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목사님, 강순명 목사님, 이현필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몇 개 올렸습니다.
위험한, 그러나 아름다운 최초의 몸짓
‘마지막 성자’ 오방 최흥종
문순태(소설가)
나는 두 번에 걸쳐 오방 최흥종 목사의 일대기를 썼다. 1970년 《영원한 자유인》에 이어 2000년에는 자료를 보완하여 실록소설 《성자의 지팡이》를 세상에 내 놓았다.
그는 선각자인가 성자인가. 《영원한 자유인》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선각자로 보였다. 그러나 《성자의 지팡이》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그의 삶을 보다 가까이 들여다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선각자가 역사를 관통하는 자라면 성자는 역사조차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닐까 한다.
광주 최초의 기독교 신자, 최초의 목사, 최초의 빈민구제운동가…
오방 최흥종 목사에게는 광주지역 최초의 기독교신자, 최초의 장로, 최초의 목사. 최초의 러시아 파견 선교사, 최초의 구라(求癩)운동가, 최초의 빈민구제운동가, 최초의 거세수술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있다.
최초의 몸짓은 위험이 따르긴 해도 아름답다. 이처럼 인간적인 삶을 위한 최초의 몸짓으로 보아서는 역사를 관통하는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현실과 역사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영원한 자유인’ 이야말로 그의 총체적 삶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 것 같다. 그렇다고 그의 자유로움은 무질서와 무책임, 방종과 방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보다 불행한 이웃을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해체시키고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의 자유로움은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만년에 성자의 삶을 살았다. 이 때문에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심을 갖고 ‘성자’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최흥종 목사는 1880년 광주시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란 그는 젊은 시절 싸움꾼 ‘최망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뚤어진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가 25세인 1904년 겨울,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벨(E Bell) 가족이 광주 양림동에 들어왔을 때, 친구 최재익과 함께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우연하게 벨 선교사집에 놀러간 것을 인연으로, 광주에서 첫 교인이 되었다. 그 후 한 때 대한제국의 광주 경무청 순검으로 지내기도 했는데, 화순에서 일본군 몰래 체포된 의병 12명을 풀어주었고 곧 순검을 그만두었다.
피고름 묻은 지팡이를 손으로 집다
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09년 4월 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광주에 와 있던 선교사 오웬(C C Owen)이 지방으로 전도를 나갔다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고, 목포에 있던 의사 포사이드가 이 소식을 듣고 오웬을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오게 되었다.
이때 최흥종이 포사이드를 맞으러 영산포 나루까지 가게 되었다. 영산포 나루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광주로 오던 포사이드는 효천 금당산 자락에서 나병에 걸려 집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포사이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 여인에게 입혀준 후 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견마잡이가 되어 나귀를 끌었다.
이때 여인이 길바닥에 지팡이를 떨어뜨렸고 이것을 본 포사이드가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여인에게 집어주라고 했다. 최흥종은 망설였다. 여인의 피고름이 묻은 그 지팡이를 손으로 집었다가는 자신에게 병이 옮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사이드는 빨리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재촉했다. 이 때 최흥종은 생각했다. 피가 다른 외국 사람도 자기가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주고 스스로 여인을 안아서 자신이 타고 온 나귀에 태웠는데, 같은 동포인 내가 지팡이 하나쯤 집어주지 않는다면 외국인 앞에서 무슨 망신인가 싶었다. 그는 병이 옮기는 한이 있어도 그런 망신을 사고 싶지는 않아서 지팡이를 집어서 나귀에 타고 있는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포사이드는 여인을 선교사촌에 데리고 가서 가족처럼 지극한 사랑으로 보호해 주었다. 나환자 여인은 끝내 죽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예수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날마다 선교사촌에 나갔으며 참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고 나환자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광주에서는 양림동 선교사촌에서 나환자를 보호하고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의 나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선교사들은 양림동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하여 환자들을 임시 수용하였다.
500명 나환자들과 서울까지 15일간 행진
1912년 최흥종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봉선동 땅 1000 평에 요양원을 만들었다. 그는 윌슨의사로부터 4년 동안 지도받은 의료기술로 나환자 치료에 전념한다. 이것이 한국최초의 나환자 전문병원 ‘광주 나병원’의 출발인 셈이다.
이 무렵 최흥종은 정신적 반려자인 독일 간호사 서서평(E J Shepping 1880∼1934)을 만난다. 1912년 광주에 와서 제중병원 간호사 일을 하게 된 서서평은 거리에서 나환자나 거지를 만나면 집에 데리고 와서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음식을 먹여주며 보살폈다. 옥양목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입고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은 그녀의 희생적인 삶은 최흥종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최흥종은 걸인들을 모아 경양방죽 옆에 걸인촌을 만들어 밥을 해 먹이는가 하면, 거리를 방황하는 나환자들을 수용하여 돌봤다. 그러자 전국의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오게 되었으며 광주시민들로부터 “광주를 나병환자 소굴로 만들 셈이냐”는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 하는 수 없이 광주 나병원을 율촌으로 옮겼다. 지금의 여수 애향원이 그곳이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는 계속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왔다. 최흥종은 이들을 수용할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만들고 총독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나환자들의 집단상경 행진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최흥종은 500여 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15일 동안 걸어서 서울까지 행진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1932년의 ‘나환자 대행진 사건’이다. 그들은 총독부로 몰려가 우까끼 총독을 만나 나환자 갱생시설 확충을 약속받았다.
