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氏年代記 황석영
등장인물 (나오는 순서대로)
민 씨……………집 주인
한영숙…………―한 영덕의 동생
서학준…………―한 영덕의 친구
한 혜자…………―한 영덕과 윤미경 사이의 딸
박 노인…………―장의사 목수
한 영덕…………―주인공, 의사
김혜경…………―한영덕의 부인
한창빈…………―한영덕의 아들
심문관 1,2
박 가…………―무면허 의사
김 가…………―무면허 약사
윤미경…………―한혜자의 어머니
조한경…………―한영덕의 동료의사
고동수…………―한영덕의 동료의사
전성학…………―한영덕의 동료의사
기타 원장, 간호원, 할머니, 감시원, 소리
때 1970년대 초반부터의 화상에 의하여 진행된다. 50년대를 중심으로 했다가 다시 70년대로 돌아옴.
곳 평양, 서울
무대 극장의 무대공간을 적절히 이용한다. 유니트 세트 (UNIT SET)의 배치와 배경 막을 드리우는 형식을 취하거나 무대에 입체조형의 단을 쌓아 조명 및 스크린의 처리로 장면전환을 시도한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 막이 있거나 없거나 막론하고 (한 씨 연대기, ― 작, ― 연출, ― 극단 공연작품) 등의 내용이 담긴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비친다.
관객들 객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남과 북" 또는 "삼팔선의 봄" 등 우리 귀에 친숙한 이산가족에 대한 주제의 유행가가 들린다. 유행가의 가락이 조가로 바뀔 때 막이 오른다.
제1장 한영덕의 고별식, 1971년 서울
(무대 불 밝아지면 집 주인 민씨, 한영숙, 서학준 박사, 한영덕의 빈소에 서 있다. 서학준 빈소에 향을 올리고 절하며 일어선다. 음악 작아지다가 사라진다.)
민 씨: 예. 이게 바로 한 씨 노인이 살던 방입니다. 보시다시피 적산가옥이라 아주 낡았읍죠.
서 학준: 그러니까 선생께서 이 댁의 주인이시죠?
민 씨: 뭐…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진 임자들이 각각 달라놔서요. 불하낼 당시에 방을 하나 둘씩 가진 주인들이 제각기 연고권을 팔고 떠나 버렸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피난 살림 같은 어수선한 형편이 이십여 년 동안 물리고 물려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 학준: 그 사람이 여기 온 지 오래 되었든가요?
민 씨: 다른 식구들은 오래 전부터 이 집에 살아 왔지만 한 씨 노인이 이사를 오신 게…그러니까…불과 삼 년 전이든가요. 일구육팔 년도 사월 달이었죠. 아마 맞을 겁니다. 그분 혼자 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트렁크를 들구 왔습니다. 세간따위란 애초에 없었지요. 이불을 운전수 변씨네서 빌려 주었다가 나중에 돈으로 받았고, 식기 나부랑이는 노인이 시장에서 하나씩 사들여 왔습니다.
한 영숙: 정신 상태는…괜잖았읍니까? 혹시 노이로제 같은 증상이 없었는지요?
민 씨: 글쎄요…사실 우리도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뭐랄까, 좀 신경이 쓰였지요. 살붙이가 하나도 없는 홀아비 노인네에게 방을 내줄 줄 알았다면 이 집 사람들이 미리 수를 써서라도 다른 세대를 받았을 겁니다. 그 양반 아주 괴퍅한 데가 있었읍니다. 노인들이 모이는 대서소나 복덕방 앞에도 얼씬을 안했지요. 가끔 밤중에 일어나서 동네를 나돌아 다닐 적두 있었는에, 그분과 골목에서 마주치면 저차에 놀라곤 했습니다. 이쪽에서 인사를 하고 말이라도 부쳐 보려면, 의심스럽게 상대방을 쏘아보다가, 뭐라고 혼자 중얼중얼 하면서 지나가신단 말예요.
서 학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소.(고개를 흔든다) 아니었지요.
민 씨: 아 예, 그렀습지요. 우리 집 사람이 그러더군요. 넘어져서 울고 있는 아이를 한 씨 노인이 말없이 안아다가 데려다 주더랍니다. 속은 착하고 순한 분이실 게 틀림 없읍니다.
한 영숙: 오라버니께서 장의사에 나가서 일해 주고 벌이를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민 씨: 이사 올 적에 노인네가 돈을 얼마쯤 가지고 계셨을 겁니다. 사채를 놀리는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다달이 생활비를 타다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아마 돈을 잘린 모양이에요. 한가하게 지자던 노인께서 동네의 잔일거리도 맡아 해주고, 동회에서 극빈자 구호양곡을 바다가 이럭저럭 사셨지요. 그래서 저기 사거리 약국 옆에 있는 장의사로 나가셨던 모양입니다. 입관시키는 일이라던가요. 염을 해주신다는 에, 이 집 사람들은 노인의 사정이 딱해 보였지만 모두 기분이 나빴던 게 사실입니다.
서 학준: 한 군이 그 동안 배씨에게도 소식이 없었나 보죠?
한 영숙: 없었어요. 어디서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서 학준: 몹쓸 사람 같으니.
한 영숙: 어떻게, 무얼루…돌아가셨지요?
민 씨: 허, 그러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가족이 있는 분인 줄도 모르고… 여하튼 무슨 사정이 있겠지만 너무들 하셨오이다.
한 영숙: 오래 앓으셨나요?
민 씨: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노인께서 장의사의 일거리를 잡은 뒤로는 그전보다 술을 더 많이 드셨지요. 어쩌다가 초상집에서 돌아오는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때에도 막소주에 만취가 되어서 지냈습니다. 노인께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거르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읍지요. 늙마에 그렇게 건강을 돌보지 않으니 누군들 배겨나겠읍니까.
서 학준: 뇌혈전이었답니다. 고통은 순간적 이구 곧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지요.
민 씨: 빨래를 하시고 이층에 오르다가 졸도를 하셨습니다. 물론 의사도 불렀지요. 입원하지 않으면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희들이야 무슨 능력이 있어야지요. 사흘 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계사다가 잠든 듯이 운명하셨습니다. 글쎄 저희는 가족들이 안 계신 줄 알고 우선 방을 치웠지요. 트렁크도 치우고 옷이며 식기는 고물장사에게 공짜로 주어 버렸습니다. 유품 비슷한 게 있길래…바로 저 가방입니다만.
한 영숙: 아, 오라버니의 왕진가방이에요.
민 씨: 검은 비닐 수첩하고…(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다)
한 영숙: 이건 독일제 청진기에요. 상아꼭지가 달렸어요. 오라버니가 의사가 되면서부터 아끼던 거예요.
민 씨: 장의사에서 같이 일하던 목수노인이 이걸 가져 왔는데 수첩을 들쳐 보니까 뭔가 잔뜩 깨알처럼 쓰여 있어서 우리는 읽어 보지도 않았고요… 맨 뒤에 주소 셋이 따로 적혀 있더군요. 그래서 어제서야 부랴부랴 전보를 쳤던 겁니다.
서 학준: 주소가 셋이라니, 우리 둘 말고 또 누구요?
민 씨: 전들 알겠읍니까.
한 영숙: 혹시 고박사님 아닐까요?
서 학준: 고선배는 지금 여기 없어요. 진작에 이민을 가 버렸으니까.
민 씨: 아무튼 여러 가지루 저희가 너무 서둘렀습니다. 이렇게 뒤늦게라도 식구들 손에 장례를 치르게 되니 정말 마음이 놓이는군요. 참, 이 방의 권리는 매도증서를 만들어서 제가 이양을 받도록 했습니다. 오만 원을 장례비용으로 보태겠습니다.
서 학준: 아, 그건 걱정 마시오. 여러 가지고 폐가 않았소.
민 씨: 정말 다행입니다요. 혈육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퇴장)
한 영숙: 저희 아버님께서두 오라버니 인품을 벌써 알아 보셨어요. 기술이 없으면 한 데에서 얼어 죽을 놈이라고 그러셨죠. 그래서 의학공부를 시키셨다는데, 훌륭한 실력을 가지구서두 살아 나가기가 무척 힘이 드셨나 봐요.
서 학준: 한 군 소식이 하도 오래 전에 끊어져서, 이 친구가 어디 지방에서나 개업하구 있겠거니 여겼지요. 한 군은 내 생각에도 너무 고지식하고 순수했습니다. 그게 이 친구의 단점이죠. 나는 이 사람하군 정반대지만, 어릴 적부터 쭉 함께 자라 며서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적당히 융통성두 없는 이 친구의 성미가 짜증이 나면서두 밉지는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그런 면을 좋아했다고나 할까요.
한 영숙: 오라버니는 결혼을 잘 하셔야 됐을 텐데…영악하구 똑똑한 아낙이 뒤에서 바짝 보채도 정신을 차릴까 말까한 분이죠. 평양 있는 저희 형님은 그런 여자가 못되고 약하고 얌전하기만 했어요. 오라버니 성격이 저러시니 아낙은 좀 세차고 똑똑해야 할 텐테요.
서 학준: 매씨처럼 말이죠? 허허 그거야 뭐 별루 상관이 있었겠오. 하여튼 영덕이는 자기에게 너무 까다로웠어요. 대범하게 잊어두는 법이 없었거든. 그렇다고 표현도 못하면서 속으로만 괴로워했지. 모든 세상의 불의를 자기 탓으로만 돌리는 거예요. 나도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 혜자 등장,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선다. 한 영숙 얼어붙은 듯이 마주 마라본다)
한 영숙: 누구…시 던 가.
한 혜자: (침침하고 냉담하게) 제 성은…한 씨예요.
한 영숙: 오…너…바로 혜자로구나. (달려들어 뻣뻣이 서 있는 그를 껴안으려 한다) 내가 네 고모다.
한 혜자: 알아요.
한 영숙: 원 이렇게 다 큰 처녀가 되다니…(한 혜자의 냉담한 반응에 머쓱해서 물러난다) 느이 엄마도…잘 있지?
한 혜자: 다시 재혼하셨어요.…아시죠? 고모님도…전보받구 오셨나요?
한 영숙: 그래, 이번에야 알았구나. 몇 년 전에 오라버니가 지방대학 기숙사에가 관리인 노릇을 하신다구 그럴 때에 왜 너한테 알려 줬었지?
한 혜자: 저는 안 찾아갔어요.
한 영숙: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찾아가니까 벌써 다른 곳으로 떠나셔서 못 만났지. 우리를 언제나 피할려구만 하셨어.
