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행장 | ||||
-1932년 2월 15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박근배(朴根培) 선생과 김인엽(金仁葉) 여사의 아들로 출생. 우수영 초등학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년 수료.
-1954년 2월 15일
통영 미래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송광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1960년 초 봄~1961년
운허스님의 부름을 받고 통도사로 가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했고 이 일을 계기로 타고난 문재(文才)를 발휘해 글을 쓰기 시작함. 한편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함.
-1967년
동국역경원 개설에 참여하고 역경위원으로 활동.
-1972년
스님의 첫 저서인 <영혼의 모음> 발간됨
-1973년
대한불교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역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으며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함.
-1975년 10월
불현듯 송광사로 돌아감. 인혁당 사건이 발생, 8명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음. 한편 반체제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송광사로 가 뒷산 중턱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행함.
-1976년
스님의 대표적인 저서 <무소유> 발간
-1984년~1987년
송광사 수련원장 역임. 1971년부터 구산스님이 시작한 송광사 선(禪) 수련회는 법정스님이 수련원장을 맡으면서 크게 확산됐다. 한해 6~7차례에 걸쳐 500여 명 이상이 참가할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고 이와 같은 4박5일간의 짧은 출가는 전 불교계로 확산, 지금은 많은 사찰에서 선 수련회를 하고 있다.
-1987년~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역임.
-1987년
미국 LA에서 김영한 보살(1999년 작고함)이 자신의 소유인 대원각의 대지 7000여 평과 건물(40여 동) 일체를 불교의 수행도량으로 바꾸어달라며 기증할 뜻을 밝힘. 이때 법정스님은 “저는 평생 주지 노릇을 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주지가 될 생각은 없다”며 완곡한 사양의 뜻을 밝힘.
-1992년
저작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져 불일암으로 많은 불자들의 방문이 이어지자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에서 지내기 시작함. 강원도 생활 17년째인 2008년 가을에는 묵은 곳을 털고 남쪽 지방에 임시 거처를 마련함.
-1993년 7월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해 정부의 종교편향 정책을 지적함. 당시 기독교인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연꽃을 제거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각 현장을 직접 확인한 뒤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함. 이 글을 통해 날로 각박해지고 메말라만 가는 인심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기 위한 시민운동을 주창함. 또한 불자들의 시주 덕분에 살아왔으니 그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이끌게 되었음. 이 글이 발표되자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실태를 파악한 후 잘못된 일이라며 시정하겠다는 뜻을 전함.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발기인 모임. 현호스님, 청학스님, 윤청광, 박수관, 김형균, 이계진, 강정옥, 정채봉, 김유후, 이성용 씨 등 지인들의 권유로 순수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시작함. 이 모임의 상징은 연꽃으로 했고, 그 도안은 고현 조선대 교수가 함.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 파리 길상사(송광사 파리 분원) 개원. 유럽 여행 도중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불자 교포들과 유학생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재불(在佛) 화가들과 함께 뜻을 모아 법당을 마련하는데 나섬. 이때 도움을 받은 화주불자들을 위해 ‘길상회’를 결성, 서울 법련사 옆 출판회관에서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선가귀감> 등을 공부했으며 이 모임은 길상사 개원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창립에도 도움이 됐다. 당시 실무는 청학스님이 맡음.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법회.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창립 기념 대중 법문을 함. 같은 해 4월4일에는 부산에서 역시 대중법문을 하여 일반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모임은 순수 시민단체를 지향, “회원 각자가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후원을 하는데 힘입어 물이 흐르는 만큼 물길이 열리듯 회원들의 성의와 뜻을 모아 우선은 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니고, 이웃과 사회를 향한 나눔을 실천하며 소중하고 감사한 자연을 보전, 보존해가는 일에 힘쓰라”는 스님의 뜻을 따라 전국 1만여 회원이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 6개 지역 모임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음.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마련,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매년 학비 지원.
-1995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조용히 정착하면서부터 김영한 보살이 거듭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힘. 네 차례나 사양하던 법정스님은 주변 사부대중의 간청을 수락해 김영한 보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함. 다만 스님 개인이 아닌 조계종단의 이름으로, 자신은 상징적인 관리자(주지가 아닌 회주(會主))의 입장에서 대원각을 기증 받겠다는 의지를 천명함.
-1995년 6월 13일
대원각 터와 건물 일체를 길상사(吉祥寺)로 창건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함.