본인의 ‘사망통고서’를 주위 사람들한테 발송
이 때가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는 이미 1912년에 북문안교회의 첫 장로가 되었고, 1914년 평양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 3·1만세사건에 연루되어 1년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가을에는 광주 YMCA 창설을 위해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21년에는 광주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중앙교회(당시 북문밖교회) 초대 목사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그는 최초로 광주부인회를 결성케 하는가 하면 노동공제회 전남지회를 결성,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1922년에는 광주에서 최초로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며 1년 후에 귀국해서는 처음으로 소작법개정운동을 전개했다. 26년에는 광주의 여러 직종의 노동조합을 망라하여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포용하여 노동조합연합회를 결성했다.
1934년, 55세 때 최흥종은 비로소 완전한 자유인의 길을 선택한다. 이 때부터 그는 성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정신적 반려자였던 서서평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35년 그는 세브란스 병원의 오긍선 박사를 찾아가 거세 수술을 받고 내려왔으며 3월17일에는 스스로 본인의 사망통고서를 주위 사람들한테 발송했다.
“1935년 3월17일 이후,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아 최흥종은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방만자,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放逸者),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 국가에 대하여 방기자,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 소위 ‘오방(五放)’을 제창하면서도 명실히 불합한 가면극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사(世事)에 간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손수레 ‘유산각’에서 걸인들과 생활
육적 인간의 죽음을 선포한 후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집을 나온 그는 사방을 판자로 막은 손수레를 만들어 ‘유산각’이라 이름 붙여 끌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도 나주 산포에 음성나환자 자활촌 ‘호혜원’을 설립하고 증심사 입구에 빈민자활촌 ‘삼애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원효사 골짜기에 결핵환자 요양촌 ‘무등원’을, 지산동 골짜기에 ‘송등원’을 세웠다. 그 자신도 무등원 안에 ‘복음당’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결핵환자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1966년 2월10일 최흥종은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면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90일 만에 장남이 경영하는 시내 ‘오두막’으로 옮겨졌으며 닷새 후인 1966년 5월14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내게는 아직도 오방 선생님의 장례식 장면이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5월18일, 무등산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햇살이 눈부신 늦봄의 광주공원. 햇병아리 기자인 나는 오방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광주시 사회장으로 엄수된 장례식장에는 광주 인근에서 몰려온 걸인들,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들, 나주 호혜원과 여수 애향원에서 온 음성나환자 등 수백 명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비로소 광주 시민들도 성자를 잃은 큰 슬픔에 잠겼다.
보통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최초의 몸짓. 그를 성자로 만든 것은 인간적인 진실된 행동이었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성자였다.
문순태 <소설가·광주대 교수>
▲ 1935년 본인의 사망통고서를 발송한 최흥종 목사는 무등산 오방정에 은거하며 누더기를
걸치고 걸인처럼 살아가며 교회의 혁신을 부르짖었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사를 참배하고
창씨개명을 하고 교회의 종까지 떼어다가 바치고, 출전 장병들의 무운을 빌고 묵념하는
추태에 매서운 채찍을 들기도 하였다. 오방정은 1986년 의재 허백련이 고쳐 지어 춘설헌이라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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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성가 최흥종
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다. 특히 현대적 영성보다는 기독교의 원천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선교대학원에서도 영성의 대가 중 한사람을 연구하기도 했다.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그런 쪽에 관심은 늘 떠나지를 않았다. 최근에는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을 받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하는 토저 목사에 대한 전기서를 읽으면서 정말 흠모하고픈 영성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의 영성가를 버금가는 훌륭한 영성가들이 있다.비록 그들의 삶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부도, 명예도 없이 살다가 죽었지만 그들의 삶의 체취가 후대에 남긴 것들을 읽노라면 참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이세종,이현필,유영모,이승훈,강순명 등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한 사람이 최흥종이다. 나는 그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마음이 짠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아, 저들은 저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버리고 오로지 한분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갔는데,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너무 군더더기 같은 것을 더욱더 덧입고 살아가는 모습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최흥종목사는 원래 젊은 시절은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 잡이였다. 그런 그는 마음을 잡고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의사의 조수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의사 포사이트가 목포에서 광주로 오게 되었다. 그때 선교의사 포사이트를 마중 나가 환자를 태우고 가던 중 환자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를 놓쳤다. 그러자 지팡이를 집어주라고 하자, 최흥종은 피고름이 묻은 지팡이를 잡을 엄두를 못 내고 괴로워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지팡이를 집어 들어 나환자에게 건네주자 다 문드러진 환자의 얼굴에서 작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순간 최흥종은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 작은 예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땅 천 평에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3.1운동의 주동자로 1년4개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주지역 초기 교회를 이끌어 광주를 기독교메카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하자 1935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해버린 뒤, 스스로 명예욕,물질욕,성욕,식욕,종교적 독선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뜻으로 오방(五放)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리고 오방 정을 무등산 속에 지어 홀로 살았다. 해방 뒤 김구선생이 오방 정에 일주일을 머물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고 호소했으나 끝내 거부했다. 그러자 김구는 화광동진(和光同塵)(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함)이라며 그를 칭송하는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 그가 죽었을 때, 수백 명의 나환자들이 그의 관 뒤를 따르며“아버지 저희들은 이제 어찌합니까”라고 뒹굴며 울었다. 소설 [성자의 지팡이]를 쓴 소설가 문순태는 오방을 “우리시대의 마지막 성자”라고 불렀다.
