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3) 예수님의 사명 인수
-예수님의 고난노정을 총탕감하신 흥남 감옥 2년 8개월
예수님이 하나님이 메시아를 위하여 준비하신 유대교단 및 유대 선민과 하나 되셨더라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하나님 섭리의 뜻을 이루셨을 것이다. 아버님도 하나님이 재림메시아를 위하여 준비하신 기독교단과 하나 되셨더라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단과 하나 되지 못하고 반대를 받았음으로써 사탄에게 끌려가셔서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받으시고 거기에 대한 승리를 이루시게 된다. 그 결과로 사탄이 잠시 물러가게 되고 메시아로서 전도 활동을 하셔서 12제자와 그 외의 신도들을 만드셨다. 그러나 사탄이 다시 유대교단과 유대선민을 통하여 침범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입장이 되셨는데, 여기서 12제자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예수님을 지켰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지 않게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12제자가 다 도망감으로써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아버님도 기독교단과 하나 못 되고 심한 핍박을 받았음으로 실체 사탄인 공산당 관헌에 끌려가 빈사상태로 고문을 당하고 몸이 풀려나 건강을 회복한 후에 3대 축복을 실체로 복귀하기 위한 시험 노정을 걸어가셨다. 그리하여 이 노정에서 승리함으로써 아버님은 전도하는 기간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기독교의 목사와 장로들이 다시 내무서에 83통의 고발장을 보내며 참소하였으므로 공산당 관원이 아버님을 내무서에 구금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아버님이 초림 메시아인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인계받아 재림메시아로 출발하기 위한 노정을 걸어가시는 십자가 노정이 되었다.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신 자리는 십자가상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지만, 재림메시아는 십자가상에서 죽지 않고 메시아의 바통을 인계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12사도에 해당하는 제자를 찾아 세워야 죽지 않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인수받아 내려올 수 있게 된다.
① 1948년 2월 22일, 아버님의 재구금
북한에서 교회가 운영하던 기업들이 모두 몰수되었고, 식량 배급제도에 의하여 신도들의 생활이 어렵게 됨으로써 교회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님의 교회는 기성교회에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목사·장로들은 아버님을 내무서 당국에 고발하게 되어 그 고발장 수가 83통에 이르게 되었다. 기성교단의 질시(嫉視)와 공산당의 종교말살 정책이 합쳐져서 아버님은 1948년 2월 22일에 평양 내무서에 또다시 구금되시게 된다.
구금 3일 후인 2월 25일에 머리를 깎이고 평양형무소에 이감될 때까지 여러 번의 고문을 받게 되고, 피를 토하면서 고문의 현장에서 쓰러지고 의식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구하여 주십시오.”하는 기도는 올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는 기도를 올리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보다도 더 괴로우신 입장에 계시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겨울은 매우 춥다.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이고, 추울 때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 밤에 자고 아침에 깨어나면 덮고 있는 낡은 이불 조각은 얼어서 단단한 판때기 같이 굳어지고 흰 서리가 덥혀있게 된다. 거기에 밥은 얼어붙은 대두 밥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먹으면 몸이 속으로부터 냉해져서 떨려오게 된다.
1948년 4월 7일에 평양 재판소에서 공판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재판정에는 공산 당국의 고관들과 젊은 공산주의자들도 많이 방청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교육하는 장으로 삼기 위한 그들의 작전이었다. 그 자리에는 머리를 깎인 아버님이 수갑을 찬 채 피고석에 있었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아버님에게 던져진 재판장의 첫 질문은 “무엇을 전공하였는가?”하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전기공학을 전공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시자, 재판장은 “전기는 어떻게 하여 만들어 지는가?”라고 물었다. 재판장이 이렇게 물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전기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이 공산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 질문을 통하여 종교재판으로 가지고 가려는 재판관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아버님은 전기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버님은 서울과 일본에서 전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아버님의 막힘없는 답변에 재판장은 곤란해져서 말을 도중에서 중단시켰다. 그것은 재판관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버님의 말씀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에 대한 판결문에는 ‘무지한 사람들을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허위를 날조하여 많은 금품을 착취하여 기독교도의 가정과 사회를 파탄시켰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판결문을 읽은 다음에 재판관은 아버님에게 다시 물었다. “이 판결문에 대하여 고칠 말은 없는가?” 이런 때는 이의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이 최상의 방법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님은 당당하게 항의하였다. “허위란 말은 빼주시오.” 그러나 아버님의 항의는 인정되지 않았고,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간의 강제노동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의 재판은 소련식 재판 수속을 따른 일방적 선언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반대 의견을 진술하는 아버님의 위엄 있는 모습에 재판의 진행을 보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이 노린 것은 ‘하나님의 사람(아버님)의 무력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교도관들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데려온 것을 후회하였다. 재판을 보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아버님을 따르는 식구들은 아버님의 재판에 임하시는 자세에 압도되었다. 아버님은 언제 봐도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누구나 낙담할 수 있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식구들에게 아버님은 부드럽고 아기를 안은 아버지와 같은 따뜻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법정에서 아버님의 언행을 통하여 배짱이 있고 결연하고 대담한, 어떠한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위엄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는 그 순간조차, 아버님에게는 처참함도 비장함도 없었고, 오히려 얼굴이 희망으로 빛나는 것 같이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아버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재판정으로부터 바로 평양형무소로 가시게 되었다.
