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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표정
김경엽 ∣ ARCADE 0006 ∣ A5(138×210) ∣ 249쪽 ∣ 2019년 9월 23일 발간 ∣ 정가 17,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신간 소개
누천년의 역사 속에 깃든 인간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
이 책은 쉽다. 그리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 깊이는 무궁하다. 그래서 단연 압권이다. 그런데 이 책의 깊이는 지식의 정도나 오래고 권위 있는 정전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중국식 표정>의 도저한 깊이는 한마디로 인간과 삶과 세계에 대한 한없는 이해와 정성스런 공감에서 발원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우리는 <중국식 표정>을 읽으면서, 낭만 선객 이백의 “한 생애를 남김없이 탕진해 본 자”의 적요와 쓸쓸함을,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었고 가난했으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두보의 한탄과 비애를,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취했는데 혼자만 깨어” 있고자 한 굴원의 결기와 비장미를 말뜻 그대로 추체험하게 된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의 페이지들을 여기저기 건너뛰어 노자가 <도덕경>에서 제시한 유토피아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거쳐 마침내 현대 중국의 대표적 작가인 가오싱젠의 <영산>과 티베트족 작가 자시다와의 “빠드마삼바바의 미로”에까지 이르는 도도한 흐름을 목도하기도 한다. 또한 눈이 밝은 독자라면 원소절(중국의 정월 대보름) 남녀 간의 애틋한 정을 읊은 구양수와 “가장 보통의 여자”를 꿈꾼 설도의 시구들이 국가와 남성이라는 이중 구속에 억눌린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의 주인공 왕지아즈의 “진심”으로 변주되는 극적인 장면을 추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는 셈이지만, <요재지이>를 ‘중국판 <천일야화>’(보르헤스)나 ‘동양의 아름다운 동화책’(헤르만 헤세)이 아니라 ‘고분지서(孤憤之書: 고독과 울분에서 나온 책)’로 대하는 저자의 자세는 그 글자들의 무늬(文) 속에 서린 사람의 마음을 오랫동안 곱씹고 헤아린 바인 셈이다. 저자 김경엽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말하자면 “공명이 간절할수록 시인을 시인답게 문인을 문인답게 한다.” 이는 이 책이 맑고 아름다운 까닭이다.
저자 김경엽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으며, 건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중앙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건국대학교, 총신대학교, 협성대학교 등에서 글쓰기와 중국 문학을 강의했다.
책머리에
얼마 전 한 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회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된 나한상(羅漢像)들이었다. 돌에 새긴 성자들의 표정은 조금씩 달랐다. 초승달 같은 눈으로 웃는 표정, 우울한 듯 슬픈 표정, 기쁜 일이 있는지 즐거워하는 표정 그리고 괴로운 듯 찡그린 표정. 제각기 개성이 넘치는 표정들이었다. 찬찬히 표정들을 살피며 그 의미를 나름대로 짚어 보는 순간 돌덩이들이 돌연 살아 있는 것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들이 걸어오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식이나 의식 없이 저것들을 바라봤다면 어땠을까. 아무 쓸모없는 흔해빠진 돌덩이에 불과할 것은 뻔한 일이다.
나는 전시회를 둘러보며 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문학은 저마다 자신만의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석공이 돌에다 각각 표정이 다른 성자의 모습을 새기듯 작가 또한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문학이란 이름의 성채에 새겨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표정은 각기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표정이 감추고 있는 의미를 번역하고 해석하여 성과 속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 환상과 실제 사이에 아찔한 소통의 다리 하나 세워 보는 일이 바로 독자와 연구자 혹은 비평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중비교문학을 공부하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수시로 꺼내 보는 시 한 구절이 있다.
剪不斷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理還亂 감으려니 더 엉키네
是離愁 이 이별의 슬픔
―이욱(李煜, 937-975), 「오야제(烏夜啼)」 중에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명주실처럼 질긴 미련의 정을 어쩌지 못하고 견뎌야 하는 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니 상실의 고통을 딱 아홉 글자로 함축한 구절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졌다. 이제까지 천 명의 시인이 천 편의 이별시를 썼다면 이 시는 이별을 견디는 천한 번째의 새로운 표정 같았다. 이렇듯 문학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는 연속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곤 했다.
