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서로 다른 방을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별거인 셈이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아내는 여러 문화원에서 하던 시창작 강의가 끊겼다. 주로 서울 근거로 하여 움직이던 활동 반경이 이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공해 많은 곳을 벗어나 주말에나 가던 양평을 주 생활거점으로 삼기로 하였다. 양평은 사실 제대로 살림을 하기에는 적당하지가 않았다. 원래 도자기 공방이었기 때문이다. 넓은 홀에는 큰 개스가마와 한쪽 구석에 좀 작은 전기가마가 있고 나머지 공간들에는 앵글로 만들어진 도자기 올려 놓는 선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한켠에는 전기 물레들이 있었다. 건물 외벽은 샌드위치 판넬을 이용해 지었기 때문에 여름은 덥고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어는 해 겨울에는 양평에 와 보니 수도가 얼어있었다. 물이 금방 녹지 않아서 바로 다시 서울로 가기도 했다. 더구나 남동향으로 항시 들어와야 할 햇빛이 집 바로 앞에 있는 4층 연립에 차단당하여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천연 난방도 제한을 받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이런 건물을 샀을까 하늕의문이 든다. 당시 아내는 버킷리스트에 도자기 만드는 것이 있었고 꼭 한번은 나도 도자기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인터넷에 공방 매매 공지가 올라와서 또 너무 싼 것 같아서 서둘러 양평으로 달려가서 계약을 덜컹 했다. 나는 불만이 많았지만 아내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버킷리스트라는데 반대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양평 출사표였는데도 막상 살아 보니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공방 안에는 작업 도구와 유약을 보관하기 위한 방과 직원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바닥에 전기 장판을 설치해 둔 널찍한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리가 기거했다.
코로나가 시작되자 아내가 느닷없이 재봉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재봉만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원단을 구입하기 위해 동대문 종합상가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음을 알고는 원단 땡처리 루터를 수소문하여 헐값에 구매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지역 당근시장에서 나오는 물품도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재봉일이 조금씩 알려지자 이곳저곳에서 원단을 보내 주는 분들도 생기고 특히 아내가 한복 만들기에 꽂히다 보니 입지는 않지만 고이 보관해 두었던 한복들을 보내주는 분들이 여럿 생겼다. 덕분에 아내는 정말 밤낮없이 자기가 만들고 싶은 대로 한복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방 안에는 원단들로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재봉틀 소리에 잠을 자야 하는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방에 원단들이 널부러져 있어서 둘이 함께 누울 공간도 부족했다. 그게 짠했는지 나더러 건넌방으로 가서 거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의 별거가 시작되었는데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아내의 한복 사랑 덕분에 텔레비전에도 여러 번 초대받아 출연하기도 하였다. 때로 나는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재봉틀 소리가 새벽에도 들릴 정도로 심각했다. 누가 돈을 준다고 맡겨 준 것도 아닌데 그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말릴 수도 없다. 덕분에 아내 뿐 아니라 나도 한복으로 치레를 하고 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어이 내 것을 만드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코로나가 몰고온 우리집의 큰 변화였다. 이에 더하여 아내의 다양한 구상에 따라 도서출판 한국힐링문학을 만들기도 했다. 이쪽이야 지금껏 해오던 일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아내는 시도, 펑론도 거의 독보적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의 관심은 산야초에도 꽂혀 있다. 요리에도 꽂혀 있다. 그러니 쉴 틈이 없다. 어떻게 저 일들을 다할 수 있을까? 산야초와 음식 요리를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보관해 두었다. 유투브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아내 옆에 있는 나도 따라가기가 버겁다.
일전에 서산 딸네집에 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목요일에 갔는데 그곳에서 주말까지 있다가 일요일 오후에 양평으로 간다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토요일에 마음이 바뀌었다. 올라가는 길에 산야초가 자생하는 곳에 가서 산야초를 캐 가지고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비가 오고 있어서 나는 나중 가자고 하였지만 아내의 의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여 목적지에 가서 우비도 없는 상황에서 비를 간간이 맞으며 산야초를 캤다. 그리고 양평집에 도착하였다. 오후에 화전리에 가서 캐 온 것들을 옮겨 심기를 했다. 일요일 교회에 다녀온 후에도 화전리에 가서 어제 못다한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일까?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광진문화원 강의를 가는데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내만 들어보내고 나는 차에서 쉬면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강의 참석자의 얼굴이 생각나서 강의에 참여하였다. 결국 쉬어야 할 시간에 쉬어 주지 못했음인가 집에 왔을 때는 몸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가급적 누워 있었다. 식사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도 싫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나를 깨웠다. 오늘 오후 5:30-7:00까지 수원 다문화 강의가 있는데 아직 10시도 안되었는데 떠나야 한다고 닥달했다. 나는 몸이 아파서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아내의 청에 따랐다. 비 때문에 더 캐지 못한 산야초를 캐러 갔다. 그리고는 저녁 때 아내의 강의에 참여했다. 몸의 곳곳이 아팠다.
