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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6강 - 아잔 차 스님의 청정한 마음과 아짠 붓다다사의 열반
00:07우리가 이렇게 단순히 불교 알자는 게 아니라 철학을 해야 됩니다. 철학을 안 하면요 과학이 헤맬 때 또 철학이 빛을 주고 해야 돼요. 과학도 다 철학이 빛을 줘서 과학도 발전한 거고 처음 과학자들 다 철학자들이었고요. 그러니까 철학과 과학이 또 둘이 아니라 함께 가야 되는데 철학이 제 역할을 못하면 과학도 또 답을 잃는 거예요. 인공지능시대가 됐는데 인간이 뭔지 몰라요. 이것도 철학 잘못이죠. 과학 잘못은 아니죠. 이건 철학 잘못이지. 인간이 뭔지 왜 정확히 못 밝혔는가? 이런 면에서 서로 공조한다는 개념을 생각하시면 좋겠고요. 항상 이 기본으로 돌아가세요. 그래서 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는 마음은 불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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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과학적으로 얘기한다고 해도 또 철학적으로 얘기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건 육근밖에 없고요. 육근도 돌아보면은 이거 지금 여기 생각 감정 작용 요거 빼고 나머지는 지금 다 오감이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당신이 우주다”라고 하는 과학자들이 쓴 책, 힌두교 베이스로 과학자들이 쓴 책을 봐도 놀라울 정도로 결국 유식학이나 서양철학에서 유식학에 해당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와 거의 똑같습니다. 내용이 과학적 언어만 쓰고 있지 핵심 주장은 다 똑같아요. 결국 쇼펜하우어가 해놓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다시 보시는 것도, 철학이 어떤 답을 내렸는지 한번 알아보는 것도 되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과학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제시한 게 왜 똑같으냐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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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거기서 지금 현대 과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게 뭐냐? 양자 하나를, "당신이 우주다"의 그 책에서, 양자를 정확히 내 의식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느냐 이거죠. 양자도 내 의식의 대상일, 표상일 뿐인데 내 의식이 떠오른 표상일 뿐이라고 알고 접근하는 거랑 내 밖에 양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랑 다르다는 거예요. 이게 현대 과학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도. 왜냐하면 이게 또 팩트니까. 제가 아까 얘기한 이게 다 지금 과학적인 거예요. 철학이면서 과학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 경험하는 건 육근밖에 없는데 이 육근 작용에다가 언어를 붙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언어의 특징이 뭐였죠? 고정 불변 독립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로 사물을 이해해버리는 순간 밖에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경험하신 건요 그냥 여러분 마음 안에 오감을 경험하신 겁니다. 이게 들어왔어요. 그냥. 이걸 경험했어요. 촉감 정보, 맛 정보, 소리 정보, 다양한 게 왔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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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를 펜이라고 해버리면서 여러분 펜하고 확 멀어지는 겁니다. 펜 하면서 나 밖에 고정불변의 펜이 있는 거예요. 영원히 펜일 것 같은 존재가 하나 되는 거예요. “영원한 펜이 있다”라고 내 법계에서는 규정돼 버린 거죠. 이거를 불교식으로 법집(法執)이라 그래요. 법집. 법에 대한 잘못된 집착. 여기서 또 생각 중에 하나가 에고 의식이 생겨나서 이건 아집이에요. 내가 별도로 있는 것 같은 집착, 아집. 존재가 별도로 있는 것 같은 집착, 법집. 이거(법집) 깨는 게 법공, 이거(아집) 깨는 게 아공이거든요. 그래서 아공 법공 얻어서 자유 얻자는 게 불교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 아공과 아공 법공을 얻으려면 2공이라고 하죠. 이게 2공인데 2공을 얻어서 깨닫는 게 뭐냐? 열반 진여의 세계예요. 진여의 세계. 결국 이거 깨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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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의식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아공 법공까지. 법집도 이해되시죠. 법집의 언어가 치명적인 역할을 합니다. 언어가 딱 규정해버리면서 나랑 다른 존재가 돼버립니다. “동물” 하면서 그냥 동물이 있는 거예요. 내 밖에 영원히 일정한 법칙으로 존재해요. 왜냐면 개별 구체적 사물을 이데아의 세계에 결합시켜버리면 보편 추상적인 개념이 나와 버려요. 그럼 이게 우리가 경험하는 건 개별 구체적 사물인데 머릿속에서는 그 사물을 보편 추상적으로 인식하니까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게 되는 거예요. 이 허점을 캐가지고 이거를 집요하게 파가지고 “무자성 아니냐?” “영원불멸한 게 어디 있냐? ”그건 언어의 한계를 깬 거에 불과해요. 언어는 원래의 한계가 있어요. 그게 이데아의 세계가 없고 참나의 세계 알아차리는 세계가 없다는 근거는 안 돼요. 현상계가 연기(緣起)로 돌아가서 고정불변 실체가 없다는 얘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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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정불변 실체가 현상계를 초월해서 없다는 얘기는 다른 얘기죠. 이렇게 깨가지고 일체 만법은 무자성이 공이니까 이게 법공이라고 주장하는 게 중관학파의 법공입니다. 이상한 법공이죠. 일체 만법은 연기하고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니까 공이다. 제가 얘기하는 공은 그게 아닙니다. 일체는 참나의 작용인데 언어화되면서 법집이 생기고, 나라고 하는 이것도 언어를 통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와 나 밖에 있는 타자가, 아와 비아가 쫙 갈라지는 거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돼 버려요. 이것들을 깨는 게 아공 법공이고 그럼으로써 진여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견성을 하고 우리가 진여 열반을 체득할 수 있다. 이게 불교의 기본이다. 왜? 석가모니도 “일체라고 하는 거는 육근밖에 없다” 그랬어요. 존재하는 세계 객관 세계를 얘기하신 적이 없는 거예요. 석가모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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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세계란 뭡니까? 그건 육근 작용이다 그랬어요. 교재 다 있어요. 그때 우리 읽어드렸나요? 육근 작용. 육근밖에 없다. 벌써 여기서 부처님도 일체를 의식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지죠. .이건 남방불교분들은요 알아차리면 알 수 있어요. 생각 감정 오감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거예요. 이걸 법공을 더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지 않아요. 다만 남방불교에서는 아공에 포인트를 둡니다. 남방 불교는.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쪽으로 석가모니가 처음에 방편을 그렇게 썼잖아요. “형이상학적인 연구하지 마. 우주에 대해 관심 갖지 마. 너가 괴롭잖아. 괴로운 너를 해방시켜”에 초점을 두다 보니까 아공의 포인트를 뒀을 뿐이에요. 그래서 아공의 포인트를 두다보니까 현상계가 내 의식의 작용이라는 그 법공 차원의 연구보다는 무상 고 무아라는 것만 주로 연구합니다. 즉 이 현상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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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다. 그래서 괴롭다. 그래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 부분만 주로 연구해서 현상계를 초월해서 탐진치의 세계를 떠나면 어디에요? 열반의 세계에 도달한다. 이게 아공만 주로 강조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근거한 남방불교 이론들은 주로 아공을 팝니다. 내려놓아야 할 대상으로 주로 접근하지. 그것들의 본질이 사실은 아는 마음의 작용이다라는 데 초점을 안 두고 그것들은 무상하니까 내려놓아야 된다. 그것들은 사실 실체가 없다. 내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만 초점을 둡니다. 그 차이가 아공 법공 두 흐름의 차이를 만든 것뿐이고요. 이 법공을 제일 강조한 경전이 반야심경 같은 거고요. 오온이 공하다. 오온개공이 여기서 나온 거고요. 이쪽은 남방불교 가르침으로 주로 가서 아공, 에고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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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하는 고정된 나가 없다. 무강 고 무아다라는 것만 주로 강조하게 되고 이쪽은 만법유식(萬法唯識) 일체유심(一切唯心) 하여튼 이런 유식학이나 화엄종 같은 일체 유심을 주장하는 화엄종이나 만법은 사실 다 유(唯) 오직 의식의 작용이라는 유식학 같은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중관론은 여기서 이런 식으로 새로운 법공을 주장한 거예요. “그냥 무자성이 법공 아냐.” 그럼 이렇게 되면 여러분 이거랑 이거랑 되게 유사해지죠. 그냥 만법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주장만 하는 거랑 이 법공(중관론의 법공)이랑 유사하지 이 법공이랑은 유사하지 않죠. 그래서 중관학파는 초기 불교부터 이미 법공이 주장됐다고 주장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법공이다. 그러니까 제법무아식 법공이 중관학파에서는 제일 중요한 거예요. “만법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게 끝인 거예요. 그런데 지금 화엄종이나 유식학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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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는 의식의 작용이기 때문에 사실상 공하다. 완전히 다른 얘기죠. 이렇게 다른 얘기입니다. 그 한번 우리가 이제 우리가 경험하는 육근의 세계를 잠깐 통찰을 해보면 이런 것까지 한번 고민해 보셔야 돼요. 언어가 붙어서 문제가 일어난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 게 중관학파다. 그 점은 대단한데 언어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이지 언어를 초월한 진실의 세계에서 영원불변한 게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이건 잘못 적용했다. 그렇죠.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그래서 포인트는 결국 아는 마음을 깨달아야지. 