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불교철학06 육조단경 1
견성콘서트 10부 - 육조단경 1강(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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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늘 할 내용은 견성 콘서트 제10탄 육조단경(六祖壇經)입니다. 6조 혜능에 대해서 혹시 모르시는 분도 계실 테니까 한번 읽어보죠. 제가 써놨습니다.
[* 6조 혜능[慧能, 638~713]
달마를 제1조로 하는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이다(동토6조東土六祖 중 6조로 통합하면 제33조임, 과거 7불과 합하면 제40조임). 제5조 홍인弘忍의 법을 이은 제자로 남종선을 창시하여 북종선의 신수神秀와 대립하였다.]
6조 혜능은요 638년에서 713년이니까 원효대사(元曉, 617년 ~ 686년)가 좀 더 나이가 많으세요, 6조보다. 그러니까 6조, 지금 제가 육조단경을 해야 되니까. 하지만 6조 대사보다 더 관심 가지셔야 할 분은 원효대사인데요. 우리나라에 전 세계 내놓을 만한 고승이신데, 예 우리나라 조계종(曹溪宗)에서 좀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조계종이다 보니까 6조 제자거든요. 이거 이해하십니까? 6조 대사가 사신 곳이 조계사 아니에요. 그래서 조계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6조 대사한테 지금 맥을 갖다 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제가 육조단경을 강의하고 6조 대사를 좋아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큰 고수들이 많으신데, 그걸 제대로 지금 한국 불교가 못 담아내고 있는 상황은 제가 좀 안타깝고요. 그거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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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6조대사는 대단하신 분이고 또 이분이 보조 스님(普照知訥, 1158-1210)한테 영감을 줬어요. 보조 스님이 처음에 깨달음을 얻은 게 육조단경을 보다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조계종이 이제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요. 물론 이제 보조 스님 이전에부터 6조 이 맥에서 배워온 분들을 또 종조로 모시고 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조 스님이 우리나라에서 큰 조계종을 그 어떤 세를 규합하죠. 자 근데 이제 재밌는 게 아무튼 이 6조 혜능과 우리나라 불교는 뗄 수 없죠. 이미 우리나라 불교 이름이 조계종이고. 그러니까 6조 대사 때문에 지금 조계종이 된 거고, 보조 스님이 6조 대사를 존경해 가지고 송광사(松廣寺)가 지금 순천에 있죠. 순천 송광사 뒷산을 조계산(曹溪山)이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계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돼버린 것은 다 6조대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마 이래 최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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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불교의 스타죠. 그래서 그분이 단(壇)에서 설법하신 게 육조단경인데 이 내용을 좀 어렵기도 해요. 그래서 아주 달마 이래 중국에서, 인도에서 달마가 전해준 인도식 불법이 중국에서 토착화돼 가지고 이제 공식적으로 선언이 된 겁니다. 예. 새로운 불교를 이렇게 열어가자 하는 그런 어떤 선언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공부 이렇게 하자. 그게 너무 참신한 게 많아서 지금까지도 1000년 더 됐죠. 1000년 더 됐는데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줬고 특히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줬고 특히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줬는데요. 우리랑 또 밀접된 문제인 게 최근에 성철스님(性徹, 1912-1993)이 돈오돈수, 돈오점수 이런 문제를 크게 한번 다시 한 번 우리나라에서 논쟁을 점화했죠. 아직까지도 지금 돈점 문제에서 되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돈오냐? 점수냐? 돈오 하면 끝나는 거냐? 돈오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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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점수가 필요하냐? 이런 문제까지도 다 직결돼 있으니까 육조단경을 한번 제대로 읽으시면 돈점 문제에 대해서도 좀 자유로운 시각이 생기실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런 문제들은 하나씩 풀어가기로 하고요. 한번 보시죠. 달마가 1조로 하는 중국 선종의 6조고요. 동토6조라고 합니다. 동토라고 하고 이게 인도에서도 계보가 있겠죠. 인도에서도 내려오는 계보는 서천(西天) 계보라면 서천이라고 합니다. 서천. 달마가 서천 28조예요. 그리고 이 혜능이 동토6조니까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죠? 달마는 한 번씩 중첩되니까 그래서 33조가 되게 돼 있습니다. 총하면 6조가 33조입니다. 이것도 재밌죠. 불교에 28천이 있고 33천이 있잖아요. 숫자를 맞춰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족보가, 뭐죠, 진실이냐? 그거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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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얘기예요. 이거는 숫자에 맞게 맞춰놓은 겁니다. 유명한 고승들을 쭉 엮어서요 그러니까 이제 그래도 사승(師承: 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이어받음) 관계에 있는 고승들을 주로 엮었지만 이 숫자를 부러 딱딱 맞춘 거, 이런 것도 다 후대인들이 맞춘 겁니다. 그렇게 보셔야 돼요. 33천, 불교에는 28천 그래서 우리나라 보신각도 아침에는 33번 치고 저녁에는 28번 칩니다. 이런 숫자적 상징성까지도 다 지금 들어 있는 거니까 이것은 100% 맞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시고요. 5조대사가 홍인입니다. 홍인대사의 법을 이어서 이제 남종선(南宗禪)을 창시했다고 하죠. 북종선(北宗禪)은 거기 나오지만 신수(神秀: 606?~706년)라는 분 홍인의 또 다른 제자죠. 신수라는 분하고 이제 남북, 이거를 남돈(南頓) 그럽니다. 6조는 단박의 깨침을 중시했고 북은요? 점(漸) 신수대사는 점차를 중시했다(北漸).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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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제 말이 내려오는데요. 같은 5조 홍인대사 제자인데 신수라고 꼭 이 漸이라고만 너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신수대사도요 이런 견성하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이 돈오를 주장하셨던 증거들이 많이 나와요. 실제로 후대로 보니까 우리가 달마대사 저작인 줄 아는 게 나중에 알고 보니 돈황에서 나와 보니까 신수대사 저작이고요. 또 티벳 가가지고 돈오돈수 주장하면서 티벳 인도식 고승들하고 인도식 수련을 하시던. 돈오점수죠 인도식은 본식이. 그래서 돈오점수를 강조하면서 싸움이 붙은 분도 다 신수대사 제자예요. 그걸 다 6조 혜능제자로 알았던 분들이 실제 알고 보면 신수대사 제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이렇게 차별성을 두고 보면 안 되고요. 예. 차별성 안에서도 공통점이 더 많다고 보셔야 맞습니다. 한 스승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시고 지금 육조단경은 철저히 6조 편에서 쓰여진 거예요, 후대에 6조 제자들이. 좀 드라마틱한 얘기 나오더라도 신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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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죠, 라이벌로 나오는 신수를 꼭 그런 식으로만, 6조 대사 제자들이 보는 식으로 보시면 안 되고요 좀 공정하게 봐주시고 그다음 5조 홍인에 대해서 알아보면요.
