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章 武陵迷魂府의 奇緣 [내 모습이 차가운가?] 일순 마의인은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혁사린은 움찔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마의인은 무표정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가? 하기야 나는 지하 일천장(一千丈) 밑에서 지금 막 나왔으니 자연 차가울테지.] [지하 일천 장...지금 막...?] 혁사린은 얼핏 마의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의인은 기이하게 웃었다. [후후훗!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하려고 하지마라. 공연히 목숨을 잃을테니까...] 혁사린은 마의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마의인은 혁사린을 힐끔 응시하며 그 옆에 앉았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혁사린이오.] [음...좋은 이름이군.] 마의인은 혼자 중얼거린 뒤 무심코 시체를 응시했다. [저 시체가 누구인지 아는가?] 혁사린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마의인은 중얼거리 듯 말했다. [무서운 자들이지. 그들은 무림을 원하고 있어. 후후훗...재미있는 일이야. 단 하나의 무림을 놓고 다툰다는 일은...] 혁사린은 그의 두서없는 말에 의아할 뿐이었다. [백마도(百魔島)! 그들이 사백 년 동안의 긴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백마도!] 혁사린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백마도(百魔島)!> 중원사해(中原四海) 어디엔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환상(幻想)과 공포의 마도(魔島). 사백 년 전, 일백명으로 이룩된 가공할 마세가 전중원을 휩쓸었다. 정도 사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백마도만이 존재한다고 부르짖을 뿐이었다. 육개월, 그 짧은 시간에 중원은 초토화로 변했다. 피와 절규가 극에 이르는 한 순간 정의 수호신(守護神)인 소림사를 위시하여 사천 팔백 명의 정사양인이 규합했다. 그리고 무림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혈전의 막이 올랐다. 백마도와 전중원의 칠주칠야의 대혈풍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백마도의 마인들은 태반이 죽거나 도주를 했다. 중원은 정사연합에 의해 지켜졌으나 그 피해는 엄청났다. 정예 고수들 태반을 잃고 수많은 무공들이 유실되는 껍데기 뿐인 무림으로 화해버리고만 것이다. 그런데 사백 년 전의 백마도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는 무서운 말이 지금 마의인 입에서 나온 것이다. [...!] 혁사린은 멍하니 시체를 응시했다. 마의인이 말했다. [만황독존에 의해 죽은 자들은 백마도에서 파견한 조무래기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만황독존은 저들에 의해 자칫 죽을 뻔했지. 후후후...그의 음양부골산이 아니었다면 만황독존은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혁사린은 내심 경악했다. (그렇다면...백마도는 사백 년 전보다 더욱 엄청난 세력으로 무림을 향해 마수를 뻗쳤단 말인가! 만황독존이 죽을 뻔 했다니...) 마의인은 혁사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혁사린이라 했던가? 자네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군. 내 마음이 포근해지니...] 그는 잠시 말을 끊은 뒤 다시 이었다. [자네는 나에 대해 많은 의아심을 지니고 있겠지?] 혁사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말해줄까?] 혁사린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도 틀림없이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후후후! 뛰어나군.] 마의인은 약간 의외라는 듯 기이하게 웃었다. [나는 지하 일천 장 밑에서 이십 년을 소비했네.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였지.] [...] [이십 년...지루하더군. 때문에 내 성격은 변했어. 고독과의 싸움...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괴롭고 어려운 일이다. 자네는 고독을 아는가?]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가끔 느낄 때가 있소. 그러나 성질이 다른 부류의 고독이지요.] [음...] 마의인은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내가 이십 년 동안 고독과 싸우며 무엇 때문에 무공을 익혔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혁사린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게. 저것이하늘이네. 나는 어려서부터 하늘이 되고 싶었네. 그리고 이제 하늘이 되기 위해 지하에서 나왔네.] 혁사린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마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는 천하를 갖고 싶네. 이제 때가 된 것이지.] 혁사린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패웅지존(覇雄至尊)을 꿈꾸고 있구료?] 마의인은 특유의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네. 설혹 내가 패웅지존이 되지 못할지언정 내가 다스릴 집단은 천하패도(天下覇道)라는 것을...] [문파를?] [후후훗...벌써 정해 놓았지. 지금부터 수하들을 거둘 것이네. 무림에서 버려진 쓰레기같은 존재를...그들이 뭉치면 물불을 모르는 엄청난 세력이 되지. 하오문(下五門)...이것이 천하제일의 가공할 문파가 될 것이다.] 혁사린의 두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그렇다. 천하의 하오문을 하나로 합친다면 정녕 경천가공할 집단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의 울분,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이 사람, 정녕 무섭다.) 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중원 전체에 퍼져있는 하류인물들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의인은 문득 땅을 응시했다. [어려움이 있지. 