한 혜자: 저 여기서 함께 밤을 새우러 왔어요.(사이) 마지막이니까요.
(이때 박 노인 술이 취해서 들어온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한 영숙: 응 그래, 그래 잘했다. 저분이 서박사님이다. 인사드려야지.
서 학준: 네가 혜자냐? 갓난애 적에 봤는데…하긴 휴전이 된 지 벌써 몇 해가 됐나, 허허…긴 세월이다.(돌아서다 박 노인 발견한다) 누구신지요?
박 노인: 나도 밤을 새우러 왔소이다. 한 씨하고 같이 한 장의사에서 일하던 목수올시다.
(빈소로 가서 술 취한 듯 무릎을 꿇고 않아 낮게 만가를 뽑는다. 노랫소리에 모두들 숙연해지고 한 영숙 터지는 오열을 참으며 쓰러진다. 무심한 한 혜자. 서학준 고개를 돌린다)
서 학준: (독백)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한 군은 꼼짝없이 손해 볼 처신으로 살아왔지…
(박 노인의 만가 고조된다. 모두 노래에 취한 듯 말이 없을 때 조명 서서히 암전. 촛불만 팔락이다 꺼진다)
제2장 중앙 인민병원
소리: (1950년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더웠다. 사람들은 개처럼 쓰러져서 이름 없누 골짜기와 들판에서 썩어 갔다. 어느 쪽인가를 열정적으로 선택했던 사람들도 죽어 갔고, 아무 쪽도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들 역시 서서히 죽어 갔다. 그해늦여름의 극성스런 모기떼처럼 절망은 우리의 온 몸을 쥐어뜯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만 했다.)
[슬라이드] 1950년6월25일 한국동란의 기록 사진들. 남침하는 탱크. 포격
제1경 동원령
(의과대학 교수 연구실. 한 영덕과 서학준 각기 물건을 챙긴다. 포성과 총소리, 공습경보 싸이렌소리)
서 학준: 자네 입대 통지 받지 않았나?
한 영덕: 난 빠진 것 같네. 자넨 어떻게 됐어?
서 학준: 나도 빠졌어. 우리 전공 탓인지도 모르겠네. 이거 우리만 당하는 게 아닌가?
한 영덕: 학위하구 임상경험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서 학준: 제외되는 게 별루 좋은 일이 아닐 텐데. 저들은 소수를 언제나 폐품 처리하듯 하지 않나.
한 영덕: 총동원령이라니까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야.
서 학준: 우리를 어디로 보낼까?
한 영덕: 보내지 않을걸. 아마 평양에 그냥 남겠지.
서 학준: 십육 세에서 사십 오세까지의 사람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가는데 교수 급들은 소좌나 중좌 계급장을 달아 주는 모양이더군.
한 영덕: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갔다는 게 사실일까?
서 학준: 글쎄, 부산을 총공격하구 있다고 선전을 하더구먼.
한 영덕: 모두 의무군관으로 입대하니 대학은 텅 비게 되겠군.
서 학준: 우리 서로 몸조심하세. 까다로운 세월에 피차 용케 살아남아야지.
(원장, 호위를 앞세우고 들어온다)
원장: 한 영덕, 서학준 동무, 난 새로 부임한 중앙 인민병원 원장이오. 의사란 기술 노동자로서, 출발부터 정신 자체가 공산혁명을 실현하는 노동투사나 애국전사들을 위하여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오. 지금 해방 전선에서는 우리 인민군대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소. 전선에서 의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조국해방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해 다친 전사들을 다시 싸우도록 해주자는 게 아니겠소? 국가는 모든 업무에 종사하는 동무들을 필요로 하지만, 전시의 의사 동무들은 몇 배로 필요하오. 우리가 이런 이유로 총동원령에 앞장서야 함을 잘 알거요. 그런데 어째서 동무들이 그 대열에서 빠지게 되었는지 동무들 이유를 알면 말해보시오. 대답을 못하는 것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고 있지 않다는 증거요. 성분 검토와 평소의 정치투쟁경력 등으로 평가해서 동무들은 의무군관으로 애국전선에 내보낼 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소. 당은 동무들에게서 교수자격을 박탈하고 노동전선으로 보내라고 했지마는, 오랫동안 제국주의적 교육을 받아 온 동무들의 정상을 참작해서 내가 중앙당으로 탄원했소. 동무들은 인민병원에서 근무 하라니 발령이 났소. 오늘 그 명령이 내려왔는데 지난날을 거울삼아 더욱 분발해서 당에 이바지 하시오.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내일부터 병원에 나가 거기서 침식하며 안민들에게 봉사할 각오를 하시오. (암전)
제2경 공습 (공습, 폭격, 총소리, 아우성)
원장: 환자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몰고, 병동 하나를 비우시오.
한 영덕: 전염병 환자로 온 병원은 발 딛을 틈도 없읍니다.
원장: 어차피 사람은 죽는 거야. 모두 내몰아요.
한 영덕: 지금은 거의 치료를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체가 본래부터 튼튼하던 환자들을 자기 체력으로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일이 지금 우리들의 최선의 치료방법일 뿐입니다. 대개의 부상자가 감염까지 되었을 때엔 십중팔구는 사망합니다.
원장: 한 동무는 특 병동에는 거의 붙어 있지 않는다면서?
한 영덕: 응급환자들은 모두 마당이나 방공호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원장: 지금은 전쟁 중이오. 정수의 애국인민과 평양의 행정에 종사할 사람을 치료하기에도 일손이 모자라오. 보통 병동의 진료는 오늘부터 중지하시오. 특 병동을 비우면 나중에 책임 추궁을 하겠소.
한 영덕: 치명적인 환자부터 살려 놓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인술은 인명의 위급을 기준해서 써져야 합니다.
원장: 그 사람의 효용성이 문제요. 하여튼 명심하시오.(퇴장)
(포성, 총소리. 다시 암전)
(스크린, 아비규환의 병상의 모습들,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 포격으로 폐허화된 거리 비춘다.)
제3경 수술
(한 영덕, 간호사 둘 다 가운 차림. 두 사람은 무대구석에서 환자를 몰래 치료중이다. 간간히 총소리, 포성 들린다)
한 영덕: 복부 파편상이군.
간호원: 선생님 수술을 해야죠?
한 영덕: 빨리 시작해야겠오.
간호원: 아무것도 없는 데요. 약품도 기구도 없어요.
한 영덕: 그래도 살려내야 해요.
간호원: 저 어린애는 수술 규정에 위반되는 데요.
한 영덕: 그 아이도 인민이오. (한 영덕 간호사에게 수술준비를 지시한다. 서학준 두리번거리며 등장한다.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다가 한의 소매를 잡아 이끌어 가서 속삭인다.)
서 학준: 급하게 되었네. 빠져 나가세. 자네 부인이랑 데리고 강서로 함께 피하잔 말이야.
한 영덕: 왜 이렇게 서두르나. 방금 위험이 닥칠 것도 아닌데.
서 학준: (여신 뒤돌아보면서) 서두르는 게 아니라 사정이 아주 급하게 되었네. 자네 모르고 있나? 국군이 삼팔선을 넘었단말야. 정신 똑바루 차리라고.
한 영덕: (무덤덤하게 섰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 학준: 나는 결심했네. 오늘 빠져 나가야겠어.
한 영덕: 자네 정신이 나갔군. 그런 생각은 말게. 저 밖에 좀 보라고. 도대체 죽어가는 사람이 몇 명인가 헤어 보게.
서 학준: 병원도 철수할 게 아닌가? 자꾸만 북쪽으로 끌려 다니다가 우리는 영영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될 거야. 이런 때 미리 숨어 버리는 게 상책일세. 가족들 데리고 강서의 과수원에 가서 숨어 있을 작정이네.
한 영덕: 이런 세월에 숨어서 자네만 살아남겠단 말인가?
서 학준: 글쎄, 한 이 주일쯤 숲이나 들판에 굴을 파고 숨어 있으면 큰 고비는 넘길 거야. 막판에 가보게. 저자들 눈에 뭐 보이는 게 있을 줄 아나? 특히, 우리를 제일 먼저…죽일 거야.
한 영덕: 나는 여기 남겠네. 환자가 있는데 의사를 죽이기야 하겠나. 뭐 죄를 진 게 있어야지.
간호원: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아이가 출혈이 심한데요.
한 영덕: 취사실에서 숯을 얻어다가 화로에 물을 끓이시오.(간호사 퇴장)
서 학준: 자네는 사람이 왜 그렇게 꼭 막혔나? 만약 내가 슬그머니 없어지고 나면 자네가 고초를 겪을 지두 모르잖나. 속 썩이지 말구 어서 가세.
한 영덕: 허, 싫다는데도 그래.
서 학준: 에이 모르겠군. 자네 부인은 나를 원망할 게야. 나는 가겠어. 뒷길로 해서 기자 송림에 숨었다가 어두워지면 집에 들러 보겠네. 당국에서 내 행방을 캐면 다른 말 할 것 없이, 그저 못 봤다고만 해주게.
한 영덕: 그래. 잘 숨어 있다가 나중에 만나세. 창빈이 에미두 같이 데려가 주겠나. 내 걱정은 조금도 말구. 어머님 잘 모시고 있으라고…안부도 전해주게.
서 학준: 나중에 후회할 걸세. 같이 가자는 데도 고집인가…속없는 사람 같으니.(바삐 퇴장)
(간호사 다시 등장)
간호원: 선생님 제가 준비한 것은 옥도정기 한 병, 날이 무딘 메스하구 수술가위가 전부예요.
한 영덕: 지혈겹자하구 마취제를 얻을 수 없을까?
간호원: 마취제 같은 건 벌써 동이 났어요. 살려만 낸다면 다행이죠. 고통보다는 죽누 게 나을 거예요.
한 영덕: 어린 것의 맨살을 쨀 수야 있나.
간호원: 붕대나 거즈 같으면 제가 준비해 놓은 게 있어요. 보병 동에서는 수술할 수도 없고, 원자의 허락이 없으며 아무것도 타 올 수가 없잖아요.
한 영덕: 특 병동 응급실에 들어가서 슬쩍 집어각지구 나오면 되겠는데…
간호원: (안타까워한다) 조수 아저씨와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구 있어요.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렇지만…원장 동무의 지시에 어긋나는 일만 골라서 해내다가, 들키면…(울먹이다) 제 언니나 오빠들이 모두 입대했지만, 저만 간신히 빠졌어요. 날이 갈수록 사정이 험악해지고 있어요.
한 영덕: 조금만 손을 쓰면… 저애는 살 텐데. 그냥 버려두었다가는 곧 사망해요.
