화산동, 영천동의 9개동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천시는 1읍, 7면 9동으로 편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천의 읍·면·동의 역사를 정리해 보자. 봉양읍은 제천의 관문으로서 오늘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본래 봉양읍은 조선시대 제천현의 근우면으로 천남리, 신리, 장평리, 묵계리, 소사리, 옹당리, 명도리, 사당리, 고산리, 주포리, 팔송리, 주론리, 노목리, 산척리, 광암리, 직치리 등 16개 리를 관할하다가 사리곡리, 고지동, 한의동, 데미론, 도비리, 횡치리, 학전리, 옥전리, 동점리, 구학리, 외소리, 내소리, 오산리 등 13개 리를 편입하여 2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0년 봉양리에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두고 면장을 배치한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주포리로 면사무소를 이전하였고, 현우면의 하소리 일부지역을 통폐합하여 주포리, 장평리, 신리, 천남리, 왕암리, 미당리, 명도리, 봉양리, 명암리, 학산리, 옥전리, 구학리, 팔송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20년 연박리, 원박리, 공전리, 구곡리, 마곡리, 삼거리 등 6개 리를 병합하여 봉양면이라 개칭하여 19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제원군 소속이 되었고, 1983년 신리, 왕암리, 천남리의 3개 리를 제천시에 넘겨주었고, 이어서 1995년 봉양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주포리, 장평리, 미당리, 명도리, 명암리, 봉양리, 학산리, 옥전리, 구학리, 팔송리, 연박리, 원박리, 공전리, 구곡리, 마곡리, 삼거리 등 16개 법정리이며, 이들이 세분되어 33개의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제원군의 북서쪽에 위치하는 백운면은 동으로 봉양읍, 서·북으로 강원도 원주시, 남으로 충주시와 접하고 있습니다. 본래 제천군의 가장 서쪽이 원서면으로 불리어 왔는데, 행정구역은 현재의 명칭으로 정리되기 전에는 대치리, 알연리, 장금대, 질고개, 왕당리, 주론리, 창리, 갈산리, 부수동, 방학교, 우음곡, 우경리, 화산리, 한삼포, 화당리, 덕동리, 굴파리, 용산리, 공재리, 죽곶리, 차도리, 도곡리, 소포리, 평동리, 모정리의 25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백운산의 이름을 따서 백운면으로 부르게 된 후 1980년 제원군, 1995년 제천시 등의 시·군명의 변경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는 운학리, 차도리, 덕동리, 화당리, 도곡리, 방학리, 평동리, 모정리, 애련리의 9개 법정리이며, 이들이 세분되어 22개의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송학이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1904년 면제 시행으로 도화동에 출장소를 두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신문리, 만곡리, 무도위, 금곡리, 번자리, 입석리, 칠종리, 시곡리, 포전리, 굴암리, 송한리, 오미리, 노동리, 지곡리, 도화동, 동막리 등 16개 리를 포함했다가 그 뒤 일곡리, 지곡리, 당곡리의 3개 리를 편입하여 19개 리로 되었다. 그 후 1922년 행정 구역의 변경으로 송학면으로 개칭되었다가 시, 군, 통합시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구역상 큰 변동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의 송학면은 오미리, 송한리, 포전리, 도화리, 무도리, 시곡리, 입석리, 장곡리 등 법정리가 8개, 이들이 세분되어 17개의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금성면은 제천시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단양군 매포읍, 서는 봉양면과 청풍면, 남은 청풍면, 북은 화산동, 영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의 변화를 보면 현재의 금성면은 한말 제천군 남면 10개 리와 청풍부의 동면 5개 리, 북면 8개 리를 포함한 것인데 1904년 제천군 남면은 성산면으로, 청풍부의 북면과 동면은 금수면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17년 금수면과 성산면이 병합되어 금성면으로 변경되어 2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29년 금성면의 도화리, 능강리, 상천리, 하천리, 성리의 5개 리는 수산면으로 이관되었다. 