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전 구형왕릉>
구형왕릉이라고 전한다고 하여 정식 명칭은 전 구형왕릉이다. 아직 확정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근에 관련 유적들이 많이 있고, 조선조에서도 덕양전을 지어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이만한 규모로 돌탑을 쌓아올린 전례가 없는 것으로 봐서 믿어도 되겠다는 것이 문외한의 생각이다. 빈곤한 가야의 유적을 더듬으며 고대사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전 구형왕릉(傳仇衡王陵)
위치 : 경남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로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2.11.30.
2. 둘러보기
1) 소개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전재)
2) 구형왕릉 관람 감회 : '문화단일민족의 최대 공헌자 구형왕'
구형왕은 전쟁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나라를 선양하고, 태왕산으로 들어왔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돌무덤에 장례 지내라는 유언으로 이 돌무덤이 만들어졌났다.
신라의 왕중 유일하게 경순왕의 능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다. 경순왕 또한 고려에 맞서지 않고 나라를 양위하여 전쟁을 피하고 백성을 지켰다. 고려에서도 이러한 경순왕을 우대하여 그는 수를 누리고 죽었다. 고려왕실에서는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다. 조선조에도 영조조에 따로 묘비를 세워 예를 다하였다.
왕조가 바뀐다고 피 흘리는 전쟁이 매번 이루어졌으면 우리 문화공동체는 다 파괴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구비문학 등이 왕성하게 전승되지 않는 이유는 매번 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어 왕조가 바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도 무혈 역성이 이루어지며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보존된 문화공동체가 한민족 단일문화권을 만들어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지만 혈통상의 단일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상하층 귀화인(여진족, 한족 등등)들과 임진왜란의 항왜 등등 많은 외인피가 합쳐졌고, 민족 형성기 자체도 어느나라든 단일민족을 말하긴 어려울 거 같다.
우리는 드물게 언어와 문화가 단일하다. 단일문화권이 계승 보존되어 온 까닭이다. 덕분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종교 갈등이나 소수민족 갈등 등 내부 문제가 적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데 구성원 모두가 힘을 보태온 것이지만, 특별히 더 큰 공헌을 한 사람을 들라면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들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 선두에 구형왕이 있음을 오늘에야 확인한다.
인근에는 농은 민안부 선생비가 있다.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인 민안부 선생은 바로 이곳에 와서 몸을 숨겼다. 72현은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숨은 고려조 충신들이다. 위에서 이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나가는 흐름을 만들었다면, 백성들은 이렇게 거스르면서 흘러가는 역사를 만든 셈이다. 이 돌무덤 또한 나라를 양도한 것을 마음으로는 거부하는 표현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역사는 평화롭게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의 한민족을 이룬 많은 흐름, 그 현장을 이곳에서 본다. 오늘 이곳에 와서 숙연한 모습으로 구형왕릉 앞에 합장하는 우리 또한 한민족 단일체를 현재적으로 지키는 존재임을 부정할 필요없을 것이다.
주변 문무석 등 석물들은 모두 후대의 것이다.
앞의 석물은 최근에 세운 것이다.
가락국 양왕릉비. 이 비석도 훗날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양왕은 구양왕의 다른 이름이다.
이 돌들을 들어내고 고증을 하면 '전 구형왕릉'이 아닌 '구형왕릉'으로 확증할 수 있겠지만 다시 쌓을 재간이 없어 그냥 둔다고 한다. 그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나온 증좌들만도 차고 넘치는 물증이 아닐까.
구형왕릉 주변의 암석에는 구형왕릉임을 알려주는 글자를 새긴 각석들이 있다는데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는 왕릉 옆에 단을 쌓아 구형왕의 수정궁을 옮겨짓고 7년간 제향을 받들었다고 한다. 현재 구형왕릉 옆의 석축단과 재실인 보능각, 고직사 건물이 그 흔적이다.
호릉각.
호릉각 입구
구형왕릉을 보고 내려가다 만난 류의태 약수터. 류의태는 허준의 스승, 이곳 산청은 동의보감의 고장이다.
류의태 약수터 가는 길.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약수터다.
김유신 사대비. 김수로왕의 태왕궁지 비각 맞은편에 있다. 구형왕릉의 손자 김유신은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사대비에는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라고 새겨져 있다.
김수로왕의 태왕궁 터를 알리는 비각.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태왕궁지비'다.
*아래는 덕양전
* 덕양전 맞은 편으로는 이와 같은 평야가 펼쳐진다. 위 김유신 사대비에서 내려다 보이는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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