-1996년 5월 20일
대원각 부동산 일체를 증여받음. 같은 해 6월7일 서울지방법원 성북등기소에 등기를 마쳐 법적인 절차를 마침.
-1996년 8월
청도 운문사에서 제1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임원 및 전국의 회원 80명 참석.
-1996년 9월 26일
김영한 보살의 대원각 기증과 길상사 창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킴. 당시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길상사는 창건 법회 이후까지 언론의 중심에 서게 됨.
-1996년 12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회원이 생기고 후원금이 들어오면서 모임의 공신력이 필요하다는 건의에 따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음. 이때 스님은 부득이 ‘이사장’이란 세속 직위를 받았으나 그것은 서류상의 직책일 뿐이라며 이사장 대신 ‘회주(會主)’라는 호칭을 사용함. 여기서 회주는 어떤 모임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후 불교계에서는 특정한 소임을 맡지 않은 어른 스님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게 됨.
-1997년 1월 말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길상사 자문위원회를 통해 향후의 사찰 운영방안과 마스터플랜이 세워짐. 이때 같은 해 12월14일을 창건 법회일로 정하고 차분히 개원을 준비함.
-1997년 6월 말
기존에 대원각 터를 임대한 영업주가 임대 기간 만료일인 6월 말을 넘겨 11월 초까지 영업 기간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길상사측이 이를 수락해 창건에 따른 보수 공사가 지연됨.
-1997년 8월
김천 직지사에서 제2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전국에서 120명 회원이 참석했고 3박4일간의 일정을 스님이 직접 진두지휘함.
-1997년 9월~12월
길상사 초대(初代) 주지 청학스님의 주도로 불철주야 창건 보수 공사를 실시함. 수십 년 동안 요정으로 사용됐던 흔적을 일소하고 주요 건물을 극락전, 설법전, 요사채, 후원, 시민 선방 등으로 개조하는 일에 박차를 가함. 당시 법정스님은 강원도 산골 마을에 주석하면서 길상사 창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부대중을 여러 차례 격려함.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법회. 4000여 불자가 참여한 가운데 경내 극락전에서 이계진(현 국회의원) 아나운서의 사회로 창건 법회가 진행됨. 각 언론사의 열띤 취재 경쟁 속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창건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해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킴. 이 날 법정스님은 “길상사가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길 바란다”면서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이며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는 내용의 법문을 함. 김종서, 윤용숙, 김유후, 공종원 씨 등을 자문위원으로 위촉.
한편 법정스님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은 김영한 보살은 개원 법회에 참석해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았을 뿐이니 의미가 없다”고 말해 모든 이들의 가슴에 환희심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길상화 보살의 뜻을 살려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바꾸고 이후 매년 전국의 중고교생 30명을 선정, 장학금을 지급함.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성 100돌 기념 초청 강연. 김수환 추기경의 길상사 창건 법회 축사에 답례 성격도 있음. 글 쓰는 일 외에는 좀 체로 하지 않았던 대중 법문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에 대한 책임과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회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며 격월로 대중법문을 함.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당시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이사장직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임원들의 거듭된 만류로 사임의 뜻을 철회함.
-2004년
그간 격월로 해오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의 대중 법문을 연 2회, 4월과 10월 두 번 함.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음. 그러나 이 병고도 당신을 찾아온 친지 중 하나라며 어르고 달래며 지내시겠다는 것을 친지 및 상좌들이 수차례에 걸쳐 간곡히 권유해 치료를 위해 도미함. 세계 최고 권위의 의사들조차 성공률 4%라며 치료를 주저했으나 “스님은 수행자로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친지들의 강력한 주장에 치료를 시작, 현대의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담당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회복함.
-2008년 2월
미국에서의 치료를 마치고 귀국함. 이후 다시 길상사에서의 정기 대중법문을 하고, 글도 다시 쓸 정도로 회복.
-2009년 4월
병고가 재발해 치료, 요양함.
-2010년 3월 현재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2010-03-11 오후 5:28:34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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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길상사는 박헌영 비자금으로 지었다”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주장 “되돌려 준다던 요정 대원각 주인 자야 약속어기고 ‘무소유’ 법정스님에 시주” 서울 성북2동 길상사는 익히 알려졌듯 ‘아름다운 사연’이 깃든 불교 사찰이다. 길상사는 원래 요정 대원각이었다. 한데 대원각 주인 자야(본명 김영한·1916~99)가 법정 스님의 에세이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은 뒤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는 약 2만 4000㎡(약 7000평) 규모의 대원각을 선뜻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다. 월북 시인 백석에 대한 자야의 순애보가 알려지면서 대원각 스토리는 세간에 무던히도 오르내렸다.
