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현대시조, 어떻게 쓸 것인가
1. 시조 짓기와 기본자세
모든 작문 교과서에서는 글쓰기의 기본 요령으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들고 있다. 간다(看多), 주다(做多), 상량다(商量多)와 같은 말이다. 남의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써 보고, 많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일찍이 구양수는 시 쓰기의 기본 요건으로 이 세 가지(詩作三多)를 들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주효하다.
필자는 여기에다 다험(多驗)을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경험을 많이 가지라는 뜻이다. 시조(시)는 체험인가 상상력인가 하는 문제의 논의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체험이란 시조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시는 산문의 상대 개념으로 운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조는 시 (자유시)보다 더 운문적이다. 여기서 운문적이라는 것을 시조가 율격(음률)과 호흡, 박자의 율감을 조화해 가면서 의미와 비유, 상징, 이미지 따위를 율격으로 이끌고 통일성을 지향하는 시라는 뜻이다.
이러한 율격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시조와 좋은 시조를 많이 읽고 외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조의 전통적인 기본 율격을 체득할 수 있고 다양한 음률 감각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언어이다. 시조의 시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들 가운데서 필요한 어휘를 선택하게 되고, 해당 작품의 표현에 적합하도록 문맥 속에서 기능적으로 역할을 하며 정서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음률을 고려해서 쓰게 된다.
우리는 가끔 '밤을 새워 시를 썼다'는 말을 듣곤 한다. 이때 그 밤새움의 까닭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시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말(어휘)을 찾지 못했다던가 말과 말의 연결 즉 시문맥의 자연스러움이나 함축적인 표현을 얻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조를 쓰는 일은 곧 언어를 선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조를 쓰고자 하는 이들은 많은 낱말(어휘)을 알아야 하고, 문법에 맞는 문장을 써 버릇하며 끊임없이 언어의 본질을 깨우치고 다듬어 가야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시조를 쓸 때는 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특히 주의할 일은 소위 작시범칙(作詩犯則)에 이르는 삼불가(三不可), 즉 세 가지의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삼불가란 강작(强作), 도작(徒作), 구작(苟作)을 말한다. 강작이란 시를 쓸 때 능력 이상으로 잘 쓸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요, 도작이란 시 쓰기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며, 구작이란 구차스럽게 억지로 쓰지 말라는 뜻이다.
시조(시)를 씀에 있어서 욕심이 앞서면 억지가 따라 시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게 되고 시 쓰기를 게을리 할 때는 감성이 무디어져 신선한 정서를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억지로 쓰게 되면 내용이 빈약하고 표현이 조잡하게 되어 시의 품격이 떨어지게 된다. 삼불가는 이를 경계하는 법칙으로서 삼다 못지 않게 중요한 작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 의작(依作) 하나를 덧붙이고자 한다.
의작이란 한 개인의 독특한 글투를 소재나 주제에 관계없이 틀에 박힌 듯이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독창적이며 신선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작시 태도가 관습화되었을 때 독창적이며 개성적인 작품을 쓸 수 없을 뿐만아니라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시조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시조를 읽고 습작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좋은 시조(집)란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조, 객관적인 평가치를 가지고 있는 시조(시인)를 말한다.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조(집)를 텍스트로 삼았을 때는 그만큼 장점을 많이 습득하여 습작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과연 자기가 쓴 시조가 시적으로 완성된 시조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과 집착에 빠져 스스로 분별해 낼 수 없는 상태에서는 수백 편을 쓴다 해도 좋은 시조가 씌어지기 어렵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볼 필요가 있다.
곧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부족한 점을 지적받을 수도 있다. 칭찬은 자칫 겉인사일 수도 있으므로 단점의 지적에 귀를 기울이고 그 단점이나 미흡한 부분을 열심히 고치고 보완하는 습작이 계속되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시인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습작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사람마다 그 자질이 다르고 시조 쓰기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정열이 다른 만큼 일률적으로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2-3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시조의 율격을 체득하고 나름대로의 감성 훈련과 개성적인 표현법을 구사할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0여 편의 시조를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혹 독자들은 '그렇게 많이?', '언제?'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2년에 200여 편, 1주일에 1편을 쓰는 셈이다.
이만한 정열도 없이 문학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2. 읽기와 모방하기
문학 활동, 즉 글쓰기는 다른 모든 의식 활동에 비해 자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도 실은 실제로 창작에 참여하고 기쁨을 체험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 모방이란 사물(세계)과의 직접적인 교감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재현하는 연습이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시조 쓰기 또한 모방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시조(시조집) 읽기를 하는 동안 감명을 받는다든지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 무엇이 그러한 느낌을 주었는가를 따져보면서 전체적인 분위기, 내용, 어휘나 구절 또는 표현의 기법 등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A라고 하는 시조(집)를 읽으며 습작하게 되면 A와 같은 시적 분위기 내용, 어휘나 구절 등 표현법이 닮은 시조를 쓰게 되고 마침내는 A에 푹 빠져 A와 똑같은 시조를 쓰게 된다. B의 시조(집)를 읽을 때도 A를 두고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B의 아류임을 느끼지 못할 만큼 푹 빠지는 것이 좋다. C의 시조를 읽을 때도 이와 같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몇 차례 거치는 동안 시적 분위기나 내용, 어휘나 구절 등 그 표현 방법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비교할 수 있는 힘이 길러져 어느 누구의 아류도 아닌 자기만의 특유한 개성으로 독립하게 마련이라고 박이도(『문예창작 실기론』)는 말하고 있다.
시인은 각자 그 삶의 체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낱말에 대한 인식과 사물을 대하는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방이나 아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제천은 그의 시작 지도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습작이 1백 편을 넘고부터는 대부분이 전문적인 시인의 길에 오르게 된다. 시가 어떤 것이라는 형식을 이해하는 동시에 시에 무엇을 쓰는 것이라는 내용에 대한 자각이 굳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예술은 사물을 복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눈으로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초적인 감정은 금물일 수밖에 없다. 기초적인 감정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언제든지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 가능성이 많은 즉, 차라리 초보 단계에서 배설하라"고 권하고 있다.
습작이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훈련을 쌓아 가는 것을 말하지만 기초적인 감정을 배설하는 일 또한 습작의 몫이다. 여기에 적당한 습작기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있다. 언제까지 (전문 시인이 되어서까지) 기초적이며 일반적인 감정이나 막연한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감상만을 분출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제목과 내용
시조를 쓰기 위해서는 시가 될 수 있는 소재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시적 소재나 대상이란 시인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소재나 대상을 말하며 무엇이든지 시조의 내용이 될 수 있다.
감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이성적 작용에 의해 알게 된 지적 내용, 오성적 깨달음, 일상 생활 속에서 체험한 경험, 감성에 의해서 지각된 느낌이나 인식, 신념이나 이념, 사물의 관찰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나 존재(사물, 인간)의 본질, 세태 등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시조의 소재가 되고 내용이 된다.
그 중 무엇이 시조를 쓰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일으키는가에 따라 그 대상이 시적 모티프가 되고, 마침내 한 편의 작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다루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좋은 시조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제목부터가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제목이 내용과 합치하지 않는다든지 뚜렷한 상징적 의미나 암시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내용의 전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목은 그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 스미듯 봄빛 아리는
東方의 하늘 받들고
失鄕의 彷徨들을
타이르듯 木蓮이 피네
추녀여 너의 가락은 없고
[재즈]가 騷音의 뜰
이호우『목련』
주체성 없이 외국 문물에 휩쓸리고 날로 오염되어 가는 문화 현상 속에서 우리의 것을 소리 없이 지켜가는 모습을 목련의 고고한 자세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조의 내용과 제목의 상징적 의미가 합치한 예가 된다.
대체로 시조의 제목들은 내용과 합치하며 상징적, 인상적, 핵심적, 포괄적, 함축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1) 제목 붙이기
시조(시)의 제목은 여자의 얼굴과 같다는 말이 있다. 한편의 작품이 독자와 맨처음 만나는 게 되는 것이 제목이며, 독자들의 관심과 내용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무제(無題)라는 제목의 작품들과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의 제목 붙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예가 된다.
