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관
학번 : 21231098
이름 : 정서연
출석번호 : 42번
내 사역의 뼈대가 되고 있는 것이 『순장지침』이다.
1. 순장은 영원한 생명의 수태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수태자로서 숨어버리는 무한한 생명의 전달자요, 영혼의 어머니임을 명심하고 순원을 키우고 돌보고 사랑하고 가르치고 심방하는 일을 자원하여 맡는다.
2. 순장의 궁극적 임무는 순원이 성령과 기도와 성경에 눈을 뜨게 하여 그것이 접붙임을 받을 때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데 있다.
3. 순장의 권위와 자원은 전도의 생산능력, 성경, 기도, 사랑, 신앙, 서령의 영적 권위이다.
4. 순장은 영역학의 핵이요, 순의 영성의 열매는 순장의 영성의 열도에 달려 있다. 유는 유를 낳는다.
5. 순장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성령충만을 확인하고 아가페의 사랑을 소유하여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순장 자신이 전도의 생산을 가져야 하고 수시로 순원의 영성을 진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일일이 그 이름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7.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고 간증하는 자세가 좋고 아는 척 하지 말고 형제의 발을 씻어라.
8.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불평으로 일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로 하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사실에 감사함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9. 자기에게 애정이나 존경을 모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돌리고 영적 지도자에게 절대 순종하라.
10. 순장은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어 쓰고 무엇이나 우선순위를 정하여 생의 좌표를 설정하라.
11.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사나운 언어와 농담을 삼가 모범이 되어라.
12. 나타내는 말보다는 보이지 않는 뿌리에 역점을 두라, 성령은 소리가 없고 사탄은 떠든다.
13. 내 지식으로 감동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권위를 두라.
14. 이성관계와 금전관계를 정확히 하라.
15. 순원에게 반드시 과업을 주고 「나의 팡세」를 쓰게 하며 자연히 분순이 이루어지도록 기대하라.
16. 순원을 전략적으로 접촉하여 옥토를 찾아 씨를 뿌리고 육성하도록 하라.
17. 순은 특질이 유기체이므로 순원들의 덕과 은혜를 공동으로 나누고 허물과 고통과 외로움과 죄와 불신은 서로 나눠서 청산해 버리는 영적 가정이 되게 한다.
18. 순은 성령이 주도하는 모임으로 답답하고 울적한 것이 아니라 생수가 터지고 풍성하고 차고 넘치는 모임이 되게 하라.
『순장지침』이 내가 부르심 받은 사역자로 살아가는 것에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고 사역자 이전에 참 순장이 되는 것이 나의 목회관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내가 존경하는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붙잡을 중요한 가치관을 정리해 보았다.
1. 처음 사랑을 잊지 않는 목회
-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요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는 목회
- 슥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3. 말씀 중심의 목회
- 딤후3:16-17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딤후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4. 제자를 낳는 목회
-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4. 공동체의 내향화를 지양하는 목회
-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막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5. 팀으로 함께 하는 목회
복음전도 사명은 혼자의 것이 아니다. 함께 할 사람들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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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목회관
영원한 청년, 김준곤 목사님
<김준곤 목사님 사진>
Ⅰ. 김준곤 목사님과의 인연
목회신학개론 시간을 통해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서 감사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송구하다. 감히 쳐다볼 수 없는 큰 나무를 보며 올라갈 것을 생각하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내가 처음으로 김준곤 목사님은 본 것은 대학교 1학년 CCC대학생여름수련회였다. 저녁집회를 인도하러 나오신 목사님을 향해 다른 선배 순장님들은 환성을 질렀고 저 분이 누구시길래 저렇게 학생들이 환호할까 궁금해하면서 처음 목사님 설교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머리를 간혹 긁적거리시거나 손으로 마이크를 치시면 그런 모습 하나에도 어린 아이마냥 좋아라 했던 기억난다. 그것이 반세기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쓰셨던 영원한 청년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 때 이후로 그 분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비록 그 분은 2009년 9월 우리의 곁을 떠나셨지만 그의 주를 향한 사랑과 꿈, 그의 기도와 열정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서 오늘도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내가 보기엔 목사님은 이웃집 할아버지마냥 평범했고 한국CCC와 한국 교회의 거장으로 불릴 특별한 것이 없었다. 모세를 모세 되게 하신 것처럼 목사님을 목사님 되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민족의 격동과 질곡의 한 복판에서 민족을 끌어안은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은 김준곤 목사님을 그렇게 이 민족을 위해 사용하셨다.