간호원: 선생님 빨리 시작하셔요.
한 영덕: 이게 몇 번째지?
간호원: 오늘 세 번째예요. (두 사람 수술에 골돌. 수술하는 동작)
한 영덕: 파편을 꺼냈소. 이 무쇠조각. 이 쇳조각! 어디서 누가 만들었을까.
원장: (급히 등장) 한 동무 특 병동에 위급한 환자가 생겼소. 여기서 뭘 하는 거요?
한 영덕: 여기에는 더 위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수술중이라 꼼짝할 수 없읍니다. (열중해서 일한다)
원장: 서동무도 보이지를 않는데 어떻게 된 거요?
한 영덕: 모르겠습니다.
원장: 까짓 애들은 또 낳는 거요. 지금 경무원이 기총소사의 관통상을 입구 피를 흘리는데, 이런 따위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요?
한 영덕: (일을 계속하며) 낭비가 아닙니다.(사이) 관통상은 압박붕대 처리만 해놓으면, 몇 시간이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원장: 고발하겠소.
한 영덕: 비켜 주시겠소? 어둡군요.
(원장, 한 영덕을 노려보다 나간다. 간호사 겁에 질려서 굳어 있다. 한 영덕, 간호사를 바라보다 다시 원장 나간 쪽을 보며 씁쓸한 미소 짓는다. 포성이 울리며, 암전)
제4경 처형
(텅 빈 무대에 한 여덕 묶여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고문 장면을 한 영덕을 무대 중앙에 놓고 실루엣으로 처리되며, 심문은 마이크 소리로 나온다. 마이크 소리는 여러 사람의 음색으로 처리된다)
소리: 서학준이 어디로 달아났읍니까?
한 영덕: (고개를 숙이거 있다가, 고문을 당하는 형식으로 몸을 움직인다)
소리: 서학준과 무엇을 어떻게 공모했나요? (역시 같은 동작) 어째서 특 병동의 진료를 거부했읍니까? (같은 동작) 당신은 인민의 적이오. 당신 같은 사람이 바로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존재요. 당신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읍니다. 나약한 감상적 부르주아요.
한 영덕: 나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앓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칩니다. 이것이 내 개인적인 의무입니다.
소리: 조국해방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생각은 용납할 수가 없읍니다. 당신의 의무는 후방전력을 최선을 다해서 보존하는 유일한 목적에 사용되었어야만 합니다.
한 영덕: 의사와 환자는 신성하고 침해받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습니다. 나는 감히 생명이 어떠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의사가 빈사의 환자에게 의술을 베풀 때에는 무의미한 기술이 아니라, 생명을 근거로 한 자유로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의술을 택한 이유입니다. 나는 이 사랑이 후방전력의 보존에 사용되어지든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던 아랑곳 없읍니다
소리: 우리는 당신의 의술을 필요로 했소. 당신은 우리의 이상에 어긋나는 사고를 갖고 있소.
한 영덕: 사회적 이상이 진정 그렇다면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읍니다.
소리: 공산주의에는 과오가 있을 수 없소. 집단적 신념 자체이기 때문이오.
한 영덕: 나는 도저히 기술만을 가지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는 없읍니다.
소리: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오. 개인의 사고란 국가적 조건에 의한 것이며 당신은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나가야만 합니다.
한 영덕: 이제 나는 의술로서 국가에 이바지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차라리 석탄을 캐고 나사르 깎는 일이나 시켜 주십시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 그 부분은 당신의 능력이 미치는 쪽도 아니고 국가적인 낭비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교육받고 숙달되어진 부분에만 있습니다. 우리 당이 당신의 의술을 쓸 대상을 뚜렷한 목적 아래 제시했을 때에는 당신의 의술은 당신 혼자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주의적 윤리의 질서입니다. 현재 국가는 열 살짜리 어린 아이보다는 후방치안을 담당할 경무원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당의 합리적인 지시를 거부한 당신의 행위는 반역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숙달된 기술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혁명적인 당성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제 필요없읍니다. (조명 갑자기 변한다. 한영덕의 머리 위에 탑 조명만 남는다. 철창문 여는 소리와 함께 소리 에코 처리된다)
소리: 한 영덕, 김일성대학의 의학부 교수, 중앙 인민병원 특 병동 부장, 맞는가?
한 영덕: (고개만 끄덕인다)
소리: 평양 방어 여단이 너희를 마지막으로 인수한다. 나오라. (철창문 닫는 소리. 한 영덕 등을 관객에게 돌린다) 분대 겨눠 총. (철거덕, 총 드는 소리) 사격.
(총소리와 합께 조명 꺼지며, 비명과 함께 한 영덕 쓰러진다. 잠시 침묵, 조가가 다시 흐른다)
제3장 피난
소리: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겨울은 재빨리 찾아왔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우울하고 어두운 소식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친 사람들의 마음은 고향에 대해 느꼈던 환멸을 보상해 줄 아무 곳이라도 막연히 그려 보게 되었으며 막상 모든 것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자 보다 더 형편이 나은 쪽을 찾아 하나 둘씩 집을 버리기 시작했다. 환경이 적합해질 때까지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생명의 뜻이었고 따라서 집과 동네를 고향을 자기 자신까지도 적응하기 위해 버릴 수만 있다면 내팽개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뒷날에 한결 같이 얘기하게 되었는에 "길어도 한 달쯤이면 모든 게 끝나 되돌아 갈 줄로 알았다"는 것이었다.)
[슬라이드] 피난민의 해열, 북진중인 국군, 끊어진 한강철교, 기차 위에 올라탄 피난민의 무리.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무대 불 밝아지면 한 영숙, 한영덕의 아들, 딸, 부인, 안절부절못하여 피난 짐을 꾸린다. 짐을 꾸리다 말고 한영덕의 처, 낙심된 듯 주저앉아 운다. 한 영숙 다가가서 달랜다)
한 영숙: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처형장을 온통 뒤져도 오빠 시체를 찾진 못했어요. 어디엔가 살아 있는 게 틀림없어요.
김 혜경: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걸 보았다는 사람의 얘기가 사실일까요? 혹시 저쪽에서 후퇴할 때 끌고 간 게 아닐까요. 차라리 죽었다는 확인이 된다면 마음이 덜 불안할 텐데요.
한 영숙: 그렇게 마음 약하게 먹지 말아요. 할머니도 계신데…서박사님이 다시 찾으러 나가셨으니까 무슨 기별이라도 가지고 올 거에요. 어서 짐이나 싸자고요. (둘이 다시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한다. 발자국소리 들리며 서학준, 한 영덕을 부축해서 들어온다. 모두 한 영덕을 놀래 반기며 부축해서 맞는다)
서 학준: 정말 운이 좋았어요. 하늘이 도우신 게 틀림없어요. (한 영덕에게) 정말 아무대두 다친 데는 없나?
한 영덕: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없는 모양일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시체들 틈에 누워 있더군. 파란 하늘이 보이고, 파리 떼가― 지독했어. 총알이 귀밑을 스치고 지나갔는지 왼쪽 뺨만 따끈따끈하더군. (모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
서 학준: 나는 그날 오전부터 닭장으로 쓰던 헛간에 짚더미를 쌓아 그 속에 숨어 있었지.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는데 이렇게 용케 살아남았으니 자네나 나나 명이 길 모양일세.
한 영덕: 신시가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더군.
서 학준: 폭격이 굉장했어. 병원은 국군이 접수했네. 나는 군의관으로 입대할 생각이야.
한 영덕: 입대한 다구…어느 쪽에?
서 학준: 어느 쪽이라니 그야 물론 국군이지. 우리 같이 입대하세. 내 벌써 절차를 자세히 알아 두었네. 우리 자신은 물론이구 가족의 신변이 안전하게 보장될 거야.
한 영덕: (일어난다. 서학준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런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어느 쪽이든 전쟁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신분보장이나 바라는 짓은 못하겠네.
서 학준: 아니 이 사람이…
한 영숙: 오라버니,
한 영덕: (집을 돌아보다가 피난 보따리를 발견하고는) 아니 이게 무슨 짓들이야.
김 혜경: 벌써 많은 집들이 떠났어요. 피난 나가지 않으면 우린 불안해서 못 살겠어요.
한 영덕: (묵묵히 생각하다가) 정말 몇 백 리의 겨울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오. 어머님은 쇠약하셔서 얼마 못 가서 지쳐 쓰러질 게야. 차라리 집에 계시는 게 낫겠지. 강추위에 길바닥에서 고생하시느니 임자가 집에서 모시고 있으라고. 며칠 뒤면 전쟁이 모두 끝나서 돌아올 텐데, 괜히 온 가족이 나가 고생할 건 없잖아.
할머니: 나도 안가겠다야. 따라나서 봤자 공연히 너희들 짐이나 되고, 너희 아버님 산소를 두고 갈 수야 없지 않느냐. 늙은 것이…염치없이…살아서 뭣 하겠어.
한 창빈: 아버지는 할머니를 맡으시고요, 전 어머닐 맡겠어요. 온 가족이 꼭 부여잡구 건너가면 될 거예요.
한 영덕: (짐짓 화를 낸다) 안 돼. 나 혼자 다녀오겠어. 피난도 돈 가져야 해요. 지금 우린 이불 보따리밖에 없잖아. 나가서 굶어 죽으면 뭘 하겠어. 살려고 가자는 것 아냐.
한 창빈: 아버지, 전 군관훈련을 받고 있었으니까, 저 사람들이 돌아오면 전장으로 끌려갈 거예요. 못 가게 하셔도 저 혼자라도 가겠어요.
한 영덕: 네 어머니는 어떡할 테냐? 내가 없으면 너라도 남아서 가장 노릇을 해야지. 다 끝난 전쟁이라니까.
김 혜경: (울먹인다) 죽어도 함께 죽는 게 나아요. 그냥 멍하니 보면서 헤어질 수는 없어요. 여보, 생짜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요. 어머님두 당신이 잘 말씀드려서 같이 모시고 가요.
한 영덕: 한 사나흘 노숙하다가 돌아온다는 데도…
할머니: 그래 잘 다녀오너라. 그래 갔다가 어서 오너라.
한 영덕: 네 곧 돌아오지요.
김 혜경: 사람 일을 누가 알겠어요. 우리도 따라 갈 거예요.
한 영덕: 좋다고. 난 안 가겠어. 평양에서 살자고.
김 혜경: 그럼 저 사람들이 다시 오면 당신을 그냥 놔둘 거 같아요?