[* 5조 홍인弘忍[601~674]
본래의 ‘참마음’(眞心, 알아차림)을 지켜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에고의 마음이 사라지며 자연히 부처와 평등하여 둘이 아니게 될 것이다. 守本眞心 妄念不生 我所心滅 自然與佛平等無二(최상승론最上乘論)]
이 홍인대사가 재미있는 분입니다. 이게 기독교에 있는 그런 얘기만큼 신비한 얘기들이 많아요, 불교에도. 전등록(傳燈錄)이나 이런 고승전(高僧傳)들을 보면 5조 홍인대사가 4조 대사를 찾아갔는데 4조보다 나이가 더 많은 거예요. 근데 도는 깨친 거예요, 5조가. 그래서 4조가 당신이 내가 법을 주고 싶은데, 의발(衣鉢)을 전수해주고 싶은데 나보다 너무 나이가 많으니까 죽었다가 다시 오라고 그랬어요. 이런 얘기들이 진행된다는 게 신기한데 “죽었다 몸 벗고 바꿔서 다시 오라” 그러니까 그럼 내가 가는데 우리 서로 약조를, 알아봐야 되니까 소나무를 하나 심어놓고 가자 해서 그 도신대사(道信大師, 580-651) 방 옆에다가 소나무를 심어놨습니다. 그러고 내려가는 길에, 길에서 시냇가에서 처녀를 만나서 그냥 자리에서 몸벗어서 처녀 배로 들어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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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처녀가 잉태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동정녀, 처녀가 잉태를 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어요. 도대체 뭔 일이냐. 그래서 쫓겨나서 애를 낳아서 화가 나서 애를 버렸는데 또 다시 돌아오고. 아무튼 그 애를 키우면 자꾸 누가 도와줘가지고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니까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7살 때인가 5살 때인가 다시 이제 그 절로 갑니다. 도신대사에 있는 절로 가서 이 꼬마가 법당에 들어가서 오줌을 눈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스님이 와서 “어디 지금 신성한 부처님 계신 곳에 오줌을 누냐?” 하니까 꼬마가 갑자기 뭐 이렇게 딱 게송(偈頌)을 읊어요. 뭐라고 하면서 “온 우주에 부처가 꽉 차 있다.” 하는 얘기를 하면서 “부처 없는 데를 가르쳐 주라. 내가 거기다 오줌을 누마.” 하니까 보통이 아니잖아요. 도신이 뛰어와요. 도신 대사가 나온 겁니다. “너 누구냐?” 했더니, “내가 그 사람이다. 저 소나무가 내 징표다.” 하니까 “아, 너구나.” 해 가지고 7살에 정식으로 출가가 아무튼 7살에 출가해서 그 양반이 5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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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그래서 5조 홍인대사예요. 인제 이 재밌는 게 이분이 나중에 또 5조가 있어요, 중국에. 300년 뒤에 5조대사가 또 있어요. 제가 예전에 불교 공부하면서 이 양반은 겁도 없이 왜 자기 그걸 5조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너무 신기하잖아요. 저분이 또 환생이에요. 그래서 이분이 가면서 “나를 등신불(等身佛)로 만들어라, 나 묻지 말고. 그러면 내가 다음에 돌아올 때 내가 손을 들 거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한 300년 뒤에 그 제자, 대를 이어서 제자들이 모시는데 어느 날 등신불이 손을 딱 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생이 오겠구나 기다렸더니, 법연선사(法演, 1024-1104)라는 분이 오셨어요. 저분이 5조 법연선사라는 300년 뒤에 또 그분이 와서 향 하나 피우면서 “이게 윤회의 증거다” 하고 이렇게 향 하나 피웁니다. 전설이죠. 그래서 5조 홍인대사가 어머니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성도 이제 어머니 성을 따르고 그래서 이런 얘기들이, 이런 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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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온다는 거예요, 5조 홍인대사에. 그래서 그런 분이 가르친 수련법도 좀 우리가 알 필요가 있잖아요. 보시면 본래의 참마음, 이분이 진심, 수본진심(守本眞心)이 제일 이분의 핵심입니다. 지켜라, 본래의 참마음을. 이 참마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참나예요. 여러분 저 주먹 보세요. 제 주먹 한번 바라보시죠. 모른다 하고 바라보세요. 이게 주먹이다 아니다 하지 마시고.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알아차림만 있으시죠. 그게 참나입니다. 여러분 참나 지금 모를 일이 없어요. “뜰 앞에 잣나무” 했을 때 그거 본 마음이 참나입니다. 일지선사(一指禪師)는 꼭, 뭐죠, 손가락 하나 일지선 하신 분 있죠. 구지, 구지선사(俱胝禪師). 일지선이 이겁니다. 손가락 하나 내밀면 이거 보는 마음이 참나예요. 알아차리고 계시잖아요. 생각 감정 오감을 다 알아차려요 그러면 알아차림은 생각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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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도 아니고 오감도 아니죠.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에고가 붙지 않은, 집착이 붙지 않은 알아차림은 그 자체가 참나예요. 참나를 따로 찾지 마세요. 왜냐하면, 5조 홍인대사의 주장이 이거예요. 제가 방금 말씀드린 그겁니다. 참마음을 잘 지키라는 게요 그 밑에 수련법이 나오는데 제가 3개나 실었군요. 예. 알아차림 상태를 잘 지키면서 알아차림이 생각 감정으로 더럽혀지지만 않게 하시라는 겁니다. 망념(妄念)이 일어나지만 않게 하면 에고가 사라져서 자연히 부처와 평등하여 둘이 아니게 된다. 곧장 부처가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죠. 자 이때의 부처는 어떤 걸까요? 알아차림 자체가 부처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걸 오해하시게 되면 돈오점수라는 참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듭니다. 정말 소모적인 논쟁인데요. 보십시오. 참나는요 우리 부처 자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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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현상계의 존재입니다. 즉 현상계는 오온의 세계고요. 부처님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했던 이 에고의 세계 얘기예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무상 고 무아를 지배하는 원칙은 연기법입니다. 다른 말로 인과법이에요. 인과법과 연기법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인과법을 잘 모르셔서 그래요. 같은 내용이에요. 인과에는 엄청 여러 가지 인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참나는요 인과가 없어요, 이 세계는. 나와 남이 없고 시공도 없습니다. 연기가 펼쳐질려면 일단 나와 남이 있어야 돼요. 너가 있으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너가 있다가 연기법 핵심인데 나와 너가 찢어져야 돼요. 나와 너가 찢어진 세계는요 자체를 영원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현상계 차원에서 에고가 닦이는 거랑, 참나는 닦을 수가 없어요. 인과도 없는데 어떻게 닦아요. 에고가 여러분이 노력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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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을 하는 것은요 에고가 있어야 돼요. 누가 노력하는데요? 내가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참나의 세계에 여러분이 들어가면 노력할 수가 없어요. 이런 비유를 듭니다. 소금인형이 바다를 재려고 들어갔다는 소금인형이 에고입니다. 바다가 참나의 세계예요.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소금인형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녹아버려요. 어떻게 해요? 거기서 무슨 수행을 합니까? 참나는 원래 닦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돈오돈수라는 건 이겁니다. 참나의 세계는요 돈오 한 방 깨치면 돈오돈수 끝나요. 일득(一得)이 영득(永得)이라고 그럽니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다. 참나, 이게(一指) 참나예요. 시공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이게 알아차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 주먹 알아차리셨죠. 모른다고 보셨죠. 그 모르는 마음이 참나거든요.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가 참나가 아니고요. 보십시오. 이름 모르시죠. 몰라라고 한번 해 보세요, 속으로. 몰라 한 뒤에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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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적이 있죠. 몰라 하고 난 뒤에 알아차리는 자가 선명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알아차리는 자는 있죠? 이름은 몰라도. 몰라 하고 그냥 멈추지 마시고 몰라 하고 알아차리는 자를 느껴보세요. 지금 존재하는 자. 이름도 모르지만 존재하는 자. 그 자리가 참나 자리입니다. 여긴 닦을 수가 없어요. 거기를 어떻게 닦으실 겁니까? 거기는 돈오돈수입니다, 애초부터. 에고의 세계는요? 무조건 점수예요. 여기는 돈오라는 것도 없어요. 이거는요 연기법의 세계라 내가 뿌린 만큼 거두는 세계예요, 이 두 세계는 철칙이 틀려요. “연기법이 여래고 열반이다.” 이런 말들 쉽게 하시는데 연기법과 니르바나는요 차원이 다른 문제고 이 니르바나가 현상계에 펼쳐지면 무조건 연기법이기 때문에 연기법과 이 참나의 공(空)은 또 둘인 것도 아니에요. 공에서 연기(緣起)가 나오니까. 공이 작용을 할 때 연기로 나타나기 때문에 연기가 공이고 공이 연기지만 엄연히 두 세계는 다른 차원대에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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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능엄경(楞嚴經)에서 참나를 바로 깨치더라도 내가 닦은 이 에고가 저지른 습기는요 단박에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인과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부처님도 상한 음식을 드시면 몸이 아프셔서 돌아가세요. 이해되십니까? 이 오온의 세계는 연기법의 작용을 받기 때문에요. 하지만 상한 음식을 먹고 돌아가는 과정을 다 지켜보는 알아차리는 자는요 애초에 공하기 때문에 윤회에도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늘 존재합니다. 이 기본 지식을 깔고 보세요. 모든 불교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6조도 여기에 근거했고 대승기신론도 이걸 써놓은 거고, 화엄경도 이걸 써놓은 거고, 보조 스님도 이걸 얘기한 건데 요 두 세계를 혼동하면서 “돈오하면은 에고도 다 닦여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자꾸 우기신다면 그건 에고의 욕심입니다. 한 방에 가고 싶은 욕심이에요. 그래서 돈오하면 단박에 부처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요 에고가 다 닦여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 얘기 듣다가 단박에 아라한이 되신 분들이 있는데, 니르바나에 들어가신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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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분들은 에고가 다 닦였을까요? 안 그래요. 인과법 때문에 앙굴리말라(央掘摩羅)인가는 아라한 된 뒤에도 돌로 맞아 죽었죠. 1000명을 죽인다고 돌아다녀서 아흔, 뭐죠, 999명을 죽이고 1000명 채울려고 부처님 죽일려다가 “서라” 하는 바람에 딱 멈춰가지고 알아차리는 바람에 그 양반이 아라한이 돼서 아라한이 돼서 내면에서는 희열을 느끼는데요 자기가 해 놓은 인과가 있기 때문에 돌로 맞아 죽었다고요. 그런데 죽을 때 편안하게 죽었어요. 내 죄업을 씻었다고. 인과는 그런 세계입니다. 자기가 책임지고 받는 세계예요. 그런데 “나는 돈오했으니까 인과를 초월할 거야. 인과 자체가 완전히 나는 없어.” 이렇게 주장하신다면 그건 아상(我相) 중에 큰 아상입니다. 내가 저질러 놓은 똥을 안 치우고 가겠다는 발상입니다. 자기가 한 것은 부처님도 다 치우고 가셔야 돼요. 이거 분명히 이해하십시오. 이건 힌두교에서 온 사상인데요 그냥 한 방에 끝난다. 윤회를 초월해 버린다. 이런 사상이 원래 힌두교 사상인데 불교에서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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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과 없이 들어와 가지고 한 방에 끝났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냥 윤회로 들어가 버렸으면, 윤회를 초월해 버렸으면. 이런 게 대승사상은 특히나 아니에요. 6조나 5조나 다 대승의 핵심, 달마나 다 대승불교를 믿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참나가 있으면 에고도 영원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공이 오온을 낳고 오온이 공이다.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이 에고를 갖고 가면서 보리, 참나의 보리와 에고의 중생성 살타, 그래서 우리는 부처의 길이 아니고 사실은 그러니까 더 고급스러운 부처의 길입니다. 보살의 길을 걷는다라는 게 대승의 핵심입니다. 영원히 공이면서 영원히 윤회계를 돌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겁니다. 이거 제가 항상 하던 얘기인데 요약해서 한번 드린 겁니다. 오해하지 마시라고요. 보십시오. 부처랑 둘이 아니게 된다고 했을 때는요 부처도, 보십시오, 부처의 에고와 나의 에고는 다르지만 이건(참나) 부처랑 똑같죠. 나의 알아차림만은, 지금 여러분이 방금 제 주먹 바라보신 알아차림만은 부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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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없습니다. 부처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거를 얘기한 겁니다. 그다음 얘기 볼게요.