그는 자주 성령의 역사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말씀과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러면 스가랴 4:6절 말씀이 마음에 새겨졌다. 간사들은 그를 돈키호테라 불렀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무모한 도전에 가까운 시도들이 많았다. 특히 엑스폴로74가 그러했다. 여의도 광장에 323,419명의 사람들을 모아 전도요원으로 훈련시킬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처음에 모든 간사들이 다 반대했었다. 반대이유가 참석한 간사 수만큼 70여 가지가 넘었다. 그런 반대 앞에 김준곤 목사님은 물으셨다.
“민족이 복음화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요?”
“......”
“그럼 그 일이 가능하겠소?”
<엑스플로‘74에서 빌브라잇 박사와 김준곤목사님>
순도 100%, 처녀성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안에 주를 향한 첫 사랑을 생각하게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서요...”
김준곤 목사님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실 때마다 우셨다. 그러면 나도 따라 울었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목사님이 한 생애를 바쳐 온전히 밀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Ⅱ. 김준곤 목사님-한국CCC를 창설하다
일제 강점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925년 3월 28일 김준곤목사님은 전남 신안군 봉리 원동에서 부친 김면주와 모친 김통안 사이에서 8남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7살 때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으로부터 처음 복음을 들었다. 이후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면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만주 봉천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일제징용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끌려가다가 탈출하여 만주의 김인석 목사 댁에 피신해 있었다. 당시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김인석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문학, 철학서 등 2,0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또한 성경 암송을 시작해서 수백 구절을 암송했다.
그 때 상황을 기억하며 김준곤 목사님은 “그 때 금식도 많이 했는데 사흘에 한 끼, 이틀에 한 끼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민족복음화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고 헌신 서약도 했습니다.”라고 하셨다.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6년에 그는 서울역 앞에 있었던 조선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 당시 조선신학교에서는 김재준교수와 송찬근 교수의 자유주의신학논란으로 인해 학내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신앙동지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퇴학처분을 받게 되었고 고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부산 고려신학교에 잠시 내려가 그곳에서 한 학기 공부를 했다. 이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복구되자 다시 그들과 함께 올라와 학업을 계속해 194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의 이런 신학적 배경은 그가 성경중심, 하나님중심, 성령중심, 기도중심, 복음중심, 교회중심의 보수적 복음주의 운동을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졸업 후 법성포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김준곤목사님은 지도섬으로 피난을 갔다가 거기서 지방 공산당폭도들에게 가족이 밤중에 체포되어 아버지와 아내와 함께 묶여 지도의 삼한봉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부친과 아내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자신을 학살현장으로 끌려가다 도망쳐 이리저리 숨어지내다가 상륙작전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가족을 죽였던 원수를 용서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후에 이 사람은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목사안수를 받고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으로 봉직했다. 교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인 한성신학교 교수로 잠시 사역한 후 1957년 미국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CCC설립자인 빌브라잇을 만나 함께 학생운동을 하자는 제의를 받고 귀국하여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KCCC를 시작했다.
Ⅲ. 김준곤 목사님의 교회철학
(*아래 글은 한국설교음성연구소 김대현 목사가 김준곤 목사님에 대해 연구한 글을 바탕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그는 한국교회 전체를 목회한 큰 스승이었다.
1. 민족복음화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다
김준곤 목사님을 누구와 비교할까? 전형적인 대중집회 설교자라는 점에서는 빌리 그레함에 손색이 없고, 성경을 섬기는 철저한 복음주의적 설교가라는 점에서는 로이드 존스를 연상시킨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목회자들이 영향을 받고 변화하였고 주의 종의 길을 선택하였다. 김준곤 목사님은 기독교인의 퍼센트가 한 자리 수에 머물던 7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몇 차례의 전국적인 전도대회를 통하여 기독교 인구를 일약 20% 대에 육박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한국교회 모두가 그의 은혜를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의 한국교회를 위한 행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창설과 활동이다. 그는 한국 CCC를 창설하고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의 CCC 운동을 통하여 훈련받고 사역을 담당하는 제자 목사들 중에는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김인중, 김지철, 김기홍 같은 쟁쟁한 목회자들이 있으며, 평신도로 사역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정섭 장로(기아대책 회장), 두상달 장로(기아대책 이사장), 박세환 장로(예비역 육군대장), 주수일 장로(칠성섬유 회장), 민산웅 장로(전 극동방송 부사장)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그밖에도 CCC를 통하여 구원받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청년들이 30만 명 이상이 되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가 주도하는 전도 집회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부흥사요 설교가로 활동하다가 2009년 9월 29일 소천하였다.