여기에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간’ 박헌영(1900~55) 사연까지 더해진다. 박헌영은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쪽에서는 남로당을 이끌고 월북한 공산주의 수괴로 낙인 찍혔고, 북쪽에서는 ‘종파주의자’ ‘미제 간첩’ 등의 혐의로 내몰리다가 끝내 처형당했다. 자야와 백석, 그리고 법정, 여기에 박헌영까지 얹고 나선 이는 다름아닌 박헌영의 남한 내 유일한 혈육인 원경(70) 스님이다. 경기 평택 만기사 주지인 원경 스님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백석 흠모한 자야 모종의 거래 요정 대원각은 원래 박헌영의 비자금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모 인사가 항일독립운동에 써달라며 박헌영에게 거액을 기부했고, 박은 이 돈으로 대원각을 지었다. 자야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원각을 되돌려주겠다고 원경 스님에게 누차 약속했다.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기 전인 1989년쯤에도 원경 스님에게 이 같은 뜻을 두어 차례 밝혔다. 스님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주변 지인들에게 “대원각을 돌려받으면 사찰을 세워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혼령들을 달래고, 한 쪽에는 시민학교를 세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자야는 1997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덜컥 시주해버렸다. 한사코 거절하던 법정 스님은 결국 시주를 받아들이면서 일정액, 정확히는 50억원을 떼 자야가 평생 흠모한 백석의 기념사업에 내놓기로 했다. 원경 스님이 더러 사석에서 대원각이 자신의 아버지(박헌영) 소유라는 말은 종종 했지만 “(박헌영) 비자금으로 지어졌다.”며 구체적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과연 원경 스님의 ‘충격 증언’은 사실일까. 비자금의 특성상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지만 일단 추적해보기로 했다. 첫 힌트는 1915년 박헌영의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입학 학적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박헌영의 신원보증인으로 ‘조용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양반’이며 ‘관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용구는 가난하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 충남 예산 시골 출신 박헌영이 경성고보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후 내내 정치적 후원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 뒤 몰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번째 힌트는 길상사 등기부 등본이었다. 등기부에 따르면 자야가 길상사 땅을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조봉희’라는 사람이었다. 원경 스님은 “조봉희가 바로 (박헌영의 후원자였던) 조용구 집안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자야가 대원각 땅을 취득한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으로 몹시 혼란스러울 때였다. 당시 그녀는 정계 실력자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 모든 정황을 감안하면 박헌영이 자기 사람(조봉희)을 가짜 명의로 내세워 대원각을 지은 뒤 자야를 비자금 세탁창구로 이용했다는 원경 스님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 ●법정스님 입적후 미궁속으로 하지만 진실의 한 끝자락을 쥐고 있을지 모를 법정 스님이 지난 5월 입적하면서 대원각 미스터리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됐다. 자의반타의반 어린 시절 출가(出家)한 원경 스님은 “그 땅(대원각)을 운용하지 못한 것도 인연이자 업보”라면서 “나의 작은 그릇에 담기 어려운 큰 내용이 오려고 하자 인연이 일부러 뒤틀린 것 같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어찌됐든 대원각을 둘러싼 그간의 미담과 지고지순한 러브 스토리에 개운치않은 뒷맛이 남게 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3102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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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병원비 홍라희 여사 대납
관련 기사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31209294883938
삼성의 언론 플레이 비판 :
http://cafe.naver.com/raz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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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유언장 초재 후 길상사에서 공개, 무소유 등 법정스님의 책은 절판(법정스님 유언장 전문) _ 링크
http://blog.naver.com/dualgundam?Redirect=Log&logNo=30082649434
ytn)법정스님 '무소유' 한 권에 21억 원?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1327&key=201003230446328113
관련 비판
법정스님은 결코 소박하고 도량이 넓은분은 아니라고 생각드네요 돌아가시면서도 그런유언을 남기셨다면 자기 개인주의가 너무 심하네요 차라리 어려운처지에 있는 불쌍한 이들을 위하여 책판매수익을 불우한많은이에게 남기셨다면 이렇게 품귀현상도 없을것이고 진정한 무소유를 느끼면서 모든이들이 볼수있게 하는게 도량인것으로 압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자신의 명예욕으로 가득차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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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전 총리의 블로그 법정스님 애도글 전문
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한명숙 전총리가 14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최근 타계한 법정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한 전 총리는 "제 육신이 법정에 매여 있던 그 시간, 스님께선 무소유의 淨土로 떠나셨습니다"면서, "배웅도 못해드린 것이 못내 죄스러워 뒤늦게 이런 글이라도 올리면, 마음의 짐이라도 좀 덜어질까 싶었습니다"라고 적었다.
