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소금 2024년 봄호 신인 추천-홍성주 시인
누에잠을 앓다 외 2편
남쪽으로 내려가요
삼팔선을 넘어가면 온통 지뢰밭이지요
이빨 사이로 새는 신음 소리
철책을 넘나들었죠
아, 개구멍은 안 돼요
따닥따닥 심장 볶는 소리에
콩닥콩닥 머리가 울려요
저절로 온몸에 잔뜩
힘이 쥐어지네요
떨리지 않는 척은 무척 힘이 들어요
방공호 밖으로 나가면 안 되겠죠
선은 넘지 말라고요, 제발
분계선은 37도이지요
실수로 넘은 거면 셋 셀 동안
다시 넘어가 버려요
하나, 둘, 셋
빵야!
타이레놀 두 발
쏴버리고 말았네요
체온계인들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잘 때마다 껍질 벗는 누에잠처럼
사락사락 허탈한 만큼 낙엽이었어요, 며칠
자정의 스위치
잠시 묵념, 한 소절 레퀴엠도 없이
매일 죽는 오늘에게
슬금슬금 어스름 저녁이 불빛을 데려온다
잠을 여는 찰나에 꾹꾹
침 발라 써 내린
몽유의 그림자가 유리처럼 굳는다
구부정한 하루
눕지도 못한 채 자근자근 밟힌다
밟고 두드려도
펴지지 않는 속옷의 깊이
아무도 모르리라 쓴다
다시 깨어나지 못해도 언제나 오늘
내일은 별책 부록쯤으로 남겨둬야지
흐르는 기억이
자정의 스위치를 내린다
어제는 잠깐 졸다 만난 환영일지도 몰라
내일은
말쑥이 다려놓은 슈트를 입을 거야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로
다가오는 초침
접힌 기지개가 젖은 햇살을 들어 올린다
차렷
오늘인 거야, 내일도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대학병원 긴 복도가 한가롭다
창 너머 엎드린 산
단풍이 초록에 업혀 가을로 다가선다
등 뒤 불투명한 말소리
저벅저벅 걸어간다
유리창엔 순서 없는 생의 그림자
사다리를 타고 있다
시간은 빈 껍질로 돌아앉은 채
그늘진 불빛으로 다가온다
아득한 수액 줄, 길이 따라
흔들리는 희망을 막막히 땋아내린다
낯선 곳 여기 한 점으로 왔다가
한 점으로 되돌아가는 호흡기의
인공적인 고요
고요가 나비처럼 앉아있다
계절이 계절에 업혀간다
뿌리끼리 줄다리기를 한다
메마른 땅에서 얼마나 더
겨울을 견딜 수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봄이
복도 끝에 서 있다
[홍성주 당선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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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발하는 기점으로
비 오는 밤을 말없이 너머와 맑은 눈으로 창문을 노크하는 햇살에게 활짝, 커튼을 열어 인사합니다.
저만치 먼 곳에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디딜 땅이 있기에 딛는 발이 있기에 흔들리며 걸어도 감사함으로 건너는 하루입니다.
새롭게 해가 뜨고 또 새롭게 저물어야 할 걸음입니다.
걸었습니다. 때로는 뛰기도 하고 엉금엉금 기어본 적도 있으나 날아본 기억은 희미합니다.
그러나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파닥거리며 날아보기도 했을 겁니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하늘 끝 보이지 않는 우주선을 탈 수도 있겠습니다.
아주 조금만 욕심을 가져볼게요.
가슴 벅찬 기쁨이 흐려지지 않도록 막차가 떠나기 전에는 무조건 뛰어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날, 시가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 날에는 왜 시가 쓰고 싶은지를 나직이 되물었지요.
무조건 살고 싶은 날, 스스로에게 왜 살고 싶은지를 물어야 했던 것처럼.
‘그냥’이라는 말, 그보다 더 명확한 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막 도착했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한없이 기쁜데 그러면 된 건데, 허락도 없이 살그머니 묻어오는 작은 두려움은 또 뭘까요.
그마저도 애틋합니다. 그래도 거울 속에는 실없는 웃음이 저 혼자 절로 핍니다.
수많은 걸음이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데리고 당도했을 산티아고 순례길 땅끝마을
피스테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놓여있는 노란색 화살표와 조개 문양 이정표는 어디쯤에서 그쳤습니다.
