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박물관 상설 제2관 <한국인의 일상>】
작성자 최정란
이 전시관에서는 일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농경생활과 사계절 변화에 맞춰 삶을 살아온 조선시대(1392 ~1910)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살기 좋은 곳에 터를 잡은 한국의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온 최소 단위의 공간이다. 이 터에서 가꾸어 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례로 보여주고, 아울러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물자와 물자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문화와 교역의 장(場)인 시장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 전반을 볼 수 있다. 사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현상에 맞추어 살며 만들어 낸, 농경세시를 바탕으로 한 생업. 의식주. 공예 등의 다양한 일상을 만날 수 있다.
장승
좋은 터에 형성된 마을의 입구에는 대개 돌탑과 장승을 세웠다. 마을의 입구에는 사람의 얼굴 형태를 그리거나 조각한 장승을 세우는데, 조각상의 몸통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의 글씨를 새긴다.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의 경계와 위치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수호신(守護神)의 성격이 강하다. 장승 옆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막대나 돌기둥 위에 얹은 솟대를 세우기도 하는데, 솟대는 수호신의 성격과 함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경직도 병풍(벽면 우측 영상)
논을 가는 농부의 모습과 모내기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절기에 따라 농사짓는 모습과 명주실을 뽑기 위해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위정자의 자리에 펼쳤던 이러한 병풍은 통치자로 하여금 농사짓고 누에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 근검절약하고 선정에 힘쓰도록 하기 위한 의미를 담은 것이다.
마을의 형성
풍수에서 살기 좋은 터 란 뒤에 산이 있고 앞에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말한다. 마을 뒤에 위치한 산은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생활에 필요한 땔감이나 산나물 등 자연의 혜택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마을 앞에 흐르는 물은 농업 용수나 식수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을은 이러한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잡았으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했다.
순창현 지도 (바닥)
옛 홍산현 마을을 그린 지도이다. 오늘날 충남 부여군 홍산면 일대를 말한다. 마을 뒤에는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전형작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 둥근 판처럼 생긴 것은 윤도이다. 오늘날의 나침반과 비슷한 것으로 좋은 터를 잡거나 방위를 확인할 때 사용하였다.
마을의 조직
마을에는 성. 연령. 직업별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규범과 규약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의 주된 내용은 상부상조와 선악에 따른 산과 벌, 마을의 대서사에 관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을 크고 작은 일들에 함께 대처하며 더불어 살아왔다.
<팔등면향약선생안> <동계절목>
6) 절기와 세시(Korean’s seasonal division and customs)
옛 말에 ‘역서’를 만들어 절후를 알게 하는 것은 제왕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농업이 사회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역서를 발간하여 백성들이 농사짓는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임금이 새로 등극하면 달력을 만들어 반포한다. 이는 새로운 통치 질서의 확립과 농사의 때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역서에는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음력을 사용했으며, 또한 해의 움직임에 따라 한 해를 24절기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알기 쉽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절기에 맞춰 세시행사를 전승해 왔으며, 해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어온 세시풍속은 삶에 여유와 풍요를 더해 주었다. 또한 절기는 일과 쉼의 분기점 역할도 하였다.
*<천세력> * <시헌서> <명시력> 등등
【봄(春)】
24절기의 (입춘 : 2월 4일경) 부터 곡우(穀雨 : 4월20일 경)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농작물의 파종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7)마을제
봄이 되면 나라에서는 농사에 힘쓸 것을 권하고, 마을에서는 일년 농사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며,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농촌에서는 논밭을 갈고 거름을 주며 파종을 함으로써 농사를 시작하며, 어촌에서는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위해 뱃고사를 지낸다. 중앙에 걸린 현판은 세조임금을 마을 신으로 모셨던 <복개당현판>이다. 왼쪽 벽에 걸려있는 <산신도>는 은산별신제에서 모시는 산신을 그린 그림이다. 오른쪽 벽에 걸린 <길쭉한 나무토막>은 해랑당신으로 강원도 삼척 바닷가에 있는 해랑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동해안의 어촌에서는 해랑신을 동해의 신으로 여겨 바다에서의 안전한 풍어를 기원했는데 해랑신은 여신상으로 나무를 남자의 성기 모양으로 깎아 만들어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밖에 집집마다 노구솥이나 시루에 밥이나 떡을 지어 동제(洞祭)를 지내기도 했다.
8) 국시말
말모양의 조각품으로 신성한 수호신이 땅과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할 때 타고 다녔다고 한다.
9)권농윤음
새해가 시작되면 임금은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들에게 농사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문서를 보냈다. 이는 풍요로운 한해를 기원하고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서이다. 오른쪽에 있는 <농가월령가>에는 농가에서 매달 해야 할 일과 풍속을 담은 노래가사가 적혀 있다. 농업기술을 음률에 맟추어 흥겹게 부를 수 있도록 하여 글씨를 모르는 농민들에게 보다 수 쉽게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농가월령가’를 통해 절기별 조선농민의 일상적 삶을 엿본다.- 농가월령가 : 조선시대 정학유가 일상적 농민의 삶을 취재하여 적은 글. ‘농가월령’은 농사짓는 이들이 매 월 할 일을 적어놓은 글. 덧 붙여 세시풍속, 놀이, 행사, 음식 등에 대한 소개도 녹아있다.- 정학유(丁學遊, 1786-1855) : 조선후기 문인.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첫째 아들인 정학연과 함께 다산의 학문 활동을 도왔다.
10)농기와 농악 <두레>
<두레>는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는 풍습이다. 특히 농사는 단기간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하므로 두레를 통한 공동노동은 필수적이다.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농기(용이 그려진)를 앞세우고, 꽹과리, 장구, 북, 징 등을 치며 고된 농사일에 흥을 돋우었다. 오른쪽 영상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리농악> 이다.
11)거름주기(44)
봄이 되면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거름주기를 한다. 봄갈이 철이 되면 집안에 모아 두었던 분뇨나 퇴비 등 거름을 장군이나 똥지게로 퍼다 날라 논과 밭에 거름을 주어 흙의 기운을 돋운다.
“쇠똥이 세 바가지면 쌀이 세 가마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곳에는 거름을 모으고 나를 때 쓰인 농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장군 : 흘림 방지를 위하여 입구를 작게. *귀때동이 : 똥지게와 장군, 삼태기에 의해 운반된 똥. 오줌. 재 등의 거름을 땅에 뿌릴 때 사용한다. *똥지게와 똥통*)(오른쪽 5번) 장군 : 옹기로 만든 장군에 삼나무 껍질을 감아 운반할 때 깨지지 않게 하였다.
12) 봄갈이 (45)
겨우내 잠들었던 땅을 깨우고, 쟁기질이나 가래질을 하여 땅을 갈아 엎어 농작물을 길러 낼 수 있는 땅의 힘을 돋운다. 이렇게 땅의 기력을 회복시켜 다음으로 씨뿌리기, 모찌기, 모내기 등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한다. 커다란 쟁기를 멘 소가 우직하게 논을 갈고 있다.*<농결> 이덕무가 직접 농서를 옮겨 적은 것으로서 , 특히 농서<금양집록>에는 소의 노동력 관한 언급이 나온다. 소 대신 사람이 쟁기를 끈다면 무려 9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써레 ,쌍따비 : 땅이 거칠고 돌이 많아 쟁기를 쓸 수 없는 땅을 파 엎는 데 사용한다. 날이 하나인 것을 외따비, 두개가 있는 것을 쌍따비라 한다. *남태: 씨뿌린 땅을 다질 때 사용한다. 양쪽에 끝을 맨 후 소나 사람이 끈다.