오늘의 우리는 말만 무성하다.“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3)주님이 가장 책망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의 특징이 말만 하고 이다. 영성은 말만 하고 가 아니다. 말 보다는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깨달은 대로 사는 것이다. 다시금 최흥종목사가 그립다.
고병국 목사(한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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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崔興琮)은 1880년 광주 불로동에서 태어난 광주 토박이로서 구한 말에 순검(巡檢)을 하다가 김윤수씨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한 분인데, 북문안교회에서 김윤수 장로와 함께 초대 장로로 장립되어 선교 활동에 힘썼다.
그는 3 · 1운동에 가담하여 3년형을 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년만에 출옥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북문밖교회(중앙교회)의 초대, 및 제 3대 목사와 광주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 제 5대 목사를 역임하였고 시베리아(블라디보스톡) 선교사로도 일하였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뿐아니라 나환자를 위한 기독교 사회운동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젊은시절에 불량배로 유명했던 최흥종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된 사람으로서 뒤에 많은 일을 하였다. 먼저 1908년 놀란(Dr. J. W. Nolan) 의사의 후임으로 광주제중병원 원장에 취임한 윌슨(Robert M. Wilson, M. D.) 선교사가 나병원을 세우자 최흥종은 그 일을 거들게 되었다.
광주에서 첫 세례교인 김윤수와 최흥종은 많은 교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1912년
광주 북문안교회에서는 최초로 장로 장립을 받게 되었다
최흥종 장로는 장로회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고 1917년부터는 북문밖교회의 전신인 기도처의 전도사 일을 맡아 보다가 1921년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북문밖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특히 오방(五放) 최홍종 목사는 1920년 7월 28일에 광주 YMCA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청소년 운동에 앞장서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3․1운동 때에는 독립 투사로 3년형을 받고 복역 중감형되어 1년만에 출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베리아 선교를 자청하여 두 번이나 북풍이 휘몰아치는 그 험한 곳에 다녀 왔다. 또한 그의 생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의 냉대와 버림속에 사는 나환자들의 자활 운동에 헌신 봉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신앙으로 다른 사람, 곧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일로 일관된 인도주의적인 생애를 보냈다. 그리하여 교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분이 된 것이다. 1949년에는 무등산 증심사 부근에 의제 허백련(許百鍊) 선생과 함께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하여 하나님과 나라와 땅을 사랑하는 농민 지도자를 양성하였고, 1956년에는 부랑하던 나환자들을 모아 나주에 호혜원(互惠園)이라는 자활촌을 건설하였으며, 무의탁 폐결핵환자들을 수용하는 송등원(松燈園)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1951년에는 한국 사회사업협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62년에는 국민훈장을 받았다. 1964년 은퇴한 후 1966년 5월 14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5월 18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최흥종 목사의 후손으로는 2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 최득은(崔得恩)씨는 광주에서 사업을 하였으나 별세하였고, 장손 최 협(崔 協)은 전남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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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헌신의 독신전도단 운동가 강순명
글: 이덕주 교수
http://www.kch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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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전도단이었던 ‘독신전도단’을 창설한 강순명(姜順明)은 1898년 3월 24일 광주 방림동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모태신앙으로 출생한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가난에서 출발했다. 아홉 살 때 부친이 별세한 후 어머니와 형(강태성, 후에 광주중앙교회 장로)과 함께 ‘살 길을 찾으러’ 목포로 갔으나 고생만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숭일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보통과를 졸업했는데 그 해 '믿음 좋은’ 어머니마저 별세하였다. 이 때부터 긴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형이 차려준 이발소를 운영하였으나 돈 벌 생각은 없었다. 주먹 싸움도 종종 벌였는데 ‘박치기 명수’로 이름을 날린 것도 이 때 일이다.
그러다 1918년 10월, 광주 최초 교인으로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장로였던 최흥종의 딸(최숙이)과 결혼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때 장인은 평양신학교 재학 중이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직접 서울에 올라가 남대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르고 내려왔다. 장인은 1921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당회장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광주가 낳은 ‘성인’(聖人) 목회자로 이름을 남겼다. 강순명이 이런 장인에게 신앙적 지도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회심과 전도 소명
강순명은 1921년 3월 이발소를 처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9월 유명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인한 두려움도 컸지만 지진 직후 조선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일본 자경단의 만행이 더욱 두려웠다. 그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이 5천 명이 넘었다. 그도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 몰려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내게 사흘만 더 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죽겠습니다. 주 예수님, 사흘만! 사흘만!”