아버님은 평양형무소 안에서 한사람의 의인을 만났다. 그 사람은 감방장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원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사형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과 남쪽에서 평양으로 온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꿈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얼마 후에 김원덕은 꿈에서 본 대로 사형이 4년 8개월 형으로 감형이 되었다. 김씨는 사형을 면하게 된 기쁨으로 남에서 온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다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너는 내가 한 말을 잊어버렸느냐?”고 꾸짖었다. 그 후 김씨는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김씨의 부친은 병이 나고,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환상 가운데 돌아가신 부친이 나타나서 “노인이 너에게 남쪽에서 온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그 청년을 보여줄 테니 내 뒤를 따라오라.”고 말하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김씨가 부친의 뒤를 따라 가니 궁전 같은 곳이 나왔다. 김씨는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거기서 경배를 드리고 위를 쳐다보니 광채가 나는 보좌가 있었고, 거기에 한 사람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부친이 “얼굴을 들어 저기 계신 분을 보라.”고 하여 얼굴을 드니 너무나 광채가 강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계단을 다 내려오니 부친은 사라졌다. 김씨는 보좌에 앉아 있던 분이 아버님인 것을 알고 그때부터 아버님을 모시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김씨는 아버님과 함께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게 된다.
아버님은 1948년 5월 20일에 평양형무소로부터 흥남에 있는 본궁(本宮)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궁이란 명칭은 이씨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기에 그것에서 유래되었다. 아버님은 본궁 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6월 21일에 다시 덕리(德理)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아버님이 1950년 10월 14일에 수용소에서 해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하여 옥고를 치르셨다.
아버님은 흥남 특별노무자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때때로 말씀하신 때가 있으셨다. 아래의 글은 제3차 세계순회 시 미국에 도착하신 후 1971년 12월 27일부터 29일 사이에 미국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공산당 지배 하에서의 감옥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 여러분은 잘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소련 혁명 후 많은 러시아 인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대단히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공산당의 본심은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자는 모두 말살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지만, 세계 여론 때문에 그렇게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그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하여 가혹한 노동을 시켜서 그들이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는 북한 감옥에 있을 때에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있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소련을 본으로 하여 모든 수인(囚人)을 3년간의 중노동에 동원하여 죽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일요일은 휴일이지만, 공산당원들은 수인들을 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소위 세뇌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서 모든 수인이 다 알고 있는 거짓말 선전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인들을 잘 대우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언제든지 면회할 수 있고 면회 온 사람은 수인을 위하여 어떠한 음식물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경일에는 수인들에게 생선이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인다고 해 놓고는 실제는 그런 것들은 하나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실제와는 다른 선전을 1년 중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의 포로수용소 영화를 본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무릎 위의 허벅지보다도 아래 다리의 장딴지 쪽이 더 큰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중노동을 하게 되면 여러분의 허벅지는 어린아이들의 허벅지보다도 가늘어집니다. 수인들은 시체같이 보입니다. 적은 양의 식사를 하면서 중노동을 하면 에너지는 공급되지 않고 소모하게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배가 널판때기같이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공산주의 노동자수용소 생활입니다.
밥을 배급받을 때 수인들은 밥이 담긴 그릇을 받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밥을 전부 입속에 집어넣습니다. 자기 밥을 먹으면서 두 개의 눈은 다른 사람의 밥그릇에 가 있습니다. 배급이 끝나기 전에 자기 밥을 다 먹어치운 그들은 자기가 먹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밥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 밥그릇이 비어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옆 사람과 싸움을 합니다. ‘네가 내 밥을 다 먹었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인이 자기 밥을 다 먹기 전에 죽으면 주변에 있던 수인들이 죽은 사람의 입으로부터 밥알을 끄집어내서 서로 먹으려고 싸움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력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먹고 있는 밥의 절반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먹고 있는 밥의 절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3주간 계속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받는 밥의 절반만 먹으면서도 나의 노루마(일정의 노동량을 뜻하는 말)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장 힘든 작업을 내가 자진해서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3주간 후에는 그 작업에도 익숙해져서 자신만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배급받는 내 밥의 전부를 먹기로 하였습니다.