산은 우뚝하고
골자기로 물이 흐르는
절로 난 흐름의 길가
꽃들은 피어서
빠쁘게 몸을 추스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시냇물 제 혼자
소리내어 흐르고
나무잎 하나 달빛 싣고
흔들리며 가느니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먼 산 뻐꾸기 운다
김제현『무제(無題)』
시조의 제목 붙이기에는 처음부터 제목을 결정해 두고 그 내용을 완성해 가는 경우와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 붙이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주제에 맞추어 시상(실상)이나 내용을 통일성 있게 전개시켜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주제의 구속에 매여 다양한 의미의 풍부한 내용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약점을 지닌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여 풍부한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칫 주제 및 상(심상)의 통일성이 결여될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편의 시조는 그 작시 동기가 다양한 차원에서 유발되고, 다양한 상상력이 동원되어 내용을 이끌며 뜻하지 않는 발견과 의식의 변화 및 낱말(의미)들의 충돌과 조화를 통한 실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토록 복잡한 작시 과정에서 당초의 시상과 다른 변용된 시세계로서의 작품성이 구현될 수도 있는 만큼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 제목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 하겠다.
하지만 제목 붙이기에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며 좋은 제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 및 모든 사물의 명칭이나 현상, 주제구나 핵심적인 낱말 등 예상을 뒤집는 어휘로써 작품의 주제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제목이면 무난할 것이다. 처음 시조를 쓰는 이들은 시상의 통일성 있는 전개를 위해 제목을 정한 다음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독서 경험에 따르면 좋은 제목은 좋은 내용을 이끌고 있고, 또 좋은 내용은 좋은 제목으로서 표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목과 내용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완성되어 한 작품을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정직하면서도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제목 붙이기란 내용의 구성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목도 창작이기 때문이다.
2) 시조의 첫머리와 마무리
제목이 독자와 만나는 첫 대면이라면, 첫머리는 독자를 안으로 끌어들이는 첫 관문이 된다. 비록 제목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첫 구절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과연 누가 그 작품을 읽어 줄 것인가. 더구나 시조의 단수는 12마디 50자 정도이고 길어야 3수 내외의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다.
이렇듯 짧은 한 편의 시조가 읽히느냐 읽히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그 첫 구절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시조의 첫 구절을 잘 쓴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첫머리는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첫줄이 잘 나오면 그만큼 시상의 전개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첫 단추를 잘 채워야 옷을 바로입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첫 구절을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로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첫 구절이 잘 나오면 벌써 반은 썼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면 시조의 첫 구절은 어떻게 씌어지는 것인가?
흔히 시조의 첫 구절은 영감에서 온다고 말한다. 발레리는 "시의 첫줄은 신에게서 온다"고 했고, 강우식 등은 "시는 영감 또는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므로 대개의 경우, 첫머리의 시작은 초월적인 만남이기가 일쑤"라고 말한다.
신으로부터 오는 첫줄이거나 초월적인 만남이란 다같이 영감으로 떠오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감이란 천재들이나 특별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므로 손으로 이끌어 내기만 하면 된다.
박목월 선생 아래서 공부할 때였다. 선생께서는 내가 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셨던지 늘 "이미지로 써라, 시는 머리나 가슴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일러주시곤 하셨다.
시가 손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 시조를 쓸 것이 아니며 첫머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해서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다. 시조에 집중하여 열심히 써 가는 동안 신기하게도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시조에 있어 첫머리 못지 않게 중요한 대목이 끝 구절 곧 종장이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시조의 끝마무리가 종장이며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종장의 결구로써 한 편의 시조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완결성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시조의 종장은 소음보, 대음보, 평음보, 소음보(3자, 5~8자, 4~5자, 3~4자)의 특유한 율격 장치와 통사적 기능에 의해 완결의 미학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격이 흐트러져 있다든가 통사적 기능이 떨어져 문맥이 서지 않는다든가 초장․중장의 내용과 접속 또는 통합적 종결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경우이다. 종장의 율격장치를 잘 이해하고 시상을 완결 짓는 완결성을 추구하도록 힘써야 한다.
시조를 완결성의 미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가리키는 것이며, 개방적․미완성적 미학을 추구하는 자유시와 대조가 된다.
4. 시조의 구성
시조의 일반적 구성은 3단의 구조에 따라 '펼치고', '세우고', '맺음'을 구성의 원리로 한다.
시조의 의미 구조를 삼단논법의 논리적 구성으로 파악하고 그 전개 양상을 유형별로 분류할 때 크게 동의적전개형(同意的展開型), 반의적(反意的) 전개형, 종합적 또는 통합적 전개형으로 분류된다. 이 밖에도 열거적 전개형, 교환적 전개형 등 효과적인 결구를 위해 다양한 구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올 때까지 와서 영영 돌이킬 수 없을지언정
꿈틀거리는,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은
묵묵히 수면 아래 있거라 물낯바닥 아래 있거라.
그러나 치솟아오르는, 분수마냥 치솟아오르는
그 무엇들이 거기 있어 바다는 퍼덕인다
불현듯 거대하게 살아 거대하게 퍼덕인다.
이정환 『浮沈에 대하여』
동의적 전개형의 예이다. 의미(내용)의 전개가 초장→중장→종장으로 접속 종결되는 순행적 논리 전개를 보이고 있다. 시조의 전형적인 구성법이다.
이승에 소풍을 왔다
귀천(歸天)했다는 천상병의
티없는 영혼은 본다.
칼날보다 더 섬뜩한
한 사발 역설의 맹물로
이 지상을 다 울궈 간.
대도(大盜), 천상병이 구천에서 껄껄 댄다
뽀얀 양털같은 저 인간의 손 좀 보라며,
그까짓 검은 돈 몇 푼쯤
실명제에 걸려 떠는.
조주환『대도(大盜) 천상병』
반의적 전개형의 예의다. 의미의 전개가 초장←중장←종장으로 핵심구가 초장에 놓여 있다. 역접 전개를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구성법이다.
가야 할 곳 아득하고
창백한 어둠 내린다
지나온 길 돌아보니
청솔 위 흰눈 녹다
헤어진
너의 모습도
흰눈처럼 녹고 있다.
바람 소리 두 귀 막아도
마음은 혼자서 쓸쓸하다
길은 외길인데
두 마음이 길을 걷는다
솔가지
그 난간에서
녹던 눈이
떨어진다.
김영재 『눈 그치고, 너의 모습』
종합적 전개형의 한 예이다. 초장과 중장이 분열된 두 개의 대상을 정반합의 대립과 지양을 통해 종합하는 전개 과정을 보이고 있다.
우리들 넝마 같은 삶을 좀 돌아보라고
돌아보다간 더러 풀빛 웃음도 웃어 보라고
다 해진 검정 고무신
벼랑 위에 벗어 두었네.
누덕누덕 기운 장삼은 虛空藏에 펼쳐 두고
누구든 와서 입어 보라 그리곤 춤도 추어 보라고
침묵의 묽은 그 이름
빈 산 가득 울리네.
백이운 『빈 산』
통합적 전개형의 예이다. 병렬된 초장과 중장의 내용이 종장에서 통합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바람 잔 푸름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라 불러다오.
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라 불러다오.
천 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이라 불러다오.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열거적 전개의 예이다. 각 장이 각각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김제현 『풍경風磬』
교환구조의 한 예이다. 핵심적인 의미(주제)가 중장에 놓인, 중장과 종장의 구조가 교환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으나 연시조일 경우 전편의 각 수가 단일한 구성을 취하기도 하고 각 수마다 각각 다른 전개형을 취하기도 한다.
이 고독한 운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襤褸한 탈을 벗고
쓰러지고 싶다
品階 밖 저만치 서서
물구나무라도 서고 싶다.
죽어도 눈감지 못할
그리움 하나 때문에
한 벌뿐인 목숨을
감아온 마디 마디
이제는 문밖에 서서
가슴으로만 돌고 싶다.
풀리는 태엽으로
하루를 보내며
헛짚어온 세월을
털어내면서
참된 내 자리에 와서
맷돌이 되고 싶다.
전원범『팽이』
복합적인 구성의 예이다. 1수는 열거적 전개형이고, 2,3수는 순행적 전개의 접속종결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여러 전개형이 한 작품 안에 두루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시조의 작시 원리
시조가 옛시조에서 탈피하여 현대시조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혁신 시조의 대두였다.
