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章 칠백만 냥의 대가로 네 육체(肉體)를 ① 아스라이 안개(霧)가 깔리고 있다. 동정대호(洞庭大湖)에서 몰려드는 물안개는 해가 떠오르고 나서도 한참 동안 호안 가를 덮기 마련이다. 주령! 그녀는 아까부터 천선루(天仙樓)의 낭하(廊下)에 서서 목씨세가의 웅대한 축조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열아홉이다. 하되, 그녀는 이 년 전 강호출도(江湖出道)하여 풍운천하 구석구석을 안 가 본 곳이 없기에 강호계의 경험도 지극히 풍부한 편이다. 휘이이-! 바람이 불며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멀리서 그녀를 본다면 하나의 경이가 되리라. 희디흰 비단 옷자락에 감겨져 있는 탐스러운 옥체(玉體)는 가히 예술이었다. 그녀의 외모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정교하다. 조금이라도 고치고자 한다면 오히려 전체의 아름다움이 깨어지게 되리라. 일견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축복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하되, 그녀가 설부화용(雪膚花容)의 모습으로 아침 안개를 들이마시며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경색된 생각들이었다. '이 곳은… 용(龍)의 대지(大地)이다. 극히 평화로운 이 장원은 중원의 상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제왕이라 하더라도 목가의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목가의 힘은 강호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다. 하기에 목가가 어떠한 세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강호 정세가 달라진다.' 주령은 입술을 잘강 씹었다. 상아질 치아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당세는 난세(亂世) 직전이다. 항차 혈하(血河)가 강호를 피로 적시리라. 그러나 강호계의 노명숙(老名宿)들은 안빈낙도에 열중하며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자 하고, 구파일방(九派一 )은 내분을 일으켜 지리멸렬한 상태. 그러한 가운데 사마외도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개방( )의 정통한 소식통에 의해 수집한 정보대로라면, 올해 안에 백도맹을 구축하여 이십만 무사세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강호천하는 사마외도 집단에 의해 장악된다.' 주령은 얼굴에 창백기를 띄운다. 그 빛은 처음 내리는 눈의 빛깔이다. '사마외도의 발호를 차단하는 방법은 청천영웅문(靑天英雄門)을 구심점으로 방대하고 엄밀한 백도의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뿐이다. 그 일을 할 열사(烈士)들은 충분하다. 문제는… 자금(資金)이다!' 그녀는 점점 더 세게 입술을 악물었다. 사실 그녀는 지극히 빈한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오랫동안 보아 온 것은 산사(山寺)의 고적하고 물욕(物慾) 없는 허무(虛無)의 삶에 불과하다. 강호에 들어온 후 그녀는 백도의 첨예(尖銳)가 되었고, 무수한 사마외도 무사들의 성적(性的) 노림이 되어 피습을 받아 왔다. 하되 누구도 감히 그녀의 손목 한 번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연약하다 여기고 다가섰던 색마(色魔)들은 그녀의 등에 걸려 있는 송문자비검(松紋慈悲劍) 아래 고혼이 되어야만 했다. 그녀는 일개 여인이되 강호백도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급기야 그녀는 청천영웅문(靑天英雄門)이라는 백도 후기지수들의 비밀 결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강호에 목가의 며느리로 알려져 있다. 목가는 강호제일비지(江湖第一秘地)로 불리우고 있고, 목가의 며느리감이라는 지위는 타인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그러한 위치였다. '난 군자금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오지 않았는가? 목가의 막대한 재산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얻고자 하는 자금은 적다면 적은 액수.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항차 목가의 평화를 위해 쓰여질 귀중한 돈이기도 하지. 그런데 돼지만도 못한 작자는……!' 주령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그녀는 한 남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약간 마르고 고집이 세게 생긴 자, 그 자는 주령이 본 남자 가운데 가장 오만했다. 모든 강호영웅이 그녀 앞에 서기만 하면 그녀를 향해 찬사의 말을 하고, 감복해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그래서 주령이 비록 겸허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남자들에 대해 다분히 안하무인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지하고 경박한 자! 내가 어찌 그 자의 아내가 돼랴?' 주령은 목야성에 대해 철저한 반발심을 품고 있다. 목야성은 주령이 가장 혐오하는 그런 자로 비추어진 것이다. 주령은 목야성의 건방지고 냉막한 눈빛을 기억했다. 그런 가운데 이제까지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영혼을 바치고자 노력한 또 한 명의 남자를 생각했다. 