[다만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중에 늘 본래의 ‘참마음’(眞心)을 똑똑히 지켜서 능히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에고의 마음이 사라지며 일체의 온갖 법이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但於行住坐臥中 常了然守本眞心 會是妄念不生 我所心滅 一切萬法不出自心.(최상승론最上乘論)]
다만 행주자와에, 걷고 머물고 안고 눕는 중에 본래의 참마음, 알아차리는 마음만 똑똑히 지키면요. 이 얘기는 그 알아차림만 제일 잘하시는 분은요, 참나 즉 알아차림 자체만 지키시면 되고, 혹시 알아차림을 지키기, 자체만 지키기 힘드시면 뭔가 대상을 하나 세워서 알아차리시는 게 좋겠죠. 제 주먹 알아차리시는 게 더 쉽죠. 그러다가 알아차리는 자를 알아차려 보십시오. 여기 견성도 단계가 있습니다. 제 주먹을 차려보세요. 모른다 하고 보세요. 제 주먹은 이제 관심 놓으시고 알아차리는 자체만 알아차려 보세요. 예, 거기가 참나 자리입니다. 거기를 바로 알아차리셔도 되고 행주자와에 뭔가 마음에 하나 염을 품어서, 나무아미타불이라든가 하나를 세워서 거기를 알아차리셔도 돼요. 알아차림이 늘 흐르게 돼요. 무조건 만들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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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래서 쭉 그걸 지키면서 망념이 일어나지만 않으면 에고의 마음이 사라지며 온갖 법이, 보십시오, 이 말 되게 중요합니다. 온갖 법이 내 안에 있다. 참나에서 연기법이 나왔으니까 즉 참나 안에는 우주의 모든 법이 다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죠. 만법이 여기 다 있습니다. 만법이 다 참나 안에 있기 때문에 만법을 갖춘 그 몸이라고 해서 줄여서 만(萬) 자 빼고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법신은요 텅 비어 청정하다라고만 아시면 잘못된 겁니다. 동양에서 무극(無極)은 청정하죠. 텅 비어 있죠. 그런데 태극(太極)은 만물의 원상을 다 갖고 있어요. 텅 비어 있으면 무극이고, 우주의 뿌리가 되면 태극입니다. 그런데 법신은요 이 두 개가 합쳐진 겁니다. 텅 비어 있으면서 우주의 모든 법을 갖고 있는 자리예요. 그래서 법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법신, 진짜 법신은요 여러분이 알아차림을 찾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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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된 것 같죠. 그런데 진짜 법신이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육바라밀을 다 펼칠 때 법신이 돼요, 실제로. 아니 참나 안에 우주의 모든 법이 있다는데 알아차림을 잘하다가 부모님이 뭐 좀 시키면 화내고 와이프랑 싸우고 이러면 법신이라고 할 수 있나요? 좀 이상하죠. 예. 그러니까 법신의 일부만 본 겁니다, 처음에. 그런데 이 법신이 부처님이랑 다른 건 아니죠. 똑같은데, 내 안에서 구현이 안 되거든요. 즉 이것도 에고 문제예요. 에고가 참나를 얼마큼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 참나는요 진정한 법신으로 펼쳐질 수도 있고 아니면 법을 꽁꽁 감추고 있는 법신이 될 수도 있어요. 하나도 안 나와요. 안에는 지혜와 자비가 가득 있는데, 만법을 갖고 있는데, 에고가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으니까 수용을 안 하니까 참나의 빛이 밖으로 못 새어 나오는 겁니다. 에고를 거쳐서 나오니까. 그래서 법, 그럴 때는요 법신이라고 하기 민망한 법신이 있습니다. 이 차이들이 점수를 낳는 겁니다. 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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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성을 낳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참나는 닦을 수가 없어요. 돈오 자리니까. 하지만 에고는 점수를 통해 무지와 아집을 타파할수록 참나 자체가 점점 더 드러나기 때문에 참나가 마치 변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경(大乘經)에 보면 1지의 견성과 2지의 견성과 3지의 견성과 불지의 견성이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게 참나 자리는 하나인데 왜 다르냐? 에고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정도가 달라서요. 그런데 만약에 딱 처음에 깨달은 이 참나를 곧장 불지의 참나라고 만약 누가 주장한다면 말이 안 되겠죠. 에고는 닦지도 않아시고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돈오돈수을 참나에만 적용하면 말이 되지만 에고까지 적용해 보려고 하면 그 논리는요 잘못된 얘기가 됩니다. 돈오돈수를 갖다가 업장에까지 적용하시면 큰일 납니다. 그러면 내가 돈오를 한 순간 내 업도 다 지워진 거예요.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행위는 법 그 자체여야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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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도 안 그렇고.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쌓아온 업이 많기 때문에.
[만약 처음 마음을 내어 ‘좌선’을 배우는 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16관법)에 의거하여 단정히 앉아서 바르게 알아차리고, 눈을 닫고 입을 다물고, 마음의 앞을 평평하게 바라보되 생각에 따라 원근을 조절하며 하나의 ‘태양의 형상’을 지어서 ‘참마음’(알아차림)을 지키며 생각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잘 조절하여 거칠어졌다 미세해졌다 하지 않게 하라. 그러면 사람에게 병고病苦가 생길 것이다. 若有初心學坐禪者 依觀無量壽經端坐正念 閉目合口 心前平視隨意近遠 作一日想守眞心 念念莫住 卽善調氣息 莫使乍麤乍細 則令人成病苦(최상승론最上乘論). (제5조 홍인조사가 전하는 최상승법은 ‘간화선’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청정한 ‘참마음ㆍ열반’을 반조返照하는 ‘반조선’이다. 홍인조사는 그 방편으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일상관日想觀’과 ‘조식調息’을 권했다.)]