가람에 의해 주도되었던 시조의 혁신 운동과 이론적 천착에 의해 현대시조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고 그 혁신 시조의 작시 원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가람은 시조의 혁신 요건으로서 ①실감․실정을 표현하자 ②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③ 용어의 수삼(數三) ④격조의 변화 ⑤연작을 쓰자 ⑥쓰는 법, 읽는 법 등을 제시하였다.
이병기 『시조는 혁신하자』, 동아일보, 1932. 1. 27.
1) 실감(實感)․ 실정(實情)을 표현하자
실감․실정의 표현이란 그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자기 주관으로서 하는 서정 그것과, 객관으로서 하는 서정 그것을 절실한 감정이나 또는 색채가 가득한 감각적 광경으로 표현함"을 말한다.
시인이 대상(사물)을 통해 받은 느낌이나 감동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정서를 표출하는 경우와 그 정서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정서의 표현이야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간에 시의 정서는 절실한 감정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어야 하며 그 실상이 잘 드러나는 생생한 광경(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절실한 체험과 진실한 표현이 요구되는 것이며, 개성적인 눈(시각)과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게 된다.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새로운 시각과 예민한 감각만이 신선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고 창조의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즈막 누우시든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참아 못하시고
매었든 옷고름 풀고 가슴내어 뵈더이다.
『젖』 1 수
<젖>은 어리던 8,9 남매가 물고 자란 생명줄이다. 이와 같은 생명의 혈연 의식은 인간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시인은 여기서 어떤 윤리의식 같은 것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실감과 실정으로 느끼게 하고 그 느낌을 일상의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실체적 사실로 전하며 의고체의 어조로 그 깊은 심회와 경건한 심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암』은 섬세한 묘사로써 사물을 감각화시켜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발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치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어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을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를
이제도 의상(義湘)을 더불어 신라시절 말한다
볕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돌아 들온다
『대성암』
호젓한 산길이다. "발간 딸기"와 "패랭이 꽃"의 빛깔이 시각적 대조를 이루면서 산길의 서경을 돕는다.
첫째 수는 아차산의 이러한 정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발 끝에 부딪치는 묵은 기와쪽'과 '검은 버섯 돋아난 성을 고인 돌'을 통해 한 왕조의 멸망을 전해주고 있다. '묵은 기와쪽'과 '성을 고인 돌'은 곧 허무감을 나타내는 제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은폐되고 다람쥐나 넘나들고 있는 현상의 묘사로서 한 왕조의 멸망의 의미를 덧없음의 의미로 전해주고 있다.
셋째와 넷째 수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왕조를 대칭적 구조로 하며 백제의 패망과 멸망의 의미를 '물어도 알 이 없는 그리운 그 옛날 자취'로 치부하고 검은 바위--(파란 물)--하얀 모래로써 소멸의 의미를, 그리고 '바위굴에 솟아나는 샘물'의 은유로서 의상(신라)을 떠올려 역사의 의미를 새겨보게 한다.
그러나 '볕이 쨍쨍하던 날도 구름이 서들대고 마침내 비가 몰아오고 있는' 마지막 종장에 이르면 비애의 정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볕․구름․비 등의 자연 소재들을 감각적으로 연결시킨 의미 구조에서 대성암의 역사적 사실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영탄하지 않는다. 비탄이나 비애의 정서도 내비치지 않고, 다만 현상적인 실상을 경중의 시(景中詩)로써 그려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정서의 표출을 억제하고 의미를 은폐하고 있는 데에 가람시조의 특징이 있으며, 작가(시인)만의 생각이나 기법으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물․사실․실경․실정․실감의 바탕 위에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감각화시켜 주는 데에 혁신시조의 특성이 있다.
2)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사생(뎃생)은 자연을 비롯한 인사(人事) 및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만큼 시조의 취재 범위는 처음부터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고시조의 상상적인 취재 방법과 패러디화를 지양하고, 신시조 즉 육당류의 조선주의나 민족주의적인, 즉 관념적인 소재의 결합으로부터 탈피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람시조 역시 자연 속에서 많은 소재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산과 계곡 등 큰 소재뿐만 아니라 일초일화(一草一花)나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 풀벌레 등 작은 것에서부터 사회현상과 인사에 이르기까지 그 취재 범위가 널리 확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몸이 한가로우매 도로히 병은 잦다
보던 글 던져 두고 상머리 홀로 누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잔시름만 하도다
몸에 아픈 곳을 스스로 헬 수 없고
깃보다 가벼운 맘 허공으로 떠오르니
흐릿한 별과 구름은 머리맡에 어르이다
『고곰』
앞서의 『젖』이 인체의 한 부분인 젖을 소재로 하여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모성애를 형상화하였다면, 『고곰』은 학질이라고 하는 병질을 소재로 하여 그 체험의 사실들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가 된다.
시조에서뿐만 아니라 당대의 자유시에서도 이러한 인체의 관능적 부위인 젖이나 질병, 해충과 같은 소재의 선택은 드문 예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가람시조의 소재들은 실제로 보고 겪은 생활 속의 소재들이다. 이렇듯 생활 주변의 소재들이 시인의 체험적 요소로서 시적 자료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용어의 수삼(用語의 數三)
우리 시사에서 시가 언어의 예술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순수시파와 주지주의 시인들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시사에 있어서 주지주의적 시가 얼마만큼 성공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표현 방법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종래의 시들이 음악적인 언어 구사를 통해 청각적인 이미지를 전달해 준 데 비해 주지파 시인들은 감각적인 언어 구사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새로운 표현법을 시도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지용과 가람의 작품들에도 이러한 자각과 시도가 엿보이고 있으며, 가람의 시조에 나타나는 감각적인 언어와 사실적인 묘사의 표현 기법은 주목을 끄는 것이다.
가람은 어느 시인보다도 언어의 조탁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종래의 가락과 용어의 습용(襲用)은 시정신을 질식시킬 따름이다. 그리고 사설시조에서처럼 쌍소리가 시조에 침입할 때, 시조는 그 자체로서 소멸할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언어를 정제하고 일상의 모든 말을 다 선택하여 시어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래의 시조들에서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용어과 한자어로서는 좋은 표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골이 아늑하매 해도 별양 다스하다
새로 드는 단풍 잎마다 발갛고
바위도 희기도 희고 물은 몹시 푸르다
성긴 덤불 속에 머루 다래 드리우고
시드는 산초(山草)는 뿌리에 살 오르고
미미히 이는 골바람 되우 상긋하도다
새긴 바둑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청학은 어데 가고 신선이 따로 없다
바위에 고요히 앉아 물소리를 들어라
『만폭동』
{만폭동}은 옛날에 학과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을 제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맑고 그윽하게 만폭동의 경치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고요롭고 밝은 서경은 상투어나 한자어로는 신선하게 표현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위 시조에서 상투적인 어법이나 명사 이외의 한자(어)를 찾아볼 수 없는 대신 "골이 아늑하매 해도 별양 다스하다", "바위도 희기도 희고 물은 몹시 푸르다" 등의 구어체와 함께 산초, 덤불 등 순수한 우리말과 토착적인 언어들이 섬세한 조탁을 거쳐 색채가 가득한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람 시조들이 이렇듯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전달되는 것은 순전히 그 언어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가락, 용어(用語)의 습용(襲用)은 시정신을 질식시키며 공허한 느낌을 줄 따름이라는 것을 그는 실제의 창작을 통해 증명한 셈이었다. 신선하고 새로운 용어를 선택․개발하고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기 위해 가람은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나섰고 외래어나 새로운 조어로써 시어의 범위를 확충해 나갔던 것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말을 찾아서 우리의 새로운 감각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위해서는 그만큼 자유로운 시정신과 시어의 개척이 필요했을 것이다.
4) 격조의 변화
모든 시(시조)는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고 그 풍격을 격조라고 한다.
시조의 격조에는 부르는 격조와 읽는 격조가 있다. 지금도 시조라고 하면 으레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곡조에 따라 전해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부르는 곡조라고 하여 꼭 배격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현대시조가 전통적인 곡조를 그대로 밟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
시조가 음악으로부터 탈피하여 '읽는 시조', '생각하는 시조'로 바뀌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학사적 요구였다면 읽는 시조에 따른 격조의 변화 또한 현대시조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가람은 신율격(新律格)과 오도(悟道)로서의 예도를 시조의 새로운 격조로 정립시켜나 갔다. 이러한 격조의 변화는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혁신 시조의 핵이자 가람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된다.
