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밀교경전의 유통과 그 영향
1.연구 목적과 연구 현황
불교는 인도에서 성립하였으나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 전래된 이래 이 지역 사람들의 사유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불타의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합리성과 보편성, 그리고 진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경전이 출현하고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지며 불교는 사상의 발전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전래된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적인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변화하며 발전하였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신라시대 불교의 영향은 종교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따라서 신라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과정을 탐색하는 것은 신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이후 불교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은 중국을 거쳐 신라에 지속적으로 전해졌다. 그 중에는 밀교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불교사적 관점을 견지하는 가운데 밀교를 중심으로 신라 사회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인들에게 새로운 사상체계로 전해진 불교의 전래와 확산 속에서 신라 사회에 받아들여진 밀교의 성격은 무엇인지 또한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밀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넓은 의미에서 비밀스러운 가르침, 즉 비밀교(秘密敎)로 해석한다면 역사상의 모든 종교가 이 범위에 해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신비한 체험의 영역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밀교는 그 외연을 불교에 두어, 비밀불교의 줄인 말로서 '비밀한 불교'나 '불교 속의 비밀'한 가르침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밀교는 다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처음에 밀교는 드러나 있는 가르침[顯敎]이 아니라, 석가모니가 설법이나 문자를 통해 말하지 못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가르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밀교의 의미는 조금씩 변화되어, 다라니(陀羅尼)를 비롯한 신비한 수행법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8세기 경에는 진언밀교(眞言密敎)가 밀교 외의 가르침[顯敎]보다 빨리 성불할 수 있게 해줌[速迭成佛]을 강조하여 우위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불교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밀교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불교와 별개의 이론과 실천체계를 갖추고, 교단을 조직한 것이라고 파악하기 어렵다. 밀교가 발생한 과정을 살펴보면 밀교는 대승불교의 발전 과정 속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적 갈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밀교는 불교 속의 비교적인 내용, 즉 밀교의 특징과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들을 체계화하고 심화하는 과정을 거쳐 나타난 불교 사상과 실천 체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특징으로 하는 불교의 모습을 현재 불교학계에서는 밀교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밀교가 성립한 이후의 모든 정황을 밀교라는 용어 하나로서 정의한 것이 아니다. 후대에 밀교의 특징과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들이 체계화되고 사상의 심화가 정립된 이후, 이와 같은 사상의 흐름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밀교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교파로서 밀교를 정의하려는 관점이 드러나는 것은 8세기 말 이후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밀교 이외의 용어로 밀교를 지칭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밀교의 정의에 관한 오해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의 관점에서 초기~ 후기 밀교의 흐름을 모두 포괄하여 '밀교'라는 하나의 용어로 통칭하는 것은 특히 일본 학계의 밀교 연구 과정 속에서 정착하였고, 이후 여러 학자들이 이에 공감하여 밀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밀교의 성립 과정은 현재로서는 밀교의 역사적‧사상적 발전 과정을 가장 많이 연구해 온 일본 학계의 이론에 따라 초기밀교, 중기밀교, 후기밀교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초기밀교는 불교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3~4세기경부터 7세기 중엽까지 대승경전 가운데 진언과 다라니, 의례와 공양법 등이 부수적으로 설해지던 시기로 제재초복(除災‧招福)의 현세이익을 바라는 것이 특징이다. 중기밀교는 7세기 중엽 성립한 『대일경』과 7세기 말경 성립한 『금강정경』을 계기로 그 이전시기에 비하여 체계화된 밀교경전이 유행한 시기를 가리킨다. 이 경전은 다라니를 염송함으로써 삼매를 얻으려는 세간적 이익 외에 밀교의 소재를 통해 성불을 목표로 한 전문화된 밀교 수행을 설하고 있다. 후기밀교 는 8세기경 성립된 탄트라(tantra)중심의 밀교경전이 성립한 시기이다. 이 시기 밀교는 대락사상(大樂思想)의 교리와 의학과 생리적 지식을 수행에 반영시킨 생기차제(生起次第)와 구경차제(究竟次第)의 독특한 수행차제가 설해져 있다.
초기밀교와 중기밀교는 동북아시아 삼국, 즉 중국‧신라‧일본에 전해졌으며, 후기밀 교는 중국의 경우 송(宋)대 이후 전해졌으나 크게 호응받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본고의 주제인 신라시대 밀교 연구에서는 초기밀교와 중기밀교가 연구의 대상이 된다.
