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 관우, 장비와의 만남
세월이 흘러갔다.
어수선한 회평연간도 지나가고 새로이 광화관 연호를 쏜 지도 여섯 해나 되었다.
그러나 뜻 있는 선비들의 탄식과 울분 속에서도 후한의 조락은 깊어만 갔다.
한 예로 광화 원년을 살펴보면,
그 해에만 합포, 교지, 오호의 세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켰고,
선비가 주천을 침략했으며 구진과 일남에는 민란의 기록까지 보인다.
큰 지진과 일식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흰옷을 입은 요괴가 덕양전으로 사라졌으며,
푸른 무지개가 옥당에 서고, 검은 기운이 언독전을 뒤덮었다.
황제는 환관들의 참소에 넘어가 황후 송씨를 폐한 뒤 그 족당을 주살 했고,
서저를 열어 공공연히 공경 이하의 관직을 내다 팔았다.
그런데 그 같은 일이 그 한 해에 그치지 않고
여섯 해를 거듭하니 인심은 한층 흉흉하였다.
거기다가 광화 6년에 접어들어서는
봄부터 가뭄이 극심해 천하해 대기근의 조짐까지 보였다.
탁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한층 농사일에 바쁠 3월인데도
백성들은 마른 먼지만 풀썩풀썩이는 밭둑에 앉아 쨍쨍한 하늘만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
"큰일이로군"
한 청년이 그런 들길을 지나며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릎에 닿는 손,
자기 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귀와 길게 째진 봉의 눈-
어느새 스물 넷의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난 유비였다.
횐 비단 옷이나 손잡이에 구슬 장식을 한 보검을 비스듬히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돗자리를 메고 시골의 저자 바닥을 헤매는 미천한 소년 같지는 않았다.
사실은 그러했다.
칠 년 전 노식의 문하를 떠나 누상촌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돗자리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 저자 바닥에서 출발했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짧으나마 노식의 문하에서 닦은 학문과 인품,
부호인 족숙 유원기의 변함없는 후우언,
인근의 유력한 집안 자제들이거나 군리로 있는 동문들,
촌수로 따지면 멀지만 그래도 한실의 종친이란 신분 같은 것들은
그가 몸 둔 곳이 낮고 천했기에 더욱 빛이 났다.
특히 그가 저잣거리에 나오고 서 너 해 뒤 탁령이 되어 온 공손찬은
그로 하여금 관부까지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듯 행세할 수 있게 하여
주먹 하나만 믿고 뒷골목을 떠도는 여느 건달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관록과 위엄을 더해 주었다.
거기다가 타고난 관후함과 침착은
곧 그를 탁현 저자 바닥을 중심으로 한 유협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만약 유비가 그때 스승 노식의 추천대로 정현의 문하를 찾아 학문에 정진했더라면
효렴을 거쳐 조정의 미관 말직이나 작은 주군의 승은 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처럼 그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호걸과 협사들이나,
그의 그런 숨은 힘에 보호를 구하는 호상 부호들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따금씩 유비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불안스레 돌이켜 볼 때가 있었다.
특히 탁현을 떠난 뒤로도 눈부신 성공을 거듭하고 있는 공손찬이나
동문으로는 남달리 빠른 벼슬길을 걷고 있는 유덕연의 소문을 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기도 했다.
공손찬은 그 무렵 요동 속국 장사로서 선비 족들 사이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었으며
유덕연은 의랑이 되어 말석이나마 벌써 묘당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상산의 나무꾼 늙은이이라 칭한 그 이름 모를 늙은이를 떠올리고
신념을 키워 갔다.
"고목은 높은 가지부터 마른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은 서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밑바닥에서 흙에 뿌리를 박고 출발하고 있는 것만은 옳은 일로 믿고 싶었다.
☆☆☆
"유비 형님, 유비 형님"
갑자기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며 크게 소리쳐 불렀다.
유비가 미간을 들어보니 소삼이라고 하는 장돌뱅이였다.
유비가 성내로 들어가면 유비의 좌우에 붙어서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자였는데.
발이 빠르고 귀가 밝아 요긴하게 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소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녀석에게 유비가 조용히 물었다.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낯빛이 변하는 법이 없는 유비의 중후함이었다.
"큰일났습니다. 장비형이, 장비형이..."
"장비가 어찌 됐단 말이냐?"
"방금 사모를 들고..."
"사모를?"
유비도 약간 놀라는 듯한 기색이었다.
"네. 사모를 들고 싸우러 갔습니다."
장비가 사모를 들고나섰다면 어떻든 일은 크게 벌어졌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이미 여러 해를 알고 지냈지만 그가 싸움에 사모를 들고 나간 것은
단 한 번 재작년 비적떼가 탁현으로 몰려들었을 때뿐이었다.
"상대는 누구 라더냐?"
"소쌍의 패거리랍니다."
"소쌍의 패거리라니?"
"소쌍이 웬 수염 긴 놈을 하나 딸려 보냈는데 예사내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소쌍은 근래에 탁군의 저자를 넘보는 중산국(군과 비슷함)의 호상이었다.
주로 말을 사고 파는데 천금을 풀어 수백 필씩 끌고 멀리 요서에서 유주 탁군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탁현만은 오래 전부터 장세평이란 또 다른 호상이
먼 일가뻘인 장비의 비호 아래 말 시장을 오로 지하고 있었다.