격조의 변화란 옛시조가 근거하고 있던 곡조의 자리에 다른 대치물을 놓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치물을 찾는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의 발견 없이는 현대시조가 창작될 수 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시인이 바로 가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람이 파악한 대치물의 하나가 곧 신격조였다.
격조는 과연 음악과도 다르다. 음악은 소리 그것에만 의미가 있을 뿐이지마는, 격조는 그 말과 소리가 합치한 곳에 있다. 그러므로 말을 떠나서는 격조도 없다. 그런데 시조의 격조는 그 작가가 자기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의미와 조화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딴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공교롭다 하여도 죽은 기교일 뿐이다.
『가람문선』에서
오늘날 시조에서는 이미 곡조를 찾아볼 수 없다. 육당과 노산의 시조에 있어서는 조국(국토)으로 대치되었고, 또 순연한 문학 안에서의 예도(예술성)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곡조를 따르고 곡조를 위한 시조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조 500년 전으로 돌아가는 퇴영의 길을 밟는 노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람이 성찰하고 발견한 대치물이 예도로서의 격조였고, 가람시조의 비밀이며 그의 천재성을 말해 주는 예도란 곧 오도(悟道)였다.
김윤식,『한국문학사 논고』에서
오도란 마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편안한 심경에 이름을 말하며,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본질을 깨달아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가람은 자연의 본질과 삶의 이치를 난초와 매화, 수선 등 산수(山水)를 통해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오도를 시조의 새로운 격조로 앉힌 것이다.
난을 난을 나는 캐어다 심어도 두고
좀 먹은 고서를 한 옆에 쌓아도 두고
만발한 야매(野梅)와 함께 팔 구년을 맞았다
다만 빵으로서 사는 이도 있고
영예 또는 신앙으로 사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을 이러하게 살고 있다.
『난과 매』
『난과 매』는 시인의 삶과 정신적 지향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만약, "가람이 기독교 신자였다면 예도의 자리에 신을 놓으려 했을지 모르며, 불교 신자였다면 그 자리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혹은 무명(無明)을 놓으려 했을지도 모른다."(김윤식,『한국문학사 논고』에서) 그리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였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이나 이(理)를 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은 들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 야인(野人)이었고, 들사람의 생활이란 흙 속에서 풀과 함께 사는 삶이다. 이러한 들사람의 생리와 선비의 정신을 함께 구현하고 있는 『난과 매』는 빵(재물)이나 명예 또는 신앙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만족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난과 좀먹은 고서, 그리고 매화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에서 자연『난과 매』의 생리와 동화된 시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적어도 재물이나 명예 또는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구분되는 가람의 정신적 지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곧 난초의 생리로 표상되고 있는 시인의 기품이며 그 기품을 시인은 난초와 매에서 발견한 것이다.
오늘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蘭草 다시 한 대 피어나며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冊을 앞에 놓아두고
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난초․3』
금시 바위라도 굴러내릴 듯한 강파로운 사태바기
노루와 맷도야지 새로 자옥이 나고
꽃나무 드러난 뿌리 발에 자주 걸린다
멀리 가린 구름 다다라 보니 짙은 안개
풀이슬 옷에 젖어 다리 더욱 무거워지고
봉머리 반반한 바위 더 오를 곳 없어라
엷어지는 안개 해는 살처럼 희고
조각 조각이 파란 하늘 트이고
다투어 머리를 들고 봉이 솟아 나온다
어둡던 굴과 골이 유리보다 투명하고
바위에 돋은 버섯 꽃처럼 혼란하고
한머리 잦은 안개는 다시 일다 스러진다
들마다 에운 바다 바다에도 뫼이로고
예는 어데이고 제는 또한 무엇이뇨
손들어 가리키는 곳에 다시 명산 보이도다
『월출산』
월출산은 전라남도 영암에 있는 산이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과 석봉들이 무리지어 솟아오른 고산의 험하고도 웅대한 산세는 남성에 비유될 만하다. 안개 속에 솟아오른 월출산은 고산으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모든 생명(체)들을 품안에 안고 우뚝 서 있다. 명산은 명산만이 안다는 내용이다.
이 시조는 첫 수 초장부터 일정한 음수율이나 음보율을 밟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음보의 불규칙함은 자유로운 율격적 변화의 속성을 보이기도 한다.
만약 이 시조가 정연한 4마디(음보)의 율격을 밟고, 3․4조의 음수율을 따랐다면 월출산은 그 참모습을 읽고 여성(새악시)다운 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난초』의 기품과『월출산』 등의 신율격을 현대시조의 새로운 격조로 앉힌 것이다.
5) 연작(連作)을 쓰자.
앞의 작품들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가람의 시조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연작(연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검고 영이 지고 늙고도 병든 몸이
청처럼 처진 어깨 팔은 무릎을 지나가고
쨍쨍한 볕을 이고 서서 숨은 거의 잦는다.
『수송』
옛시조는 거의 단수로 이루어져 있고, 단수로서 완성미를 추구해 온 단형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형시는 고도의 응축미와 생략의 기교를 그 생명으로 삼는다. 가람 역시 한 수가 한 편이 되게 하여 완전히 독립된 시상을 표현하는 단수형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대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생활 체험이 복잡해진 것이 사실이며, 시대 정신의 변화와 복잡한 생활 체험은 아무리 선을 굵게 하더라도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얻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 표현방법을 전개시킬 필요가 있었고, 윤선도의 『우후요』나『어부사시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시조형식 그 자체가 얼마라도 좋은 시상을 전개시킬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시형이기 때문에 연작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가람은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글에서 "한 제목을 가지고 한 수 이상으로 몇 수까지든 시를 지어 한 편으로 하는데 한 제목에 대하여 그 시간이나 위치는 같든 다르든 다만 감정의 통일만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주제로 하든지 중심으로 하든지 하여 그 시간이나 위치도 그 감정을 통일함에 어긋나지 아니할 만한 정도 안에서 변동이 있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연작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말하였다.
그리고 가람시조의 형태는 시상의 완전한 표현을 위한 연작성과 시조 본래의 미학인 간결성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이루어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연작(연형)시조가 빠지기 쉬운 산문화를 막아주는 것은 그 내적 구성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간결성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조의 내용을 단수로서 완결하는 단형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구체적인 표현을 위한 연작성을 지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판단할 문제이며, 그 주제와 정보(情報)의 양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6) 쓰는 법, 읽는 법
시조를 노래할 때 악조에 붙여 노래하는 경우와 곡조가 없는 상태에서 음송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고시조에 해당되며, 후자의 경우는 현대시조에 해당된다. 그리고 현대시조가 '읽는 시조'로 발전하면서 그 쓰는 법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터이다.
현대시조에 이르는 동안 그 기사형식(記寫形式)은 장(章)․구(句)․음보(音步,마디) 등 각각의 율격 단위에 따라 분행하거나 또는 시상의 마디에 따라 분행하는 등 다양한 기사형식을 보이고 있다.
그 중 3장을 분절하여 쓰는 기사형식이 가장 일반화된 기사법(記事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의 3장 분절(분행)의 기사형식이 음악(시조창)의 소리마디이거나 관습적이었는 데 비해 가람시조의 경우 의미나 심상의 마디를 분행의 단위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쓰는 법, 읽는 법'을 가람은 왜 시조 혁신의 한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시는 일찍이 낭송(노래)하는 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낭송하거나 음송함으로써 시를 향유하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 민족이든지 그들 고유의 낭독법, 즉 율독관습(律讀慣習)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문장은 그들의 고유한 율독 관습에 따라 읽게 마련이며, 청자(聽者)들은 율독 관습에 따른 율독 기대가 충족되었을 때 쾌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시조가 시조의 창조(唱調)를 떠난 이후에는 우리의 고유한 율독 관습에 의해 음송되고 읽혀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 방법은 관습적인 것으로서 무개성적인 것이며,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표현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생각을 요구하는 현대시조의 경우 그 표현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분절(분행)의식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분행의 기사형식을 택하여 독자(청자)로 하여금 시인의 표현 의도에 충실히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시조(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의미․심상 등이 온전하고도 개성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혁신 시조는 체험적 요소를 바탕으로 한 작시태도에 따라 시적 진실성과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감각적인 언어구사를 통한 묘사의 수법은 사물의 실상과 경중시(景中詩)의 서경적 의미를 감각화시켜 주고 있다. 더구나 자연과 인생에 대한 오도와 난초의 기품으로써 이루어 낸 새로운 격조의 변화는 가람시조의 독자적인 미학을 이루고 있음과 동시에 현대시조의 새로운 풍격의 창조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그 위대성이 평가되고 있는 터이다.