소의궁협(素衣窮俠) 군옥초(君玉楚)라는 이름이 그 사내였다. 군옥초! 그는 강호십검(江湖十劍) 안에 끼이는 청년검호였다. 그는 본시 천애고아(天涯孤兒) 출신이고, 소년 시절을 녹림도상(綠林道上)에서 소매치기로 살았다는 뼈저린 과거를 갖고 있는 자였다. 그가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이(二) 척(尺) 팔(八) 촌(寸) 길이의 칙칙한 쇠붙이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그는 진정한 강호인이며 무사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군옥초는 주령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주령은 슬픈 눈빛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난 누구의 내자(內子)도 되지 못할 계집입니다. 나는 일생을 검학(劍學) 연구에 바칠 겁니다. 한 남자를 위해 아이를 낳을 수도 없으며, 그 남자를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군(君) 대협(大俠)에 비해 목야성은 실로 좋은 여건이다. 그런데 목야성의 방자함은 목불인견. 하기에 내가 어젯밤에 화를 내고 그의 뺨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박한 행동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 자를 유혹해 그 자의 아내가 되고자 함은 아니지만… 그 자가 목비룡 대인에게서 상속받은 거금 가운데 일부를 얻고자 온 게 사실이 아니던가?' 주령은 이제까지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나 목야성으로 인해 그만 심한 두통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음대로 한다면 즉시 이 곳을 떠나고 싶다. 이 오만과 냉정으로 뒤덮여 있는 위선자의 땅을! 그러나…….' 주령은 눈길을 들어 동정호를 응시한다. 그 곳 안개가 바람에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사람의 일생이란 어찌 볼 때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안개와 같은 것일지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하고, 언제고 쓰러져야 한다는 것도 안개와 같다. 주령은 안개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목야성! 그 자가 아무리 오만방자한 자라 하더라도 목비룡 대인의 아들이 아닌가? 조리 정연히 말한다면 흔쾌히 군자금을 희사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만나 보자!' ② "말도 아니 되십니다. 그 망나니에게 백지 전표를 한 다발이나 주시다니요? 조금 전 대내총관(對內總管)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오오, 예월은 분해 눈물로 옷을 적실 수밖에 없습니다." 국화가 떨어지고 있는 뜨락, 약간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대내총관의 입이 무거운 줄 알았더니, 꽤 가볍군." 낭랑한 목소리가 뒤따른다. 뜰 한가운데이다. 목야성은 호로를 먼 곳에 세워 놓고 화살을 던지고 있다. 이름하여 투호(投壺)라는 놀이였다. 그것은 가끔 목야성의 심심풀이 소일거리이기도 하다. "그 자가 전표 다발을 훔쳤다고 여기고 징계를 할 참이었는데, 공자님이 직접 그 자에게 주신 것이라니……!" 공손예월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한상이 그걸 갖고 뭘 했다고 하더냐?" 목야성은 화살 하나를 들어 가볍게 던진다. 툭-! 화살은 호로병에 들어가지 못하고 병을 맞고 떨어져 내렸다. "뻔한 일 아닙니까? 도박판에 끼여들어 모두 다 잃고 말았지요." "푸핫핫… 한상답군." 목야성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다행이다. 한상이 그것으로 축융화첩에 적힌 물품을 구입한 일은 비밀리에 처리돼야 한다. 도처에 내가 모르는 시선이 있다. 모름지기… 그 자들이 안팎에 밀정(密偵)을 심어 두었으리라. 내가 분쇄해야 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편복( : 박쥐)들이 도처에 있는 이상, 조심해야 한다!' 목야성은 다시 화살 하나를 쳐들었다. "그나저나 도박장 영업은 항상 잘되는가 보군." "머리 텅 빈 사내들이 거리에 가득하니, 영업이 잘 될 수밖에요." "그렇다면 가서 대외총관(對外總管)에게 말해라. 가능한 많은 자금을 풀어 도박장 백 군데를 접수하라고!" 화살은 다시 그의 손을 떠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화살은 빗나가고 말았다. "도박장을 하시겠다고요? 그건 아니 되십니다. 도박장은 목가의 가법(家法)상 금지된 사업입니다요." 공손예월은 또다시 정색을 했다. "하긴 그렇군. 하되 도박장도 아니 되고 유곽(遊廓)도 아니 된다는 가법으로 인해 벌 수 있는 많은 돈을 못 버는 것도 사실이야." 목야성은 다시 화살을 던졌다. 화살이 호로를 때리며 퉁기어 나갈 때였다. 문득 목야성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예감에 휘말렸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야릇한 한기(寒氣)……. 그 한기는 대지를 덮기 시작한 무서리의 한기처럼 싸늘한 한기였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군.' 목야성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저만큼 뜰 어귀, 섬세한 그림자 하나가 서 있다. 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절세미녀(絶世美女)가 하나 있다. 조금 전 목야성이 느낀 예감은 그녀의 숨결에서부터 뿜어지고 있는 냉기(冷氣)에 대한 예감이었다. '주령, 역시 아름답군.' 