2.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다
한국교회를 위한 김준곤 목사님의 가장 큰 공헌은 보수와 진보를 같이 품고 화해와 일치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을 향하여는 연합운동에 참여를 독려하였으며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 한국교회를 섬길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화해와 일치를 통하여 그가 원한 것은 오로지 민족복음화밖에는 없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7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저조한 복음화율과 미미한 성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보수와 진보의 양극이 연합하지 못하고 교회를 양분하며 힘을 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거목답게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두 진영의 힘을 모았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이 민족에게 오기를 소원하며 노력하였다.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민족복음화의 기치아래 온 교회가 하나가 되었고 ‘EXPLO 74대회’ 등 100만 명 이상이 모이는 대중 집회를 통하여 교회의 부흥과 대 사회적인 기독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하였다.
3. 로칼처치(local church)와 파라처치(para-church)를 연결하다
김준곤 목사님은 CCC라는 선교단체(para-church)를 교회와 연결시킴으로써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는 여타의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교회론 때문에 지역교회와의 마찰을 빚고 있는 가운데서도 장로교 목사답게 교회론을 분명히 하고 CCC라는 파라처치가 지역교회를 섬기고 도움을 주는 파트너십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지역교회들을 돌면서 설교하였고 크고 작은 연합집회의 강사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CCC의 선교 열정이 지역교회에 점화되어 전도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CCC의 사영리 소책자와 10단계 성경교재는 한국교회 성경공부의 체계를 잡아 주었고 제자훈련을 하나의 운동으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Ⅳ.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
김준곤 목사님은 성령체험의 설교자였다.
김준곤 목사님의 성령체험과 민족을 향한 복음화의 열정은 그의 설교 전반에 걸쳐서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사역의 동력(動力)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설교하다가 자주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는 민족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였고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민족이 복음화 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이 버림받아도 좋다는 사도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순교적 자세로 설교한 한국교회의 큰 사도요 스승이었다.
그의 설교에는 논리적 설득보다는 감성적 터치가 강하다. 그는 자신의 지식으로 설교하려 하지 않고 성령께서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설교한다. 그의 설교에는 설교학적인 인위성이 전혀 없고 설교가로 훈련된 가식이 보이지 않는다. 가꾸지 않은 야생화처럼 그의 설교는 세례 요한을 닮고 베드로를 닮았다. 그의 설교는 십자가의 복음밖에는 없는 단순성이 매력이다.
이동원 목사가 말하는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
(*목회와 신학 2009.11.월호를 참고하였습니다.)
1. 나는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를 큰 소리로 고함치지 않아도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처음 그분의 설교를 접했을 때 작은 낭만적인 목소리로 호소함에도 그의 설교가 마치 내 세포의 깊은 구석구석을 터치하는 것을 느꼈다. 낭만적인 시상과 애절한 설득의 영이 내게도 임하기를 기도한 적이 있었다.
<백문일답-모든 문제의 답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2. 백문일답-무슨 문제를 제기해도 대답은 그리스도라는 명제, 곧 그리스도가 구원이고 그리스도가 소망이라는 외침은 젊은 설교자인 나의 영혼에 깊은 울림으로 자리 잡았다.
3. 무엇보다 가장 큰 그의 영향은 민족 사랑의 외침이었다. 정치, 경제, 교육, 과학, 예술 모든 삶의 영역에 그리스도를 심어 이 민족을 그리스도의 민족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외침은 아마도 그가 이 땅에 남긴 가장 위대한 로망스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진실로 민족 사랑의 로맨티시스트였다.