이와 아울러 시상의 구체적이고도 완전한 표현을 위한 연작의 형태 구성과 시인의 표현 의도를 개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쓰는 법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 걸쳐 보인 가람의 진지한 작태도와 성실성으로 하여 혁신시조의 미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미학의 독자성은 시조의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6. 현대시조 작법
현대시조는 우리의 전통시이자 한국시이다.
현대시조를 말할 때, 우리는 시조라는 장르의 전통이 우리 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의문에 접하게 된다.
흔히 전통이란 독창성이 없는 것, 이미 지나버린 것, 보수적이거나 과거 지향적인 것쯤으로 생각하기 일쑤이지만, 실은 오늘에 되살려야 할 가치 있는 것, 새로운 창조의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은 그저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갖기 원하거든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한 T.S 엘리엇의 말과 같이 전통을 살아가는 힘으로서, 창조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답습과 고수가 아닌 새로운 추구의 연구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조지훈의『승무』와 같은 자유시들에서 시조의 음률이 더욱 인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시조의 전통이 현대시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무의식중에 확산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문학의 전통은 과거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뜻하지 않은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또 온전히 계승되기도 하지만 T.S 엘리엇의 전통 의식이 <荒蕪地>와 같은 기발한 작품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견치 못했던 일이다.
현대시조가 우리의 전통시로서 그 몫을 다하고, '오늘의 시'로서 작품성을 제고해 나가기 위해서는 작시 태도와 방법상에 변화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본다.
첫째, 주제 의식의 확대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영탄적 정서를 지양하고 실존의 의미와 현실적인 삶의 정서를 노래해야 한다. 현실 의식(역사의식)과 현대적 감각이 없는 시조란 현대시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소재의 확충이다. 산수경물만이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물․현상들이 모두 시조의 재료가 되는 것이며 체험적 사실(요소)이 시조의 소재로 선택됨으로써 사실성(현장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시조 형식에 대한 철저한 이해이다. 3․4나 4․4조로 글자수를 맞춤으로써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시조란 4음보의 음보율에 따라 의미(시상)가 전개되는 율격이 시이기 때문이다. 시조가 율격(4음보율)시임을 이해함으로써 넓고 다양한 의미를 자유롭게 표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넷째, 상상력의 확대이다. 시조는 전통적으로 감성적 상상력에 의존해 왔다. 그로 인해 사상성의 단순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터이다. 이를 극복하고 사물 또는 생명의 본질적 의미를 형상화해 가기 위해서는 논리적 상상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항들이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조를 쓰고자 하는 독자들께서는 이를 숙지하여 좋은 시조, 명실상부한 현대시조를 써 가야할 것이다.
1) 주제와 소재의 확대
한 편의 시조는 대체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어떤 충동이나 계기만으로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시조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조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 체험적 사실이나 생각 또는 감정을 바탕으로 주제를 한정하고 고정시켜야 비로소 바라는 시조를 쓸 수 있게 된다.
주제를 설정하는 기준이나 요령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첫째, 독창적인 주제여야 한다. 독창적이란 곧 새로움을 뜻하며 새롭지 못한 주제는 신선한 감동(새로운 서정)과 깨달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구체적인 주제여야 한다. 강렬한 주제 의식에 따라 주제의 범위를 구체화하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집약화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줄 수 있으며 선명한 의미(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재가 풍부한 주제여야 한다. 아무리 놀랍고 훌륭한 주제라도 그것을 형상화 (구현)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재료가 없을 때 그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주제가 되는 시적 상념은 모든 사물에 대한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서 비롯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시적 정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실재나 실존을 직접 접촉하면서 느끼는 고조된 감정이어야 한다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바와 일맥 상통한다. 깨끗한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아야 시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시조를 만드는 소재 즉 제재란 작자(시인)에게 감동을 준 사물들이 된다. 시상이나 시정이나 시흥도 사실 시인이 현실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겪은 여러 가지 사물들이나 현상들 가운데서 얻어진 것이다. 그 어떤 충격적인 감동이나 영향으로 인하여 시작의 동기가 마련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란 그대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만 새롭고 무한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러므로 시조를 쓰고자 하는 이들은 통념적인 생각과 평면적인 지각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눈으로 모든 대상(자연, 인간, 현실)을 관찰하고 투시하는 감성 훈련을 꾸준히 쌓아 나가야 하며, 서정성을 위주로 하는 주체의식을 사회적․역사적․사상적 방면으로도 확대해 나가야 한다.
1
한 시대 협기 서린 수평선을 가늠하며
오랜 해를 담금질로 벼린 끝에 혼이 섰다
서정을 엮은 달빛도 이 날 아랜 갈라진다.
2
머리맡에 걸어두면 가을물 소리 높다
굽은 목을 치려는 살의에 찬 저 눈빛
깊은 밤 칼을 뽑으면 한 秘史가 잠을 깬다.
3
어둠을 겨냥하여 서릿발 恨이 울고
당대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혼불이여
그날에 쓰러진 함성이 섬광으로 일어선다.
정해송, {검(劍)}
2) 체험과 상상력의 확대
한편의 시조는 체험과 상상력과 율격으로써 이루어진다.
시조의 율격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음으로 여기서는 체험과 상상력에 관해서 살펴보겠다. 우리들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물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살아간다. 시적 감동이라든가 감흥들도 모두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겪은 일들로부터 받은 감정 상태이다. 그러나 어떤 감동이나 감흥만으로 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현실적 경험이 시적 경험으로 재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적 체험이란 곧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체험을 정리하고,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체험을 말하며 이러한 체험 요소들이 시조의 제재가 된다.
워드프로세서 커서가 하릴없이 숨차다
튕겨지듯 집을 나선 나의 하루는
한 뼘 반 괄호 속에서 쓰고 다투고 돈을 센다.
강은 오늘도 녹조와 적조를 되풀이하고
그리운 사람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다
오오랜 병 끝에 바라보는 한 폭 담채화처럼.
하루가 쓰레기통 속에 가득 쌓이는 저녁답
조금씩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답다
서랍 속 꿈마저 짐되는 괄호 속의 하루
권갑하, {괄호 속의 하루}
위 작품은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투영된 예이다.
현실 경험의 시적 재구성 과정 등에 관해서 구상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창작 입문>)
첫째, 대상에 대한 집중적인 관찰, 그 까닭이 무엇인지, 자기의 심리 상태는 어떤지, 또 사물과 관계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그 사물로 말미암아 생각나는 것들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살피고 따지고 정리(취사선택)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구성의 과정은 자유시나 시조가 다를 바 없고 이러한 과정을 밟고서야 현실적 체험이 시적 체험으로 재구성되고 시조의 제재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조가 체험이나 선험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주제 의식이 작용하고 상상력이 참가하여 경험을 심화․확대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은 대개 유사 연상(밀↔술), 접근 연상(강물→바다), 반대 연상(앞집 처녀↔뒷집 총각)
등의 연상(유추)작용에 따라 발전하며,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현실적 대상(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것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의미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한 편의 시조(내용)는 체험 요소와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서정 세계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떤 시조가 현실적 경험 요소에만 의존하고 있을 경우, 현장성(리얼리티)은 얻을 수 있지만 문학성을 잃게 될 것이고, 상상력에만 의존하고 있을 경우 문학성은 갖출 수 있지만 사실성을 잃어 공허한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3) 관찰과 표현
시조(시)를 처음 쓰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시조(시)가 잘 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은 간단하다.