쇳조각처럼 차갑게 느끼어지는 가을 햇살의 추락을 고스란히 어깨에 받고 그녀는 거기 서 있다. 다름 아닌 비천옥봉 주령이었다. 그녀는 내가의 상승고수이기에 몸놀림이 극히 가볍다. 그녀는 모래를 디디고 걸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내공을 일으키고 걸을 경우에는 초상비(草上飛)와 등평도수(登萍渡水)를 자유롭게 시전한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수십 차례 혈전을 치른 바 있기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움직인다. 한데 목야성은 그녀가 이십 장 밖으로 다가선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목야성은 그러한 사실을 간과했으나, 그것은 본능적인 예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최근 하루에 한 시진 이상씩 시전하고 있는 운기조식(運氣調息)의 결과일 뿐이다. 최근 그의 안력(眼力)과 청력은 그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예민해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상도일로(商道一路)의 옹고집으로 무장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하기에 강호절학의 신비함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배우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목야성은 주령을 힐끗 보다가 공손예월을 바라봤다. 다분히 대조적인 두 여인의 아름다움이다. 주령이 한 송이 활짝 핀 작약(芍藥)이라면, 공손예월은 뜰 귀퉁이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한련(旱蓮)이다. 주령의 아름다움은 성숙하고 화사한 아름다움이고, 공손예월은 다만 귀엽고 깜찍스러운 인상인 것이다. 목야성이 자신을 빤히 보자 공손예월은 저도 모르게 양 볼이 확확 달아올랐다. '갑자기 왜 저런 눈빛을……?' 공손예월이 숨막히는 긴장감에 휘말릴 때였다. "예월아, 투호 던지기를 한참 했더니 땀이 나는구나. 자, 들어가서 함께 목욕을 하자꾸나." "예에?" 공손예월의 눈알이 호도알처럼 동그래진다. '함께 목욕이라니?' 공손예월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했다. "프하핫… 네가 등을 밀어 줘야 목욕한 개운함이 더하지." "갑… 갑자기 왜 그런 뚱딴지 같은 말씀을……?" 공손예월은 말술을 마신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때였다. 슷-! 뜰 한 곳에서 흰 새가 떠올랐다. 흰 봉황새같이 떠오른 그것은 거의 찰나적으로 울울한 적송림(赤松林)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요즘 들어 공자님이 좀 이상해진 듯합니다요." 공손예월은 목야성의 응큼한 명령에 울상이 되어 목야성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목야성은 먼 곳을 보고 있다. 이미 그의 표정은 겨울 바위처럼 차갑다. '어디를 보고 계시는지……?' 공손예월은 목야성이 바라보는 곳을 힐끗 보았으되, 그 곳에는 누구도 무엇도 없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그 곳에 백도 최고의 미녀가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속히 떠나도록 하오, 주령!' 목야성은 싸늘한 가을 대기를 폐부 가득 채웠다. '이 곳은 겉으로만 평화로울 뿐이오. 이 곳은 가장 냉혹하고 무자비한 위선자의 연극 무대요. 그러니 속히 떠나시오. 주령, 그대는 몹시 아름답고 고결한 여인. 나의 가문과 그대 가문의 인연은 감동적인 것이되, 지금 내가 써야 할 것은 혈서(血書)에 불과하오.' 목야성이 속으로 되뇌일 때였다. "아마 서책을 너무 오래 접하시어 심마에 빠지신 듯합니다. 소녀, 약왕부주(藥王府主)께 말해 탕약을 대령케 할 테니 쓰다고 타박하지 마시고……." 공손예월의 목소리가 바람에 날리는 국화 꽃잎처럼 허공으로 풀풀 떠오른다. ③ 그 날 저녁 한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몇 가지 물품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장강(長江)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자 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되 목야성은 그가 떠나지 않음을 완벽히 믿고 있었다. '한상은 완벽한 일 인의 무사. 그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천 명의 일급무사를 대동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대거는 일초무학(一招無學)의 문객(文客)이되, 그가 날 위해 지혜를 쓰기 시작한다면 십만 대군의 지원보다 더 큰 힘을 얻는다.' 목야성은 왼손에 붓을 쥐고 있다. 그는 석란(石蘭)을 그리고 있었다. 힘이 무척 드는 듯 그는 얼굴을 비지땀으로 뒤덮고 있다. 그는 좌우수(左右手)를 동시에 쓰는 훈련을 오래 해 왔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만 하더라도 족자로 만들어 팔 수 있는 용사비등(龍蛇飛騰)의 명필(名筆)이다. 그의 사군자(四君子)는 이미 강남일절(江南一絶)로 소문이 난지 오래이고, 특히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굳강히 자라나는 석란의 섬세한 묘사에 있어서는 이미 대가(大家)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화단(畵壇)에서 평가받고 있다. 한데 지금 그가 그리는 석란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붓을 잡고 그리는 석란처럼 초라할 뿐이다. 