그러나 두 달만에 그들을 규합할 것이다.후후훗...단 두 달만에...] 혁사린은 마의인의 눈을 보았다. (저 눈빛, 소름이 끼친다! 두 달...그는 이룩할 것이다. 저 집념(執念)의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이다. 그 누구도 나의 앞을 막을 수는 없다. 운명(運命)도...하늘도...그 무엇도...] 잔인함과 야망이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문득, 그는 혁사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네와 내가 만난 것은 인연(因緣)일지도 모르네. 자네에게 단 하나 뿐인 나의 마음을 주고싶네.] [마음?] [그렇네. 나라는 인간 반천악(潘天岳)은 정(情)을 모르네.아니 정이 있으되 잊은 지 오래네. 자네가 나로 하여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을 느끼게 했네.] [...] 혁사린은 그의 심중을 십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의인은 돌연 품속에서 조그만 석패(石牌)를 꺼내 혁사린에게 건네주었다. [받게.] 혁사린은 석패를 받아 들었다. [지하 일천 장 밑에서 만든 것이네. 단 두 개 뿐, 하나를 자네에게 주겠네.] 혁사린은 석패를 자세히 살폈다. 앞면에는 지옥의 수라신상(修羅神像)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천상(天上)의 옥황신상(玉皇神像)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간단한 글이 양각되어 있었다. -천마패(天魔牌)! [천마패...] 혁사린은 석패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되뇌였다. 마의인은 천천히 말했다. [천마패는 언젠가, 아니 두 달 후에 탄생할 하오련(下五聯)의 지존령패일세.] [아...!] 혁사린은 탄성을 발했다. 마의인이 재차 말했다. [하오련의 전 제자는 자네와 내가 가진 천마패의 명이라면 목숨도 불사할 것이네.] 혁사린은 자신도 모르게 감격했다. 마의인이 마종지주(魔宗之主)라 해도 관계없다. 장차 무림의 햇불이 될 일대성협이라고 해도 관계없다. 오직, 그들에게는 사나이의 뜨거운 정(情)이 있을 뿐이니까. 마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주겠는가?] 혁사린의 가슴에 이 순간 그 무엇인가 강렬한 감정이 와서 부딪쳤다. [형님...] 마의인의 두 눈에 어느 한 순간 이슬이 반짝였다. [아우!] [형님!] 그들은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어쩌면 정사대종주(正邪大宗主)와 제마신협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반천악은 격동을 가라앉히며 잔잔하게 입을 열었다. [아우, 자네와 나는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을지도 모르네.] 무슨 뜻인가? [나는 알고 있네. 자네는 하늘이 내린 정의(正義)의 화신이며 무림의 기둥이라는 것을...그러나 나는 무림을 일대 피보라 속에 몰아 넣을 자...] 혁사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지금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요.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반천악은 웃었다. [그렇지.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지.] 반천악이 다시 말했다. [아우, 만약...우리가 대립한다면?] 혁사린은 웃었다. [형님, 소제는 장담합니다. 소제와 형님은 영원히 대립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반천악의 두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어둠을 혁사린은 보았기에 그는 불안했다. (그래...너와 나는 대립해선 안돼.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우리들을 위해서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버리리라.) 반천악은 자신의 말마따나 감정도, 생명이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너무도 뜨겁기에 그것을 나타내지 않았기에 무심하며 차가왔을 뿐이다. 진정한 사나이! 그는 반천악이었다. (형님 당신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비극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나 제마신협은 형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영원히...) 그들은 웃고 있었다. 문득 반천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았다. (헤어질 시간인가?) 그의 두 눈에 짙은 아쉬움이 어렸다. [아우, 무릇 천지만물 중 인간만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지. 그리고 두뇌가 있네. 그 두뇌는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지.] 돌연 반천악은 자신의 두 손을 등뒤로 돌렸다. [보아라! 이것이 이십 년 동안의 피와 땀이 어린 패도지공, 천마파천개(天魔破天開)다!] 파츠츠츠츳... 어느새 뽑아든 쌍도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일정한 초법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사천팔백변을 자르고 있었다. 파---파---팍! 십여 장 밖의 바위들이 정확하게 사천팔백개로 잘라졌다. [도법의 최고 경지, 그것은 천라혈섬도강(天羅血閃刀 강)이다!] 철컥! 철컥! 쌍도가 어느 새 도집에 들어갔다. 그것도 잠시 뿐, 휘리링... 슈슈슉! 두 개의 쌍도가 저절로 도집에서 뽑혀지며 엄청난 도강을 발출하며 허공을 날았다. 뿐인가? 촤아악---! 마치 부채살처럼 퍼진 도가 일제히 가공할 도강을 뿜었다. 츠츠츠츳--- 파아팟! 한 차례 허공을 노릴던 쌍도는 다시 도집에 꽃혀졌다. (저것이 도법인가? 아니면 천하 멸망을 위한 악령의 춤사위인가가?) 사방 십장 내외는 완전히 초토화(焦土化)로 변해 있었다.모조리 평지로 변한 것이다. 강호 무림에 지금까지 이같은 도법은 없었다. [형님...] 혁사린은 반천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순간 반천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별의 아쉬움조차 남깆 않은 채 말없이 떠난 것이다. 냉혹한 사나이, 그리고 끝없는 야망을 갈무리하고 있는 반천악과 혁사린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아쉬움만 남기고 끝난 것이다. [반형님...] 혁사린은 이미 사라져버린 반천악의 이름만 되뇌였다. 