그 뒤 1947년 북진리, 교리, 학현리의 3개 리를 청풍면으로 옮겨졌고, 1983년 강제리, 명지리, 산곡리의 3개 리가 제천시로 편입되었고, 1995년 제천시·군 통합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동막리, 월림리, 위림리, 진리, 사곡리, 적덕리, 활산리, 월굴리, 구룡리, 양화리, 대장리, 중전리, 포전리, 성내리의 14개 법정리이며, 이들이 세분되어 16개의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청풍면은 고구려시대 사열리현으로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청풍현,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군, 청풍김씨가 조선시대 명종의 왕비가 되어 청풍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예전의 상리, 중리, 하리, 물태리, 도촌리, 실리곡, 연리, 광의리, 계산리의 9개 리와 근서면의 신촌리, 단촌리, 연론리, 양평리, 도곡리, 대유수, 용복리, 진곡리, 고명리의 9개 리를 병합하여 비봉산의 명칭을 따서 비봉면이라고 하고 제천군에 편입하고 읍리, 물태리, 도리, 실리곡, 연리, 광의리, 계산리, 신리, 단리, 고명리, 양평리, 연론리, 도곡리, 대유리, 용곡리의 15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그 후 1917년 옛 명칭인 청풍면으로 고치고, 1929년 제천군 수하면의 후산리, 장선리, 사오리, 부산리, 황석리, 단돈리, 오산리, 방흥리, 진목리의 9개 리를 편입하여 24개 리로 되었다가 1947년 금성면의 학현리, 북진, 교리와 수산면의 도화리를 편입함과 동시에 고명리를 수산면에 넘겨주고 27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85년 충주댐 완공으로 인하여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곧 광의리와 연곡리를 합하여 비봉리로, 교리와 북진리을 합하여 북교리로, 황석리과 후산리을 합하여 황석리로, 계산리과 양평리을 합하여 양평리로,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 진목리, 사오리, 부산리을 합하여 부산리로, 읍리와 물태리를 합하여 물태리로 행정구역이 통폐합된 후 1990년 제천군, 1995년 제천시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북진리, 교리, 학현리, 도화리, 도실리, 단리, 연론리, 용곡리, 신리, 대류리, 도곡리, 물태리, 연곡리, 광의리, 황석리, 후산리, 부산리, 장선리, 양평리의 19개 행정리로, 이를 세분하여 27개 법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수산면은 청풍군 남쪽이 되므로 원남면이라 하여 오치리, 수산리, 수촌리, 원대리, 계란리, 괴곡리, 내동리, 적곡리, 대전리의 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근남면의 구곡리, 조곡리, 지곡리, 전곡리, 다불리, 도전리, 율지리의 7개 리와 덕산면의 적곡리의 일부를 편입하여 수산면으로 고쳐서 16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1929년 금성면의 도화리, 능강리, 상천리, 하천리, 성리의 5개 리를 편입하여 21개 리가 되고, 1944년 능강리는 청풍면에 넘겨주고, 청풍면의 고명리를 편입하였고, 1985년 충주댐 완공과 더불어 많은 곳이 수몰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능강리, 상천리, 하천리, 성리, 지곡리, 서곡리, 도전리, 율지리, 구곡리, 고명리, 오티리, 수산리, 전곡리, 다불리, 괴곡리, 계란리, 원대리, 내리, 적곡리, 수리, 수곡리, 대전리, 임간리의 23개 행정리로 편재되어 있다.