화선지에 먹이 번지고, 가는 줄기는 먹 투성이가 된다. '그들 강호의 사악한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의 가문을 건드렸다. 아버님은 일생을 협의도를 위해 일하셨지만, 누구도 목숨을 바치며 복수하지 않았다.' 붓이 격렬히 떨린다. 매일 밤 한 시진 이상씩 좌수(左手)를 연마하고 있으되, 이백 근 무게를 이긴다는 것은 아직 힘든 일이다. 목야성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거나 화분을 옮기는 일을 왼손으로 함으로써 이백 근 무게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팔에는 이백 근에 달하는 팔찌가 차여 있다. 누군가 본다면 불과 반 근도 채 안 나가는 소소한 물건이라 여길 것이되! 묘한 것은 좌수를 움직일 때마다 배꼽 아래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아 올라 혈맥을 타고 흐트러지다가 왼손으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배꼽 아래에는 단해(丹海)가 있고, 기해혈(氣海穴)이 있다. 목야성의 신체에 생기는 변화는 그에게 상승내공이 형성되기 시작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칠 년을 참아 왔다. 그리고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 목야성은 쉬지 않고 열다섯 장의 난초도를 그렸다. 연후 엉망이 되어 버린 열다섯 장 난초도를 화로에 불살라 버리는 가운데, 매운 연기를 마시며 피식 웃었다. 문득 그가 금무외와 함께 바둑을 두던 때를 기억할 때였다. "불이 밝혀진 것을 보니, 안에 계시다는 증거. 소녀 예의를 망각하고 왔으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나오시기 바랍니다." 바깥에서 낭랑하고 은은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주령이다.' 목야성은 문 쪽을 바라봤다. '왜 이 밤에 경박하고 음탕한 자의 방으로 와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 주령은 백도를 위해 자존심을 꺾은 것이다!' 목야성은 주령이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나게 하고자 세 번에 걸친 연극을 했다. 주령은 그 때마다 낙심을 했으나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다. "밤공기가 찬지라 나가고 싶지 않군. 할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말해라." "……." 목야성은 건방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목야성은 그녀가 토라져 떠날 수도 있다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목야성이 생각한 이상으로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스륵-! 문은 조용히 열렸고, 흰 옷을 걸친 주령의 창백한 뺨이 보였다. '오만방자한 자! 감히 날 이렇게 대접하다니……!' 주령은 눈물이 쑥 빠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목야성은 냉정한 자세 가운데 그녀를 쓸어 봤다. "소생 따위는 돼지처럼 알고 있는 주령 소저가 야심한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 "지난번 신중히 드리고자 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되 사정상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였기에 모조리 말씀드리고자……." "후후… 난 철저한 장사꾼이지. 장사꾼은 돈에 관한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지. 강호 대세가 어떠하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는 따분해서 듣고 싶지 않아." "좋아요. 지금 소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공자께서 그리도 좋아하는 돈에 관한 이야기예요." 주령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파득대고 있는 눈빛은 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칠백만 냥을 투자하십시오. 백도를 위해!" "……!" 목야성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주령을 발에서 얼굴까지, 그리고 얼굴에서 발까지 세밀히 살펴본 다음에 히죽 웃었다. "미쳤군. 칠백만 냥을 백도에 기부하라니?" "목가의 거대한 부를 생각한다면 무시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닌가요? 게다가 강호 대의를 위해 쓰일 돈이고……." "목가가 거대한 부를 이룩하게 된 이유는 일전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으음……!" "게다가… 세인들이 강호대의니 하는 말들은 자기의 이익을 명분(名分) 좋게 포장하기 위해 떠벌여 대는 일이 대부분. 나는 강호무사들이 하는 전쟁놀이에 가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상인은 대세를 알아야 하는 법이 아닌가요? 목가라면 가히 천하 정세를 손바닥 보듯 보고 있을 텐데, 어찌 그리 당세의 정세에 대해 알지 못합니까?" 주령은 화를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평화롭고 정숙한 표정을 짓는 모습보다 언짢아 하고 역정을 내는 모습이 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칠백만 냥은 백도의 중흥을 위해 쓰일 것이고, 그건 바로 목가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쓰이는 돈이기도……!" "후후… 중요한 이야기를 빼고 하는군." "……!" "날 쑥맥으로 여기지 마라. 