살육의 광풍이 몰아치는 공원에서 강순명은 난생 처음 뜨겁고도 깊은 기도를 드렸다.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다. 긴 기도 후 평안이 찾아왔다.
“나의 일생은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리라.”
강순명이 중생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강순명은 우에노공원 회심 체험 1년 후인 1924년 7월 귀국했다. 그 무렵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가 에비슨(Douglas W. Avison)이 광주에 내려와 농촌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그는 에비슨의 서기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농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이 때 비로소 그는 농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제의 농지 수탈정책으로 농촌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선교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농촌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경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였다. 강순명의 기도 시간이 늘어났고 이 무렵부터 그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강순명은 혼자 텅 빈 교회당에 들어가 밤을 새웠고 눈물의 열도(熱禱)로 제단을 적시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거리에서 거지를 보면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지만 털어주었고 헐벗은 이를 만나면 단벌옷을 아끼지 않았다. 고아를 보면 업어왔고 병자를 보면 목을 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 그는 가끔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눈물을 흘리며 한숨과 함께 ‘주님!’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때로는 폐병환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며 외로운 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해 주기도 했다. 나환자를 만나면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는 마침내 뜻을 정하고 집을 나섰다.”1)<1) 윤남하, 《믿음으로 살다 간 강순명 목사 소전》, 호남문화사, 1983, 74-75쪽.>
그는 유명하다는 명사들을 찾아 나섰다.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었다. 윤치호, 백낙준, 김활란, 노정일, 신흥우, 현동완, 김창제, 조만식 등 유명하다는 인사들은 모두 만났고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금강산 ‘은둔 수도자’ 김성실도 만났다. 그런데 1928년 여름 금강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를 만났다. 삼일운동 때 옥고를 치른바 있는 배은희 목사 역시 농촌 현실 문제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상 문제로 고민하다가 신경쇠약증세를 보여 요양차 금강산에 들어와 강순명을 만났다. 자살을 시도한 배은희의 목숨을 구한 것을 계기로 둘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신앙으로 농촌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독신전도단이다.
독신전도단 운동
금강산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배은희 목사와 강순명은 동지들을 구했다. 전주서문교회 장로 신현창, 유상백, 김병수와 강봉의, 박노수, 김종흡 등이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1928년 7월 다음과 같은 독신전도단 강령을 발표하며 단원을 모집하였다.
“1) 인류는 다 유물(唯物)의 길을 밟는다. 우리는 신국운동(神國運動)을 기(期)함
2) 시대는 예수 재림의 불원(不遠)을 고한다. 우리는 복음선전(福音宣傳)을 촉진함
3) 경제는 교역(敎役)의 현제(現制)를 위협한다. 우리는 가족책임(家族責任)을 초월함.”2)<《기독신보》, 1928.8.1.>
독신전도단은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과 마태복음 9장 12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삼았다. 복음 전도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헌신을 목적하였다.
강순명은 일본 유학 시절 알게 된 일본의 빈민 전도자 가가와(賀川豊彦)의 저서, 《가난한 자의 눈물》,《농민운동의 실제》,《노동운동사》,《한 알의 밀》등을 읽으면서 터득한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정신을 농촌 현장에서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즉 초대교회와 같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농촌에서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개인)을 희생하여 농촌(사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할 전도자들이 필요했다.
독신전도단원은 적어도 3년간 가정생활(성생활 포함)을 피하고 독신으로 농촌에 들어가 주간과 야간에 부녀자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전도자로 설교하고, 마을 단위로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농촌 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며, 기초 상비약을 준비하여 환자 치료까지 할 수 있어야 했다. 독신전도단에 지원한 남녀 청년 10여 명은 익산 옛뚝이부락에 있는 훈련원에 들어가 사관학교식으로 6개월 훈련을 받은 후 전북 익산, 전남 광산 등지로 파송받아 농촌 사업과 복음 전도에 헌신하였다. 강순명 자신도 제주도 모슬포교회로 가 독신전도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독신전도단원들의 열심과 헌신의 결과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보수도 받지 않고 어려운 농촌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했다. 그러나 전도단의 성공은 다른 곳에서 탄압과 시기를 불러왔다.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한 일제 경찰당국이 노골적으로 독신전도단 활동을 방해하였고 독신전도단에 대한 교인과 지역 주민들의 호평에 위기감을 느낀 기성 교회 목사들의 비난도 점증했다. 1931년 접어들어 독신전도단원들이 제일 많이 활동하고 있던 전북노회에서 독신전도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은희 목사는 이단 시비의 원인이 되는 ‘독신’이라는 단어를 빼고 ‘복음전도단’이란 명칭으로 내용을 바꾸어 계속하려 하였으나 강순명은 ‘독신’을 고집하였다. 결국 둘은 갈라섰다. 그러나 복음전도단도, 독신전도단도 오래 가지 못했다.