한 영덕: 잘 아는군. 죽으면 나 혼자 죽지 않겠어? 이거 보라고 그저 며칠 동안만 나갔다 오면 될 거야.
김 혜경: (눈물을 씻으며) 맘대로 하세요.
서 학준: (무슨 말을 하려는데 한영덕의 강한시선을 의식하고는 외면한다)
(김혜경, 옷 보따리와 왕진가방 등을 간단히 챙겨서 한 영덕에게 내준다. 한 영덕, 말없이 받는다. 수많은 시선 교차되는 가운데 서서히 암전)
제4장 피난시절
(이 장면은 대사 없이 노래와 극적 장면들로 구성된다.( ) 6.25 동란 전후의 유행가 가락이 낡은 축음기의 소리로 들려오면서 무대불이 밝아지면 거리의 악사 등장하여 아코디언과 하모니카와 기타로 구성진 유행가를 뽑는다.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 스산한 바람소리, 거지들 구걸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지나간다.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 거리의 악사 구성진 노랫가락 반주한다. 거리의 여자들 배회한다. 한 영덕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 유심히 살피며 지나간다. 사람들 길거리에 갖가지 물건을 들고 나와 팔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다시 거리의 악사들 노래하며 구걸한다. 호르루기 소리. 기적 소리. 스산한 바람소리. 무대 위의 등장인물 서서히 얼어붙을 때 암전)
제5장 포로수용소의 기지
(타이프라이터의 키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슬라이드] 정보보고서.
수신 - 미군 제 2 기지 한국군 파견대 조사반장
제복 - 적성용의자에 관한 건
1. 입건 일시 및 장소
1951년 11월 27일 15시 20분경 W. P. CAMP 부근
2. 인적사항
성명 한 영덕 (남)
생년월일 1911년 5월 18일생 (40세)
직업 의사
본적 평안남도 평양시
현주소 경상북도 대구시 덕산동
(이상 모두 한자로 찍힌 자막으로 처리된다)
(타이프 소리 멎으면 무대가 밝아오고 심문관2 앞에 앉은 한 영덕. 책상위편에 심문관1 서 있다)
심문관 1: (단조롭게 서류를 읽는다) 3. 입건이유. 상기 자는 1951년 1월 20일 경부터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P. O. W. 캠프 OFF LIMIT AREA 에 접근하여 수상히 여긴 경비병이 수차 경고 했으나 불응 도주한 적이 있고 21일 오후 4시에도 일직 하사관이 본 적이 있다 하며 23일에도 상기 시각에 철조망 주위에 접근, 합동 동초 근무자, 토마스 일병과 하사 김창수가 불심검문하여 보니 외투 속에 적지의 소위 인민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횡설수설하여 믿기 어려웠음. 본 M. I. D.는 부산과 거제의 포로수용소를 내왕하며 군사기밀과 적의 지령을 전달하누 공작첩자가 있다는 확인된 정보 하에 상기의 용의자를 체포하였음. 4. 조치 및 의견. 효과적인 취조가 필요하므로 귀 파견대의 장교 1명과 미민사심리전 요원과 M. I. D.가 가하다고 사료됨. 참고. 심문 냉용은 별지에 첨부된 것과 여함. 귀관들 의 심문조서 역시 같은 보고서에 철해 주시압. 발신자. 중사 하이트. 대필 통역장교 중위 이 경호. 1951년 11월 25일 13시부터 17시까지 대위 크라펜스키, 중위 이 경호, 대위 박 윤구 등이 M. I. D. 조사실에서 취조 하였는바 심문 내용은 다음과 같음.
심문관 2: 피의자가 1911년 평양 출생의 한 영덕이 맞습니까?
한 영덕: 네.
심문관 2: 피의자는 1951년 11월 20일 23시 사이 포로 캠프 주위에서 배회한 적이 잇습니까?
한 영덕: 네.
심문관 2: 정확하게 몇 시쯤, 몇 번입니까?
한 영덕: 세 번입니다.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문관 2:무슨 목적으로 캠프에 왔읍니까?
한 영덕: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심문관 2: 피의자의 아들이 현재 포로입니까? 그렇다면 그의 관등성명을 말하시오.
한 영덕: 군인이 됐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자세한 사실은 모릅니다. 평양 출생, 당년 19세의 한 창빈입니다.
한 영덕: 포로명단을 조사했더니 그런 자는 없다는데 누구에게서 언제 그런 사실을 들었읍니까?
한 영덕: 동향인이 지난 10월 부산으로 오는 포로 수송열차에 그 애가 타구 있는 것을 먼데서 본 것 같다고 힝읍니다.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심문관 1: 포로 중에 아는 자도 있겠군.
한 영덕: 기만 명중에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나는 행여나 여기 오면 먼데서라도 아들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심문관 1: 피의자와 대화한 포로가 잇습니까?
한 영덕: 없읍니다.
심문관 2: 캠프지역에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을 알았읍니까?
한 영덕: 네, 알았습니다. 그러나 잡상인들과 어린이들이 포로와 아아아 애기를 하고 그래서 그리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심문관 2: 어느 지역입니까?
한 영덕: 게이트 3번 동쪽입니다.
심문관 1: 왜 근무자의 명령에 불응하고 도주했읍니까?
한 영덕: 잡상인이 달아나 길래 저도 같이 섞여서 달아났습니다.
심문관 2: 피의자는 언제 월남했소?
한 영덕: 50년 12월입니다.
한 영덕: 피의자가 공작첩자가 아니라 피난민이라면 어째서 가족이 없읍니까?
한 영덕: 나느 저들에게서 처형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사람이므로 고향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곧 수복되리라 믿고 단신 월남했습니다.
심문관 1: 속이지 마시오. 피의자가 50년 12월에 월남했다면 어째서 아직도 적지의 민간복을 입고 있습니까?
한 영덕: 나는 여기 와서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대구의 후배가 경영하는 조그만 개인병원에서 시간제 의사로 일하고 있어서 생활비를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벌의 옷이 있습니다만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인민복은 마구 입기가 좋고 목에까지 단추가 달려 방한에 좋습니다. 왜정 때에도 나는 이 비슷한 옷을 아무 느낌 없이 입었습니다. 버리기도 아까워 그냥 입어 왔습니다.
심문관 2: 이남에 친지가 잇습니까.
한 영덕: 에, 대부분이 월남했을 테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고 전쟁 전에 남하한 손아래 누이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심문관 1: 피의자는 북한에서 정당이나 단체에 가입한 일이 잇습니까?
한 영덕: 네, 북한에서는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무슨 단체에든 가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전국 교맹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심문관 1: 직책은?
한 영덕: 평회원입니다.
심문관 2: 피의자는 북한에서도 의업에 종사했나요?
한 영덕: 네.
심문관 2: 전국 교맹의 회원과 의업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한 영덕: 처음에는 대학에 있다가 인민병원에 근무했습니다.
심문관 1: 대학이라면 소위 김일성대학 의학부를 말하니 가요? 직책과 전공은?
한 영덕: 의학부 산부인 과학 교수였습니다.
심문관 2: 어째서 피의자는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제거되지 않고 떳떳하게 교수직에 종사할 수 있었읍니까?
한 영덕: 나는 정치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해방 전부터 박사과정을 위해 대학 연구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뒤에 그자들이 가르치라고 해서 학교에 계속 눌러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산부인과에 관한 지식 외에는 그들과의 관련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문관 1: 인민병원에서의 직책은?
한 영덕: 특 병동 담당 의사였습니다.
심문관 2: 특 병동이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한 영덕: 군인과 준 군인, 당원, 행정요원과 그들의 가족만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습니다.
심문관 1: 피의자가 공산주의자들 고부터 절대적으로 신임을 받았다는 증거 같은데 대개의 의사가 50년 말에 징집되어 전선의 이동의 무대에 편입되었는데 피의자는 제외되어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요?
한 영덕: 그때의 북한 상황을 모른다면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징집된 자들보다 지독히 나쁜 환경 아래 혹사당했으니까요.
심문관 2: 믿을 수 없는데. 후방근무가 전방 근무보다 더 위험하고 곤란하다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읍니다.
한 영덕: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살기 위해서 월남한 것만은 틀림없읍니다.
심문관 1: (다시 서류를 들어 단조롭게) 이상과 여히 심문했음. 아직은 공산첩자 여부를 밝힐 수 없으나 피의자가 대학 교수 급의 신분으로 부역한 사실이 확실함. 요시찰 인물로 추정되므로 민간 경찰에 이첩함이 가하다고 사료됨. 조사반장 대위 박윤구.(S. O)
제6장 한영숙의 재봉소
소리: (드디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들판 가운데를 가르고 흘러가던 강물의 표면이 일시에 얼어버리듯 멎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망마저 얼어붙은 물 속 깊이 가라앉아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며 소망마저 한없는 겨울잠에 들어갔고 남북의 장벽은 두터운 망각기의 층을 이루며 쌓여져 갔다.)
[슬라이드] 1953년 휴전협정의 기사를 다룬 신문.
초라한 한 영덕(으로 분장한 배우의) 찌든 얼굴. (한 영숙 한 씨에게 그릇을 권한다. 그리고는 바느질하는 시늉)
한 영숙: 어서 드세요, 오빠. 근육통이나 신경통에는 소주에 날계란을 타서 마시는 게 좋대요.
한 영덕: 이제는 괜찮아.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사이) 영숙아, 나 따르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 영숙: 왜요. 제집이 불편하셔요?
한 영덕: 나도 이젠 일을 해야지. 너 혼자서 고생되지 않니?
한 영숙: 아이 난 또…뭘 이까짓 게 고생 이예요. 아이들 셋인데.
한 영덕: 여자 혼자 재봉소 일루 벌이가 얼마나 된다고. 밑천이 조금만 있으면 병원이라도 하나 내겠는데.
한 영숙: 서선생님께 직장 부탁하시지 그래요. 수도 육군병원에 계시다면서요?
한 영덕: 취직은 까다로워서 안하겠다.
한 영숙: 전번에 적십자 병원에 취직이 되신다더니 오빠 왜 안하셨어요?
한 영덕: (우물쭈물) 글쎄, 나도…모르겠어. 며칠 뒤에 와 보라고 해서 그저…그런 줄만 알았지. 가보니까 벌써 자리가 찼다고 하든가?
한 영숙: 혹시 핑계 대는 거 아녜요? 작년에 대구에서 고생하구 나왔다고 의심하거나 뭐…꺼리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한 영덕: 겨우 한 달인데 뭘 꺼리겠니. 요즘 세상에 이북 사람치구 그 사람들 밑에서 일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력서에 저쪽서 하던 일을 거짓으로 쓸 수야 없지.