13) 밭농사 (46)
밭을 다지고 고르는데 필요한 농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왼쪽에 커다란 포크처럼 생긴 농기구는 쇠스랑이다. 흙을 긁거나 흙덩이를 깰 때 씌였다. 중앙에 굵은 밧줄이 묶인 커다란 삽은 땅을 파고 그 흙을 멀리 던질 때 쓰는 가래이다. 한 사람이 삽자루를 잡고 파면 서너 명의 사람들이 양쪽에 달린 줄을 잡고 힘껏 당겨 파낸 흙을 멀리 던졌다. 이렇게 땅의 기력을 회복시키고 나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14) 갯벌농사. 부게 (47)
스스로 살아 숨을 쉰다는 검은 들판, 바로 갯벌이다. 특히 봄이 되면 추운 겨울 동안 땅 속 깊이 있던 어패류가 갯벌로 올라와 어촌사람들에게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안겨준다. 그래서 ‘밭농사 열 배의 소출이 난다.’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진열장에 보이는 부게는 수확한 어패류를 담아 지게처럼 어깨에 메고 나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내용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뒤쪽을 앞쪽보다 조금 높이 올려 만들었고 물이 아래로 고여서 잘 빠지도록 나무홈통을 아랫부분에 덧 대었다.
15) 갯지렁이 쇠스랑 (48)
이곳에는 갯벌농사에서 사용된 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맨 왼쪽에 갯지렁이를 잡는 갯지렁이 쇠스랑이 있고 그 옆에 끝이 뾰족한 조새가 있다. 조새는 굴을 따거나 껍데기를 깔 때 사용되었다. 다음으로는 갯벌호미가 있다. 갯벌을 쉽게 팔 수 있도록 농사용 호미보다 날이 좁고 뾰족하다. 오른쪽에는 낙지 잡을 때 이용하는 낙지가래와 갯벌 바닥을 긁을 수 있는 써레도 볼 수 있다.
16) 조개방. 갯벌썰매 (49)
바구니처럼 생긴 이것은 조개방이다. 사람이나 소가 매고 끌면 진흙은 빠져나가고 조개만 남아 쉽게 수확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갯벌가래는 농사에 쓰이는 가래와 비슷하다. 갯벌 진흙을 떠서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다음은 진열장의 갯벌썰매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수확한 어패류를 운반하는데 이 갯벌 썰매를 이용하였다. 또한 사람들이 이 썰매에 앉아 이동하며 굴, 조개등을 캐기도 하였다.
17) 나물채취 (50)
봄이 되면 아낙들은 봄나물을 캐고 남자들은 약초나 버섯을 채취하러 산행을 나섰다. 중앙에 긴 꼬챙이는 복령꼬챙이다. 소나무 뿌리에 붙어있는 복령이라는 버섯을 찾을 때 이 꼬챙이로 찔러 있고 없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왼쪽 옆에 걸려있는 갈고리 모양의 고리들은 말코지이며 약초나 나물바구니를 주렁주렁 걸어놓을 수 있었다.
복령은 소나무를 벌채한 뒤 3∼10년이 지난 뒤 뿌리에서 기생하여 성장하는 균핵으로 형체가 일정하지 않다. 표면은 암갈색이고, 내부는 회백색의 육질과립상으로 신선한 냄새가 감돈다.
껍질은 복령피라 하고, 균체가 소나무 뿌리를 내부에 싸고 자란 것은 복신(茯神), 내부의 색이 흰 것은 백복령, 붉은 것은 적복령이라 하여 모두 약으로 쓴다. 약성은 평범하며 맛이 달고 덤덤하다.
18) 구황 (51)
보릿고개.
봄은 만물이 시작되는 시기이지만,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미처 익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때를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적은 책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곡식이 바닥난 춘궁기에는 풀뿌리나 나무껍질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왼쪽에 있는 항아리에 절미통이라는 글씨가 씌여있다. 이것은 쌀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평소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한 주먹씩 따로 모아둔 그릇이다. 조금씩 아껴먹고 쉽게 꺼낼 수 없도록 입구를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구황방(救荒方> 흉년으로 양식이 모자랄 때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적고 있다.
【여름 (夏)】 (52)
24절기의 입하(立夏: 5월5일 경) 부터 대서(大暑: 7월24일 경)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뜨거운 햇볕에 의해 농작물이 자라는 시기이다.
모내기와 김매기. 물대기. 등에는 고된 노동이 수반되는 만큼, 이때 나타나는 새참풍속과 노동요 등은 노동의 힘겨움을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삶의 지혜였다. 김매기가 끝나고 나면 호미씻이와 더불어 한 판 대동 놀이를 했다. (밀양백중놀이)
19) 강과 바다 (53)
강이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을 천렵이라고 한다. 맨 왼쪽에 원통형으로 생긴 것이 통발이다. 강이나 바다에 설치하는데 바닥에 날카로운 발이 달려 있어 한 번 들어간 물고기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옆에 가리는 물고기를 덮어 위의 구멍으로 손을 넣어 꺼낼 수 있게 만든 도구이고, 오른쪽 위에 있는 항아리는 문어를 잡을 때 사용하는 문어단지이다.
테왁과 망사리 : 바다에서 해초나 어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테왁은 몸을 가볍게 띄워주고 작업위치를 알려주며, 망사리에는 채취물을 넣는다.
통발: 바닥면에 대나무 발을 달아 날카로운 끝이 가운데로 모이게 하여, 한 번 들어간 물고기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문어단지: 물 속에 넣은 단지에 문어가 들어오면 단지를 들어올려 문어를 잡는다.
20) 염전 (54)
커다란 물레처럼 생긴 이것은 염전에서 바닷물을 퍼 올릴 때 사용한 무자위이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소금이 만들어 지는 시기가 바로 여름이다. 적당한 바람과 뜨거운 햇볕에 바닷물이 빨리 증발하여 결정이 고르고 맛 좋은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 발효음식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소금은 아주 중요한 천연조미료였다.
21) 김매기. 새참(55)
여름이 되면 농작물도 자라지만 더불어 잡초도 자라 농작물의 양분을 빼앗기 일쑤다. 김매기는 농사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로 논에서 사용하는 것은 흙밥이 잘 뒤집히도록 날이 크고 많이 휘어져 있고, 밭에서 사용하는 것은 돌과 자갈을 잘 고르도록 날이 작고 뾰족하다. 농작물 사이사이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정을 사람이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고된 노동이다.
세벌매기(마지막 김매기)가 끝나면 ‘호미씻이’ 라 해서 절반의 성공을 자축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흥겹게 하루를 즐긴다. 일을 하다가 잠깐 쉬면서 노동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데 이를 ‘새참’이라 한다. 새참 중에 마시는 한 사발의 막걸리는 노동의 고단함을 잊게 해준다. 밀양백중놀이 영상
오른쪽은 논에서 김매기를 할 때 꼭 필요한 세가지 도구이다. 골무처럼 생긴 깍지는 손가락에 끼워 손톱을 보호하고 그 옆의 토시는 억센 잎에 손목이 긁히지 않도록 팔에 끼웠다. 위의 여러가지 호미의 종류는 땅의 성질과 용도에 따라 날 모양이 다르다.