호남 영맥의 한 줄기
독신전도단 해산과 함께 모슬포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온 강순명은 다시 에비슨과 함께 1932년 광주농업실수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사업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훗날 ‘해남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이준묵 목사와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동광원 창설자 이현필이 이 때 실업학교 학생으로 들어왔다. 강순명은 이 무렵 오랜 독수도 끝에 성경 말씀에 통달하여 금욕과 청빈, 무욕의 도를 실천하고 있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역시 이세종과 같은 수준의 금욕적이고 청빈한 수도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장인 최흥종 목사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세종-최흥종-강순명-이현필-이준묵으로 이어지는 ‘호남 영맥(靈脈)’이 형성된 것이다.
이미 도쿄에서 귀국한 1924년 이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해 온 강순명은 청빈의 삶으로 일관했다. 처음부터 그에겐 집이 없었다.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형이 보다 못해 17평짜리 집을 한 채 지어주어 그의 가족 여섯 식구가 비로소 자기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광주에 들어온 성결교회가 예배당 신축을 위해 이성봉 전도사를 데려다 부흥회를 하였는데 강순명이 그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그 집을 건축 헌금으로 바쳐 그의 가족은 다시 셋방으로 나앉게 되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 무렵 광주에는 불신자들까지 “예수를 믿으려면 강순명처럼 믿어라.”는 말이 돌았다.
강순명은 처음엔 ‘평신도 전도인’으로 끝내려 하였지만 에비슨의 권고로 목회자가 되기로 하고 1934년 감리교 계통인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옮기면서 그 곳에서 1년 밖에 공부하지 못했지만 진보적 신학자 정경옥 교수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졸업반 때 평양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결국 그는 통신과로 한 학기 수업을 마친 후 졸업장을 받고 1938년 11월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남평교회, 전북 금암교회, 용강 온천교회 등지에서 목회했으나 시국 상황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1월 목사직을 사임한 후 서울로 올라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숨어 예배드리는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해방을 기다렸다.
연경원 설립
해방 직후 강순명 목사는 대대적인 구령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전도자 양성에 착수하였다. 북아현동(후에 원효로로 이전)에 적산 한 채를 얻어 ‘연경원’(硏經院)이란 간판을 걸고 주로 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일종의 신학교였다. 학교 운영은 독신전도단과 농업실수학교 방식으로 혹독했다.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수였던 윤필성 목사를 비롯하여 복음교회 윤치병 목사, 장로교회 오종덕 목사, 음악가 이남철, 조선신학원 학생 차남진 등을 교수진으로 하였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20명이던 학생이 2년 만에 120명으로 늘었다. 그러다보니 연경원 출신들의 목사 안수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이 문제로 강순명 목사는 그 때까지 소속해 있던 장로교 군산노회로부터 “사사로이 안수하여 교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하였다. 강순명 목사는 담담하게 군산노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후 강순명 목사는 동석기 목사의 권유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소속을 옮겨 원효로교회, 부산교회, 광주교회를 담임하였고 1952년 광주 천혜경로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5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신촌 언덕에 토굴을 파고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만들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광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1959년 3월 12일 별세하였다.
평생 가난과 함께 하며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했던 전도자, 그러했기에 소유와 명예, 교리나 신조, 제도와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독신’ 전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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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와중 전라도 광주에서 강순명(1898~1959·왼쪽 사진) 목사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구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 첫 집에선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왔던 사내가 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 버렸다.
두번째 집도, 세번째 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힘들게 끌며 골목을 다 다녀도 보리쌀 한줌도 얻지 못한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본 강 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하루하루 죽으로 연명하며, 방 두 칸에 대식구가 겨우 살아가는 비좁은 집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광주천 다리 밑을 지나다가도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죽어가던 할머니를 두고 돌아설 수 없던 강 목사는 또다른 할머니를 업고 와 집 안방에 누였다.
그렇게 집에 데려온 사람이 무려 30여명.
강 목사가 전쟁 중 데려온 걸인 할머니 때문에 강 목사 가족들은 방안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어 한뎃잠을 자야 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천혜경로원의 시작이었다. 1952년 7월이었다.
광주시 동구 학동 천혜경로원에 들어가 70여명의 할머니들을 보니 자식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어 양로원에 들어와 살아가는 노인들은 불쌍하다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정갈한 외모에 밝은 미소들이 경로원 전체를 빛으로 감싸는 듯하다.
‘오늘이 바로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여기고 여한이 남지 않게 모시려 한다’는 강은수(65) 원장은 강 목사의 아들이다.
강순명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으나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세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청년기를 방황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광주의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치던 ‘박치기 명수’였다.
형 태성의 눈물 어린 호소로 순명은 마침내 교회를 나가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소를 차려 새 출발을 했다. ‘
돌아온 탕아’였다. 그는 그해 수피아여고를 나온 재원 최숙이와 결혼했다.
‘광주의 대부’ 오방 최흥종 목사의 장녀였다.
대인은 대인의 싹을 알아본 것일까.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의사의 청혼을 거절하고, 부모도 없이 뒷골목이나 누비던 이발사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기가 막혀 했지만 최흥종 목사는 보물을 얻은 듯 만족해했다.
순명은 이듬해 만학도가 되어 일본에 유학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살림은 아내가 일본 유학생들의 밥을 해주어 근근이 이어갔다.