한 영숙: 그까짓 이력서 아무렇게나 쓰며 어때요. 오빠도 참…
한 영덕: 서군 말대로 면허장 없는 사람하구 손 잡구 동업이나 해볼까.
한 영숙: 밑천 없다고 수입은 다 뺏기고 월급 몇 푼 받을 텐데, 그건 뭣 하러 해요.
한 영덕: 반반으로 얘기를 해오더라. 그만하면 꽤 괜찮은 조건이지. 착실하게 모으면 작은 병원은 차릴 수 있을 거다.
한 영숙: 혹시 박 씨라는 사람 아녜요?
한 영덕: 어떻게 아니?
한 영숙: 그 사람이 왔었어요. 평양 이치과 병원서 기공사 하던 사람 아내요? 개구리 배두 째보지 못한 사람이 외과 병원을 내구 있다면서요?
한 영덕: 그 동안 틈틈이 책이라도 읽고 남의 어깨넘어루 치룬 임상경험두 있으니까, 이런 난리 통엔 그럭저럭 써먹을 만하겠지.
한 영숙: 오빠답지 않게 그런 사람하구 동업하셔요?
한 영덕: (괴로운 듯이) 난 이제 의술이란 걸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요즈음 누가 책임감을 가지고 제세하려는 마음으로 진료에 임하겠니. 모두들 돈 벌자고 배운 기술로 생각하는 거야. 돈을 위한 기술…그 사람도 먹고 살겠다고 의업을 택하는데 욕할 게 뭐 있겠니.
한 영숙: 그래요. (동정하듯) 하지만 동업은 손해인데. 저는 다만 그런 뜻이에요.
한 영덕: 병원만 차리게 되면 혼자 고생하는 네 뒤도 돌봐 줘야 할 텐데.
한 영숙: 오빠, 그런 생각 아예 하지 마세요. (말을 바꾸려고) 그리고 재혼도 하셔야지요. 그때까지 함께 지내요. 저는 재봉일루 이만하면 먹고 살만 하니까요.
한 영덕: 까짓 거 혼자 살지…귀찮게 장가는 들어 뭘 하니.
한 영숙: 아니어요. 사내들은 아낙이 있어야 사람 구실해요. 지금 휴전된다고 매일같이 신문에 나오는 거 못 보셨어요?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세월이 흐를지 몰라요. 아마…십년이 갈지. 이십 년이 갈지…
한 영덕: 아니야. 네 남편도 곧 돌아온다. 한 사오년 뒷면 통일이 되겠지. 꼭 통일이 되겠지. (S. O)
제7장 투서
제1경 동업, 박가의 병원
한 영덕: (가운을 벗으면서) 박 선생, 볼 일이 생겨서 좀 나갔다 와야겠는데 급한 환자가 오면 이리로 연락해 주시오.
박 가: 야, 이거 한 선배님…요릿집 출입만 하시는군요. 저도 좀 붙여 주시오.
한 영덕: 나중에 부벽루로 오시려오?
박 가: 아, 아닙니다. 보나마나 윤여사하구 랑데부하시는 모양이네 제가 끼어서 뭘 합니까?
한 영덕: 기다릴 테니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얘길 합디다.
박 가: 아, 괜잖대두요. 저도 오늘은 매우 기분이 상쾌한 날입니다.
한 영덕: 정말 아까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박 가: 선배님…드디어 골칫거리가 해결됐습니다. 저의 재 면허 신청이 통과됐읍니아. 이젠 어느 놈들이 와서 짖어대두 면허장만 내보이면 끽 소리 없이 물러갈 겁니다.
한 영덕: 그거…기쁘겠군요. 난 그럼…
박 가: 예, 다녀오십시오. 저는 환자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한 영덕: 무슨 환자?
박가: 어제 초진을 했는데요, 여잡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 혼자라도 충분하니까.
한 영덕: 수술 같은 것은 절대로 해선 안 되오.
박 가: 실력이 없다 그건가요? 저도 급할 땐 제왕 절개까지 해봤습니다. 한 선배님은 그런 데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한 영덕: 출산시키는 거라도 조심해야 하오. 낙태는 말할 것도 없고.
박 가: 참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요. 이거 인종은 많은데 자를 건 자르고 봐야지. 자꾸 낳게 해서 어쩌자는 건지. 전장에선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가는에 한쪽에선 계속 태어나고 있단 말예요.
한 영덕: 그러니까 전시하의 국가에서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 않소.
박 가: 양공주다, 전쟁미망인이다, 사방에서 난리인데 낙태수술을 않으면 요즈음 병원이 운영되는 줄 아십니까. 수술비를 실비의 몇 배나 받아 내거든요.
한 영덕: 좌우간 법을 어겨서도 안 되겠지만 돈 몇 푼 벌겠다고 모체에 든 생명을 함부로 끊을 수야 없어.
박 가: 한 선배님은 너무 물정을 모르셔서…(웃음) 개화기 때 의원 같단 말이야.
한 영덕: 약제사는 어디 나갔소?
박 가: 예, 김형은 미제 수성 페니실린과 마이신이 싸게 나왔다고 연락이 와서 몽땅 사들일려구 급히 나갔습니다. 운이 좋으면 다섯 배는 날거든요.
한 영덕: (한숨 쉬며 고개를 젓고) 세 시간 뒤에 돌아오겠소. (암전)
제2경 부벽루
한 영덕: 이사는 했소?
윤 미경: 네, 아까 낮에요…한 시간밖에 안 걸렸어요. 집이 무척 깨끗하긴 한데 진용이 때문에 아무래도 이사를 잘못 간 거 같아요.
한 영덕: 시끄러워서? 아이들은 친구들이 많은 게 오히려 좋지.
윤 미경: 아뇨. 좋지 않은 여자들이 살더군요. 양공주가 둘이나 세 들어 있어요. 미군들이 들락날락 하잖아요.
한 영덕: 어디나 비슷한 형편이요. 마당만 같이 쓰지 않는다면 별 상관이 있겠소. 진용이두 내년엔 학교를 보내야겠지요?
윤 미경: 벌써 다 큰 것 같아요.
한 영덕: (담배를 피우려다가 권한다)
윤 미경: 안태우겠어요. 이젠 끊어야죠. 다방도 그만두고 지금 생각 같아선 좀 들어앉아 쉬고 싶어요. 한선생님두 어서 병원을 차리셔야지 언제까지나 박 선생 뒷바라지만 할 순 없잖아요?
한 영덕: 글쎄요. 개인병원이 체질에 맞질 않는 모양이오. 장사를 할 줄 알아야지. 종합병원에 취직이나 할까 하는데 신경 쓰지 않고 월급이나 받는 게 마음이 제일 편할 것 같소.
윤 미경: 이쪽이 전쟁에서 이길까요?
한 영덕: 그렇군.…우리는 둘 다 이번 전쟁과 깊은 관계가 있군요. 아직도 진용이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죠?
윤 미경: 이미 포기했어요. 날마다 그저 그런 풍문만 들리잖아요. 오늘은 어느 고지에서 무슨 전투가 있었는데 아군은 북방으로 몇 킬로 진북해 올라갔다든가…그런 식이죠.
한 영덕: 휴전이 되려는 모양이오. 멋대로 서로 치고박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두자는 거요. 차라리 끝장이 나야지. 이렇게 멈추면 언제나 다시 합쳐져서 오고가게 될지 아득한 일이오.
윤 미경: 선생님 아직 누이 집에 계신가요?
한 영덕: 예. 그 애도 윤여사처럼 이번 전쟁에 혼자가 됐습니다. 함께 지내기가 좀 거북스러운 입장이지요.
윤 미경: 빨래 같은 거 있으시면 제게로 가져 오세요. 그리고 언제든 집에 들러 주셔요. 약주를 드시더라도 밖에서 돈 쓰지 마시구요. (한 씨의 상의를 만지작거린다. 단추를 때어 자기 백 속에 넣는 시늉) 그대로 달구 다니다가 잃으시겠어요. 양복 단추는 같은 것으로 짝을 맞추지 않으면 촌스럽거든요. 제가 보관했다가 달아드리죠.
김 가: (급히 등장) 큰 탈났습니다. 박형이 수술 도중에 그만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한 영덕: 유산이오?
김 가: 네, 그렇습니다.
한 영덕: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그렇게나 당부했지 않소?
김 가: 전 모릅니다. 약을 구입하러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박형이 무모하게 일을 벌인 겁니다.
한 영덕: 몇 개월이오?
김 가: 6개월이랍니다.
한 영덕: 소파수술은 불가능하오. 인공조산으로 낙태를 시켰어야 하는데.
제2경
(9조명 구역에의 이동에 의하여 자연스런 장면전환)
박 가: 양막을 자궁벽에서 박리시켜 가지고 진통을 도와줬습니다. 태아가 사망한 대로 나오기는 했는데 웬일인지 출혈이 그 지질 않습니다.
한 영덕: 자궁천공을 일으켰거나 자궁에 임신으로 난관이 파열되어 내출혈을 일으킨 게 분명하오. 수술한 지 얼마나 경과됐죠?
박 가: 두 시간쯤 됐습니다.
한 영덕: 수혈은?
박 가: 못했습니다. 손 쓸 틈이 없었어요. 끝난 건 방금 삼십 분 밖에 안 됩니다.
한 영덕: 나도 자신이 없어요. 정당한 사유가 있는 중절이라면 책임을 지구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만약에 이런 만용으로 환자가 죽는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되겠소?
박가: 한 선배님 그럼 어떡합니까? 애초부터 선배님을 오시기로 한 게 이런 불상사를 위해서가 아니었읍니까?
한 영덕: 박 선생이 먼저 손을 댔고 나는 말렸소. 우선 수혈을 해놓구 환자 가족을 부르시오. 때에 따라선 자궁척출을 해야 되니까. 임신 능력을 잃게 될지도 모르오.
박 가: 어쨌든 생존조치나 해주십시오. 환자가 죽으면 저희는 마지막입니다. 우리가 시술을 했다고 써 놓고 용태도 적어 놓겠습니다. 한 선배께서는 응급조치만 도와주셨다고 하시면 께름칙할 것이 하나도 없잖습니까.
한 영덕: 아무렇게나 하시오. 먼저 환자를 살려 놓고 봅시다.(나간다)
김 가: 각서를 써놓고는 어쩔 셈인가?
박 가: (픽 웃고) 얼빠진 소리 말게. 저 친구 그런 보장이라도 없다면 손을 써줄 줄 아나? 불상사가 생길 땐 우린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거야. 무사하면 다행이구 말이야.