*호미씻이 : 한자어로는 세서연(洗鋤宴)이라 하고, 지방에 따라 풋굿. 초연(草宴)이라고도 한다. 풋굿이란 풀밭에서 한바탕 굿행사같이 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초연은 풀밭에서 잔치를 벌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농촌에서는 7월 백중 무렵이면 논매기가 다 끝나는데, 이 때 농사일을 잠시 쉬고 머슴에게 하루를 즐기게 하였으므로 이 날을 ‘머슴날’이라고도 하였다.
옛날부터 음력 7월 보름께에 각 농가에서 제각기 음식을 내어서 시냇가나 도는 산기슭의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같이 하면서 징. 꽹과리. 날라리. 북. 장구 등 농악기를 울리면서 질탕하게 하루를 한껏 즐긴다. 이것을 호미씻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이때는 논밭의 김을 다 매어 호미를 씻어 두고 놀기 때문이다.
이 호미씻이 때에는 그 마을에서 그 해 농사가 질 된 집이 있으면 그 집 머슴을 뽑아서 여러 머슴 중에서 우두머리로 삼아 그 머슴에게 삿갓을 씌우고 황소에 태워서 여러 머슴이 에워싸고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마을로 돌아다니는데, 이 때 그 집 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어 잘 먹였다.
22) 물관리 (56)
한 해 농사의 성패는 김매기와 물 관리를 얼만큼 잘 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비가 여름에 집중해서 내리고 봄, 가을, 겨울에도 간간이 내리기는 하지만 건조한 기후여서 계절별로 적절한 물 관리를 해 주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봄에는 가뭄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못자리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여름에는 장마나 태풍으로 인한 폭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거나 막아주면서 수시로 물 양을 관리해 주었다.
기계식 농사가 보급되기 이전 논에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하여 용두레로 물을 퍼 올리거나 비 오는 날이면 논에 물이 너무 많이 고이지 않도록 도롱이를 입고 살포로 논두렁에 물꼬를 터주는 모습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도롱이는 겉으로 보기엔 짚으로 그냥 엮어 놓은 것 같지만 도롱이는 매우 정교한 비옷이다. 겉은 짚풀 줄거리를 길게 늘어뜨려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바로 흘러내리도록 하고 속감은 뒤쪽 벽면의 동그란 사진처럼 정교하게 짜였기 때문에 한겨울 방한복으로도 사용될 정도였다. *용두레 : 논이 물이 흐르는 곳보다 높은 지역이 있을 경우 논에 물을 퍼 올릴 때 사용한다.
23) 여름옷 (57)
여름옷은 통풍이 잘 되고 땀 흡수가 빠른 모시나 삼베를 이용해 만들었다. 왼쪽 가운데 흰 저고리 안에 있는 등걸이와 토시는 옷이 땀에 배지 않고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착용한 도구이다. 오른쪽 끝에는 경북지역의 여성들이 많이 입던 살창고쟁이가 있다. 여성용 속옷이며 허리 아랫 부분을 오려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였다. 여성들은 단오를 전후로 여름 옷과 시원하게 보이는 옥과 은 소재로 된 장신구로 바꿨다고 한다.
상류층 여인네들은 비녀도 여름 소재인 주옥. 은 등을 사용했는데, 서민들은 나무, 뿔, 백동, 은 종류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특히 상을 당했을 때에는 흑각비녀를 꽂았는데, 상류층에서는 흑산호나 물소 뼈로 만든 것을 사용했고, 서민들은 버드나무 등으로 만든 검정색의 민비녀를 사용했다.
24) 낮잠 (58)
한 여름 농사일에 지치면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겼다. 집안에서는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평상을 깔고 대나무로 만든 투명 발을 쳐서 더위를 피하곤 했다.
발: 가늘고 긴 대오리를 엮어 만든 가리개.
죽부인: 더위를 식히려고 안고 자는 도구. 대나무를 속이 비도록 사람의 몸과 비슷한 크기로 만든 도구이다. 과거 중국(당나라때부터)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도 “DUCH WIFE” 라고 불렀다. 대나무 줄기를 직접 손으로 휘어서 만들었다. 비록 대나무로 만든 물건에 불과하나 아버지가 쓰던 것을 아들이 사용하는 거은 금기시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용하던 죽부인은 옷가지와 함께 태웠다고 한다.
여성들이 사용하던 것은 죽노(竹奴)라고 불렀다.
합죽선 : 대나무의 겉 껍질로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였다. 접선 중 가장 격이 높은 부채로 일반 접선과는 다르다. 대나무 껍질을 두 쪽을 민어부레풀로 붙여 하나의 살을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다. 산수화 사군자 등을 그려 넣어 소장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 전주합죽선’이 유명하며 전주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맛돌이와 멋순이도 이 합죽선과 태극선을 기본 모티브로 한다. 조선후기 화려해진 부채의 미가 일제강점기때 값싼 부체의 보급으로 찾는 이가 줄어들고 양반계층이 몰락하여 맥이 잠시 끊겼다가 해방후 몇몇 장인들이 다시 합죽선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나 잃어버린 기법들을 복원하지 못해 품질은 매우 조악해졌다.
팔덕선 : 주로 농촌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부채의 용도가 여덟 가지나 된다고 해서 팔덕선이라고 한다.
팔덕선의 여덟 가지 용도는,
첫째 시원한 바람을 내고,
둘째 모기나 파리를 쫓아 주고,
셋째 곡식이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덮고,
넷째는 불을 지필 때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붙여주고,
다섯째 땅바닥에 앉을 때 깔고 앉고,
여섯째 길을 다닐 때 햇빛을 가리고,
일곱째 비를 막아주며,
여덟째 머리에 물건을 일 때 똬리 대신 사용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덕은 종종 다르게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팔덕선의 용도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만큼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팔덕선은 용도가 다양할 뿐 아니라, 흔한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밖의 활동이 잦은 농민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재료에 따라 부들팔덕선· 왕골팔덕선 ·피죽팔덕선(대나무 껍질로 만든 팔덕선)· 옥피팔덕선(옥수수 속껍질로 만든 것)· 발팔덕선(발처럼 엮어서 만든 것)이라고 하며, 여덟까지 쓰임새가 있다.
25) 염색 (59)
여름옷의 소재인 모시나 삼베는 주로 흰색에 가깝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기에 홍화나 치자 쪽과 같은 식물에서 얻은 천연재료로 색을 들여 예쁘게 멋을 냈다. 붉은색 홍화씨, 노란색 치자, 파란색 쪽 염색을 하였다.
26) 베짜기 (60)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삼베, 모시, 명주, 무명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베짜기(길쌈)’ 라고 한다. 길쌈은 삼한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길쌈을 통하며 만들어진 직물은 자급자족적인 옷감의 충당뿐 아니라,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는데 화폐의 대용으로도 씌였다. 길쌈은 20세기 중엽까지도 행해졌는데 나일론 등 화학섬유가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길쌈에서 삼을 삼는 과정이 매우 고된 작업이므로 두레삼이라는 협동작업체를 조직하여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편을 갈라 내기를 하기도 하였다.