Ⅴ. 김준곤 목사님의 기도
1962년 불광동 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전국간사수련회를 마치고 삼각산 움막기도처에서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감동가운데 민족복음화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하였으며 그 후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국회조찬기도회와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1968년 민족복음화의 제3의 집단으로서 나사렛형제들을 창립하였고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의 전략적 차원에서 민족복음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순과 사랑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다음 해에 전군신자화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기독교방송 CBS을 통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구호와 함께 ‘민족복음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운동을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민족복음화 운동 요원 강습회’를 수원과 대전에서 차례로 실시하였으며 교회 교사 전도훈련, 시범 교회 교역자 전도훈련, 춘천성시화운동, 엑스플로‘74대회와 ’80복음화 대성회와 1990년 뉴라이프마닐라대회와 SM2000대회 및 세계선교대회를 통해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그는 사영리 소책자를 통한 전도요원강습회(LTC)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운동과 더불어 기도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기도 외에 전도를 위한 지름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도와 금식에 헌신하였다. 그는 특히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민족복음화의 원동력과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과 성령에 의해 가능하다는 성경적 확신 속에서 이 일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일제치하 만주에서의 피난 생활과 한국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수난을 통하여 그로 하여금 민족복음화의 꿈을 꾸도록 하셨다. 그에게 민족과 가족의 수난사는 고스란히 민족복음화의 꿈으로 용해되었고 이렇게 한 맺힌 민족복음화의 꿈과 기도를 가슴에 품었던 그는 학생운동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하였다.
그는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 오늘의 민족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라는 모토 위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하였고 이 운동은 대학생선교회를 모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꿈으로 이어졌다. “나는 격동의 60년대를 배경으로 학원 전도를 하는 중 겹치는 한 많은 민족의 수난 속에서 내가 키워 놓은 순수한 학생들과 함께 밤새 울고 기도하며 한편 민족복음화의 환상을 꿈꾸며 영적 청춘을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이것이“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구호로 외쳐지게 된다.
이것은 제자들의 고백에서와 같이 “우리들의 영적 스승인 김준곤 목사님의 기도요 비전이며, 그 꿈과 기도는 우리들의 꿈과 기도가 되었으며, 우리들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우리 삶의 최대의 목표이기도 했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꿈과 믿음과 열정과 헌신의 모습을 볼 때 그는 확실히 ‘영원한 청년’이었고 우리들의 영적 스승으로서의 ‘영원한 청년, 김준곤’이었다.
1.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
김준곤 목사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민족구원을 향한 가슴앓이는 성령체험의 결과이다. 그는 1962년 2월 서울 삼각산에 있는 민족기도원에서 영하 20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기도했다고 한다. 그 내용이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고 또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사장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 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 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2. 금식기도
그가 미국에 갔을 때 빌 브라잇 집에 초대되어 몇 날 묵었다.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그를 불렀더니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대한민국이 통일이 되기 전까지 아침 금식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간사들과 20일, 혹은 40일 금식을 하러 갔고 지금도 이 기도의 영성은 이어져서 CCC대학생들은 연말이 되면 금식성회로 모여 3박 4일 민족과 나라와 개인을 위해 금식하고 있다.
<2008년 대학생 금식수련회에서>
3. 1.1.1.기도운동
1993년 김준곤 목사님이 1.1.1.기도에 대해 대학생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1994년 6월 4일 여의도 광장에서 세계선교대회(GCOWE) 준비위원회가 대규모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다. 1.1.1.기도운동은 기도를 통해 전국민 복음화를 꿈꾸는 운동으로 매일 오후 1시에 1분 동안 북한을 위하여, 대한민국이 정의롭고 정직한 나라가 되기를 위하여,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운동으로 전국의 그리스도인이 이 기도운동에 동참한다면 기도합주회가 이뤄지게 되고 그 기도의 힘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다.
2007년 여름수련회에 참석한 김준곤 목사님이 1만명의 학생들 앞에서 “내가 마지막 유언처럼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시며 1.1.1.기도운동에 헌신할 것을 요청하셨다. 요즘에는 1.1.1기도운동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앱(APP)이 제작되었다. 앱을 설치하면 매일 1시 정각에 아람이 울리고 ‘오늘의 기도제목’이 전송되고 주어진 기도제목을 놓고 어디서든 쉽게 기도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Ⅵ. 김준곤 목사님의 생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일을 마치시고 집으로 오신 김준곤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밥상 가지고 오라는 말을 “민족 복음화 가져오시오”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민족이 복음화되는 것에 열망을 가졌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보다 못한 사모님이 그만두라고 하면 화장실이든 서재든 어디 들어가서 ‘사탄아 물러가라’ 그렇게 많이 기도하셨단다. 간사들과 함께, 혹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가면 민족이 복음화 되게 해 주십시오 하며 기도가 터지고 금방이라도 민족이 변화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그 일에 나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고 산을 내려오면 칠흑같고 딱딱한 벽같은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내가 왜 그렇게 기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실 때도 많았다고 하셨다.