소쌍은 몇 번 힘깨나 쓰는 작자들을 앞세워 탁현으로 들어와 봤으나
번번이 장비의 주먹에 쫓겨 물러나곤 했는데 기어이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장비가 어찌해 사모까지 들고나서게 되었느냐?"
유비가 다시 소삼에게 물었다.
"그자가 청했습니다. 여럿이 부딪치면 죽고 상하는 자가 많이 날 터이니
장비형과 단둘이 겨루어 길을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자가 장비에게 창을 들고 나오라고 청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그자는 권장도검 무엇이든 좋다고 했는데,
한동안 눈싸움을 벌이던 장비형이 대뜸 사모를 들고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자는 무어라고 하더냐?"
"빙긋 웃으면서 너는 힘을 뽐내기를 좋아하는구나,
네가 구태여 길고 무거운 창을 쓰겠다면 나는 청룡도로 받아 주마라고 했습니다."
"그래 지금 그들은 어디 있느냐?"
"성밖 토묘 뒤의 숲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알았다. 그러잖아도 내 성안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유비는 그렇게 대답하며 천천히 누상촌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
소심의 얘기로 미루어
확실히 장비의 상대는 예사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두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난폭하고 조급한 장비가
고분고분 그의 청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대뜸 자신의 으뜸 무기인 사모를 들고나선 것으로도
얼마나 상대로부터 위압감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유비 형님, 모두 끌어 모을까요?"
돌아서는 유비의 등뒤에서 소삼이 그렇게 물었다.
그 역시 어지간히 질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필요 없다."
유비의 패거리 중에서 가장 힘세고 날랜 것이 장비였다.
그가 패한다면 다른 자들을 불러모은다고 해도 승산이 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급히 말에 안장을 매면서도
유비는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장비의 무예를 믿고 있다.
유비가 장비를 만난 것은
다시 돗자리를 지고 저잣거리에 나간 뒤 세 해짼가 네 해째의 일이었다.
그때 장비는 유비보다 한 살 아래인 열 아홉 이었으나
벌써 그 유별난 힘과 난폭함으로 탁현의 저잣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현의 관리들도 그의 힘이 두려워 웬만한 횡포는 눈감아 주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장비는 술에 취해 현위를 초죽음 시키는 데 이르렀다.
바로 공손찬이 현령으로 있을 때였다.
공손찬은 갑졸을 풀어 장비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갑졸들은 워낙 장비의 용력이 뛰어나 어쩌지 못하다가
술에 떨어져 잠든 뒤에야 짐승 옭듯 하여 하옥을 시켰다.
공손찬은 깨어나는 대로 관리를 상하게 한 죄를 물어
저잣거리에서 목을 벨 작정이었다. 이때 장비를 구해 준 것이 유비였다.
진작부터 장비의 용맹과 무예를 높이 보던 유비는
먼저 공손찬을 찾아가 간청을 하고 한편으로는 족숙 유원기의 재물을 빌려
병신이 돼 누운 현위의 가족들을 달랬다.
유비가 없었더라면 장비는 틀림없이 죽은목숨이었다.
장비는 술에 취하면 천하의 개망나니였지만 깨어나면 은혜도 알고 의리도 아는 위인이었다.
자기를 구해 준 것이 유비인 것을 알자
그는 그 길로 달려와 유비와 교유하기를 청했다.
한낱 돗자리 장수에 지나지 않지만 평소에도 온화한 미소 뒤에 숨은 이상한 위엄 때문에
행패를 부린 적이 없었다는 점도 두 사람이 쉽게 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장비는 원래 연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명문의 후예였으나
다섯 살 때 집안이 당고의 화에 연루돼 풍비박산이 되고.
어린 그는 늙은 가복의 구함을 받아 탁현의 저잣거리에 숨어살게 되었다.
가복은 돼지를 잡고 술을 팔기도 해 장비를 길렀는데
장비가 열 다섯도 되기 전 에 죽어, 그때부터 장비는 저자 거리의 불량배로 자랐다.
그러나 그의 몸을 흐르는 명문의 피 탓인지
성미가 호탕하여 호걸 사귀기를 좋아하고,
선대로부터 가복을 통해 물려받은 한 자루 사모를 열심히 익혀
여느 저잣거리의 불량배들과는 달랐다.
유비가 그를 구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일찍부터 장비의 그런 됨됨이를 알아본 때문이었으리라.
한편 장비는 장비대로 유비와 사귈수록 깊이 그의 인품에 빠져들었다.
자기에게는 없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보는 감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한 살 차이밖에 되지 않는데도 차츰 유비를 어려운 형처럼 대하게 되었다.
유비와 장비의 그 같은 만남은 여러 가지로 의미 깊은 일이었다.
한 유협집단이 어떤 지역사회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자면
나름의 지도자와 조직을 갖추어야 한다.
하기야 유비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도 탁군의 유협세계는
장비처럼 주먹으로 저자 바닥을 휩쓰는 우두머리와 그를 따르는 얼마간의 건달은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철저하게 힘에 의존하고 있고
이합 집단도 아무런 원칙 없이 이루어 주는 점에서
장비는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그들의 모임도 조직 일 수는 없었다.
