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경 위에 있는 세상의 빛
2024. 2. 11(주일낮예배) 마태복음 5:14-16
여러분은 자랑할 것이 많은가?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가 쓴 웃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2세 때는 똥오줌 가리는 게 자랑거리, 3세 때는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 12세 때는 친구가 있다는 게 자랑거리, 18세 때는 자동차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2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
그런데 50세가 되면 자랑거리는 어릴 때 자랑거리와 대칭을 이룬다.
50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 6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0세 때는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있다는 게 자랑거리, 80세 때는 이가 남아있다는 게 자랑거리, 85세 때는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그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결국 인생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똥, 오줌 가리는 것 배워서 자랑스러워하다가 사는 날 동안 똥오줌 내 손으로 가리는 것으로 마감한다고 정의한다. 결국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자랑거리고 삼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랑거리가 없으면 삶이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침을 튀겨가며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눈에 생기가 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아들이 없고, 자녀들에게 받는 용돈이 없으면 삶에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은 눈에 생기가 없다. 그래서 내가 뭐하며 살았는가? 하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여 인생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온다. 여러분도 잘 아는 것처럼 부자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자는 매일 잔치를 열어서 인생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자색옷은 왕이나 높은 고위관직에 입는 사람이 입었던 비싼 옷이다. 그리고 고운 베옷은 당시 금보다 더 비쌌다고 한다. 부자는 최고급 옷을 입고, 늘 잔치를 열어서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또 즐기는 인생최고의 삶을 살았다던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는데, 몸에는 헌데를 앓았고 개가 와서 그 헌데를 핧았다고 한다.
이 말은 인생 최고의 비참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극심한 고통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①나사로가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눅 16:24)라고 아브라함을 부르는 ②부자가 음부에 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언약의 백성인데, 부자가 음부에 갔다는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왜 음부에 갔을까? 하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천국가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왜 했을까?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만약에~ 라는 가정으로 말씀하신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최고의 연락을 즐기다가 음부에서 고통하는 사람이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최악의 가난으로 힘겹게 살다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의 더 큰 도우심을 받았는가?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에 누가 하나님의 더 큰 도우심을 받았는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돈 많이 가지고, 또 값진 옷을 입고, 연락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도우심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참된 안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은 내게 아브라함의 품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도의 자랑이 아닌가? 오늘은 명절을 보내고 피곤한 여러분께 피로회복을 위한 아재개그를 하겠다. 질문에 맞추어 보시기 바란다.
추장보다 높은 것은 고추장이다. 그러면 고추장보다 더 높은 것은? 초고추장
초고추장보다 더 높은 것은? 태양초 고추장
소는 영어로 카우이다. 소가 죽으면 무엇인가? 다이소
아몬드가 죽으면 무엇인가? 다이아몬드
사슴은 영어로 디어(deer)이다. 눈이 좋은 사슴은? 굳 아이 디어
여러분 중에 목사님의 설교에 협조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을 내어 주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가 잘 맞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을 것이다. 결국 자기자랑을 위하여 우리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이 자랑을 위한 삶이 아니었는가? 스토로맨 박사는 교회를 다니는 7천명의 청년을 대상으로 믿음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설문조사의 문제 중에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청년들 60%는 선행을 해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스토로맨 박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어느 정도로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그 질문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70%나 되었다.
정말 대단한 청년들이 아닌가? 설문의 결과를 보면 아마 신앙에 열심을 내는 청년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들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느껴서 더 큰 열심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옳은 신앙의 모습인가? 저는 아기가 예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기가 예쁘게 보였다. 그래서 그 아기가 공공장소에서 떼를 쓰고 우는 것을 보면서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다. 아니 엘리베이트에서 아기를 만나면 꼭 인사를 먼저 한다. 그러면 어떤 아기는 방긋이 웃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아기는 아저씨가 낯설어서 고개를 뒤로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방긋 웃어주는 아기도 예쁘고, 또 고개를 뒤로 돌리는 아기도 귀엽다. 아기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기라서 귀엽고 예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이와 같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택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웃어도 예쁘고, 울어도 예쁘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뭔가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안타까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이다. 예수님은 천국백성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오늘 본문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가르치는 부분이다.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창세기 1장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질서를 만들어 가신 것이다. 그랬던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라고 말씀하신다. 그 예수님은 죄악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빛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놀랍지 않는가? 이제 본문을 읽기 바란다.
(마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된 우리에는 말 아래가 아니라, 등경위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 땅을 새롭게 하는 그 빛된 우리는 그릇 안에 담겨져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빛된 우리는 등경 위에 놓여서 집 안의 모든 사람에게 비쳐져야 하는 것이다. 아니 빛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서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하는 그 새로움을 창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러한 등경 위에 놓여진 우리는 내가 예수님 믿어서 부요하게 되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비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천국백성이 되었고, 무엇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 기쁨을 얼굴과 삶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빛은 얼마나 멀리 비쳐지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초대 예루살렘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 중에 많은 분은 초대예루살렘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이 있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또 헌금을 할 때 생색을 낸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아니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과부가 구제에 빠진다는 불평이 있었다. 교회가 헬라파가 있었고, 히브리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엄청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지금 우리가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려 노력하였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가려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 세상의 빛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빛이란 말은 아무 문제가 없고, 풍족함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렇게 노력하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회다니는 사람의 삶은 참 특이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멋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백성된 저와 여러분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세상의 빛된 역할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