이 진여의 세계는요 무조건 아는 마음이에요. 알아차리는 마음을 깨닫고 보면 이러는 거예요. 그냥 이 펜으로 보였잖아요. 나 밖에 펜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이 펜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이 펜을 알아차려 보세요. 나의 대상으로만 지금 존재합니다. 깨어서 알아차리고 보면요 이건 아공 법공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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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펜은 지금 나의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이게 사라지면 펜을 알아차리는 의식은 사라져요. 하지만 알아차림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 알아차림이 참나고 이걸 알아차리는 의식이 오온이고 이건 오온의 대상으로서 물질이었던 거죠. 이해되시죠? 이렇게 계속 돌아가는 겁니다. 저 육근작용을요 소펜하우어 식으로 얘기하면요 감성이 오감을 인식합니다. 감성이. 이때 감성이 시공의 틀로 인식해요. 이때 감성이 시공을 부여해요. 여러분 바깥세계에 시공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없다도 안 맞아요. 없다 있다를 말할 수가 없다. 내가 경험하는 시공은 내 의식의 시공이에요. 내 의식은 모든 거를 시공의 틀로 인식해요. 이게 팩트예요. 여러분 깊은 잠에 꿈꾸실 때도 시공으로 인식하죠. 그럼 여러분 거지 바깥에 시공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꿈꾸실 때도 공간이 있죠. 다양한 등장인물이 존재하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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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은 공간이 있어야 확보됩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변화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흘러야 돼요. 그럼 여러분 꿈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존재를 만났다. 시공을 체험하신 거예요. 그럼 그거는 뭘 보고 시공을 느끼신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마음은 애초에 시공의 틀로 모든 걸 소화해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거를 서양 근대철학에서 칸트가 발견한 거예요. 칸트가 이거 발견했다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객관적인 세계가 있는 줄 알았더니, 시공이 있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사물을 볼 때 내가 이미 시공에 안경을 끼고 보고 있더라는 거예요. 거기서 쇼펜하우어가 더 나아가서, 그리고 여기서 오성이라는 게 뭘 인식하냐면 인과성을 직관적으로 인식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말하는 오식의 작용이에요. 뭘 볼 때 시공 속에서 인과관계까지 딱 짜서 여러분은 이해해요.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볼 때 흐름 속에서 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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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의 흐름 원인과 결과의 방식으로 보고 있는 건 이미 여러분 틀이라는 거예요. 이거를 예전에 철학자 회의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회의주의자 흄이 인과법칙도 못 믿는다. 왜냐? 우리가 경험하는 거 파편적인 표상, 현상들일 뿐이지 이걸 엮어서 하나로 꿴다는 것부터가 오류다. 그래서 흄이 객관적 인과법칙까지 부정했어요. 부정의 대가거든요. 다 부정해버려요. 흄이 거의 중관학파랑 진짜 비슷해요. 다 깨버린 거예요. 자아가 있다는 거예요. 니가 경험하는 건 하루 종일 꼬라지부리는 너의 어떤 여러 모습들일 뿐이지 그걸 묶어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냐 이거죠. 자아, 공. 그리고 너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니가 파편적인 경험만 있지 그걸 꿰가지고 인과 속에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너의 오류라는 거죠. 법공. 흄이 그러면 아공 법공 대가죠. 그런 식으로. 늘 불만에 차 있는 철학자. 참나 아신 분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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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드신 분도 아니고. 뭐 이상하지 않아요? 중관학파는 그게 한계입니다. 중관학파를 연구하신 분들은 항상 남의 말을 허점을 잡아서 공격할 거기에 밝지. 탐진치에서 벗어나신 세계에서 유유자적 놀기가 힘들어요. 서양 철학에서도 발견됩니다. 혹시 그런 중관학파 이런 비슷한 느낌 보고 싶으시면 흄 보시면 돼요. 다 깨버리겠다. 다 무자성.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무자성이 치고 나와 주니까 쇼펜하우어나 이제 칸트나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우리 내면에 틀이 있는 거 아니냐를 찾은 거예요. 그럼 “우리 안에 진짜 틀이 있나 보다.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었다”라는. 오히려 자극제가 돼서 우리 안에 틀이 있다. 우리는 근데 다 인과법칙을 얘기한다. 근데 마음대로 우리가 마음대로 인과법칙을 설정하는 거라면 나는 설정해도 저 사람은 안 할 수 있는데 모두가 다 공통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라면 우리 안에 기본적인 프로그램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감성이 오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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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를 딱 전송해 주면 오성의 인과성을 딱 붙여주고 거기에 이성이 언어화를 합니다. 이래서 여러분이 세계를 경험해요.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모든 걸 통해서, 이렇게 구성되는 게 세계이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언어까지 인과적으로 파악이 됐을 때부터 언어화된 것까지 이걸 다 표상이라고 불러요. 언어화되기 전이건, 언어화되기 전의 재료건 이미 인과성 안에서 파악된 것들은 다 표상이라는 거예요. 이건 아직 표상이 아니에요. 재료예요. 인과성이 딱 붙으면 표상이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경험하는 세계는 이미 인과성 속에서 경험되거든요. 시공 인과성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거는 표상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여러분이 언어를 붙이는 것도 표상이에요. 그럼 이거(언어)는 추상적 표상 이거(세계)는 경험적 표상. 그런데 이번에 “당신이 우주다”의 과학자들이 해놓은 것도 똑같더라니까요. 이 모든 거를 퀄리아라고 하는 또 새로운 용어만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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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은 똑같아요. 언어의 세계 감정의 세계 경험의 세계 전체는 우리 의식의 대상이다. 이게 의식의 대상이다. 그래서 표상이라는 말을 불교식으로는 법이라고 보시면 돼요. 만법. 존재하는 건 모두 법입니다. 근데 법의 특징은 뭐냐면요 자성을 지닌 존재라는 게 법이에요. 또 법은 그렇게 설명해요. 법은 불교에서도 설명을 잘해요. 자성을 지닌 존재라고 근데 자성은 없대요. 그래서 법공이 되는 거예요. 재밌죠 불교가. 여러분은 아셔야 돼요. 자성은 있습니다. 자성이 없다면 여러분, 마음대로라면 여러분이 명상에 들었다 나왔을 때 6근이 아니라 7근이 생길 수도 있어야 되고 5온이 아니라 6온이 생길 수도 있어야 돼요. 반드시 오온만 생깁니다. 반드시 육근이 작동합니다. 공부는 반드시 육바라밀을 해야 되고요. 이상하지 않아요? 있어요. 의식 세계 안에 동서남북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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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설명을 못합니다. 무자성만으로는 그래서 이렇게 법이라는 건 자성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만법의 세계가 우리 의식에서 굴러가는 거. 이걸 전제하지 않고 과학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이미 법집에 빠져버린 거예요. 자 과학자한테 이렇게 큰소리 칠 수 있는 문과. 멋지지 않으세요. 이과한테 큰소리 칠 수 있는 문과. 이과한테 그러세요. 너희는 법집에 빠져 있다. 여기서 잘못 빠져가지고 무자성이다 하면 안 돼요. 자성이 있어요. 자성이 뭐예요? 과학 법칙이 자성이에요. 중력의 법칙이 자성이에요. 그게 중력의 자성이에요. 법칙을 부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철학도 과학도 아니게 돼요. 소피스트가 돼요. 소피스트. 남의 말꼬리 잘 잡아가지고 자기의 우위를 점하면서 학원비 받아 챙기던 소피스트.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미워했던, 지식의 창녀라고 외쳤던. 하나도 정확한 진선미를 가르쳐주는 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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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우월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만 모든 논리를 다 쓰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진선미를 못 가르쳐주는데. 진리를 못 가르쳐주는 진리라는 건 법칙을 알아내는 겁니다. 그 법칙, 각각의 법칙들을 많이 알아내는 사람이 과학자고 철학자예요. 과학과 철학은 같아요.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법칙을 알아내는 사람들이에요. 인과의 세계에서 법칙을 많이 알아내면 과학자라고 하고요. 선악 판단에서 법칙을 많이 알아내면 철학자라고 하는 것뿐이에요. 법칙은 똑같은 법칙이에요. 그 모든 법칙은 이 아는 마음 안에 다 내재돼 있습니다. 왜? 여기 말고는 있을 데가 없어요. 현상계의 법칙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적용은 되는 곳이지만 법칙의 근원은 저 진여 자리 말고는 파악할 수가 없어요. 시공을 초월한 저 진여 자리 안에 모든 법이 갈무리 돼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이게 지금 이번에 “당신이 우주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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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그 논리도 똑같아요.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분 동양에서 수없이 얘기되던 그냥 그 가르침, 서양에서도 근대에 와가지고 칸트 이후로 깨달았던 그 가르침, 양자 물리학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가르침, 우주를 관찰하는 의식, 이게 포인트거든요. 이 알아차린다는 건요 우주를 관찰하는 그 의식이 여러분의 가장 본질이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그 의식 때문에 여러분 지금 하루 종일 살아가고 계시다. 