국내 밀교학 연구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가 1986년에 간행한 『한국밀교사상연구』와 1998년 대한불교진각종에서 펴낸 『한국밀교학론문집』 등은 기존에 이루어진 밀교연구를 바탕으로 교학체계를 정리하고 밀교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신라 밀교는 우리나라 밀교의 도입기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밀교 전반에 대한 서술에서 밀교의 도입기로서 간단히 설명되거나 고려시기 밀교의 전 단계로서 분석한 경향이 있으며, 현재 신라밀교를 단독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시기 밀교 관련 기초문헌이나 찬술문헌이 다른 불교 사상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에서 이 시기 밀교의 교학적 연구는 주로 인도, 중국, 일본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신라시대 밀교연구 상황을 살펴보면, 신라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시켜 밀교의 수용 양상과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는 1차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주편(神呪篇)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신주편이 『삼국유사』의 다른 편목에 비해 항목 수가 적은 것이나 중국의 불교 역사서의 체제와 비교했을 때 편제 구성이 독창적인 점들을 지적하며 신주편의 편제 목적이나 의의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일연(一然)이 밀교를 신라 불교의 하나의 중요한 줄기로 파악했기 때문에 단독 항목을 편제했을 것이라고 신주편의 의의를 평가하기도 하며,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당시 고려가 원(元)의 복속기에 있었던 상황에서 외세를 물리칠 수 있는 호국(護國)의 원리로서 밀교를 제시하고자 했다는 견해가 있다. 한편 당시까지 이어지던 신인종(神印宗)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신라 밀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는 신주편에 수록된 밀본‧명랑‧혜통 등 세 명의 승려의 성격과 그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삼국유사』 신주편 밀본최사(‧密本催邪)‧명랑신인(明朗神印)‧혜통강룡(惠通降龍)의 세 승려들을 각각 밀교의 신인종과 총지종 승려로 이해하였다. 1970년대 들어 보다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밀교 승려로 보는 것에 동의하고 신라시대 명랑과 혜통에 의해 신인종과 총지종이 성립되었음을 긍정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게 되는데, 이와 같은 견해는 이후에도 큰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하여 두 종파 모두 인적‧사상적 전통을 신라에 두고 있었던 것이지 실질적인 종파로서 성립한 것은 고려 시대 들어서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고, 신인종은 신라시대에 종파로서 성립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총지종(摠持宗)의 경우에는 부정확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종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대한 각 연구자들의 시각에 차이 때문에 발생한 논쟁이다. 현재 종파의 정의와 성립 시기에 관한 재고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신라 밀교의 성격 규정과도 관련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라 불교 전반에 대한 고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종파 성립 시기 문제와 더불어 신주편의 세 승려 각각의 주요 행적을 탐구함으로써 밀교의 역할을 정리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밀본과 혜통은 경전 독송이나 다라니 염송을 통해 개인의 치병 활동 분야에서 역량을 보여주었고, 명랑은 문두루비밀법을 설행하여 호국적 성격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밀교 수용 이후 왕실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다라니에 대한 깊은 신앙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기존 연구를 통해 각 승려들의 활동의 의미는 다각도에서 파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주편만의 내용으로는 7세기 신라 사회와 불교계에 영향을 미친 밀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혜통의 경우 아직까지 그의 스승인 무외삼장(無畏三藏)에 대한 해명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고, 그의 신이한 행적에 대한 평가도 적확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신라 내부의 기록만이 아니라 소의 경전의 내용 및 동시 대 주변국의 정황과의 비교를 통해 신라밀교의 성격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신주편만으로는 7세기 이전의 모습을 설명하기 힘들며, 그 이후 전개된 중기밀교 전래와 이해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공감하여 신주편 이외의 자료를 통해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먼저 세 승려 이외에 원광(圓光)‧안홍(安弘, 安含)의 행적에서 밀교적인 성격을 밝혀내어 이들로부터 밀본‧명랑‧혜통에게 연결되는 밀교의 모습을 찾고자 노력함으로써 연구의 범위를 넓혔다. 특히 밀본‧명랑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자장(慈藏)에게서 밀교적인 모습이 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또 통일신라 시기 활동한 진표(眞表)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을 전해 받아 제자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중기밀교가 신라에 전해졌던 모습과 의미를 살핀 연구가 있다. 또한 밀교 승려들의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를 전하고 있는 당 해운(海雲)의 『양부대법상승사자부법기(兩部大法相承師資付法記)』와 일본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등의 자료를 통해 의림(義林), 불가사의(不可思議), 혜초(慧超) 등 몇몇의 신라 승려들의 역할을 추론함으로써 당시 신라밀교의 위상을 재정립하였다.