첫째는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대상)에 관한 관찰이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경우이고, 둘째는 대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에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이루어지고 또 그에 적합한 말을 찾아 쓸 수만 있다면 시조(문학)쓰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업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데 시조 쓰기의 어려움과 신비로움이 있으며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시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들에서 선택해서 갈고 닦아 쓰는 말이 시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말과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상어란 사전적인 뜻의 단일한 의미를 지닌 말을 지칭한다. 우리의 감정 및 정보를 지시적이며 실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단순한 의미의 낱말을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인 어법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상어이다. 이에 반해 시어란 비실용적이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로, 하나의 낱말이 하나의 문맥 속에서 다른 낱말들과 어떻게 관련되고 연결되는가에 따라 그 지시 대상과 의미의 진폭이 서로 다른 정서를 낳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어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내고 질서화시켜 나가는 생명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쓸 때 사물에 대한 관찰과 통찰 및 언어의 기능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채 일상적이며 습관적 어법에 따라 문장을 이루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표현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여인들이
푹 푹 속을 썩히고 있다
못 생겨서 못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롯한 그 장맛 하나
우려내고자 함이다
시렁에 매달리어
바람쐬는 메주들
트는 살 살 속 깊이
파고드는 푸른 날 빛
얼나를 더 삭히어야
다 떴다 이를 건가
김제현 {메주}
시조는 본질적으로 서정시이다. 서정시란 개인의 정서와 상상이 인상적인 리듬과 더불어 표현되는 짧은 시이다. 그 중에서도 시조는 순간적이며 절박하고도 긴장된 감정을 압축된 형태로 표출해 내는 정형시이다. 순간적으로 긴장된 감정 상태를 압축된 형태 속에서 질서화(정형화)해 나가는 구체적인 도구가 시어인 것이다.
새롭게 발견된 사물의 의미를 예술적(서정적)세계로 형상화시켜 나가는 데는 다양한 표현법이 따르기 마련이다. 여기서 비유나 생략 등 각종의 수사법이 동원되게 되고, 시조는 그 형식상의 특성에 따라 격조와 리듬을 살린 언어의 음률적인 구사와 함축된 의미의 간결한 표현이 요구된다.
시조를 일컬어 절제의 미학이라고 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도의 생략적인 기법을 통해 절제된 표현을 얻어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조는 현대적 감성이 자아올리는 새로운 서정 세계를 요구하고 있다. 시상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시어의 새로움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문장의 비틀기나 시어의 낯설게 하기 또한 이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시조를 쓰는 사람들은 먼저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으로써 정확히 전달(표현)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며, 표현의 요체인 사생력(뎃생)을 길러나가야 할 것이다.
7. 사설(辭說)시조 쓰기
사설시조란 '이야기 시(詩)'이다. 평시조가 대체로 인생을 표현한다면 사설시조는 현실적인 삶 속에서 제재를 선택하여 '사람 사는 이야기'를 엮어 가는 시이다.
"사설시조는 자유시다"(박철희)라고 할 만큼 그 형태가 자유롭고 융통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형으로서 현대시조에 이르러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다.
그 형태는 3장을 겉틀로 하고 종장 첫구를 소음보(3음절)로 고정시킨 정도가 형태의 요건이지만, 내적 구조는 3장(내용 단락) 6구절(의미덩이)의 구수율을 기본 구조로 하는 정형적(定型的) 형태와 1장 구절의 규칙과 음보에 제한이 없는 탈정형적(脫定型的․變形的)형태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진술방법으로서는 서민적 구술(口述)양식을 취하여 서술하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설시조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사설시조의 본질과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열거할 사설시조의 본질과 속성을 모른 채 외형적 모습만 비슷하게 갖췄다고 해서 사설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태와 구조의 면에서,
① 사설 시조는 의미 요소가 음률 형식을 지배하며, 1장 2구절의 의미 체계가 내부 구조를 이룬다.
② 구수율(규칙)의 의미체계와 종장 첫구 3음절의 구성요건을 갖춘 3장 형태의 정형적 형태와 구수율의 규칙성이 없는 탈정형적 변형의 형태를 공유한 독특한 형태이다.
③ 대화 형식의 서술과 엮음의 구성 방법 취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서사성(서사적)과 산문성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
내용과 시정신의 면에서,
① 서민 정신을 표현하는 문학이다.
② 사설시조의 서정성은 비극적 정조를 주조(主調)로 하고 있다.
③ 비판 정신을 안으로 갖추고 있고, 풍자적이며 저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④ 현실 체험의 사실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서정신의 개방성으로 하여 여러 장르의 제재를 수용하고 있다.
⑤ 대상은 인물을 중심으로 하며, 생활 주변의 사물들이 시적 대상이 되고 있다.
⑥ 의식의 측면에서는 허무주의적 사상과 현세주의적 지향성을 갖고 있으며 저항적 성격을 띠고 있다.
⑦ 기지(wit)와 해학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외설적․향락적이다.
이상과 같은 특성과 속성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설시조이며 현실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내용의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에, 휘파람새 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
나의 너, 네게로 아직도 후이후이 휘파람 불면서 간다. 어디 있느냐 너는 신나게 날리다가 무너져 버린 연, 끊어진 연이 되어 멀리멀리 사라진 너. 서너다섯 해 꼬박 찾아 헤매는 너의 나 나의 너 어디 있느냐며 내 예 이리 간다고 부는 바람. 후이후이 휘휘 부는 바람.
나무는, 휘파람새나무는 당장 알아 듣고서는 거 참 딱하다며 따라 후이후이 훠 하네
서벌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과 휘파람새 나무 설화(說話)』
설화를 재해석하여 시화한 사설시조이다.
중장과 종장이 길어진 예가 되지만 중장이 보다 확장되어 있다. 이와 같이 중장이 길어진 형태가 사설시조의 보편적(일반적)형태라고 할 수 있다.
초장은 시각적으로도 2개의 구절로 분절되고 중장은 많은 어휘가 동원되고 있지만, '너의 나 ~ 불면서 간다'와 '어디 있느냐 ~ 휘휘 부는 바람'으로 내용상 크게 분절할 수 있으며, 종장 또한 '나무는~ 알아듣고서는'과 '거 참 ~ 후이후이 훠 하네'로 분절된다. 각 장이 각각 2개의 구절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며, 전체적으로 3개의 의미단락으로 짜여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정형적인 형태 속에 휘파람 나무의 원형적 상징으로 내용을 이끌면서 중장에 이르러서는 잔 사설을 촘촘히 앉혔다. 즉 휘모리 장단의 율박으로 사설을 이끌면서 서정적으로 서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를, 사설시조의 호흡을 알고서야 끌어 낼 수 있는 대목이다.
浮石寺 저녁노을은 기다리는 빛이었네.
영원의 구비를 돌아 피어나는 그대 옷자락이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손을 흔드는 시늉으로 이승의 한 모퉁이를 조금씩 헐어가면 다시금 살아나는 서러운 너의 눈빛. 저물녘 산문에서 그리움을 옷고름에 감아들고 기다리던 너는 어느덧 망부석이 되어 거무스레이 핀 돌옷을 입고 있나니. 세월이 가뭇이 스러지면서 잿빛길은 어둠에 묻혀가기를 얼마나 되풀이 했으랴. 마침내 그대는 혼령이 되어 옷자락에 이끌리는 사랑을 후광으로 두르고 표표히 사라진 서녘하늘에 타던 것이 그 타던 것이깊은 밤 혼의 속살에 불도장을 찍는다.
정해송 『어떤 설화』
중장만이 길어진 예이다. 초장과 종장은 평시조의 율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중장의 구수는 3개 또는 5개로 어느 한 쪽도 기준으로 삼기 어려울 정도이다. 즉 내부 구조(의미구조)면에서 탈정형적 변형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전개에 따라 의미 요소가 음률(형식)요소를 이끈다든가, 각 장의 길이를 신축성 있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곧 사설시조 형태의 특성이다.
위와 같이 사설시조에는 정형적 형태와 탈정형적 형태가 공존하고 있으며 모두 사설시조를 포괄한다.
스무 해 공장 경력의 일등 기능공 白氏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 그 벼락 맞아 와르르 무너져 내린 白氏, 아아 백주대낮에 벼락
을 맞아 일급 장애가 된 白氏, 무너진 억장으로 바라보는 하늘과 같아 살길이 막막하다.
이제는 일등 기능공 아닌 일등 실업자 白氏.
3개월 직업훈련의 기초과정뿐이고, 기관의 구직 센터를 찾고 인력 센터를 찾았지만 일
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너스 전약 반납에 월급 감봉이 그리운 날, 늙은
노모의 병원비는 어떻게 하고 막내놈 학자금은 또 어떻게 할까
白氏의 숯이 된 가슴 일몰이 지고 있다.