이제 진도 나갑니다. 빌드업만 한 두 시간을. 이거 올려고. 근데 지금 중요한 얘기는 다 나왔어요. 이게 진짜 중요한 얘기입니다. 앞으로 왜 우리가 이 시대에 왜 갑자기 문과냐? 과학도 지금 빨리 시급한데, 반도체 해야 되는데 왜 문과냐? 막 이러면 “반도체도 언어의 언어로 이루어진 표상이라는 거 알아?” 문과라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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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고 나가야 돼요. 그렇죠. “양자(量子)가 과연 양자일까?” 이렇게 화두를 던지고. 그것도 의식의 작용일 뿐이라는 거. 보편법칙, 우주에는 보편 법칙이 있습니다. 그 보편법칙의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게 법이에요. 불교식으로는 다르마. 그래서 이데아를 불교식으로 뭐라고 그러냐면 출세간법(出世間法)이라 그래요. 세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법, 다르마가 질서가 있어요. 그거 불교에 다 있는 거예요. 있는 거를 허물어뜨리니까 제가 짜증나서 그러는 거죠. 그러면 보편법칙, 세간 속에서 육근 속에서 경험되는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법칙은 뭐라고 하겠어요 출세간법의 반대 뭐겠어요? 찍어보세요. 출세간법의 반대? 세간법(世間法). 머리는 있으신 걸로 세간법. 이게 다예요. 세간법과 출세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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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이미 화엄경에서 끝없이 노래해요. 출세간법과 세간법. 그 이전에 부처님 때부터 이미 얘기가 다 나왔어요. 출세간법 세간법. 이걸 탐구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이해되시죠? 근데 법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법공을 주장하면 안 돼요. 우리가 말하는 법공은 법칙은 있는데요 개별 구체적,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개별 구체적 현상들이 내 의식의 작용이고 결국은 그 불변의 법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내는 거예요. 이 부분이 포인트입니다. 이게 법공이에요. 그럼 법공이 차원이 다르죠. 이 얘기를 앞으로 하나씩 풀어나갈 겁니다. 유식학이고 뭐 화엄경이고 대승기신론이고 다루면서 아공 법공의 이제 더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가 볼게요. 근데 오늘은 아잔 차 스님 1918년부터 1992년이면 우리랑 동시대를 살았던 이런 고승이 있다는 거 재미있지 않습니까? 옆에 붓다다사 이분은? 이분도 93년에 돌아가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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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시대. 아잔 차 스님의 스승은 1950년에 돌아가셨네요. 아짠 문. 왜 아잔이고 아짠이고 이렇게 돼 있느냐? 그냥 그거는 그 책 번역자들을 제가 인용한 거기 때문에 그 책 제목들은 검색이 돼야 되잖아요. 그래서 아짠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아잔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정도 알아두시면 되고요. 아잔 차 스님 한번 볼까요? 근데 제가 이렇게 보면요 이분들 다 태국 고생들이에요. 태국. 태국이 제가 볼 때는 남방불교에서도 태국이 더 자명해요. 보통 미얀마 다녀오시거든요. 근데 미얀마 다녀오면 미치게 대상에 대해서만 몰입해요. 열반을 바로 못 찾더라고요. 미얀마 다녀온 분들은 어느 정도냐면요 제가 읽은 미얀마 고승의 위빠사나 수행 책은요 고통을 알아차리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데만 집중하세요. 그러다 보니까 대상을 알아차리는 데는 되게 노하우가 쌓였는데 중요한 거는 이건 제 몰입 책에 의하면 이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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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대한 몰입이잖아요. 나에 대한 몰입을 해야 회광반조(廻光返照)거든요. 이걸 보다가 이걸 틀어서 나를 봐야 돼요. 알아차리는 나를 알아차려야 견성을 하고 열반에 드는데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에 너무 집착해요. 그리고 여기서 더 잘 알아차려가지고 레벨을 또 나누고 있어요. 그러니까 “알아차리다가 알아차릴 대상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하면 거기서 고승들은요 막대기라도 다리에 괴어가지고 고통을 일으켜서 알아차리래요. 뭔가 좀 이상하죠. 여러분 알아차릴 게, “지금 막 육근 다 알아차렸는데 막 육근이 자꾸 사라져가요. 이제 저는 뭘 알아차려야 되죠?” 그럼 학당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참나요. 알아차리는 자체를 알아차려야지 언제까지 활주로만 달리실 거예요. 좀 나세요.” 할 거 아니에요. 처방이 다르게 나와요. 거기는 “고통을 좀 일으켜보세요”라고 한다고요. 차이 아시겠죠?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문제가 있는 게 깨어 있는 힘, 알아차리는 힘은 엄청 길러주는데 그걸로 본질을 안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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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에도 나와요. “만법이 무상 고 무아란 걸 깨닫고 혐오하여 떠나라”고 돼 있는데 떠나질 않는 거예요. “떠나야 열반에 도달하리라” 돼 있는데 안 떠나고 “지금 계속 알아차리는 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음 알아차림의 대상을 계속 투여해야 될까요?” “더 해봐.” 거기서 뭘 끝을 보려고 하세요. 알아차림,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너무 강조하고 있어요. 그 부분을 제가 비판 드리고요. 태국 고생들은 달라요. 이분들은 그냥 바로 열반 들어가는 걸 되게 강조합니다. 저희랑 되게 맞아요. 그래서 읽어드리는 거예요. 아잔 차 스님 반조(返照), 반조부터 이미 회광반조죠. 돌아보라는 겁니다. 마음을 비추다. 아잔 차 스님은 아는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보세요. 1. 모든 생각들이 단지 마음의 움직임이며 앎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앎이라는 게 뭐겠어요? 요 알아차리는 마음이죠. 요 아는 마음은요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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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체험해 보면 아니까. 이게 체험이 제일 좋아요. 체험해 봐야 돼요. 어떤 일상의 체험이 아니라 선정 체험을 계속 해봐요. 선정도 깊은 선정 말고요. 계속 이 찰나 선정, 알아차리는 선정, 그러니까 몰입 4단계죠. 제가 얘기하는 몰입 4단계. 마음이라고 하는 모든 활동은.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하는 건 뭐겠어요? 육근 작용. 육근 작용은 아잔 차 스님은 이걸 뭐라고 부르냐면 ‘인습적인 마음.’ 되게 관습적인 마음 카르마의 업력으로 굴러가는 마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진정한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진정한 마음이 따로 있다는 얘기죠. 그게 뭐겠어요 앎이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앎. 이것은 이 앎이라는 건 알아차림이에요. 알아차림. 진정한 것은 그저 있는 것이지 일어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아잔 차, "반조, 마음을 비추다2", 싱긋, 152~153쪽) 알아차림이라는 건 늘 있고요. 여러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건 뭐겠어요? 보세요. 육근을 알아차린다고 그러면요, 육근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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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이거예요. 돋보기를 여기다 대는 거예요. 마음 챙김은 여러분이 일으켜야 돼요. 내가 뭘 알아차리겠다고 마음을 정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뭘 알아차릴지 정하는 게 마음 챙김이에요. 정해서 거기다 몰입하는 게. 마음을 그쪽에 챙겨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몸의 감각에 챙기든지. 호흡에 챙기면 의수단전(意守丹田)이죠. 호흡을 챙기든지 단전에 챙기든지 생각에 감정에 챙겨야 돼요. 그럼 마음을 그쪽으로 몰아가 주는 포커스를 맞추는 작업일 뿐이고요. 마음에 포커스 맞추기가 돋보기 돋보기를 딱 맞춰주는 게 마음 챙김이면, 태양빛은 영원히 있었죠. 항상 있었는데 돋보기를 맞추니까 거기서 불이 나죠. 사람들은 마음이 없다가 생긴 줄 알아요. 아니에요. 알아차림은 항상 있는데 거기를 알아차리기로 했을 뿐이에요. 마음 챙김을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알아차림은 항상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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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해 못하면 우리가 이제 기본, 이제 일단 열반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얘기는요 티벳 불교건 어디건 다 하는 거예요. 알아차림은 항상 있다. 이해되시죠? 그저 있는 거예요. 진짜는 그저 있는 거예요. 없앨 수가 없는 거예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다 현상계적인 존재예요. 육근 작용이에요. 마음 챙김도 육근 작용이에요. 내가 이걸 마음 챙겨야겠다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챙김을 통해 알아차리는 그 자체는 영원한 거예요. 다만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거는 오온 중에 식별 능력이에요. 생각 작용 중에 하나에요. 그 대상을 알아차린 거는 근데 알아차림 그 자체는 진정한 마음으로 영원히 있다는 거예요. 이거 이거 이것만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두 번째예요. 2. 일상적인 마음 육근 작용을 넘어서 존재하는 ‘명확하고 빛나는 알아차림.’ 이게 석가모니께서 얘기하신 뭐예요? 특징이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에서 빛나는 마음.