한편 밀교경전의 수용 과정과 실제 유통 가능성에 천착한 연구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삼국유사』의 문헌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밀교 경전들을, 일본의 사경(寫經)자료를 통해 역추적 함으로써 실제 신라에서 유통되었을 법한 밀교관련 경전을 제시한 연구가 주목된다. 이는 그간의 『삼국유사』 신주편의 3명의 승려의 행적 분석에 초점을 두었던 연구 방법에서 벗어나 신라에 전해졌으리라 추측되는 밀교경전의 유통 상황과 그 경전들의 사상적 특징 분석으로 초점을 변경할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라시대에 전해진 밀교경전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근거한 탑의 조성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커서 무구정탑에 봉안된 사리장치에 대한 연구가 미술사 분야에서 축적되었다. 그리고 무구정탑 내에서 『무구정경』이나 경에서 설한 다라니를 서사한 인쇄물이 발견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서지학 분야에서 『무구정경』의 한역 연대 및 신라 전래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무구정탑을 건립하게 된 이유를 아미타신앙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신라하대 아미타신앙의 성격을 풀이하였는데, 『무구정경』이 정토왕생 기원뿐 아니라 호국과 치병 등 다양한 공덕을 함께 설명하고 있으므로 무구정탑의 건립 목적을 아미타신앙에만 한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밀교의 입장에서는 『무구정경』이 다라니를 중심으로 설명한 경전이란 것에 의미를 두고 무구정탑을 밀교 신앙의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신라 밀교의 성격을 해명하는 것과 관련한 또 다른 주제로는 오대산신앙을 들 수 있다. 오대산신앙은 문수신앙과 결합하여 오대산에 문수가 머문다고 생각하는 신앙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오대산신앙은 오대산에 방문한 자장이 문수를 친견한 것을 계기로 전래된 이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이곳에 수행하였고 보천에 의해 오대에서의 결사(結社)와 예참(禮懺) 의례(儀禮)가 정해졌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자장의 오대산 방문 및 문수 친견에 대한 해석 및 두 태자의 실존인물과의 대응 문제와 그 성격에 대한 논의는 오대산신앙이 신라 중대에 성립하였는지 하대에 성립하였는지에 대한 논쟁과 신라 오대산 신앙의 성격 해명과 연결되어 논구되어 왔다.
최근에는 『삼국유사』 오대산신앙 관련 사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필요성을 제안하여 사료의 재해석 여지를 제시한다든지, 오대산신앙과 관련 하여 『삼국유사』 이외의 오대산 관련 기사 및 돈황의 『오대산도(五臺山圖)』등 새로운 자료의 분석을 통해 오대산신앙을 새롭게 보고자 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밀교 승려인 불공(不空)의 영향으로 오대산 신앙에 밀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신라의 경우 중국과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으나 오대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사방에 불보살을 배치한 것에서 밀교의 오방불신앙의 영향이 지적되었다. 오대산의 오방불 및 불교 조각품에 나타난 오방불과 관련해서는 미술사학계에서 관심을 가졌고,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나타나기 시작하는 비로자나불 조성과 관련하여 밀교에 주목하여 화엄과 밀교의 결합 양상에 대한 연구 성과가 상당량 축적되었다.