유비도 처음부터 지도자의 자격을 모두 갖추고 나선 것은 못 되었다.
정당한 권력조직에서 지도자의 자질은
보통 상황 변화에 반응할 수 있는 관찰 및 예견력, 인격적 접촉 능력,
방식이나 정책 이념 등의 창안 능력, 용기와 의지력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협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 외에 또 하나 바탕이 되는 자질로서
상대를 위압할 수 있는 거친 힘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데 유비는 바로 그 점이 모자랐다.
물론 유비도 당대의 모든 식자층에게 필수 교양이었던
병법과 무예에 어느 정도의 소양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병법은 시골 유협 집단의 주도권 싸움에 응용할 만큼 밝고 세밀하지 못했으며,
무예 또한 그저 겨우 난군 중에서 몸을 가릴 정도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장비를 얻음으로써 유비의 그 같은 단점은 보완되었다.
장비를 자신의 두 팔이나 다름없게 쓸 수 있게 되자
탁군의 유협세계에서는 거친 힘에 있어서도, 지혜와 배경에 있어서도
유비를 능가할 사람이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비가 장비의 지원 아래
탁군의 유협집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대략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어떤 사회에서 유협집단의 존재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종종 범법과 동일시되거나 반역의 의심을 받는다.
사마천이 '사기' 의 유협열전 앞머리에다,
"유자는 글로써 법을 문란케 했고
협자는 무로써 법이 금지하는 일을 범했다." 라고 쓰고 있는 것이나
한무제가 관동의 대협 곽해를 주살한 것 등이
바로 그런 평화로운 시대의 견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그런 유협집단은 바로 변혁의 원동력으로 본다.
민중들도 썩고 무능한 관리나 이미 지켜지지 않는 법보다는
그 들 편에서 있는 유협집단과 그들의 힘에 의지하려 든다.
그리하여 그런 그들의 집단적 반항은
일반적으로 도둑 떼의 노략질과 달리 기의라고 불리어지며.
중국 역대의 태조들 가운데서는 적지 않은 유협 출신을 볼 수 있다.
어쨌든 유비도 한번 탁군의 유협집단에서 지도권을 확보하자
그 세력은 급속히 불어 갔다.
크고 작은 저잣거리의 이권들이 모두 유비의 손안에서 조정되었으며,
썩은 관군을 믿지 못하는 인근의 토호들은 유비에게서 산적들로부터의 보호까지 구하려 들었다.
뿐만 아니라 탁군에 살지 않아도 탁군에 이권을 가진 자는
재물을 써서라도 유비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데 장세평 같은 이가 그 대표 격이었다.
그는 탁군 일대에서 말 장수로 생긴 이익의 태반을
유비와 그가 거느린 협객들에게 바쳐 탁군 일대의 말 시장 독점과 아울러
장삿길의 안전을 구해 온 것이었다.
장비와 동성이란 점을 이용해
상인들의 이익 다툼에까지 끼여들지 않으려는 유비를 설득한 것이어서
유비 쪽으로서는 처음부터 달갑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역시 중산 국의 호상인 소쌍이란 자가
탁군의 말 시장을 노리게 됨으로써 유비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소쌍의 패거리와 장비가 노상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사태에 이르자
유비를 둘러싼 유협집단의 인상이 흐려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여러 번 그런 장비를 말렸으나 어찌 된 셈인지
장비가 그 일만은 말을 듣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일은 터져 버린 모양이었다.
☆☆☆
장비가 싸우는 곳은 부근에만 가도 금세 알 만했다.
탁현 성밖 허물어 진 사당 뒤에 작은 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사방 열장 가량의 공터가 있었는데
벌써 5리 전부터
그곳에서 들리는 기합 소리와 무기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까이 갈수록 마치 천군만마가 부딪고 있는 듯했다.
유비가 급히 말을 달려 그곳에 이르니 싸움은 벌써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딴에는 장비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각기 병장기를 꼬나 들고
주변에 둘러선 몇 명의 건달들도 그런 두 사람의 싸움에 완전히 넋을 잃은 채였다.
실로 눈부시리 만큼 화려한 일장의 비무였다.
장비가 한 마리 성난 호랑이를 연상시킨다면
상대는 구름 속에 반쯤 감춘 신용을 떠올리게 했다.
여덟 자나 되는 키에 큰골로 뭉쳐진 어깨,
범의 머리에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과 머리는 올올이 곤두선 채
우레 같은 기합과 함께 내지르는 장비의 창을
한 자루 긴 청룡도로 받아치는 상대는 아홉 자 키에 얼굴은 무르익은 대춧빛이요.
검은 수염은 가슴까지 드리운 장한이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유비는 그런 상대를 보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낱 장사치를 위해 무예를 파는 칼잡이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늠름한 풍채와 전력을 다해 덤비는 장비의 창을
태연히 받아넘기는 칼 솜씨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또 상대는 어디선가 한번 만난 기억 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유비도 이내 둘의 귀신같은 솜씨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장비의 창 솜씨가 예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걸 보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뱀의 모양을 한창은
살아서 꿈틀거리듯 상대의 급소를 찌르고 후볐다.