다음은 법정스님을 추모한 한 전 총리 블로그 글의 전문이다.
법정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3월의 하얀 눈이 봄볕에 녹고 있던 그 날,
제 육신이 법정에 매여 있던 그 시간,
스님께선 무소유의 淨土로 떠나셨습니다.
배웅도 못해드린 것이 못내 죄스러워
뒤늦게 이런 글이라도 올리면, 마음의 짐이라도 좀 덜어질까 싶었습니다.
탐욕과 거짓에 물든 권력이 사람들의 삶을 거침없이 유린하는 이 땅엔 저희들만 남았습니다. 이제 어떤 스승에게 청빈과 상생의 지혜를 구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돌아보니 스님을 처음 뵈었던 것이 1970년대 초, 강원용 목사님과 함께 하셨던 종교간 대화의 자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스님과 목사님은 종교를 넘나드는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어 하셨고, 마침내 한국 최초로 ‘6개 종교 지도자’들의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스님께선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에 어느 분보다 열심이셨습니다. “사람을 갈라놓는 종교는 좋은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가 아니다.” 스님의 말씀입니다.
스님께선 속세의 불의에는 두 눈을 부릅뜨셨습니다. 각계 인사 일흔 한 분이 참여했던 ‘민주회복국민선언’에 불교계에선 유일하게 서명하셨습니다.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을 이끌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스님께서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을 받은 뒤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박해를 받으니 증오심이 생긴다. 증오심은 마음의 독이다.” 사람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 은둔하신 스님을 뵈러 송광사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 생각납니다.
송광사 산길을 따라 걷다보니 허름하고 조촐한 암자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님께선 바람소리 청정한 그 곳에서 손수 밥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밖에서 느닷없이 “어처구니가 없네”라고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던 저희들 에게,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다.” 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아!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 나왔구나....
‘어처구니’의 의미에는 ‘상상 밖의 큰 사람’이라는 뜻도 담겨 있음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스님께선 이 시대 이 나라의 ‘어처구니’이십니다. 어처구니를 잃은 중생들이 스님의 법체를 따라 송광사로 운집해 눈물짓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스님을 이승으로 다시 모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속인의 욕심일 뿐이겠지요.
떠나신 자리가 너무나 크고 쓸쓸합니다. 혹시라도 누가 될까 병문안도 못 드린 채 스님을 보내드린 제 처지가 한없이 서글픕니다.
스님, 진실이 거짓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날, 송광사 뒷산 불일암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맑은 바람 소리와 개울물 소리로 맞아주십시오. 향기로운 가르침으로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의 탐욕과 증오를 말끔하게 씻어주십시오.
스님의 극락왕생을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2010년 3월 14일
한명숙 올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13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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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관련 기사/글 모음 _ 링크
'무소유' 법정스님 길상사에서 입적_뉴스모음
http://blog.daum.net/djagustnr/16904709
http://womant30.blog.me/101844965
ytn)"'무소유'만은 소유하고 싶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289473
안과의사 이야기
http://blog.naver.com/dr_s?Redirect=Log&logNo=90084125198
"빈 마음이 진짜 본 마음 텅 비어야 울림이 있다" _어록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31193851
문화예술종교인 16명이 추모한 법정스님_'맑고 아름다운 향기' 출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621212
류시화 "법정스님, 눈쌓인 산 보고싶어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164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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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홈페이지
길상사 : http://www.kilsangsa.or.kr
맑고향기롭게 : http://www.clean94.or.kr/
법정넷 : http://www.beopjeong.net/
글모음 : http://kr.buddhism.org/bbs/bud/pub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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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대한불교>(<불교신문>의 전신)에 실린 법정스님의 투고,
<부처님 전상서>를 올립니다.