이렇게 기존 밀교 연구는 일차적으로 개별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향이 크다. 또한 밀교경전 연구에 바탕을 둔 사상사적 입장에서의 풀이는 여전히 부족하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관정경』‧『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무구정광대다라니경』‧『불정존승다라니경』‧『준제다라니경』‧『불공견삭다라니경』‧『수구다라니경』 등을 단독 주제로 한 연구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관련한 검토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경전들은 모두 신라시대에 전래되었던 경전들이기 때문에 신라시대 밀교의 성격을 논구하기 위해 각 경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2.연구 범위와 연구 방향
신라에 전해진 경전과 그와 관련한 논서들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신라시대 불교 사 상계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 연구는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 불교 연구 과정에서 밀교에 대한 관심도 점차 확대되면서 일정 이상의 연구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밀교 연구는 주로 『삼국유사』 신주편의 자료를 주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수록된 밀본, 명랑, 혜통의 행적은 모두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직전의 상황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유사』 신주편만으로는 7세기 중반 이전과 8세기 이후 신라 밀교의 모습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처럼 그간 밀교 연구는 자료 부족과 해석상의 문제로 한정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신라 사회에 전해졌던 밀교경전을 분석 자료로 삼고자 한다. 경전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불교의 모습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 초기밀교와 중기밀교 경전이 유입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관정경』, 『불공견삭다라니경』, 『수구다라니경』이 있으며, 불교미술품과 관련 있는 경전으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정존승다라니경』, 『다라니집경』, 『십일면신주심경』, 『불공견삭신변진언경』, 『파지옥삼종실지의궤』, 『금강정경』과 관련 의궤류, 천수천안관음과 관련한 경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신라 승려들의 밀교 관련 저술 중 현존하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가 『대일경』 권7에 대하여 주석한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 2권, 혜초(慧超)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지 않지만 신라 승려의 밀교 관련 저술로 생각되는 예로는 현일(玄一)의 『수원왕생경기』 1권, 경흥의『대관정경소』 2권‧『십이문다라니경소』 1권 및 도륜(道倫)의 『십일면경소』 1권, 지인(智仁)의 『십일면경소』1권 등이 있다.
그런데 기존 연구에서는 이외에도 밀교부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밀교적인 요소가 있는 경전의 경우 신라시대에 유포되었을 밀교경전으로 분류하였다. 예를 들면, 경흥의 『금광명최승왕경약찬』, 의적(義寂)의 『반야이취분경유찬』 1권, 원측(圓測)의 『인왕반야경소』 6권 등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밀교경전의 범위를 현재 불교학 연구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신수대장경 체제에서 밀교부에 수록된 경전으로 한정짓고자 한다. 신라 밀교의 성격과 그 역할에 대한 분석 및 정의가 아직까지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현 연구 단계에서는 밀교 경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경전의 사상적 탐색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십일면관음보살상, 천수천안관음보 살상, 오방불상, 비로자나불상 등의 불교예술품의 도상 파악을 전제로 해야만 그 전래 양상을 추론할 수 있는 경전들인 『십일면신주심경』,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금강정경』, 천수천안관음류 경우도 일차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겠다. 다만 문헌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이 경전들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전문적인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아 논의를 전개할 경우가 있기도 할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불정존승다라니경』, 『준제다라니경』은 불교 예술품인 탑과 관련이 깊지만, 본 연구에서는 경전의 내용과 탑의 발원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므로 이 세 경은 연구의 대상에 포함하고자 한다.
한편, 8세기 찬술로 추정되는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은 화엄과 밀교의 융합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주목받았다. 이 저술은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진위 논란이 있었으나 신라 승려가 찬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901~961년 사이에 찬술된 것으로 생각되는 『건나표사일승수행자비밀의기』(이하 秘密義記)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화엄사상이 주가 되며 밀교적 요소는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문헌의 분석은 화엄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두 문헌 연구만으로도 독립된 연구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간단히 소개 하고 추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본고에서는 『관정경』,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정존승다라니경』, 『준제다라니경』, 『불공견삭다라니경』, 『수구다라니경』을 연구의 1차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더불어 논의 전개 과정에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경』의 서문과 일본의 『대일경공양차제법소사기』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관정경』은 『삼국유사』 신주편의 명랑이 행한 문두루비밀법의 소의 경전이었으며, 밀본이 치병에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8세기 이전 신라에 전해진 초기밀교경전으로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시기 신라의 밀교의 성격과 그 영향력을 탐색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는 중기밀교경전인 『대일경』의 주석서 중 하나인데, 이 저술의 찬자가 신라 승려 불가사의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에 중기밀교경전이 전해졌음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없다. 따라서 중기밀교의 사상이 8세기 이후 신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서 이 저술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첫 번째 과제이다.