중앙에 길게 늘어뜨린 천은 베틀로 짠 안동포이다. 그 아래 바디는 구멍마다 실을 꿰어 실 간격을 고르게 하는 도구이다. 구멍이 촘촘할수록 고운 천을 짤 수 있다.
물레: 실을 잣는 도구이다. 밭에서 수확한 삼의 껍질을 쪼개어 여러 가닥의 실로 엮고, 물레를 이용해 실을 잣는다.
씨아: 목화씨를 빼는 기구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씨는 뒤로 떨어지고 솜은 앞으로 빠진다.
베틀: 씨실과 날실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 기구이다.
경북 안동에서 삼베를 짤 때 실제 사용한 베틀이다.
27) 다듬이질 (61)
두여인이 베매기를 하고 있다. 베매기는 실의 강도를 높이기 위하여 풀을 먹이는 작업이다. 중앙에 길게 늘어진 실은 베를 맨 실이다. 풀이 너무 빨리 마르면 풀을 고루 먹이기 어렵기 때문에 주로 흐린 날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불이나 옷감의 구김을 펴기 위하여 여인들은 다듬이질을 했다. 홍두깨에 천을 둘둘 감아 방망이로 두드리면 홍두깨가 돌아 구김살이 더 잘 펴진다.
오른쪽 영상은 1925년 베네딕토 수도회의 베버신부가 기록한 영상이다.
28) 시장, 부보상 (62)
시장은 점포에서 각종 물품을 판매하고, 여러지역의 다영한 사람들이 모여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역의 장소이며, 친지와 이웃간의 소식 들을 들을 수 있는 교역의 장이다.
조선초기에 상설점포에서 장사하는 시전이 수도인 한양에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셈 기구와 화폐경제의 발달, 도로망의 정비를 배경으로 점차 지방에 향시가 정기적으로 개설되어 전국에 1천여개가 남는 시장이 생겨났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시장에는 놀이판도 생겨났다.
조선시대의 시장은 부보상들의 활약이 매우 컸다. 이들은 상품을 짊어지고 다니며 장마다 물건을 유통시켜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벽면에 도장이 찍혀있는 종이 (보부상신표)는 부보상을 임명하는 문서이다. 부보상들은 나라의 허가를 받아 상권을 보장받았다. 오른쪽의 작은 책은 전국각지의 지명과 거리를 적어 놓은 정리표이다. 방방곡곡을 다니는 부보상에게는 필수품이었다. 또 하나의 필수품인 박다위가 있는데, 박다위조이개나 멜빵 고리로 길이를 조절해 짐을 메고 다녔다.
29) 객주 (63)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물건을 팔거나 흥정을 붙이고 술과 국수, 국밥 등의 음식을 팔던 상인이다. 진열장 왼쪽은 객주에서 주로 먹던 음식을 만드는 도구들이 있고, 투전패, 골패가 진열돼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객주의 부엌 창문이 보인다.
30) 상전 (64)
상전은 일용잡화를 팔던 가게이다. 한양의 시전에 있던 상전은 의금부 앞, 종루 남쪽, 안국방 주변에 있었는데 말총, 가죽, 초와, 밀, 실에서부터 이야기 책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물건들을 팔았다. 옛 속담에 상전 시정(市井) 연줄 감듯’ 이라는 말은 시장의 봇짐장수나 등짐장수들이 물건의 짐을 꾸릴 때 그 끈이나 줄을 단단히 잡아 매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얼레빗. 참빗. 안경집 –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한지공예로 만들기도 한다.
위쪽에 빗살이 성긴 것은 얼레빗.
오른쪽에 전시된 나무판은 옷감이나 장신구에 금박문양을 새길 때 쓰는 금박판이다. 금박판에 풀을 발라 옷이나 장식품에 찍은 후, 그 위에 얇은 금박을 올려 장 붙이면 화려한 금박문양이 나온다.
참빗은 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빗이다.]세소(細梳)나진소(眞梳)라고도 부른다.
한국의 전통 빗으로, 전통적으로 빗살이 성긴얼레빗으로 머리카락을 대강 빗은 다음에 참빗을 사용했다.머리카락의 때나비듬 등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쓰이기도 했으며, 머리카락에 기름을 바르는 용구로도 쓰였다.참빗은 대개대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모갑(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과 배를 싸고 있는 껍데기)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31) 포목전(65)
갖은 종류의 천을 파는 가게도 천의 종류에 따라 각기 전문적인 상점이 있었다. 무명은 면포전에서, 명주는 명주전, 모시는 저포전, 베는 포전에서 팔았다. 특히 무명이나 명주와 같은 천은 현물화폐를 대신했던 주요한 상점의 품목들이었다. 면포전, 면주전, 저포전, 등은 선조 년간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 까지 서울의 육의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래쪽 가운데 여성들의 여름 옷감으로 쓰인 분홍빛 명주는 저고리 한 벌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32) 상전 (66)
일상용품을 팔았던 상전이다. 앞에 긴 도투락 댕기는 혼례 때 쪽진 머리 뒤에 들인다. 아래의 빨간 금박문양의 댕기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기 들인 댕기다. 귀주머니는 곱게 수를 놓아 작은 물건이나 돈을 허리에 차거나 들고 다녔다. 수젓집은 당시에 생명을 상징한다 하여 길상문자나 문양을 수 놓아 행운을 기원했다. 그래서 여성들의 혼수품으로 만드시 준비했다고 한다. 왼쪽에 허리띠와 노리개와 장도를 볼 수 있다.
댕기, 광다회, 도포끈 등 여러 종류의 끈을 파는 상인들
33) 판과 꾼(67)
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놀이이다. 산대놀이는 탈을 쓰고 공연하는 가면극의 하나이다. 산대놀이는 경제적 여건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커다란 시장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송파장에서 행해지던 송파산대놀이는 춤과 무언극 ,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계율을 깨트린 중과 부패한 양반에 대한 풍자, 서민의 빈곤한 모습 등 당시의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양주별산대놀이 가면-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2호
양주시 유양동(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어 오는가면극.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에 공연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이다.
내용
산대는 산의 형상을 본떠 만든 무대이다. 기암괴석이 첩첩한 산의 형상인데, 그 괴암기석 여기저기에 동굴과 절벽이 있고, 그곳에서 잡상(雜像)들이 널리 알려진고사 장면을 재현한다. 따라서 여러 개의 좁은 무대가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산대에는 한 장소에 고정시켜 놓은 대산대(大山臺)와 밑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할 수 있는 예산대(曳山臺)가 있다. 산대는 궁정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현재의 산대놀이는 궁정의 공연물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산대놀이 연희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산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별산대는 본산대와 구별하여 붙인 명칭이다. 17세기 말 궁정의 공연문화가 쇠퇴하자 전문 놀이패가 한양의 시정을 중심으로 민간 공연문화를 발흥시켰다. 녹번,애오개[阿峴], 노량진, 사직골의 본산대놀이가 그것이다. 이 지역은 상업이 융성했던 곳이다. 당시 양주에서는 사직골 놀이패를 초청하여 놀이판을 벌이고는 하였는데, 그들이 지방공연 일정으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아지자 양주 주민들이 스스로 가면을 만들어 산대놀이를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양주별산대놀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양주는 목사가 주재하는 1천여 호의 고을이었다. 그 후 본산대놀이는 전승이 끊기고 양주별산대놀이만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34) 세물전 (68)
흔히 혼례나 장사와 같이 큰 일을 치를 때 필요한 사기그릇이나 놋그릇 등 각종 옹기뿐 아니라 소반이나 멍석에 이르기까지 각종 용품들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 가게를 말한다. 의복까지도 빌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35) 모자 (69)
모자를 파는 상점은 말총으로 만든 갓을 파는 흑립전, 국상 때 흰 삼베로 만든 백립을 파는 백립전, 망건을 파는 망건전, 동물털을 이용해 만든 모자를 파는 전립전, 관례를 마친 남자나 관아의 심부름꾼들이 쓰던 누런 풀을 엮어 만든 초립전과 같이 각기 용도와 재료가 다른 관무를 파는 가게들이 별도로 있었다.