그러나 상대의 청룡도 또한 칼끝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그때마다 장비의 창끝을 밀어내며 후리고 베었다.
그러다가 유비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장비의 천지가 떠나갈 듯한 고함소리 때문이었다.
"좋다, 이 촌놈아. 나와 함께 천 합을 싸워 보자."
한 차례 무섭게 다가들어 상대를 서너 발자국 물러서게 한 뒤
틈을 얻어 내지른 소리였는데 그 호기에 비해 몸은 어느새 땀 투성이였다.
그렇지만 다시 휙 청룡도를 그어 오는 상대는
무거운 무기를 쓰는 사람답지 않게 숨결이 평온했다.
당장이야 견디겠지만
오래 가면 아무래도 장비 쪽이 불리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걸 보고 어떻게든 싸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유비는
기억을 다해 상대를 만난 것이 언제 어디였던가를 되살려 보았다.
그러자 무슨 영감처럼 스승 노식의 초당이 떠올랐다.
칠팔 년 전 어느 날 유자 차림으로
노식 선생에게 좌씨 춘추를 물으러 왔던 그 장한 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유비의 눈에도
그 풍모가 하도 늠름해 관씨라는 그 성을 기억해 둔 적이 있었다.
☆☆☆
거기서 유비는 돌연 보검을 빼들고 소리쳤다.
"장비. 창을 거두어라."
그러나 장비는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창을 내질렀다.
"형님. 먼저 이놈부터 때려눕혀 놓고 봅시다."
그러나 유비는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다.
섣불리 창을 빼았다가는 그 틈을 탄 상대의 청룡도에 목 없는 귀신이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는 무예를 아는 유비도
장비의 그 같은 처지를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상대를 향해 정중히 청했다.
"관공께서도 잠시만 노여움을 거두시오.
무예를 겨루는 일은 먼저 시비를 가린 뒤에라도 늦지 않소이다."
그러자 상대가 움찔 놀란 기색을 짓더니
한 차례 위맹한 공격으로 장비를 물리친 후 청룡도를 거두었다.
"귀하는 누구시기에 이 몸의 성을 아시오?" 맑고도 우렁찬 목소리였다.
유비가 목청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공은 어찌 동문도 알아보지 못하시오?"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소이다.
나는 일신이 기구하여 스승을 정해 배운 적이 없소."
"한 마디를 배워도 스승은 스승-
공은 벌써 노식 선생의 초당에 좌전을 깨우침 받은 일을 잊으셨소?"
그제야 상대도 엄숙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그럴 리야 있겠소? 그렇다면 귀하는 노식 선생의 문하시겠구려."
그러더니 다시 저쪽 편에서 씩씩거리는 장비를 흘겨보며 물었다.
"노식 선생처럼 고명하신 분의 문하에서 배운 귀하가
어인 일로 시정 잡배들의 싸움에 끼여드시오?
도대체 저 입이 험한 망나니와 어떤 관계시오?"
"뭐라고? 이 촌놈이!"
장비가 다시 사모를 꼬나 들고 덮칠 기세였다.
"장비, 가만있지 못하겠느냐?"
유비가 엄하게 장비를 단속한 뒤 다시 손을 모았다.
"비록 성은 다르나 저 아이는 내 아우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서로 중한 병장 기를 맞대게 되었소?"
"장사치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와 때는 나라도 간섭을 않는 법이오.
그런데 저자가 어느 간상에게 팔려 탁군을 그에게만 독점시키고 있다기에
그 이치를 타일러 주려했으나, 말을 들을 귀가 열려 있지 않아
부득불 이 청룡도로 훈계를 하려 한 것뿐이오."
"그 일이라면 이 유 아무개에게 맡기시오.
반드시 창칼을 맞대지 않아도 좋은 해결이 있을 것이오."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장비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장대인의 그 같은 후의를 입고 도소가 놈에게 장바닥을 빌려주려는 거요?"
"시끄럽다. 내 진작 너에게 이르지 않았느냐?
저잣거리의 장사치들 일에 너무 깊이 간여하면 호걸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딴소리 말아라."
"그래도 싫소. 저놈이 거드럭대는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오늘 이 사모의 맛을 톡톡히 보여줘야겠소."
"장비, 너 다시 이 형을 보지 않으려고 이라느냐?
네가 정히 창 솜씨를 내고 싶거든 먼저 이 형의 칼부터 꺾고 싸우든지 말든지 해라."
금새라도 창을 내지르며 상대에게 달려들 것 같은 장비를
보검까지 쳐들어 보이며 억누른 뒤에야 유비는 다시 관씨 성을 쓰는 사내에게 향했다.
"실은 내가 공에게도 묻고 싶은 게 있소."
"무엇이오"
"내가 듣기로는 좌전이 힘주어 말하는 것은 대의와 명분이라 했소.
그런데 오늘의 시비는 공이 그때 그토록 깨우치고자 하던 좌전의 가르침과
반드시 맞지는 않는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공은 내 아우의 허물만 나무라고 계시나
따지고 보면 공 또한 소쌍이란 장사치의 이익을 위해 칼을 빼는 셈이 되니,
그게 어찌 대의 명분을 아는 호걸의 처사일 수 있겠소?"