일본에서 2년째. 도쿄대지진이 일어났다.
이틀 만에 도쿄 인구 300만명 가운데 16만여명이 죽고,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분노의 화살을 ‘조선인’에게로 돌렸다. ‘
조센징들이 혼란한 틈에 도둑질을 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인들은 미친개처럼 조선인을 찾아 닥치는 대로 칼로 베고 찔러 죽였다.
도쿄에서 그렇게 학살당한 조선인이 무려 5천명이 넘었다.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한 순명은 눈물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지은 죄를 조금도 씻지 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청산하도록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눈물의 기도였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그치자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왔다.
그는 그 때 여생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회심 1년 뒤 귀국한 순명은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들어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독신전도단은 청년들이 3년간 시간을 내 홀로 농촌에 들어가 헌신하며 주간엔 일하고, 저녁이면 부녀자와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교회에 봉사하는 삶으로 농촌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독신전도단은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해 농촌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는가 하면, 늘 기초 상비약을 준비해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때 독신전도단으로 그를 따라나섰던 이들이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등이다.
순명은 그때부터 병에 걸려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폐병환자와 나환자를 업어다가 돌보았다.
그는 언제나 말보다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했다.
첫부인이 결혼 17년 만에 6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평양여자신학생 장신애는 처녀의 몸으로 고아원에 들어간 셈 치고 순명의 삶에 동참했다.
바로 강은수 원장의 어머니다.
강순명 목사는 해방 뒤 서울에서 연경원을 만들어 기독교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직접 골목길을 누비며 남의 아궁이를 고쳐주고 쌀을 얻어와 청년들을 먹여살렸다.
그러나 그가 거둬주었던 한 집사가 소유권 등기를 해놓지 않은 것을 알고 연경원을 자신의 소유로 해버렸다.
주위에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이를 갈았으나, 그는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한다”며 두말없이 한강 다리 밑으로 떠났다.
그는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서나 그만의 장점을 발견해내 칭송하곤 했다.
그리고 “남을 성자로 보는 자가 바로 성자이며, 남을 마귀로 보는 자가 바로 마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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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명 목사
6,25전쟁 와중에 강순명(1898~1959) 목사는 광주에서 지팡이를 짚고 구걸하는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첫 번째 집에선 나왔던 사내가 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 버렸다. 두 번째 집도, 세 번째 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힘들게 끌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도 보리쌀 한줌을 얻지 못한 할머니가 눈물 훔치는 것을 본 강 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 집에 모셔갔다. 하루하루 죽으로 연명하며, 방 두 칸에 대식구가 살아가는 비좁은 집에 식구 하나가 더 늘었다. 광주천 다리 밑을 지날 때는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죽어가는 할머니를 두고 돌아설 수 없어서 할머니를 업고 와 집 안방에 누였다. 그렇게 집에 데려온 노인이 무려 30여명. 강 목사 가족들은 방안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어 한뎃잠을 자야 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천혜경로원의 시작이었다. 1952년 7월이었다.
강순명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으나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세 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청년기를 방황으로 보냈다. 그는 광주뒷골목에서 유명세를 타던 박치기 명수였다. 그러나 형(태성)의 눈물의 기도로 마침내 교회로 돌아왔고, 이발 기술을 배워 새 출발했다. 그해에 수피아여고를 나온 최숙이와 결혼했다. 최숙이는 광주의 대부 오방 최흥종 목사의 장녀였다. 일본유학을 다녀온 의사의 청혼까지 거절하고, 부모도 없이 뒷골목이나 누비던 이발사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식구들은 기가 막혔지만 최흥종 목사는 보물을 얻은 듯했다. 순명은 이듬해 일본에 유학했고, 아내는 일본 유학생들의 밥을 해주어 근근이 살아갔다. 일본생활 2년째, 도쿄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까지 풀었다는 유언비어에 조선인 5천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우에노 공원으로 피신한 강순명은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지은 죄를 조금도 씻지 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청산하도록 시간을 주십시오!” 폭포수 같은 눈물이 그치자 초월의 평화가 밀려왔다. 그는 그 때 여생을 주님께만 바치기로 결심했다.
귀국한 강순명은 YMCA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와 함께, 청년 홀로 3년간 농촌에 가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독신전도단을 조직해서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봉사를 전개한 것이다. 독신전도단은 농촌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했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초대교회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때 독신전도단으로 그를 따랐던 사람들 중에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등이 있다. 순명은 그때부터 병에 걸려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폐병환자와 나환자를 업어다가 돌보았고, 언제나 말보다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했다. 첫 부인이 결혼 17년 만에 6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평양여자신학생 장신애는 처녀의 몸으로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순명의 삶에 참여했다. 강순명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남을 성자로 보는 자가 성자이며 남을 마귀로 보는 자가 마귀라고 가르쳤다. 그가 끼친 기독교적 감화는 말할 수 없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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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명(1898.3.24-1959.3.12) 목사
강순명 목사는 광주군 효천면 방림리(현 광주직할시 서구 방림동)에서 자라 광주 숭일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최숙이 사모와 1918년 3월에 결혼하였다.