김 가: 지금은 모른다고 해도 나중엔 드러날 텐데. 가족들이 항의할 걸. 낙태를 시켜 달랬지 언제 자궁척출을 해달랬냐구 법석을 떨며 고발을 하던가 하면 골친데 이거.
박 가: 염려는 푹 놓으라. 이거야. 우린 시술을 해서 인공 조산을 다 시켜 놨는데 한 씨가 나서서 손을 잘못 썼다고 우기면 되는 거야. 보라고, 우린 둘에다가 저치는 혼자가 아닌가.
김 가: 적자생존이란 말이 있지. (암전)
[제 4경]
(박가의 병원) (의료 감시원 책상설합이며 구석구석을 뒤지는 중이다.)
박 가: 이거 너무하지 않소.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졌다고 이러는 거요?
감시원: 이 양반아 무면허영업은 최하 5년 이하의 징역이야.
박 가: 여보쇼, 사정이나 알고 취체를 받아야 할 것 아뇨. 당신이 의료 감시원이면 다요? 우린 위법한 일이 전혀 없소. 우리는 면허증을 취득했고요, 의사 한 분이 또 계셨단 말이오.
감시원: 영업주가 현재 누구요. 누구 이름으로 올랐냐고.
박 가: 이게 내 면허장이요. 똑똑히 보시오.
감시원: 이 종이쪽지 말인가. 가짜면허증… 두었다가 코나 푸시지 그래.
박 가: 당신에 과장 허가 아래 나온 거요.
감시원: 당신이 알던 과장께선 전출되어 갔다고. 다른 분이 새로 오셨으니 재교부 신청을 해보시라고.
박 가: 나는 이북서 개업까지 하구 살던 사람이요. 무슨 결격사유도 없는데 면허말소란 당지두 않는 일이오. 나중에 관계처루 항의하겠소.
감시원: 맘대로 하오. 면허 등록 대장에는 당신에 관한 사항이 없는데 당신 번호에는 딴 사람이 기재되어 있더다 그 말이요. 당신 면허증은 유령번호를 달구 있다 그거야.
박 가: 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 이럴 거 없잖아. 나 좀 봅시다. 잠깐만 보자고.
감시원: 이거 봐요. 괜히 얼렁뚱땅 하지 마슈. 노라니까.
박 가: 안 다구요. 당신네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고. 우리 톡 까놓고 얘기하자 이런 말이요. 같은 동포끼리 이렇게 매정할 건 또 뭡니까.
감시원: 여보, 매정하긴 뭐가 매정하단 말이오? 무면허 영업을 하지 말아야지.
박 가: 글쎄 그걸 누가 모르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노형들도 먹고 살기 마련이구, 또 사귀다 보면 서로 편리하게 주고받으며 트고 지내는 거 아니겠소. 그래 얼마… 한 장쯤 드릴까?
감시원: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신 아주 상투적이군.
박 가: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나 하나 처넣어 봤자 당신이 신통할 게 뭐가 있겠소.
감시원: 이번 일은 위에서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이요.
박 가: 누구, 신임과장 말이오? 글쎄 염려마슈. 형씨들은 내가 따로 생각해 주고 나서 그 양반은 나중에 만나 보면 될 거 아뇨. 그 사람이 안 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당신들은 윗사람 눈치에 따라서 처신하시지. 내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인 줄 아슈? 그런 내막쯤은 나도 슬슬 꿰고 있다 그거요.
감시원: 박 선생 정말 사람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군.
박 가: 나도 한 달 내론 입대할 사람이요. 병원일은 얼마 안 가 집어치울 작정이오. 하여튼 잘 왔수다. 안 그래도 면허증 때문에 노형들을 만나려던 참이었소.
감시원: 이 양반 수단엔 손을 들었구만. 좋소. 알아서 하시오. (감시원 퇴장. 약제사 김이 뛰어 들어온다)
김 가: 직원 갔지? 끈질긴 놈인데, 최소한 두 장은 써야겠군.
박 가: 뭐 두 장씩이나?
김 가: 크게 걸렸잖아. 무면허 개업에다, 면허증 위조, 하여간에 꼼짝없이 걸린 거야.
박 가: 자네는 뭐 약사 면허 있어?
김 가: 그러니까 나도 동업자로서 피는 보겠지만 서두 주인은 자네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박 가: 지금 현찰이 없는데…
김 가: 발등에 불부터 끄고 봐야지. 차용증이라도 써 주구 나중에 빚을 얻어다가 무마를 하서 그려.
박 가: 가만있어… 한 영덕이가 그만둔 지 일주일도 못되어 저것들이 들이닥쳤단 말이야. 한 씨가 고발한 거 같은데?
김 가: 뻔 하다구. 그 친구 아니면 누구겠니?
박 가: 내가 의전 동창회에 갔다가 수모당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리네. 나도 그 학교 나와서 재 면허를 낸 걸루 되어 있으니 안 갈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그 회장인가 하는 고박사라는 자가 나를 가리키며 몇 회 졸업생이냐고 묻는 거야. 42년도라고 그랬지. 한 씨가 교수 노릇 할 때니까 나는 그 치가 변명해줄 줄 알았어.
김 가: 그 벽창호가 차라리 아무 말 안하면 좋게?
박 가: 나하고 병원을 같이 하구 있지만 졸업을 했는지는 기억에 압수다. 이따위로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서박사라는 놈, 조가, 권가, 모두들 내가 있는 데서 의학을 배웠느냐는 둥, 참 혼났어. 좋다. 나는 이제 군의관으로 입대할 거야. 어느 누구도 군인 신분인 나를 건드리지 못해.
김 가: 그러고 보니 지난 번 마이신 사건말일셰. 그것도 한 씨가 찌른 것 같단 말이야.
박 가: 그 새끼가 밥 먹여 준 은공도 모르고.
김 가: 작자가 수상하단 말이야. 난 암만 생각해도 그치 사상이 좀…
박 가: 아, 그만… 우리 애국 한번 해보자고. (면허증을 찢어 버린다) (박가와 감가 둘이 소곤대고는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암전)
제5경 투서
(박가,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서 투서 작성. 고성능 마이크를 이용하여 속삭이듯이 투서를 적어 나간다. 글씨 쓰이는 소리, 숨소리 등 모든 것이 포착된다)
대한민국의 온건한 사상을 지닌 국민으로서 지금은 군문에 입대하여 장교 복무를 위해 피 교육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국가를 사랑하고 정부의 안전과 번영을 염려하는 가운데 삼가 위중한 정보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현재 부산 시립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영덕은 평양 출생으로 1948년 김일성대학 의학부 산부인 과학 교수직에 취임하여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부터는 당의배려 아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부역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은 1950년 12월에 군사기밀수집과 간첩조직망의 구성, 불평분자 포섭의 임무를 띄우고 피난민으로 가장, 남파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동기는 1951년 - 확실한 날짜는 조회를 바람 - 부산에서 미군 제2기지 군사 정보 대에 검거되었다가 대구 경찰서로 넘겨진 사실이 있다는 것을 그의 친지로부터 분명히 확인한 바 있으며 국내 정세로 보아 포로조직과 접선하여 난동을 획책하려는 북의 지령을 전달했을 용의가 짙다고 봅니다. 측근자로서 꾸준히 관찰해 온 결과이오니 직접 내사하면 판명될 것입니다. 선량한 국민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남에서 결혼까지 하고 가정을 마련한 다음 52년 말부터 본격적인 동조자 포섭을 시도해 왔습니다. 한은 수개월 전 동창회를 구실로 모인 동향 의사들 중에 북한에 처자를 남겨두고 월남한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는바 그들은 성심병원 의사 조한경, 제일병원 원장 의학박사 고동수, 전 내과 의원장 전 성학 등으로 제일병원을 근거지로 하여 조직을 확대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증거로는 본인에게도 은근히 포섭을 시도하다가 묵살당한 일이 있고 김종식이라는 약제사에게는 유엔군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했으며 월남해서 재혼한 처 윤미경에게는 이북의 정치체제를 찬양하는 뜻을 비친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친목회를 빙자하여 틈만 있으면 고동수가 경영하는 제일병원에 모여 현 정부 비판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 예의 비난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은 참석했던 치과의사 이필 중씨에 의하여 밝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은 북한방송을 계속 청취해 왔으며 지방 출장이 잦고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주거가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건대 이번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것도 적의 지령에 의한 것이8 나 새로운 접선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별지에 관련자의 소재지와 증인 명단 등을 첨부하나이다. (S. O)
제6경 체포
(부산 한영덕씨 하숙집) (문 두드리는 소리. 누워있던 한 씨 고개를 든다. 잠시 후에 그의 얼굴로 떨어지는 불빛)
한 영덕: 누구요? (얼굴을 가리며 벌떡 일어난다)
소리: 포위됐으니 도망갈 생각마라.
한 영덕: 누…누구요? (허우적거리며 걸어 나온다)
소리: 손들고 일어나, 벽에 붙어 서. (손을 들고 걸어 나와 누구의 힘에 의한 듯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한 영덕: 뭣 때문에 이러시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는 거요?
소리: 이 빨갱이 새끼! 순순히 말을 들어. 즉결 총살을 당하고 싶나. (조명 불빛의 이동에 따라서 한 씨 움직인다)
한 영덕: 어디로 가는 거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소리: 평양으로 갔으면 좋겠나? 내가 가는 곳은 지옥이야.
제8장 무고
[슬라이드] 1950년대 당시의 무고죄에 관한 처벌 법조문
제1경 추적
(남자 셋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섰으며 한영숙, 차례로 다가서며 주고받는다. 남자 셋은 부채 모양의 사람 얼굴 그린 것으로 모습을 가리고 서 있다.)
한 영숙: 아무리 혼란기라지만 엄연한 법치국가에요. 여자 혼자 싸워 본들 죽기야 하겠어요? 나중에 변호사에게 증거자료를 내놓을려구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조 한경: 동창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목적은 무엇이냐 묻더군요. 거기 참석한 사람 전원의 소재를 말해라, 또 한 영덕이가 북에서 당의 신임을 받고 특별대우를 받은 게 사실인가, 이런 것을 자세히 물었어요. 누가 몇 명이 짜구서 투서를 써넣은 게 분명합니다. 주요 인물은 한 군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덕이 혐의를 확정 시켜 주느라고 끼어 들어간 게 확실합니다.
한 영숙: 저희 오빠를 안에서 만나셨죠?
고 동수: 예, 꼭 한번 대질심문 때 봤습니다. 눈에 눈곱이 끼고 입술이 터져서 피가 맺힌 몰골이었습니다.