나의 식사는 절반이고 나머지 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받은 보너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해서 정신적인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위로가 대단히 큰 힘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2배쯤 일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는 늘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할 때 몸에 어떤 영향이 오는가를 분석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작업 중에 밥 생각을 하면 작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할 때에는 밥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일하는 것이 나의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장래 나의 자손과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게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2년 8개월 예수님의 공생애에 해당하는 기간을 보내고, 12인의 제자를 전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12인의 제자를 전도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잃어버린 모든 조건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연합군이 북한을 공격해서 나를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김원필 씨는 1946년 7월 17일에 아버님을 만난 후 학교 교사를 하다가 후에 육군 병기제조소에 근무하였다. 아버님이 흥남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김씨는 회사일로 창고를 관리하기 위하여 잠시 흥남에 가게 되었다. 김씨는 흥남에 가서 수용소로부터 공장으로 가는 4km의 길 도중에서 아버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기다렸다. 그때에 수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아래를 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시간은 공장의 종업원들도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수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가는 것은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열을 지어가는 양쪽에는 간수들이 총을 들고 같이 걸어갔다. 그 수인 무리 속에 아버님이 계셨다. 아버님은 눈치 빠르게 김씨를 발견하고 자기 근처에 오도록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김씨는 아버님 가까이 가고 싶어도 발견되면 큰일이 나고 자기도 그렇지만 아버님도 무사하게 지나지 못 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아버님이 김원필 씨에게 가장 가까이에 왔을 때 “모두 잘 있느냐?”라고 말을 걸어 오셨다. 이와 같은 일은 보통 사람 같으면 무서워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님은 이와 같은 모험을 하면서까지 평양에서 인연을 맺었던 식구들의 안부에 신경을 쓰고 계셨다. 다행이도 이때는 간수에게 들키지 않았다. 왜 아버님은 이와 같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양에 있는 식구들의 일을 걱정하고 계셨던 것일까? 아버님은 죽음이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용소 안에서도 1일 3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셨다. 하루에 3회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상시에도 2년 이상이나 하루 3회씩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나 굶주림과 강제 노동이라는 상황 가운데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버님에게 식구들은 자기 생명 이상으로 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계속 하실 수 있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쁘게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버님이 면회 때에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어머니와의 면회였다. 평양에서부터 흥남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정주로부터는 더욱 어려웠다. 여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여행증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아들을 생각하며 많은 먹을 것과 의류를 준비하여 면회하러 왔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 음식을 자기보다도 더 배고픈 사람을 위하여, 의류는 자기보다도 더 낡은 수인복을 입은 사람에게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나누어 주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버님에게 말했다. “미숫가루는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먹으라.” “그것은 싫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이와 같은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입을 떨면서 큰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님의 몸에 입고 있는 옷은 언제나 너덜너덜해지고 바람이 불면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면회 올 때마다 아들의 모습을 보고 부르짖었다. “저 옷은 너를 위하여 가져온 것인데, 누가 나누어 주라고 말했는가?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하여 아버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문 아무개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한국나라의 아들입니다. 또 한국나라의 아들이기 전에 세계의 아들이고 하늘땅의 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한 후에 어머니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사촌 동생인 문용기 씨는 큰어머니(아버님의 모친 김경계 여사)가 흥남수용소에 갔다가 정주의 집에 돌아온 후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큰어머니가 수일 후에 집에 돌아오시면 큰형님(아버님의 형님)이 ‘어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 가시자마자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집에서 정성을 들여 준비해서 간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분해서 우셨다.”
아버님은 어머니의 심정을 뼈아프도록 알고 계셨다. 또,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가 이 흥남수용소까지 오셨는가 하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님은 하나님과 인류의 구제를 위하여 인정보다도 천정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셨다.