그러다가 돌연 그의 두 손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파츠츠---파파팟---! 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마파천개에 이은 천라혈섬도강이 그의 손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아우는 형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못했는데 형님은 아우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군요...오늘의 만남, 절대 잊지 않겠읍니다. 절대....] 혁사린의 춤사위는 나직이 중얼거리는 음성과 함께 한동안 계속되었다. * * * 무릉산(武陵山)-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신선들이 기거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었다고 한다. 경치는 그야말로 산명수려하며 산자수명하기 이룰 데 없었다. 아침 안개가 전산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으며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오고 있었다. 헌데 새벽 안개를 헤치며 한 인영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진정 우스울 정도로 멍청했으며 두 눈동자 역시 꿈꾸듯 몽롱했다. 천하에서 가장 멍청하게 생겼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백의만큼은 깨끗하며 청결했다. [휴우! 공연히 고생만 했군.] 그는 푸념을 하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았다. 기실 이 멍청한 인상의 서생은 역용술로 자신의 뛰어난 용모를 감춘 혁사린이었다. 용모 때문에 자꾸 일어나는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 이렇듯 멍청한 서생으로 변장을 한 것이다. [후후훗! 모습을 바꾸니까 상당히 편하군. 계집애라고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러나 계집애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조금 섭섭하군.] 혁사린은 웃음을 지으며 안개를 응시했다. 아침 햇살이 천천히 떠오름에 따라 안개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스...스스... 한데 그때였다. (응?) 혁사린은 오십여 장 밖 절벽 부근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잠시 반짝 비쳤다가 이내 사라진 것이다. (눈이 반사된 것인가?) 그는 이같이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반---짝! 이번에는 그 빛이 좀더 강렬하게 비치는 것이 아닌가? (눈(雪)에서 반사되는 빛이 아니다. 어떤 금속체에서 발광하는 빛이 분명하다!) 혁사린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빛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휘이잉...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이 하늘을 꿰뚫을 듯이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스스스... 혁사린의 신형이 그곳에서 내려섰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곳에서 빛이 발산했는데... 가까이 보아도 전혀 빛이 없으니...) 혁사린은 위치가 잘못됐나 싶어 다시 절벽을 응시했다. 그러나 위치는 틀림없었다. [그렇다면...햇살에 눈이 반사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혁사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제자리에 선 채 절벽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틀림없다. 절대로 눈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혁사린은 천천히 절벽면을 살폈다. (이상한 곳은 없다. 다만 얼음이 엉겨있을 뿐...음? 저것은...) 갑자기 혁사린의 두 눈에서 일순 기이하기 이룰 데 없는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의 눈빛은 절벽 면에 닿자 더욱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저것이다!] 혁사린은 무엇을 발견한 듯 급히 절벽 면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눈 앞에는 놀랍게도 깨알만한 크기의 미세한 백색투명한 인공 단추가 있었던 것이다. [교묘하다. 천안신공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구나.] 그렇다! 조금전 그의 눈이 빛난 것은 단순한 안광이 아닌 어떤 물체도 꿰뚫어본다는 천안신공(天眼神功)을 운용한 탓 때문이었다. [이 단추는 분명 기관이다. 무엇을 움직이는 기관일까?] 혁사린은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굳힌 뒤 단추에 시선을 바짝 들이댔다. [발견한 이상 단추를 작동시켜 보자.] 그는 다시금 천안신공을 일으켰다. 동시에 뇌리로 수 많은 구결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그가 지금것 보아온 기관진법(機關陣法)의 요해(要解)들이었다. (그대로 누르면 안된다. 좌측에서 반바퀴...그리고 다시 우측으로 두 바퀴...연후 세 번을 계속 누르면...) 혁사린은 단추를 왼쪽으로 반바퀴 돌렸다. 이후 다시 오른쪽으로 두 바퀴 회전시킨 뒤 빠르게 세 번을 눌렀다. 때를 같이하여 절벽 아랫 부분이 서서히 뒤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쿠르르릉---! [아...!] 혁사린은 이같은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잠시 후 절벽이 갈라지며 시커먼 입인 양 하나의 암동(暗洞)이 나타났다. 혁사린은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결정했다. [이왕 열린 것...들어가 보자.] 그는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르르릉! 그가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 순간 절벽이 다시금 원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혁사린은 흠칫 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 * * 암동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혁사린의 두 눈에서 일순 짙은 자광(紫光)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시야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인공으로 지은 석실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구나. 