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성지 설명
1) 명동성당
서울 대교구 주교 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 암 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소에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 종로 성당
좌 · 우 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되었다.
천주교 신자 색출에 앞장선 포도청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년)의 집에서 있은 첫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년)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년)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포도청의 옥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 마련 한편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여 2013년 9월 2일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