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책 성경을 펼쳐 창세기 1장 1절을 보여주며,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존재의미가 있고, 따라서 우리 인생에게도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 등 단어가 듣기에 거슬렸고 저는 자신이 물리학도라고 소개를 하고는 과학에서는 이 세상의 시작은 한 점, 즉 에너지 덩어리였고 그것이 어느 순간 폭발을 일으켜 현재의 우주가 만들어졌으며,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구 상에 생명체가 생겨났으며 진화의 최고봉으로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반론을 폈습니다.
공부하다 머리 좀 식히려고 나왔는데, 머리 아프게 무슨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러니 창조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그래도 워낙 다른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보니, 그냥저냥 듣다가 "주일예배'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가자고 강권을 하기에 역시 거절을 못하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
주일예배에는 제 또래의 대학생들이 20여명 정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만남은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반박을 해 가면서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해가 1986년도였습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 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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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한국 한자: 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1]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였고,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장교, 육군보병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지도세력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저격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을 주도하였다.[2]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3][4]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2, 3, 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프로스포츠 산업,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표면적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그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재임 중 1980년 8월 4일 창설, 비상계엄령 해제로 1981년 1월 25일 폐지.)를 창설했다.
[위키백과 '전두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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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는 전두환 쿠데타 정권의 두 번째 임기 말이었습니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던 시기라 나름대로 나라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1986년 6월 6월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권인숙이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하여 조사 과정에서 수사관이 권인숙을 뒷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학생 성기에 본인의 성기를 갖다대는 성추행을 자행하고서도 언론 조작을 통하여 급진 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출자로 몰아갔고, 결국 징역 1년 6개월이라는 실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반면 파렴치한 수사관은 무협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1987년 1월 14일,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였고, 대한민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캠퍼스는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혼란스런 캠퍼스 분위기로 인하여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불교 서적을 읽으며 증산도라는 신흥종교를 찾아가 주문을 외우며 도를 닦기도 하였습니다.
학교는 휴강이 잦았고, 그러다가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총장실 점거도 하고,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아~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만 답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