또한 절벽 안에 이같은 석실은 만들었다는 자체부터가...분명 뭔가 있다.) 혁사린은 재빨리 생각하며 석실 주위를 살폈다. 얼마 후, 그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뻗었다. [저곳에 또 다른 기관이 있다!] 천안신공을 운용한 혁사린은 석벽 면에서 또 하나의 투명한 단추를 찾아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추를 눌렀다. 쿠---르---릉! 석면이 좌우로 갈라지며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왔다.혁사린은 그곳이 또 다른 석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주춤하며 제자리에 섰다. 석실의 중앙에는 지극히 준수한 서생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생의 심장에는 한 자루의 철전(鐵箭)이 깊숙히 꽃혀있었다. 심장에서 흘러내린 선혈은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난 듯 굳고 퇴색해 있었다. 뿐인가? 서생의 머리 위에는 수북하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죽은 지 오래된 시체였다. 혁사린은 아연실색했다. (최소한 팔백 년은 넘었을 것이다. 시체가 팔백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다니...불가사의한 일이다.) 혁사린은 서생이 앉은 바닥에서 희미한 글씨를 발견했다.절정(絶頂)의 대라금강지력(大羅金剛指力)으로써 바닥에 새긴 것이다. <본인은 옥전서생(玉專書生)이다. 우리는 어리석었다.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무림의 최대영웅이라던 사대천왕(四大天王)인 우리가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어갈 줄을 그누가 알았겠는가?> [사대천왕!] 혁사린의 두 눈에서 격동의 빛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사대천왕(四大天王)-! 팔백 년 전 천하를 종횡하던 네 명의 신화적인 절대무적자(絶代無敵者)들이다. -무아성승(無我聖僧). 그 당시 소림사의 최고배분으로써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와 달마진경(達磨眞經)을 최초로 완벽하게 익힌 절대신승(絶代神僧)이었다. 또한 불문무공에 사문(邪門)과 도가(道家)의 현공을 융합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옥전서생(玉專書生) 담대우리(潭臺宇理) 당시 천하 으뜸의 귀공자(貴公子)라 불리웠다.또한 그의 무공은 형체도, 형상도 없다고 했다. 남해의 전설적인 환상도(幻想島)의 도주였으나 그 당시엔 천하제일의 신비도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천기쌍선(天奇雙仙). 천선(天仙) 명심자(明心子). 지선(地仙) 현음자(玄陰子). 이들은 쌍둥이 형제로써 유일하게 천축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원조인 천축을 능가할 정도로 천축무공에 통달한 인물들이다. -만상천인(萬象天人). 천하의 온갖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는 한 번도 그 무공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그만이 익힌 독특한 내공심법 때문이었다. 공명심법(空冥心法)! 오직 서장무학(西藏武學)에만 사용할 수 있는 괴이한 내공심법으로 그가 익힌 광범위한 무학을 전개하지는 못했으나 서장무학에 관한한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혁사린은 사대천왕에 떠올리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사대천왕이 이곳에?] 그는 급히 바닥에 새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크으! 양광(楊廣)! 일국(一國)의 황제(皇帝)인 네가 정녕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심장에 박힌 철전(鐵箭)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이 온다. 이 고통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목임을 알기에 이 글을 남긴다. 수양제(隋煬帝), 그는 무서운 자다. 그는 놀랍게도 천하의 모든 무공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 그 화후가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아! 양광(楊廣)이라면 팔백여년 전 남북조를 통일하며 세운 수(隋)나라의 두번째 황제, 수양제(隋煬帝)다! 수양제가 천공의 모든 무공을...] 혁사린은 크게 경악했다. -수양제(隋煬帝)! 중원 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막은 북주(北周)의 개국공신이었던 양견(楊堅)에 의해 무너지고 대륙은 양견이 세운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된다. 양견이 바로 수문제(隋文帝)였다. 수문제는 경제부흥에 힘을 쓰는 한편 관리와 귀족들을 엄히 다스렸다. 수문제는 큰 아들 용(庸) 대신 둘째 아들인 광(廣)을 태자에 자리에 올렸다. 양광이 바로 수양제(隋煬帝)다. 수양제는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 한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듬은 물론 자신이 강남으로 유람을 다니기 편하게 할 생각으로 어마어마한 토목사업을 벌이니 그게 바로 대운하(大運河)였다. 대운하는 수양제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수양제는 조세의 부담과 대운하 공사에 징발(徵發)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들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외정(外政)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만주 일대의 돌궐족(突厥族), 서북방 청해(靑海) 일대의 선비족(鮮卑族), 지금의 대만(臺灣)인 유구국(流求國)은 물론 멀리 남방제도의 말라야군도(末伊群島: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동방의 부상국(扶桑國:일본)까지 수나라에 입조(入朝)시키거나 국가간 교류를 텄다. 하지만 유독 고구려(高句麗)만은 당해내지 못했다. 