白氏,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풀고 싶다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는데 별은 길게 저물고, 허약한 사랑만이 서로 끌어안는 밤 도시
의 적막을 끌고가는 白氏, 하늘아, 땅아 그 사이 인생의 눈물아 이 환란의 끝은 어디냐
백씨는 길을 떠난다, 그 흔적은 아름답다.
오종문 『실업자 백씨의 하루』
두 수 1편으로 이루어 진 연형(連型) 사설시조의 예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옛사설시조에서는 찾아지지 않는 형태로서 현대시조에 이르러 나타난 형태이다. 그만큼 정보의 양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사설시조의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 형식, 즉 진술 태도(방법)이다. 하나의 이야기란 시간의 진행에 따라 일어나는 행위(사건)들이 어떤 변화를 야기하고 그것이 인과 관계의 필연성에 따라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때 사건의 전달방법에 따라 소설이나 희곡이 되기도 하고 사설시조가 되기도 한다. 사설시조의 이야기에는 어떤 인과 관계의 필연성이 없는, 줄거리만 갖춘 듯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서사시가 아니라 서사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설시조의 이야기는 시인이나 시중 화자의 주관적인 1인칭 시점에서 진술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객관화하며, 양자 교체로 진술되는 2중의 시점이나 유형․무형의 대상과의 대화로써 진술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화진포의 바다는 칙칙한 흑백 필림을 빼내고 밝은 칼라의 필림을 막 갈아 끼우고 있는 아침이었다.
서울의 우중충한 구름을 피해 나는 도망 중이었으므로 오랜만에 부딪친 그의 예리한 옥빛 렌즈 앞에 몸둘 바를 몰랐다. 바다가 와락 산불이 휩쓸고 간 내 민등해진 패배의 산등성이를 향해 흰 파도의 조리개를 열고 조이며 카메라를 들이민다. 밑둥만 남은 희망 피사체를 찾아 앵글을 맞추며 다가오고 물러가며 종종대다 몸을 뒤집어 쉬지않고 셔터를 눌러댄다 먼 수평선, 시누대섬, 갈매기 떼들도 배경의 포즈를 취하며 서로 살아있음의 한 컷을 남기고 싶어했다 바다가 건네준 한 통의 칼라 필림, 아직도 내 삶의 현상액 속에 담그어져 천연색 봄날 아침으로 환하게 떠오르고 있다.
노명순 『사진 222, 피사체 속의 봄』
1인칭 시점에 사물을 묘사적으로 진술한 예이다. 1인칭 묘사적 진술로 이야기가 표현될 때는 한 경치를 떠올림과 동시에 서정성이 환기된다.
神의 장난감처럼 버려진 山邑 마을
길 잃은 새들 찾아와 밤 기도에 첫눈이 와도
어깨를 기대지 못해 서성이는 풀씨 몇 개
빈 驛舍 녹슨 확성기 하늘에 꽂혀 있고
坑口의 천 길 적막을 찢어내는 올빼미 울음
결 삭은 아픔을 통해 그대 呻吟 노래가 되리
민병도 『그대 呻吟 노래가 되리』
어둠 속에 버려진 폐광촌에서 흘러나오는 인고에 찬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외된 삶의 풍경을 원심의 위치에서 따뜻한 응시의 눈빛으로 노래하고 있다. 사설시조가 산문이 아니라 산문적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음률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율성(律性)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흰옷을 입었어요 당신을 뵈오려고 내 가슴 내 팔뚝을 희게 문신하고 이 흰 꽃 뿌리 드리우고 흰 못으로 박았어요
원두막에 올라볼까요 흰 배를 띄울까요 흰 두레박 흰 옷 너울 쓸까요 가득히 담아 부어서 날릴까요
그대야 눈이 입술이며 흰 피로 타는 불꽃이 하얗게 오르사이다.
흰 열풍 불꽃이 하이얗게 피어 누에고치 만드사이다
이영지 『흰옷--새벽기도』
이 시조의 발화자는 시인이고, 수화자는 당신 곧 신이다. 무형의 대상(신)과 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 형식의 예가 된다.
앞으루 늬 자식일랑은
제발
이런 세월 않으야 헐텐디 말여
파발마 명찰이 붙은 서울역서 새벽기찰 타고 광주로 나주로 강진, 해남으로 허위 허위 햇고구마 삶아들고 우리 내외가 여덟시간이나 내달려간 송지면 갈두리란 데는 진도랑 완도 사이에 개콧구멍처럼 바다섶으로 비죽이 내민 땅끝마을 土末이란 곳으로 윤고산 선생 유택 있다는 보길도, 노화도 건너는 나루가 누워있는 최남단 지점인데 그 발치 갈두 사자봉에는 시방도 제주서 불빛 건너오던 봉수대에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01초 극남지를 알려주는 토말탑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바 거기 오래 전 전곡 한탄강 재인폭포께에서 갈매기표 계급장을 네 작대기로 바꿔 달고 아픈 밤을 홀로 울었던 그 아비보담 아직은 작대기가 하나 모자란 시커먼 녀석이 M16을 곁들여 메고 돌벼랑을 지켜섰다가 뛰어와설랑 딴에는 불알 값 한답시고 <단결!>하고 외치며 쭉정이가 다된 피붙이를 인생고참으로 맞았다.
서울선 북한 장성이 와
산업시찰을 나다닌 무렵
김상묵 『평민사(平民史)』
사설시조의 전통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다. 곧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사설시조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론화된 사회(사람 사는)적 이야기이다. 서사적이며 산문성을 띠는 것도 대사회적 비평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작품은 객관적 시점에서 서민의 구술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비롯하여, 일상적인 범박한 언어라는 점, 4개의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는 점, 유머와 위트가 있다는 점, 현실적 상황에 대한 풍자성(비판정신)을 띠고 있다는 점, 소시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사설시조의 본질과 속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설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화 형식의 담화는 엮음 구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엮음 구성이란, 다성구조(多聲構造) 즉 여러 목소리의 엮음을 말한다. 시중의 화자가 1인칭 또는 3인칭 시점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화법이나 판소리와 같이 화자의 다양한 목소리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러한 화자의 진술 태도(작자, 시중 인물, 작자와 시중 인물의 교체, 다른 이야기의 삽입, 대화)뿐만 아니라 그 내용 역시 작자의 감정이나 생각이 아니라 타 장르의 내용, 다른 사람의 이야기, 고사, 속담 등을 삽입하거나 페러디화하여 주제를 성립시키는 구성법이다.
십 년의 긴 세월 너머
오윤을 만나러 갔다.
새치가 유난히 많은 헝클어진 머리, 깡마른 속살
드러낸 홑적삼, 특유의 맨발 자세로 학고재 입구에
앉아서 관람객을 맞고 있는 그는 정작 내 지친
육신을 측은해 하는 듯했다. 벽면을 채운 액자에는
생전에 그가 오래 머물렀던 수유리 산번지
동네사람들의 다정한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고, 아직
인화가 덜 된 듯한 빛바랜 사진 속의 낯익은
얼굴들도 더러 보였다
'연전에 김용태가 만든 유고화첩 <칼노래>는
제목부터가 좀 뻥튀기한 것이지.'
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나도 따라
떠나면서 힘주어 말했다.
'저 그림 속 세상사람들은 적어도 속물은 아니야.'
그날 밤
수유리 집으로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박시교 『쓸쓸한 초상』--오윤의 유작전 '동네사람 세상사람'을 보고
대화의 내용을 직접 삽입한 엮음 구성의 좋은 예가 된다. 시인과 시중 인물이 교체하면서 담화가 진행한다.
오윤의 '<동네사람 세상사람>을 보고'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미술관 관람기가 화소(話素)이다.'뻥튀기'된 세태와 오염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를 암시하면서 진행되는 화소가, 사라져가는 순박한 우리들의 옛모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설시조의 서사성과 담화 형식은 시적 표현미보다는 사물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엮음 구성 또한 주제 의식의 개방성과 다양한 내용의 완전한 전달이라는 표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련된 구성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근래(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연합시조(聯合時調)가 시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위 옴니버스 시조(윤금초 명명)가 그것이다.
