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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알면 모두 통하는 법. 공부하는데 가장 긴요한 요체는 하나를 바로 알면 다른 것도 바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어름하니까 다른 것도 어름해지는 법입니다.
그래‘불법이 무엇이냐’, ‘도가 무엇이냐,
‘중노릇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도 하나를 바로 알면 거기서 다양한 변용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설사 팔만대장경을 전부 외운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모르고 외운다면 모르는 사람과 한치도 다름이 없는 것이지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배우지 않더라도 조금만이라도 올바르게 배운다면 거기에 팔만대장경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배우고 경을 외우고 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옛 조사 스님들도 문자나 경을 무시하거나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많이 배우되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이치가 있으면 점차적 계단이 있는데 사람들은 문자에 집착해 철사처럼 얽히어서 실천문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 병통을 고치기 위해서 팔만대장경을 똥 막대기다, 코딱개다, 가랑잎이라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사법은 부처님 법을 떠나서 법을 설하는 것도 마구니요,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허물이 많다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문자는 성불에 이르는 노정기에 해당합니다. 실물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지 실물이 없다면 그림자가 나올 수 있습니까.
진짜가 있으므로 해서 가짜가 있고, 안이 있으므로 해서 바깥이 있는 것이니, 외도라는 것도 진실한 해탈법이 있기 때문에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여의 법은 둘로 나누어서 분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절에 들어오는 일 주문에서 그 비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주라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 아닙니까?
절 입구에 일주문은 말 없는 가운데 불이법(不二法), 즉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응변해 주고 있습니다. 상대가 끊어진 자리, 참으로 하나마저도 떠난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글자를 모르더라도 이 하나의 자리를 바로 알면 내내 이 속에 팔만대장경의 소식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분별심과 집착을 버리는 공부 다 아시다시피 불법의 목적은 성불하는 데 있습니다. 부모를 버리고까지 이 문중에 들어왔는데, 나는 글을 배워야 하고 도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깨쳐서 성불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렇게 무엇인가에 집착하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스님 노릇을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 하나만 바로 알면 만사가 태평이고 이대로가 극락인데 자꾸만 나라는 것에 집착하니 발전성이 없고 괴로운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 허망한 나를 위해서 스님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불법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불법을 위해서. 불법이라고 하면 일체중생과 다생부모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의 삿된 소견을, 무아(無我)의 정신을 가지고 나라는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 글을 배우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부터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무심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를 완전히 비워낸 사람을 세상 어떤 것도 당해내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삿된 소견으로는 무엇을 하든 그것은 죽은 말이요, 세상 법이요, 사구(死句)인 것입니다. 활구(活句)가 아닌 사구(死句),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 스님 말씀도 분별심으로 따지는 것은 전부 사구(死句)인 것입니다.
활구란 우리 마음속에 활발하게 살아가는 진여의 성품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찾고 궁구해야 할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분별심을 떠나는 것이 곧 활구이니,
우리는 활구 정법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일까요. 그것은 세상 법하고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속세법이란 분별심으로 따지는 법이고 우리가 갈 길은 분별심올 떠나는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분별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입으로 몸으로 분별심을 내어 누에 고치가 실타래를 풀어 자기 몸을 감싸듯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죄없는 자리, 청정한 법신(法身) 자리에서 본다면 글 배우는 것도 남올 위하는 것도 기능적 일을 익히는 것도 해탈법을 떠나서는 죄짓는 일이고 업을 증장하는 일입니다. 언제 청정 자성(自性)에 무슨 선(善)이 있고 복(福)이 있고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부처가 있고 범부가 있다고 그런 말을 했던가.
그것은 소승법에 다름 아닙니다. 불가피하게 문자를 의지하고 방편을 의지하는 것이지,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이 시간도 우리는 업을 쌓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쓰고 못 쓰고는 회향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나쁜 것이라도 좋게 쓰면 산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글을 배우고 부처에 이르는 노정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 법은 오늘 하루 배우면 얼마만큼 쌓아지는 것이 있는데, 도라는 것은 쌓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없애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 절에서 속가에서 배운 것, 모두를 다 없애는 공부하는 것이 도 닦는 것(참선)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분별지(分別智)는 태평양 바다에 싹 쓸어 넣어버리고 훨훨 타는 불 속에 멋지게 태워버리는 것이 참선이요, 해탈법이요, 대 자유법입니다.