수나라는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계속적인 전쟁과 조세의 부담, 대운하 공사로 인한 가혹한 노동 등은 결국 대대적인 농민반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세번째 황제인 공제(恭帝)에 이르러 건국 37년만에 이연(李淵)이 세운 당(唐)나라에 망하고 만다. 수양제 양광- 사가(史家)들의 기록에 의하면 수양제는 농난(農亂)을 막기 위해 전장(戰場)에 나갔다가 전사(戰死)했다고 전한다. 혁사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이곳에 들러온 사람이 사대천왕과 수양제라면 수양제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 떠도는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수양제의 죽음은 수 많은 억측을 낳았다. 그 중 가장 지배적인 억측은 두 가지다. 농란이 계속되고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총명하다 못해 약삭빠른 수양제는 수나라가 오래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 그동안 축적(蓄積)해놓은 보물을 챙겨 새로운 삶을 살았다고 하는 가사설(假死說), 또 다른 얘기는 고구려 원정길에서 입은 부상이 무척 심해 양주(楊州)에서 요양중이다가 수나라가 망하자 잠적했다고 하는 은거설(隱居說)이다. 가짜 죽음이나, 도망의 두 설(說)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信憑性)이 있었다. 아무리 향락에 빠져 있던 수양제라 하지만 그는 가공할 무공을 익힌 제왕(帝王)이다. 그런 그가 농민들로 구성된 반란군들 손에 죽었다는 것은 선뜻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또한 수나라를 명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운 고종(高宗) 이연(李淵)이 수나라 황궁비고를 열었을 때 그많던 보화들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럼 그 많던 보화들이 전부 어디 갔을까? 그리고 수양제가 죽은 장소가 바로 양주(楊州)란 사실이다. 양주는 수양제를 위한 향락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도(皇都)인 낙양성보다 양주성의 지리를 더 잘아는 사람이 수양제였고 그가 고구려 원정 길에서 입은 부상을 치려하기 위해 내려온 곳 역시 양주성이었다. 숨으려고 맘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숨을 수 있는 곳이 양주성이다. 그러하기에 정사(正史)와는 달리 야사(野史)는 수양제가 난(亂) 때 죽지 않았다고 전해왔다. 그랬는데 이곳 무릉미혼부(武陵迷魂府)에 그 당시 강호 무림을 질타했던 사대천왕과 수양제가 함께 들어왔다고 하니 혁사린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혁사린은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글을 읽었다. <수양제가 우리들 사대천왕에게 제안했다.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릉미혼부(武陵迷魂府)에서 가장 재미있는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무릉미혼부는 거미줄처럼 깔린 기관(機關)과 미로(迷路),함정(陷穽)으로 가득한 죽음의 사역(死域)이다. 그 누구도 들어가 보지 않는 이곳에 들어가 중심부인 무릉정(武陵亭)에 이르는 사람이 승리자다. 승리자에게 자신들이 지닌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한다는 것이 내기의 조건이었다. 자신이 있었다. 승리자가 되어 그들의 무공을 얻는다면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무릉미혼부로 들어갔다. 무릉정을 찾기에 전심했다. 수많은 기관과 미로 속에 헤매길 어언 십년, 사대천왕과 수양제의 능력이면 며칠 안에 무릉미혼부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우린 십년을 그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누구도 길을 찾을 수 없었고, 들어간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무릉미혼부를 너무 얍잡아본 우리들의 불찰이었다.> [...!] 혁사린은 글을 읽은 뒤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전설 속에 존재한다는 무릉미혼부는 전설이 아닌 현실이었고, 그곳은 전설이 말하는데로 죽음의 사역이었다. 문득, 혁사린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릉미혼부 어딘가에 나머지 네 사람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설령 무릉정을 찾았다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허면 난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단지 외부에서 기관을 작동하는 단추를 찾았을 뿐인데...) 그는 마지막 글을 읽어 내려갔다. <사대천왕의 종말이 이렇게 허무하단 말인가? 또한 일국의 황제가 이토록 야비하단 말인가? 나 옥전서생이 이곳에 들어온 지도 어언 백 년이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관을 전부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벽에서 하나의 철전이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방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한 함정이었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해 나 역시 망가뜨린 기관들 가운데 몇 군데를 따시 작동케 했고 그 기관을을 전혀 다른 함정으로 바꿔 놓았다. 이젠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한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한...> 혁사린은 아연했다. (아아...대체 공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백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젊은 서생의 모습이란 말인가? 또 죽어서도 썩지 않는 불후지체(不朽之體)가 된단 말인가?) 이곳에서 보낸 백년 세월동안 사대천왕은 인간이 아닌 신(神)이 되어 버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를 비롯한 우리들 사대천왕을 죽이려고 한 자는 분명 수양제일 것이다. 그는 이곳의 기관과 미로를 알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들의 비급을 취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는 안된다. 그놈에게 줄 수는 없다. 