만약에 처음 마음을 내어 좌선을 배우는 자는. 이 얘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5조 홍인대사가 6조 스승인데 6조한테 인가를 해주신 분인데 지금 조계종에서 화두 지상주의를 주장하는데 6조 대사는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6조도 화두를 안 가르쳤습니다. 6조대사는 화두도 없었어요. 그러면 그 스승인 5조 홍인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보십시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가지고 하라고 했습니다. 관무량수경에는 16관법이 나와요. 원효대사도 이걸 했습니다. 이걸 닦았습니다. 원효대사도 이걸 닦았고 5조 홍인도 이걸 닦았고 이걸 6조한테 또 가르쳐 줬겠죠. 이 16관법에는 아미타불의 세계를 갖다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건데 주로 첫 번째 일관을 합니다. 일관이 뭐냐면 일상관(日想觀)이에요. 태양을 눈앞에 그려보는 겁니다. 태양을 눈앞에 태양이 생생하게 떠 있는 것처럼 그리는 수련을 합니다. 5조 홍인대사는 그걸 했어요. 그걸 가르쳤어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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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참나 깨치는 최고의 비법이라고 가르치는 게 이겁니다. 화두선도 아니고 마음속으로 심상수련을 가르쳤습니다. 태양을 그려라. 서방정토니까 서쪽이니까 태양이 지는 모습을 그려라. 아무튼 태양을 그리라는 겁니다. 예전 어른들 다 이걸 했어요. 그 당시에도 그러면서 뭘 하는지 보십시오. 그 16관법에 의거해서 단정히 앉아 가지고 알아차리되. 계속 깨어서 태양을 그리고 알아차리고 있어야겠죠. 눈 닫고 입 다물고 마음 앞을 평평하게, 발라보되가 아니고 바라보되입니다, 평평하게 발라보면 이렇게 보면 안 되죠. 자, 관법하는 요령까지 가르쳐줘요. 눈앞을요 눈앞에 평평하게 바라보라는 거죠, 눈 감고. 평평하게 바라보면서 거기에 원근을 조절하여. 태양을 어느 정도 설정할 건지도 정해서 하나의 태양의 형상을 지어서 참마음을 지키며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 된다. 즉 알아차리기만 하지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태양만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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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려운 겁니다. 눈앞에 여러분이 태양 그리시면 “왜 이렇게 안 그려지지?”라는 것도 생각이죠. 그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면서 태양이 너무 밝네, 어둡네, 모양이 동그라미가 아니네, 이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면서 눈앞에 태양이 머물게만 해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호흡을 잘 조절하라. 기식(氣息)을 조절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거칠었다 미세했다 하면 안 된다. 즉 늘 미세하라는 얘기입니다. 호흡을 미세하게 하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거칠었다가 호흡이 들쑥날쑥하면 그러면 병고가 생길 것이다. 병난다, 몸에. 이분이 하는 수련법 이해되십니까? 조계종에서 지금 가장 6조를 그렇게 존중한다면요 6조 스승이 가르친 것이 일상관(日想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간화선 제일주의가 나올 수가 있나요? 안 맞죠. 6조도 간화선을 이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그때는 화두라는 것이 없던 때입니다. 이것도 이해하십시오. 간화선은 훨씬 뒤에, 당나라 때가 아니라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스님이 방편으로 제시한 게 간화선입니다.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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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셔야 돼요. 이때는 오히려 간화선이 아니라 간화선의 내용이 되는 여러 가지 화두들이 실전 속에서 구현될 때입니다. 자, “부처가 뭡니까?” 이런 얘기들이 서로 오갈 때예요. 단박의 깨침을 실제로 해주려고 온갖 제스처 도구를 다 이용해서, 뜰 앞에 잣나무도 보여주고. 부처가 뭡니까? 이겁니다. 모른다 하고 바라보세요. 그 자리입니다. 거기. 이렇게 실전이 오고 가다 이게 스토리로, 이야기로 정리가 되니까 간화선이 나중에 나온 겁니다. 당연한 얘기죠. 이야기가 많이 쌓이고 나니까 “이 얘기는 뭔 뜻이지?”라고 거기에 몰입하기 시작하는 방편법이 또 나오게 된 겁니다. 그건 훨씬 후대 얘기고 그거는 최상승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최상승선은 방편에 있는 게 아니에요. 태양 그리는 거는 최상승, 태양 그리는 것은 그러면 만약에 간화선만 최상선이면 이거는 형편없잖아요. 그런데 보십시오. 5조 홍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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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그 책 제목이 “최상승론”입니다. 5조 홍인은요 최상승법을 준다고 쓴 거예요. 5조가 틀렸거나 우리가 틀렸거나 하나가 틀렸겠죠. 이해되십니까? 최상승법이 되는 원리는요 알아차림을 곧장 불러낼 수만 있으면 최상승법입니다. 위빠사나도 최상승법이에요. “호흡 알아차려봐. 알아차리는 자가 있지? 거긴 생각 감정 오감이 없지? 무상고 무아하지 않지? 상락아정하지? 거기야.” 이래서 부처님이 단박에 아라한들을 만들어냈잖아요. 그것도 최상승법이에요. 우리 종파 거 아니니까 저것은 안 되고 우리 것은 되고. 다 부질없는 놀이입니다. 이거 잘 이해하세요. 최상승론에서 가르친 게 태양 그려보라고 한 겁니다. 태양을 그리시라는 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시라는 겁니다. 곧장 부처가 되는 원리는 주먹에, 뜰 앞에 잣나무는 되는데 왜 태양은 안 될까요? 예 이해되시죠. 똥막대기는 되는데 왜 태양은 안 됩니까?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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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해 보시고요. 이제 육조단경 본격적으로 들어갈게요
[1. 스스로 본성의 ‘반야지’를 취하여 하나의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바쳐라. 내가 그대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6조로 삼겠다. 自取本性(姓)般若之知(知之) 各作一偈呈吾 吾看汝偈 若吾大意者 付汝衣法 稟爲六代(돈황본육조단경敦煌本六祖檀經).
① 신수神秀의 게송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이다. 수시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이 묻지 않게 하여야 한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佛)拭 莫使有塵埃.
② 혜능慧能의 게송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은 또한 받침대가 없다. 불성은 늘 청정하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겠는가?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清淨 何處有塵埃.]
스스로, 이제 이건 5조 홍인이 한 얘기입니다. 제자들한테요 어느 날, 이 말이 재미있죠. 스스로 본성의 반야지를 취하여, 참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에고의 지혜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참나는요 알아차림이죠. 이 알아차림 자체가 지혜거든요. 에고가 뭘 안다 하는 게 아니라 참나가 그냥 알아차리는 거. 고 지혜를 써서 그게 반야지입니다. 여러분 반야라고 하면 에고의 세계가 아닙니다. 반야는요 참나가 자명하다라고 아는 게 참 반야지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여러분도 다 참나가 없으시지 않죠. 여러분도 제 글을 보시면서요 이건 자명해라고 선명한 느낌이 드신다면 확신적인 지혜가 이게 반야지입니다. 반야지는요 에고를 뚫고 나와요, 자명한 그 빛이. 자명하다. 아니다. 확신을 가지고 아니다 하실 수 있는 것도 반야지입니다. 맞다 하는 것도 반야지고요. 아무튼 반야지를 더 끌어내서 참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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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행주좌와의 참나를 되찾은 분들, 늘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는 분들은요 반야지가 늘 현현(顯現)하겠죠. “그럼 그 반야지 가지고 게송을 하나씩 지어서 나한테 바쳐봐라. 그러면 깨달은 자가 있으면 내가 의발 전수해 줄게.” 이렇게 나왔죠. “6조로 삼아 줄게.” 제자 중의 하나인 신수, 6조 혜능보다 공부가 좀 못했을 수는 있어도 이분도 이분 말이 틀린 게 아닙니다. 이분은요, 자 신수는요 지금 이 육조단경 상에서만 가지고 보죠. 실제의 신수가 아니라 육조단경 상에서 신수는요 “에고를 닦아야 참나가 나올 거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고요. 6조 혜능은요 “곧장 참나, 알아차림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면 되지 중간 단계를 거치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둘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에고를 잘 닦아야, 에고를 지워야 구름을, 이게 주장이 두 주장은 이겁니다. “구름을 다 치워야 태양이 드러나지”라고 주장한 반면, 신수는, 혜능은 “그냥 구름을 뚫고 태양을 바로 보라”는 걸 주장하는 겁니다. 이게 돈법(頓法)과 점법(漸法)의 차이예요. 에고를 가지고 얘기하려니까 점수(漸修)를 얘기 안 할 수가 없죠. 에고는 한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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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지워지거든요. “에고를 조금씩 지워 나가다 보면 태양이 보일 것이다.” 혜능은요? “구름 위에 태양이 늘 떠 있다. 그냥 구름 뚫고 올라가라. 신경도 쓰지 마라, 구름에 대해선. 바로 돈오하면 된다.” 즉 이게 뭐랑 같을까요? 기독교에서도 그런 거 있죠. 바리새파들은 “십계명을 잘 지켜야 천국 간다.” 예수님이나 바오르는요 “그냥 하나님 은총 받으면 가는 거지 계명 잘 지켰다고 가는 거 아니다. 그거랑 상관없는 문제다.” 왜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계명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요. 두 개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얘기합니다. 에고 차원에서 아무리 우리가 계율을 잘 지켜도 참나를 모르는 한에는 영원히 모릅니다. 이해되시죠. 곧장 참나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참나를 만날 수가 없다고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지금 곧장 모른다 하십시오. 이름 모르시죠. 여기 어디인지 모르시고 이름도 모르시는데 생생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이 자리를 바로 안 느끼고 “생각 감정 오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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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는 자가 있다는데 그걸 느끼려면 더 내가 생각도 바르게 해야 되고 바르게 살아야겠다.” 아무리 해도 알아차리는 자를 몰라요, 결국. 이 두 개의 차원대가 틀려서 그래요. 그래서 아래 차원대에 신경 쓰지 말고 바로 돈오를 하고 싶다면, 부처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들어가라는 얘기를 가르쳐 주는 겁니다. 신수는 이제 에고 차원에서 얘기를 해요. 몸은 보리의 나무요. 보리, 참나의 나무요 참나를 담고 있는 나무요. 마음은, 우리 마음도 참나가 아닙니다. 우리 에고의 마음을 말해요. 우리 마음은 참나를 받치고 있는 참나라는 거울의 받침대다. 에고의 입장은 분명히 이해해 주죠. 에고의 세계는 몸과 마음이 다 에고죠. 보리의 나무, 보리를 담고 있는 나무거나 밝은 거울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에고를 털고 닦아서, 에고의 망상이 일어나면 또 닦고, 잡생각이 일어나면 또 이렇게 해서 티끌이 묻지 않게 해야 참나가 밝혀진다. 에고의 점수 차원을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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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죠. 이거 인가를 못 받은 겁니다. 그래서 5조가 이걸 보더니 “아! 좋은 말이다. 하근기들한테 열심히 이거 듣고 따라하라고 해라. 그런데 이건 아주 최상의 가르침은 아니다.” 하고 딱 인가를 안 해줬어요. 그러니까 6조가 보고 있다가 또 잽싸게 썼어요. 그래서 6조를 보고 5조가 바로 인가를 안 해 줘요. 다른 제자들이 시샘할까 봐. 이것도 아니다 하고 밤에 오라 그래라. 밤에 몰래 인가를 해서 아주 드라마틱한 내용이 펼쳐집니다. 실제인지는 알 수 없고요. 그래서 밤에 막 도망을 칩니다. 제자들은 추적이 오고 의발을 뺏으려고. 이런 드라마틱한 내용이 펼쳐지는데 이겁니다. 뭐라고 했냐면? 뭐라고 했을까요? “보리에는 나무가 애초에 없고 밝은 거울에는 받침대가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먼지가 없으니 뭘 털겠느냐.” 이렇게 나와 버립니다. 차원이 다른 차원 얘기를 바로 한 겁니다. 참나에는 애초에 그 자리만 가면 나와 남이 없는데 무슨 닦고 털 게 어디 있냐? 참나에는 닦을 게 없다는 얘기를 딱 한 겁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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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가 볼 때 6조가 참나를 제대로 알았죠. 5조는 지금, 아니 신수는 계속 에고 차원에서 참나를 보고 있죠. 그런데 6조는 참나 차원에서 에고를 보고 있습니다. 참나 입장에서 보면 에고도, 뜰 앞에 잣나무도 다 둘이 아니다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여기까지는 6조가 6조 된 얘기고요. 사연이고. 그다음 내용 좀 빨리 가보죠.