고려시대 덕산향이 있어서 이름지어진 덕산은 예전에 충주시에 속했던 곳으로 선림리, 도기리, 탄지리, 수촌리, 적곡리, 곡현리, 복평리, 송계리, 성내리, 신리, 만도리, 고목리, 성곡리의 14개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1914년 제천군에 편입되면서 복평리, 송계리의 2개리는 한수면으로, 수곡리는 수산면으로 넘겨주는 동시에, 청풍군 근서면의 월악리를 편입하였다. 그 후 1980년 제원군, 1990년 제천군, 1995년 제천시 등의 변화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신현리, 도전리, 수곡리, 선고리, 성암리, 도기리, 월악리의 7개 법정리, 이를 세분하여 17개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예전에 청풍군 원서면 지역으로 복평리, 여탄리, 한천리, 서창리, 덕곡리, 황강리, 증산리, 월악리의 9개 리였다가 1914년 충주시 덕산면의 송계리를 편입하는 동시에 증산리과 월악리을 덕산면에 넘겨주고 황강리의 한수 이름을 따서 한수면이라고 부르고, 서창리, 황강리, 한천리, 역리, 북로리, 상로리, 덕곡리, 탄지리, 복평리, 송계리의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29년 수하면의 호운리, 함암리, 명오리, 사기리, 서운리, 포탄리의 6개 리를 병합하여 16개 리로 늘어났다가,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어 서창리, 황강리, 한천리, 역리, 북로리, 상로리, 복평리 등 정겨운 삶터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가슴속의 마을로 변하고 말았다. 또한 1987년 물길로 가로막힌 서운리, 호운리, 함암리, 포탄리, 명오리, 사기리의 6개 리를 충주시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거친 오늘의 한수면은 서창리, 적곡리, 황강리, 한천리, 역리, 북로리, 상로리, 탄지리, 복평리, 송계리 의 10개 행정리에 302 명이 옛 터전을 지키고 있을 뿐, 대부분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면 지역의 커다란 변화는 충주댐 건설에 따른 수몰과 행정상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충주댐은 1978년 진입로 공사를 시작으로 1984년 담수식을 거쳐 1985년 10월 17일 준공되었다. 이로 인하여 홍수조절과 발전 및 용수 공급 등 얻어진 점도 있으나 많은 지역이 수몰되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을 만들어내는 가슴아픈 점도 있다. 수몰 지역을 들어보면 한수면 16개리(949가구, 5176명), 청풍면 25개리(1665가구, 9514명), 덕산면 1개리, 금성면 4개리(328가구, 1849명), 수산면 15개리(359가구, 2154명)로 61개리(3301가구, 18693명) 지역적으로 50%에 이르고 있는 넓은 지역이다. 구체적으로 금성면의 월굴, 구룡, 성내, 중전, 청풍면의 진목, 오산, 방흥, 단순, 부산, 사오, 후산, 황석, 북진, 교리, 도화, 실리곡, 도리, 신리, 단리, 대류, 광의, 학산, 도곡, 양평, 용곡, 연론, 물태, 읍리, 연곡, 수산면의 하천, 상천, 계란, 원대, 괴곡, 다불, 전곡, 지곡, 도전, 도지, 고명, 수산, 성리, 능강, 적곡, 덕산면의 수산, 한수면의 성암, 서운, 명오, 사기, 호운, 서창, 덕곡, 황강, 역리, 한천, 북노, 상노, 탄지, 북평, 송계 등입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수몰민은 일부는 새로 조성한 이주단지로 옮겼으나 대다수는 고향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동지역으로 먼저 교동은 본래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읍부리가 되었다가, 1949년 동제의 실시로 교동이 되었다. 향교가 있어 향교골, 향미골로 불려졌던 교동은 행정동은 교동이나 법정동으로 교동을 비롯하여 장락동, 고암동을 포함하여 3개 동을 관할한다. 장락동은 창락사(후에 장락사가 됨)라는 절이 있어 창락이라 불리다가 장락으로 변한 곳이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토구지리를 병합하여 읍내면에 편입하여 장리로 불러오다가, 1940년 제천읍 승격과 함께 장락리로 굳어졌다. 고암동은 고인돌과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고라미, 고래미라고도 불렸었다. 고암리의 출발은 1914년으로,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도치리, 운전리를 합하여 고암리라 하고 읍내면에 편입시켰다가 1940년 제천읍, 1980년 제천시에 속하게 되어 현재의 이름으로 되었다.