그러니까, 글을 배우면서도 우리가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나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견(我見), 나의 소견은 무조건 없애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두니까 네가 생기고 주지가 생기고, 나라가 생기고, 민족이 생기고, 주의가 생기고, 파벌이 생기는 등 경계가 천차만별로 일어나서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허물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예요. 부처님은 정각 이후 중도제일(中道第一)이라 해서 가장 먼저 평등을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초발심자경문 끝에서도 성불하려는 사람은 평등심을 버리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나요? 분별심으로 하는 것은 전부 나고 죽는 법이니 착한 일했다는 상이라도 내면 이는 업만 하나 더 증장하는 일이 됩니다.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도와 봐야 인간적으로 작은 선은 될지언정 상대가 끊어진 청정한 선(善)의 자리에서는 결코 세간의 선은 이름이 선이지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생을 위해서 포교도 하고, 불사도 하고, 불법 문중에 여러 가지 면으로 도와줄지언정 그런 일을 해서 내가 선업을 쌓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조그만 일에서부터 큰 불사에 이르기까지 내가 불자니까, 나는 불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니까 도와줄 따름이지, 분별심을 내어 기쁜 마음을 내거나 그것에 대하여 나중에 과보를 바란다면 생사에 업을 더하여 생사고(生死苦)를 받는 죄업만 커져 버립니다. 이토록 상대가 끊어진 청정한 자리를 궁구하는 해탈법은 세간적 알음알이로 미치지 못하는 장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대 자유 해탈법은 근본에서 궁구해야 하며 이러한 대 자유 해탈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근본을 챙겨야 합니다.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나 쉽고 어렵고는 법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 있는 것이라서 모를 때는 어려운 것이나 알면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세상에 제일가는 낙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떤 이는
“봄이 돌아와 꽃 피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하니
“사계절의 조화로 봄은 생하는 때이고 가을은 멸하는 때이다. 일 년이 채 못가서 낙엽이 되고 죽을 것은 죽는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의지할 것이 되겠느냐.
러니 네가 어리석다.”
또 어떤 이가
“음식을 장만해 놓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니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요 회자(會者)는 정리(定離)라. 태어난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고 만나서 사랑하는 자는 이별을 면할 수 없으니 그 며칠이나 간다고 의지할 것이 되겠느냐? 그러니 네가 어리석도다.”
또 어떤 이가 “재보가 제일이다”하니 “많은 재산을 가지고 말 타고 북 치면서 호의호식하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것이 즐거운 것 같지만, 개천에 물이 차면 마를 징조요, 장마가 지나면 가물 징조 해가 뜨면 넘어갈 징조요, 달이 차면 기울어질 징조와 같이 흥망성쇠가 정해진 세상인데 네가 그 며칠이나 산다고 의지할 것이 되겠느냐? 그러니 네가 어리석다” 하셨습니다.
또 부인을 자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주의하셨습니다.
“밤이 오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다시 밤이 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격으로 친한 사람이 원수 되고 원수가 친한 사람 되는 법이다. 친한 사람을 내놓고 원수란 절대 없는 것이니 너의 부인들이 지금은 네가 젊고 돈이 많으니 너를 따르고 있지만, 평생 네 말에 복종할 것 같으냐, 그러니 네가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진정한 낙이라는 것은 무심 경계 진여문-생멸문품 떠나 열반문에 들어가 열반락을 받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낙이 되는 것이다”라고 간곡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별심으로 사는 우리 중생들이 지금은 네 가지만 들어서 말씀하셨지만 사십 가지, 사백 가지 등 무수한 욕망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를 채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산 넘어 산, 물 너머 물이요, 괴롭고 부족한 것이 또 나오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엽적이지 근본적인 낙이 아니니 언제든지 근본을 두고 따져야지 근본을 망각하고 부분적인 면에서 차별적으로 단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밤낮 속게 되는 것입니다.