[2.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선정’(定)과 ‘지혜’(慧)를 근본으로 여긴다. 첫째로 미혹하여 지혜와 선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마라. 선정과 지혜의 본체는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선정은 지혜의 본체이며,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다. 지혜를 쓸 때는 선정이 지혜에 있으며, 선정을 쓸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다. 선지식이여, 이 뜻은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다는 것이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생각을 지어 먼저 선정을 닦아 지혜를 발한다거나, 먼저 지혜를 닦아 선정을 발한다고 말하지 마라. 선정과 지혜가 각각 별개의 것이 된다. 이러한 견해를 짓는 자는 법에 2가지 형상이 있게 된다.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惠爲本 第一勿迷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即定是惠體 即惠 是定用 即惠之時定在惠 即定之時惠在定 善知識 此義即是[定]惠等 學道之人作 意 莫言先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뭐 지운 보람이 없네요. 한번 보겠습니다.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선정과 지혜를 근본으로 여긴다. 자 이 정(定)자와 혜(慧)자만 신경 쓰십시오.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들어보셨죠. 선정과 지혜를 근본으로 여긴다. 첫째로, 절대로 미혹하여 선정과 지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제 강의 계속 들으신 분들은 잘 아실 텐데요. 이거 뭐 보통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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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가 않은데요. 참나를 한번 이해해 볼게요. 참나는요 제가 쓴 책 수심결(修心訣) 혹시 보신 분들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참나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적(空寂) 텅 비어 고요한 자리고요. 영지(靈知) 신령스럽게 알아차리는 자리예요. 즉 영지는요 신령스럽게 알아차리는다니까 무슨 귀신을 보고 천당 지옥을 보고 그게 아니고요. 여러분이 뭔가를 생각과 감정 오감을 알아차린는다는 게 신령한 겁니다. 공적은 텅 빔이고요. 텅 빈 허공은요 알아차리지 못해요. 그런데 여러분을 알아차려요 생각 감정 오감을 초월해서 텅 비어 있으면서 알아차려요. 이것을 갖다가 보조 스님도 육조단경의 영향도 받고 이것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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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이 뭐냐 하면 대승기신론의 그런 정혜쌍수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이것을 선정이라고 보고 이것을 지혜라고 보는 겁니다. 핵. 알아차림은 지적인 거죠. 안다는 거니까요. 정혜쌍수는 이겁니다. 이게 진짜 정혜쌍수예요. 이 진짜 참나 차원의 정혜쌍수는 뭐가 다른가요? 에고 차원의 정혜쌍수도 가능해요. 에고 차원의 정혜쌍수는요 명상,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고요함에 들어갈 때 마음을 푹 쉬고, 지혜를 닦을 때는 책을 보거나 알아차려지는 것, 몸 호흡 마음 이런 걸 가지고 연구를 합니다. 이놈은 참 무상하구나, 이놈은 참 고통스럽구나, 이게 다 지혜의 결과물입니다. 호흡이라는 거 하나 봐도요 들어가면 나가야 되고, 들어가면 나가야 되고, 요놈 참 무상하고 가만히 안 있어서 고통스럽고, 이 호흡도 결국 내 것이 아니구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멈추란다고 멈추는 것도 아니고요. 이렇게 이해하는 게 혜(慧)입니다. 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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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할 때 정과 혜 중에 뭘 더 먼저 해야 돼요. 선정을 한 뒤에 혜를 닦거나 혜를 닦다가 선정을 들거나. 그런데 참나는 어떤가요? 두 개가 떨어질 수 있나요? 텅 빈 알아차림이 참나라고 보면 정혜는 늘 같이 다니죠. 즉 보십시오. 6조 혜능이 지금 이렇게 강조한 이유가요 단박의 참나를 찾아버리면 그대로 정혜쌍수가 돼버립니다. 선정과 지혜를 따로 닦을 필요조차 없다. 6조는 계속 이런 입장이에요. 6조는 참나만 빨리 찾으라는 겁니다. 여기는 부처 자리고 여기에는 선정과 지혜가 애초에 떨어질 수 없는 자리다. 여러분 지금 모르시죠. 이름 모르신다고 전제해 보십시오. 그 자리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게 선정이고요. 그런데 알아차리고 있어요. 졸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알아차리고 있어요.여러분이 넋을 잃고 주무셔도 그 자리는 알아차리고 있다가 누가 부르면 일어나게 합니다. 선정과 지혜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요. 그 선정과 지혜를 찾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혜쌍수라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해요.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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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에서 선정 닦았다가 두 시간은 선정, 두 시간은 지혜, 이렇게 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고루 닦는 사람 사마타를 닦아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뭐 호흡을 보든 어떤 상 하나, 아까 태양을 그리고 집중하는 건 사마타죠. 그러다가 이 태양의 눈앞에 떠오를 정도면 태양을 가지고 분석에 들어갑니다. 요놈의 빛이 어떻고 무상하고 이게 위빠사나거든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엄밀히 보시면요 태양을 곧장 알아차리고 있는 알아차림 자체는 이미 정혜죠. 이미 정혜쌍수죠. 이걸 바로 보는 겁니다. 같은 사태에서 더 본질적으로 깊이 보는 겁니다. 영성 지능이 더 높은 거예요. 더 깊은 사태의 본질을 봐요. 그래서 6조 효능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선정과 지혜를 나는, 내 법문은 선정과 지혜밖에 없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나는 오로지 참나 하나만 민다. 부처 자리, 돈오하는 거, 돈오 하나만 미는데 그 자리에서는 선정과 지혜가 다르지 않다. 선정과 지혜의 본체는 하나라서 둘이 아니다. 선정은 지혜의 본체이며 텅 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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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고 알아차림은 작용이라는 겁니다. 한 덩어리다. 선정은 지혜, 보십시오, 지혜를 쓸 때는, 자 이런 사람은요, 보십시오, 이런 사람도 에고를 써서 뭔가 뭔가를 알아차릴 때가 있고 고요함이 들 때가 있겠지만, 그래도 참나는 항상 같이 다니기 때문에 지혜를 쓸 때는 선정이 거기 있고 선정을 쓸 때는 거기 지혜가 있다. 즉 여러분이 참나를 깨치신 분은 고요하게 있다고 쳐도 알아차리고 있고요. 뭔가를 가지고 연구를 하고 계실 때도 고요해요. 참나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이해되십니까? 참나를 깨친 분은 그다음부터 움직이는 모든 삶이요 정혜쌍수예요. 머리를 써도 고요하고 고요하게 있어도 알아차리고 있어요. 원래 다 그런데 모르고 있는 겁니다. 원래 이런데 “나는 선정만 했어.” “나는 이제 위빠사나만 두 시간 닦으려고.” 만약 이렇게 얘기하신다면 사태를 모르는 분이라는 거죠. 그런데 같은 사태에서 누군가가 “나는 선정과 지혜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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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를 아시는 분이에요. 6조 혜능은 고걸 미는 겁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생각을 지어가지고 선정을 닦아 지혜를 한다거나, 선정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하거나, 먼저 지혜를 닦아야 된다거나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얘기해 버리면 두 개가 찢어져 버린다. 찢어져 버리면 이런 견해를 짓는 자는 두 가지 형상이 있다. 이게 분열상이 있다는 겁니다. 이원성에 빠져버린다 참나는 일원성이에요. 에고는 이원성의 세계입니다. 나와 남이 갈라져요. 지금 여러분 마음이 이원성의 세계에 있는지, 일원성의 세계에 있는지 한번 보세요. 이원성을 떠나서는 못 살지만 더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요? 모르는 마음을 가지시라는 이유가 모르시면요 그냥 일원성에 빠져요. 아무것도 모르시면요. 몰라도 모른다고 하세요. 몰라. 그리고 몰라란 말도 나오지 않는 그 모르는 상태에 빠져보세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원성이라는 말도 원래 필요가 없지만, 이원성의 세계에서 벌써 보면 일원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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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알아차리시고.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지止ㆍ관觀’의 두 문이 서로 도와서 이루어주며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만약 ‘지ㆍ관’을 갖추지 못하면, ‘보리(지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止觀二門 共相助成 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 보조 지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10가지 믿음’ 중에 ‘방편’과 ‘지관止觀’을 닦아, 자유로이 맡길 수 있는 공부가 이루어지면,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광명해지니, 이를 ‘발심주發心住’(발심
하는 머무름)라고 부른다. 自修十信中 方便止觀 任運功成 定慧圓明 便名發心住.]