그러자 상대의 얼굴에 언뜻 무연한 기색이 떠돌더니 목소리가 흐려졌다.
"이놈이 나선 것은 소쌍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 아무개란 장사치의 행패가 미워서였소."
"군자는 궁하다고 해서 함부로 말을 돌리지 않는 법이라 들었소.
그렇다면 공은 소쌍이란 장사치와는 전혀 무관하시단 말씀이오?"
"그렇지는 않소. 나는 지난날 그에게 약간의 후의를 입은 적이 있소이다."
사내가 솔직히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도 그런 그의 태도에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 보시오. 그렇다면 장세평의 후의를 입은 적이 있는 내 아우 허물만 어찌 탓할 수 있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공의 허물을 들추자는 뜻은 아니오.
다만 내 아우의 입장도 공께서 헤아려 달라는 뜻일 뿐이오.
공이 원하시는 바는 꼭 이루도록 해 드리겠소."
유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들고 있던 칼을 칼집에 꽂고 새삼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는 유비라 하며 대대로 이 탁군에서 살았소.
다행히 인연이 닫지 못해 공의 존성은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아직 대명은 모르고 있소이다.
어리석고 미천한 이 비의 귀에
우레 같은 대명을 담을 영광 주실 수는 없으실는지"
그러자 관우도
청룡도를 땅에 꽂고 엄숙하게 두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소생의 보잘것없는 이름은 관우라 하오.
자는 본시 장생 이었으나 요즈음은 고쳐 운장으로 쓰고 있소이다.
하동 해현이 고향인데,
어떤 일로 그곳을 떠나 여기저기 떠다니다
이 탁군에 와 숨어 산지 몇 해 되오이다."
"영웅을 곁에 두고 여태 알아보지 못했으니 모두가 이 유비의 눈 어두운 잘못이외다.
늦게나마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세상이 새로운 감이 있소이다."
유비는 그렇게 말한 뒤 아직도 씩씩거리고 서 있는 장비를 돌아보았다.
"내 아우는 이름을 장비라 하고 자를 익덕으로 쓰고 있소 본시 연땅 명문의 피를 받았으나
난세를 만나 간신배의 참소로 일가를 잃고 어릴 때부터 이곳 저잣거리에서 자랐소이다.
성품이 과한 데가 있으나,
불식를 보면 사갈처럼 미워하는 의기 남아로 벗하여 허물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방금 힘을 다해 싸우던 상대라 얼른 말이 나오지 않는지 관우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고 장비도 여전히 씩씩거리며 관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걸 보고 유비가 다시 한번 장비를 책망했다.
"형이 이미 이름을 통했으니 관공은 형의 벗이나 다름없다.
얼른 관공을 나를 대하는 예로 뵙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장비도 할 수 없다는 듯 사모를 땅에 박으며 억지로 두 손을 모았다.
"장비가 관공을 뵙습니다."
목소리는 아직도 질그릇이 깨지듯 거칠었다.
관우도 공손히 손을 모아 답례했다.
"장공을 만나 이 관우도 기쁘오이다."
얼른 보아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통성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제 주루로 자리를 옮겨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 이 어떻겠소?"
장비와 관우 두 사람이 마지못해 화해를 한 걸보고 유비가 다시 그렇게 제의했다.
그리고 관우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침 어물어물 다가오는 소삼에게 명했다.
"너는 지금 즉시 내 말을 타고 성안으로 달려가
깨끗한 주루 하나를 비우고 향기로운 술과 좋은 안주를 준비케 하라."
그 말에 장비는 금세 안색까지 환해졌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 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그토록 술을 금하던 유비가
스스로 술자리를 마련하게 하니 아니 기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우는 아무래도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는 모양이었다.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사양을 한다.
"뜻은 고마우나 하회를 기다리는 자가 있어서..."
"그게 누구 시오?"
"소쌍이 그 수하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소이다."
"그 일이라면 염려 마시오.
사람을 보내 소쌍에게 부리는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라고 하시오.
나와 아우가 공과 함께 있는 한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없을 것이오."
그러더니 다시 장비를 향했다.
"장비 너는 지금 사람을 장대인에게 보내 우리가 있는 주루로 모시고 오도록 하라."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관우도 어느 정도 그 뜻을 짐작했는지
자기를 따라 온 장정들을 불러 청룡도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거라.
그리고 소쌍에게 방금 들은 대로 이르고 거처를 정하는 대로 우리가 있는 주루를 찾게 하라."
그러자 장비도 사모와 함께 졸개들을 돌려보내고,
셋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성안으로 돌아갔다.