그렇잖아도 이 글을 찾고 있었는데
저를 끔찍이 아껴주는 선배님이 한글로 입력된 것을 화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수십 년 전의 고민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거듭해서 문제와 그 해결방안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 향산 합장
부처님 前 上書
法 頂
序章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深山에 樹木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無心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黙黙히 지내려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한 心情을 당신에게라도 목소리 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韓國佛敎徒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懺悔를 드립니다. 당신의 弟子된 使命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 無爲徒食하고 있다는 處地에서.
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緣由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韓國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이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亡命해버린지오래이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弟子라는 이름은 마치 鬪爭堅固時代의 標本같은 群像들로 채워져 있다고도 합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弟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政治家들처럼 不信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理由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은은 結実과 收獲의 季節이라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는 結實할 밑천도 거두어들일 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期待할 수도 없는 일이지반, 이 不毛의 荒蕪地에 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所望에서, 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作業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來日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自身의 질환에 대한 診斷같은 作業을 - .
敎育의章
부처님!
「大韓佛敎曹溪宗」이라는 ○○下에서는 걸핏하면 三大事業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마 만큼 그 일은 時急한 저희들의 課業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緊要한것이 당신의 慧命을 이어받을 수 있는 人材를기르는 敎育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祝文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實際로는 거의 無視되고있습니다. 지금 몇몇 寺院에서 벌리고 있는 講堂이나 禪房이라는것도 眞正한 意味에서 당신의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人材」를 양성하기위서라기보다는, 한낱 道○莊○정도로 차려 놓은 것이 不過한印象들입니다.
그것은 實로 「敎育」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前近代的인 遺物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妥當한 方法論도 具體的인 計劃性도不在합니다.
사제. 교육의 기초기관인 講堂에서 현재 遊行되고있는그 方法이란 철저하게 ○○的인 그러니까 한문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習俗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라스를 全擔해가지고 講을하고있으니, 全體學人을 命令一下에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 자신의 육체적인부담과 精神的인 失○, 그리고 講받은사람들의 선취할 건덕지가 얼마나 있을는지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展[履]歷 科目이라는게 李朝 中葉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被敎育者의 智能 따위는전혀 무리하고 또 時代的인 要求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無批判하게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 동안에 배워 마친다는 定해진 期間도없이 -. 이처럼 무모한 <敎育?>이 어느 다른 社會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종교인>으로서 어떠한 使命을 해야 할 것인지를, 風聞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끼친 목소리를 듣기위한 훈고적인 文字의 傳達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現代라는 時點에서 소위 一切衆生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宗敎敎育이라면, 生動할 수 있는 使命感을 불러 일으켜주는 것도 哲學이 頭腦의 領域이라면, 종교는 心臟 領域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自身은고사하고 어떻게 이웃을 올려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당신의 弟子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우리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所見에만 固着된 이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禪房이란곳에서는<不立文字>의 本來意志를 曲解한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基礎敎育도없는 이들을 함부로 받아들여 禪 自體에대한 誤解마저 초래케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禪이 修行의 ○○目的이아니고, 그것이 깨달음(○)으로 向한 한낱 方便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視野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門에틀어선 初○信者에게있어서는 -.
<莫存知解>라는 말과 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軌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參禪者가 禪에<參>하기보다는 禪에 <着>하기가 일쑤이고, 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獨善的인 壁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自樂을삼는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重要한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오늘 이 社會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 가르치시겠습니까?
이러한 敎育 以前의 不合理性 때문에 이 나라의 市井에 있는 절간에 가면 奇異한現象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沙彌僧들이 그늘진 表情으로 二重生活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緇衣를입고 절문 밖에서는 俗衣를입는 -.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動物처럼. 佛前에서 목탁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學館의 門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一念에서 이처럼 어설픈 向學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또 그들 學○의 出路란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三寶에 喜捨한 淨財가 잘못 流○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 둔> 信徒들이 紙○에 依存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信徒가 돈을 쥐어줄 때 그것으로서 世俗의業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造業으로 그 健全한 ○向을 바랄 수는 없습이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의 業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求道의 門안에 들어섰던 그들이 道業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俗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山寺에서 간신히 履修課程을 마친 學人들이 外典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名分아래 下山한 뒤로는 거의가 不歸의 僧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數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未來를 期待해야할 젊은 世代間에 -.
이와 같은 不愉快한 現象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른 체 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불교계에는「急造僧」이란 前代未聞의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僧侶라면 一般의 指導的인 立場에 서야한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常識입니다. 그런데 그 資質 如否는 고사하고 一定한 修業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削髮과 衣裝 交替가 너무나 신속하게 進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弟子로서의 品位나 處身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落後된 經濟社會에서 不渡가 나버린 空手票처럼 -.