27:00명확하고 빛나는 알아차림인 ‘붓도’(부처님). 그 자리를 아예 부처라고 불러버립니다. 엄청나죠. 그 자리가 부처래요. 남방불교 이건 선불교도 아니에요. 남방불교 분이 뭘 주장하고 있냐면 즉심시불(卽心是佛) 이런 걸 주장하고 계신 거예요. 평상심이 부처다. 지금 이런 주장을 하고 계신 거예요.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 부처다. 그래서 저기 남방불교식으로 붓도라고, 그 마음을 ‘붓도’라고 부르고 이걸 개발하라고 합니다. 거기다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그 안의 모든 내용을 알 수 있게 마음을 훈련해라(276쪽). 이분은 지금 그 알아차리는 마음 안에 진리 다르마가 들어있다는 것까지 아세요. 그렇죠. 설명이 정확하죠. 그 마음 안에 있는 내용물이 있대요. 그러면 그 부처님 마음 안에 있는 내용물이면 진리겠죠. 진리들이 있다는 거예요. 무형의 진리들이. 이게 모든 현상계에 존재하는 법칙들의 원인입니다. 여기까지 연구해가면 법공이 돼요. 물론 이제 남방불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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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안 파요. 그 안에 뭐가 있다고 보겠어요? 무상 고 무아의 진리가 있다고 보는 거죠. 이분은 현상계에 굴러가는 모든 것들이 무상하게 굴러가게 만드는 연기법의 근원이 되는 진리가 있다고 말하신 걸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이분들도, 아라한들 무시하면 안 되는 게요. 제가 아라한 비판하는 강의도 한 번씩 올릴 때가 있는데 그때는 아라한들이 재수 없어서 그랬어요. 뭐냐면 제가 한 번씩 이게 약간 강의 되게 논조가 다릅니다. 어떨 때는 아라한이면 어디냐 할 때가 있고 재수 없을 때가 있고. 그거는 이제 그때그때 달라요. 근데 어떤 느낌이냐면 아라한들이 보살들을 까거나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그런 걸 접할 때는 저도 화가 나잖아요. “숲에 있다고 뭔데 그게. 숲에서 뭐 하는지 한번 까볼까.” 이런 이런 느낌이 되는 거고 그냥 아라한을 가지고 얘기하면 부처님이 당시, 부처님의 업적이 아라한 배양이잖아요. 그럼 아라한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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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나 보살과 다르겠냐고요? 부처님이 키우신 인재인데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때는요 이렇게, 좋게 얘기하면 아라한들을 아공만 강조해서 그렇지 당시 힌두교가 법공을 강조하니까 석가모니는 아공을 주로 강조합니다. 근데 법공을 강조 안 해도 돼요. 왜냐하면 구공이 있거든요. 석가모니는 팔정도라는 구공이 있어요. 자비, 팔정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는 구공이 있어요. 법공은 기본적으로 열반을 채득하신 분들은 감각적으로는 알아요. 일체가 내 의식 작용이라는 거는. 그걸 법공이라고 말 안 해서 그렇지 아공을 가르쳐주고, 너 자아 영원하지 않지? 없지. 너를, 좀 에고를 내려놓게 한 다음에 팔정도 구공으로 사무량심으로 자비희사(慈悲喜捨)로 인도해버리는 거예요. 그럼 자비심 충만한 존재가 돼요. 그러면 아라한일까요? 보살일까요? 애매해지죠. 이게 부처님이 노린 겁니다. 그러니까 애매한데 보살이 되게 만든 거예요. 당시 인도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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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기 해탈만 원하는데. 보살되길 원하지 않아요. 다 자기 해탈만 원하지. 자기 해탈하겠다는 사람 모아다가 견성시키고 열반 깨닫게 한 다음에 팔정도의 전사로 만들어서 숲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라한들은 숲에 주로 있지만 전도하러 막 다니게 시키거든요. 그럼 거의 당시에 제다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인도 스타일이라 좀 다른 것뿐이지. 이렇게도 이해하시면 아하한이 대단한 존재로 보이실 거예요. 자기는 이번에 윤회 끝난다고 믿고 있으니까 또 사심도 최대한 배제돼 있겠죠. 그렇죠? 자기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뭐 그렇게 뭐 밥맛이나 나겠어요? 이번 생이 마지막인데. 아니면 또 막 지구(地球) 막 눈물 날까요? “여기 지구 어떻게 해. 다시 못 오는데” 막 이럴 수도 있지만 계속 그러니까 깨어 있게 만들면서 무상 고 무아만 훈련시키니까 현상계에 정이 뚝뚝 떨어지게 만들어요. 근데 그다음에, 거기서 끝나면 힌두교랑 다를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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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공밖에 모른다고 비판을 할 수 있는데 거기서 팔정도로 사무량심으로 이어져 버리면 자비의 대가가 되거든요. 그럼 또 이야기가 달라져요. 대신에 이번 생이 끝이라고 믿으니까 한계가 있죠. 보살 정신하고는 좀 다르지만 그러면서사실은 또 보살이죠. 이번 생이 끝이라고 알지만 그분은 이번 생에 최선을 다할 테니까. 어떠세요? 이럼 애매해지죠.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에 너무 아라한 욕하는 게 올라갔더라고요. 그건 그날의 제 기분인데. 그러니까 그 흐름 자체는. 그래서 제가 안타까워서. 그런 것만은 아닌데 그래서 이런 분들 이런 아라드로는 훌륭함. 이분들은 보살이에요. 아공을 주로 가르치고 있어서 그렇지 보살이에요. 부처님이 그냥 하고 가시지 않죠. 위대한 성인이 오셔서. 그러니까 인도인들을 아라한까지 만들어서 자비의 전사로 만들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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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대단한 점이에요. 지금 인도 가서도 힘들어요. 쉽지 않아요. 뭐 무섭잖아요. 그러니까 워낙 인구가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도인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워낙 인구가 많고 그러면요 거기서 보살을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질이 다 해탈만 원하는 사람들한테 “남을 위해라 살아라.” 이거는 안 와 닿잖아요. “그러지 말고 빨리 이 사바세계에서 탈출할 방법만 가르쳐 달라.” 이 사람들한테 석가모니가 꾀를 쓴 게 “가르쳐줄게. 이번 생으로 끝이다. 안심해라. 단 이제 너는 에고 없지? 에고 최대한 눌렀지? 그러면 다른 중생들 최대한 가르치고 가라. 어차피 끝이잖아” 하고 되게 내보내는 거죠. 그러면 갑자기 자비를 하고 있는 거죠. 원래 목표는 그냥 지구 떠나는 건데 애초에 인도인들은. 이런 데서 성인들의 솜씨가 방편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우리가 못 읽어드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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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거든요. 석가모니 한(恨) 생겨요. 그래서 제가. 다만 아라한이 “우리가 최고지 보살이 뭐냐.” 이렇게 나오면 이제 전 또 다시 “니네가 뭔데 이제 자비, 숲에서 자비가 뭐 되냐?” 이제 이렇게 또 나갈 수도 있어요. 여기까지. 세 번째 3. 마음은 감각 대상들을 인식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육근이에요. 마음은 감각 대상을 인식한다는 게 뭐죠?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하죠. 여기서 마음이라는 건 육근 작용을 통틀어서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은 색깔을, 이식은 소리를, 그다음 마지막 의식은요 법을. 거기서 또 법이 뭐겠어요? 자성을 지닌 존재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의식은 언어를 개념을 활용할 수밖에 없어요. 법을 담을 도구가 언어밖에 없어요. 법을 어디다 담아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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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법칙을 어디다 담을까요? 우리가. 우리 색깔에 담을 수가 없죠. 소리에도 못 담죠. 그러면 오감 정보로는 못 담아요. 그럼 어디다 담아요? 언어로요. 그래서 언어로 담으면 문제가 돼요. 언어로 담는 딱 순간 나 밖의 존재 같단 말이에요. 고정불변의 존재가 돼버려요. 그렇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럼 우리가 언어화를 안 해야 되냐? 해야 돼요. 언어화를 안 쏘면 인간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고 인간은요 견성, 도를 전할 수도 없어요. 언어 덕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항상 주장하지만 언어의 한계를 활용할 수 있어야 돼요. 인간은 전제하고 활용해야 돼요. 그러니까 아쉽지만 아쉬운 대로 잘 써야 되는 게 언어예요. 이 언어 덕에 우리가 이렇게 여기까지 왔다는 거 아셔야 돼요. 언어 없으면 여러분 생각도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언어 안 쓰고. 그럼 바로 견성이죠. 언어 안 쓰고 생각해 보세요. 언어 안 쓰고 화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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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나요? 언어를 안 쓰는데. 욕을 할 수가 없잖아요. 언어를 안 쓰면. 언어 안 쓰고 탐낼 수도 없어요. 언어를 안 쓰고. 갖고 싶다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언어를 우리가 안 쓰고 이렇게 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언어는 최고의 참나의 작용이다. 최고의 작용. 그 아쉬운 점만 공격해 가지고 뭐가 이렇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마음은 감각 대상들을 인식하는 겁니다. 이 대상에는 마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중에 의식은 법을 대상으로 한다. 근데 법은 자성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 자성을 의식이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그릇에 담아야 돼요. 언어의 그릇에 담습니다. 개념의 그릇에 담아요. 이것까지 아시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마음과 감각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아는 ‘아는 자’인 마음과 다릅니다. 자 육근 중의 마음은 아는 마음과 다릅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죠. 지금 이분. 이분은 열반에서 사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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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라한으로 인정해 드리는 분들인데 아라한으로 인정해 드리는 분들 모아놓으니까 다 태국 분들인 거예요. 미얀마를 폄하하려는 건 아닌데 분발하시길요. 그래서 저한테까지 알려지게 분발하시길. 제가 견문이 짧아서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자’인 마음과 다릅니다.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끗하게 해야 됩니다.(276쪽). 알아차림만 우리가 계속 유지하면 깨끗해지게 돼 있다. 마음은 계속 정화된다. 이런 얘기까지 해주시고 계시죠. 왜냐? 알아차림이요 부처예요. 그대로 부처 붓다예요. 이 스님한테는 아는 마음이 부처예요. 그래서 과거의 부처님은 볼 수 없지만 지금 부처님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해요. 아잔 차 스님은. 지금 바로 알아차리는 마음, 아는 마음을 만나면 부처님 뵙는 거라는 말까지 해요. 그게 부처님의 법신이에요. 법신은 지금 만날 수 있어요. 화신을 못 만나지. 부처님 육신은 우리가 만져볼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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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 없죠. 법신은 만날 수 있어요. 그게 아는 마음이에요.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럼 이분한테, 이분한테 “그게 참나인가요?” 하면 이분도 안 받아들일 수도 있죠. “참나는 좀...” 근데 그 말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죠. 