난 이미 어머니가 백만 냥 이상을 청천영웅문의 창건에 썼다는 것을 안다. 그건 보상을 바라지 않은 엄청난 제공. 하되 백도 측에서는 그것 가지고도 모자라다 여기고 널 보내 나의 재산을 갈취코자 하는 것! 넌 위선에 가득 찬 백도인들에게 속아 꼭두각시가 된 것뿐이야." "꼭두각시라고요?" 주령의 눈빛이 비수처럼 차가워진다. 목야성은 그녀의 가슴 속에 가득 차기 시작한 살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는 계속 시건방진 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풋내기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풋내기들은 천 명이 모여 봤자 기루 한 채 운영하지 못해. 온통 소비적이고 허영적인 일만 할 뿐이지." "감… 감히 백도열사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후후… 내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나가라구. 건방진 여협 나으리!" "으으……!" 주령은 사지를 잘게 떨었다. 그녀의 짧다면 짧은 인생 가운데 이처럼 모욕적인 일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호에 그녀의 정혼자(定婚者)로 소문난 자에 의해 이러한 모욕을 받게 되다니……. 하되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일생일대의 모욕이 다음 순간 그녀를 짓밟으리라는 것을……! 그녀가 분해 숨도 못 쉬고 있을 때였다. "칠백만 냥…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희귀하지. 난 그 늠름한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이고. 하지만 내게 그 돈을 받아 가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대가라면……?" "프핫핫핫… 내 뺨이 문드러지도록 후려친 당사자는 네가 아니었더냐? 날 그렇게 모욕 주고도 내게서 미소를 받으며 기부금을 받아 갈 수 있다고 믿는 철부지 낭자는 아니실 텐데?" "바라는 게 뭐죠?" "넌 아름답다. 눈이 부실 정도로… 난 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묘사한 한 폭의 미녀도를… 후후……!" 목야성은 하이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주령은 그 웃음소리에 구토를 느낄 지경이었다. 문득 그녀는 검을 흔들어 눈앞 사내의 흰 목을 끊고 싶다는 강렬한 살기(殺氣)에 휘말렸다. ④ 서재의 침입자는 달빛과 밤새(夜鳥)의 울음소리뿐이다. 지금 주령의 입술은 죽음 직전 환자의 그것 마냥 새파랗다. "그대가 요구하는 대가란 나의… 육체……?" 주령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목야성은 오만한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디 오해하지 말기를… 후후후… 난 세상 모든 것에 눈이 높은 자이지. 아시다시피 난 모든 게 풍요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왔고, 여자 또한 마찬가지!" "……." 부르르……! 주령은 너무나도 엄청난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전신을 떨 뿐이었다. "하되… 넌 정녕 아름다운 여인이고, 난 너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의 육체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냐. 어차피 너와 나는 혼례를 치룰 처지가 아니냐?" "으으……!" 주령의 얼굴은 보다 핼쑥해졌다. 그녀의 인내력이 조금만 더 허약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이 순간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목야성의 두개골을 수박 쪼개듯이 쪼개어 버렸을 것이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아시다시피 내겐 모든 게 흔하지. 여자의 속살을 보는 것도 내겐 흔한 일 중의 하나야." 목야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방지게 말했다. 주령은 시종일관 그를 노려볼 뿐이다. 그녀는 강호천하에 협명이 자자한 절세여협(絶世女俠)의 처지가 아니던가? 천하대세를 좌지우지하는 강호세가에 간다 하더라도 그 곳의 지존이 맨발로 달려나와 영접을 하는 게 그녀의 현재 지위이다. 한데 그녀가 일초무학(一招無學)의 백면청년에게 철저한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부시여! 어찌하여 영아의 인내심을 이리도 철두철미하게 교육시켜 주시었습니까? 어이해 소녀가 이 경박하고 독선적인 일개소상(一個小商)의 수급을 잘라 내는 일(一) 검(劍)을 참아야 하는지요." 주르르……! 주령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부모가 죽은 그 날 이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었다. 목야성은 그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일 장을 가하리라 예상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옷가슴에 닿는 그 순간까지도……! 한순간이다. 정녕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슷-! 옷가슴 섶이 살며시 벌어진다. 달빛에 벌어지는 달맞이꽃의 꽃잎처럼 벌어지는 옷자락. 놀랍게도 주령은 검을 떨쳐 내는 대신 전혀 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다. 벌어지는 앞가슴 옷자락 사이로 흰 피부가 살포시 드러난다. 