그가 비급은 가져가되 그것은 가짜다.> [아...!] 혁사린은 죽으면서까지 후일을 안배한 옥전서생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이 감기고 기운이 없어진다. 인연자는 보아라. 그대는 우측 벽을 세 번 두드려라.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이...환상도의 모든 것을....그대가 계승하라...> 모든 글은 여기서 끝이 났다. [...!] 혁사린은 멍하니 옥전서생의 유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우측 벽으로 다가갔다. 벽면 가운데 하나의 돌이 약간 돌출되어 있었다. 혁사린은 가볍게 세 번을 두드렸다. 스르르릉... 벽이 좌우로 벌어지며 조그만 틈이 형성했다. 그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 한 권의 얇은 비급과 팔각형(八角形)의 정교한 동전(銅錢)이 들어 있음을 혁사린은 보았다. [...!] 그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했다. 옥전서생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혁사린은 천천히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동전을 살폈다. <환상지존령(幻想至尊令)- 환상도(幻想島) 도주신전(島主神錢).> 팔각형의 동전은 신비의 섬, 환상도(幻想島)의 최고령부였다. 일반의 동전과 똑같았으나 단지 새겨진 글과 그림이 틀릴 뿐이었다. 동전 전체에는 검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안개에 가려진 희미한 섬이 그려져 있었다. 혁사린은 다시 낡은 비급을 응시했다. <천영환상보(天影幻想譜).> 천영환상보 안에는 환상도의 도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천해승극검공(天海乘極劒功). 바다가 갈라지며 거대한 파도가 천지를 뒤덮을 정도로 가공할 검식이었다. 죽음의 피를 부르는 패도검공이었다. -용비천혈강(龍飛天血 ).> 하늘을 뒤덮는 용의 분노인가? 아니면 여의주(如意珠)의 포효인가? 피빛 혈광이 번쩍하는 순간에 모든 것은 끝난다. 그 뒤에는 오직 공허(空虛) 뿐이다. -천영환상경(天影幻想輕). 그야말로 하늘의 그림자와도 같은 경공술이다. 전개하는 순간 형체는 그 자리에 남아있다 잠시 후에 연기처럼 사라진다. 즉, 너무도 빠르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허상(虛像)일 뿐이다. 혁사린은 옥전서생의 무공에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정녕...사대천왕이로구나.] 그는 환상지존령과 비급을 갈무리한 뒤 옥전서생의 유체에 공손히 예를 취했다. [노선배님의 유물 반드시 천하에 그 빛을 떨치겠습니다.] 옥전서생의 유체는 마치 웃는 듯했다. 잠시 후 혁사린은 이내 천안을 이용해 기관을 찾아낸 뒤 곧바로 다른 통로로 접어들었다. 무릉미혼부를 헤맨지 어느새 두 시진이 지났다. 혁사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쓱 문질렀다. [휴우...거미줄처럼 엉킨 미로로구나. 사대천왕과 수양제에 의해 기관이 파해됐기에 망정이지...] 그는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통로 벽에 화약 찌꺼기와 벽에 깊숙이 박힌 화살, 창들을 수없이 보았다. 뿐만 아니라 아래로 떨어지다가 멈춘 철문, 거석들로 볼 수가 있었다. 천지사방이 온통 죽음의 함정 투성이었다. [만약 내가 천기사뇌 엽소풍의 기관지술, 기문둔갑진법 등을 모르고 있었다면 나 역시 몇 년을 헤매었을 것이다.] 혁사린은 무릉미혼부의 무서움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하늘마저 닿는다는 지식을 지닌데다가 악마의 두뇌를 지녔다는 천기사뇌의 진전까지 얻은 그마저도 진저리치게 하는 이곳 무릉미혼부는 말 그대로 영혼마저 방황하는 곳이었다. 혁사린은 씁쓸한 웃음을 띄우며 계속 앞으로 나갔다. 통로는 비좁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혁사린의 시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또 지났는지 모른다. 대략 세 시진 가량 나아갔을까? 문득, 혁사린은 통로 옆 벽면에 붙어있는 기이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흡사 정체불명의 검은 짐승이 벽에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거대한 곤충 같기도했다. (무엇일까? 이곳에 짐승의 흔적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혁사린은 급히 신형을 날려 벽에 붙은 물체로 다가갔다. 찰나 그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벽에 붙은 물체는 다름 아닌 시체였다. 시체는 완전히 백골(白骨)만 남아 있었다. 백골은 가슴을 뜰고 등까지 튀어나온 기다란 금창(金槍)에 의해 벽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기관장치에 의해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 시체는 사대천왕중의 만상천인(萬象天人)일 것이다.) 그렇다! 그 시체는 바로 만상천인의 것이었다. 대륙의 무공, 중원과 새외의 무공까지 두루 섭렵했지만 공명심법 때문에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했던 절대자. 뼈만 남은 만상천인의 오른쪽 식지 부근이 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만상천인 역시 마지막 힘을 다해서 글을 남긴 듯했다. 하지만 이끼 때문에 글이 보이지 않았다. 혁사린은 급히 벽면의 이끼를 털어냈다. 그러자 희미한 글이 벽에 나타났다. <수양제...그는 노부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대천왕의 무공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느냐고...노부는 절학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 비급을 주었다. 후회는없다. 내 자신이 택했으므로...> [...] 혁사린은 조용히 묵념을 드렸다. (수양제는 만상천인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 어디로 갔을까? 밖으로? 아니다. 일단은 무릉정으로 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혁사린은 생각을 그치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두 구의 백골이 또 다시 그의 앞길을 막았다. 백골의 골격은 몹시 흡사했으나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천기쌍선(天奇雙仙)이다.) 