② 충모님과 대형님의 아버님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충모님은 흥남에 계시는 아버님을 면회하러 갔다 오시면 다시는 가지 않는다고 말씀해 놓고는 또 어느 새인가에 면회 가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13인의 자녀 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시고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시던 아들이 바로 아버님이었다. 몇 번이나 면회를 가는 사이에 팔아서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다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소 한 마리였다. 이 소를 팔면 농가로서의 일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들의 면회를 다시 가기 위해서는 소를 팔지 않으면 비용을 만들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충모님은 이웃에 살고 있는 연하 동서인 김경기 씨(아버님의 숙모이고 문용선, 용기, 용현 3형제의 모친)를 찾아가 의논하였다. “농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도 아들 면회를 가고 싶다. 소를 팔 것을 장남(문용수 대형님)에게 내가 말할 수가 없으니 나를 대신하여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장남인 대형님은 아버님보다 5년 연상인데 영감도 빠르고 동생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 하는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동생 면회하러 갈 때 물건을 가져가는 것에 대하여 한 번도 반대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아버님의 숙모는 대형님을 집에 불러서 어머니가 소를 팔아서라도 면회를 가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소를 파는 것은 사활이 달린 문제였다. 대형님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대형님 입장에서는 이 일을 형수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과 형수는 입장이 다르다. 형수는 맏며느리이므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대가족의 식사 준비를 하고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소를 판다는 말을 들은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식사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소를 판다는 말을 듣고 형수는 엄청난 고민을 하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형님은 결단하고 소를 팔았다. 그 돈으로 충모님은 미숫가루와 의류등 모든 준비를 하시고 아버님 면회 길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형님의 어머님에 대한 효성과 충모님과 대형님의 아버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1948년 2월 22일부터 1950년 10월 14일까지의 2년 7개월 23일간은 초림메시아였던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사명을 재림메시아가 인계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기간으로서, 하나님 섭리의 연속 진행과 아버님의 메시아로서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1948년 4월 7일의 재판 이후에는 고문 같은 악형은 없어졌지만, 아버님에게는 하루하루가 사탄과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투쟁이 연속되는 기간이었다.
사탄은 아버님이 옥중 기간 중 사탄의 법도와 하나님의 법도 양쪽을 잘 지키는가를 철저히 감시하고, 만약 하나라도 지키지 않고 어기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하나님에게 참소하고 아버님에게 침범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버님은 사탄의 관할 하에 있는 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사탄의 법도를 지켜야 할 것을 알고 계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탄이 주관하는 감옥 안에서의 자유가 없는 생활이었지만, 장소 여하를 불문하고 항상 하나님의 법도를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탄이 주관하는 완전히 자유가 박탈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버님에게는 가장 어려운 조건이었다.
제3차 세계순회 차 미국에 가셨을 때 하신 아버님의 말씀에 있듯이, 감옥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을 자기가 태어난 운명으로 생각하시고, 다른 사람의 2배 이상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1년에 한 번 주는 모범상을 세 번이나 받으심으로써 사탄의 법도를 훌륭히 지키신 조건을 다 세우셨다.
아버님의 첫 번째 생활신조는 하나님에게 최고의 효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생활을 하셨다.
하나님 법도의 첫째는 남을 위하여 사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은 흥남수용소에 들어가서 시작한 첫 3주간 동안 자기가 받은 급식의 반을 남에게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남을 위하여 사는 생활의 실천 조건을 세워놓고 생활하셨다. 강제 노동 작업에서 10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일 할 때도 자기가 제일 어려운 일을 맡고, 제일 약한 사람에게 그중에서 제일 쉬운 일을 맡게 하심으로써 남을 위하여 사는 조건을 세웠다. 그리고 남보다 2배 일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자기가 더 많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어머니나 누가 면회를 와서 음식이나 옷을 차입 받았을 때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남기지 않고 어머니가 가져왔을 때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이 가져왔을 때도 모든 것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신 것도 위하여 사는 삶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 법도의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철저히 모시고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은 하나님의 지시나 명령이 있으면 그것을 즉시 실천에 옮기셨다. 그 예가 남한에서 북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하고 즉각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는 기도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노동으로 아무리 피곤하여도 병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기상 시간 2시간 전에 일어나서 남겨 놓은 음용수를 작은 수건에 묻혀서 몸을 정결히 닦는 조건을 세우시고, 보고기도와 정성을 들이는 시간을 가지는 생활을 하셨다.