갓집
36) 양태전 (70)
양태는 갓의 테두리 부분을 말하며, 양태전은 갓양태를 만들고 수리하는 곳이다. 갓은 조선시대 남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관모로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진다. 양태는 둥글고 넓적한 부분으로 실낱처럼 가늘게 쪼갠 대올을 엮어 만든다. 갓은 매우 손상되기 쉬워 외부충격에도 쉽게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손상되지 않게 늘 관리해야 한다.
37) 신발전 (71)
신발을 파는 가게들도 각기 재료에 따라 다른 점포명을 갖고 있었다. 이서전에서는 쇠가죽신창. 짚신. 가죽에 기름을 먹인 징신, 당혜등을 팔았고, 승혜전에서는 짚이나 삼으로 만든 미투리를 팔았다. 진땅에 신었던 나막신은 왕골이나 볏집으로 만든 물건을 파는 초물전에서 팔았다.
모자와 마찬가지로 신발 역시 신분과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 앞에는 서민들이 신던 짚신이 있고 비오는 날에는 양반들은 신발위에 나막신을 덧신었다. 양반이 신던 비단신과 가죽신이 있고, 뒤에는 목이 긴 목화라 불리는 신은 관료들이 관복에 갖춰 신던 신발이 있다. <태사혜>
신코에는 앞눈, 뒷눈이라는 무늬를 붙이는데, 이 무늬를 태사문이라 불렀다.성인 남자의 태사혜는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눈을 장식하지만, 아동용 태사혜는 연두색이나, 분홍색 바탕에 붉은색 또는 연두색으로 눈을 넣어 꾸몄다.
<당혜>
당혜의 기본 구조는 태사혜와 유사하며 다소 고급신으로 양갓집 부녀자들이 신었다. 붉은색 선으로 장식한 당혜는‘홍목당혜’. 푸른색으로 눈을 장식하면 ‘청목당혜’라고 불렀다.
<운혜와 흑피혜>
운혜는 고무신과 모양이 비슷한데, 신바닥에 담을 깔아 따뜻하다는 의미에서 ‘온혜’ 라고 부리기도 했다. ‘제비부리신’이라고도 불렀고, 신코 앞부분은’ 앞구머리’, 뒷축은 ‘뒷구머리’ 라고 했다. 뒷축부분에는 구름무늬를 수놓았는데, 운혜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운혜는 ‘꽃신’ ‘비단신’이라고도 불렸다. 이렇게 마른 신은 한 켤례를 만드는데 72번의 손이 갈 정도로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신발이므로 형편이 좋은 양반가에서나 신을 수 있었으며, 양갓집 규수들은 당혜나 운혜를 준비하여 혼기를 맞이할 정도로 귀한 신이었다. 흑피혜도 여성용이디. 주로 나이 든 층에서 신었다.
<미투리>
삼[麻]이나모시 또는 노끈 등으로 엮어 만든 질이 좋은짚신.
미투리를삼신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마혜麻鞋, 망혜芒鞋, 승혜繩鞋라고 표기한다. 지역에 따라서 무커리, 미커리, 미쿠리, 메토리, 메투리 등으로 불린다. 미투리 중에서도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나들이할 때 신기도 했다. 미투리는짚신보다 고급품이었으나,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신이 등장하면서 점차 일반 서민층들의 고급 신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미투리는 백리 길을 가면 구멍이 나고, 짚신은 십리 길만 가도 구멍이 난다. 미투리 값은 짚신 값에 비해 열 배나 비싸기 때문에 비천卑賤한 백성들은 모두 매일같이 짚신 갈아 신기에 여념이 없다. 가죽신 값은 또 미투리의 열 곱이 된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가죽신이 가장 고급 신이었고, 짚신보다 미투리가 고급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투리의 주재료는 삼이었으나 점차 닥나무 껍질, 청올치(칡넝쿨), 종이,무명실 등과 같은 사치스러운 재료를 사용하여 삼기도 했다. 미투리는 절치· 탑골치·무리바닥·지총미투리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대개 미투리를 삼을 때 사용한 재료나, 만든 고장에 따라서 구분되었다.미투리 관련 유물 중, 경상북도 안동 정상동에 위치한 이응태李㒣台(1556~1586)의 묘에서 출토된 미투리가 오늘날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기 때문에 황토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미투리는 검은 실처럼 보이는 것이 엉켜져 있다. DNA를 검사한 결과, 이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엮어 삼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징 및 의의
미투리는 삼이나모시, 노끈, 칡넝쿨, 종이, 무명실 등과 같은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엮은 신으로 양반층이나 서민들의 고급 신으로 사용되었다. 미투리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섬세하게 엮었기 때문에짚신보다 튼튼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미투리 출토유물 중 이응태의 묘에서 출토된 미투리와 여러 유물은 조선 중기 양반 가문의 복식과장례 풍습을 연구하는 데 긴요한 자료로써 그 의의가 있다.
<징신또는 진신>
징신과 나막신은 비 오는 날 혹은 진 땅에서 신는 신으로, 마른신에 반대되는 뜻으로 진신이라고 불렀다. 징신은 물이 스며들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도록 밑창의 가죽을 들 기름에 약 한 달쯤 절여 만들며, 남자용은 태사혜의 형태이고, 여자용은 당혜나 운혜와 같은 형태이다. 재료는 대개 소가죽, 말가죽, 개가죽, 사슴가죽이 사용되었다.
<나막신>
나무로 만든 신으로 나무신에서 와전되어 나막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로 바닥에 끈을 단 모양이었던 것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반적인 신의 모양에 굽이 달린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재료로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를 제일로 여겼으며, 말라서 터지지 않도록 밀납을 녹여 겉에 칠했다.
<짚신>
서민들 중에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은 미투리를 신었으며, 양반이라 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먼 길을 떠나야 할 때, 혹은 상을 당하면 짚신을 신었다. 물감을 들인 짚을 중간에 넣어 삼은 것도 있었다. 과거에는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농촌에서는 집안에서 필요한 신을 각자 삼았지만 각설이나 죄인들이 밥이나 옷가지를 얻은 사례로 대신 삼아주기도 했다고 한다.
38) 도량형과 셈기구 (72)
시장이 발달하면서 보다 더 정확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방법들이 생겨났다. 왼쪽 진열장에 손바닥 그림이 그려진 문서는 땅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자신의 손바닥 그림을 그려 증거로 남겼다. 오른쪽의 하얀패가 들어 있는 계산패는 곱셈을 할 수 있는 도구이다.