그것은 어느 해 봄인가 눈물을 쏙 빼도록 희게 피어났던 배꽃처럼 흰 젖가슴의 융기였다. 검은색으로 단단히 동여맨 젖가리개 위아래로 삐죽 두드러지는 박속의 살집! "……!" 목야성은 한순간이나마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주령은 어느 틈엔가 토끼 눈알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목야성을 쏘아봤다. "영광이군요. 나의 하찮은 육신이 그리도 큰 대가를 받을 물건이라고 평가받다니……." 주령의 언행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그녀는 도도히 선 채 상의를 벗었다. 백옥의 나신(裸身)이 적나라히 드러났다. 그녀는 목야성을 쏘아보며 결연히 젖가래를 끌렀다. 출렁-! 단단히 억눌려 있던 젖가슴이 본래의 풍만함을 회복하는 데에는 찰나의 시간이 걸릴 뿐이다. 실로 두 손으로 감쌀 수 없을 정도로 풍만하고 아름다운 융기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내의 눈길을 받아 본 바 없는 젖가슴. 그 끝에는 사내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아주 작은 두 개의 열매가 꼿꼿이 고개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라서 그 풍요하고 아름다운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싶지 않겠는가? 슥- 슥-! 이어 주령은 하의마저 벗기 시작했다. 대리석의 허벅지가 이루어 내는 선(線)은 가히 예술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발가벗은 여인보다는 옷을 한 조각이라도 걸치고 있는 여인이 더 아름답다고……! 다만 그러한 말은 주령에게는 허가되지 않는 말이다. 그녀의 나신은 완벽, 그대로였다. 기실 옷이란 인간의 육체가 지닌 약점을 감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주령의 육체는 그녀의 이목구비 이상으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옷을 걸침으로 보강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옷을 벗음으로 완전히 드러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스릇-! 또 한 겹 꽃뱀의 허물이 벗겨진다. 그리고 서실 안은 문득 설국(雪國)으로 화한다. 너무나도 희다.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흰빛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건이고, 동시에 묘한 공포였다. 터질 듯이 팽만한 육체! 그녀는 이제까지 꽈악 가슴이 조여지는 무복(武服)이며 경장(輕裝)만 걸쳐 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목구비의 정숙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에 반했을 뿐이지, 그녀의 두터운 옷자락 뒤에 감추어진 관능(官能)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주령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눈썹에는 새벽 풀밭에서만 볼 수 있는 맑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목야성은 숨이 콰악 막혀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건 주령의 나신이 상상 외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나신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백안시할 수 있을 정도의 절제력은 지니고 있는 그다. 다만 그는 그리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던 백도의 여협사가 모든 감정을 극복하고 자기 앞에서 옷을 벗는 그 사실에 대해 숨막히는 질식감을 느끼는 것이다. '주령, 그댄 너무나도… 강하군!' 목야성은 주령을 섬약하고 아름다운 미녀라고 여기기보다, 도저히 꺾지 못할 오기를 지닌 인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내 몸무게의 반밖에 안 되는 가냘픈 몸뚱이 속에 썩어 가는 백도를 일으킬 투혼이 있다. 우리 두 사람의 감정 싸움에서 이긴 쪽은 옷을 벗긴 내가 아니라, 옷을 벗은… 저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목야성은 그래도 냉소를 흘릴 뿐이다. "생각보다는 살집이 좋아!" 그는 넉살 좋게 말하며 붓을 쥐었다. "속살이 풍만해야 그림이 좋아지지." 주령은 매순간 순간 피부에 소름처럼 돋아나는 살기를 이기기 위해 소녀 시절 외운 금강경(金剛經)을 암송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불가의 속가제자(俗家弟子)가 아니었더라면 이 방 안에는 묵향(墨香) 대신 혈향(血香)이 흐르게 되었을 것이다. 주령은 넉살 좋게 자신의 벗은 몸을 그리기 시작하는 오만한 갑부청년을 쏘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못해. 그리고 이번에 본 나의 나체(裸體)는… 네가 마지막으로 보는 나의 나체일 것이야!' 주령은 목야성과 성혼(成婚)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또한 일생 남자라는 더러운 하등동물과 살을 섞지 않겠다는 맹세도 했다. 사부가 은근히 바라 마지않았던 비구승(比丘僧)의 길이 바로 자신의 운명의 길일 것이라는 숙명(宿命)의 암시까지도……. 하되 목야성은 달랐다. 그는 이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여들 자격이 있는 완전 무결한 여체를 세밀히 묘사해 가는 가운데, 문득 주령이 상상할 수 없는 맹세를 발아(發牙)시켰다. '오늘 낮까지는 주령을 포기하고자 했다. 하되, 지금 내 가슴 속에는 저 여인이야말로 날 위해 아들을 낳아 줄 여인이라는 생각뿐. 