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巫堂)의 정체성(正體性)
올바른 성무수업(成巫修業)받지 않은 무당은 최고(最高)의 무당이 될 수가 없고, 최선을 다하는 무당이 되려면 올바른 성무수업을 받아야 한다.
무당의 올바른 성무수업을 위한 무속 백화사전인 신불원해풍의 무도학(巫道學)은, 무당(巫堂)이 가는 길(道)을 배우는 학문(學文)으로, 무속세계의 기초(基礎)학문과 무속의례와 기예(技藝)부터 큰 무당으로 거듭나게 하는, 완벽한 무속세계의 지식(知識)을 총 망라한 무당 길의 등대와 같은 교재이다.
오늘날 과학(科學)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어느 듯 5차원(五次元)시대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意識構造)도 상당한 높은 차원에 들어섰고, 2차원(二次元)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개한 무당들의 점사(占辭)에서는,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주먹구구식의 점법(占法)이 통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렇기에 무당(巫堂)들도 2차원(二次元)세계를 벗어나 3차원(三次元)이나 4차원(四次元)세계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무속제자들은 신(神)이나 신명(神明)이나 신점(神占)의 정체성(正體性)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무당인 자신(自身)의 정체성도 모르고,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무당이 대부분이다.
감나무 밑에서 자신의 입으로 익은 감이 떨어지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무당(巫堂)들 참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감이 먹고 싶거나 필요하면 감나무에 올라가서, 자신이 필요한 만큼 따오면 되는 간단한 이치(理致)도 모르는 제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먹고 살려고 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무지(無知)한 무당일 뿐인 것이다.
제자들이 올바른 지식(知識)도 없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며 애절(哀切)하게 신(神)을 찾아도, 올바른 신의세계(神意世界)를 알지 못하면 신(神)의 감응(感應)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의세계를 먼저알고 회향(回向)신의 역할과, 조상신(祖上神)의 능력(能力)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지금의 무당 길은 실패작이며 춥고 배고픈 제자 길인 것이다.
신앙(信仰)의 길(道)
천지(天地)가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운행(運行)의 기운(氣運)은 쉬지 않고 계속 숨 쉬고 있다. 해와 달이 바뀌는 세월(歲月)이 아무리 흘러가도, 그 광명(光明)의 빛은 영원히 변(變)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인간(人間)일 뿐인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생(人生)길에서 근묘화실(根苗花實)의 사계(四季)속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과 5운(五運) 6기(六氣) 변화의 기운을 맛보고 있다. 그러나 봄(春)이 계속 찾아와 자신의 인생길이 되풀이 되고 있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 위에는 하늘이 있지만 사람 밑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앙이란? 강요(强要)나 선동(煽動), 또는 분위기에 이끌려 선택(選擇)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사명감(使命感)을 자각(自覺)하는 꾸준한 자기수행(自己修行)을 통해, 행복(幸福)을 창조(創造)하기 위하여 지혜(知慧)로 운 삶을 가꾸어 가는, 순수(純粹)하고 깨끗한 마음이 바로 신앙(信仰)인 것이다.
신앙이 본분은 개미같이 노력(努力)하고 벌같이 부지런하며, 스스로를 밝히고 비판(批判)하데 남을 원망(怨望)하지 않고, 고뇌(苦惱)하되 타인의 것을 욕심(慾心)내지 않으며, 비록 흙탕물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배신(背信)하지 않고, 거짓되지 않고, 신의(神意)를 존중(尊重)하며 남을 위해 유용(有用)해지기를 기쁨으로 삼는, 연꽃과 같이 어진 생활이 바로 신앙(信仰)이다.
산속의 흘러가는 계곡(溪谷)물을 보면 인간(人間)들은 마시는 물로 보지만,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물고기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주어진 환경(環境)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각도 자신(自身) 인생의 운명(運命)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속에서 평생(平生)동안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끊이지 않는 것은, 세상(世上)의 모든 것들을 평생자신(平生自身)의 중심(中心)에서 출발(出發)하는, 이득(利得)의 잣대로만 살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높이 있어도 떨어뜨릴 수도 있고, 물속의 고기는 깊이 있어도 낚을 수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가까이 있어도 헤아릴 수가 없다. 호랑이를 그리면서 그 가죽은 그릴 수가 있어도 그 속에 있는 뼈는 그리기 어렵다. 사람을 아는 데는 그 얼굴을 알 수 있어도 마음은 알 수가 없다.
