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6일 (월) 촬영
풍무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 횡단보도를 건너,
좌회전하면,선수공원 4거리가 보인다.
선수공원 사거리를 건너면,
이곳에 강화길(김포옛길) 제2길인 금릉옛길의 안내도가 있다.
김포의 원류를 찾아가는 길.
아파트 앞 길을 따라 직진한다.
김포풍무 푸르지오 1차 버스정류장을 지나,
광장에 있는 풍무도서관이 보이면 도서관 쪽으로 우회전한다.
풍무도서관이다. 도서관과 아파트 사이에 있는 사잇길로 들어 간다.
풍무도서관과 아파트 사잇길로 나와 인도로 직진하다가,
4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신호등에 이정표가 있다.
인도 바닥에 '풍부초등학교 가는 길'이라는 표식이 있다. 멀리 노란색의 신호등이 있는 4거리가 보이는데,
이 4거리에서 우회전하는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한다.
아파트(서해그랑볼) 쪽으로 건너지 않고 직진한다.
버스정류장에 이정표가 있다.
직진, 대각선 방향에 있는 아파트 옆 길로 간다.
횡단보도를 건너 건너편 앞에 보이는 단층 집들이 있는 길로 가면 된다.
함흥냉면, 칼국수 간판을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천주교 풍무동 성당이 이곳에 있다.
성당 앞에서부터 살짝 오르막 길이다.
우측은 공동묘지이다.
공동묘지가 상당히 넓다. 얕은 산이지만 두 봉우리나 차지하고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얕은 산이 김포 장릉이 있는 산이다. 우측은 계속 공동묘지이다.
묘지 아래쪽에 김포장례식장(쉴낙원)이 보인다.
김포장례식장과 공동묘지다. 이 공동묘지에 한하운 시인의 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길의 이름이 한하운시인로이다.
한하운(1919~1975)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 2년을 수료했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 1953년 신명보육원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
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 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지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 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한하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보리 피리 한하운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1955)
全羅道길 한하운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김포장례식장을 지나면, 바로 우측으로 장릉의 펜스가 나온다. 펜스따라 우회전하면 된다.
펜스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좌측으로는 펜스에 갇힌 장릉이 있는 산자락만 보이고,
우측으로는 방금 지나온 공동묘지가 보인다.
공동묘지가 넓다.
장릉 입구에 있는 의자에서
기운이 나는 붉은 색의 과일을 먹으며 쉬어 갔다.
제2길 금릉옛길.
사후에 왕의 칭호를 얻어 '원종'이 된 사연 김포 장릉
장릉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입니다. 임금 또는 왕족이 죽은 뒤에 다시 왕으로 모시는 것을 추존이라고
하는데, 원종이 바로 이렇게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족입니다.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이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했습니다. 용모가 출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받았다는 정원군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양주군 곡촌리 묘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정원군의 큰 아들이었던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이후 인조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다시 원종으로 추존된 것입니다.
사실 이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원종을 태묘에 합제 하고자 할 때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면서 관직을 삭탈다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장릉을 참배했습니다. 특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전에 장릉을 먼저
참배했었다고 전합니다. 죽은 뒤 왕자에서 다시 왕으로 추존된 원종이 잠든 김포장릉에서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겹겹이 쌓인 산세 속에 고요히 잠든 조선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장릉 주변을 따라 펼쳐진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선의 역사를 산책하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
장릉 입구.
장릉입구에서 김포시청으로 가는 길. 윗길은 경기옛길이고, 아랫길이 금릉옛길이다.
김포시청 앞을 통과.
시청에 있는 "김포 현령, 군수 선정비 군"(김포시 향토유적 제14호)
사료에 의하면 김포 현령, 군수 등의 선정비는 20여기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10기이다.
김포시청 앞 길.
김포시청.
김포체육공원에 있는 축구인 이회택의 흉상과 조형물.
사우(김포시청)역 앞 사우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건너 직진.
멀리 육교가 보인다.
돌문마을.
돌문마을은 김포의 기름진 농토가 2001년 택지개발로 인하여 사라지기 이전 옛 김포여자 중, 상업고등학교에는
돌을 쌓아 만든 교문이 있었다. 이 후 사람들은 이것을 추억하여 이 일대를 돌문마을이라 칭하였다.
또한 2003년 4월 30일에는 지금의 '돌문거리'가 있는 사우 24통 마을이 사우 5통에서 분통되었다.
현재의 '돌문거리'는 주로 먹거리가 다양한 김포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2003년 11월 20일 돌문마을 번영회
김포는 한반도 최초로 벼를 재배한 곳이기도 하다.
중봉 조헌,重峯趙憲 선생 / 중종 39년(1544)~선조 25년(1592)
김포 감정동 출생, 조선 중기의 유학자, 개혁사상가, 의병장,
임진왜란시 청주성을 수복, 금산전투에서 700 의병과 순절, 동방 18현으로 성균관 문묘 및 전국 234개 향교에 배향.
동방 18현(동국 18현)은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올라 문묘에 종사(從祀)된 18명의 한국의 유학자들을 말한다.
서배향 -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
동배향 - 설총, 안유(안향),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조헌 선생 동상 왼편에 있는 KT 건물 앞으로 통과 후,
왼편 골목에 전봇대에 있는 김포향교 이정표따라 골목으로 진입하면.
노거수인 향나무가 보이고 그 뒤로 향교의 외삼문이 보인다.
벽화도 있고...
김포 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을 교육, 교화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김포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1960년대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그 외에 재실과 출입구 구실을 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맛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퍠를 모시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 ,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을 올렸다. -현지 안내문-
강학공간인 명륜당의 좌측면과 후면의 모습
내삼문 안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향교 좌측에 있는 지붕이 특이한 김포가정교회
향교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여인숙 지나 다시 우측 골목으로 내려가
만나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올라 간다.
이정표따라 길건너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간다.
아파트 공사장 뒤 산에 성당이 보인다.
김포성당이 있다.
길을 잠시 벗어나 성당에 올라가 봤다.
공사 중.
본당.
우측 언덕에 옛 성당 건물이 있다.
구 김포 성당 건물 / 국가등록문화재 제 542호(2013년 4월 18일 지정), 건축년도 1956년 12월 17일, 석조 콘크리트.
구 김포 성당은 한국 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 이상적 특징인 종탑과 뾰족한 아치창호 공간적 특징인
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을 잘 간직한 1950년대 석조 성당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가치가 매우 높다.
4각형 평면의 탑신과 8각형 평면의 종루 위에 총화형(파꽃 모양) 돔을 얹은 종탑의 형태 구성이 매우 우수한 건물이다.
성당의 입지가 도시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도시의 전망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김포 역사 문화의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도처
성당을 내려오면,
걸포사거리가 나온다.
걸포사거리를 건너 우리병원과 백세삼계탕 사이에 있는 계양천에 설치된 테크 길로 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