한중비교문학을 공부하면서 작품들의 표정과 그 표정 뒤에 감추어진 말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잘 들렸고 때로는 모호했다. 모호한 것은 그것대로 새롭게 태어난 변종의 표정으로 여겼다. 문학작품이 저마다 얼굴처럼 붙이고 있는 다양한 표정과 그 표정이 내재하고 있는 궁극의 의미, 이 두 가지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판독하는 작업이 문학을 공부하는 일의 즐거움이자 어려움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중국 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하는 즐거움과 어려움을 통과하며 남긴 작은 흔적들이다. 문학은 시공을 넘어 보편적이지만 중국인이 그들의 언어로 창작한 문학에는 그들만의 특수한 조건에 의해 규정된 그들만의 고유한 생각과 자세와 표정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책 제목을 ‘중국식 표정’이라고 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 약력
김경엽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중앙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건국대학교, 총신대학교, 협성대학교 등에서 글쓰기와 중국 문학을 강의했다.
차례
005 책머리에
011 시선일여의 시학
023 현실과 환상의 경계, 가오싱젠의 <영산>
038 ‘붉은 종족’을 위한 진혼곡, 모옌의 <붉은 수수밭>
050 신화와 상상력의 제국, <산해경>
063 욕망과 금지의 이중주, 장아이링의 <색, 계>
074 시와 그림의 만남, ‘시화일률론’
086 「우연」의 시인, 쉬즈모와 그의 여인들
100 부재와 결핍의 노래, 설도의 ‘동심초’ 사랑
111 일탈의 로맨스와 문자 유희, 사마상여와 탁문군
122 환상의 귀환, 포송령의 <요재지이>
137 중국인의 초상, 위화의 <인생>
150 애도와 성찰의 시간, 자시다와의 「티베트, 가죽끈 매듭에 묶인 영혼」
163 ‘희미한 등불 아래 있는 그대’, 원소절의 아름다운 시편들
176 은일과 취흥 혹은 광기의 시인, 이백
190 봄날과 전장의 시인, 두보
203 유토피아를 찾아서, 도연명의 「도화원기」
214 최초의 시인 굴원과 ‘중취독성’의 시학
228 불가능을 사랑한 시인, 꾸청
244 참고 문헌
책 속으로
시가 선을 배우면 주객 분리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다. 또한 생략과 함축, 암시와 절제를 통해 일상 언어 너머로 초월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선이 세계를 통찰하고 관조하는 방식을 빌어 언어를 담금질하고 기존 언어의 고유한 의미를 구조적으로 해체시킨다. 재조립된 언어는 선적 직관의 엄호를 받으며 태어난 전혀 새로운 언어의 종족들이다.(「시선일여의 시학」 중에서)
오늘날 문학에 가해지는 억압적 상황에 대한 가오싱젠의 우려와 고민은 깊다. 문학도 상품처럼 거래되는 21세기에 시장의 논리와 규율에 굴복하지 않는 것, 대중적 기호에 영합하지 않는 글쓰기의 관철이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찾은 해답은 작가 스스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잃지 않을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중심 아닌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 세상과의 거리는 관조의 거리이고 고독이 발생하는 자리이다. 고독한 자리에서 세상을 관조할 때 비로소 작가는 무절제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차갑게 성찰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현실과 환상의 경계, 가오싱젠의 <영산>」 중에서)
<붉은 수수밭>은 작품 전체가 일종의 초혼가(招魂歌)이다. 모옌 자신이 권두언에서 밝혔듯 끝도 없이 펼쳐진 고향의 붉은 수수밭을 떠도는 선조들과 영웅들의 영혼을 불초(不肖)한 자손인 내가 부르는 노래다. 그런 점에서 <붉은 수수밭>은 오직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원초적 삶, 불가역의 시간 속에서 타올랐던 ‘붉은 종족’들의 원시적 생명과 영웅적 서사에 바치는 진혼곡이기도 하다.(「‘붉은 종족’을 위한 진혼곡, 모옌의 <붉은 수수밭>」 중에서)
황지우와 권혁웅의 시에서 <산해경> 언어의 차용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익숙한 낱말의 의미와는 무관한 한자를 병기하여 그 낱말이 조장해 왔던 관습과 관행의 사고를 중지시키고 낯설게 만든다. 이 낯선 감각이 신화적 지형 위에 포개진 당대 현실의 난경(難境)을 생생하게 드러낸다.(「신화와 상상력의 제국, <산해경>」 중에서)