아버님이 옥중에서 죽지 않고 실행해야 할 조건이 예수님이 잃어버리신 12명 이상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의 신앙인들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세계에서도 신도를 만들기 위한 전도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옥중에서 마음대로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전도하여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 아버님은 어떻게 12명 이상의 제자를 옥중에서 만들 수 있었겠는가? 아버님은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을 쓰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계에 있는 영인들을 감동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버님은 일하면서나 일상 행동을 하면서나 어떠한 생활을 하면서도 주변 사람이나 만물이 감동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되었고, 그것을 통하여 영계에 있는 조상 영인들까지 감동시킬 수 있는 일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생활과 일을 하셨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수인들의 조상 영인들이 자기 후손인 수인들에게 꿈으로 나타나 계시를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이 몇 동에 있는 596번 수인은 특별한 분이니 너는 그 분을 잘 모시고 따라야 한다는 계시를 주어서 그들이 감옥 내에서 실제로 아버님에게 남모르게 인사도 하게 되고 정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1950년 8월 1일에 흥남 강제노동수용소가 있는 흥남 공장 지대에 대한 미 공군에 의한 대폭격이 있었다. 폭격을 피해 간수들이 다 안전한 곳에 도망가고 없을 때에 아버님을 모시는 수인들은 아버님 주변에 자동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아버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말씀도 받고, 아버님 주변 12m 직경의 원내에 들어오면 폭격 때에도 안전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아버님에 대한 신뢰감이 굳건해 지기도 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가져오신 음식이나 옷을 아버님이 주시더라도 어머니가 가신 후에 어머니가 보시지 않는 자리에서 주시지 왜 어머니가 마음 아프게 보시는 자리에서 주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버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아버님도 거기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어머니가 보시지 않는 곳에서 주는 것보다도 보시는 곳에서 주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고 진짜로 줄 수 없는 더 어려운 자리에서 주는 것이 정말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장 극한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남을 위해 사신 삶이라는 기준을 감옥에서도 세우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③ 김인호(金仁鎬) 씨의 증언
김인호 씨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인데, 자기 반생(半生)에 관하여 『서울로 오는 길』(도서출판 민중, 1985년 출판)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속에는 자기가 흥남 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강제 노동형에 복역하였던 체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책 제1장에 「감옥 속의 성자(聖者) 문선명 씨(文鮮明 氏)」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 김씨가 옥중에서 본 아버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씨는 기독교 신도도 아니고 통일교회 신도도 아니다. 다음은 김인호 씨가 이 책에서 아버님에 관하여 쓴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그(문 선생)는 공산당원인 간수들도 인정하는 모범수였다. 그 이유는 작은 반칙(反則)도 범한 일이 없었고, 체격은 장건(壯健)하여서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일하면 동료들 모두가 그만큼 고생하지 않아도 되지요.” 주위 사람으로부터 자기 몸을 좀 더 위하면 어떠냐는 말을 들으면 문 선생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면서 일하는 손을 쉬지 않으려고 하였다.
문씨는 말수는 적었지만, 언제나 편안한 얼굴로 일관하여 있었고 일하는 면에서는 누구도 그의 힘과 열심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문씨는 한 번도 목욕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 동안 바쁘게 일을 하면 눈이나 코에까지도 비료의 가루가 붙고 거기에 땀과 먼지가 섞여서 끈적거려 목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령 깨끗하지 않은 폐수와 같은 공장 용수를 써서라도 목욕을 하는 것이다. 후일에 문선명 씨에 관하여 마음에 걸렸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어느 날 나는 용변을 보려고 생각해서 보통 때보다도 두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났다. 아직도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안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눈이 보이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앉아있는데 방 한쪽 구석에 어둠가운데 앉아있는 문선명 씨의 모습이 보였다.
“김군인가? 일찍 일어나셨구만!”
기도를 하고 있던 것일까? 문씨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말을 걸어 왔다.
“매일 이와 같이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계시는 겁니까? 피곤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일찍 일어나는 데 몸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 쉬려고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요.”
용변을 마치고 돌아오니까 문선명 씨는 윗도리를 벗고 수건에 물을 묻혀서 냉수욕을 하고 있었다.
“문 선생, 춥지 않습니까, 감기라도…”
“공장에서 몸을 씻지 않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몸을 닦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는 공장 폐수와 같은 물에서는 결코 몸을 씻지 않고 마시는 물을 귀하게 수건에 머금게 하여 놓고 매일 새벽에 전신을 닦아 깨끗이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어나서 기도를 마친 후에 냉수욕을 하고 다시 한 번 기도를 한 후에 식사를 하고 작업에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죽음과 이웃하고 있는 환경에서 자기의 체력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데도 자기의 종교의식을 지켜가기 위해서 황금과도 같이 값지고 중요한 수면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줄여 버틴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이 소문은 수용소 내에 널리 퍼져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문선명 씨는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간수가 이유 없이 문선명 씨를 학대하면 그 밤 산신(山神)과 같은 노인이 나타나서 간수에게 무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문선명 씨 자신이 먼저 알고 있어서 전날 자기를 괴롭혔던 간수에게 전날 밤에 본 꿈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본 것 같이 상세히 이야기하여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옛날도 지금도 기독교도도 아니고 통일교회 신도도 아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가 있다. 문씨가 흥남 감옥에서 보여준 변하지 않는 언행(言行)과 인격은 길이 잊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문씨와 재미있는 생각이 나는 일이 있다. 당시의 수용소에서는 먹을거리가 정말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차입에 의해서 받는 음식을 이웃의 동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씨는 자기가 먹어야 할 식사를 배고파서 참을 수 없는 이웃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먹을 것에 굶주려 중노동에 고통을 받고 있던 수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던 이야기가 있었다. 감옥 속에서 얻어먹은 콩 한 알은 일반 세상에서는 돼지 한 마리에 필적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수용소에서 아버님과 같이 지내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인호 씨가 평양형무소에서 흥남수용소로 온 것은 1948년 11월이었다. 아버님이 흥남에 온 후의 일이다. 김씨가 수용소에서 해방된 것은 아버님과 같은 1950년 10월 14일이다. 그는 감방 내에서 이동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로 아버님과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아버님과 같은 감방에서 1년 정도 그는 침식을 함께 하였다.