일념으로 수행의 길로 정진하는 마음의 우리 비구나 비구니 스님네들도 업보 중생이라서, 법문을 들을 때나 책을 볼 때는 근사하지만, 다생에 익힌 버릇이라서 식욕에도 재물에도 여색에도 속고 놀아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문중에 들어와 해탈하기 전에는 나만 괴로울 뿐 아니라, 내 눈이 어두워 남도 괴롭게 만들어 동쪽에 태어나고 서쪽에 태어나서 남을 끌고 다니면서 괴로운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정말 어쩌다 이렇게 불연을 만나 스님이 되었나, 말로만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고생을 해도 좋고 남한테 천대받아도 좋다, 나는 바른길을 만났다. 어쩌다 이런 살길을 만났나, 이 길을 걷는 것은 백번이라도 그야말로 좋다.
위법 망구라, 천 번 만 번을 죽더라도 이 길은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이런 생각이 딱 들어서 스님 노릇을 하게 되면 어디를 가든 다 맞는 것입니다. 동쪽에 가도 서쪽에 가도, 천상에 가 봐도 지옥에 가 봐도 안 맞을 일이 없습니다. 내가 스님이다 중이다. 하고 다니지마는 껍데기뿐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중노릇하면서 과연 중물이 얼마나 들여졌나를 살펴보고 살펴볼 일입니다.
절을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을 하는 바른 뜻만 바로 알아도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하는 절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무명심을 조복 받고 지혜를 밝히자는 절이요, 해탈하는 절인 것입니다.
절 하나 데도 그러한데 우리는 자세를 생각하고 명리를 생각합니다. 요즘은 물질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몸을 위해서 사는 것 역시 물질주의요 죄업일 뿐입니다.
살생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파계하지 않아도 몸을 위해 사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해태심으로 소일하거나 도를 닦지 않고 명리를 위해 중노릇하는 것은 부모를 죽인 죄보다도 크다고 했습니다.
항하의 물로 씻어내려 해도 그 죄는 다 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설사 글을 배우고 경을 대한다고 하여 정법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도 중이 아니면 소도 없어지고 지옥도 없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입니다. 참으로 이런 생각이 몸에 배어 있으면 무슨 공부를 하든지 맞지 않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의 길을 지어가면 강당에 있든 대중 생활을 하든 참선하든 맞지 않는 게 없습니다.
이런 생각 없이 속인 생각을 가지고 중노릇을 하니까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오늘날은 물질 만능의 세계이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은 예전보다 오히려 나아져 덧없는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데 훨씬 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하더라도 도를 닦는 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요, 못 먹어서 공부 못하고, 못 입어서 성불 못 하지는 않습니다.
도를 깨닫는 것은 잘 먹고 편안히 잠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잘 먹고 편안히 사는 데에 무슨 도를 깨달을 일이 있겠습니까. 말법 시대에 태어나서 참으로 발심한 마음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위산 스님은 대중이 집을 고쳐 달라고 하자
“이 사람들이 아랫목이 새면 윗목에서 공부하고 윗목이 새면 삿갓을 쓰고 하지. 설사 노지처(露地處)면 어떻겠냐? 도를 닦는 데는 잘 먹고 편히 자는 것에 있지 않다. 못 먹고 못 사는 데서 도 닦고 깨달을 일이 있다. 옛 선지식 스님의 가풍을 살리기 위해서 허락할 수 없다.”
그래서 그곳 대중들은 천정이 없어지고 벽이 없어진 곳에서 삼동의 추위에 고드름이 주렁주렁한 곳에서 몸이 오그라드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옛 스님들의 가풍을 생각하고 오직 정진에 열심히 했다 하지 않아요. 오늘날같이 풍요로운 시절에 대강백이 나오지 않고 투철한 학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 스님들은 공부를 지어가는데 일념으로 간절히 정진해서 글을 배우는데 글이 온통 자기 몸이 되고 완전히 자기 말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까. 곧 글과 자기가 따로가 아니라 온전히 글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공부를 지어간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남이 알든 모르든 오직 일념으로 투철히 공부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여건이 좋다 나쁘다 따질 것이 아니라 항상 나 자신의 허물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도록 힘을 써서 정진하는데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해인승가대학 특강중에서 발췌-
소참법문이란
불가(佛家)에서 조실스님이 대중 스님에게 수시로 정진의 요긴한 점을 일러 주는 독특한 가풍입니다. 상당 법문이 법당에서 격식을 갖추고 깨달음의 본질을 설하는 것이라면 소참 법문은 아무 때 어디에서나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잠자는 믿음을 일깨우고 전도된 가치관에 지혜의 빛을 주는 살아있는 법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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