아내는 강의를 끝내고 차에 타더니 너무 힘들다고 했다. 우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뻗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오늘 수요일에는 10:3분부터 시낭송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한다. 정말 꼭 쉬고 싶었다. 아내는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강의를 듣고 나서 지인이 찾아와서 함께 고기집에 갔다. 우리를 위해 돼지갈비를 사 주셨다. 그런데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가 맛이 없게 여겨졌다. 단맛도 짠맛도 다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분과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오면서 아내도 오늘 고기맛을 못 느꼈다는 것이었다. 어제 캐 온 산야초들이 봉투에 가득 들어 있는 채로 차 뒤칸에 있는데 화전리에 가자는 말도 못하고 아내는 힘들다며 자리에 누웠다. 나도 자리에 누웠다. 목 위 부분에서 수시로 통증이 유발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양쪽 귀, 머리 꼭대기 등에서 통증이 왔다. 죽을 쑬 때 용암이 분출되기 전에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거품처럼 아픔 또한 똑같았다. 곳곳 즉 대퇴부와 명치 어림과 복부에서도 계속 통증이 왔다. 아내는 내가 지난 금요일 어린이날에 목욕탕에 다녀와서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나는 그게 아니라 비를 맞으며 일을 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라고 누차 말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의지대로 한 일이라서 그런지 쉽게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몸살로 시작해서 독감화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인 것은 우리 부부가 독감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이리라. 타이레놀을 두 알씩 벌써 네 번이나 복용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자주 복용했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3시 무렵이었는데 일이라면 쉬지 않고 하던 아내가 몸이 힘드니 한 시간만 자고 밭에 가자며 쉬겠다고 누웠다. 나도 정말 쉬고 싶었기에 덩달아 누워 쉴 수가 있었다. 누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잠옷바람으로 나갔더니 옆집 공사장에서 일하는 폭크레인 기사가 와서 아내가 부탁하던 흙을 어디에 채워 주었으면 좋겠는지 위치를 정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내를 잠시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나갔다 와서는 다시 누웠다. 내가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나가서 삽과 곡괭이를 이용해 뒷정리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안이 계속 마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말하던 소태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당시 나는 저 소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오늘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입 안이 쓰고 침이 마르며 물을 마셔도 물의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참으로 희귀한 느낌이었다. 목이 계속 마른데도 물로 해갈이 되지 않는 이상한 증세였다. 어찌어찌 뒷정리를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전기장판이 없었으면 과연 어땠을까? 뜨끈하게 찜질방처럼 온도를 올리고 누워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건넌방의 아내도 나처럼 이제 기침이 시작되는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가 홀로 아픔만 공유하며 누워 있는 것이다. 몸이 아프니 입으로만 연신 기도가 나올 뿐 무릎을 꿇는 행위는 하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몰입하고 싶었던 신앙도 병마 앞에서는 위력이 반감되고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도 아내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이럴 때 아내를 위해 내가 뭐 먹거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끼니는 늘 아내가 준비했기에 나는 먹기만 하면 되었기에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럴 때 쌀죽이 제격이라는 생각에 혹시나 하여 유트브를 열고 쌀죽 끓이는 법을 보았다. 별 것 아니었다.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 쌀죽으로 정하고 곧 작업을 시작했다. 쌀의 양을 많이 했음인지 끓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디어 쌀죽이 완성되었다. 우선 내가 한 그릇을 떠서 맛을 보았다. 반찬으로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고추장으로 하였다. 쌀죽 한스푼에 간장 보다는 고추장을 먹으면 조합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왠 걸. 고추장에서 엄청 쓴 맛이 튕겨져 나왔다. 깜짝 놀랐다. 아직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쌀죽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그릇을 먹는 데는 역함이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선택한 것이었는데 잘한 것 같았다. 아내에게도 권했다. 아파서 못 일어나겠다고 해서 내가 일으켜 앉히고 아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회복을 기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쌀죽을 잘 먹었다고 했다. 도움이 된다고 했다.
거의 잊고 있었던 시간 전에 있었던 쌀죽 끓이기는 그렇게 재현되어 내가 아내에게 서빙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단순했기에 아내를 위해 준비할 수가 있었다. 반찬도 없이 단지 쌀죽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