더구나 이들이 寺院을 主管하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修道비슷한거라도 치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家出以前의 世俗的인 行動擧止가 그대로 殘存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新聞의 三面에서는 가끔 「似而非僧」이란 記事거리와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寺院에서는 처음 入山하려는사람의 學歷이 學部出身이거나 좀 머리가 큰사람이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家風이나처럼 -.
거절의 理由인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表面的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벅차서일 것입니다. 우선 知的인 水準이 이쪽보다 優勢하기 때문에 하나의 劣等意識에서 拒否하는것입니다.
그 한 反證으로서 人間的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年少者는, 그나마 勞動力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求道者로서의 資質과 未來像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修道場을 經營하고있는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韓國佛敎의 表情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惡貨가 良貨를 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너무나 肥大하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宗團의 議決機關인 中央宗會에서는 몇 군데 計劃的인 修道場으로서 叢林을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無秩序가 建材하고있는○地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期待할수 있겠습니까?
黃色의자
부처님!
세상에는 「벽감투」란 말이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資格없는사람에게 갑자기 얻어 걸린 높은 벼슬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에서는 五慾中에 하나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世俗을 여의었다는 당신의 제자들도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버티기를 세속사람들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을 요즈음 흔히 봅니다. 마치 그런 감투나 뒤집어쓰기 위해 이 門안에 들어온 것처럼 -.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분수도 돌아보지 않는 채 노랗게 탐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政權을 탐하여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는 저 마키아벨리즘의 무리들처럼, 말로라도 세상의 慾樂을 떠나 出家修道한다는 이들에게 무슨 「長」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일이 전혀 自意아닌 他意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行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個中에는 個人의 修業을 온전히 희생하고 大衆의 外護에 全力을 다 하고 있는 보살의 化現같은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오늘날의 社會構造로 보아 本意는 아니나마 「긴 의자」에 걸터앉아야 하고 寺院의 運營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三寶의길에 들어섰으면 어디까지나 佛弟子된 분수와 出世間的인 立場에서 사심 없이 公正하게 執務해야 할 것임에도 三寶의 淨財를 함부로 탕진하고 나아가서는 승려로서의 本分을 離脫한 채 社會的으로 不美스런 物議를 일으키고 있는 事例를 우리는 그 동안 드물지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基本財産이 좀 여유 있거나 樹林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우리는 불행하게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 底意는 얼마 안가서 結果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喜捨凾을 치워라
부처님!
당신의 聖像이 모셔진 法堂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통(喜捨凾)이라는 怪物입니다. 이 怪物의 番地는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市井이나 山中에 있는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近來 寺院의 무슨 악세서리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難處해 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는 상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着板>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데』라고 -.
四十九年 당신의 長廣舌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계셨습니까? 福德이라는게 화폐로써 척도할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邪敎가아닌 無上한 正法임에도 -.
누가 보든지 낯 간지러운 이怪物은 時急히 철거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像이 모셔진 코앞을 비켜서만이라도 -.
極樂行 旅券
부처님!
極樂行 旅券을 發給하고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暗黑의 계절 中世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절>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大刹들에서 버젓이 백주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夜市場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걸쳐서.
『極樂으로가는 車票를 사가시오』하고 -.
당신의 옷을 입고 당신이 말씀해놓은 敎理를 공부하는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당신을 파는 이런 짓을 얼굴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뻔뻔스럽게 恣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邪敎에서나 있음직한 惑世誣民의 所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이 橫行해야 되겠습니까? 마치 中世 歐羅巴에서 한동안 致富에 餘念이 없던 살찐 가톨릭의 聖職者들이 <免罪符>라는 부적을 만들어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짓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쪽에서는 宗敎改革의 한 불씨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이 고장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하도 많기 때문에 感觸이 마비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는 가끔 억울하게도 迷信과 同계의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佛事의 正體
佛事라는 行事가 요즘에는 왜 그리도 많습니까? 걸핏하면 「百日기도」․ 「萬人同參기도」․ 「菩薩戒 살림」․ 「가사불사」․ 탑에 물방울정도 튀기는 「洗塔佛事」 ․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僞造紙幣까지 發行해 가면서 하는 도깨비 놀음 같은 「豫修재」 등등…. 이 밖에도 일찍이 보고 듣지도 못한 별의별 희한한 佛事들이 정말 비 뒤의 竹筍처럼 여기저기서 잇달아 ○行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佛國世界가 到來하는가 싶게 -.