한 영숙: 라고 물었어요?
고 동수: 저도 혼자 내려와 여기서 새로 가정을 가졌습니다. 단신으로 월남한 이유를 묻더군요. 제일병원에 모여서 무얼 어떻게 했는가를 주로 조사받았습니다.
한 영숙: 많이들 맞으셨어요?
고 동수: (당황하며) 아뇨, 아닙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말 못합니다.
한 영숙: 자유당 정치인을 통해서 청탁을 넣으셨다죠?
전 성학: 아뇨…
한 영숙: 그러면 잡혀가신 근거가 뭐에요.
전 성학: 모릅니다.
한 영숙: 투서는 박가가 냈지요?
전 성학: 글쎄요, 전화를 받자마자 저더러 나가라고 했으니까 이런 엉터리 석방으로 미뤄 보더라도 억지 구속이었습니다.
한 영숙: 어째서 제일병원에 놀러 가셨던 일을 추궁하구 그랬을까요?
조 한경: 개업 일주년이라고 고박사가 한 턱을 냈지요. 고향 얘기도 했고, 삼팔선 애기, 휴전을 추진하는 얘기를 했지요. 담당 검사는 기관과 손을 잡고 권력의 허수아비가 되어 있는 작자라서 마음이 안 놓입니다.
한 영숙: 우리는 그럼, 그 방면에 수단이 있는 변호사를 세워요.
조 한경: 이 손가락 끝의 작은 살갗이 상하는데도 고통이 무시무시했어요. 차라리 칼이나 몽둥이였다면 훨씬 참기가 쉬웠지요.
한 영숙: 오 하나님, (세 사람 이때 부채를 내린다. 부채를 떨어뜨리면 부채의 얼굴과는 대조적인 이기적인 모습의 탈을 쓴 모습이 보인다. 조명, 얼굴을 강조하고는 암전)
제2경 상담
(서학준의 사무실. 서학준은 육군중령의 군복을 입고 있다)
한 영숙: 그런 나쁜 놈들 때문에 통일이 안 되는 거예요. 그저 저 놈, 하고 찍으면 덮어놓고 데려다가 족치는 판이니 뭐에요.
서 학준: 그만해 둬요. 그런 걸 높은 사람이 알아나 줘야지.
한 영숙: 빨갱이라구 무조건 몰아세우면 우린 누굴 믿고 어디로 가서 살란 말이예요.
서 학준: 그러니까 말조심해야지요. 쓸데없이 정치에 참여해선 안 돼요.
한 영숙: 선생님, 이런 사건은 요새 너무 흔한 게 아닌가요?
서 학준: 에, 검찰에는 이런 사건이 무더기로 밀려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북한 사람들이 반 이상입니다.
한 영숙: 예감이 어떻습니까. 재판에까지 회부될 사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 학준: 글쎄요… 이 정도의 희박한 증거를 가지고 기소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곤란한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가령 사건의 성격 자체가 간단히 증거 불충분으로 단정 지어 구속을 해제해 버리기엔 국가안보상 중대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런 경우에 검사는 공소를 보류시킨 다음에도 피의자를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 인물로써 계속 감시 관찰을 위임할 수가 있고 증거 조사를 위해 수시로 소환할 수도 있습니다.
한 영숙: 선생님 투서한 작자들을 무고죄로 소송을 걸려고 그러는데요. 기관 사람들도 마찬가지 루요.
서 학준: 글쎄요, 그러나 물적 증거가 없읍니다. 가령 투서를 작성하는 데 관계한 장본인들의 자백이라든가 그 투서를 사본이라도 우리가 입수해서 보관하고 있다든가 하는 뚜렷한 증거 말입니다. 이런 상태로 무고하게 피해를 받은 사실을 경찰이 수사해줘야 하겠지만 경찰은 모기관의 직무에 개입할 권한이 없읍니다. 모기관은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현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과오라도 범할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보안상의 문제에서 그들은 믿을만한 정보를 입수했었다는 선까지만 밝혀 주면 그뿐일 테죠.
한 영숙: 그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당한 사람은 어떡해요. 생사람을 춘향이 식으로 때려잡는 게 민주국가에요?
서 학준: 이번 전쟁에서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절반으로 삭감되어 있는 거죠. 그것은 양쪽의 똑같은 명분입니다. 계속 죽지 않고 이런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고충이 따르기 마련 아닙니까? 한 여사, 애써 무고죄로 소송을 걸면 뭘하겠읍니까. 성립되지도 않겠지요. 한 군이 무사히 나오기가 하면 미친개에 물린 셈 치고 몸이나 회복하길 바랍시다. 다음부터 주의해서 조심해 가며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한 영숙: 전 어젯밤에 너무 외로워서 우리 큰 아이를 깨웠습니다. 어린 것이 자다 일어나 눈을 크게 뜨고는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러더군요. 너희가 뭘 잘못해, 우리 어른들이 다 몹쓸 것들이지, 하면서 저는 그 애에게 말했습니다. 그저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한다, 나라의 이런 때를 거울삼아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이다음에 좋은 세상이든 나쁜 세상이든 옛말 하듯 하라고요. 저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오라버니 겪은 얘기를 모두 해주었지요. (운다. 서학준 다가가서 한 영숙의 어깨를 잡는다. 암전)
제9장 재판
제1경 조서
(한 씨 의자에 뒷짐 진 상태. 심무관2, 그의 주위를 오락가락한다. 심문관1, 맞은편에 않았다. 심문관, 발전기 돌리는 시늉)
심문관 1: 여태까지 조서에다 모든 피의 사실을 인정해 놓고 진술서에 서명 날인을 않겠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이 한 바퀴 더 돌려.
심문관 2: (발전기 돌리는 시늉. 한 씨의 꿈틀거리는 동작과 신음. 실신하자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젖힌다) 좀 쉬었다가 해야 되겠습니다.
심문관 1: 괜찮아. 죽지 않으면 된다고. 보통 악질이 아니란 말이야. 야, 눈 떠 . 나를 똑바로 봐. 이 사람이 누군지 기억나나?
한 영덕: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심문관 1: 다시 한 번 묻겠는데 1953년 4월 23일에 제일병원에 모여 뭣들을 했나?
한 영덕: 개업 기념…
심문관 1: 이놈이 이제 와서 또 딴소리야. 심문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겠나?
심문관 2: (한 씨의 머리카락을 당기며) 너 또 코로 물 먹고 싶나? 매운탕 한 주전자 부어 줄까?
조 한경: 제가 대신 말씀 드리지요. 이 사람은 지금 대답할 기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나서 이 사람이 시인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심문관 1: 좋아. 말해보시오.
조 한경: 개업 기념일은 틀림없었습니다. 술을 몇 잔씩 들고 나서 갈 사람은 가구우리 몇몇이 남았습니다. 우리 네 사람 외에도 그때에 한 대 여섯이 더 있었습니다. 한 영덕 삼팔선은 이차대전에서 이긴 강대국이 서로의 이해과계를 견제하려던 결과였다고 말했지요. 저도 찬성하면서 정부 형태가 없다고 일방적으로 국토 안에 거주하는 한 민족을 강대국의 행정적인 임시 방침에 희생시킨 군사조처였다고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들은 고향을 떠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심문관 1: 아아…그만, 알았어. 바로 그런 것이 불순한 대화라고. 이 부분의 조서내용울 읽어줄까? 너희들이 진술했던 내용 말이야. 자 여기… 피의자는 1953년 4월 23일 제일병원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고 미국을 위시한 우방연합국들을 비난하는 성질의 불법집회를 가진 적이 있는가? 네, 시인합니다.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너희들은 거기서 정기적으로 불법 집회를 가졌다 그 말이야. 여기 한 영덕 피의자가 주로 의견을 말했고 너희는 절대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는가?
조 한경: (두 손을 벌려 보이며 애원하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인다)
심문관 1: 당신을 여기 데려 온 이유를 잘 알겠지.
조 한경: (고개를 끄덕인다) 약속을 지키는 겁니까?
심문관 1: 어서 말해.
조 한경: 네…했습니다.
심문관 1: (한 씨의 어깨를 잡아 흔든다) 야, 정신이 드나?
한 영덕: (그를 멍하니 올려다본다)
심문관 1: 아까 읽어 준 진술서에 서명날인을 하겠나?
한 영덕: 나는 진술서를 쓰지도 않았소.
심문관 1: 이 악질…네가 말한 걸 우리가 받아쓰지 않았나?
한 영덕: 아는 피난민일 따름이오.
심문관 1: 그래 부산에서 아무도 안 만났다는 데까지는 좋다. 이북 방송을 청취했고 현 정부를 비난했지, 다 시인했잖아.
한 영덕: 나는 살기 위해 월남했소.
심문관 1: 어라 인젠 동문서답까지… 아주 죽여 버릴 테다. 너 귀신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고 싶어?
심문관 2: 넌 간첩이야, 간첩! 네 따위 하나쯤 죽여 봤자 전시에 누가 알성 싶으냐.
한 영덕: 나는 피난민이오.…(연신 고개를 흔든다)
심문관 1: 내가 교대하기 전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아주 씹어 먹어 버릴 테다.
조 한경: 한번 휘갈겨 쓰면 편할 텐데 왜 그래.
한 영덕: 나는 사람이오. 나는 … 사람이오. (기절한다. 암전)
제2경 판결
(어둠 속에서 한 영덕, 빈 무대에 혼자 서 있다. 실루엣으로 처리된다)
소리1: 재판은 자꾸 연기되었다가 한 영덕이 법원으로 넘어간 뒤 4개월이 지나서야 그 사건은 일단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건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자궁척출에 관한 사건이었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뒷수습으로 수술해 준 일 때문이었다.
소리2: 피고 한 영덕, 환자의 위탁이나 승낙 없이 낙태 중 처사시킨 행위에 해당되므로 2년의 징역과 3년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여러 사람들의 웃음소리) (야, 참아라, 참아. 세월이 약이다. 잊어 버려라. 곧 좋아질 거야.) (웃음소리 난자하게 고조될 때 암전)
제10장 소망장의사
(어둑한 무대, 관들이 널려져 있고 박 노인의 목수연장과 톱밥, 대팻밥 등이 관 사이에 모여 있다. 지금 막 일손을 놓은 듯 박 노인과 한 영덕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운다)
박 노인: (담배를 비벼 끄며) 그래 딸아이가 하나 있다고요? 나야 자식들을 난리 통에 잃고 여편네마저 병들어 죽고 나서 홀가분하게 살지만 한 씨야 처자식도 있었던 모양인데 왜 이런 곳에 와서 고생을 하시우
한 영덕: (담배만 태운다)
박 노인: 한 씨가 이곳에 있는 줄 아시우?
