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먼저 명활산성부터
명활산성작성비는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석입니다. 이 비석의 이름이 명활산성작성비니 당연히 명활산성이라는 곳에 세워졌겠지요. 그 명활산성은 글자 그대로 경상북도 경주시 명활산에 있는 성입니다. 명활산성은 삼국 시대 신라에서 쌓아 만들어진[축조] 성이었지요.
그 산성은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한 성곽이었습니다. 원래 왜구를 막기 위하여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6km에 이른다고 하지요. 명활산성은 우리나라 사적(史跡/史蹟)입니다. 사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를 말하지요. 이 사적의 정식명칭은 ‘경주 명활성’입니다. 그런데 명활산이라는 지명은 신라 초기부터 기록에 나타나지요.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중략)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원년(1년) 4월 15일」 |
이 명활산성의 작성비(作城碑)는 서기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 터 일부가 무너지면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성(內城)은 이중으로 쌓은 성에서 안쪽의 성을 말하고요. 이중(二重) 역시 글자 그대로 두 겹 또는 두 번 거듭되거나 겹치는 것을 말합니다.
② 명활산성작성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명활산성작성비는 삼국시대에 신라의 명활산성을 쌓은 후 만들어 세운 돌에 글을 새기어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 비석은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간직하고 있지요. 비의 크기는 높이 66.8 cm, 상폭 29.6 cm, 하폭 31 cm, 최대두께 16.5 cm입니다. 형태는 긴 사각형이지요.
이 비석은 중간 부분이 약간 둥글게 들어갔습니다. 그러하되 나머지는 파손된 부분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했고 글자의 획도 뚜렷하지요. 비석에 새긴 글 즉 비문(碑文)은 9행 148자입니다. 여기서 행은 쉽게 말해 줄이지요. 글을 가로나 세로로 벌인 것을 세는 단위입니다. 이 비문은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글자가 새겨졌지요[각자(刻字)].
여기까지는 제가 다소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듯도 합니다. 이 명활산성작성비는 서기 551년에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과 손을 잡고 각자 한강 상류와 하류를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을 무렵 세워진 모양이고요. 신라가 한강 상류를 차지한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원전에서 몇 월인지 구체적인 시기를 밝혀놓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리한 기세를 타서 10군(郡)을 빼앗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12년」 |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이 시기는 그레이트 전집으로는 15권(신라, 한반도의 중심에 서다)에 나오는 그 시기입니다. 아울러 독자분들께서 일부 용어들이 이해가 어려울 듯하여 설명한다면 한강 상류는 강원도를, 한강 하류는 경기도와 서울특별시를 뜻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비석이 서기 551년인지 알 수 있었을까? 여기서 필요한 개념이 바로 육십갑자이지요.
③ 난데없이 필요한 개념, 십간십이지 혹은 육십갑자
비문에는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을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간지는 설명하자면 십간과 십이지의 줄임말이고요. 십간(十干)은 천간(天干)이라고도 하는데 육십갑자의 위(앞) 단위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일컬어지지요.
십이지는 간지에서 뒤쪽에 붙는 열두 가지입니다. 앞에 붙는 십간이 하늘을 의미한다고 하여 천간이라고 함은 이미 언급했고요. 십이지는 땅을 의미한다고 하여 지지(地支)라고 부릅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고 흔히 일컬어지지요. 이렇게 천간과 지지를 순차로 배합하여 예순 가지로 늘어놓은 것이 바로 육십갑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조합은 갑자(甲子)부터 계해(癸亥)까지 총 60개가 있습니다. 천간과 지지에서는 짝수와 홀수를 조합하지 않으므로 120갑자가 아닌 60갑자가 되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에서 세는나이로 61세가 되면 환갑(還甲) 혹은 회갑(回甲)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여하간 이 비석의 발견은 개국 원년이자 진흥왕 12년인 서기 551년의 상황을 알 수 있지요.
④ 드디어 비석 원전 소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는 하시모토 시게루(橋本繁)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교수의 논문인 「중고기(中古期) 신라(新羅) 축성비(築城碑)의 연구」입니다.
신미년(551년) 11월에 성을 만들었다. 상인나두(上人邏頭: 군 태수?)는 본파부(本波部)의 이피이리(伊皮尒利) 길지(吉之)이고, 군중상인(郡中上人)은 오대곡(烏大谷)의 구지지(仇智支) 하간지(下干支)이다. 장인(匠人)인 비지휴(比智休) 파일(波日)과 공인(工人)인 추혜(抽兮) 하간지(下干支)의 무리가 길이 4보 5척 1촌을 받았고, 문질혜(文叱兮) 일벌의 무리가 길이 4보 5척 1촌을 받았으며, ▨▨리(▨▨利) 파일(波日)의 무리가 4보 5척 1촌을 할당받았다. 모두 합하여 높이가 10보이며, 길이는 14보 3척 3촌이다. 이 기록은 고타문(古他門)에서 서남쪽으로 돌아간 뒤 그곳에 돌을 만들어 세워 적은 것이다. 여러 사람이 이르러 11월 15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12월 20일에 일을 마치니, (공사 기간은) 합하여 35일이다. 글을 쓰고 베낀 사람은 원흔리(源欣利) 아척(阿尺)이다. |
간단히 말하면 각 직책에 따라 할당제 식으로 성을 쌓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의 도성성곽터에서 한양도성 축성이 세종 때 할당제가 적용된 것과 유사한 대목이지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