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동행
유숙영
우리는 마음껏 웃거나 울지 못해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했다.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의 불협화음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아픔을 나는 아이들에게 감당하라고 부끄럼도 없이 말하곤 했다. 아이들끼리 놀고, 웃고, 다투고, 울며 부둥켜안고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만 부끄러워 고개를 떨궜다.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서로에 대한 궁금증으로 만남을 시작했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부리던 날, 후배가 세 살 연하남을 만나보라며 연락처를 주었다. 그날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세 살 연하라니 만나기도 겸연쩍어 거절하려 했는데 갑자기 세 살 연상을 만나려는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했다. 그 역시 세 살 연하를 만나려는 여자가 궁금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름날의 헤프닝으로 웃어넘긴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집에 갈 막차도 끊겼는데 헤어질 때 뒤도 안 돌아보고 간 내가 괘씸해서 집까지 다섯 시간을 걸어갔다고 했다. 7년을 행정고시만 준비하던 새내기 직장인인 그는 직장 생활을 오래 한 내가 신기했고, 난 그 나이 먹도록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을 한 그가 참 신기했다. 그는 내가 사회에 찌들어 나이만 먹어 가는 모습에 안타까워했고 난 그가 제 앞가림이나 하고 살까 싶어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서로를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2011년, 우리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시련의 시작이었다.
첫 만남부터 아들을 폄하는 시아버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누이를 잃고 홀로 남은 아들을 걱정하는 시어머니의 말은 어느 정도 이해되었지만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고 떨리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불안해하는 나에게 자기 부모는 좋은 분들이라며 아픈 외삼촌을 어머니가 돌봐주시고 있고 조카들도 자신의 어머니가 돌봐주었다 했다. 그 말에 나는 내 느낌이 잘못된 것이겠지 하며 좋은 분들을 오해한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 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문제는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퇴근길에 매일 같이 초인종을 눌렀고 아이가 잠들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분은 매일 같이 나를 앉혀놓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남편은 두 분이 이상하다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식을 잃은 상처가 있어 그런 거라며 시부모는 좋은 분들이라며 두 분과 시간을 더 보내라며 등을 떠밀었다. 작은아이 출산 후, 한 달을 시댁에서 보내고 온 큰아이가 매일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큰아이가 걱정되어 시댁과 지리적 거리를 조금 두자고 말했으나 남편은 결사반대했다.
1년 후 남편은 시댁과 10분 거리의 여건이 조금 나은 곳을 보더니 마음을 바꿔 겨우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건강한 사람들과 만나게 해주려 애썼고 아이들은 주말을 줄곧 친가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7살, 4살, 1살 아이를 둔 엄마인 몸으로 고관절 괴사 진단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외면했고 남편은 아이들을 시아버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그때부터 시아버지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칭하며 수술을 반대했다. 나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최대한 아이들의 생활을 유지하려 애썼다.
2019년,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작은 아이가 피를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 시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시아버지의 말은 항상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고 킥킥거리던 웃음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이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막내 아이는 작은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고 둘째는 테이블 밑에 들어가 울기 시작하더니 선택적 함묵증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막내는 누나를 때리고 나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매일 혈투를 벌이는 두 아이를 어쩌지 못해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누나를 때리는 아이를 업어도 보고 누나와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해 질 녘까지 밖으로도 데리고 나가도 봤지만 방치되는 작은 아이의 상처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고 치료실을 다니던 중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차단되자 두 아이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떠났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숙소에서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시어머니와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휩싸였고 떨리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 친정으로 향했다. 더는 그들과 하루도 같이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친정아버지에게 그간의 사정을 전했고 친정아버지는 목 놓아 울었다.
2022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믿었던 과거와 정면으로 대면했다.
친정 부모의 보살핌으로 고관절 수술을 하고 상처받은 아이들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철저하게 파괴한 주동자를 찾고 싶었고 그를 옆에서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1년 후 그의 30년 지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물음에 누이의 사고가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사건이었다며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울었다고 했다. 우리가 떠났다며 울었다는 개인적인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고 답해줬다.