이 밖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불정존승다라니경』‧『준제다라니경』은 8~9세기에 걸쳐서 신라 탑의 조성 과정에 사상적 근거가 되었던 경전이라고 생각된다. 밀교경전에 근거한 신앙 사례 중 그 파급력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경전이기 때문에 이들 경전들이 지닌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신라 사람들의 신앙 활동에 미친 밀교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공견삭다라니경』은 중국에서 해당 경전의 한역을 도모할 때 신라 출신의 명효(明曉)가 함께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이 경의 한역이 필요로 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밀교의 성격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수구다라니경』의 경우는 수구다라니를 서사하여 탑에 안치하거나 염송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수구다라니의 특징과 실제 신앙 사례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신라에서 수구다라니를 서사하고 염송한 배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상의 경론들의 구성 방법과 내용상의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대상이 되는 경론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된 바가 적기 때문에 이 작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 분석을 통해 해당 경론들이 전체 밀교경전 성립사적인 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점은 신라 사회에서 받아들인 밀교의 성격을 파악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각 경론들의 어떤 내용상의 특징이 관련 저술 및 신앙 사례, 불교 미술품 제 작에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경에서 말한 내용 중 중요하다고 인식한 점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내용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선택적으로 이해하였는지 등을 기준으로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며 의미는 무엇인지 추론하려고 한다. 경론의 인식 태도는 신라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입장을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의 자료만을 분석하는 것은 기존의 연구 결과와 크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같은 경전이라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였는지를 신라의 양상과 비교하고자 한다. 각 경전이 유행한 시기는 각각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다른 경우라면 그 시기적 특징을 통해 신라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고, 같은 경우라면 공통점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각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남아 있다면 해당 경전에 대한 이해 태도를 알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에 내용을 비교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 신라 사회와 불교계에서 밀교가 갖는 의미를 추출해 볼 것이다.
이상의 방법을 바탕으로 본문의 각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초기밀교 경전으로 분류되는 『관정경』이 정토‧약사‧삼귀오계‧주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관정경』이 7세기 이전부터 유행하였던 사례를 근거로 7세기 중반 밀본이 『관정경』의 권 12에 해당하는 『약사경』 독송을 통한 치병 활동을 하기 이전부터 『관정경』이 신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불교가 신라에 내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속신앙이 담당했던 역할을 불교가 대체하여 가는 과정을 『관정경』과 같은 관점에서 풀이하고자 했을 여지를 찾아보겠다. 또 밀본과 명랑의 행적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불교 수용 초기에 밀교가 전통신앙과의 대립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언급해오던 기존의 관점에 구체적인 예시를 더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Ⅲ장에서는 중기밀교를 대표하는 『대일경』의 주석서인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분석해 보려 한다. 불가사의가 『대일경』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고 수행하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찬술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공양차제법소』가 신라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전래되어 계승‧발전된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대일경』 권7의 유일한 주석서로서 그 가치를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Ⅳ장에서는 밀교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신앙 활동이 이루어진 사례를 통해 신라 사회에서의 밀교의 확산과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Ⅳ장 1절에서는 8세기 들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6종의 다라니를 법보(法寶)로서 받아들여 다라니의 공덕을 통한 다양한 기원의 성취를 바라며 무구정탑이 조성되기 시작한 배경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내용 분석을 통해 살펴보겠다. 또 비슷한 사례로서 『불정존승다라니경』과 『준제다라니경』이 받아들여져 실제 조탑(造塔)으로 이어지게 된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Ⅳ장 2절에서는 이 무첨이 『불공견삭다라니경』을 한역하게 된 과정에 신라의 명효가 관여하게 된 배경을 추론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 『불공견삭다라니경』이 다른 불공견삭 관련 경전과 비교하였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특징이 신라의 관음신앙과 그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Ⅳ장 3절에서는 보천이 수구다라니를 염송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거나, 신라 말 해인사의 치군(淄軍)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탑 안에 수구다라니가 납탑하게 된 사상적 배경을 『수구다라니경』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알아보고자 한다.
Ⅴ장에서는 앞장에서의 검토를 통해 파악된 신라시대에 유통된 밀교경전과 경전에 근거를 둔 신앙 사례의 성격을 정리해 보겠다. 특히 신라 사회의 변화 과정과 당시 불교계의 흐름 속에서 밀교의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밀교의 특징과 성격이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 의의를 생각해 보겠다. 밀교경전이 신라에 전해졌던 정황과 전래 이후 신라 사회에서 어떤 관점에서 해당 경전들을 이해하고 해석하였는지를 정리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연구가 구체적 근거를 찾아야만 설득력이 부여되는 것이지만, 본 연구 또한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이라도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해석상의 실마리로 남겨 두고자 한다. 이 연구가 신라시대 밀교의 성격과 그 역할의 의미에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길 바라며, 나아가 신라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짚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신라시대 밀교경전의 유통과 그 영향/ 옥나영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