왕지아즈의 이중의 정체성은 ‘격렬한’ 모순이다. ‘유부녀-마이 부인-친일 앞잡이의 연인’으로 이어지는 가면과 ‘처녀-대학생-스파이’로 이어지는 민낯이 대립 충돌한다. 이 이중의 정체성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성’이며 정체성과 관련된 혼돈과 모순이 영화 「색, 계」를 추동하는 힘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적 서사(여성의 몸)와 공적 서사(민족, 국가)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팽팽한 모순과 긴장이 영화를 밀어 올리는 부력이다. 그 중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여주인공이 처한 이중적 식민 상황이다. 거시적 민족 차원의 식민 상태, 그리고 대의와 이념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려는 일상에 편재하는 의식의 식민 상태.(「욕망과 금지의 이중주, 장아이링의 <색, 계>」 중에서)
훌륭한 그림이란 형상을 똑같이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형상 밖에 숨겨진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좋은 시 역시 의미는 언어의 표면에 있지 않다. 표면에서 부단히 미끄러지며 언어의 밖에서 의미를 구축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림에서의 ‘형외지의(形外之意)’, 시에서의 ‘언외지미(言外之味)’는 시와 그림이 각각 추구하는 미적 원리이다. 중국 예술에서 중시하는 의경(意境)이란 바로 형상과 언어 밖에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심미 차원의 경계이다.(「시와 그림의 만남, ‘시화일률론’」 중에서)
11월 19일 새벽녘, 쉬즈모는 오래된 연인 린후이인의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우편 수송용 비행기를 무료로 얻어 탔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향하던 비행기는 산동성 제남 부근에 이르자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방향을 잃고 헤매다 산봉우리에 충돌했다. 비행기는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했다. 쉬즈모 또한 공중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가 쓴 시의 한 구절인 한 조각 뜬구름이나 한 송이 눈꽃처럼 스러져 갔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시인처럼 살다가 시인처럼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우연」의 시인, 쉬즈모와 그의 여인들」 중에서)
만약 설도가 기생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생애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생각해 본다. 양갓집 규수로서 혹은 평범한 가정의 여자로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권태와 공허한 날들을 보냈을까. 잘 모를 일이다. 가정의 질문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만약 그녀가 기생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절실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의 ‘동심초’도 없었을 것이다. ‘동심초’는 부재와 결핍의 노래이기 때문이다.(「부재와 결핍의 노래, 설도의 ‘동심초’ 사랑」 중에서)
이 시대의 주류 문학 장르였던 부(賦)는 한마디로 통치자에게 아부하는 문학이었다. 황제의 공덕과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어용문학이었다. 글재주가 있어야 쓸 수 있었지만 내용과 정신은 텅 빈 채 오직 통치자의 오락과 유희에 봉사하는 문학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이 시대 개인의 글쓰기 능력이란 최고 권력자에게 봉사함으로써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얻는 유력한 수단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기층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글쓰기 의식은 아직 잠잠하던 시대였다. 사마상여는 이러한 시대 정황에 최적화된 글쓰기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문인이되 어용 문인이었고 문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식 상인에 가까웠던 인물처럼 보인다.(「일탈의 로맨스와 문자 유희, 사마상여와 탁문군」 중에서)