佛事라는 본래 뜻은 諸佛의 敎化를 가리킨 것으로서 開眼․上堂․入室등에 주로 쓰인 말인데, 요즘에는 흔히 僧侶들의 日用事세로 落着된 感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佛事의 본래 뜻에 합당한 佛事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흔히 佛事란 이름을 내걸고 실속은 엉뚱한데 있는 佛事 아닌 「不事」를 자행하고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求道者의 良心에 비추어보아 떳떳할 수 있는 法다운 佛事가 얼마나 될는지 지극히 疑心스럽습니다.
『중이 돈이 아쉬우면 멀쩡한 축대라도 헌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코 웃어넘길 수 만 없는 가슴을 찌르는 퉁정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法會>라는 모임이 있을 때면, 으레 그 끝은 두둑한 「勸善冊」이 나돌기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몇 가지씩. 결코 「喜捨」일 수가 없도록 半 强要하는 눈초리를….
財貨를 다수 내놓으면 흔히 말하기를 『信心이 장하다』고 합니다. 財貨가 信心의 바로미터일 수가 있겠습니까? 佛事라는 美名 아래 信徒들은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순진한 信徒들은 敎化를 입기보다는 經濟的으로 出血的인 흑심한 取○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돈도 없는 사람은 절에도 나갈 수 없더라』는 非佛敎的인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가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僧侶의 總數가 얼마나 되는지, 그 가운데서 修道에 專念하는 의젓한 求道者가 몇이나 되는지, 關係 機關인 中央總務院에서도 集計를 못하고 있는 實情입니다.
이에 反해서 布敎堂을 비롯해서 信徒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절간에서는 信徒의 一○ 카드가 어느 市廳의 戶籍事務 못지않게 질서 정연히 정비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극성스러운 곳에서는 카드에 金錢出納의 記載欄까지 만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런 짓을 布敎의 使命처럼 착각하고 있는 두꺼운 顔面神經을 가진 당신의 弟子들이 許多합니다.
佛事라고 당신의 이름을 팔아 ○行되는 그 表面에는 얼마나 셈 빠른 打算이 오르내리는지, 부처님도 아시게 되면 얼굴을 붉히시리다. 속이 유리 속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이 어설픈 수작들은 休日이 없습니다.
부처님!
그리고 이런 無慈悲한 橫暴도 있었습니다. 市井에서 어떤 모임을 보면 너무나 世俗的인 動作들에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 숨 막히는 組織社會에 염증이 나서 어쩌다가 당신의 門을 두드린 사람들을, 문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다시 組織속에 얽어매려는 先參人들의 橫暴가, 무자비한 橫暴가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피곤한 나그네에게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트인 길조차 막아버려야 하다니! 싱싱하게 이끌어 주어야 할 求道의 길을 짓눌려버려야 하다니!
더구나 이쪽이 物質的으로 여유 있다는 것을 先參人들이 추○했을 때, 그들의 食慾은 왕성하게 動해서 상대방의 의사도 아랑곳없이 감투 뒤집어씌우는 이 노란 術策! 그 잘난 <信心>이라는 코걸이를 미끼로 내세우면서…. 우리는 그러한 모임에서 어떻게 純粹한 宗敎活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즘 항간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라독스가 떠돕니다. <큰스님>의 體重이란 法力이나 道德의 比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信徒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歸依한 純白한 信仰人을 마치 하나의 財源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부처님!
佛事만은 더럽혀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이 <不事>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말로 時急하고 緊要한 佛事라면, 한시바삐 이 衆生의 탈을 벗고 또한 벗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寺院이란 그 어느 特定人의 所有거나 個人의 邸宅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明白한 常識입니다. 오직 修道者가 道業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琢磨해 가면서 精進해야할 淸淨한 道場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寺院이 小數의 特定人에 依해 修道場으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傾向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네 <패거리>의 食性에 맞는 몇몇이서만 도사리고 앉아 굳게 門을 걸어 닫고 外部와의 交通을 차단한 채 해져가고 있습니다. 全體 修道者의 廣場이어야 할 이 修道場이 -.