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도량형기구이다. 계산을 쉽게 하는 셈기구 들이 필요하다. 무게를 재는 저울은 푼(分) 돈, 양, 근. 관, 칭 등의 단위가 씌였고, 부피를 재는 홉, 되, 말, 석 등이 있다.
셈기구로는 산가지가 사용되었는데, 산가지는 막대의 놓는 방향에 따라 가로 놓기는 십. 천. 십만을, 세로놓기는 일. 백. 만 등의 자릿수를 나타낸다. 18세기부터 사용하였다.
홉은 한 줌에 해당하는 양이고, 되는 10홉이며, 말은 10되이다.
39) 화폐 (73)
시장에서 점차 많은 물건이 사고 팔리면서 전국적으로 화폐사용이 늘어났다. 상평통보는 만들어진 이후부터 조선후기까지 전국적으로 사용된 화폐이다. 금액에 따라 무늬와 색깔이 달랐다. 중형전은 뒷면에는 오행이 새겨져 있고, 당일전의 뒷면은 일부터 십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당백전은 ‘땡전 한푼 없다’는 말로 그 땡전이 당백전을 말한다. 오른쪽에 엽전괘가 있는데 뚜껑에 구멍이 있어 동전을 넣고 보관했다.
40) 소주내리기(74)
이곳은 객주의 부엌이다. 솥 위에 장구모양의 그릇 하나가 얹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소주를 내릴 때 쓰는 소줏고리다. 발효주를 가마솥에 놓고 이렇게 소줏고리를 올려 끓이면 증기가 올라가는데, 증기는 찬물이 담긴 소줏고리에 닿아 온도가 내려가면서 액체로 변해 저 작은 주둥이를 통해 흘러내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소주이다.
41) 채상장 (75)
이곳은 채상장의 공방이다. 채상이란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고 가늘게 잘라 다양한 색으로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짠 상자이다. 채상장은 이러한 채상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일반 서민들은 혼수품으로 구비하기도 하는데, 주로 옷이나 침선구, 귀중품을 담아두는데 사용한다. 채상은 대나무를 선별하여 대오리 만들기, 염색, 겉 상자짜기, 속 상자 짜기, 조립 및 마무리 과정을 거쳐 만드는데 채상장의 손끝을 통해 나오는 아름다운 색상과 문양에 그 특징이 있다.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채상장 서한규)1987년 보유자 인정
1930. 7. 28. ~ | 보유자 인정: 1987년 1월 5일
이 병신아 이 병신아 / 뭣 하고 살았노내 눈에 금(金)빛 열매 열리는 / 매미 운다.
햇빛과 바람을 친하였던 / 천 갈래 만 갈래의댓살을 다스리어 / 먼 강물은 들판을 도는가청춘은 다 가고 빈 바구니를
내 천치나 네 천치나 / 별 수 없는 캄캄한 숲을 헤쳐매미가 손 끝에 와선 / 내 울음을 운다.
42) 자리짜기 (76)
자리는 주로 짚이나 왕골, 부들과 같은 재료로 짜는데 짜임모양과 색깔에 따라 죄판에서 사용하는 거친 멍석이나 화려한 무늬를 넣은 화문석으로 나뉜다. 자리에 걸려 있는 수 십 개의 고드렛돌은 각기 다른 무게를 이용해 짜임을 조절했다고 한다.
【가을 秋】 (77)
24절기의 입추(立秋: 8월 8일 경)부터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10월 23일 경)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농작물을 수확하는 가을걷이를 하는 시기이다. 또 가을걷이한 곡식과 채소를 갈무리하여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다. 추위가 오기 전에 창호를 새로 바르고 초가지붕의 이엉을 올리는 등 집수리를 하여 겨울나기를 대비한다.
43) 대문 (78)
조선시대 양반집의 대문이다. 양 옆의 기둥을 보면 이 대문으로 사계절의 복을 맞이하고, 왼쪽에는 방문으로는 사방의 재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門迎春夏秋冬福)
44) 감사 (79)
왼쪽에 떡을 찔 때 쓰는 시루가 있고 그 안에 시루밑이 있다. 이렇게 깔아야 떡가루가 시루 바닥으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루밑은 짚, 삼껍질, 칡넝쿨 등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떡살은 떡에 문양을 찍는 도구인데 꽃, 물고기, 빗살무늬와 같은 문양을 떡에 찍어 장수와 부귀를 빌었다.
45) 가을걷이 (80)
가을이 되면 봄에 파종하고, 풍족한 여름 햇볕에 알맞게 여문 곡식을 거두어 들인다. 벼를 비롯하여 콩, 팥, 옥수수, 메밀, 목화 등의 작물을 수확하는데, 특히 벼의 수확은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시기에 수확한 다양한 작물은 타작도구와 탈곡도구를 이용해 다음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가공, 저장되며, 일부는 시장으로 운반되어 다른 물산과 교환된다.
도리깨와 도리깨방석. 매통.
46) 사랑채 (81)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보통 사랑대청, 사랑방, 누마루 등으로 구성되며 대문에 접한 바깥쪽에 위치한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사랑채가 이와 같이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주로 외부손님들을 맞거나 집안 어른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방안을 들여다보면 사군자 병풍 아래 보료가 있고 그 앞에 서안(書案)과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있다.
붓걸이 *사방탁자
전시된 한옥은 <경주양동마을>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47) 누마루(82)
누마루는 대개 사랑방에서 이어서 있으며 마루 주변을 따라 난간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공간은 집주인이 글을 읽거나, 손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소작인은 소작료를 내기 위하여 이곳을 찾으며, 마름은 소작인들에게서 받은 소작료를 계산하거나 문서를 작성한다.
< 지주의 토지를 대신 관리해 주는 사람 마름>
대리인 또는 관리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주가 회장이라면 마름은 월급사장인 셈. 마름이 있다는 것은 지주가 직접 땅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는소작인에게 임대료를 받고 누구에게 얼마나 땅을 빌려줄지 실제로 결정하는 사람이 마름이라는 이야기다. 소작인의 생산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드물지만, 추수기의 소작료 징수만이 아니라, 소작권의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름은 추수기에만 파견되기도 하기 때문에 추수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문에 마름은 지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지고 농민들 위에 군림하기 마련이며, 소작료 액수를 속여 지주에게 갈 돈을 횡령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름을 별도로 두지 않고 소작인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다른 소작지의 관리까지 그에게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임시대리인을 파견하는 일도 있었다.
48) 소작료내기 (83)
계약서 *추수기
소작대장판: 소작료 관련 양식을 찍어내는 판이다. 소작인. 땅의 위치. 등급및 규모. 소작료 등을 적을 수 있도록 칸이 나누어져 있다.
소작용하기(小作用下記): 1925년부터 소작료의 사용 내역을 적은 문서이다.
49) 집수리 (84)
*양택도 성주의 운세 및 집의 배치를 기록한 문서로 위쪽에는 집의 배치와 주소가, 아래쪽에는 집의 운세가 적혀있다.
탕개톱
신간증양이선성택영경: 안택법(安宅法)에 따른 올바른 집터와 배치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돌대송곳
50) 안채 (85)
안채는 여성들의 주된 공간으로 대청, 안방, 주방 등으로 구성되며, 집채의 가장 안쪽에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공간에 위치한다. 전통가옥의 주거공간은 여성과 남성이 분리되는데, 전시장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담아 안방과 사랑방의 사이에 내외담을 상징하는 유리벽을 두어 구분하였다.