그분은 민족복음화의 기수였다. 큰 나무와 같고 넓은 바다와 같으신 분으로 보수와 진보뿐 아니라 모든 선교단체들까지도 다 품에 안고 자식처럼 키웠으며 통일과 북한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깊은 분이셨다. 많은 이들이 김준곤 목사님은 영원한 청년 같고, 꿈꾸는 소년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예수의 향기가 언제나 흘러 넘쳤다. 그는 늘 경건하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신 분이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품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희망을 심어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 종이 되어 발을 씻고 순도 가지고 북한으로 가자! 사막에 오아시스를 파 놓으면 목마른 사람들이 와서 먹지 않겠느냐, 우리가 파자, 개척하자!” 그렇게 외치며 민족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Ⅶ. 김준곤 목사님의 약력
·1925.03.28. |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에서 부친 김면주와 모친 김통안 사이에서 8남 중 넷째로 출생 |
·1946.03~1948.09 |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제1회 졸업 |
·1951.09 |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 |
·1952.03~1953.02 |
조선대학교 문학과 졸업 |
·1953.04~1955.10 |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목 |
·1955.04~1956.10 |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장 |
·1956.03~1956.07 |
한성신학교(여수애양원 나환자 신학교)교수 |
·1957.09~1958.11 |
미국 풀러신학교 1년간 연구수학 |
·1958.10~현재 |
한국대학생선교회(CCC)창설, 총재, 재단이사장 |
·1966.02 |
국립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 |
·1966.03.08. |
국가조찬기도회 창설(4번의 대통령 조찬기도회 설교) |
·1969~ |
전군신자화운동전개(영관급 2400명에게 기독교와 반공강연) |
·1972.07.31.~08.03 |
춘천성시화대회(한국 최초) |
·1974.08.13.~18 |
엑스플로‘74 전도대회 준비위원장, 주강사 |
·1979.03~1980 |
‘80복음화대성회 대회장, 주강사 |
·1980.08 |
한국창조과학회창설 |
·1980~1981 |
조선일보(2년), 동아일보(1년)에 매일(주일제외) 예수칼럼 게재 |
·1981.05~1990.06 |
국제대학생선교회 동아시아 대표 |
·1983.05 |
세종대학교 명예교육학박사 |
·1983.07 |
Southwest Baptist University, Missouri, U.S.A 명예신학박사 |
·1984.05 |
세계기도성회(International Prayer Assembly)준비위원장, 주강사 |
·1985.09 |
엑스플로‘85 인공위성 세계대회(세계 50개 도시 동시 개최)준비위원장, 주강사 |
·1988.12~1990.12 |
한국복음주의 협의회 회장 |
·1990.07~08 |
마닐라 뉴라이프2000 준비위원장(대학생 3,000명 단기선교사 파송) |
·1992.07~1995.06 |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and Beyond Movement)준비위원장 |
·1994.03 |
한국기독교계 원로간담회 창설 |
·1994.06 |
세계기도성회(세계 2,000도시 위성 연계 동시 개최, 여의도 기도회)준비위원장, 주강사 |
·1995.05 |
GCOWE(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95 세계선교대회(187개국 4,000여명 참석)준비위원장, 주강사 |
·1996.12 |
국민일보 주최‘국민선교대상’ 한국교회부흥 부문 수상 |
·1997~현재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 대표 |
·1999.03~1999.08 |
엑스플로‘99 민족복음화 인천대성회 준비위원장, 주강사 |
·1999.09~2003.04 |
사단법인 2002년 월드컵 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
·1999.08~ |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목장 완공) |
·1999.03~현재 |
기독교 민족화합운동 대표회장 |
·2000.06.04. |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 예배(한기총, KNCC공동주최)준비위원장 |
·2002.02 |
북한방문(우리민족서로돕기상임공동대표자격으로 송월주,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
·2002.12 |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
·2005.05~현재 |
성시화 운동 세계 총재 |
·2006.02 |
명지대학교 명예철학박사 |
·2009.09.29. |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소천 |
저서: 『예수칼럼』, 『김준곤 문설집』,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리바이벌』, 『김준곤 예화』, 『김준곤 명상』외 다수
<참고자료>
-목회와 신학, 2009년 11월호, 두란노서원, 통권245
-월간목회, 2009년 11월호, 통권 395
-CCC와 민족복음화 운동, 김준곤, 순출판사, 2005.
첫댓글 수고했어요. 훌륭합니다. 교수를 감격하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