제가 이 강의 서두에 참나냐 아니냐는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 말에 언어에 집착하지 마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말하는 광명심, 무한하게 스스로 빛나는 그 마음이 있냐 없냐 이거는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걸 참나라고 부르건 열반이라고 부르건 하느님이라고 부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음 문제예요. 그래서 지금 아잔 차 스님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계세요. 4. ‘본래 마음’은 본래의 그 마음은 자유로운 것이고 빛나고 찬란하며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떤 한계도 없고 특징도 없고 광명하게 빛난다는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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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신 거예요. 마음은 오로지 바르지 못한 사견(邪見), 사특한 견해입니다. 잘못된 견해 그 아지 법집의 견해들, 이런 견해나 ‘조건적인 현상’과. 즉 인연법, 오온 같은 게 조건적인 현상이죠. 그러니까 시공 안에서 인과 속에서 굴러가는 현상, 그리고 자아라는 그릇된 감각에. 아집, 법집, 웬만한 거 지금 다 나온 거예요. 사견(邪見), 내가 있다는 견해, 그 연기 세계에 되게 제한돼 있는 현상들, 현상은 지금 법을 번역한 거예요. 법, 아와 법, 나와 남이 다 시공 안에서 제약돼 있잖아요. 근데 이런 것들에 대해 속음으로써만 자유를 뺏긴다. 아와 법에 속은 거를 아집 법집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두 개의 아집 법집 현상으로 인해서 우리가 속는 겁니다. 내가 있고 나 밖에 남이 있다고 속음으로써 밖에 있는 세계도 무상한 연기법의 세계일 뿐인데 그걸 영원하다고 집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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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도 연기의 소산일 뿐인데, 오온의 작용일 뿐인데 생각 감정 호감이 뭉친 게 나인데 생각 감정 오감의 나를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이게 한계라는 거예요. 육근의 세계, 무상하고 연기하는 세계에 대해서 영원하다고 집착하면 다 아집 법집이 돼버리죠. 그런데 뭐가 있대요? 벗어나 있는 찬란하고 빛나는 본래의 마음이 있대요. 이것만이 열반인 거예요. 4. 그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을 보게 하셨다. 이 진리의 마음이 각자 내면에 다 있다. 애당초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아무것도 없다. 이분도 이제 공의 세계를 얘기하죠. ‘공(空)’은 현상에 의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현상적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생멸하는 건 공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선(善)과 접촉한다고 해서 선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악(惡)과 부딪힌다고 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선악도 없고 생멸도 없는 그 자리가 공이라는 겁니다. 청정한 마음은 이런 대상들을 분명 알고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40:00그래서 이 청정한 마음이 결국은 또 공의 세계인 거죠. 진짜 참으로 없음을 아는 그 자리, 공성을 아는 그 자리가 청정한 마음이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아짠 붓다다사 이분의 열반론을 한번 볼까요? 이분이 디테일하게 열반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어요. 한번 같이 읽어보게요. 1. 윤회의 종식. 윤회가 있어도 없어도 고통은 소멸시켜야 된다. 고통의 소멸은. 석가모니의 제일 특이한 점은 힌두교에서 다 참나 브라만 다 신을 얘기할 때 석가모니는요 신을 얘기 안 했어요. 참나 얘기도 안 했어요. 석가모니는 일부러 참나 얘기 안 했어요. 그나마 밝혀놓으신 게 광명한 의식이 있다고 한 거지 참나 얘기도 잘 안 하시잖아요. 뭔 얘기만 했냐면요 그 도를 아십니까처럼 돌아다니시면서 “괴롭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아프지?” 그랬어요. 아파 보인다. 그러면 다들 “사실은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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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봤고,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의 원인은 탐진치 때문이고, 고집멸도, 고통만 없애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고, 그걸 없애려면 알아차리라고 했어요. 알아차려서 거기서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가 올 거라고. 팔정도죠. 팔정도 중에 제일 중요한 게 마음 챙김, 정념(正念), 마음 챙김이 중요하고 정견(正見) 두 개가 합쳐서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돼요. 정념 정견이 같이 가면 정혜쌍수예요. 정정(正定)은요 너무 깊은 선정이라 다음 문제예요. 몰입 정도의 선정이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정념을 강조한 거예요. 알아차리고 그게 바로 사띠가 알아차림이고 정견. 위빠사나로 이어져요. 지혜로 이어지면서 육근을 알아차려봤더니 육근이 무상 고 무아더라는 거예요. 육근을 알아차려 봤더니 무상 고 무아더라는 거예요. “무상 고 무아인데 뭐 해. 빨리 빠져나와.” 빠져나오면 열반에 도달하는 거예요. 지금 저 미얀마 스타일 불교는 뭐가 문제냐면
42:01부처님이 알아내지 말라는 것까지 알아내고 있어요. “잠깐만요 부처님. 무상 고 무아 말고 더 있어요. 알아차려 보니까 끝도 없는데요.” 쟤는 또 뭘 알아차렸대요. 저는 뭘 알아차렸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제발 나와. 아니 그러니까 무상 고 무아만 확인하고 나와.” 거기 계속 있어요. 잠깐만요 여기 방사능 말고도 더 있는 것 같아요. 빨리 나와. 죽어 이제. 이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 힘들어하는 게. 정신 여러분 일상생활 하시겠어요? 누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 되는데 대답하려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답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족 중에 이런 분 있으면 돌아버립니다. 또 지는 또 뭐 대단한 거 한다고 또 목에 힘 들어가 있어요. 자 가정이 볼 만하겠죠. 이래서 출가하나? 막 이럴 거예요. 뭔가 잘못돼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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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 분들은 안 그러시겠죠. 그렇게 티나게 막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참나 알고 시작하거든요. 참나 아는 자리에서 알아차리면 쉬워요. 뭐든지 알아차리려면 알아차리고 말라면 마는 건데 알아차려야 한다는 거에 강박증이 생기면요 진짜 이거는 힘들어집니다. 이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대화도 대화의 내용에 집중을 못해요. 대화도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막 주의 깊게 들을 수가 없어요. 나의 반응만 계속 보고 있느라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눈 깜빡였다. 나 방금. 막 이래서 침 한번 삼켰다. 침 삼키려는 의도가 먼저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듣기만 해도 힘들죠. 한국인들한테는요 안 될 수행법입니다. “빨리빨리” 한국인들한테는 맞질 않아요. 이 수행은 절대 크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저주 같지만. 근데 위빠사나 수행 자체를 제가 비판한 게 아니에요. 아니 빨리 깨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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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열반 찾아야지 부처님 가르침도요 무상 고 무아 알았으면 빨리 빠져나와야 돼요. 그럼 열반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다예요. 저희 교재 앞에 있잖아요. 하도 답답해서. 여기 법구경의 삼법인에 대한 가르침. 일체 행위가 무상하다는 진리를 꿰뚫어 봤으면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나야 돼요. 그러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청정에 바로 도달해요. 끝. 열반 얻으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은 열반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닌 거예요. 계속 더 잘 알아차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뭔 차이인지 아시겠죠. 지금 제가 이분들은 태국 스님들은 대단하다. 이분들은 그런 게 좀 안 보여요. 너무 미얀마만 또 뭐라고 했나? 미얀마가 다 그런 건 아니겠죠. 아무튼 근데 제가 접한 수행법들이 주로 그런 답답한 얘기를 하시는 분들을 보니까 미얀마에서 닦으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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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소멸은 자아가 없다는 것과 모든 것이 무아라는 걸 아는 지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이게 아공의 진리 인가죠. 그러니까 이거 이거 좋아요. 그러니까 남방불교 분들은 아공의 진리까지 연구하는 게 장점이니까 육근을 알아차린 다음에 “아 여긴 나라고 할 게 없구나. 생각 감정 오감 내가 나로 알고 있는 생각 감정 오감 오온은 무상하구나.” 그렇죠. 다 놔야 돼요. 그러니까 나도 남도 아도 법도 다 놔버려야 돼요. 아도 법도 놔버려요. 제법무아니까 법도 놔버리고. 궁극의 법공은 아니더라도 일단그것도 기본적인 법공이죠. 중관학파는 그걸 법공으로 보니까 그것도 이 말 자체는 잘못된 말은 아니에요. 만법이 무자성이다. 만법은 공하다. 무상하다. 다만 깊은 의미의 법공이 아니라는 거죠. 일체가 만법이 의식의 작용이라는 측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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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든 법공은 아니지만 그냥 무상하다는 측면에서 “고정된 게 없네” 이런 공 가능하잖아요. 무상의 의미로 공. 이렇게 놔버리면 이렇게 무아를 아는 게 지혜인데 무아를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윤회가 없다는 걸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분 말씀이 특이한 게요 이 고승의 말씀이 특이한 게 있습니다. 아라한은 윤회를 초월해서 이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게 아라한이잖아요. 이분은요 개념을 좀 확장했어요. 그러니까 보세요. 실제로 육근은요 생멸의 세계예요. 여기는 육근의 세계는 카르마가 계속 이어지면서 윤회합니다. 육근에서 벗어나서 내 안의 섬을 만들어라 그랬죠. 내 안의 섬, 내 안의 안식처를 찾고 보니까 여기는 시공을 떠나 있어요. 