광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정치중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엄청난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하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1928년 여름, 섬기던 배은희 목사가 몸이 쇠약하여 금강산으로 휴양을 떠날 때에 동행하였다. 금강산 구룡폭포에 이르러 배은희 목사가 말하기를, 눈에 떠오르는 것은 교회의 싸움과 사회의 혼란, 농민들의 참상과 민족의 절망뿐이니 자신이 살아 있다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강군, 나는 여기 이 절벽에서 떨져 죽어야 하겠오. 강군이 산을 나서면 또 다시 예수님이 옳으니 잘못이니 하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겠지." 하면서 폭포 속으로 몸을 날려 물속에 뛰어들었다. 이에 강순명은 옷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배은회 목사를 구출해 낸 일도 있었다.
1930년 독신전도단을 창단하여 1931년 5월 29일 제주도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여 전도하다가 1933년 광주농업실습학교를 만들었고, 1934년 3월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평양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9월 20일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지만, 강순명은 그 해 11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강순명은 군산노회 금암교회에 부임하였다가 1942년 전도여행 중에 4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에 연경원을 설립하였고, 1946년에는 남정국연학교에서 김구 선생이 자축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에 동석기 목사와 성락소 목사를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환원 후 원효로 2가 원효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다가 6.25가 터지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삼각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수복 후 10월경에 상경하여 수라장이 된 교회를 정리하고 예배를 드렸다. 1-2주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모여들었고, 10월 27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1-12월의 워낙 추운 날씨 탓에 꼼짝도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지내려고 떡을 하기 위해 찹쌀을 담가 놓았는데, 정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떡쌀로 찰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12월 24일 영등포역에 나와 이틀 저녁을 기다리다가 뚜껑 없는 곡간 차를 얻어 타고 천신만고 끝에 이리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3일간 쉬고 형님 집으로 가서 그 해를 넘기고 1951년 1월 7일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 교단 총무로부터 목회 할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장성만 목사 집에서 모이던 대교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다가 용두산 언덕으로 예배처를 옮기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에는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였다. 광주에서 걸인과 노인 그리고 고아들을 집에 데려다 돌본 사람이 30명이었고, 사동다리를 지나다 움막에서 중풍에 걸린 여인을 발견하여 병을 치료해주다 장례까지 치르다 보니 광주 학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120명 수용능력의 양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5년 5월에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신촌토굴에서 개설하였으나 과로로 쓰러져 1959년 3월 12일 소천하였다. 현재는 그의 가족이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강순명 목사의 유명한 설교는 "기도만능"(막 9:14-29)이고, 장기는 엄지손가락에 막대기 붙이기, 원숭이 놀이, 자전거 뒤로 타기, 시조에 미친 창평노인 흉내내기, 이발기술, 박치기, 겨드랑 밑에서 총소리 내기, 임기웅변의 재주, 코끝에 막대기 세우고 그 끝에 독아지 올려놓기, 땅 짚고 재주넘기, 수영 등이다.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은 "나의 갈길 다 가도록"과 "주안에 있는 나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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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李鉉弼, 호:방림, 1913 - 1964)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 벗고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금욕, 청빈, 순결을 몸소 실천한 선생은 동광원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예수를 닮으려는 그의 열성은 철저하고 진실했다.
이현필(李鉉弼, 호적에는 李鉉鼎으로 되어 있음)선생은 1913년 1월 28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나주군 영산포나 남평에서도 산을 타고 30여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으며 주변에 화학산과 천태산(혹 개천산)이 있다. 아버지 이승노(李承老),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 3남매가 출생했는데, 현필은 어머니 나이 27세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다. 막내로 자라서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꼿꼿한 성격은 부친을 닮았고, 인정이 많고 따뜻한 점은 효자댁 출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전 학력이다. 그후 현필은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많은 책을 읽고 사상이 깊어 그 실력이 대학교수와 논쟁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어 다도면 면서기(茶道面 面書記) 시험에 응시하여 형과 함께 합격했으나 형만 서기로 다니고(후에 다도면장까지 지냄) 이현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기로 봉직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은 싹뿌리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제자들이 이를 ‘뿌리고 싹 났으니’ 혹은 ‘예수를 안 후는 싹 버렸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생은 자칭 ‘헌신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일생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이현필의 집은 예수를 믿기 전에 넉넉히 살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살던 집도 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너무도 가난하게 살아 그는 돈을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옛집을 다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 읍에서 닭장사를 하러 다녔다. 당시 영산포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담임목사는 관파라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구제도 많이 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다. 이현필은 그를 만나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가 13세였을 때였다(1925년). 그의 나이 17세 때 서울 기독 청년학관(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제가 평생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21세때(1933년)에는 전남 광주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었고,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현필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도 하였다.