한 영덕: (고개를 젓는다)
박 노인: 이해할 수 없구먼. 그래도 사람은 좋으나 싫으나모여 살게 되어 있는데 적당히 심사나 달래고 들어갈 집이 있으면 찾아 들어가시오.
한 영덕: 이게 내 집이외다.머지 않아죽으면 그만 아뇨.
박 노인: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하오. 내 더 이상 묻진 않으리다. 우리처럼 살아온 사람들한테 기막힌 사연들이 없다면 말이 되오. 내 처음 한 씨를 볼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소. 세상 사람들 이리저리 바둥바둥대며 살아도 다 장의사에 시체로 들어오면 마찬가지라우.
한 영덕: (끄덕인다)
박 노인: 헌데 한 씨 염하는 솜씨 보니 보통이 아니오. 전에도 시체를 다뤄 보신 적이 있소?
한 영덕: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박 노인께선 집 짓던 목수가 어째 관을 짜게 되었소.
박 노인: 그야 나이가 들어 집짓기 힘이 드니까 쉬운 일 찾다가 이렇게 됐지요. 그러나 저러나 관도 말하자면 죽은 사람 집인 셈이니 집을 짓기는 마찬 가지 아뇨. (웃는다)
한 영덕: (따라 웃는다) 그럴 듯한 말이외다.
박 노인: 집 치고는 아주 간단한 집이지요. 죽은 사람 집은 한번 져 주면 그만이요. 세상 집은 비가 오면 새고 날이 가면 낡아 썩으니 늘 손을 봐 줘야 되지만 관이란 한번 짜면 시신과 함께 묻어 버리니 뒤탈이 없지요.
한 영덕: 기왕이면 내 것도 하나 미리 짜 주시오.
박 노인: 거 무슨 소리. 나보다 젊은 양반이 무슨 소리요. 더 살다가 가족과 만나야지요. 그보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한 영덕: 그건 왜요.
박 노인: 한 씨의 염하는 솜씨를 보니까 맘에 듭니다. 제발 내 염을 해주고 나중에 죽으시오.
한 영덕: 그러면 난 만가 소리를 못 듣게요. (둘이 조용히 웃는다. 사이) 박노인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박 노인: 말해보시우.
한 영덕: 혹 나 아는 사람이 찾아오거나 하거든 내가 먼저 죽고 나서는 말이우. 내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시겠우. 이렇게 모든 걸 잊고 살다 가면 그만이겠소.
박 노인: 거 요즘 와서 별 이상한 소리 다 하는구려. 대관절…
한 영덕: (말을 가로막으며) 이거 박노인에게 만가나 배워 둡시다. 혹시 노인께서 먼저 돌아가시면 누가 그 만가를 부르겠소. 내 배웠다가 불러드리리다.
박 노인: 거 좋은 생각이오. 음, 자 내 한번 해볼 테니 따라해 보시우.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장단을 먹인다. 한 영덕 어설프게 따라한다. 박 노인 취한 듯 만가 고조될 때 서서히 암전)
제11장 한영덕의 고별식
(제 1 장의 무대와 동일함. 초도 다 타서 끝뭉치만 남았다. 새벽이 이제 박 밝으려는 참이다. 박 노인의 만가 끝을 맺는다. 무대불이 밝으면 서학준 말없이 박노인에게 술을 건넨다)
서 학준: 거 참 구성집니다.
박 노인: (술을 들이킨다) 고인은 평소에도 제 소리 듣기를 좋아했지요. 장의사에서 염을 하거나 할 양반이 아닐거라구 막연하나마 느끼곤 했는데 듣고 보니 기막힌 사연이 있으셨군요.
서 학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확실한 배경이나 사리판단에 밝아야 하는 법인데 한 군은 고집덩어리였어요.
한 영숙: 오라버니에겐 평생 본의 아니게 반동이다 적색이다 등의 낙인이 찍혔었어요. 한 번도 억울한데 몇 번씩이나 견디기 어려운 올가미가 씌어졌어요. 집을 나간 것도 지방 대학에서 기숙사 관리인 노릇하다 잠적해 버리신 것도 아는 사람만 만나면 옛날 일이 되살아나서 괴로우셔서 그랬을 거예요.
한 혜자: 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진작 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이해할 수 없어요. 저에겐 모두가 이해하기 힘든 것뿐이에요. 저의 출생부터가 그렇고요. 저는 주정뱅이 고용의사와 월남 미망인 사이의 우울한 만남에서 나온 그야 말로 밀두끌두 없는 개똥참외예요.
박 노인: (껄껄 웃으며) 개똥참외라 허허허 거 말이 좋구먼. 오히려 개똥참외가 빛깔 좋은 것보다 맛은 더 나는 법이지. 우리 자식들도 지금 살아 있으면 그런 말을 할까? 이봐요, 선생. 난 난리 통에 자식 둘을 잃었소.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는에 난리 통에 몽땅 없어졌소. 자식 놈은 저쪽 애들이 내려와서 엉뚱한 감투를 씌워 주니까 멋도 모르고 날 뛰다가 저쪽 애들이 후퇴할 때 같이 달아나 소식이 없고 딸자식은 수복된 뒤 오빠 때문에 조사받으러 끌려가 이놈 저놈에게 몸을 베리고는 부끄러워 못 살겠다고 집을 나가 여태껏 감감 무소식이오.
서 학준: 여태껏 찾아보지 않으셨나요?
박 노인: 찾을 만큼은 찾아 봤지요. 혹시나 옛날 살던 이곳으로 나타날까 해서 꼼짝없이 이곳에서만 살아 왔는데 객지에서 횡사를 했으면 했겠지, 이젠 기대도 안 합니다.
서 학준: 거 참 기구 하십니다. 피난도 안 가시고 계속 사셨다면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박 노인: 다 잊어 먹고 살았었지요. 한 씨가 나타나서부터 옛날생각이 자꾸 되살아났었지요. 이젠 한 씨도 먼저 떠났으니 또 잊고 살아야지요.
한 혜자: 그 일들이 옛날 얘기도 아닌데 쉽게 잊혀 지나요?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날마다 허리를 앓거나 날마다 폭음을 하던 술꾼이라는 기억뿐이에요. 나는 자라나는 동안 양친의 일가친척 집에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살았어요. 어느 쪽에서도 혈육의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달랐던 진용이 오빠 하구는 사이가 좋았지만 진용 오빠는 아버지를 미워했죠.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부르더니 커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렀고요, 사실 그럴 만두 했어요. 그는 독립 호적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나한테 아버지의 얘기를 꺼낼 적에도 진용 오빠는 너의 아버지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런 게 모두 우스웠어요.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죠. 아버지는 식구들과 말도 건네지 않고 항상 골이 난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술이 깨면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면서 솜으로 두 귀를 꼭 틀어막고 지냈어요.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부터 의사 노릇을 했다는 기억이 없군요. 나는 그가 의사인 줄도 몰랐어요. 어느 날 아침에 아버지는 슬그머니 외출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 엄마 윤마담은 내가 열다섯 살 때 여관업을 하던 홀아비 노인과 재혼해 버렸죠. 훨씬 뒤에 나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지가 미숀 계통의 어느 지방대학 기숙사에가 관리인 노릇을 하신다구요. 첫 번에는 고모와 함께, 두 번째는 나 혼자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세 번째 찾아갔을 때에는 아버지가 거길 그만두고 떠난 버린 다음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지요. 왜 아이제와서야 아버지 얘기를 해주시는 거지요. 왜 모두들 지난 이야기를 잊으려고만 하세요.
한 영숙: (훌쩍인다) 넌 모른다.
박 노인: 전쟁을 못 겪은 아가씨는 모든 것이 억울하고 안타깝게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 주위에선 멋모르게 죽어간 삶이 더 많지요. 그런데 그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더 고생스러운 법이지요. 잊지 않으면 어쩌겠소? 누가 보상해 준답니까?
서 학준: 너희 아버지는 보기 드물게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난 딴에는 사리판단이 밝다고 자처해 왔고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살아남았겠지만 너희 아버진 그 고집이 이 암울했던 세상과 맞부닥치면서 한 번도 펴 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거야. 그런데 나 한 번도 너희 아버지의 고집을 탓해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보면 듬직한 고집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죄라면 한 군은 세상을 잘못 태어났지.
한 영숙: 글쎄요. 그렇다면 전쟁 때문에 덕 본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나서 그런가요? 오라버니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었어요. 난 네가 사내아이가 아닌 게 다해스럽기두 하다. 우리네 여자들은 그저 슬퍼도 참구 살면 되지만 남자들이야 어디 그러냐. 눈치도 봐야되구 싸움도 해야 되고 가만히 있겠다. 해도 싸움 나면 이쪽저쪽에서 그냥 놔두질 않는다고.
서 학준: 아 요 새 세상이야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지요. 옛날에 비하면 많이 개화된 셈이죠. 한 군에겐 그간 수많은 낙인이 찍힌 셈이지만 이젠 그것을 다 벗었지 않읍니까. 이제 우리느 고인의 명복을 빌어 편한 곳에 가게 해주면 됩니다.
한 혜자: 아무리 편한 곳에 간다고 해도 편하게 살지 않았던 이야기는 남겠지요. 고모가 큰 아이에게 아버지 얘기해 준 것처럼 저도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 얘기를 전하겠어요. 모두가 지난날의 얘기를 과거지사로만 돌리고 싶겠지만 저 제 자식들이 개똥참외의 후예가 되게 하긴 싫어요. 아무리 부끄럽고 괴로운 얘기라 해도 그것을 지아가 버린 과거지사고 돌리고 싶진 않아요. (음악) 한영덕씨가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고서도 나는 울음이 나오질 않았어요.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그이가 내포했던 시대를 새롭게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 길고 지루한 고별식은 이제 끝내야겠어요. 한영덕씨는 그의 시대와 더불어 캄캄한 어둠 속에 박제될 거예요. 저, 정지된 폐허 가운데 들꽃과 잡초에 뒤덮여 쓰러진 녹 쓸은 기관차처럼 그의 매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아버지가 좋아하셨다는 만가를 다시 한 번 들려주세요.
(음악이 고조되면서 박 노인 서서히 일어나 만가를 부른다. 새벽이 밝아오면서 한 혜자, 촛불은 불어 끈다. 청진기와 수첩을 양 손에 들었다 한영덕의 영정 앞에 조용히 엎드려 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