환상은 현실에 대한 위반과 변형의 욕망이 낳은 착란이다. 또한 사회적 질서에 대한 전복적 장치다. 착란과 전복을 통해 포송령은 비루한 현실에서 탈주하고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요재지이>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욕망의 어긋난 틈새에서 비집고 나온 서사들이다. 서사들의 배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의식의 각종 욕망들이다. 욕망들이 환상이란 외투를 뒤집어쓰고 표출될 때 비로소 환상은 서사 내부로 안착한다. <요재지이>는 환상들의 최종적인 귀환 장소였다.(「환상의 귀환, 포송령의 <요재지이>」 중에서)
13살 아들 유칭의 죽음의 원인은 ‘과다 수혈’이다. 학교 교장이 출산 도중 하혈이 심하자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헌혈할 것을 강요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어린 유칭은 교장으로 상징되는 지배 관료를 위해 피를 빼앗긴 것이다. 이 사건은 후일 문혁 시기에 딸 펑샤가 출산 도중 ‘과다 출혈’로 희생된 일과 쌍을 이룬다. 위화는 ‘과다 수혈’과 ‘과다 출혈’이라는 기묘한 소설적 설정을 통해 이 시대에 아이들의 피를 필요로 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를 준엄하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가파른 중국 현대사의 어느 국면은 인민대중들에게 어쩌면 흡혈귀의 모습으로 도래하여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중국인의 초상, 위화의 <인생>」) 중에서)
티베트 전역은 빠르게 중국화되어 가고 있다. 지난 2006년 개통된 칭짱(靑藏)열차는 베이징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4,000㎞를 달린다. 달라이 라마는 열차의 개통이 티베트에 대한 ‘문화적 대학살’의 시작이라고 절규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차는 매일 수천 명의 한족들과 관광객들을 라싸 역에 쏟아 낸다. 1950년대 2만 명에 불과했던 라싸 인구는 이제 30만 명에 이르는 도회지로 탈바꿈했다. 유서 깊은 사원과 궁전 근처엔 첨단의 백화점과 쇼핑센터, 각종 위락 시설과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포탈라 궁 앞엔 대형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티베트인들의 손안에는 염주 대신 햄버거와 위안화가 들려져 있다.(「애도와 성찰의 시간, 자시다와의 「티베트, 가죽끈 매듭에 묶인 영혼」」 중에서)
인파 속을 그대 찾아 천만 번 헤매다가
문득 고개 돌려 보니
그대는 저쪽
희미한 등불 아래 있었네
아마도 대보름 밤 몰려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人山人海)였을 것이다. 무수한 인파 속을 거꾸로 헤쳐 나가며 나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수도 없이 두리번거려 보지만 그 사람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못 찾을 것 같은 순간, 그래서 애타게 절실한 순간, 무심히 고개 돌려 보니 저쪽에 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희미하게 사위어 가는 곧 꺼질 듯 쇠잔한 등불 아래 그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왜 희미한 등불 아래 있었던 걸까. 우리는 잘 알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시는 무한한 상상과 해석의 지평을 개방한다. 모르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하고 미묘한 시가 되어 버린 소중한 예를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경험한다.(「‘희미한 등불 아래 있는 그대’, 원소절의 아름다운 시편들」 중에서)
이백의 개성은 몇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분방한 낭만과 고요한 은둔으로 향하다가도 어느새 격렬한 현실로 돌아와 출세와 공명의 성취에 안달이 났다. 고매한 예술적 감수성과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불사르다가 또 어느 순간 차가운 입선(入仙)과 구도의 적막 속으로 침잠했다. 그는 평생을 출세와 은둔, 선계와 속계 사이에서 방황한 광객(狂客)이었다. 이백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완벽하게’ 무능했다. 재물을 우습게 여겼고 평생을 놀고먹었다.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렸고 아내는 산후조리 잘못으로 죽었다.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했던 이백 정신은 위대한 문학을 낳는 데만 집중되었다. 이백 시가 보여 주는 해방과 은둔의 경지는 동양적 유토피아를 방불한다. 적요하고 쓸쓸했다.(「은일과 취흥 혹은 광기의 시인, 이백」 중에서)
