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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순천만(上)
전 호 준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잠이 오질 않는다. 소풍 전날 밤 초등생 같이 여행을 앞둔 설렘일까? 날씨 때문에 예민해진 신경 탓일까? 지난 토요일 부처님오신 날부터 시작된 비가 3일 연휴 내내 오락가락 마음 졸인다.
휴대전화를 열어 오늘의 날씨를 검색했다. 레이더 영상에 포착된 구름이 우리의 갈 길을 알기나 하듯 전남과 경남지방 일대를 뒤덮고 있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비는 잠시 그쳤지만,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잠깐의 선잠에 휴대전화 알람이 잠을 깨운다. 서둘러 여장을 챙겨 약속 장소인 친구 집으로 갔다.
같은 해 퇴직한 동료 3명이 합심해 매년 부부 동반 2박3일 일정으로 국내 여행을 해왔다. 이번엔 전남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장 견학을 하기로 했다.
친구가 준비한 융숭한 아침밥에 농촌에 거주하는 친구가 손수 잡은 자연산 미꾸라지 튀김까지 더하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친구들의 정성 어린 우정이 참 고맙다.
렌터카 6인승 카니발 승용차 핸들을 잡았다. 최신형 차종에 자동화된 기기 조작에 신경이 쓰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진다. 다행히 하늘도 서서히 개니 기분이 한결 가볍다. 비에 씻긴 산천초목은 푸른빛을 더하고 길가에 만개한 황금빛 금계국이 눈부시다. 드문드문 모내기를 마친 논물 위로 바늘잎을 내민 벼가 바람결에 하늘거린다. 온통 흰 구름처럼 날아오를 듯 화사하던 벚꽃 향연이 끝난 자리에 아카시아가 대신했는데 어느새 하얀 밤꽃이 임무 교대 했다. 언 듯 언 듯 스치는 보리밭이 이채롭다. 경상도 보리 문둥이가 고향에서도 보기 드문 보리밭을 멀리 남도 땅에서 보니 어릴 적 기억이 새롭다.
광주·대구 고속도로 남원 분기점에서 순천-완주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예상한 일 비교적 비와 친한 사람들이라 개의치 않고 빗속을 달려 박람회장 서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비를 피해 주차장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준비해 간 음식으로 노숙자처럼 쪼그리고 앉아 먹는 재미, 노년의 또 다른 추억이 된다.
박람회장 투어에 나셨다. 경로 무료입장이다. 감사하는 마음보다 가버린 세월이 서글프다. 입구에 들어니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란 글씨도 선명한 꽃으로 장식된 거대한 지구모형의 상징물이 도는지 마는지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앞쪽 입구로 들어섰다. 강을 가로지르는 길이 175m의 꿈의 다리다. 30여 개의 빈 컨테이너를 두 줄로 연결 여러 개의 작은 창을 내어 강물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진 지붕이 있는 사각형 다리다. 외벽은 오방색 한글 유리 타일 작품 1만여 개로 장식했으며 내벽은 세계 여러 나라와 우리나라 어린이 작품14만 점의 타일로 제작 장식한 세계 최초 물 위에 떠 있는 미술관이라 한다. 다리를 나오니 기화요초와 희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아름다운 정원이 낙원처럼 펼쳐진다.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인증 샷에 여념이 없다.
수십만 평의 정원을 발품으로 돌아보기란 시간도 체력도 고희를 넘긴 나이에는 무리다. 궁여지책 정원일주庭園一周 관람차가 있어 표를 구입 몸을 맡겼다. 중국 정원을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멕시코,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튀르키예, 영국, 일본, 태국 정원까지 12개국의 정원이 차례로 펼쳐진다. 비에 젖은 풍광이 갓 그린 수채화처럼 산뜻하다. 관람차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바쁘게 눈을 돌려 보지만, 언 듯 언 듯 지나가는 풍경에 이국의 정취를 느껴볼 겨를도 없이 수박 겉핥기지만, 그래도 눈만은 즐겁다.
중간지점이라 할까? 제2 매표소란 곳에 내렸다. 자유로이 정원을 산책하다 수시로 관람차를 다시 이용할 수 있다는 설명에 식물원을 비롯해 주위를 한동안 돌아보고 다음 일정을 고려해 플랫폼으로 왔다. 지그재그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에 지루함이 발동한다. 행사 기간 중 관람 연인원 800만 명이 목표라 한다. 성공을 기원하며 박람회장을 나왔다.
옛날 성읍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낙안읍성을 찾아 나셨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목적지 부근이라는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차를 세웠다. 산지가 아닌 평평한 대지에 길게 뻗은 거대한 성벽이 가로 막아선다, 나로선 처음 보는 성의 형태에 마음이 설렌다.