대승기신론에 이게 어떻게 되어 있냐면 지관(止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는. 선정과 사마타, 사마타와 위빠사나. 지관의 두 문이, 같은 겁니다, 정혜랑. 지관 두 문이 서로 도와서 이루어지며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만약 지관을 갖추지 못하면 보리, 진리에 들어갈 수 없다. 깨달음에 못 들어간다. 저게 두 개가 한 덩어리가 돼야만 깨달음에 들어간다. 이게 대승기신론에 나온 얘기고요. 보조 지눌 스님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열 가지 믿음 중에 1주보살 아래가, 보십시오,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10신이 있어요. 10개의 믿음을 거친 뒤에 1주보살에 들어가는데요. 지(地)를 썼네요. 1주(住) 보살이 되는데 우리 학당, 우리 홍익학당에서 1급입니다. 1단 전의 1급인데 이때 1주보살의 경지를 말하는 게 지관쌍운(止觀雙運)이에요. 즉 참나가 24시간 드러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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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가 24시간 드러나 있어야 1주보살입니다. 이거 자세한 거는 제가 학당의 9급 체계, 예 뭐죠, 9급 체계에 써놓은 거 보시고요. 9급 체계, 제가 써놓은 거 보시고 1주보살이 되시려면요 여러분이 참나가 24시간 흘러야 돼요. 즉 참나 자리에 안주를 해야 1주입니다. 믿음의 단계는요 아직 믿음이라는 건 남의 말을 믿는 상태죠. 참나가 밖에 있어요. 내 밖에 있는데, 참나를 내 안에 머물게 된 겁니다, 내가 참나랑 하나가 돼서. 그래서 제가 처음 강의 견성콘서트 1탄 때 했던 신심명(信心銘)은 이겁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게(十信) 아니라 이게(十住) 진정한 믿음이다. 참나랑 하나가 될 때 진정한 믿음이다. 이걸 강조한 강의고, 다 이 1 주 자리를 노래한 겁니다. 이 1주 때 지관쌍운이 펼쳐져요. 그 얘기를 쓴 겁니다, 보조 스님이. 10신 중에 이때도 육바라밀을 닦아요. 그런데 이때는 육바라밀이라고 안 하고 여섯 가지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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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 수행을 닦는데 뭘 닦냐면요? ①보시 ②지계 ③인욕 ④정진 ⑤선정 ⑥지혜죠. 그런데 선정 지혜를 묶어서 지금 止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관과 나머지 네 개,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방편과 지관. 방편, 나머지는 방편입니다. 남한테 베풀고, 계율 지키고, 화 참고, 뭐죠 열심히 정진하는 것은 방편이고요. 행으로 하는 거고, 지관은 좀 차원이 다르니까 고요하게 깨어나는 걸 알아차리는 걸 주로 하니까 지관을 따로 빼서 이 여섯 가지 육바라밀이 온전히 육바라밀은 아니고 참나를 모르니까, 참나에서 나와야 육바라밀이고요 이땐 여섯 가지 수행을 하는 겁니다. 육바라밀을 해보려고 닦는 거죠. 그러다가 자유로이 맡길 수가 있는 공부가 이루어지면, 즉 늘 깨어있으면. 그냥 참나가 훤히 드러나서 턱하고 참나한테 맡길 정도가 되면 그때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광명해지니 정혜쌍수 이루어지니 이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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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주, 1주예요. 발심주가 1주보살을 발심주라고 합니다. 진정한 발심이 이루어져요, 그때. 참나를 아니까 “내가 이 부처를 만났구나. 내 안에 부처가 이미 있었구나. 나는 이 부처로서, 진정한 부처로서 살아보겠다.” 이게 발심입니다. 6조대사가 말하는 돈오도 이 자리예요. 1주보살 자리입니다. 여기를 자꾸 지금 12지, 돈오를 6조대사가 곧장 부처가 된다고 하니까 현상계적으로 완전히 된 부처를 자꾸 생각하세요. 6조가 말한 부처는 그냥 이거예요. 원래 퍼펙트한 이 자리. 원래 퍼펙트한 자리를 찾아서 거기 머물게 되면은 이때 이미 부처라는 겁니다. 1주의 이미 부처다. 이게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이 있어요. 초발심이 그대로 정각이라는 주장이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게 발심주거든요. 발심주 때 이미 견성했다. 이미 부처 됐다. 그러면 이후는요? 그냥 부처로 사는 거라는 거예요. 이미 참나가 내 안에서 24시간 돌아가는데요. 그다음부터는요 그냥 부처 서로 사는 거예요. 진보가 없냐? 아니에요. 나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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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하지만 그래도 어제도 부처였고 오늘도 부처였기 때문에 진보를 초월해 있다는 얘기를 자꾸 하는 것뿐입니다. 진보는 현상계 차원에서는요 보십시오,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그냥 부처로 사는 거지만 에고는 어떨까요? 나날이 발전해 가야죠. 이걸 선가(禪家)에서 무한향상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또 뭐라 그러냐면 향상일로라 그래요. 무조건 위로만 계속 진보되어 올라간다. 그런데 진보를 거부하는 스님들이 있어요. 난 돈오했기 때문에 진보를 안 한다고. 전혀 잘못, 오해하신 겁니다. 고시생한테 “합격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 자체를 즐겨. 이미 합격했다고 생각하고 즐겨라. 공부를 즐기면서 해.”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지금 육조단경은. 그런데 그걸 듣고 “그럼 이미 합격을 한 건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현상계적으로 합격을 했단 말인가? “넌 이미 부처야 부처로서 살아.” 그러니까 “그래 그럼 내가 12지인가?” 이렇게 착각을 일으켰네요. 1급한테 하는 얘기예요. 1급이나 1단, 보조스님 6조대사는 1주보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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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보살 경지를 얘기합니다. 1주는요 참나가 늘 내 안에 여여한 사람이고요. 1지는요 참나 안에 만법이 갖춰졌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육바라밀이. 참나를 건들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그냥 터져 나온다는 걸 체험적으로 더 닦아가지고 아는 사람을 1지 그럽니다. 우리 학당에서 1급과 1단이에요. 우리 학당에서 육바라밀이나 사단노트를 잘 쓰시면 1단이 됩니다. 그게 이제 참나가 그렇게 생겼다는 것까지 알아야 법신이 갖춰져요. 이때(1지) 법신이 진정한 법신이라고 해요. 이때(1주)도 이미 참나를 찾은 거지만 진짜 법신은 1지 정도는 돼야 돼요. 그래서 대승경전에, 대승기신론에 1지부터 법신보살이라고 불러요. 1주도 이미 참나 찾았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법신을 아직 덜 봤다는 거예요. 육바라밀을 참나 안에서 다 못 찾았다는 겁니다. 뭐만 찾았나요? 지관쌍운(止觀雙運)이니까. 선정바라밀과 지혜바라밀만 찾았어요. 참나는 고요하면서 알아차린다는 것만 알았지 거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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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인욕도 하고 정진도 한다는 걸 아직 다 못 알아낸 겁니다. 예, 유교식으로 말하면 자기 안에 있는 태극을 다 지금 못 찾아낸 거예요. 텅 비어 알아차린다는 것만 안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이 자리(1주)는 법신을 조금만 봤다고 그러고 1지보살부터는 법신보살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참나에 의존해서 살아가기 시작해요. 그렇지만 이때 부처가 된 게 아니거든요. 자 이거 보시고.
[3.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체의 시간 중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울 때 늘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直心+行=德) 정명경淨名經(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길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이다”라고 하였다. 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行住座臥 常行直(眞眞)心是 淨名經云 直(眞)心是道場 直(眞)心是淨土(늘 모르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성의 ‘덕德’을 행하여 무한향상하자는 것!)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진여삼매’에 의지하여, ‘법계’가 ‘하나의 형상’(一相)임을 알게 된다. 일체의 부처님의 ‘법신’이 중생의 ‘육신’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니니, 이를 ‘일행삼매一行三昧’(하나로 작용하는 삼매, 一相三昧)라고 이름한다. 마땅히 ‘진여’는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이렇게 닦아간다면, 순차적으로 능히 한량이 없는 삼매를 낳을 것이다. 依是三昧故 知法界一相 謂一切諸佛法身與衆生身平等無二 卽名一行三昧 當知眞如是三昧根本 若人修行 漸漸能生無量三昧.]