큰 파도는 볼 수 있으나 작은 사람의 마음은 볼 수가 없고, 바다가 마르면 그 바닥을 볼 수가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모습을 살피려면 맑은 거울을 보아 라, 과거(過去)의 모습은 지금의 원인(原因)이며, 미래(未來)의 모습은 지금의 결과(結果)인 것이다.
인간(人間)의 세월(歲月)
인간의 세월 길게 살아야 백년(百年) 그 짧은 세월도 다 못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사람들의 최대 수명(壽命)이 백년(百年)이라하는데, 과연 100명중 몇 %가 백년을 살 수가 있는 것일까?
10%~20%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10대부터 60~70대 사이에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의 최대 수명이 백년(百年)이라고 하지만 그 세월 안에, 인간들을 죽게 하는 각양각색 흉액(凶厄)의 일진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는 각종 형태의 죽음이 수 만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 수 만 가지의 각종 흉액의 일진(日辰)들은 피해야만 겨우 백년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이 백세까지 살 수가 있는 확률이 겨우 10%~20%라는 것이다.
그 짧은 인간의 세월(歲月)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생전 극락(極樂, 천국)과 지옥(地獄)속에서, 짧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극락(極樂, 천국)과 지옥(地獄)을 오가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한 평생을 사는 동안 극락(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20%라면, 중간 정도의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30%이고, 근근이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20%이고, 정말 죽지 못해 겨우 살고 있는 지옥(地獄)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30%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죽으면 육신(肉身)은 땅에 묻히고 영혼(靈魂)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靈魂)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영혼은 무형무체(無形無體)의 기(氣)인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살아있을 때 인간(人間)이지 인간의 죽은 시체(屍體)는 페기물이고 죽은 사후에의 영혼(靈魂)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연 무형무체의 영혼인 기체(基體)가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일까?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두고, 대부분 종교(宗敎)의 사제들은 이를 이용해 돈 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신의세계(神意世界)나 영혼세계(靈魂世界)에서는 금은보화(金銀寶貨)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금은보화는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죽은 영혼들이 사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사후세계의 영생(靈生)을 위해 현실적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종교의 신도(信徒)들은, 정말 바보중의 바보이며 멍청한 미개인일 뿐이다.
그래서 옛날 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다고 한 것이다.
무당(巫堂)의 운명(運命)이란?
무당(巫堂)이 되기 위해서는 신 부모를 선택한 후, 신 내림이라는 입문(入門)식을 거쳐 신의세계(神意世界)에 고(告)한 뒤, 신의 신탁(神託)을 받고 비로소 애동제자가 되어 무당(巫堂)의 길(道)을 가게 된다. 무속의 전통(傳統)에는 신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성무수업(成巫修業)을 받아야, 비로소 올바른 무당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무당들은 자신들도 올바른 무당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으면서, 금전(金錢)에 혹(惑)하여 무조건 신 내림굿을 시켜 애동제자 마저도 무당의 길에서 헤매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들의 무당들은 성무수업(成巫修業)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당들이 차고 넘치고 있다.
그렇기에 무당(巫堂)의 길(道)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는 애비 성무자(成巫者)들은, 신 내림굿을 받고 나면 명경만리 주유천하가 다보이고, 또 신(神)이나 신령(神靈)님들이 옆에서 다 알려주시는 것으로 안다.
오늘날 무속제자들은 누구나 무당이 될 수가 있기에, 그렇기에 누가 사이비(似而非)무당인지 또 선무당(先巫堂)인지 알 수가 없는 시대(時代)이다.
