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강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갈2:1-10)
1. 예루살렘 방문(2:1-2)
바울이 회심한지 약 14년이 지났습니다. 14년 세월동안 바울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알려진 것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는데 3년 정도 걸렸고, 나머지 시간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머물렀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동안 다마스쿠스에서 경험한 갑작스런 회심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끼친 감격스런 은혜를 어떻게 전해야할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이방의 지역에서 복음전도활동을 하였을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장에서 바울이 다시 계시를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이유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2:2)이라는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생각하면서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2. 거짓 신도들(2:3-4)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한 일을 설명하였고, 그때 존경받는 유명한 지도자들을 따로 만났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말합니다. 회심하자마자 먼저 사도된 사람들을 절대 만나려 하지 않았던 바울이, 이제 그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찾아간 것은 꼭 만나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방 그리스도인 선교 활동에 대한 일종의 “교통정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더불어 헬라인 그리스도인 디도를 대동하였습니다.
바나바(Barnaba)는 예루살렘에도 잘 알려진 키프로스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땅을 팔아서 헌금할 정도로 충성하였고, 안디옥 선교사로 파송 받아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소개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를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아마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를 쉽게 만나려면 바나바의 도움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15장에도 나오는데, 바리새파 출신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벌어진 토론회가 “예루살렘 공의회”(AD 48/49)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거짓 신도란 “가짜 형제”(Pseudo-Adelphos)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형제인 척한다는 말입니다. 즉, 복음의 본질을 비껴나간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의 현재상황과 같은 문제이고, 안디옥에서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벌어지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써서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갈라디아교회에게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도들은 엿보기를 수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슬그머니 다가와서 형제인 척하면서 허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율법도 모르고 할례도 안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도대체 어떤 윤리적 도덕적인 규례를 배우고 있냐고 질문하면서 혼란을 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이었다는 말에는 모두들 할 말을 잃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지금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해방 시키려고 자신을 희생하신 분인데,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율법의 멍에를 강요하는 것은 다시 예수를 죽게 만든 유대교 전통의 노예가 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3. 예루살렘의 반응(2:5-6)
바울은 토론하는 내내 한 순간이라도 “굴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종과 굴종을 구분해서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순종은 자발적인 의미이고 굴종을 강제적인 의미입니다. 순종은 내면의 전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굴종은 찍어 눌러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달려드는 유대주의자들의 위세에도 당당하게 맞섰고, 존경받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지도자들 앞에서도 자신의 복음 선교활동을 주눅 들지 않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기록한 말이 “하나님의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외모란 얼굴 같은 겉모습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외모란 그 사람이 걸친 모든 것을 뜻합니다. 보통 깊이 사귀어 보지 않은 채, 겉으로 알려진 것으로만 보는 것을 “외모”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외모판단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합니다. 그 후에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 그 때는 속마음을 다 알게 됩니다. 한눈에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알아볼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그런 깊이 있는 통찰력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의 소유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바울 같은 자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굴종이 아닌 순종의 삶을 살려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어떤 “덧붙임”(제안)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런 뜻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양자가 모두 공감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반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선교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먼저 유대인이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그렇게 결정하였다면, 오늘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바울의 깊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보편성>입니다. 누구에게나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런 바울의 넓은 생각이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아무 것도 제안하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약간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러 논의 끝에 베드로가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편지를 안디옥으로 보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으로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반면에 갈라디아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저자”의 말을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바울이 합의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판단정도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4. 무할례자의 사도(2:7-10)
복음의 진리를 지켜서 전해주려는 바울의 수고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복음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거짓신도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라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하부조직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주도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안디옥교회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활동을 돕기 위하여 구제헌금을 모아 전달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복음과 진리의 핵심은 어떤 것을 지키는 일로 제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종속관계”라고 부르는데, 영어로 <if-then>(만일 무엇을 하면, 그러면 이렇게 된다)는 구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그때야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참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모두 “은혜”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because-therefore> 구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은혜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제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인 선교에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하고 고마운 일인지 증거 할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