「석호리」는 바로 당시 민중이 겪어야 했던 참상과 고난을 리얼하게 묘사한다. 1,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당시의 비극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핍진성에 전율하게 된다. 전쟁 중 한 마을의 여관에 묵었던 두보는 그날 밤 그 집에서 벌어진 사태를 마치 생중계하듯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아들 셋이 이미 징집되어 끌려간 할멈의 집에 관리들이 들이닥친다. 관리들이 오기 직전 할아범이 도망친 빈집에는 이제 젖먹이 손자와 헐벗은 며느리밖에 없다. 누구를 전쟁터로 끌고 갈 것인가. 호통을 치며 위세를 부리는 관리들 앞에서 할멈은 눈물로 호소한다. 아들 둘은 이미 죽고 더 이상 징집될 사람이 없는 집이니 차라리 자신을 데리고 가라고 자원한다. 늙고 병들었지만 전선에서 아침밥은 지을 수 있다는 할멈은 유사 이래 최초의 ‘가장 슬픈 취사병’이다. 두보가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그와 작별 인사를 한 사람은 지난밤에 도망갔던 할아범이다. 할멈은 어디로 갔을까. 시의 비극적 정조의 절정은 시가 끝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이어진다.(「봄날과 전장의 시인, 두보」 중에서)
「도화원기」는 매우 신비로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그 후로는 마침내 그 나루에 대해 묻는 자도 없게 되었다.” 영원히 봉인되는 유토피아의 순간이다. 다만 막막한 현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문득 각자의 마음속에 홀연히 비쳐 드는 한 줄기 빛, 그 빛을 따라갈 때 비로소 열리는 초월과 환상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도원은, 유토피아는 누구에게 물어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원히 주소 불명의 매혹적인 공간이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는 도연명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들려오는 듯하다.(「유토피아를 찾아서, 도연명의 「도화원기」」 중에서)
굴원이 남긴 작품군을 묶어서 우리는 ‘초사(楚辭)’라고 부른다. ‘초나라의 말로 된 초나라의 노래’란 뜻이다. 초사 훨씬 이전에 우리는 중국 시의 효시인 <시경(詩經)>을 알고 있다. <시경>이 중국 민족 공동체의 집단 노래, 집체 인격이라면, 초사는 중화 민족이 부른 최초의 개성적인 개인의 노래다. <시경>이 익명성의 합창이라면, 초사는 굴원이라는 기명인의 독창이다. <시경>이 황하 유역의 치란(治亂)과 이별과 세상의 몰락을 위로했다면, 초사는 대체로 한 사람의 고행과 우수와 시름을 노래했다. 그리고는 신화와 낭만의 천상으로 솟아올라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다. <시경>이 말발굽의 먼지가 보얗게 일어나는 황하 유역에서 부른 집단의 노래라면, 초사는 수려한 장강 협곡에서 부른 굴원의 독백이었다. <시경>이 우리에게 시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면, 굴원의 삶과 그의 글쓰기는 시인이란 누구인가를 최초로 질문하게 하였다. 우리가 굴원의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최초의 시인 굴원과 ‘중취독성’의 시학」 중에서)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미성년이 아니라 스스로 성년이 되기를 거부한 ‘비성년’의 삶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세속에서 얻은 상처와 오염을 치유하기 위해 자연 속으로 자발적 소외와 자아 유배를 감행했던 것이다. 소외와 유배는 시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 목표이기도 했다. 어쩌면 꾸청은 시와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희귀한 예에 속하는 시인일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절망했던 순간 ‘동화 시인’은 한 손에 도끼를 들고 한 손으론 자신의 목에 끈을 감았던 것은 아닐까?(「불가능을 사랑한 시인, 꾸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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