죽이죠. 내 안에 이런 세계가 있다면 여러분 힘들 때 육근에서 잠시 벗어나서 좀 쉬다 오세요. 휴가 좀. 참나의 세계에 휴가 다녀오셔야 돼요. “너 이번에 어디가? 뭐 몰디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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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는 섬 있어. 인스타에 올릴 순 없지만 내가 가는 섬 있어. 방금 갔다 왔는데 거기가 짱이다. 최고다.” 이제 이런 섬을 다녀오셔야 돼요. 이해되시죠? 이 돌아가는 이 업력의 흐름에서 벗어나서 여기 오면 첫 번째로 뭘 알아요? 여기는 윤회가 없다는 걸 알아요. 여러분 더 자명한 표현이에요. 윤회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난 이제 윤회를 하지 않아. 이 말은 자명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다음 생 가봐야 알거든요. 근데 이 표현은 그냥 그 자체로 자명해요. 난 원래 윤회가 없더라 하는 거. 그래서 아라한은 윤회를 하지 않는 자라고 규정하는 거는 저는 그건 보살사상이 안 맞거든요. 근데 이 표현은요 “본래 윤회가 없던데요.” 이거는 보살 사상하고 딱 맞아요. “만법이 본래 열반이더라.” 이게 보살사상이거든요. 이게 반야심경의 핵심이거든요. 오온이 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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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하더라. 여기서 공은 진여 열반을 말해요. 오온이 그대로 진여 열반이더라. 이 말은 되게 다른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 “윤회가 본래 없더라.” 일단 이 참나 체험을 통해서 얘기할 수 있죠. 이걸 스스로 발견하게 될 거래요. 그럼 이분 말씀 맞죠. 아공을 깨치고 열반에 안주해 보면 윤회가 본래 없더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열반은 이분이 또 대단한 게 열반을 어렵게 설명 안 해요. 열반은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그럼 이게 자연스럽다는 게 뭐냐면요 이게 노자랑 연결해서 보면 무위가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유위는요 인위적인 상태예요. 이걸 인위 이걸 자연으로 보면 무위 자연 그러잖아요. 이 표현하고 지금 잘 맞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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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노자를 알고 하신 얘기가 아니지만 이 표현이 잘 맞아. 열반은요 가장 탐진치가 인위적인 거예요. 탐진치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마음이더라. 이거 설명을 되게 잘해주신 거라고요. 그래서 번뇌가 없는 마음의 청정한 상태이더라. (열반도 결국 우리 마음에 존재한다. 마음 밖에 열반 없다). 번뇌가 인위적인 겁니다. 탐진치가. 그거 없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더라는 거예요. 이분이 열반을 정확히 얘기해 준 거예요. 안 그러면 사람들은 열반을 어디서 찾냐면 지금도 탐진치가 완전히 없는 어떤 나 밖의 어떤 세계를 찾아요. 이것도 언어에 걸린 거예요. “열반은 탐진치가 없는 세계야. 와 가고 싶다. 거기.” 이렇게 된 거예요. 근데 아는 분들은 뭐라 그래요? “아는 마음이 열반이다. 너의 마음 중에 참진치가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열반이다.” 여기서도 또 함정이 있어요. 그럼 내 마음에 탐진치가 하나도 없게 만들어야 열반에 도달하나요? 이게 가능할까요? 안 돼요. 아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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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들어서 탐진치를 눌러놔도요. 탐진치는 작동합니다. 원래 작동하라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열반을 둘로 나눕니다. 번뇌가 없는 마음의 상태인데 열반은 두 가지로 나눠져요. 유여 열반과 무여 열반. 전통적으로 그래서 유여열반은 남은 게 있는 열반이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청정해졌지만 감각 대상을 받아들인 육체적 감각 기관이 아직 청정하지 않은 마음이다. (유여열반有餘涅槃. 5온을 갖춤. 불이 꺼졌으나 아직 뜨거운 상태의 목탄). 이 소리는 뭐냐면요 이 소리는 번뇌가 없는데 있대요. 번뇌가 없지만 청정해졌지만 아직 번뇌가 있는 몸뚱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여열반. 5온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여러분 깨달으신 거는 유여열반밖에 안 됩니다. ② 그 감각기관마저 청정해진 마음이다. (무여열반無餘涅槃. 반열반般涅槃, 구경의 열반, 5온이 없음, 윤회를 초월, 목탄이 완전히 식은 상태). 무여 열반은 죽어야만 깨달을 수 있어요. 왜? 몸뚱이가 없어져요. 그런데 기억해 두세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이것도 힌두교에 그대로 있습니다. 생존 해탈과 사후 해탈이라고 그래요. 살았을 때 해탈한 진인과 거기서 진인(眞人)이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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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 완전히 참나로 돌아가 버린, 브라만과 합일돼버린 진인을 구별해요. 똑같아요. 완전히 열반에 합일을 해버린 존재를 무여열반을 얻었다 그러고 이 무여열반을 반열반(般涅槃)이니 마하열반이니 그래요.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게 여기서 나온 표현입니다. 실제로 열반에, 이거 열반에 드셨다는 말은 원래 이 소승불교에서나 써야 돼요. 왜냐하면 보살은 다시 움직여야 되는데 열반에 들어 현상계에서 완전히 사라지셨네 이런 뜻이거든요. 열반에 들었던 건. 실제로 이제 초기불교랑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에 들었다는 게 궁극의 목표 목표예요. 아무리 내가 아는 마음에 24시간 안주를 해도 몸뚱이, 육근이 아직 있는 동안에는 탐진치가 작동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탐진치는 내 열반의 마음을 깰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서 유여열반이라고 그래요. 열반은 얻었는데 아직 몸뚱이가 남아 있다. 그럼 카르마가 다 지워진 건 아니라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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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카르마는 계속 작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열반 51% 이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늘 51%는 아니지만 계속 열반에 접속해 있고 계속 그 51%의 마음을 계속 그 더 깊은 선정으로 만들어 가면서 계속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탐진치에 영향을 안 받을 정도는 되겠죠. 죄를 안 지을 정도는 만들어내요. 그걸 우리가 아라한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라한이 탐진치가 다 끝난 존재면요 부처랑 다를 게 없어야 돼요. 업장이 그 정도 다 지워졌다면 부처랑 공역에서 다를 게 없어야 돼요. 그런데 달라요. 그러면 아라한들은 뭘 얻었냐? 항상 열반에 접속해 가지고 원하면 바로바로 51%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얻은 거예요. 이러니까 탐진치에 지지 않을 정도는 된 거예요. 이해되시죠? 여기까지가 아라한입니다. 이러니까 아라한이 일주일에서 보름 사이에 된 아라한들이 되게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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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능했다는 거예요. 이게 진짜로 업을 다 지운 뒤데 아라한 된다면 그건 무량겁을 또 닦아야 돼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석가모니나 됐지 우리는 안 된다고 포기하고 아예 아라한을 목표로 합니다. 부처를 목표로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아라한이 죽을 때 이제 몸이 사라지면 궁극의 열반에 든다고 믿은 거예요. 그걸 무여열반이라고 한 거예요. 그 감각기관마저 청정해져버렸다는 거는 이제 완전히 죽었다는 거고요. 열반에 이런 두 가지 기준이 있다는 것도 한번 들어보시고. 이런 게 힌두교의 진인 이론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힌두교도요 아트만 각성을 해서 24시간 아트만과 접속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미 진인이에요. 생존 해탈자예요. 살아서 해탈한 존재. 근데 이 이 진인이 죽으면요 완벽하게 브라만과 합일돼버려요. 그걸 이제 사후 해탈. 무신 해탈, 몸이 없어진 해탈이라 그래요. 그 이론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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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안주가 목표면 여기도 똑같이 열반 안주가 목표예요. 레벨도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그 화두 깨친 정도, 1급 1주 보살의 경지 정도에 해당됩니다. 지금 아라한이나 힌두교의 도인이나 다 1주보살 정도입니다. 참나 안주, 열반 안주, 아공 법공까지 깨달은 존재. 구공은 약해요. 그래서 구공까지 닦아야 1지 2지로 올라가는데 거기까지는 안 닦인 상태가 많습니다. 세 번째 3. 찰나적 열반. 번뇌들은 생멸하는 사물이다. 번뇌는 일어났다가도 원인적 조건이 없어지면 간단히 제거된다. 비록 순간적으로 제거된다 해도 다른 말로 ‘청정함’이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현상은 진실한 의미의 ‘열반’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또 뭐라고요? 찰나의 딱 번뇌가 탐진치가 찰나 없을 때 여러분 몰라 하면 탐진치가 순간적으로 없죠. 왜냐하면 욕심내던 거 화나던 거 잠깐 몰라 했잖아요. 그때 딱 청정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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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알아차림이 빛나겠죠. 육근이 찰나라도 멈추면 태양빛이 느껴질 거 아니에요 구름에 가려졌던 그것도 열반이라고 보는 거예요. 찰나적 열반. 이런 이론이 여러분을 열반으로 쉽게 인도해주는 가르침이에요. 안 그러면요 이거 지금 아마 어디 한국 절에 가서 “제가 찰나 열반한 것 같아요.” 그러면요 스님들이요 “놀고 있네.” 할 거예요. “열반이 장난이냐.” 왜냐하면 열반을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아시는 분이라면 아는 분이에요. “사실 우린 늘 열반 속에 살고 있다.” 이 말이 나오면 고수이고요. “놀고 있네” 하면 이분은 상상 속의 열반을 추구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완벽한 기준을 정해놓고 열반이라고 하니까 나도 못 들어가고 아무도 못 들어가요. 이게 기독교식 바리새파의 한계랑 똑같습니다. 내가 정한 어떤 상을 세워놓고 그걸 열반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분은 정확히 얘기하고 계신 거예요. 찰나 열반이 가능하다는 거. “우리가 잠깐 생각 멈추면 사실 열반이야” 이겁니다. 