☆☆☆
그렇게 세 사람이 원만한 결말을 짓게 된 경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비에 대한 장비의 고분고분함은 물론 관우의 순순한 응종도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유비가 한 번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다지만,
그 한 번의 은의로는 아무리 의리를 중시하는 유협세계의 일이라고 해도
장비의 복종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관우 역시 노식에게 몇 번 좌전을 깨우침 받은 적이 있다 해도
정식으로 노식의 문하에 든 것은 아닌 만큼 유비의 한 마디에 한창 불붙은 싸움에서
칼을 거둘 정도의 인연은 못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의혹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유비의 가장 무서운 힘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성숙할수록 한층 환한 및이라도 떠돌듯
온화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까닭 모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체모,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저항하기 어려운 위엄이 깔린 음성,
태산처럼 우뚝하면서도 종내 그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몸가짐,
그러한 것들이 어울려 내는 묘한 힘과 부딪고 보면 누구도 쉽게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유비를 힘으로 이기고 말재간으로 속이고 학식으로 억누른 뒤에도
항상 그 상대로 하여금 정말로 지고 속고 밀린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에 젖게 하는 어떤 것이
유비의 크고 환한 정신에서 우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간 소삼의 전갈을 받은 건달 몇이
벌써 저자에서 제일 술맛이 좋다는 주루 하나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급작스러워 안주는 변변치 못하나 술만은 잘 익은 천일취가 독채 있습니다.
천천히 드시면 되는대로 안주도 갖추어 보겠습니다."
주인도 문 앞까지 나와 유비 일행을 그렇게 맞았다.
☞ 천일취란 인근에 이름 높은 그 주루의 술로
주인이 그걸 독채 내놓겠다는 것은 예사 아닌 경의의 표시였다.
유비 또한 조금도 거드럭대는 기색 없이 주인의 인사를 받았다.
"주인 어른께서 몸소 나와 마음을 써 주시니 어떻게 해야 바른 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안주는 가리지 않으려니와 잔은 큰 것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오늘 숨은 호걸 한 분을 만났으니 이 비도 흠뻑 취해 보렵니다."
그리고 관우를 인도해 상좌에 앉기를 청했다.
그제야 관우도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내 듣기에 남의 손된 자 주인의 자리를 뺏지 않는다 했소.
오늘 이 자리는 형장이 마땅히 주인이니 어찌 이 관 아무개가 높은 자리에 앉겠소?"
"그렇지 않소이다. 오늘 이 자리는 관공을 위해 마련했으니
마땅히 관공이 이 자리의 주인이오. 사양하지 마시오."
유비는 다시 그렇게 권했으나
관우가 재차 사양하자 할 수 없이 상좌를 없이 하고 셋이 평배로 술상에 둘러앉았다.
"내 이미 말했지만 관공께서는 신룡 같은 품자를 지니시고
어찌하여 우리 탁군같은 궁벽한 곳에 몸을 숨기게 되시었소?"
한 순배 술이 돈 뒤에 유비가 진작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 말에 관우의 짙은 눈썹이 꿈틀하며 미간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그러나 조용히 긴 수염만 쓰다듬으며 얼른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분명 무슨 감추어진 까닭이 있으나 섣불리 털어놓기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유비가 그걸 알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내가 공연한 말을 한 것 같소.
영락한 산실의 말예로 저자 바닥을 헤매는 나나,
역시 멸문의 잔예로 돼지고기나 썰어 파는 장비의 안목으로
감히 공의 깊은 바다 같은 가슴속을 들여다보려 한 허물을 용서하시오."
뜻은 은근히 관우를 격동시키는 데가 있었지만,
말투만은 겸손하고 성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자 관우도 슬며시 마음이 움직이는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찮은 말씀이오, 내가 잠시 망설인 것은 이 한 몸의 내력이 무어 대단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쫓기는 데가 바로 관부이기 때문이었소.
굳이 알고 싶다면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없소"
"저희 못난 형제를 믿어 주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관부에는 무슨 일로 쫓기는 바 되셨소이까?"
"귀공들도 아시겠지만
우리 하동 해 땅은 예로부터 소금으로 유명한 곳이외다.
그런데 5, 6년 전 못된 토호 한 놈이
한편으로는 관부에 줄을 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깨나 쓰는 건달들을 사
그 소금밭을 오로지 하고 소금장수들의 고혈을 빨기 시작했소.
특히 십상시의 우두머리 장양의 조카인 현령놈과 배가 형아 아우야 하며 지내니
그 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그래서 어느 날 두 놈의 술자리에 뛰어들어
모두 베어 죽여 버렸는데 그게 관부의 쫓김을 받게 된 내력이오."
"소쌍과는 어떤 사이시오?"
"옛적 해 땅에서 소금장수들의 뒤를 보아주고 있을 때 알게 되었소.
비록 장사치라도 도량이 넓고 헤아림이 밝아 깊이 마음을 허락하고 지냈는데,
내가 관부의 쫓김을 받게 되자 그가 자기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숨겨 주었소이다.
지금 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도 실은 그가 주선 해 준 것이오."
"원래 그런 은의가 얽혀 있었구려.
나도 관공이 몇 푼돈에 팔린 칼잡이로 보지는 않았소만..."
그런데 그간 거처하신 곳이 어디였소?
한 고을에 살면서도 통 뵈온 적이 없으니 이 몸의 눈멀고 귀어두움이 부끄러워 묻는 말이오."
실은 묻고 있는 유비에겐 그 일이 이상했다.
그만 정도의 인물이라면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고
남의 눈에 띄었다면 유비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탁군 안의 마을이라면
유비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관우는 그런 유비의 뜻을 달리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앙향 이가촌에 소쌍의 처족이 있어 그곳에 몸을 숨겼소이다.
이름을 바꾸고 몸을 움츠려 마을의 소동들이나 가르치고 있었으니
어찌 형장의 고명한 눈에 들 수 있었겠소?"