성루와 성문 위에는 깃발이 펄럭인다. 어느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낙풍루란 현판이 붙은 성문으로 들어갔다. 읍성의 동문이라 한다. 읍성은 풍수지리상 동, 서, 남 세 곳에 문을 설치했는데 남문이 정문이란 설과 동문이 정문이었다는 설이 상충한다고 한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남대리 소재 낙안읍성은 넓은 평야 지대에 쌓은 총길이 1,420m 높이 4m 장방형 석성으로 1~2m 크기의 자연석을 견고하게 쌓아 끊어진 곳이 없는 유일한 읍성으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태조 6년 왜구들의 침입에 김빈길이란 분이 의병을 일으켜 처음 토성을 쌓았고 인조 4년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부임해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 동, 서, 남내리 3개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전체면적은 223,108㎡ 이른다.
비가 오는 탓인지 인적이 끊인 성안은 너무나 조용하다.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과 돌담길 가끔 눈에 띄는 주차된 차량과 현대식 농기구를 제외하면 그 옛날 읍성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다. 90여 세대가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다.
임경업 장군의 선정 비각 앞에 묵례하고 한동안 들어가니, 커다란 솟을대문 양쪽에 창을 든 병사가 문을 지키고 서 있다. 모형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당使無堂 이란 현판이 걸린 팔짝 지붕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대청마루엔 관복을 입은 고을 수령이 의자에 앉아 호령하듯 아래를 내려다보고 왼편으로 흰 두루마기에 갓 쓴 관리가 송사 내용을 기록하듯 붓을 쥐고 앉아있다. 마루 아래 양편으로 두 사람의 관리가 손을 모으고 읍하듯 서 있고 계단 아래로 머리가 헝클어진 죄수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옆에는 육모 방망이를 든 포졸이 죄인을 노려보며 서 있다. 옛 송사의 모습을 재현한 실감 나는 조형물이다.
동헌東軒이라는 조선시대 지방관아로 송사를 처리하던 곳이다. 동헌을 사무당이라 함은 논어 안연편顔淵篇을 인용 송사에 지방 수령의 권력 남용으로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옛사람들의 자취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지만, 궂은 날씨와 내일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예약된 펜션을 찾았다. 순천만 갈대숲이 코앞인 곳이다.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한 펜션 촌 같다. **펜션 별관 우리들만의 공간에 여장을 풀었다.
비교적 넓고 깨끗한 곳이라 기분이 좋다. 저녁 식사 후 산보 겸 거리로 나왔다. 너무나 조용하다. 그 많은 펜션과 식당은 거의 불이 꺼져있다. 인적인 끊긴 거리는 적막함이 감돈다. 낮에 보았던 거리 모습과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로나 여파일까? 날씨 탓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가 묵는 펜션 주차장도 텅 비어 있다. 옆집 국제정원박람회 탓일까? 비수기일까?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잠을 청했다.
비 내리는 순천만(下)
전 호 준
세계 5대 연안습지로 생태계의 보고 평화의 정글이라는 순천만 습지 갈대밭 탐방을 위해 펜션을 나왔다. 걸어서 10분 거리다. 9시에 문을 연다는 안내판을 보고 한참을 기다렸다. 앞으로 보이는 넓은 주차장은 차량 몇 대만 빗속에 외로이 서 있다. 지난밤 적막하던 거리 정경이 떠오른다. 날씨 탓인가 비수기인가 예상외로 너무나 조용하다. 우리 일행을 비롯해 불과 10여 명이 입장했다.
순천만 습지란 현판이 붙은 입구로 들어갔다. 여기도 신분증을 보이니 무료 통과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길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승용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부산하다. 5년 전 가을, K 산악회 주관으로 처음 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한동안 걸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무진교 다리 위에 올라서니, 강물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녹색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유명한 순천만 갈대밭 습지다. 건너편 저 멀리 아득하게 전망대가 있는 용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남해의 용이 승천을 하다가 순천만의 아름다움에 반해 내려와 머물다 산이 되었다는 용산, 5년 전 가을 용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순천만 갈대밭은 회갈색으로 추수가 끝난 들판 같기도 하고 갈대숲 같기도 했다. 오늘의 갈대밭은 어릴 적 고향 들판의 청 보리밭이 연상 된다.
끝 모르게 뻗어있는 멋진 방부목 데크 탐방길이 우리를 마중하지만, 조금 걷다가 되돌아 나왔다. 흐린 날씨에 오락가락하는 빗방울보다 고장 난 벽시계가 아닌 고장 난 무릎들이 걸림돌이다. 칠십여 년을 사용했으니, 어쩌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 나니, 우리네 할머니들이 즐겨 부르던 노랫가락을 떠올리며 여행도 다리가 성할 때 해야 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나오는 길 습지 자연생태관 전시실에 들렀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라운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로비 중앙에는 거대한 흑두루미 조형물이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2층에는 순천만에 서식하는 다양한 갯벌 생물과 철새들에 관한 전시시설과 영상물이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에 습지를 거니는 기분이다. 순천만은 다양한 갯벌 생물과 철새는 물론 주변에는 갈대 외에도 100여 종의 식물들이 분포 자생하고 있다 하니, 생태계의 보고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습지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 경남 통영으로 차를 몰았다. 남해고속도로에서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 통영 방향 북 통영IC를 진입 목적지 통영대교 밑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통영 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오른다. 장군의 시호를 딴 충무시와 삼도수군 통제영의 줄임말 통영군으로 나누었으나 1995년 1.1일 충무시와 통영군을 통합 도농 복합형태의 통영시로 명명되었다 한다.