찰나적 열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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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번뇌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냥 우리가 숨 쉬듯이 열반을 느낄 수 있다니까.” 이렇게 얘기해 주는 게 얼마나 희망의 소식이에요. 번뇌가 여전히 남아 있어도 이 열반은 모든 존재들을 자양(自養)한다. 길러준다. 사실 우리는 이 열반 덕에 산다 이겁니다. 제가 저는 이런 말까지 해요. 이거 이 말 이해되시면 대단하신 분 제가 몰입 책에 이런 말까지 했어요. 욕망이, 우리가 욕망을 해소하는 것도 사실은 행복해지려고 그런 거죠. 그게 사실은 열반을 얻으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왜 쇼핑을 하신 거예요 열반을 얻으려고요. 오늘 택배가 오늘 이제 집에 가면 와 있대요. 집에 가서 뭘 체험하시겠어요? 열반을요. 물건을 딱 받을 때 찰나의 열반이 옵니다. 무욕의 상태가 잠깐 와요. 아! 난 이제 족하다. 이때가 열반이에요. 여한이 없다. 근데 여한이 없는데 하나만 빼고 이러면 이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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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서 딱 튕겨요. 열반에서 바로 튕겨요. 하지만 그러니까 찰나 열반인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 찰라 열반을 누려요. 이거 힘 때문에 살아요? 왜 영화 보러 가요? 왜 음악 들으러 가요? 가서 찰나 열반을 누려요. 잠깐이라도 시공을 초월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그 느낌 그러니까 존재할 뿐인 상태 존재할 뿐이 원래 참나 상태인데 참나를 맛본다니까요. 여러분 가끔씩 그러니까 무아지경에 들 때 더 바랄 게 없을 때 가끔씩 찰나 접속이 돼요.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힘으로 우리가 사니까 자양한다고 하는 거예요. 만물을 다 그래요. 가다가 고양이 그 봄볕에 이렇게 누워 있는 그게 열반 상태예요. 여러분이 부러우시죠. 열반이라서 부러워요. 아 저 고양이도 열반에 들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까 삶이. 너는 월세 걱정을 안 해서 열반에 든 거야. 막 뭐라고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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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배제하고 그냥 딱 있는 상태, 그게 열반입니다. 그래서 찰나 열반.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활력을 되찾는 거다. 그러니까 홈쇼핑도 물건과 눈이 마주친 순간, 견물생심이잖아요. 감각 대상에 홈쇼핑 그 물건이 들어오잖아요. 이때 시작돼요. 카르마가 욕망이 딱 발동합니다. 탐진치가 확. 탐진치도 항상 대기하고 있거든요. 확 몰려옵니다. 알아차림만 늘 있지 않아요. 탐진치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조건이 갖춰지면 형성돼요. 왜냐? 탐진치도 근원에 가면 알아차림이거든. 알아차림에서 작동하는 거예요. 근데 시공 안에서는 탐진치의 모습으로 작동되는 것뿐이에요. 확 탐욕을 냅니다. 안 되면 막 짜증을 내요. 그렇죠. 마감 임박. 이런 마감 임박 이런 얘기를 안 하면 사람들이 느슨해요. 탐진치가 내일 살까 좀 더 고민해 보지. 근데 “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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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임박 품절 곧 품절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얼마 없는 거예요. 지금 빨리 결정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딱 지르고 나면 잠깐 찰나 열반이 옵니다. 아, 샀다. 잠깐 그러다 채널 돌리면 다시 시작되는 거죠. 이게 우리 중생의 삶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열반을 추구해요. 모든 존재들이요 욕망을 추구한다는 게 사실은 열반을 추구하는 거예요. 탐진치가 추구하는 게 사실은 열반이에요. 늘 열반에 있고 싶은 건데 못 있게 돼 있어요. 탐진치를 따라가서는 튕기게 돼 있어요. 그래서 탐진치를 초월하라고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똑같아요.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찰나의 행복이냐? 영원한 행복이냐?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짧은 시간이나마 집착과 번뇌로부터 자유를 추구합니다. 이런 순간이 일어날 적마다 적으나마 열반이 옵니다. 이분 대단하죠. 인정해 주잖아요. 이 현상은 우리가 ‘완전한 열반’, ‘영원한 열반’으로 전환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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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열반이라는 건 일반적으로 스님이 죽었을 때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음이 아니라 불사(不死)입니다. 영생(永生)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얘기해 준 거예요. 알아차림은 영원하니까. 근데 문제가 있어요. 알아차림은 영원한데 알아차림은 에고성이 없거든요. 그럼 나는 죽는 거잖아요. 이래서 이 열반론이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정토예요. 에고도 갖고 영원히 가고 싶은데. 그럼 정토 가셔야 돼요. 그러니까 나는 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럼 열반에 드세요. 근데 나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좋은 데서 좀 유유자적 도를 탐구하고 싶다. 영원히. 그러면 정토로 가셔야 돼요. 그래서 다 상품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걸 원하시느냐에 따라서 불교가 다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놨어요. 근데 어디로 들어가시건 결국은 견성하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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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여러분한테 호객을 하건 결국엔 견성해야 돼요. 제가 늘 주장하는 거고요. 4. 열반은 무의법이다. 우린 열반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열반을 만들어내려고 그래요. 완벽한 열반, 탐진치가 없는 이상적인 마음을 열반이라고 규정해버리면요, 언어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이제 거기에 노예가 돼가지고요 완벽한 열반을 내가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영원히 아라한이 못 됩니다. 그냥 아무 짓도 안 하면 열반인데, 몰라 하면 열반인데 열반을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여러분 몰라만 하시면 지금도 열반이에요. 몰라 과거 몰라 미래 몰라 내 이름 몰라 하면 무아선이죠. 부처님이 가르치신 무아선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무아, 에고도 몰라. 무아죠. 그러니까 존재해요. 그런데 에고가 없는데 존재해요. 그게 이게 최상승선이고 견성이에요. 거기는 무위의 세계예요.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제가 보조적으로 얘기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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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접속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모든 원인이나 원인적 조건이나 보조적 조건, 즉 인연(因緣)입니다. 인과 연, 직접 원인 간접 원인, 인과 연을 초월해 있어요. 인연법이 아니거든요. 그 세계는 인과가 없는 세계예요. 인과가 없는 무위의 세계, 조작할 수 없는 세계에 접속할 수 있을 뿐이에요. 접속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과를 짓는 거예요. 이거 이해하셔야 돼요. 열반은 밖에 있는 태양 같은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우리 인과를 떠나 있어요. 그런데 내 방은 캄캄해요. 커튼이 쳐져 있어서.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현상계, 내 방 안에서의 룰은 뭐예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어요. 커튼을 걷어야 커튼이 걷어져 있어요. 이해되시죠? 그럼 나는 뭘 해야 돼요? 커튼을 걷어요. 그럼 태양빛이 들어와요. 열반을 체험해요. 즉 내가 명상을 하니까 열반을 체험했어요. 그럼 열반이 만들어진 것 같단 말이에요. 아니라는 거 아시겠죠? 내가 커튼을 치웠다고 태양빛이 들어왔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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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빛을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원래 있었지. 원래 알아차리고 있었는데 내가 몰라를 해서 생각을 멈추니까 알아차림이 내 법계에의 영향력을 일으킨 거죠.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열반을 내가 접속하고 열반을 얻었다고 해서 내가 만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야 됩니까?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꾸준히 원인을 지어야 돼요. 열반이 드러나기 좋은 원인을 지어서 그 결과를 만들어내야 됩니다. 그러나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해야 된다. 이분도 정확히 그 얘기를 하시는 거죠. 그러면 열반 증득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선행은 열반 증득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행하는 보조적 조건일 뿐이다. 여기서 소승과 대승이 갈립니다. 소승은 일정 기간 동안 선행을 하다가 열반을 얻으면 멈출 각오잖아요. 보살은 열반보다 육바라밀이 더 목표면 보살이고요. 육바라밀을 해서 열반 얻어야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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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이에요. 육바라밀을 닦아도 소승이에요. 목표가 열반이잖아요. 이런 것들은 소승 수행, 이번 생이 끝이라고 보는 아라한들의 한계이긴 합니다. 열반을 얻으면 그칠 거라는 거야. 열반 얻으면 내가 더 이상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왜냐하면 열반 안에 들어가면 나도 남도 없는데 선행을 어떻게 해요? 이런 의식이 있어요. 이건 되게 힌두교적이에요. 이런 의식은 힌두교랑 잘 통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은 좀 차이가 난다. 5. 열반은 고가 소멸한 마음의 경지. 열반을 의미하는 가장 좋은 표현은 고통(苦)이 사라진 소멸(滅)이다. 소멸된 상태다. 사라진 상태다. 열반을 번역할 때 멸도(滅道) 그러잖아요. 소멸됐다. 탐진치가 소멸되고 고통이 소멸된 겁니다. 이 열반은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마음의 상태이다. 이건 일종의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은 늘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열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아무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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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을 얻지도 못하면서 법공, 무자성 아무리 떠들어봤자 의미가 없어요. 그럼 이 무자성, 만법이 무자성, 떠드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뭐 하는지 아세요? “무자성, 무자성”을 외우고 있어요. “무자성 무자성” 집착할까 봐. 열반에 의존하지 않고 수행을 하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아니 깨어나지 않고, 이 영원불변한 이 열반의 마음에 의뢰하지 않고 열반을 얻으려면 여러분 계속 끝없이 연기하는 세계에서 계속 외치고 있는 거예요. “무자성 무자성” 이것도 무자성 이것도 무자성. 열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뭔가 좀 힘들어 보이지 않으세요? 이게 지금 중관학파식 수행을 하다 보면 이 함정에 빠집니다. 열반을 못 얻고 계속 무자성을 외치고 있는 상태가 돼요. 열반이 없이는 안식이 없어요. 이분 말씀이 열반이 없으면 불교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7. 열반은 본래 현재적이다. 모든 이들은요 열반을 의미하는 정념과 정견.