오늘날 신 내림굿을 받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무당의 숫자는 가하급수(幾何級數)로 늘어나고 있지만, 무속세계의 수준은 최하(最下)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무속세계에는 올바른 교육기관(敎育機關)도 없고, 무속(巫俗)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제제하거나 통제(統制)하는 기관도 없다.
신 내림굿으로 자신의 심리치유(心理治癒)나 심리만족(心理滿足)으로 끝난다면 괜찮지만, 이것을 빌미로 무업(無業)을 하려고 한다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 입(口)속의 세치 혀는 총이나 칼 보다 더 무서운 무기(武器)가 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무당이 되면 항상 행동이나 말을 조심해야 된다는 선배무당들의 조언(助言)이 있다.
이런 상황이 무당의 소양(素養)이고 도리(道里)인 것인데, 수박 겉 활기 식으로 올바른 지식도 없이 무당 길을 간다면, 잘못하면 자신과 같은 선무당이나 사이비 무속 인을 양성(養成)하게 되고, 또 어리석은 무당 세치 혀의 농간(弄奸)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된다.
물론 신앙의 길을 가는 사제(司祭)라도 우선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우선이 될 수가 있지만. 무당길 가기 전에 신병(神病)의 고통(苦痛)으로 고생하던 시절(時節)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러한 탐욕적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무당(巫堂)의 길(道)이란?
누가 가라고 한다고 가는 길도 아니고, 또 누구를 위해 가는 길도 아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신(神)께 구원(救援)을 받고자 스스로 선택(選擇)한 길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나약할 때나 어려울 때는 신(神)을 찾게 되지만, 무당이 나약할 때는 허주가 따라 붙는다.
애동제자
무속신앙속의 애동 제자들은 대부분 안타까운 사연(事緣)들을 앉고 간다. 또한 비록 신 내림굿을 받았다 해도 몇 달을 가지 못하고, 신 부모와 헤어지는 가슴 아픈 말 못할 사연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보니 허허벌판에선 무속고아(巫俗孤兒)가 되어, 배움에 목말라서 좋은 스승을 찾기 위해 이 선생 저선생을 만나다 보니, 때로는 사이비(似而非)선생을 만나 사기(邪氣)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올바른 무속의 기초(基礎)도 배우지 못해, 너무 미숙하고 몰라 이사람 저 사람에게 또 당하고 당하며 살게 된다.
옛날부터 사람은 언젠가 사람을 배신(背信)하지만, 좋은 책이나 글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 다고 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지식(知識)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부터 좋은 책을 접하고, 또 좋은 책들을 통해 많은 지식(知識)을 습득(習得)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에 따라 자신의 운명(運命)이나 팔자(八字)도 변하는 것이다. 요즘 현실에 무속인
100만 시대에 왔다고 하지만, 대부분 90%가 올바른 무속지식을 가지고 있는 무속(巫俗)인이 드물다.
왜냐하면 애동 제자가 아무리 배우려고 노력(努力)해본들, 올바른 무속지식(巫俗知識)을 배울만한 곳도 없을뿐더러, 또 애동제자 자신들도 배우려고 하는 의지가 약할 뿐이다.
불교에는 불경(佛經)이 있고 기독교에는 성경(聖經)이 있고, 또 체계적인 교리(敎理)와 배울 수 있는 교육과정들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무속신앙(巫俗信仰)에는 올바른 무경(巫經)이나 체계적인 교리(敎理)나 올바른 성무수업(成巫修業)을 받을 수 있는 교육과정도 없다.
그렇다보니 개개인 조상(祖上)신들을 모시는 무당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신령(神靈)님과 자신이 최고인 것으로 알고 대부분 삼채의 행동들을 하고 있으며, 거머리처럼 무당들의 피를 빨아먹는 각종 협회의 단체들은, 하나 같이 제자들 교육은 뒷전이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돈만 갈취(喝取)하려고 한다.
애동 제자가 신의 몸 주가 되었으면 영검(靈劍)은 신령(神靈)님이 주시지만, 기술(技術)적인 제례의식 등은 배워야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제례의례가 있는데 우리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도 똑 같은 것이다.