따라서 엄연하게 大衆이 모인 會上임에도 大衆의 意思가 無視되기 茶飯事이며 결코 健全한 것일 수 없는 個人의 협착한 所見이 全體大衆의 이름을 詐取하여 제멋대로 行使되는 수가 많습니다. 從來로 우리의 淸白家風인 <大衆公事法>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으니 이것은 곧 和合과 淸白性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나 구역이 나는 것은 <眷屬觀念>이라는 그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惡臭 -. 그래서 圓融한 會中이어야 할 大衆處所가 <獨살이>로 轉落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世俗을 떠났다는 이 出世間에서까지 튼튼한 빽이 없이는 방부조차 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雲水를 벗하여 훌훌 單身修道에만 專念하던 납子들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定着할곳이없어 여기저기 彷徨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所謂 獨身修道한다는 이 比丘僧團의 會上에서 淨化 以前이나 다름없는 냉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寺院은 마땅히 修行하는 이의 집이어야 할 것임에도 -. 個人과 椅子(職位)의 限界는 엄연히 區分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法이 선 社會의 秩序입니다.
그런데 어떤 部類들은 이 한계마저 무시하고 個人이 의자의 힘을 빌어 權力같은것을 神經質的으로 휘두르기가 예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녁노을만치도 못한 하잘 것 없는 權勢라는것을. 더구나 諸行無常을 뇌이고 하는 이 出世間에서 -.
그래서 大衆이 모인 會上에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 내어 모처럼 찾아갔던 初學人들도 발붙일 곳이 없어 되돌아가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저마다 <獨살이>인 自己領土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여 求道의 빛은 바래져 가고 使命感도 내동댕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닌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
부처님!
이런 시시한 일들에 탐착하자고 저희들이 문안에 들어선 것이겠습니까? 頭骨의 크기와는 당치도 않은 감투나 뒤집어쓰고 우쭐거리자고 出家한 것이겠습니까?
부처님!
당신에게 올리는 이 글도 이제는 그만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높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글을 읽은 사람이면 대개가 유쾌한 隊列에는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자신부터 유쾌한 기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입을 빌어서든지 이러한 自己批判쯤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혼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歸蜀途의 외침이라도 있어야겠습니다.
求道의 길에서 가장 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勢로써 僞裝할 것이 아니라, 時時로 自己 位置를 돌이켜보는 懺悔의 作業일 것입니다. 自己 反省이 없는 生活에 밝은 未來를 期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韓國佛敎가 宗敎로서의 使命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現代와 社會에 이바지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何等의 存在價値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 지 千六百 년! 오늘처럼 이렇게 병든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물을 것도 없이 弟子된 저희들 全體가 못난 탓입니다. 늘 당신에게 罪스럽고 또 어굴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처럼 뛰어난 당신의 가르침이 오늘날 저와 같은 弟子를 잘못 두어 빛을 잃고 또 誤解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히다시피 저의 이러한 作業이 이웃을 헐뜯기 위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開口則錯>이라는 말을 저는 늘 信해오고있는 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開口하여 한량없는 口業을 지은 것, 외람되게나마 眞理를 向해서 道程하고싶은 저의 信念에서입니다.
韓國佛敎의 健康은 저희들 弟子의 共通한 悲願입니다. 無關心처럼 비참한 對人關係는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無關心이 求道者의 周邊에뿌리 내릴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罪惡일 수도 있습니다. 一切衆生에게 주어진 당신의 慈悲가 無關心의 所産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주제넘게 高聲으로 지꺼린 것입니다. 이 혼탁을 어서 벗겨야한다는 悲願에서 버릇없이 당신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과감한 一大改革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永永 窒息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박차고 나섰던 저 혼미한 브라만들에 對한 「否定의 決意」가 없고서는 -.
위의 글에서 좀 지나치리만큼 無差別한 사격을 加한 것은 우리들이 當面한 오늘의 現實을 直視하자는 뜻에서였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自身의 아픈 곳을 向해 自虐的인 사격을 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밝혀드릴 것은, 얼마 전에 이글을 쓰다가 부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中斷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저의 한 고마운 道伴이 격려해준 힘을 입어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비 개인 그 어느 여름날처럼 당신 앞에 가지런히 서서 業을 같이하는 道程의 청정한 인연에 조용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摩訶般若婆羅密. 1964년 9월
迷弟子 法頂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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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들의 감성과 상견을 부추기는 글과 행위들만을 남기고 가셨네요
아 이 분 참 바쁘게도 사셨네요. 수행할 시간도 어디 있었겠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