그다음에 6조가 이 얘기를 해요. 일행삼매라는 걸 얘기합니다. 일행삼매도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개념인데요. 6조가 또 그 얘기를 합니다. 일행삼매라고 얘기하면서 일체의 시간 중에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울 때 늘 곧은 마음을 행하는 거다. 유마경에서 곧은 마음이 이미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정토다. 자 이 말은 따로 출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도량이란 도 닦으러 산에 가는, 청정한 데로 도 닦으러 가잖아요. 청정한 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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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을 초월해서 내가 내 안에서 참나가 이루어지면 내 마음이 바로 도량이라는 겁니다. 이 에고가 바로 도장이 돼요. 보십시오. 여러분 실제 도 닦는 데는 어디인가요? 여러분의 에고예요.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나라는 선지식을 모셔놓고 공부하는 겁니다. 그렇죠. 곧은 마음이 내 마음에 딱 서면요 내 마음 오온 자체가, 여러분의 마음과 몸뚱이 자체가 도량이 되어버려요 그것도 이해하시고요. 그런데 또 하나 보조 스님, 아니 6조 스님이 지금 일행삼매를 이렇게 푸신 건 중국식입니다, 지금. 직심을, 곧은 마음을, 다른 자리에서는 참마음이라는 얘기를 하다가 여기 일행삼매 같은 이런 데 오면 6조 스님이 무조건 직심이라고 갑자기 말을 고쳤어요. 직심을 행하는 거다. 그러면 이게 중국식으로 덕 덕(德)자가 돼요. 그래서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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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꾸 푸는 겁니다. 덕 덕(德)자가 행할 행(行)자에다가 원래 곧을 직(直)자예요. 곧을직 자에다가 마음 심(心)자 입니다. 이게 원 자예요, 덕의. 그 네모을 눕힌 겁니다. 그래서 지금 덕이라는 얘기를 자꾸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유교적인 개념이랑 합쳐진 거예요. 순수한 불교적인 게 아니고요 일행삼매를 이렇게 푸는 건 중국적인 겁니다. 직심(直心)을, 직심을 행하는 거다. 유교에서도 논어에서부터 이미 덕은 이런 거예요. 그래서 공자는 이미 직(直), 곧아야 된다. 이런 얘기하시는 게 원래 이거거든요. 곧지 않으면 요행히 살고 있는 거다. 그게 덕을 얘기하는 겁니다. 덕을 펼치라고. 원수를 덕으로 갚을까요? 어떻게 원한으로 갚을까요? 하니까 그러지 말고 직(直)으로 갚아라 그래요. 곧음으로 갚아라.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원수를 사랑할까요? 원수한테 복수를 할까요? 이렇게 할 때 사랑하지도 복수하지도 말고 직으로 갚아라.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게 “원수한테 더 잘해줄까요?”라는 얘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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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직하게만 하라는 거죠. 더 잘해주려는 것도 오바예요. 그건 또 에고의 또 놀음이에요. 에고의 작용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좀 편해지고, 싶다든가 또 다른 작용이고 정직하게 하라. 이제 6조는 그 사상을 지금 유교랑 지금 불교가 합쳐진 겁니다. 일행삼매라는 건 뭐냐? 참나를 직심으로 풀어가지고요 곧은 마음대로 살아가는 거다. 참나 그대로 살아가는 게 즉 유교적인 덕이고, 불교에서는 그게 일행삼매다. 한결같이 참나대로만 살아가는 삼매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행삼매를 여기는 뭐라고, 여기는 대승기신론은요 그렇게 한결같이 시간성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좀 공간적입니다. 우주 전체를 하나로 보는 삼매를 일행삼매라고 합니다. 단어는 같은데 뜻을 약간 달리 풀었어요. 그거 한번 보시고.
[4. ‘선정’과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의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며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은 빛의 본체이며, 빛은 등불의 작용이 다. 이름이 비록 둘이나 본체는 한 가지이다. 이 ‘선정ㆍ지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定惠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即有光 無燈即無光 燈是光之(知)體 光是燈之用 [名]即有二 體無兩般 此定惠法 亦復如是.]
선정과 지혜 얘기 마무리 지을게요. 선정과 지혜는 뭐랑 같으냐? 등불의 빛과 같다. 보십시오. 지금 전등 있죠. 저 등에서 등 자체는 선정이라는 겁니다.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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뿜어내는 빛은요? 지혜라는 겁니다. 참나가 있으면 여러분의 존재가 텅 빈 존재가 있으면 그놈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등과 불의 관계, 불빛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며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은 빛의 본체이고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이 비록 둘이나 본체는 한 가지이다. 이 선정 지혜의 법 또한 이와 같다.
[5. 선지식이여, ‘법’에는 ‘단박’과 ‘점차’가 없는데, ‘사람’에게는 날카롭고 둔함이 있다.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며, 깨달은 이는 단박에 닦는다. 자신의 본심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래도록 윤회하게 된다.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예로부터 모두 ‘무념無念’(생각이 없음)을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형상이 없음)을 본체로 삼고, ‘무주無住’(집착이 없음)를 근본으로 삼는다.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即漸契(勸) 悟人頓修 識自本[心]是見本性 悟即元無差別 不悟即長劫輪迴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爲(無)宗 無相爲(無)體 無住{無}爲本.]
선지식이여. 여기서 이제 좀 유명한 얘기를 합니다. 돈점 문제를 분명히 하세요, 6조대사가. 참나를 깨치는 거, 여기에 돈점이, 단박과 점차, 단박에 그게 깨달아지느냐 점차되느냐라고 하는데 법에는, 즉 참나에는 진리에는 단박과 점차가 애초에 없다. 돈오이 점수니 이런 말이 애초에 없다는 겁니다. 다만 사람에게는 날카롭고 둔함이 있다. 우리 학당에서 9급 체계로 참나를 체험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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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잖아요. 보조 스님은 단박에 된다고 했는데 왜 우리 학당에서는 9급을 나눠놨을까요? 이것도 점차죠. 점차 들어가는 문이죠. 왜 그러느냐? 단박에 들어가세요, 들어가실 분은. 뭐냐 하면 제가 9급을 나누는 건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렇게 이해를 해가는 단계가 9단계라는 거지 부처님 경우나 이런 선사들 경우처럼 언하에 대오해 버리면 그냥 1급이에요.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혜능도 단박이니 점차니 하는 것은 원래 사람한테 딸려 있는 거지, 에고 수준이 달라서지 여기는 원래 단박이니 점차니 말도 없다. 본래 퍼펙트할 뿐인데 단박에 들어가는 분이 있어요. 제가 자주 예 들잖아요. 인도의 그런 힌두교 성자 중에 마하리쉬 같은 분은 16살 때 수행도 안 했는데 갑자기 누워 있다가 “한번 내가 죽었다고 상상해 보자” 했더니, 진짜 온몸이 싸늘해져 가더래요. 그러다가 참나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알아차리는 자가. 그런데 이후로 생활을 못 할 정도로 알아차리는 자가 나타나가지고 죽을 때까지 그 상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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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죽었어요. 이런 경우는 좀 희귀한 경우지만 참나가 그냥 드러나서 안 떠나면 1급이에요. 근데 만약에 언하의 대오를 했다고 치죠. 선사가 딱 얘기하는데 아! 했는데 집에 갔더니 그 느낌이 사라졌어요. 별 수 없습니다. 점차입니다. 다시 우리 9급 체계로 닦아야 돼요. 우리 9급 체계로 오시면 8급 뭐 이렇게 해서 몇 급 이렇게 해드립니다. 근데 이 급수가요 시간, 이 급수 하나 올리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질 않아요, 사실은. 그러니까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짧게 걸릴 수도 있고 본인의 집중도나 그 차이예요. 에고가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냐의 차이입니다. 이해를 하고 집중을 하고 있느냐? 사실은 참나 찾는 건 어렵지 않아요. 지금 자꾸 제가 찾아드리잖아요. 이름 모르시죠? 지금 늘 있는데요. 참나 없는 분이 없는데요. 참나는 늘 깨어있는데요. 여러분이 깨어나시게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돈수(頓修)라고 하는 겁니다. 닦을 수가 없어요, 참나는. 받아들이시는 거죠, 여러분이. 여러분이 단박에 참나의 실존을요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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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셔 버리면 1급이에요. 그런데 조금씩 받아들이시면, 점차점차 받아들이시면요 여러분의 사람의 견해에, 앎의 수준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오점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오니 점오니 점수만이 아니죠. 돈오니 점오(漸悟)니, 단박에 깨치느니 점차 깨치느니, 이런 문제까지도 복잡해지거든요. 단칼에 정리하세요. 그것은 사람에 달린 거다. 한 방에 깨칠 수 있으면 깨치세요. 그 길을 막는 게 아닙니다. 여기 날카로운 사람,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한 방에 깨치고요 좀 둔한 사람은, 일반인들은 점차 깨칩니다. 자신의 본심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래도록 윤회한다. 나와 남이 있고 6도 세계를 윤회하게 됩니다. 자 깨달은 사람은 그럼 윤회를 안 할까요? 그런 게 아닙니다. 보조 스님이나 6조 스님이나 대승불교는요 윤회를 절대 버리지 않아요. 왜? 에고 세계를 버리지가 않으니까. 공이 있으면 색이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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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과 깨달은 자는 뭐가 다를까요? 