중앙동은 제천군 현우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제천읍의 동쪽이라는 뜻의 동부라고도 불렸다. 그 후 1940년 읍제 시행과 함께 일본식 이름인 본정 1, 2정목으로 나누었다가 1949년 중앙로 1, 2가로 나뉘어져 1980년 시 승격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서동은 명동과 서부동이 합쳐서 이루어진 곳이다. 이들 두 지역은 본래 제천군 현우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읍내면의 읍부리였었다. 1940년 제천읍 승격과 함께 명동은 소화정으로, 서부동은 서정으로 왜색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49년 동명변경에 따라 명동과 서부동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 후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명동과 서부동이 합쳐져 명서동 다시 태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림동은 제천시 현우면 서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읍내면 읍부리 지역이 되었다. 1940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대화정이라는 왜색 명칭으로 불려졌다가 1949년 의림지에서 착안하여 의림동으로 부른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의림동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침략과 깊은 연관 있어 의미 심장하다. 곧 합방을 추진하던 일제는 의병의 완전한 진압이 없이는 합방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1908년 후반기에 반일세력 곧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남한 대토벌 계획을 세워 의병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의병의 중심지였던 제천 지역이 불태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극심한 지역이 바로 의림초등학교 일대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영국 신문의 기자였던 멕켄지가 지은 '조선의 비극'이라는 책에 사진과 함께 당시의 진상이 기록되어 있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후 일제는 민족 정기를 누르려고 그 일대에 관사를 지어 일본인들이 살도록 했으며, 이름 또한 대화정이라 했으니 일제의 간악함을 알 수 있다.
1980년 4월 1일 제천군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하소리, 신월리를 병합하여 용두산의 이름을 따서 용두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84년 봉양면 왕암리를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은 용두동으로 하여 하소동, 신월동, 왕암동의 3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하소동은 조선시대 제천군 현우면 지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지대가 낮으므로 하소리라고 불려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남리를 근우면으로 넘겨주고 그 외 지역은 읍내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월동은 조선시대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반달 모양 지형이 됨으로 새월이(新月里)라고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진리, 하진리, 마천리(마하리, 마락골)와 근우면의 옹당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월리라 하고 읍내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왕암동은 한말 제천군 근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묵지리, 소사리, 한의동을 병합하여 왕바위의 이름을 따서 왕암리로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의 변화는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고, 1980년 제천읍의 시 승격과 함께 제천시 용두동에 편입되었다.
동현동은 한말 제천군의 현우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읍내면 읍부리 지역이 되었는데, 1940년 동제 실시에 따라 동문외리, 입읍현, 백야리를 병합하면서 동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시로 편입되었다. 행정동으로서 동현동은 신백동, 고명동, 대랑동, 두학동을 관할한다. 신백동은 한말 제천군 근우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백리, 행백리, 관전리를 합하여 신백리로 태어났다. 고명동은 한말 제천군 동면 지역으로 198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거리, 증계리, 한천리, 송현리, 그리고 백양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면서 고명리로 본격 출발하여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시로 편입되었다. 지형상 학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붙여진 두학동은 한말 제천군 동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상풍리, 하풍리, 응동, 유곡리, 부곡리, 그리고 단양군 어상천면의 자작리 일부 지역을 합하여 읍내면에 편입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청전동은 제천시의 북쪽에 위치하며, 한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상소리를 병합하면서 청전리로 태어났다. 이 청전동은 모산동을 행정적으로 관할한다. 제천시의 북쪽에 위치하는 모산동은 의림지 안쪽이 됨으로 못안이라고 불리다가 발음하기 쉬운 모산으로 바뀌었으며, 안쪽을 안모산, 바깥쪽을 바깥 모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산동은 한말 제천군 현좌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담리의 일부를 편입하여 읍내면에 소속된 이후 커다란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산동은 위치가 화산 아래가 됨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한말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었다. 그 후 1914년 군면의 통폐합에 따라 화산리는 서당리와 사천리가 병합되어 읍부리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40년 읍 승격과 함께 읍부리는 갈라져 본정(중앙동), 소화정(명동), 대화정(의림동), 서정(서부동), 영정(영천동), 대성정(교동), 화천정(화산동,남천동,동현동) 등 왜색 이름으로 변경되었는데, 이 때 화산동은 화천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후 1946년 오늘의 이름을 되찾았고, 강제동, 명지동, 산곡동을 법정동으로 관할한다. 