이현필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만난 등광리의 이공(李空, 이세종)선생이었다. 이곳은 용하리에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마을로 이공의 고향이다. 방산교회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어도 이현필은 그냥 계속 다녔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년 9월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년 10월,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광주로 진입하기 직전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장 유화례선교사를 화학산 문바위, 박적골, 도구박골 등지에서 정성껏 숨겨주었다. ‘인공치하’ 5개월 동안 100여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피신생활을 한 것이다. 이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광원은 수도생활과 성경공부 지도하는 일 외에, 고아들, 폐결핵 환자들 돌보아 주며, 지체 장애인 300여 명 돌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성경공부 모임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밤나무골 남나무 집에 백 여명의 제자들이 매양 선생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이현필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침내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으며 자주 각혈을 했다. 죽음을 예상한 선생은 자기가 고요히 죽을 장소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남녀 수십 명의 제자들이 광주역에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을 하였다. 오북환, 김준호, 정인세가 동행했다. 서울 신촌 부근 넝마주이 거지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준비를 하면서 밤중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인 정인세, 오북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이 두 분은 자리를 비웠고 김준호는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선생은 옛날 광주 양림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죽는 순간도 거지하고만 함께 있으려는 듯했다. 다음날 정인세는 다시 돌아왔다.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김준호와 정인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신앙간증을 하였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행위주를 해왔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것을 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평생 오늘까지 밥이 귀한 줄 알며, 밥만 좋은 줄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게는 물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수가 귀합니다. 이 물을 마셔야 저는 살고, 이 물을 마시지 않는 날엔 저는 죽습니다. 선행으로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보혈이 내 몸에 한 방울 흘러 들어오면 저는 삽니다. 제가 앞으로 걸어갈 걸음은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의 요청대로 정인세가 이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서울 신촌 대피호 굴속에서 사경을 방황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이 날의 경험이 있는 뒤부터는 이현필선생의 분위기는 보다 부드러워졌고 깊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 교계에서 이현필을 산중파 금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그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이공(李空)처럼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갈 때 보통 사람들보다는 배나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개미, 지렁이 등 곤충벌레가 밟히지 않게 목숨을 가진 것을 주워 옮겨 놓든가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평생 그는 한잔의 커피도 한 점의 고기도 들지 않았다. 몸소 청빈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예수를 닮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 자체에 대한 교만을 가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 앞에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 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것은 예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금욕생활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천년 전 유대땅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에 뚝뚝 떨어져 오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생 고기를 한번 잎에 대지 않던 선생이 신촌에 있는 거지 굴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굴비 국물을 달라고 해서 떠 드릴 때 제자들이 당황했다. 물론 후두결핵으로 그 국물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금욕주의보다 복음이 우선임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체 자신이 죽고 나서 율법주의파나 고행을 위주로 하는 어떤 파가 생길까봐 몹시 염려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급성 결핵병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병이 좀 회복된 후 이때의 심경을 술회하면서 “내가 저지른 이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그 동안 나의 금욕주의, 고행, 불살생 때문에 나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청년들 중에 크게 실망하여 소동이 일어나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혹은 정신이 돌았다고 욕하고 혹은 나를 저버리고 떠날 것이고, 혹은 더 분하게 생각하는 이는 몽둥이로 나를 때리며 동광원에서 쫓아내기까지라도 할 것임을 각오하면서 고기를 먹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인간 이현필을 우상화하려던 당시 제자들의 움직임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던 이현필선생.
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목사의 주선으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입원하기를 거부하여 결핵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게 되었다. 사실 병원에 간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김준호를 입원시키려는 생각이 더 많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후두결핵병이 걸린 것이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한동안 병이 심해서 40일간이나 목으로 물도 삼키지 못했다. X-ray를 찍어보니 속립성 결핵인데 이 병은 결핵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급성 전신결핵이었다. 결핵약이 나오기 전에는 속립성 결핵에 걸렸다 하면 모두 사망하고 마는 무서운 결핵이었다. 여성숙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회복이 빨라 열흘 후에는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3개월간 병원 음식도 비교적 들면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겠다고 한다. 평소 약을 쓰지 않고,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던 이선생이고 보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것도 길었다. 특히 치료에 효험이 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모았으며, 주사도 거절하여 여성숙 담당의사가 권유하였더니, ‘우리 한국의 결핵환자들이 이 약을 다 먹을 수 있게 되면 나도 먹겠습니다’고만 했다. 아직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고비만 넘긴 상태인데 퇴원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담아서 왕진을 하여도 막무가내 거절하여 그냥 돌아왔단다.2) 김준호는 6개월간 입원하여 건강이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선생의 파계(고기도 먹고 약도 쓰다)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심지어 그를 위선자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선생은 신촌에서 고기국물로 입 다신 것과 제중병원에서 한번 약을 쓴 일 외에는 다시 과거의 습관대로 고기도 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격적으로 제중병원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그는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임종하러 갈 때 행한 고별(유언) 설교도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는 순결주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과 동광원의 순결주의는 참으로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들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동정을 지켜라. 깨끗이 살아라. 청빈 생활을 사랑하라. 음란은 죄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살아라”
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 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년 3월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 우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
주여!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시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 가장 행복 된 것은
구주가 제게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여!
항상 저의 약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이 가장 제게 복된 것은
크신 권능이 물밀 듯이 찾아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
이 두 가지 큰 위로가 저의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람들이 다
주님 권능만 믿고 바라게 하옵소서
이 사람들만 아니라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자들을 다
주님의 은사만 알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기도,이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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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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