"역시 그러셨구려.
근래 그곳 젊은이들의 행실이 단정하고 학식이 늘더니
그게 모두 공의 감화를 받은 덕분인 것 같소."
"과분한 말씀이오.
실은 내가 서책을 가까이한 것이
그대 형장의 영사되시는 노식 선생의 초당을 찾을 무렵이 처음이오.
그러나 재주가 모자라는 데다 쫓기는 신세가 되다 보니
지금 더듬거리면서라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춘추경 하나뿐이오.
그런 내게서 무슨 배울 게 있겠소?"
"맹자께서 이르기를 춘추가 만들어지니 난신 적자가 모두 두려워했다 하였소.
천하의 대의 명분을 밝히는 필법의 엄정함이 추상 같으니
이 같은 난세에 그보다 더 적절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소?"
☆☆☆
그때 묵묵히 술잔만 비우고 있던 장비가 불쑥 관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의 그 도법은 어디서 익히셨소?"
아직도 목소리는 퉁명스럽지만 마음은 완연히 풀어진 것 같았다.
거푸 들이킨 술로 기분이 좋아진데다,
관우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밝은 세상에서는 얻을 게 별로 없는 처지라는 걸 듣자
조금 전까지 느끼던 맹렬한 적개심이 스러진 탓이었다.
거기다가 거칠게 살아온 그였지만 관우의 비범함을 알아볼 안목은 있었다.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다가 한 숨어 달인을 만나 몇 가지 도법을 흉내내게 되었소.
그런데 그걸 왜 물으시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관우 또한 장비를 밉게만 보고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내 이마에 땀이 솟게 하였으니 필경 비범한 스승을 두었으리라 싶어 물어본 거요."
그런 장비의 말투에는 관우의 청룡도 솜씨에 대한 은근한 감탄이 배어 있었다.
관우도 비슷한 느낌인 듯 희미한 미소로 장비의 말을 받았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요.
지난 5년 동안 관병의 추격도 받고 녹림의 무리들과도 자주 맞닥뜨렸지만
아직 내 청룡도는 백합이나 받아 낸 사람은 장형뿐이었소.
장형이야말로 그 무서운 창법, 어디서 배우셨소?"
"나야 뭐...그저 가학이오.
나를 길러 준 노복이 사모와 함께 전해준 몇 수를 홀로 연마한 것뿐이외다.
뒷날 기회가 있으면 관형과 한번 더 겨루어 보고싶소 만..."
장비는 아직도 호승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비가 가볍게 나무랐다.
"병장 기란 흉한 물건이니라. 이제 우리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귀려는 터에
무엇 때문에 창칼을 다시 맞대려 드느냐?"
"내가 어디 피를 흘리며 싸우자고 했소?
형님은 공연히 사람을 몰아 대지 마시오.
길고 짧은 걸 한 번 대 보자는 뜻일 뿐이란 말이오."
"그러면 네가 이길 것 같으냐?
내가 보기에 너는 관공의 신기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그 말에 힘쓰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장비가 벌겋게 성을 냈다.
"형님은 이 장비를 무얼로 보시오?
그렇다면 내 사모를 가져올 테니 관형도 다시 청룡도를 내오시오."
장비는 금새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설 태세였다.
관우가 미미하게 웃으며 그런 두 사람을 말렸다.
"무예란 맞수가 겨루는 것 이상 훌륭한 연마가 없을 것이오.
유형은 너무 영제를 허물 하지 마시오.
내 그렇지 않아도 틈만 나면 영제와 어울려 시원찮은 도법을 더욱 가다듬을 참이었소."
거기다 때마침 소쌍이 찾아 들어 장비도 어물어물 주저 않고 말았다.
☆☆☆
유비도 말로만 듣던 소쌍을 대하자 처음에는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막연히 돈푼 깨나 긁어모은 늙은 장사치로 생각했는데,
막상 대하고 보니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영준한 청년이었다.
거기다가 말투까지도 장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치와는 달랐다.
"유, 장, 두분 대협의 높으신 이름은 우레처럼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이 소 아무개의 광영이올시다."
결코 입에 발린 아첨 같지 않은 말이었다.
몇 번 말이나 그의 일꾼들을 때려눕힌 장비까지도
정중하게 그의 예에 답할 정도였다.
"관대협께서 실로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술자리에서 내가 가볍게 내뱉은 말에 대협께서 이토록 몸소 나서실 줄은 몰랐습니다."
유비와 장비에게 차릴 격식을 다 차린 소쌍은 다시 관우에게 그렇게 치사를 했다.
그 말투 어디에도 자신이 불우한 망명객을 뒤봐주고 있다는 거드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관우도 의적하기 그지없었다.
"장세평이란 장사치가 너무 하는 것 같아 내가 잠시 분격했던 것 같소.
다행히 여기 이 두 분형께서 일을 원만하게 주선해 주겠다 하시니
이 몸이 헛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소이다."
한편으로 유비에게 은근히 약속을 상기시키는 말투였다.
그러나 유비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주루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중년 사내가 들이닥쳤다.
번들번들한 비단옷으로 피둥피둥한 몸을 감싸고 나타난 그는
대뜸 장비에게 반호통으로 나왔다.