여기서의 연합시조란 하나의 독자적인 형태가 아니라 시조의 여러 형식 즉 평시조․엇시조․사설시조의 형식들의 혼성적 구성으로 한 편의 시조를 이룬 형태를 말한다.
다음 예시는 그 좋은 예가 된다.
천의 다리, 천의 팔이 비비꼬인 이 매듭을
재갈 물린 한 역사의 넌덜머리 이 결박을
실꾸리 가닥을 풀 듯 아, 아픔의 끈을 풀라.
우망눈, 곰배팔이 방정맞은 굿패로다.
천더기 상민들의 울 일을 움켜쥐고, 주검보다 무서운 그 굴욕의 굴헝 아래 무담시 도륙당한 비렁뱅이 식칼들아. 누거만석 아전님네 술찌끼로 흘러나온 얼간이 씨나락도, 두엄 속에 짓눌린 저 봉두난발 어릿광대, 토색질 손갈퀴에 으스러진 벙거지도, 부역꾼 등줄 같은 거적들아 일어서라. 치고 패고 차고 밟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구부러뜨려 매로 다스려진 몸이로다.
앗아라, 춤이나 추자. 미친 밤의 굿거리로.
날라리 웅박캥캥 덧뵈가춤 신명난다.
말뚝이, 비비양반, 취발이, 귀팔이야.
차라리 참혹한 정상을 탈로 가린 풍물잽이.
전라도 막막골의 개발코 주걱턱 탈
마른 모가지 여위어 궁항벽지 따오기 그것처럼
돌아라. 살풀이 장단, 관솔불도 휘돌아라.
구들장 불씨같이 자지러진 타령마당.
줄부채 붉은 고깔 용트림 거드름의, 은하석경 머흔 길에 적토마 갈기를 잡고, 난양공주 영양공주 결 고운 그 미색을 열두 두름 꿰미 채로 왁자히 수작하는, 개가죽 용수관의 칡베 장삼 양반 보소.
마파람 높새바람에 어흐 몰라, 넉장거리.
윤금초 『탈놀이』
'탈놀이'를 빌려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민초 의식이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이 작품은 그 형태의 구성면에서 볼 때, 평시조로 열고 사설(시조)로 엮어 늘이고 평시조로 맺은 다음 숨을 돌려 다시 평시조로 열고 사설(시조)로 풀어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곧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형식을 혼성한 연합시조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시조의 형태는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으며, 조주환의 장편 서사시조 『사할린의 민들레』는 그 좋은 예가 된다.
8. 한국시의 모색과 시조
전통적 시정신에 입각한 현대시조는 그동안 민족시의 계승 및 발전과 자문학(自文學)의 보호의지 차원에서 주로 작시(作詩)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고정화된 시관(詩觀)과 보수성은 상상력의 빈곤과 표현상의 왜소함을 초래하였다.
시조(시)관은 동양적 성정론(性情論)에 입각해 왔으며, <훌륭한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발로>라는 워즈워드의 순수 서정시의 입장과도 같이 해 왔다. 그것은 시조가 본질적으로 서정시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뜨릴 때, 비로소 시는 탄생한다>고 한 티보테의 말을 또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대시조가 한국시의 위상에서 전통의 계승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지 않으면 결코 참다운 가치평가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만약 현대시조가 과거 조선조의 시조로 돌아가 그 도습에 그친다면 그것은 한갓 장인(匠人) 취미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시문학으로서의 현대시조가 있어야 할 당위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무릇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그 시대와 영합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문학 또한 시대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발전과 시대의 진전에 따라 그 현실적 상황은 서로 다른 특성을 띠게 되며 이에 따라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이 달라지게 된다. 아무리 시가 상상력을 통한 형상화의 작업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인생의 표현이며 시대(현실)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의 향가에는 신라인의 삶이, 고려가요에는 고려인의 삶이, 시조에는 조선인의 삶과 정신이 깃든 그들 특유의 문학 형식이었다. 오늘날 한국시도 현대인의 삶과 현실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시의 특성을 말하고 유형화하기는 쉽지 않다. 사조적인 면에서 현대시는 자유시가 되어야 하겠지만 한국의 시문학은 자유시와 시조가 나란히 발전하면서 다같이 문학사적 발전와 기여하고 있어 어느 한쪽을 한국시의 모형으로 제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는 양자가 다같이 현대 한국시의 전형으로 정립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시의 경우, 복잡한 요소와 다기한 양상이 비록 외형상 신기함을 띠고 있으나 실은 서구 문학사조의 직접․간접적 관련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렇게 전통성이 결여된 현상은 마치 서구문학의 경향과 방법론들이 대거 유입되어 다양한 기법들이 판을 치는 실험무대를 이룬 듯한 인상이다.
한편 현대시조는 전통시의 계승이라는 명분을 제외한다면 용어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현대성에 부응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간(這間)의 시조를 살펴볼 때, 대체적으로 개성적 즉 개인적 경험의 표현이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사체험(私體驗)을 개인적 체험의 특수성으로 오해하여 신변적 정회나 상념, 대자연(對自然)의 느낌을 노래하는 대동소이한 서정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것이며, 이는 곧 의식을 확대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으로써 상상력의 빈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사한 인식 방법에 의하여 선택된 소재가 관념적이고, 이것이 타율적 표현법에 의존함으로써 표현상에서도 폐쇄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시조가 그 시인의 인간적 체취를 풍기지 못하는 것은 존재(대상)의 인식이 공소하고 실체적 전달력이 부족하여 현실내지 현장감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박철희 교수는 단편적인 예로 <에리자베드>朝 시대의 소네트 시인과 조선조 귀족 작가의 시가 보편적 인식태도에 의하여 관념적․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고, 그들의 시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구름을 타고 피리를 불고 한가로움만 노래하는 문학은 문학일 수 없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현대시조에도 부분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인 사이페르의 민족시,
한 모금의 술향기 같은 너 <프라하>
그대 폐허속에 쓰러져 있고 실향의 운명에 놓여
나 이 땅에 피를 뿌려도 오 결코
나 버리지 않으리 모든 이 그대를 배반해도
나 이곳에서 죽은 이들과 기다리리
이른 봄부터 겨울 끝날 때까지
시간이 너를 깨울 때까지 침묵으로 문에 서서
<프라하를 위한 소네트 15>는 벌써 에리자베드朝 시대의 소네트가 아니듯이 현대 시조 또한 조선조의 시조가 아닌 만큼 발전하였다. 그러나 구각을 완전히 탈피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현대시조의 형식이 타설적․일률적 음률일 수만은 없다. 시조의 외형적 음률도 따지고 보면 민족의 오랜 심상에서 떠올린 내재율의 보편적 음율 형식이다. 현대시조는 이 내재율을 정제하여 새로운 율격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한국시의 한 형식(모형)을 이루어 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현대시조의 형태상 발전이란 새로운 음률의 창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현대시조가 미질(美質)의 언어에 매이고 관습적 음률 구성 등 고정관념에 빠져 감성적 언어의 탐구와 율격 구성에 소홀한다면 현대시조로서의 진정한 면모를 갖출 수 없을 것이다. 시조가 진정한 전통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작시 태도가 과거 지향이 아닌 창조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며 투철한 시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 요소를 두루 갖춘 현대시조가 이 땅의 전통시이면서도 한국시의 전형적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도 안이한 작시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진정한 한국시의 전통적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현대 시조는 <인위적인 비자연적인 형식을 배제하고 일상적 소재와 일상적 용어로 이루어진 구어체가 인생 체험의 실질적 표현으로 적합하다>는 워즈워드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시는 현대자유시와 현대시조의 조화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시조는 자유시의 새로운 방법론과 기법을 수용하여야 할 것이며, 자유시는 시조의 전통정신과 본질적 요소들을 수용하여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된다.
우리 문학의 세계 지향에 있어서도 외래 사조와 방법론의 도입 및 시도만이 세계적일 수는 없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전통문학은 그 민족의 생명력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속에서 영원한 발전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국시는 고전적(시조적) 질서 위에 외래의 방법을 수용하고 재구성하여 독자적인 세계와 형식미학을 창조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바로 여기에 현대시조의 존재 의의와 가치가 있다 하겠다.
출처: 달구비 원문보기 글쓴이: 도원 전성권