1994년 11월 16일에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일본인 기자 다케다 요시로(竹田吉郞) 씨가 김인호 씨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먼저 수용소에서 본 문 선생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내(김인호)가 흥남수용소에 있을 때는 23~25세였습니다. 문 선생은 연상이고 고귀한 분이었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관해서도 상담할 수가 있었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문 선생은 정말로 자는 시간이 적은 분이었습니다. 하루의 수면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까요. 불언실행(不言實行)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만 행동으로 우리에게 본(本)을 보여주셨습니다.”
김씨에 의하면, 흥남수용소의 감방은 좁았다. 한 방에 약 25인(때로는 30~40인)이 짐짝 같이 집어넣어져 있었다. 너무나 좁기 때문에 몸을 옆으로 세우지 않으면 쉴 수가 없었다. 밤중에 변기 쪽으로 가기 위하여 일어나면 다시 자기 잠자리를 확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에서 어떻게 자고 있었는가를 김씨는 필자에게 그려주었다. 김씨로부터 들은 하루의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같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에 따라서 시간 등은 약간 다르게 되어있다.)
[하루의 스케줄]
▪ 조조(早朝) 4시 반경에 사이렌이 울리고 간수들이 ‘기상!’이라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 조식 시간은 30분이었지만, 조식은 2~3분이면 다 끝나는 분량이었다.
▪ 오전 5시경 운동장에 집합해 점호(點呼)를 한다.
▪ 오전 6시경 수용소로부터 6km 떨어진 흥남비료공장으로 출발한다. 탈주를 방지하기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아래를 보면서 4열로 걸어간다. 일요일을 빼고는 얼마나 비가 세게 오든지, 눈이 많이 쌓이든지 수용소와 공장 사이를 왕복한다.
▪ 오전 7시 반경에 공장에 도착, 그날의 작업 배치를 결정한다.
▪ 오전 8시경에 작업 개시
▪ 정오로부터 주식, 조식과 같이 2~3분이면 다 먹어치우는 분량이다. 주식 시간의 나머지 시간에는 오락회가 열린다. 이것은 수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간수들이 즐기기 위해서 수인들에게 유행가 같은 것을 노래하게 한다. 노래하는 사람은 매일 거의 결정되어 있었다. 오락회 때에 졸기라도 하면 뒤로부터 얻어맞게 된다. 수인끼리 잡담은 할 수 없다.
▪ 오후 1시경부터 6시까지 작업(휴게 시간이 있다.) 그 후에 다시 수용소로 돌아간다. 그곳에 돌아가면 다시 간수들로부터 체크를 받는다. 작업장으로부터 유리조각, 담배꽁초, 끈, 성냥 같은 것을 숨겨가지고 오지 않았는가를 조사 받는다.
▪ 오후 8시경에 석식(夕食)
▪ 오후 9시경부터 독보회(讀報會)가 약 30분,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사설을 읽고 토론한다. 또, 그날의 작업에 관한 자기비판 등 감상문(感想文)은 마크된 사람이 1주간이나 10일간에 한 번 쓴다.
▪ 오후 10시경 취침
물은 하루 아침과 저녁에 2회 받는다. 낮에는 개인별로는 받을 수 없지만, 물이 저장되어 있는 곳으로부터 한 컵 양만큼 받을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일요일은 작업이 없기 때문에 ‘독보회’는 길어서 약 2시간, 1시간은 일광욕(日光浴), 세탁 등을 한다. 목욕은 1주간에 2회 정도 있었다. 편지는 1~2개월에 1회 쓸 수가 있었다.
면회는 기본적으로 1개월에 1회였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면회 시간은 약 30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면회 장소도 정해 있지 않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면회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부터는 면회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만들어지고, 면회 때에는 간수가 반드시 입회(立會)하였다. 면회는 지시한 대로 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면회할 수 없게 되었다. 면회 때 가져오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미숫가루(쌀, 보리를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 옷, 내의였다.