그래, 넌 나 이외의 남자는 생각할 수 없는 나의 여자이다. 언제고… 언제고 이 빚을 다 갚아 주고, 널 맞이하겠다.' 나녀도(羅女圖)!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강호 사대미녀 가운데 한 여인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딱 두 시진이 걸렸다. 목야성의 눈앞에 전무후무한 아름다움을 품은 한 폭 나녀도가 펼쳐졌다. 이미 시간은 새벽을 넘기고 있었다. 여명은 이미 뜰을 넘어 서재로 조심스럽게 흰 발길을 뻗치고 있었다. 그 사이 주령의 피부는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또한 어찌나 입술을 악물었는지 입술에 피가 맺혔을 정도였다. 그녀가 두 시진 간 거듭한 번뇌(煩惱)는 그녀가 일생을 통해 다시 하지 못할 그러한 농도의 번뇌이다. 그녀는 가장 존경받아야 할 대상에게서 가장 철저한 모독을 받고 만 것이다. 그녀가 이 순간을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대자심결(大慈心訣)이라는 상승무학의 부동지심(不動之心) 때문이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목야성은 마지막으로 주령의 눈빛을 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도 성(聖)스럽다. 세상을 다 산 현인(賢人)의 눈빛… 저 젊은 나이에 이런 눈빛이라는 것은 다분히 불행일지도…….' 그는 화룡점정의 심정으로 눈동자를 그렸다. "제법 그려졌군. 후후……!" "이제 되었나요?" 주령이 물었다. 다분히 감정이 없는 목소리이다. 처절한 분노와 증오심이 아예 없다. 차라리 노한 목소리였다면 목야성의 미안함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주령은 파리한 눈빛을 흘리며 벗었던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밤새 음탕한 눈빛을 흘리는 사내 앞에서 노출되었던 신비가 감추어지고 있다. 하되 여인의 가슴 속에 간직했던 신비는 완전히 파괴되어 다시는 원상태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목야성은 그녀가 옷가슴을 여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돈은 전표로 주겠다. 원한다면 지금!" 그 때 주령은 비녀로 머리 모양을 고정시키며 갑자기 웃었다. "호호호호……!" 다분히 비정상적인 웃음이다. 허무에 가득 찬, 그리고 허무감을 넘어선 파멸이 번지어 있는 그런 웃음. "이제까지 왜 무사들이 마도에 빠지는지 알지 못하였거늘, 이제 알 것 같군요. 목야성 공자, 그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인생의 사부입니다!" 주령은 목야성을 쏘아보았다. 목야성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뒤엉켰다. 주령의 눈빛은 목야성이 보아 온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 주령은 쉽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리도 사납게 목야성을 쏘아봄은 이미 마음 속으로 그를 인간 이하의 금수로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귀하 덕에 보타산(普陀山) 자비검파(慈悲劍派)는 일생을 검에 희생할 구도자 하나를 얻게 되었으니, 거듭 감사드립니다. 호호호……!" 주령은 광기와 허무감에 가득 찬 웃음을 흘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으로 꽂혀 드는 차가운 금속성 화살촉 같은 언어(言語) 하나가 있다. 그 언어는 아마도 목야성이 절대로 상상하지 못할 그러한 언어이다. '어이해… 내가 저 오만하고 경박한 사내에게 마음의 흔들림을 느끼다니! 오오, 대자대비하신 석가세존이시여! 부디 이 마음의 동요가 단 한순간의 동요이기를……!' 그녀는 이 세상 모든 대상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특히 남아(男兒)라고 불리우는 모든 상대에 대해서는 유독 철저히! 하되 여심난측(女心難測)이랄까? 그녀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또 하나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흐르고 있다. 그리도 철저한 모욕을 준 당사자에 대한 야릇한 동물적 욕정(欲情)이랄까? 그녀는 그러한 마음의 동요를 자신의 수양이 부족한 데서 발생하는 독소(毒素)라 치부했다. 하여 그 뿌리를 과감히 끊을 결심까지 굳혔다. 하여간 주령은 비참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전표 한 장을 쥐었다. 일금 칠백만 냥짜리 전표였다. 그것은 항차 백도정예의 훈련장 건축을 위해 쓰이리라. 모든 모욕을 이기고 취하는 대가치고는 너무 가벼운 종이 한 장이다. 그녀가 전표를 쥘 때였다. 목야성은 냉막하고 건방진 표정 가운데 말을 이었다. "하여간 고맙다. 주령, 너는 나의 은인이다." "……." 주령은 순간적으로 의아해 하는 눈빛이다. 그의 말 뒤에 숨은 독아(毒牙)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기에 그를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목야성은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말로 인해 나의 한 팔이 날아갈지도…….' 목야성은 꽤 큰 타격이 있을 것을 각오했다. 그러나 예정해 두고 있던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그리고 눈앞의 여인을 위해……! "백도에 칠백(七百)이 갔다면, 내 수중에는 천(千)이 들어올 테니까!" "천… 천이 들어오다니?" "후후… 상권의 유지란 구체적으로 말해 세력의 균형을 깨는 것이지. 프핫핫… 황금을 버는 데에는 평화(平和)의 시기보다 난세(亂世)가 좋지. 