안방은 집안의 안주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휴식은 물론 가족들의 옷가지를 직접 짓거나, 손질하는 일 등을 하였다. 방안의 가구들도 여성들의 몸치장과 관련된 소품들,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였으며, 다산과 화목을 상징하는 화조화(花鳥畵)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나전이층농. 촛대. 경대. 화조도병풍.
51) 솜옷짓기 (86)
겨울철에 외출할 때는 솜두루마기와 토시, 여러종류의 방한모자(남바위 조바위)를 써서 추위를 막는다. 여성들은 가족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옷감 안팎 사이에 솜을 두어 누빈옷이나 솜옷을 만든다. 특히, 아이의 누비옷은 ‘백 줄을 누비면 백 살을 산다.’고 하여 더욱 정성을 들인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늘. 누비게. 골무 등 다양한 침선용구들이 사용되는데, ‘규중칠우’ 라고도 불리는 이 도구들은 그 쓰임새 만큼이나 모양새 또한 아름답다.
남바위. 조바위. 씨아. 반짇고리 등
【겨울 동(冬)】
24절기의 입동(立冬: 11월8일 경)부터 대한(大寒: 1월20일 경)에 해당하며 가을걷이를 통해 거둬들인 곡식을 겨우내 막을 양식으로 비축하고, 다음에 땅에 뿌릴 종자를 보관하는 시기이다. 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를 쑤고, 추운 겨울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는 사냥한 동물과 콩으로 만든 두부, 김장김치를 통해 보충한다. 동지가 되면 한 해 동안의 액을 쫒는 의미로 팥죽을 먹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52) 납육먹기 (87)
추운 겨울은 열량이 많이 필요하므로 사냥으로 얻은 꿩, 멧돼지 등의 동물로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받는다. 납평(臘平)날 잡은 짐승은 조상께 바친 후 잡은 고기를 나누어 먹는다. 납육먹기라 한다. 납일은 동지 후 세번쨰 미일(양날)
<사냥하여 잡은 고기로 만든 ‘납평전골’>
섣달 납일에 공물로 쓰였던 멧돼지, 토끼 등 납일을 위해 사냥한 고기를 납육(臘肉)이라 하는데 제사에 쓰고 난 고기로 만든 전골을 ‘납평전골’이라 한다. 궁중에서도 납향에 올릴 공물을 위해 왕이 직접 사냥하여 돌아오면 노루, 멧돼지, 메추리, 꿩 등 잡은 고기로 전골을 만들어 잔치를 베풀었는데 납일에 사냥해 온 고기는 모두 맛이 좋았다고 한다. 전골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만물사물기원역사(萬物事物紀原歷史)』에서 ’전골은 그 기원을 잘 모르기는 하나 상고시대에 진중 군사들은 머리에 쓰는 전립(氈笠)을 철로 만들어 썼기 때문에 진중에서는 기구도 변변치 못하였던 까닭에 자기들이 썼던 철관(鐵冠)을 벗어 고기와 생선들을 끓여 먹을 때 무엇이든지 넣어 끓여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여염집에서도 냄비를 전립 모양으로 만들어 고기와 채소 등 여러 가지를 넣어 끓여 먹는 것을 전골이라 한다’ 라고 하였고,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李土亭) 선생(1517~1578)이 항상 철관을 쓰고 다니다가 고기나 생선을 얻을 때는 머리에 썼던 철관을 벗어 끓여 먹었다 하여 선생의 별호를 철관자라 하였다는 말도 있다. 또한『경도잡지(京都雜誌)』(1700년대 말)에는 ’냄비 이름에 전립투라는 것이 있다. 벙거지 모양에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채소는 그 가운데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에다 넣어서 데치고 변두리의 편편한 곳에 고기를 굽는다. 술안주나 반찬에 모두 좋다’ 라고 기록되어 전골 틀로는 벙거지나 전립(戰笠), 철관(鐵冠), 벙거짓골, 전립골(戰笠骨), 전립투(氈笠套)라고도 하여 무쇠나 곱돌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리법 가운데 하나인 전골은 음식상 옆에 화로를 놓고 그 위에 전골 틀을 올려놓고 볶으면서 먹는 것을 일컫는다. 전골과 비슷한 조리법으로 볶음과 찌개가 있는데, 주방에서 아주 볶아서 담아 올리면 ‘볶음’이라 하고, 또 국물을 잘박하게 붓고 미리 끓여서 올리면 ‘조치’ 또는 ‘찌개’라고 하여 전골과 구분된다. 이러한 전골은 겨울철 절식 중 하나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10월조」에는 추위를 막는 시절음식으로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 외, 훈채(파ㆍ마늘처럼 특이한 냄새가 나는 채소), 달걀 등을 섞어 장탕(醬湯 장국)을 만든다’고 하였다. 전골은 진짓상, 주안상을 차릴 때 곁상에 재료와 참기름, 장국 등을 준비하여 즉석에서 볶아 대접하는 것이므로, 뜨겁고 알맞게 익혀 먹을 수 있어 매우 특이하고 좋은 조리법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특정 재료의 맛이 두드러져서는 안 되고, 여러 재료의 맛이 어우러져 은은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 음식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조화미를 음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음식이라 하겠다.
<임원십육지>와 <농정회요>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역사가 깊은 술로 생각되며, 그러나 방문에서 보듯, 쉰밥은 본술 재료보다 많아서는 안되는, 다시 말해서 주재료로 이용되는 쌀(고두밥) 양의 1할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쉰밥이 고두밥 양보다 많게 되면 알코올도수가 낮은 술이 될 뿐 아니라, 오래 보관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술을 빚을 때 평소 먹는 밥이 아닌 찐 밥(고두밥, 지에밥)을 만들어 술을 빚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풍속에 ‘작은 설’로 알려진 명절이 납일(臘日)이다. 납일은 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을 가리킨다. 대개 연말 무렵이 되는데,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제사를 올렸고, 민가에서는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납향(臘享)이라고 일렀다.<동국세시기>를 보면, 옛날 내의원에서 납일에 각종 환약을 만들어 올렸는데, 임금은 이 약을 근시(近侍)와 지밀나인(至密內人)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주로 정신적 장애에 쓰는 청심환, 열을 다스리는 안심환, 곽란을 다스리는 소·환 등이었다.한편, 납약(臘藥)이라고 하여 기로소(耆老所)에서도 환약을 만들어 여러 기신(耆臣)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각 관청에서도 많이 만들어 서로 주고받기도 하였다.농가에서는 이날 새잡기를 하는 풍속이 전해 온다. 통발을 추녀에 대고 긴 막대기로 추녀를 치면 새들이 자다가 놀라 날아오르다가 통발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납일에 잡은 새고기는 가을부터 곡식을 주워 먹고 살아, 납일 무렵이면 살이 오르고 맛도 좋을 뿐 아니라, 어린 아이가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침을 흘리지 않는다고 여겼다.또 ‘납설수(臘雪水)’라 하여 납일에 내린 눈을 곱게 받아 독에 담아두었다가, 녹으면 그 물로 환약을 만들 때 반죽을 하거나, 안질에 걸렸을 때 이 물로 씻으면 낫는다고 하며, 김장독에 넣으면 김장의 맛이 변하지 않고 오래 저장할 수 있다고 하여 납일에 눈을 받는 풍속이 있다.그런데 섣달 12월에, 특히 새해 세찬 준비며, 한해를 마무리하는 일로 사람의 왕래가 분주할 때 나눠 마시는 술이 있다. 섣달에 빚어 두었다가 납월 중순경부터 그믐날까지 마시는 술로, 납주라고 한다.그러고 보면 현대인들이 연말 모임이나 송년회 때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잦은데, 이러한 술자리가 사실은 우리 고유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인데도 가양주문화가 사라지면서 일부 호사가들에 의해 뭣도 모르면서 외래문화를 답습하고 값비싼 와인과 위스키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가슴만 아플 뿐이다.납주는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빚는다. 평소 먹고 남아 모아두었던 쉰밥을 이용하는 방법이 그것으로, 평소 자주 빚는 술이나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대로 술을 빚되, 쉰밥을 함께 섞고 버무려 술독에 안쳐서 한 번 발효시키는 단양주이다.대개 10일 정도면 술이 익게 되는데, 이때 용수를 박아 그 안에 고인 청주를 다 떠낸 다음, 더 이상 술이 고이지 않으면 물을 쳐가면서 탁주를 걸러 마신다.