수인복(囚人服)은 최초로 지급된 것을 계절과 관계없이 계속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의 같은 것의 지급은 없다. 옷이 해지면 자기가 꿰매야 한다. 영양실조가 되면 1개월쯤 지나면 죽어갔다. 피부를 눌러서 들어간 것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밥이나 죽은 사람의 입에 넣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국은 바닷물을 끓인 탓인지 쓰고, 식기의 바닥에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해서 찬찬히 보면 작은 돌 같은 것이 깔려 있기도 한다.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이 9월 9일이 오면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소 한 마리가 선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날 소장의 긴 김일성 주석 찬양의 연설이 끝나고 기다리고 기다린 식사가 나왔다. 그런데 소고기 국이라고 하지만, 소기름 한 방울도 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면 수인들 사이에는 살벌한 분위기가 생긴다. 또, 감방 속에는 간수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스파이는 정보를 조금 제공하면 밥을 조금 더 받게 되기 때문에 수인은 쉽게 스파이 역을 맡아버리게 된다.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인 이외에 일반 노동자도 있었다. 그들은 8시에 출근하여 오후 6시가 되면 일을 마친다. 노동량 같은 것은 특별히 없는 것 같았고, 작업 사이사이에 담배도 피우고 잡담도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 점심에는 그들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면 자연히 입에서 침이 흘러 내렸다.
겨울에 눈이 1m쯤 쌓인 때가 두 번 있었다. 눈이 쌓이건 비가 오건 일요일 이외에는 매일 왕복하였다. 10인 1조의 작업 내용은 비료를 가마니에 넣는 사람 2인, 무게를 재는 사람 1인, 가마니를 운반하는 사람 2인, 가마니의 입을 새끼로 매는 사람 2인, 그 가마니를 화차에 올리는 사람 2인, 화차 위에서 가마니를 받아 놓는 사람이 1인 합계 10인이다.
김인호 씨의 책에는 감옥 내에 있던 한 목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김씨에 의하면, 그 목사의 사위가 감방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말라리아 약을 그 목사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위가 목사에게 달라고 애원했지만, 받지 못하였다. 그 목사는 유명한 목사이고 출옥 후에도 많은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명성을 얻고 있었다. 김인호 씨는 그 목사의 수용소에서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목사에 대하여서는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최후로 김씨와의 잡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자는 마지막으로 “문선명 선생은 어떠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았다. 그때 김씨는 즉석에서 “산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순간 말하고 있는 것이 즉석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공자, 석가, 마호메트 등의 성인은 죽고 지금은 지상에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성인은 문 선생입니다.”
김씨는 이와 같은 말을 증언한 것이다. 이것이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하는 가혹한 수용소에서 약 1년간 아버님과 행동을 24시간 함께하면서 살아왔던 인물의 말이다. 더욱이 지옥과 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야 말로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다.” “감옥은 인간 사회의 축도이며, 인간의 본질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따르면, 김씨의 “문 선생은 성인”이라고 하는 증언은 아버님의 진실한 마음,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흥남수용소에 한(限)하지 않고 강제노동이나 수감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으면 모두가 인간인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상황 하에서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한 인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케다 기자가 보기에는, 김인호 씨는 농담 하나도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성격의 사람으로 보였다. 성실함이 전해져 왔다.
④ 박정화(朴正華) 씨의 증언
박정화(1913~1997) 씨가 흥남노무자수용소에 들어온 것은 1949년 2월의 일이었다. 박씨가 노동일을 하는데 가마니를 묶는 일을 잘 못하기 때문에 아버님이 보다 못해 어느 날 그에게 말을 걸고 가마니 묶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박씨는 이상한 꿈을 꿨다. 한복을 입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이 나타나 박씨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정화야! 정화야, 일어나라. 너에게 가마니 묶는 법을 가르쳐 준 그 젊은이가 누군지 아느냐?” “무슨 죄를 짓고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함께 징역형을 살고 있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박씨는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그 꿈에 나온 노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어릴 때부터 재림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이다.” 박씨는 꿈에서 깨어났지만, 도무지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날 밤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후에 박씨는 전체가 모일 때 아버님을 찾아서 그의 바로 뒤에 앉았다. 뒤에서 아버님을 아무리 보아도 박씨에게는 이 청년이 재림주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기와 다른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어젯밤에 당신은 꿈에 나를 보지 않았습니까?” “네, 꿈에 보았습니다.” “그러면 나를 누구라고 말합디까?” “재림주, 재림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문답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919번은 사무실(소장실)로 오시오.”라는 방송이 있었다. 919번은 박정화 씨의 수인 번호였다. 박씨가 소장실에 가니까 총반장이 어제 만기(滿期)가 되어서 나갔기 때문에 박씨가 그의 대신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소장은 1,500명의 수인 명부를 보고 인민군 제2연대의 대대장직에 있었던 박씨를 총반장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박씨는 총반장을 맡을 지의 여부에 대하여 즉답을 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아버님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아버님의 지도를 받고 총반장이 될 것을 승낙하였다. 총반장에게는 많은 권한이 있었다. 물론 강제노동이 없었다.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어떤 일자리에 어떤 수인을 배치하는가 하는 것도 총반장이 결정할 수가 있었다. 수인들은 누구나 더 쉬운 일 하기를 바란다. 제일 어려운 일이 하루에 1,300가마니의 목표량이 있는 유안비료를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본궁노무자수용소로 가면 더 쉬운 일자리도 있었다.
