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 주교 묘소.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 시 송산구 동산향의 동산 천주당 리진타오(李金濤) 보좌 신부는 1월 초 인근 마을의 교우들을 순방하던 도중 그곳 교우들로부터 제보를 받고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를 찾아냈다.
1월 초 성당에서 20리(약 8km) 떨어진 교우 촌을 방문하던 중 교우들이 '문화 혁명 때 외국인 선교사가 묘비가 파괴될 것을 염려해 옮겨 놓은 것'이라며 비석을 내줘 성당으로 옮겨다 놓았다"고 발견 경위를 밝혔다. 이 신부는 또 "당시 서양 선교사는 홍위병에 의해 살해돼 순교했다"고 덧붙였다.
묘비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중국에서 조선선교에 나섰던 모방(1803-1839) 신부가 1835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고 묘소 앞에 세운 것이다.
묘비에는 '首鐸 蘇公之墓 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수탁 소공지묘 도광 십오년 팔월이십구일립)'라고 쓰여 있는데, 수탁(首鐸)은 초대 조선교구장을, 소공지묘(蘇公之墓)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뜻한다.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서한에서 '주교님의 무덤 위에는 주교님의 한자 성(姓)인 소(蘇)자가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적었다.
또한 도광(道光)은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연호로, 도광 15년은 곧 1835년이다. 따라서 묘비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일인 음력 1835년 8월29일(양력 10월20일)에 묘비가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善終)한 때와 일치한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이 조선을 빠져나와 마카오로 어떻게 갔을 지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가셨던 길의 역방향의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방 신부가 뽑아 보냈던 세 소년에게 마가자에서 조선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브뤼기에르 주교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방 신부님은 주교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마가자로 오셔서 장례미사를 집전했고 바로 그 묘지에 주교님을 장례 지내셨던 바로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결국 마가자로 왔을 것이고 주교님 무덤 앞에 무릎 꿇어 결국은 조선교우를 위한 순교를 다짐했을 것이다.
마가자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죽음으로 인해 모방신부- 김대건·최양업으로 이어지는 주춧돌을 놓은 그야말로 위대한 성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곳에 묻혔던 소 주교 유해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됐다.
[자료참조] pax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