"장비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바로 그때 것 탁군 일대의 말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장세평이었다.
어떻게 끌어대다 보니
장비의 아재비 뻘이 된 그는 재물의 힘을 믿는지 자못 위세 당당했다.
유비의 뜻을 짐작하는 터라 면목없이 된 장비는
이미 술로 벌개진 얼굴을 더욱 붉히며 유비만 쳐다보았다.
난폭하고 거친 것에 못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장비는
오랜 약정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게 무안한 모양이었다.
"장대인도 거기 앉으시오."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눈길로만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이상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전에도 몇 번 유비를 보았지만 그런 심상찮은 태도는 처음 보는지 장세평도
움찔하며 유비를 살피다가
이내 수그러든 기세로 유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혹 아실는지 모르지만 이분은 장대인과 같이 중산국의 호상이신 소쌍이란 분이오.
먼저 인사라도 나누도록 하시오."
장세평이 앉는 것을 보고
유비가 다시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송이는 이미 알고 있소.
그 보다는 유형, 아니 유대협, 무슨 일이시오?
저 애송이는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끌어들이셨소?"
장세평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유비의 위엄에 눌리어 진정하려고 애썼지만
소쌍을 대하자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비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변화가 없었다.
"저분도 장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우리 탁군으로 말을 몰고 왔소.
함께 사고 팔 분이니 알고 지내시는 게 좋을 듯싶소."
"그럼 기어이...그런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여러 호걸 님들께 제가 섭섭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잘못 같은 건 없소이다."
"그럼 왜 마판을 저 애송이와 나누어 가지라는 겁니까?"
"원래부터 저잣거리는 어느 한 장사꾼을 위한 게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게 잘못된 일이었소."
그러자 장세평은 완전히 낙담한 표정이었다.
탁군의 말 시장을 독점하여 적지 않게 재미를 보아 왔는데,
갑자기 젊고 재치 있는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장비를 어떻게 다그쳐 볼 까도 생각했으나
자신을 외면한 채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는 모습을 보자 유비에게 한 번 더 매달려 보기로 했다.
"유대협, 다시 한 번 헤아려 주십시오. 앞으로는 더욱..."
그때 곁에서 보고 있던 소쌍이 유비를 대신해 나섰다.
"대인, 고정하십시오. 저는 결코 대인의 이문을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그 말에 장세평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소쌍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네 놈의 혀가 길고 미끄럽다는 말을 이미 익히 들었다.
뭐 이문을 해치지 않는다고? 아니 어째서 혼자 거두던 것을 둘이서 나누는데
이문이 줄지 않는단 말이냐?"
"의심스러우시면 저와 동업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인께서 지금 탁군에서 얻는 이문을 제게 일러주시면
한 행비 장사가 끝날 때마다
먼저 대인의 몫을 채워 드리고 나머지만 제 몫으로 하겠습니다."
"여우같이 간사한 네놈을 믿고 어떻게 같이 장사를 한단 말이냐?"
"그건 여기 유대협께서 보증해 주실 겁니다."
소쌍은 그 말과 함께 유비를 돌아보았다.
"제 말씀대로 해주시겠습니까?"
유비는 갑작스런 요청을 받고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장하겠소.
거기다가 앞으로 탁군 뿐만 아니라
전 유주(탁군이 포함된 북주의 주) 경내에서는 아무도 대인을 건들지 못할 것이오."
말하자면 독점을 과점으로 바꾸는 대신 보호지역을 넓힌 것이었다.
아직은 소쌍도 유비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장세평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비의 결정을 따르고, 그 결과가 좋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장세평이 못마땅한 대로
좌중이 권하는 술을 몇 잔 마시고 일찍 자리를 뜬 뒤였다.
유비가 문득 소쌍을 보며 물었다.
"보아하니 소형은 글을 읽으신 분 같은데 어찌하여 이토록 일찍
재리에 눈뜨시게 되었습니까?"
"작게는 천금을 모아 한 몸의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고,
크게는 저 문신후 처럼 기화를 사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쌍이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문신후란 진의 대상인인 여불위의 봉호로
그는 천금을 던져 진시황의 아버지인 자초를 한낱 볼모로 가 있던 진왕의 서얼에서
장양왕에 오르게 한 사람이다.
마지막은 스스로 짐독(=독의 일종)을 마셔 끝냈으나
그가 일시에 누린 영화는 가히 왕자에 비할 만했다.
"기화라면?"
"당장은 물건도 아니고 금전도 아니지만,
사서 두면 재물도 되고 명예도 되고 벼슬도 되는 재화입니다."
"무엇이 그런 게 되겠소?"
유비가 속으로는 짐작 이가면서도 짐짓 물었다.
그러나 소쌍은 다만 조용히 웃을 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야 유비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제가 오늘 그 기화를 사게 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일에서
유비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역시 관우를 알게 된 일이었다.
그후로도 셋은 틈만 나면 어울렸고,
나중에 관우는 거처를 아예 유비의 울타리 속으로 옮겼다.
비 온 뒤에 더욱 땅이 굳어지듯
장비와 관우 사이도 언제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느냐는 듯 친숙해졌다.
주로 무예 단련의 상대로 점점 가까워진 그들은 머지 않아 호형호제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나이가 장비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관우가 형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