면회 때 수인들이 차입 받는 물품의 일부가 총반장에게 오는 것도 총반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박 총반장은 이때 7세 연하인 아버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박 총반장은 아버님이 제일 어려운 노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님을 쉬운 일자리에 배치하였다. 그때 아버님은 박 씨에 대하여 이와 같은 쉬운 자리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이야기하였다. “수감 중에 박정화란 사람을 통해서 쉬운 일자리를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렇게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였다.
아버님이 강제노동에 종사하면서 모범노동자상을 수상하였을 때 박 총반장이 “문 선생이 모범노동자상을 수상하여서 정말 기쁩니다.”라고 말하니까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수상한 것이 기쁜 것이 아니다. 사탄의 유혹에 이긴 것이 기쁜 것이다.” 아버님은 이 굶주림과 강제노동 속에 있으면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사탄을 가장 무섭게 의식하면서 인류의 구원을 걸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박 총반장은 수인들로부터 받은 미숫가루의 일부를 아버님에게 드린 일이 있는데, 후에 박 총반장이 아버님에게 “지난번에 드린 그 미수가루를 드셨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아버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나보다도 더 배고픈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아버님이 말라리아에 걸리셨다. 고열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고 때로는 떨면서 노동에 열중하고 있는 아버님을 볼 수가 없어 박 총반장은 이렇게 간청했다.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 쉴 수 있는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부터 그곳에서 쉬십시오.” 그러나 아버님은 쉬지 않으셨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리도 휘청거려 균형도 잡을 수 없고 손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총반장은 아버님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자의 절실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내가 고생하고 있는 것은 이 역사의 프로그램대로 따르기 위한 것이다. 너의 성의는 알겠지만, 나는 너 이상 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이 박씨에게 말하면서 아버님은 일을 계속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의 육신은 훨씬 전부터 비명을 울리고 있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 신도가 수감되고 강제노동에 복역하여 왔다. 그런데 그 많은 신도는 하나님에게 지금의 비참한 환경으로부터 일각이라도 빨리 구원받기를 기도하며 간구하였다. 성경 속에는 기적이 일어나서 옥중에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였던 신도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하나님에게 이 비참한 환경으로부터 탈출하거나 해방되기를 원하여 기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일보다도 이러한 곳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로하였다. 그와 동시에 왜 자신이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무엇을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아버님은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제노동에 복역하면서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총반장이 자기를 편한 일자리에 배치해 준다면 어떠한 수인이라도 그것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 기독교도라면 자기의 기도가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말라리아에 걸린 아버님은 그것을 보다 못해 총반장이 쉴 방을 준비해 준 것에 대하여 앞에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감방에서 함께 고생했고 후에 『서울로 오는 길』이란 책을 쓴 김인호(金仁鎬) 씨의 증언 속에는 아버님이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박 총반장도 아버님이 자기 몸을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은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총반장은 아버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버선(한국식 양말)을 벗고 발이라도 씻으면 아주 편할 텐데요.”그때 아버님은 박 총반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버선을 벗고 물로 씻어 맨 발로 있으면 얼마나 자유롭겠소. 그러나 나는 내 몸이 하늘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늘의 법도를 깰 수가 없소.”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고 아직 사람 앞에서 속살을 내보이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생각해 보면, 아버님은 흥남노무자수용소에서 나와서 몇 년이 지난 서울에서의 여름 더운 때에도 반소매 옷을 입고 팔을 노출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아버님은 수용소 안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총반장을 통하여 구원의 손길이 뻗쳐졌지만, 일을 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고, 사탄이 참소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였다. 1946년에 ‘삼팔선을 넘어가라.’는 천명을 받았을 때 그것에 절대복종한 것과 마찬가지다.
아버님의 생애를 연구하여 보면, 아버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복종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령 그 명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어도,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자기 생명과 직결되는 위험한 일이어도 그것을 엄격히 지켰다.
아버님은 처음에 박 총반장을 만났을 때 세례 요한이 사명을 못했다는 것과 마리아가 책임 못했다는 이야기, 예수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 등에 관하여 박 총반장에게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박 총반장이 아버님의 이야기를 불신하였을 때 하늘이 박 씨에게 징벌의 역사를 내려서 아버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리에 관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박정화 씨의 흥남노무자수용소 입감 기간은 1949년 2월부터 1950년 8월 2일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