나는 그가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까지 치료제로 쓴 그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병원에 모시고 갔어야 할 분에게 어떻게 사람들을 치료제로 들이밀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는 상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말했고 우리 또한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몇 개월에 걸쳐 상담 치료를 받았고 부부치료를 하며 결혼생활 동안 있었던 사건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았다. 상담 치료가 끝나갈 무렵 친정아버지가 위암 3기 중반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상담 치료를 끝마칠 의지가 사라져 버렸으나 아이들을 위해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자 다짐했다. 마지막 상담 치료에서 시누이의 죽음으로 가족이 고통받았던 이야기를 하며 자신들은 특별하다고 내내 말했던 그에게 나 또한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다. 감금당한 고모와 같이 살며 조부모에게 가족이 고통받았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감금당한 고모의 고통을 시어머니를 통해 나 또한 똑같이 느꼈음을 고백했다. 선생님은 시부모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그에게 가족이 부모였음을 이야기해줬다. 그에게 고통스럽더라도 가족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그가 변하지 않으면 이혼하라 말했다. 그와 나는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5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고 시부모에게 상담 치료 결과를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송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시아버지로 인해 그의 가족이 고통받았음을 남편으로 인해 나와 아이들이 고통받았음을 알렸다. 막내가 7살이 되면 검사를 진행하겠다는 설명도 보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하물며 사람을 짓밟아놓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가길 바라는 모양새가 참으로 비겁해 보였다. 시누이의 죽음은 그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었다. 나는 그런 시누이가 안타까웠다. 여러 차례의 설전이 오고 간 끝에 그는 내 말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말을 했다. 자신도 아버지가 정신병자 같아 보였다고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꿨다고 말하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 또한 피해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의 잘못된 양육 태도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한 그에게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 상담 치료에서 말한 고모의 이야기를 기억하냐 물었고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 나는 그에게 시어머니가 정신에서 시누이를 놓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냐 물었다. 그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몸은 벗어났는데 여전히 갇혀있는 것 같아 괴롭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결말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시부모와 아이들의 만남을 차단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동안 아이들이 시댁에 다녀오기만 하면 곧바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 양육자인 나와 시댁의 상반된 양육 태도에 혼란스러웠던 아이들은 엄마에게 반기를 들고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세상과 소통하며 일관된 양육을 받아야 했고 교육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이들의 불균형은 점점 심해졌고 친구들과 소통할 수 없어 괴로워했고 점점 고립되어 갔다. 시부모는 서로를 비난하고 남을 헐뜯고 약한 자들을 조롱하기 바빴고 아이들에게는 잘못한 일도 칭찬하며 무조건 허용했다. 그들은 항상 그들끼리만 똘똘 뭉쳤다. 나는 그들에게는 철저히 외부인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 친정 부모와 인연을 끊으라는 말 등을 쏟아내며 세상과 고립시키려 혈안이었다.그들은 항상 희생양이 필요했고 획득한 희생양을 제물 삼아 그들만의 잔치를 벌였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라 믿었다고 했다. 자신이 믿은 어머니에게 나와 아이들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간 도움이 필요한 나를 외면하는 어머니를 보고 그도 이상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편을 가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했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나보다도 모르는 듯했다.
며칠 전 작은 아이가 빨간 글씨로 ‘죽어’라고 한 장을 빼곡히 써 언니에게 주었다. 그리고 언니가 소중히 여기는 인형을 가위로 난도질을 해놨다. 큰아이는 목 놓아 울며 인형을 꿰매었다. 작은 아이는 언니의 행동에 소중한 것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시부모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도 어렸을 때도 많이 아팠지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한 후 항상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되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다시 운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곳에서는 항상 나쁜 말을 들었고 이곳에서는 좋은 말만 듣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좋은 말이란 잘한 일에 칭찬을 아낌없이 하고 잘못한 일에는 단호하게 꾸중하고 아이가 성장하도록 응원하는 말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는 자신은 할아버지가 좋고 외할아버지는 싫다고 말했다. 나는 단호하게 할아버지는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작은 아이는 할아버지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따라 하게 되어 있다고 그동안 우리는 모두 잘못된 습관을 들인 거라고 말했다. 엄마도 그곳에서 잘못된 습관을 들였다고 그래서 매일 밤 습관적으로 너희들에게 나쁜 말을 하진 않았는지 하루를 되돌아봤다고, 그런 날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도 큰아이와 같은 12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잘못된 습관을 고쳐 보자 말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말하자고 했더니 아이는 동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에게 ‘그래, 잘하고 있구나’라고 말해줬다. 시아버지도 어떤 날은 엎드려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또 그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시아버지를 보면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여우 누이 책이 생각난다. 피의 언어를 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수히 많은 책이 경고해주고 있기에 연락을 취해오는 그분에게 응답할 수 없다. 한 가지 의문은 시아버지가 딸의 죽음 앞에 울었는가다. 시아버지는 항상 세 살 아이 같았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 또한 피를 흘렸고 혈투를 벌이는 두 아이를 지켜보며 그분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한 아이를 희생시켜가며 지켰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희생당한 아이의 죽음을 마음껏 애도하지 못해 그 아이를 놓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시아버지가 변하지 않는다면, 시어머니에게는 음성의 기운이 좋아 보였다./ ?
글을 쓸수록 기억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며칠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중 소리가 돌아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말하는 속도는 느렸으며 힘이 느껴졌다. 소리를 잃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막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탑승했다.
예전부터 내가 그에게 원한 건 아이들과 놀며 시간을 보내라는 것 한가지였고 지금은 아이들과 놀고 다투며 아픔을 치유 중이다.
우리는 치유 받지 못해 아팠고 그래서 길을 잃었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등에 업은 채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기 위해 산의 정상을 향해 더 높이 오르려고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끌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남편을 질질 끌고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너무 힘이 들어 남편을 놔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그 오랜 시간 산을 오르려고만 했을까. 하산해야 안개가 걷힌다는 것을 그땐 왜 미처 몰랐을까. 나는 왜 그것을 모르고 그 오랜 시간을 혼자 전전긍긍 발버둥 쳤을까. 지금 우리 가족은 서로 손을 잡은 채 하산 중이다. 어떤 날은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우리 모두 안전하게 하산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우리 가족의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막내는 특수학급 입학을 준비 중이다. 그들이 왜 고립을 택했는지 알기에, 그러기 위해 희생당해야 했던 시누이와 나, 그곳에서 고통받은 아이들, 길을 잃어 고립을 택하는 아픈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너무나도 아팠던 내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이제라도 손을 내밀어 주고 싶다.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이제, 그만 그곳에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