혁사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천기쌍선은 통로가 끝나는 지점 오른쪽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글을 남겼다. <노부 형제는 기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결국 우리는 기(氣)와 허(虛)가 종말에 이르렀다. 무엇인가? 무엇이 노부 형제를 이처럼 만들었는가? 간악한 놈, 놈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승부가 아닌 우리들의 비급과 우리들의 죽음이다. 까짓, 줄테니 가져가라. 노부 형제의 무공을 너에게 준다. 그러나, 수양제! 너 역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모두 이곳에 묻히는 것이다. 이곳에...> 수양제에게 남긴 글이었다. 혁사린은 한동안 두 구의 백골에 묵념을 드린 뒤 다시 신형을 날렸다. 얼마나 갔을까? 돌연 시야가 확 트이며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아아...!] 절로 혁사린의 입에서 탄성이 발해졌다. 지하광장은 한 마디로 표현해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중앙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못이 있었으며 물결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또한 연못 옆에는 구름다리가 있었으며 그 끝에는 정교하고 우아한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기화이초들로 만발했다. 또한 주위에는 푸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왼쪽에서는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콰르르릉---! 비폭징류(飛瀑澄流)!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신비로운 비경이다. 혁사린은 천안신공을 둔구어 연못 가운데의 정자를 바라보았다. 정자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릉정(武陵亭).> 아아! 이곳이 바로 무릉미혼부의 중심부였던 것이다. [...] 혁사린은 이같은 절경에 한동안 넋을 앗겼다. 문득, 그는 정자 뒤에서 폭포를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있는 한 고승을 발견했다. [무아성승(無我聖僧)!] 그렇다! 그 고승은 바로 무아성승인 것이다. 무아성승의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표표히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가사 위에 얹혀진 수북한 먼지는 쓸쓸하게만 보였다. 무아성승 역시 유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혁사린은 조심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갔다. 무아성승의 두 눈은 지그시 감겨 있었다. 합장한 손에는 백팔염주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한 장의 서찰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게 아닌가? 혁사린은 가볍게 합장한 뒤 허공섭물(虛空攝物)로써 서찰을 끌어당겼다. <아미타불, 그대가 이 글을 읽게 됨이 부처님의 안배일 것이다. 노납은 결국 이곳 무릉정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수양제, 그는 중원 대륙에 만족하지 않았다. 야망에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노납은 보았다. 그는 잃었던 수황실을 다시 되찾음은 물론 천하무림마저 손에 넣으려 한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아무도 이루지못했던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노납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그와 더불어 이곳에 영원히 묻히기 위해서다. 사실 사대천왕의 능력으로도 그를 막지 못한다.> [...] 혁사린은 멍청해졌다. 설마 사대천왕의 무공으로도 이수양제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말에 그는 아연했다. <그대는 의심하지 마라. 수양제는 가장 뛰어난 신골의 소유자다. 한 번 본 것은 영원히 잊지 않는 능력도 지녔다. 노납은 불제자로서 파계를 범했도다. 노납은 그에게 법경을 준 뒤 그가 사대천왕의 무공을 익히는 동안 무릉미혼부의 출구를 모조리 봉쇄해 버렸다. 이제는 끝났다. 노납은 저 폭포를 바라보며 스스로 심맥을 끊노라. 그리고 다시는 수양제와 같은 자가 천하에 태어나지 않기를 부처님께 비노라...아미타불...아미타불...>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그린 도해(圖解)가 있었다. 그 그림은 무릉미혼부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해였다. [...] 혁사린은 폭포를 응시했다. 콰---르---르릉! 굉음(轟音)! 천지가 떠내려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떨어져라. 더욱 크게 굉음을 울려라. 팔백 년의 한을 모조리 쓸어 버려라.] 혁사린의 입술이 악물려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수양제는 무릉정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지극히 은밀한 곳에...) 혁사린은 이같이 생각하며 급히 무릉정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 이상한 곳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수양제는 이곳을 빠져 나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그의 두 눈에서 어느 한 순간 짙은 자광이 폭사되었다. 무엇인가를 발견한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것이다!) 혁사린은 재빨리 신형을 옮겨 구름다리로 다가갔다. 구름다리 끝에는 용두(龍頭)가 장식되어 있었다. (용의 두 눈...그것이 기관이다.) 그는 용의 두 눈을 힘껏 눌렀다. 쿠르르르릉! 콰콰콰콰...부글부글... 돌연 연못 아래서부터 금빛 찬연한 석루(石樓)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오오...!] 혁사린은 입을 딱 벌린 채 망연자실했다. 석루는 위용을 드러낸 채 서서히 멈추었다. 한데, 석루의 지붕 모양은 괴이하게도 지옥의 악마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쌍두육비(雙頭六臂), 머리는 두개에 팔이 여덟이었다. 사발난비(蛇髮亂飛), 머리카락은 한올 한올이 모두 뱀이었고그것들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듯 온몸을 일으키며 혀를 날름이고 있었다. 