의사로 비유하자면 진찰(診察)을 해서 그 아픈 환자가 수술을 받기도 하고, 약을 처방해서 내려야 하듯 우리 무당들도 점사(占辭)를 보기도 하지만, 행위의 의례나 또는 굿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는 절대 무당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속신앙(巫俗信仰) 속에는 제자들이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예술로 치면 종합예술(綜合藝術)이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올바른 신 스승을 만나 무속의 의례행위와 기예 등을 꼭 배워야 올바른 무당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들에게 최대의 적은 시간과 자신의 게으름인 것이다.
신(神)은 자신의 뇌(腦)를 통해 왕래하신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의식의 행위로 노리는 목표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의 목표는 종교적 경외감(敬畏感)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종교의식에서 향을 피우거나 종교사제가 기묘(奇妙)한 제스처를 하거나 합창을 하는 까닭은, 종교적 경외감(敬畏感)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목표는 신자(信者)들이 자신을 초월(超越)해, 자신보다 더 큰 실체(實體)에 몰입하게 만드는데 있다.
절대자와 영적(靈的)으로 일체감(一體感)을 느끼게 하고 신비체험(神秘體驗)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의식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순전히 문화적 현상(現想)으로 간주하였다.
즉 종교의식을 생물학적인 산물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의식행위를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연구(硏究)해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종교의식행위가 진화론적 기원(紀元)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신경신학(neurotheology)이 거둔 성과물인 것이다.
신경신학은 신(神)과 종교의 기원을 신경생물학에 바탕을 두고 연구한 결과물로, 인간의 영성과 뇌 사이의 관계를 밝혀낸 신생(新生)학문인 것이다.
신경신학의 연구중심인물인 미국의 앤드루 뉴버그 교수는 최첨단 영상기술을 사용해, 명상(瞑想)에 빠진 티베트 불교신자와, 기도(祈禱)에 몰두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프란치스코회의 수녀가, 아주 강렬한 종교적 체험(體驗)의 순간에 도달할 때 뇌의 상태를 촬영했었다.
그리고 뇌 사진의 분석결과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발견 되었다. 명상(瞑想)이나 기도(祈禱)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뇌(腦)의 특정부위에 입력정보(入力情報)의 정상적인 공급이 차단(遮斷)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버그 교수는 뇌 활동의 비정상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을 초월(超越)하는 종교적 경험인, 신비체험(神秘體驗)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수녀들이 기도의 절정에 다다른 순간(瞬間),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과 섞이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티베트 불교 명상(瞑想)수행자들이 자아(自我)에 의해 만들어진 제한적인 감각세계를 초월해, 우주와 궁극적인 일체를 느끼는 상태에 도달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희망적인 생각이 환각(幻覺)이나 망상(妄想)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일련의 신경학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경신학자들의 이러한 결론은 신(神)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신의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인간의 뇌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기에 신이 인간의 뇌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경신학자들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신경학적 토대로 제시하는 또 다른 사례는, 종교의식에서 경험하는 경외감과 뇌의 변연계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번연계는 정서반응을 관장하는 신경회로(腎莖回路)의 집합체이다. 종교의식(宗敎儀式)에서 냄새, 색다른 제스처, 반복적인 소리를 결합(結合)하면, 변연계를 자극해 종교적 경외감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변연계의 간질발작을 일으킨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황홀감과, 종교적 경외감을 경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사도바울, 잔다르크, 이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간질발작에 의해 신비체험(神秘體驗)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사도바울에게 밝은 빛과 함께 예수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고, 잔다르크가 들었던 하나님의 목소리,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본 환각은 간질발작의 상태가 그 원인일 가능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발작 중에 신(神)을 만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뇌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은 변연계에 자극을 받은 환자들이, 가끔 종교적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요컨대 신경신학자들은 변연계가 종교적 체험에 필수적임을 시사하는 사례들을 통해 신은 사람의 뇌를 통해 왕래하고 뇌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불원해풍 무속 무도학(巫道學) 교재를 보급합니다.
HP 010-4919-0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