1:06:00
이게 정혜쌍수입니다. 마음 챙김이죠. 정념은 정견은 그 알아차림 쪽입니다. 지혜. 여기서 정견이라는 거는 이제 알아차림이 알아차림이요, 여기서 그냥 알아차림이 자명하게 알아차리는 상태를 정견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자명하게 알아차릴 때. 정념과 정견, 그래서 정념은 마음 챙김으로 번역할 수 있고요 정견은 알아차림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알아차리느냐 차이일 뿐이기 때문에 알아차린다. 여러분 자찜도 다 알아차리는 거예요. 자명 찜찜도 알아차리는 거고요. 다 아는 거예요. 정견을 가지고 있다. 열반은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알아차린다. 정념 정견이 열반을 의미한대요. 그러니까 마음 챙기고 있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 상태가 열반이래요. 깨어 있고 알아차리고 있는 게 열반이래요. 그것들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열반의 경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1:07:00
이것은 온갖 종류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과 같다. 만병통치약이랍니다. 고통이나 병은 실제로 있지만 평범한 약으로 고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병은 번뇌에 의해 생긴 병이기 때문이다. 번뇌에 의해서 생긴 병을 치료하는 약이다. 번뇌가 종식되어 열반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고칠 수 있다. 이해되시죠? 번뇌로 생긴 병은 번뇌가 사라져야 끝나죠. 그래서 이런 병은 병원 가도 뭐라 의사 선생님이 그래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어떡해 대체. 부처님이나 해줄 수 있는 말이에요. 그럴 때는 유튜브에서 자연스럽게 5분 명상을 클릭하시면 되죠. 현대에 열반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열반의 상태는 본래의 현재적이다. (늘 여여如如하다.) 예전에나 열반에 들었지 요즘에 열반에 든 사람이 있나.” 이렇게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열반은 지금 이 순간 현재적이다. 현존하고 있다. 영원한 현존이죠. 기독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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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존은 신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영원한 현존은 열반을 말해요. 열반은 영원히 현존합니다. 영원히 현존한다는 걸 불교식으로 여여(如如)하다 그래요. 여 보세요. 똑같을 여(如) 똑같을 여(如)면 지금 이 순간도 똑같아야 돼요. 그럼 부처님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그 자리인데 이게 영원한 현존이죠. 단지 아무도 그걸 찾는 데 관심을 안 둔다. 이 얘기고요. 8. 자연스러운 열반. 자신의 마음속에 청정함을 발견할 적마다. 순수한 알아차림 상태를 말하죠. 탐진치가 없고 딱 알아차리고만 있는 이 청정한 상태가 발견될 때마다 그것을 의식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라. 우리 5분 명상 10분 영상 그대로 아닌가요. 들이쉬고 내쉬고 더 바랄 게 없는 그 상태. 몰라 괜찮아. 숨을 들이쉬는 것이 청정하면 내뿜을 때도 청정하다.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잠시 동안 이렇게 한다. 딱 숨만 알아차리고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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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가 안 일어나는 상태를 지금 말하는 거예요. 청정하잖아요 이때. 그러니까 몰라 괜찮아가 이루어지면서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이 상태. 특히 붓다다사는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견성, 열반에 이르는 걸 강조하신 분입니다. 태국에서. 그것은 빨리 열반을 깨닫기 원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좋은 수행이다. 무의식적으로 번뇌가 소멸된 상태인 열반은 더욱 자주 그리고 쉽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찰나 찰나 자꾸 자꾸 열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인간의 마음을 돕는 최선책이다. 결과적으로 열반은 죽음이 아니라 ‘청정함’ 혹은 ‘불사’이다. 죽지 않음. 알아차리는 마음은 죽지 않아요. 그리고 청정해요. 순수한 알아차림이니까. 팔리어 경전에서는 열반은 죽음과 관계된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열반은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무위법의 상태고요. 그것은 일종의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은 늘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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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지라고 하냐면 다른 게 아니라 내 의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열반이 그러면 존재가 아니고 어떤 존재의 상태만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존재예요. 열반은 존재인데 분명히 열반은, 참나는 존재예요. 존재고 고정불변의 실체인데 이렇게 얘기해버리면 뭐가 돼요? 나 밖에 열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당신 의식의 어떤 한 상태라고 얘기를 해주는 건 뭐예요? 당신 안에서 찾으라는 얘기예요. 분명히 존재인데 당신 의식의 차원을 높였을 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경지. 당신이 지금 의식의 경지를 조금만 끌어올리면 나타난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런 식 표현입니다. 일종의 경지라는 거예요. 마음은 늘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탐진치만 소멸하면 그 경지에 들어가요. 만약 열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열반은 가능합니다. 번뇌는 일종의 요소들이 합성한 사물이므로. 연기법으로 합성된 거죠. 번뇌도 무자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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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도 무자성입니다. 현상계에서 봤을 때 만법은 다 무자성이에요. 중관학파의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그것만으로 법공을 만족하려고 하니까 제가 비판한 거지. 만법은 다 무자성이에요. 현상계에서 영원한 건 없어요. 그러니까 번뇌도 무상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번뇌를 잡지 않으시면 번뇌는 흘러가요. 망상은요 번뇌는 여러분이 붙잡지 않으면 흘러가 버려요. 근데 어떤 고민이 계속되고 계시다면 여러분 계속 붙잡고 계신 거예요. 여러분 계속 집착하고 있는 그게 내 마음에서 못 떠나게 해요. 놔버리면 떠나요. 관심 딴 데 돌리면 떠나요. 막 아프다가도요, 애들 막 아프다가 게임기 주면 안 아픕니다. 정신이 지금 통증에서 어디로 갔어요? 게임, 렙업으로 갔어요. 안 아프냐? 뭐 아프다고 했는데 게임을 너무 잘하고 있어. 안 아프냐? 아 아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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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아팠지. 그때 정신 차려요. 이 정도로 사람은 거기에 몰입 안 하면요 여러분 법계에서 없는 게 돼요. 그러니까 아무리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내가 관심 안 주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몰라 해버리라는 거예요. 몰라 해버리면 바로 무관심으로 들어가거든요. 무관심해버리면 끝이에요. 관심을 안 주는 한 이게 나한테 힘을 발휘 못합니다. 너무 심한 통증은 이거는 안 되죠. 그러니까 끝없이 관심을 줄 수밖에 없어요. 몸의 조건이 해결되지 않고는. 하지만 하여튼 원리는 이래요. 그래서 번뇌도 일종의 합성물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 있어요. 이 자연스러운 과정은 번뇌가 사라진 매순간 열반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 번뇌가 사라질 때마다 여러분 열반을 체험하시는 거예요. 사실은 계속. 그냥 여러분이 살겠다 할 때 그때가 다 열반 상태예요. 그 마음이 열반이에요. 나중에 참나 찾고 보면 그 마음이에요. 다른 마음 아니에요. 늘 살면서 겪었던 마음일 겁니다. ‘열반’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지’이다. 이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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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 마음에 안 일어나는데요. 그게 아니라 여러분 마음의 어떤 경지라는 거예요. 그 경지로 여러분 마음을 한번 몰고 가보라는 거예요. 사실은 마음이죠. 사실은.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영원한 것(상常)이고 무상을 초월한 본체인 ‘열반’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붓다다사 지음, 강진아 편역, 상좌불교의 가르침) 어려운 말을 썼지만 이것도 붓다다사 스님이 ‘상좌불교의 가르침’이라는 데서 얘기하신 겁니다. 상좌불교가 남방불교죠. 그래서 “남방불교의 핵심도 숨 쉬듯 자연스러운 열반이고 그 열반은 알아차림이다.” 이렇게 결론 내시면 좋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6강 - 아잔 차 스님의 청정한 마음과 아짠 붓다다사의 열반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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