53) 메주와 두부 (88)
늦가을에서 초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메주를 만든다. 이떄 만든 메주는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기본이 되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기본 재료로 쓰인다. 특히 메주는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한 콩으로 만들어 일 년 내내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 콩으로 만든 두부도 단백질을 보충하는 부식으로 겨울철 건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음식이다.
54) 곳간 (89)
곳간 혹은곡간(穀間)은 가을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간수하기 위해 지은 창고를 말한다. 규모가 크거나, 농기구 등의 각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의 경우에는광이라고 한다
곳간에는 벼 외에도 살림살이나 여러 물건을 보관하였다. 곳간은 추수 후에 거두어들인 벼를 저장하므로 규모를 크게 짓고, 습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쥐를 비롯한 해로운 짐승들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곳간 열쇠는 시어머가 며느리에게 물려주었으며 집안에서 여자들이 안주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현물이 가치가 있어서 가지고 있는 물건에 따라 경제력이 평가되었고 부잣집에는 그 만큼 곳간이 많았다. 한옥에서 곳간을 따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행랑채가 곳간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공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안행랑, 중행랑, 바깥행랑 등으로 행랑채가 늘어나곤 했다.
55) 찬방 (동지팥죽) (90)
찬방은 부엌 옆에 붙어 간단한 반찬을 만들거나 조리된 음식을 소반 위에 놓아 안방, 사랑방으로 내어가는 장소이다. 이곳에는 상차림에 필요한 식기류. 소반. 뒤주등을 보관한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나쁜 귀신을 물리쳐 집안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가 지나면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동지를 태양이 다시 살아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해서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한 살이 더 먹는다.’ 라고 여기기도 했다.
찬합. 5첩반상기.
56) 장담그기 (91)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인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의 장류를 만드는 기본 재료가 된다. 김장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한꺼번에 김치를 많이 담그는 행사로,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던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이다. 한편, 이러한 발효식품은 옹기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며, 대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어 항아리를 소중하게 관리했으며, 곳간에는 겨우내 먹을 마른 곡식과 이듬 해 밭에 뿌릴 씨앗을 보관해 둔다.
57) 김장 (92)
겨울로 들어서는 입동(음력10월, 양력 11월8일 경)에 대부분의 한국가정에서는 ‘겨울나기’ 준비의 시작으로 김장을 한다. 김장은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을 지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반찬인 김치를 한 번에 많이 담가 먹을거리를 저장하던 겨울맞이 행사이다. 일명 반양식인 김장을 준비하며 가족과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이 독특한 문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 가정에서 담가 먹는 김치류는 모두 합쳐서 무려 300여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김치와 새로운 김치의 탄생으로 그 종류는 현재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김치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김치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00여종이 넘는 김치의 다양성은 지역 및 계절별로 생산되는 채소원료가 다르고, 양념의 종류, 배합비율 및 숙성방법이 매우 다양하며, 또 같은 지역일지라도 각 가정마다 전래의 독특한 방법으로 담그기 때문에 솜씨에 따라 각양각색이며 식생활 형태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사시사철 계절 감각에 맞는 재료를 이용하여 김치를 담그는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봄에는 햇배추나 미나리, 얼갈이 배추 등으로 김치를 담그고, 여름에는 더운 기후로 인해 수분이 부족하기 쉽기 때문에 열무나 오이를 주재료로 한 물김치와 김치 종류를, 가을에는 고추나 깻잎, 쪽파 등을 이용한 김치를, 그리고 겨울에는 양념을 많이 쓴 김장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다.
58) 장독대 (93)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아 두거나 담그는 독이다. 약간 높직한 곳의 볕이 잘 드는 동쪽에 설치하며, 물이 잘 빠지도록 돌을 2∼3층가량 쌓은 다음 판석을 깔아 만든다. 가장 큰 독에는 간장, 중들이에는 된장이나 막장을 담아두며, 항아리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류를 담는다.
제주도에서는 장항굽, 이북에서는 장독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부엌 뒷문에 가까운 뒤꼍 공간에 두지만, 격조 있는 집에서는 대청의 주축선과 연결시킨 정결한 자리에 배치한다. r자 집에서는 안채의 옆공간인 뒤뜰에 놓기도 한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작은 집과 뒤꼍이 넉넉하지 못한 산골짜기나 섬의 집들은 부엌 앞 양지바른 마당에 자리잡기도 한다. 때로는 부엌을 넓게 하고 부엌 한 귀퉁이에 장독들을 세워놓기도 한다. 장독대는 배수가 잘되도록 약간 높은 곳, 혹은 지면에서 20∼30㎝ 정도 높이로 호박돌과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여러 개의 판석을 깔아 만든다.
그러나 요즈음은 판석 대신 석회를 써서 마감하기도 한다. 모양은 긴 네모꼴이 많으며 보통집의 용마루방향과 같게 놓인다. 크기는 2×3m, 3×4m, 혹은 2×4. 5m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이 큰 장독대를 두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는 우리의 기본식품인 간장·된장·고추장 및 빈 항아리를 나열한다.
영남과 호남지방의 일부에서는 장독대를 안마당에 두는 대신 주위에 나지막한 담장을 예쁘게 두르고 지붕을 해 달아서 아름답게 꾸미기도 한다. 장독대에는 성주가 모셔져 있는 수가 많다.
59). 정을 나누는 보자기 (94)
보자기는 물건을 싸거나 덮도록 만든 것이다. 설날 고향집이나 친척집을 방문하면 ‘보자기에 한보따리’ 음식과 곡식을 싸서 서로 나누는 풍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리나라 명절풍습인데, 이때 보자기에는 음식뿐 아니라 정(情)도 함께 싸인다. 조각보. 기러기보.
60) 설 (95) 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절 중 하나이며, 그 해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설날은 설빔, 덕담, 차례, 복조리걸기 등 다양한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판화로 문 앞에서 손을 잡고 서 있는 두 아이의 풍속이 행해지는 날로, 새로운 한 해를 잘 보내기를 소망하는 의미를 지닌다. *엘리자베스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