통영대교를 지나 대교 밑 통영 해양 공원 주차장에 내렸다. 흰 구름이 두둥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작은 항구다. 보랏빛 바다 위에 작은 배들이 오락가락 한 폭의 수채화다. 통영별미 해물 돌솥 밥을 더 하니 불편했던 빗길 여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한결 가볍다.
통영 일주도로를 한 바퀴 드라이브하며 한려수도의 명물 통영 케이블카를 찾았다. 해발 461m 미륵산에 설치된 길이 1,975m라 한다. 통영시와 한려수도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한려수도 저마다 독특한 자태를 뽐내는 많은 섬 섬 사이사이 한산섬에 눈길이 머물렀다. 30여 년 전 아름다운 한려수도 뱃길로 한산섬을 찾아 수루에 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충무공의 고뇌에 찬 우국충정의 시조 ‘한산도가’ 떠올라 잠시 묵념을 올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통영 중앙시장에 들러 오늘 밤 만찬 준비를 해 예약한 숙소를 찾았다. 작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션 2층이다. 통영 서쪽에 자리한 그림처럼 아름답고 아담한 평림항이다.
준비해 온 생선회와 소주병이 식탁에 오르고 창가에 둘러앉았다. 일몰의 시작이다. 창문을 열었다. 석양빛에 물든 평림항은 한 폭의 그림이다. 양식장에 가지런히 뜬 부표들이 석양빛에 바다 위 꽃밭 같다. 불 꺼진 등대 위로 나그네 갈매기 한 쌍이 잘 곳을 찾는 듯 선회한다. 부딪치는 술잔에 밤은 깊어지고 우정도 깊어만 간다. 잔이 더 할수록 소주 맛이 감로수 같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내자들이 정성스레 끓인 매운탕에 지친 속을 달래고 경남 사천의 신라시대 고찰 다솔사 순례를 위해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저 멀리 바다 위로 내려앉은 먹구름이 앞길을 예고한다. 이틀간 잡았던 핸들을 친구에게 넘겼다. 몸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통영을 벗어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를 따라가는지 비가 따라오는지 비와의 인연은 어쩔 수 없다. 갈수록 더하는 세찬 빗줄기에 핸들을 인계한 마음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2번 국도를 따라 한동안 달려 하동 사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든다. 드문드문 형성된 촌락들 정겨운 시골 풍경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다는 길, 당시에도 이렇게 비가 왔을까?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동안 들어가니 길 좌우로 하늘을 떠받치듯 곧게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내리는 비에 희뿌연 안개를 머금고 길게 이어진다. 절이 가까웠다는 느낌이다. 잠시 내려 피톤치드라도 하고 싶지만, 내리는 비가 아쉽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텅 빈 주차장엔 빗소리만 들릴 뿐 적막강산이다.
다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 신라(지증왕12)에 처음 세워져 영악사라 했으며 신라 말기 도선이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전화戰火로 불탄 것을 숙종 때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나 1914년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다솔사는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자연석으로 쌓은 돌계단을 올랐다. 대양루라는 편액이 붙은 2층 누각이 우뚝 서 있다. 이 건물은 영조 34년(1758)에 지은 것으로 마당을 가운데 두고 주 불전인 적멸보궁과 마주 보고 있다. 승려들의 수도장이었으나 지금은 차茶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 운동을 할 때 수업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단편소설 등신불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다솔사 응진전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승려 만해 한용운님이 머물며 수도한 곳으로 독립선언서 공약 삼 장 초안을 작성하셨다 한다.
적멸보궁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푸른 녹차밭이 이색적이다. 다솔사는 한국 근대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초의선사에 이어 효당 스님은 근대 차 문화의 개척자로 다솔사 차밭을 확장 개척하고 “한국의 차도”를 저술 오랜 역사와 전통의 한국 차 문화가 일제강점기 대부분 쇠퇴했으나. 다솔사 차를 통해 다시금 일깨워 육성 발전시켰다. 한다. 다솔사 선차禪茶는 그 명성이 자자하단다. 빗속에 산사는 정적만 감돌고 선차 맛을 볼 겨를도 없다. 쏟아지는 비에 일찍 귀가 하자는 의견에 따라 사흘간의 순천만 빗속 기행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차를 돌렸다.
< 프로필 >
* 2016년 <수필춘추>등단
* 한국문인협회. 달구벌수필문학회원
* hojun28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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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선생님 순천만 여행을 가셨군요.얼마 전에 저도 한번 다녀왔는데 전에 보다 더 손질이 잘 되어있었습니다. 여행은 노후를 즐겁게 해줍니다. 코로나로 여행을 못가서 아쉬었는데 이제 갈 수 있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