육목무비독아(六目無鼻毒牙), 두 개의 얼굴엔 각각 세 개의 눈이 있었고, 코는 없고, 독사의 이빨과도 같은 날카로으운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 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지붕을 이룬 기와들이 모두 인간군상(人間群像)이란 점이다. 결국 뭇 인간들을 쌍두육비의 아수라가 짖밟고있는 모습이었다. 절로 진저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지붕 아래엔 육중한 문이 있었으나 굳게 닫혀 있었다. 문에는 금고리가 달려 있었다. (저곳에 수양제가 있다. 옥전서생의 비급을 제외한 삼대천공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그가 저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체가 되어 있을테지...) 혁사린은 조심스럽게 문 앞에 이르렀다. 그는 금고리를 잡아 비틈과 동시에 힘껏 당겼다. 쿠르르릉... 문이 천천히 열렸다. 동시에 밝은 광채가 촤악 뻗어 나왔다. [아...] 혁사린은 문 안 사방 벽에 무수히 박힌 야명주를 보았다.눈을 아리게 하는 광채는 야명주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다. 석루 안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너른 대전으로 이뤄져있었다. 대전의 정중앙엔 일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사십 대 정도의 청수한 중년인이 만면에 분노의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었다. [수양제!] 아아, 그가 바로 수나라의 두번째 황제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이였다. 혁사린은 수양제의 유체를 향해 배례했다. 비록 가공할 야망을 품었으나 일국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혁사린은 예를 한 뒤 천천히 일어났다. [아...저것은!] 그는 고개를 드는 순간 석루 사방 벽에 새겨진 빽빽한 도해와 글을 발견했다. (저것은 수양제가 새긴 그의 모든 무공이다. 아아...한 사람이 어떻게 많고 난해한 무공을 지닐 수가 있단 말인가?수양제제...그는 과연 뀌어난 천인이었단 말인가?) 벽에 새겨진 무공만도 거의 칠십여 종에 달했고 한결같이 천하를 놀라게 할 개세신공(蓋世神功)들이었다. 혁사린은 격동을 누르지 못하며 다시 수양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양제의 앞에는 한 통의 서신과 네 권의 낡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혁사린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분하다! 옥전서생, 그 놈이 가짜 비급으로 본 황제를 속이다니....! 그리고 무아성승, 그 늙은 중이 자신의 법경을 순순히 내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짐이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그놈은 모든 기관을 파괴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짐의 실수다. 그러나 그들도 나갈 수 없다. 우리는 함께 묻히는 것이다. 천하에 나를 능가하는 자는 없다고 짐은 자부한다. 늙은 중놈의 법경, 몰랐을 테지? 불심이 없으면 법경을 익힐 수 없다. 짐에게는 불심이 없을 것이라 여겨겠지. 그러나 놈의 판단 착오다. 짐은 완벽하다. 정사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늙은 중놈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분하고 원통하도다. 천하가 짐의 것이거늘 늙은 중놈이 기관을 파괴하는 바람에 이곳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글은 끝났다. 그러나 수양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자부했다. 아니 그는 충분히 자신을 내세울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당나라에게 빼앗긴 수나라를 되찾고 무림까지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불세출(不世出)의 영재였음을 역사가 말했기 때문이다. (무아성승의 희생이 없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혁사린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네 권의 비급을 취했다. 손끝이 강하게 떨렸다. 호흡이 이 순간 꽉 막히는 것을 분명히 의식했다. 무아성승(無我聖僧)-보리밀다대승불(菩리密多大乘佛). 만상천인(萬象天人)-만상금경(萬像金經). 천기쌍선(天機雙仙)-유가신경(瑜伽神經).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은 수양제 본인이 죽기 전에 만든 비경이었다. 곁표지에는 비경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고 안에 설명이 있었다. 아니, 저주의 글이 적혀 있었다. <천하는 짐의 것이어야 한다. 짐은 죽어서도 천하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여기 모든 무학을 융합하여 만든 이 비경이 곧 짐의 혼이다. 독존경(獨尊經)! 천하에서 가장 가공할 힘을 지닌 짐의 혼인 독존마혈공(獨尊魔血功)을 남기노라!> [독존마혈공!] 혁사린은 하마터면 독존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독존마혈공(獨尊魔血功)! 정녕 경천가공할 무공이지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초식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한계(限界)가 있으며 또한 기(氣)가 있기 때문이다. 혼신을 불사른다 해도 익힐 수 없는 무공이 바로 독존마마혈공이다. 도저히 연마할 수 없는 불가능의 무공이라고나 할까? [...!] 혁사린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것을 이대로 놓아두어야 한단 말인가? 안돼! 그럴 수는 없다. 독존경이 만에 하나 세상으로 흘러나간다면...상상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정녕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피가 사해를 뒤덮고 시체가 팔황에 널리는 가공할 혈풍이 일어날 것이다. 독존경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된다. (모든 것은 무(無), 바로 그 자체인 것을...) 혁사린은 사대천왕과 수양제제에게 애도(哀悼)의 뜻을 표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