‘Km 0.0000’이라 적힌 표지석 앞에 꼿꼿이 나를 세웁니다.
수백 Km를 걸어와 마침내 더 이상 갈 곳 없는 땅.
닳고 해진 신발을 벗어 태우던 순례자의 마음을 조심스레 엿볼 수 있겠습니다.
묵묵히 아직은 벗지 못한 신발 끈을 질끈 조여 맵니다.
묵은 먼지들을 툭툭 털어봅니다.
돌아서서 다시 출발하는 기점으로 삼겠습니다.
부족함은 접어두고 익어가는 내일을 믿어주신 박해림 선생님께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길 위에서 길을 열어 한 걸음 이끄시는 손끝을 겸손히 잡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따라 자박자박 멈추지 않고 걷겠습니다.
홍성주_1962년, 충북 청주 출생. 2023년 《시조시학》 시조 신인상 당선. 대한시문학협회 수필문학 대상 수상.
캘리그라피 시화 개인전 <리셋>. 수필집 <바람이 두고 간 풍경>이 있음. 현재, 창원문인협회, 열린시학, 시향문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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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림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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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상상력과 날 선 감각
세상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지금 있는 것은 오래전 이미 있던 것이었고, 앞으로도 있던 것에서 포장만 바꿔 새롭게 존재할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 새롭고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어진 직립 보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은 분명 익숙하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면뿐만 아니라 각도를 달리하여 들여다볼 때 각의 위치와 면에 따라 엄청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몫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영역 또한 그러하다. 특히 언어로 된 문학은 매우 이성적이면서 매우 감성적인 면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데서 그 파장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과거는 물론 과학의 발달이 갖는 현대인의 이성적 삶이 더욱 발전하면서 개인의 감성을 끌어올리는 데 문학의 역할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특히 시의 경우 소설과 같은 산문 영역과 달라서 이성과 감성이 동시적으로 작동되면서 언어가 주는 힘과 그 언어를 받치고 있는 감성의 힘이 얼마나 상호 교합적이고 신선한가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거나 강조할 필요가 없다. 올해도 이러한 전제 아래 신인들의 응모 작품을 만났다. 작품을 응모한 여러 신인상 후보 중 최종 추천하는 홍성주의 경우 역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총 15편을 보낸 홍성주 시인의 경우, 「누에잠을 앓다」「자정의 스위치」「바람에 아니 흔들리고」를 최종 선정하게 되었다. 홍성주 시인만의 거침없는 상상력의 활달함은 물론 날 선 언어적 감각의 형상화가 다양한 각을 연출하고 이미지화하면서 시의 다변과 확장을 꾀하고 있음을 보았다.
신인만의 감성과 감정선의 내적 감흥이 만들어 내는 거침없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사뭇 도발적인 내적 충동의 보폭에도 큰 박수를 보낸다.
가령, 그의 작품 「누에잠을 앓다」의 ‘남쪽으로 내려가요/ 삼팔선을 넘어가면 온통 지뢰밭이지요/ 이빨 사이로 새는 신음 소리/ 철책을 넘나들었죠/ 아, 개구멍은 안 돼요/ 따닥따닥 심장 볶는 소리에/ 콩닥콩닥 머리가 울려요…방공호 밖으로 나가면 안 되겠죠/ 선은 넘지 말라고요, 제발/ 분계선은 37도이지요/ 실수로 넘은 거면 셋 셀 동안/ 다시 넘어가 버려요/ 하나. 둘, 셋/ 빵야!/ 타이레놀 두 발/ 쏴 버리고 말았네요… 잘 때마다 껍질 벗는 누에잠처럼’은 마치 극한 현실의 경계와 경계가 만들어 내는, 한편으로는 결연한 처지가 만든 현실의 동상이몽이 해학적으로 처리됨으로써 그 만의 개성적인 시를 만날 수 있다는 데서 무엇보다 큰 점수를 주었다.
구어체적 시어와 이야기식의 전개가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매우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가지면서 읽는 재미와 상상력의 파도타기를 만나게 한 것 또한 그렇다. 누에는 자랄 때까지 총 네 번의 잠을 잔다는 것과 잘 때마다 껍질을 벗는다는 그만의 생태적 환경을 제 것으로 끌어온 것 또한 시인만의 예리함과 섬세한 안목을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홍성주 시인의 진지하면서 산뜻한 첫 발걸음에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