난세에는 혈풍(血風)이 쉬지 않고 불고, 시산혈하(屍山血河)가 끝없이 이어지지. 파괴와 살륙, 방화가 계속된다면 장사를 할 게 많지." "으으, 감… 감히 그 따위 말을……!" 결국 주령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었다. 옷을 벗는 그 순간에도 자제되었던 인내심이다. 그러나 목야성의 그 한 마디 말에는 결국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목야성은 주령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일부러 간과했다. 연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간 고맙다. 너로 인해 나의 장사는 보다 잘 될 것이다. 그렇잖아도 백도가 흑도에게 밀리게 되어 흑도의 강호 정복이 눈앞으로 다가와 다분히 걱정이 되었지. 후후… 하되 너를 비롯한 일단의 철부지 백도열사들이 마도와 더불어 목숨을 걸고 항쟁(抗爭)을 하게 된 틈에 흑도와 백도는 세력의 균형을 유지할 것. 결국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목가의 영업은 순풍에 돛 단 듯이 번창하게 될 것이니… 프핫핫… 네 몸값으로 제공 한 칠백 정도는 이 년 안에 거뜬히 회수할 수가……!" 순간이다. "천한 자! 널 용서할 수 없다!" 일갈 노호와 더불어 주령의 손이 빠르게 쳐들렸다. 스르르릉-! 봉황후(鳳凰吼) 같은 맑은 금속성음과 함께 그녀의 허리띠로 차여져 있던 백색(白色) 채대검(彩帶劍)이 풀리며 백봉연검(白鳳軟劍)으로 화했다. 촤르르르-! 이어 눈보라처럼 퍼지는 검파(劍波)가 있다. 일컬어 백봉쌍익번천식(白鳳雙翼飜天式)이란 수법이다. 주령의 검은 목야성의 오른쪽 눈을 향해 곧장 찔러 갔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찰나 목야성은 저도 모르게 왼손을 쳐들었다. 순간 얼굴을 희게 뒤덮던 검파 속으로 검은빛이 어른거렸다. 그 직후였다. 따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퉁긴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편(劍片) 한 조각이 튀어올랐고, 그것은 목야성의 목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 벽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목야성은 주령의 일 검을 막아 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좌수일식(左手一式)을……!' 목야성이 멍하니 있을 때였다. 멍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령 역시 믿을 수 없는 불신과 경악의 눈길로 목야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성을 되찾는 것은 반각 정도. "호호호… 천하의 의를 대표한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나거늘, 항마탕사(降魔蕩邪)의 모든 절예를 터득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이거늘… 일개 강호의 잡배 하나를 꺾지 못하고 검을 꺾이다니… 호호호……!" 갑자기 주령은 발작해 웃어 대기 시작했다. 이어 지면을 박차고 빠르게 몸을 띄워 올렸다. 펑-! 그녀는 문을 부수며 신형을 이동시켜 나갔다. 그녀는 찰나적으로 한 개의 점(點)이 되어 사라졌다. 방바닥에는 그녀가 떨어뜨린 검이 나뒹굴고 있다. 검의 위쪽으로 세 치 가량이 끊어져 나간 게 보였다. 목야성의 뒤쪽 벽 속으로 파고든 것은 바로 그 끊어진 부분의 파편이었던 것이다. "아아, 내가 대체 무슨 수법으로 일 검을 막았을까?" 목야성은 손목 부위를 내려다봤다. 며칠 간 그의 손을 천 근 만 근 무겁게 압박하고 있는 패엽검환(貝葉劍環)이 거기에 있다. 방금 전, 그는 저도 모르게 일 식을 구사한 바 있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주령의 검을 가로막고 끝 부분을 절단시킨 것이다. '주령의 마지막 웃음소리에는 광기(狂氣)가 서려 있었다.' 목야성은 착잡한 눈빛 가운데 눈길을 내렸다. 주령은 떠나갔다. 문득 목야성은 그녀를 불러 세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또한 마음 속에 간직한 밀어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까지도……. 그러나 강한 인내력으로 그 충동을 억눌렀다. '이해 못할 것이오. 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요. 내가 어떠한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은 영원히 하지 않을 것이오.' 목야성은 문 너머로 사라져 간 주령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녀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한 줌의 향기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긴 것은 딱 하나 있다. 나녀도! 목야성은 묵묵히 미녀도를 내려다봤다. 검은 먹 하나로 그린 그림이되, 이 세상 모든 화려함이 머물러 있다. 터질 듯 팽창한 가슴, 쭉 뻗어 내린 늘씬한 다리와 둔부, 완벽으로 일관되어진 육체의 미학(美學)이다. 그림에서 아름답지 않은 부분은 오직 한 부분뿐이다. 허공(虛空)을 싸늘히 쏘아보고 있는 한 쌍의 동공(瞳孔)! 목야성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눈동자 부분은 아름답다기보다 처절했다. 눈동자에 그러한 느낌이 번지고 있는 것은 목야성의 그림 솜씨가 대상을 완전히 그려 내는 입신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그 처절하고 비감(悲感) 서린 눈빛! 그것은 오늘 이후 목야성의 뇌리를 떠나지 않을 몇 쌍의 눈빛 가운데 대표적인 눈빛이 될는지 모른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