일반인은요, 에고 세계와 에고에는 꼭 짝이 되는 세계가 있어요. 나와 짝이 되는 세계, 그러면 그 세계는 6도 중의 하나입니다. ①하늘나라거나 ②지옥이거나 ③축생이거나 ④아귀거나 ⑤수라의 세계거나 ⑥인간계거나. 즉 아이고 나 지옥 갔네, 나 인간 됐네, 뭐 됐네. 이렇게 상황에 자기가 윤회한다는 걸 느끼고, 윤회한다고 살아가지만 참나 차원의 부처로 살아가는 사람은 6도를 다 돌더라도 6도니 에고니 하는 모든 게 참나의 나툼이기 때문에 불성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윤회 자체에 빠지질 않는데, 일반인은 윤회에 다 빠져요. 아귀가 되면 아귀로 살아가고, 축생이 되면 축생으로 살아가고, 그게 전부가 돼버립니다. 이 차이입니다, 윤회에 빠진다는 게.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나의 법문은 무념 무상 무주를 중시하는데 무념, 생각 없음을 으뜸으로 삼고 무상, 형상 없음을 본체로 삼고 무주, 집착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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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무념 무주 무상 요거를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름만 내려놓으세요. 성함 모르시죠. 네. 성함도 모르고요 어떤 것도 모르세요. 뭐 하나라도 떠오르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그거 몰라도 여러분 사시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1분만 모른다고 하세요. 아무리 큰 문제도, 생각도 모른다고 하고요. 감정도 모른다고 해 보세요. 몸뚱이도 지금 모르십니다. 존재하시죠. 거기는 무념입니다. 생각이 없어요. 무주, 어떤 데도 집착하지 않고 계십니다. 무상, 어떤 형상에도 빠지지 않으세요. 그 자리는 참나에 대한 묘사입니다. 보세요. 일체 법 위에서, 그러니까 세상을 버리지도 않아요. 소승이, 대승에서 소승을 비판하는 이유가요 소승은 참나가 너무 즐거우니 이 에고의 세계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상 고 무아의 이 세계만 버리면 더 끝내줄 것이다. 대승은 안 그래요. 대승은요 요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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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건 말건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무상 고 무아의 세계, 지금 여러분 방금 이름 모르시니 이 세계를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던가요? 아니죠. 이 세계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으시죠. 그냥 여러분 내면은 본래 깨어 있고 텅 비어 있고 깨어 있죠. 그걸 아시고 살아가시는 거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조금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와도 거부하질 않아요. 에고는 거부하는 마음이 일지언정 이 참나의 세계에서 살아가 보는 안목은, 반야지로 보는 안목은 “원래 저놈도 이놈도 다 내 마음에서 나왔다”고 보고 나랑 둘로 보질 않습니다. 이름도 모르는데, 고통이 와도 내가 그걸 고통이라고 이름하니까 고통이지, 고통이 통증이 느껴져도 모른다 하고 보면요 그냥 느낌이에요. 내 마음에서 나타난 오온의 하나의 물결들. 예 참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느껴보세요. 참나는 알아차리는 자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자는요 그냥 알아차리고만 있어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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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다 말을 안 해요. 그냥 알아차리고 있어요. 이 현상계를 알아차리고 있지 현상계에 대해서 거부하지도 않고 수용하려고도 안 하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요. 나랑 둘로 보지도 않아요. 그걸 굳이 에고 차원에서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참나는 그냥 애초에 나랑 둘로 보지를 않고 알아차리고 있어요. 에고만 좋다 싫다 계속 떠드는 겁니다. “저거 없었으면 좋겠다. 쟤만 없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계속 에고가 떠드는 거지 참나는요 그 말을 또 그냥 알아차리고 있어요. 알아차리는 자로 살아가시라는 게 6조대사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바로 청정해지고, 지금 내 마음이 곧장 깨끗해질 겁니다.
[일체의 법 위에서 생각 생각이 집착하지 않으면 속박됨이 없다. 그러니 ‘무주無住’(집착이 없음)를 근본으로 삼는다. 선지식이여, 밖으로 일체의 형상을 떠나면 이것이 ‘무상無相’(형상이 없음)이니, 다만 능히 형상을 떠나면 ‘자성의 본체’(性體)는 청정하니, ‘무상無相’을 본체로 삼는다. 일체의 경계 위에서 오염되어 물들지 않음을 이름하여 ‘무념無念’(생각이 없음)이라고 하니,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며, 법 위에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온갖 물건을 생각하지 않아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지 마라. 한 생각이 끊어지면 별도의 곳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於一切法上念念不住 即無縛也 以無住爲本 善知識 外離一切相是無相 但能離相性體清淨 {是}是以無相爲體 於一切境(鏡)上不染 名爲無念 於自念上離境(鏡) {不}不於法上念生 莫百物不思 念盡除却 一念斷即{無}別處受生
일체 법 위에, 이런 만법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법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모든 것들에 의해서 생각이 절대 집착하지 않아요. 그리고 속박됨이 없어요. 그 보고 듣고 다 하는데 전혀 거기에 매이지를 않아요. 차원이 다르게 알아차리고, 다른 차원에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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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집착이 없는 거고요. 일체 형상을 떠나 있으니 형상이 없는 거고요. 형상을 떠나 있으면 본체가 청정하기 때문에 무상을 본체로 삼고요. 일체의 경계에 의해서 오염되고 물들지 않기 때문에 무념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생각에도 빠지질 않아요, 그 자리는. 생각에 빠져야 오염이 되는데요. 한 생각을 일으켜야 오염이 됩니다. 괴롭다 아프다라고 해야 오염이 되는데 아프다라는 말조차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냥. 빠지질 않고. 제가 이런 얘기 한 번씩 하는데 지금 온 우주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 아시겠어요? 여러분 내면에서 알아차림이 느껴지는 게 지금 여러분의 참나고요. 온 우주 자체가요 그냥 알아차리고 있어요. 여러분이 보시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른 곳을 보실 때 지금 우리가 있는 것 외에 다른 세상은, 여러분의 참나가 알아차리고 있지는 않죠, 누가 알아차리고 있을까요? 그런데 우주는 알아차림이 꽉 차 있어요. 제가 이런 비유 들죠. 예 우주가 알아차리고 있나 안 알아채고 있나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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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요 연필 제가 살짝 몰래 든 것 같지만 우주가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놓으면 바로 떨어집니다. 우주에서 알아차리는 자 몰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 알아차리고 있고 연기법대로 집행하고 있습니다, 온우주를. 여러분 내면에서는 내면에 알아차리는 자가 있지만 우주적으로는요 우주에 알아차림이 꽉 차 있어요. 이걸 기독교에서 성부라고 하고, 힌두교에서 브라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요 이 우주적인 알아차리는 자를 처음에 얘기한 적이 없어요, 부처님이. 우리 각자에서 느껴지는 알아차림만 얘기했지. 나중에 개념이 필요하니까 뭐라고 이름 붙였냐면 비로자나불이라고 붙인 겁니다. 이 우주적인 알아차림을요. 여러분의 모든 참나의 총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안에서만 참나를 느껴요. 여러분의 참나를 제가 느낄 수는 없어요. 각자 자기 참나를 느껴요. 이게 기독교에서 성령이에요. 각자 내면에 있는 하나님. 성부는요 온 우주의 하나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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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담고 있는 에고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거지 알아차림은 하나입니다, 우주에. 온 우주에 알아차림이 꽉 차 있다고 보시면 돼요. 이런 물질계보다 더 근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존재도 생각 감정 오감이 전분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아차리는 놈이 있어서 살아갑니다. 이 생각하면 저 생각이 일어나고. 이 연기법을 누가 집행하나요? 좋은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에고가 이걸 할 수 있나요? 에고는 못 해요. 좋은 생각도 자기가 일으킨 게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이 되니까 한 거죠. 에고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럼 누가 이걸 다 계획한 건가요? 이게 참나예요. 그래서 알아차리는 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알아차림만으로 우주에서는요 중력의 법칙이 펼쳐지고, 우리 안에서는 희노애락이 펼쳐지고, 희노애락에 따라서 몸에서는 정직한 반응들이 그대로. 우주의 모든 변화는 이 알아차림이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법신이라고 그래요. 우주의 모든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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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안고 있다고요. 그런데 텅 비어서 그냥 알아차릴 뿐이에요. 신기하죠. 우리 생각 감정 오감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를 어떤 분들은 신이라고 부른 거고, 어떤 분들은 이걸 우리 안에 있는 참나라고 본 것뿐입니다. 이해되시죠. 지금 여기까지 하고요. 6번부터 다시 좀 쉬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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