강제동은 한말까지 제천군 남면에 소속되어 강제골로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정리, 진우동, 동면의 백양동 일부, 근우면 고지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성산면에, 1917년 금성면에, 그리고 1983년 2월 제천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제천시의 남쪽에 위치하는 명지동은 한말 제천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검암리, 망월리, 중조곡리, 방축동, 신대리, 송정리, 사전리를 병합하여 명지리로 새롭게 태어나 성산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7년 금성면, 1983년 제천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말 제천군 현우면에 속했던 영천동은 본래 모라내(사계) 옆에 있어서 모라내, 모랏내, 또는 사천리로 불렸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읍내면 화산리에 편입되었고, 1940년 일본 통치시기에는 일제식 명칭인 영정으로 변경되었다가 1949년 동명 변경 때 영천동으로 고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행정상의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제천은 시기마다 굵직한 역사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지면 관계상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제천의 상징인 '제천의병'과 사상적 흐름만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병의 전통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어느 곳이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1895년 이후 활동한 한말의 의병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제천인으로 의병에서 활약상을 보인 인물은 이대수, 홍 원, 어득준, 어득해, 윤창명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이대수는 신월동 출신으로 무예에 남다른 실력을 보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상의원 직장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제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다. 조직적인 편제를 갖추어 제천, 충주, 원주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왜병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이대수는 1593년 내자시 직장 벼슬에 임명되었고, 이어 지평현감, 금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603년 57세로 서거하자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한말의병의 흔적은 너무도 확연하여 '제천의병'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정도이다. '제천의병'이 전국적 규모로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등으로 이어져 온 화서학파의 학문적 전통, 해발 200여 미터의 높은 곳에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리적 잇점,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서민 부유층의 성장, 그리고 강인한 제천인의 참여의식 등이 '제천의병'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 우리들이 지키는 바는 의리요. 성패이둔(成敗利鈍)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따지지도 않았은 즉 ……" 이라는 기상으로 전개된 제천 의병은 크게 1895년의 을미의병과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의 정미의병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먼저 을미의병은 안승우, 이춘영, 김백선 등 경기도 지평을 중심으로 1895년 11월28일(이하 음력)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그 후 12월 3일 제천에 입성하였고, 단양으로 진군하여 단양 장회 전투에서 12월 8일 귀중한 첫 승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승리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의 혼선으로 의진은 분열되어 소백산을 넘어 영월에 들어갔다. 의병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유인석은 의병의 분열 상을 지켜본 후 영월로 들어가 추대에 의하여 12월 24일 대장의 지위에 오름으로서 비로소 제천의진은 호좌의병진으로서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그 후 유인석 의진은 12월 28일 제천에 다시 입성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후 1896년 1월 5일 행정적 지리적 중심지인 충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월 5일 이후 충주성을 넘겨주는 25일까지 20여일 동안이 제천의병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전세가 불리하여 충주성을 물러나 제천으로 귀환하게 되었고, 집요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드디어 4월 13일 제천의병의 전환점이 되는 제천 남산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사실상 을미 의병진은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고 험난한 서북으로의 망명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패퇴한 의진이 단양, 충주, 원주, 영월, 정선, 양구 등지를 거처 압록강 근처의 초산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 해산지인 만주 회인현 파저강변에 이르렀을 때는 수천의 의병이 불과 219명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21명만이 만주에 남고 나머지는 본국으로 귀환함으로써 사실상 을미 의병진은 종언을 고하였다.
그 후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원주의 원용팔과 제천의 정운경, 단양의 장익환 등이 을사의병으로 재기하였으나 한 달여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서 1907년에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이강년이 김상태 등과 더불어 재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미의병이다. 특히 이강년을 중심으로 한 정미의진은 소백산을 넘나들며,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를 무대로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안전한 합방을 위하여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게 되고 이 와중에 제천은 그야말로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페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 후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저항을 계속하던 정미의진도 이강년이 1908년 음력 6월 4일 금성면 작성산 절매재(결매령)에서 체포됨으로써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강년 의병진에서 중군으로 활약한 김상태 등이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제천의병의 큰 줄기는 종언을 고하고, 독립군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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